[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박정순 외
오동낭구’ 그루터기 / 박정순
꽃샘추위 핑계대며 늦추고 미루던 분갈이를 끝낸 주말 오후.
숫자 늘어난 화분들 받침대로 쓸 만한 게 있을까 하여 재활용품 수거장엘 가보니 폐기물 스티커를 붙인 장롱이 봄볕을 맞고 있다. 어긋난 문짝의 백동 장식이 덜그럭대고 모서리마다 긁혀서 더 초라해 보이는 퇴물, 멀쩡한 가구들도 신제품에 자리 뺏기고 마는 시대에 그동안 어디서 버티다가 밖으로 끌려 나왔을까.
뒤끝 질긴 지병에 시달리던 노인네가 생애를 마감하자 유족들이 내다 버렸을 것 같은 내 추측이 맞으려나. 딸을 낳아 젖 떼면 시집보낼 걱정 하던 시대의 어느 새댁 혼수품일지도 모를 일, 거친 세상을 함께 떠돌다가 주인을 잃었고, 결국 뒷방에서조차 밀려나고 말았으리.
퇴색한 외관이야 감출 수 없으되 아직 선명한 나뭇결마다 손때와 눈물이 배었고, 행복한 추억보다 한이 더 서려 있을 것 같은 애잔함에 수십 년 전의 기억이 재생된다.
본토박이 노인네들끼리도 지리산 자락이네, 덕유산 줄기가 맞네, 각각 우긴들 결말나지 않는 내 고향은 워낙 외진 골짝이라 마을 터도 좁았다. 사랑채에 글방을 차려놓고 훈장을 하셨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지만, 시골 노인네 같지 않던 할머니 모습은 잘 보관된 흑백사진처럼 생생하다.
여남은 살 안팎의 봄날, 난 마당 가에 우뚝 선 오동나무 아래서 놀고 있었다. 어른 키와 엇비슷하던 나무는 몇 년 사이에 초가지붕 용마루를 내려다볼 만큼 자랐다. 휙 지나간 바람이 비늘 털듯 쏟아놓은 꽃들을 양손 가득 주웠을 즈음, 빗자루 챙겨 든 할머니가 다가오신다.
“오동낭구가 꽃을 저래 피웠으니 올해 대풍년 들겠구나.”
“대추나무 감나무처럼 과일이 달리지도 않을 건데 꽃만 잔뜩 피움 뭐하게요?”
“돌아가신 느 할아버이가 먼 동네까지 다리품 팔아서 구해다 심었니라. 내가 정순이 시집갈 때꺼정 살긴 할까나.”
“흥! 난 결혼 안 할래요. 우리 식구들이랑 여기서 살면 되지.”
“괜한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여. 너두 이 나무맹키로 반듯하니 크거라이.”
겉으로야 심통 부릴망정 속마음 뿌듯해진 난 나무 밑동에다 삐뚤 글씨로 내 이름을 새겨놨다. 할아버지가 인근 수십 리 안팎을 수소문하여 구해다 심으셨다는 벽오동은 곁의 먹감나무와 서로 경쟁하듯, 의지하듯 잘 자란다. 자연 이치를 어기지 않고 바뀌는 계절 앞에 고왔던 꽃은 한때의 자랑거리로 져버리고 오목눈이 떼가 날아와 앉아도 쉽게 찾기 어려울 만큼 잎이 무성해진다. 나무 밑동이 굵어질수록 거기 새겼던 이름이 흉터 아물듯 지워져 가는 반면, 나의 심신은 날이 다르게 성숙해 간다.
집 떠나 낯선 땅에서 시작한 직장살이. 손꼽듯 기다리던 명절 연휴를 맞아 집엘 왔다. 오동나무 등걸을 짚은 채 손녀를 기다리시는 할머니 허리가 그 새 더욱 굽어 보인다.
“낭구는 조석이 다르게 늙어 가는데 너도 신랑감 앞세우고 대문 들어서야지? 사람이나 낭구나 다 때가 있는 법이여.”
