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수필) - 교정본
- 김흥순(믿음)
마을 어귀에서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여, 주말 오후 서둘렀다.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는 빵을 사 들고, 고향을 향하여 달렸다. 어릴 때 돌멩이 많던 신작로는 다 어디로 가 버리고, 아스팔트길에 가로등만 줄지어 있었다. 혹시 고향길을 잘못 찾아왔나 의심할 정도로 길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서 애타게 딸을 기다릴 텐데, 나는 속절없이 고향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찾아오고 주위는 어두워졌다. 한참을 가다가 행인에게 길을 물어, 가던 길을 되돌아와 어머니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살아온 어머니, 고된 삶의 무게를 상징하듯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