집에 올 때마다 잔소리처럼 들어야 하던 할머니의 결혼 채근이 점점 줄어든다. 베개 챙겨 눕는 날이 늘어가고, 적삼 앞섶으로 늘어진 젖 고샅도 부끄러워하지 못하실 지경이 돼버린 채, 서너 살배기가 되고 마는 할머니.
지극정성으로도 생로병사 순리를 되돌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신 아버지가 이웃 사람 여럿을 불러 모았다. 뿌리 둘레 한 바퀴를 돌며 막걸리를 뿌려준 뒤, 집 방향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굵은 밧줄을 나무에 묶어서 반대쪽으로 당긴다. 힘껏 버티는가 싶더니 마지못한 듯 쓰러진 생나무를 여러 토막 내어 차곡차곡 갈무리해 두었다.
몇 달 지나서 할머니가 위독하니 급히 내려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가족 모두가 임종을 지켰고 할머닌 여든아홉 일생을 마치셨다.
근동에서 가장 솜씨 좋다는 목수를 모셔 왔다. 곧은 나무에 먹줄을 놓고 톱으로 켜서 대패질해 못 하나 없이 짠 오동나무 관에 할머니를 누인다. 막내까지 성혼시켜 부모 소임 다하고서야 할머니 산소 아래에 잠드신 아버지, 몇 해 사이에 할머니와 아버지와 오동나무가 함께 자릴 비우고 나자 마치 남의 집에 잘못 들어선 것처럼 담장 안팎이 휑하였다.
여울 물결 같은 세월이 수십 년 흐르고, 자식 누구도 지키려 하지 않아 흉가처럼 텅 빈 옛집 마당 끝의 벽오동은 그루터기마저 충치 오래 앓던 어금니처럼 삭아버렸다.
고향 집의 그 나무가 지금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부피 작은 물건이면 챙겨다가 소장품 삼고 싶은, 어디론가 실려 가서 곧 해체될 낡은 농짝을 바라보는 눈가와 코끝이 동시에 시려온다.
겨우내 고뿔 앓아온 오동나무가 힘줄 불끈 세우고, 가지마다 잎과 꽃을 피워내던 옛 봄날이 휘휘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는가.
삼베 보자기 / 윤미선
살랑거리는 봄빛이 따사롭다. 들에 가셨던 어머니께서 쑥 한 줌을 뜯어 오셨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도 불편한 몸으로 쑥버무리를 하고 싶다 하신다. 보드라운 쑥을 같이 다듬으며 제가 한번 만들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쑥을 씻고 채반을 준비하면서 보자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이리저리 뒤적이는데 어머니께서 삼베 보자기 하나를 꺼내 주신다. 채반 위에 펼치니 크기도 맞춤 맞았다. 쌀가루를 묻힌 쑥 반죽을 얹고 푹 김을 올렸다. 한낮의 햇살이 반짝거리는 툇마루에 어머니와 소반을 마주하고 앉았다. 김이 올라오는 쑥버무리 한 접시와 젓가락 두 짝이 다였지만 어떤 진미도 부러울 것 없었다.
떡 한 점을 드시는 어머니 얼굴에 다시 봄빛이 돌아온 듯 즐거워 보였다. 주름진 얼굴은 삼베 보자기처럼 성글게 지나간 시간을 가득 안으셨다. 어머니는 젊은 날 길쌈을 하시며 온통 배기는 내다 팔고 자투리를 모아서 옷도 만들고 밥상 보 등 생활에 요긴한 것을 일일이 손바느질로 장만하셨다.
어머니의 부엌 서랍에는 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베 보자기가 가득하였다. 넓은 보자기는 두부를 만들 때 사용하였고 작은 보자기는 오늘처럼 떡을 찌거나 고추 찜 등 찬을 만들 때 사용하셨다며 이것저것 빠짐없이 자랑하신다. 작은 구멍이라도 생기면 또 조각을 찾아서 기운 흔적이 어머니의 알뜰하심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길쌈은 날실과 씨실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베틀에서 한 필의 베가 완성될 때까지 거칠고 힘든 과정들이 일일이 어머니의 손끝에서 매만지고 다듬어 졌다. 삼을 베어 실을 장만하는 일은 여름이 깊어가는 하지와 소서 무렵에 시작되었다. 삼굳에서 쪄낸 줄기를 일일이 손으로 찢고 허벅지 위에서 피멍이 들도록 비비며 길게 이어 타래를 지었다. 바디를 끼운 날실 위에 맷 잿불을 쐬면서 콩 풀을 먹이는 베매기까지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바쁘고 고단했던 시절을 말씀하시며 가쁜 숨을 뱉으셨다.
어머니와 함께한 삼베 보자기는 당신의 삶을 그대로 보듬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젊은 시어머니까지 두 분의 시어머니와 어린 시누이가 있는 집에 시집오셨다. 철부지 시누이 둘을 당신의 사형제와 한마음으로 보듬어 키우셨다. 명절 제사를 빼고도 일 년에 여덟 번이나 되는 기제사를 모시고 접빈객을 대접하셨다. 대식구 건사와 농사일에 길쌈까지 밤낮없이 부지런하셨다. 부모님 봉양과 동기간의 우애도 보듬고 자식들 뒷바라지까지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으셨다. 그 시절을 돌아보는 어머니는 ‘힘든 줄도 모르고 살았다.’ 하셨다.
어머니에게도 금방 베틀에서 끊어져 나온 베 자락처럼 매끄럽게 반짝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일곱 남매의 막내딸로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귀여움만 듬뿍 받으며 자랐다. 시집오는 날부터 칠 남매 맏며느리의 책임감과 주부이고 어머니로서의 희생으로 억센 줄기를 가르며 얽힌 삼베처럼 거칠고 고된 날들이 어머니 삶을 촘촘하게 채웠다.
열여덟 살에 시집와 팔순이 넘는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한순간도 소홀함이 없으셨다. 삼베 보자기의 씨실과 날실처럼 셀 수 없는 날들이 어머니 삶을 촘촘하게 채우고 이제는 허리도 펴지 못하게 굽으셨다. 봄 햇살같이 고왔던 처녀가 거칠게 세월을 품고 뭉텅하게 옹이 진 세월의 질곡이 풀기 빠져 흐물거리며 낡아버린 삼베 보자기처럼 터덜터덜 닳았다.
어머니가 쓴 교과서처럼 베보자기 들을 펼쳐본다. 한올 한올 얽히어 묻어있는 시간의 이야기들이 소리 없이 흘러온다. 조각을 이어서 둥그런 아치를 그리며 기워주었고, 삼각형 꼭대기를 만들어 조각을 이으셨다. 밤낮없이 바쁘고 고된 시간 들 사이에서도 소박한 여심을 삼베 보자기 안에 담으셨다. 어머니의 지난 시간도 그랬으리라 모나고 깎이고 허물어지며 다시 보듬어 여민 보자기처럼 넓은 품 안에 어머니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며 보듬으셨으리라.
반듯하고 정갈한 보자기를 만지는 손끝에서 숙연함이 스며든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살뜰하셨을 어머님의 정갈함이 덜렁거리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마트를 이용하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리에 흔한 음식점을 이용하였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이가 아토피 피부로 한참을 고생하고 있다. 주부이고 엄마이기 전에 생활에 쫓기느라 식구들을 챙기고 아이들을 보듬는 시간이 소홀하였다. 아무리 비싼 물건도, 음식점도 어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져 나온 소중함과 건강함에 비견할 수는 없다.
작은 것 하나도 가족을 위한 사랑을 담고 너풀거리는 솔기 하나도 정갈히 다듬어 졌다. 그렇게 긴 세월을 보듬으며 함께한 보자기는 이제 내 차지가 되었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거친 시간도 이겨내고 힘겨움도 곱게 기우며 나만의 보자기를 만들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백년의 침묵 / 현금자
고향집 거실에 먼지만 쌓여가는 문갑은 한때 귀중품이었다. 할머니 혼수품이니 백 년 넘는 물건이다. 목공예의 화룡점정 장식은 광택 없는 은은함을 더한다. 불에 그슬린 듯 짙은 검회색 문갑은 말년의 고고한 할머니 모습을 닮았다. 문 여닫는 기능을 원활하게 해주는 경첩은 본체와 조화를 이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문갑은 종부인 어머니에게 대물림되었다.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닦았다. 윤기 없던 문갑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나이테가 선명했다. 경첩도 새로 끼운 것처럼 빛났다. 문갑은 할머니 이미지에서 어머니를 닮아가는 듯했다. 어머니는 대식구의 식사 준비하는 고된 생활을 문갑에 하소연했다.
아버지는 칠남매 장남, 어머니는 육남매 막내딸이다. 열네 식구 끼니를 준비해야 하는 종부의 삶은 늘 참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침묵으로 하소연을 들어주는 문갑은 철없는 자식보다 나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애환을 묵묵히 들어주던 문갑이 거실로 옮겨졌다. 어머니는 문갑이 있던 자리에 5단 서랍장과 이불장을 들여놓았다. 환대받던 문갑이 편리성에 밀려 홀대받는 길로 접어들었다. 안방은 신식 가구로 밝아졌다. 집안 환경을 변화시켜 본인의 삶을 바꾸고 싶었을까. 거실 구석에 자리 잡은 문갑은 초라했다. 새로운 가구에 밀려난 문갑은 다른 쓰임을 기다리며, 버려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하늘에서 툭 떨어진 존재는 없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계보가 있다. 사람들은 편리에 따라 물건을 쉽게 구입하고 내다버린다.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온고지신이 사라졌다. 유행에 따라 새롭고 화려한 것을 취하려는 생활방식으로 변했다. 우리 오남매도 문갑이 쓸모없으니 버리자고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문갑이 대대손손 조상의 애장품으로 남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문갑도 안방에 계속 자리하고 싶었겠지만 사람들의 가치판단에 따라 버려지느냐, 마느냐, 기로에 섰다. 안방에서 쫓겨난 문갑은 쓰레기장으로 버려질 위기에서 수석을 놓아두는 장식대로 전락했다. 세월과 함께 문갑의 모습은 잠식되어 간다. 어머니의 삶도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허리가 문갑처럼 휘어져갔다.
거실에 방치된 문갑은 종부의 삶과 닮았다. 후손의 무지몽매 때문에 문갑은 여전히 많은 짐을 지고 있다. 문갑의 가치를 언제 알아볼까.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는 자식들은 백년 간 쌓여 온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문갑은 할머니, 어머니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데. 문갑은 겉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거시적 안목으로 알아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고향집, 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말이 먼지가 되어 문갑에 내려앉는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신 지 일 년, 단아한 모습 사라지고 휑한 눈에 표정이 없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문갑에 자꾸 먼지가 쌓여간다. 위에 얹은 물건들 하나하나 옮겨 청소하기 어렵다. 문갑은 관심 없는 존재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빛 바래가는 나뭇결 홈에 쌓인 세월의 먼지는 주름진 어머니와 닮았다. 경첩도 본연의 색을 잃어갔다. 사람 눈길 받아본 지 오래다.
조상 때부터 곳간 열쇠는 큰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문갑이 곳간 열쇠는 아니지만 할머니에게 곳간 열쇠 이상이었다. 그것을 어머니에게 물려줬다. 어머니는 맏며느리의 위치가 부담이었지만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하는 종부였다. 어머니도 큰며느리에게 그 문갑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핵가족 시대인 요즘, 종부가 부담되는 자리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형제간 우애를 강조한 우리 집 가훈이, 거실 문갑 위 벽에 걸려 있다. 어머니는 맏이가 구심점이 되어 자식들이 화목하기를 바랐다. 그런 어머니의 소박한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문갑을 물려 주려해도 받을 사람 발길 끊은 지 오래다. 백년 된 문갑이 현재 가치로 몇 억 간다고 뻥 한 번 쳐볼까. 그러면 끊긴 발자국이 벌떼처럼 몰려들까. 엉뚱한 단상이 낙엽을 굴리는 가을바람처럼 휭하니 스쳐간다.
백년의 침묵을 견디며 함께해온 문갑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지 못했다. 겉모습만 중시하는 풍조에 동승하여 볼품없다고 쓰레기장으로 보내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문갑의 존재를 고민하며, 과감하게 버리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중한 가치가 문갑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셔도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친정집에 가면 어머니 빈자리를 문갑이 대신한다.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어머니의 말이 문갑에 담겨있다. 형제애로 어머니의 한을 먼지 닦아내 듯 닦아낸다, 문갑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그 날까지, 백 년 동안 쌓인 침묵을 닦고 또 닦을 것이다.
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대전 수필부문 심사평
금년 수필 본선 심사대상 작품은 115편이었다. 적지 않은 작품수이며, 내용도 다양했다.
내용이 다양하였지만 자신이 시니어라는 의식과 삶의 고단함, 질병으로 인한 고통,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등의 사실적 서술은 감동적이었다. 어떤 작품은 읽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 장르의 서정과 문학적인 성취도를 판단해야 하는 객관적인 정서가 있어야 하기에 이분들의 작품들을 제외해야 하는 마음이 아팠다. 선정되지 않은 분들의 성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너무나 애석하게 생각한다. 다음 기회에 이분들이 좀 더 분발 하신다면, 수상을 할 수 있을 것을 믿으며 위안한다.
수상작 「삼베보자기」는 딸이 자신의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을 통해 자신을 찾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어머니의 삶을 신혼 때부터 현재의 삶까지를 삼베보자기로 일생을 표현한 작품이다. 길쌈의 날실과 씨실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베틀에서 끊어져 나온 베 자락처럼 반짝거렸던 어머니의 청춘시절과 옹이 진 세월의 질곡을 흐물거리며 풀기 빠진 삼베보자기로 표현한 내용 전개 등이 감동이다. 또 다른 작품 「중년의 책임감」에도 작가의 치밀하고 사실적인 내용 등이 돋보인다.
수상작「백년의 침묵」 은 작가 자신의 친정집에 남아있는 <문갑>에 관한 추억 등을 담아낸 작품이다. 할머니의 혼수품이었던 문갑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어머니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문갑은 예전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 놓이는 장소와 용도가 달라지는 과정을 작가는 담담하지만 서정적으로 풀어냈다. 문갑의 대우가 하향 되는 과정을 통해 작가 집안의 변천사를 이해 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의 변천과정 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수필 1편을 읽으면서 백년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수상작 「오동낭구 그루터기」는 한편의 단편 같은 수필이다. 누군가에 의해 재활용품에 버려진 장롱을 보면서 느낀 소회를 통해 전개되는 표현작법이 뛰어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가 심은 벽오동나무에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나무가 자랄수록 작가는 더욱 성장했다. 결국 이 벽오동나무는 할머니의 관을 만드는 나무가 된다. 이 과정을 작가는 정성을 다행 서정과 슬픔의 미학 등을 담아 정갈한 작품으로 담아내었다.
수상작 「꽃차 우리는 시간」은 산문시 같은 수필이다. 선물로 받은 꽃차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겸손하다. 그 고마움을 담은 작가의 정성과 제목처럼 꽃차 우리는 시간의 행복한 마음을 맑고 정갈한 언어로 함축했다. 꽃차 우리는 시간에 닿을 수 있는 다양한 표현 등은 마치 읽는 이에게 꽃차의 향기가 물씬 풍기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꽃차의 향기처럼 이제 더 많은 수필 작품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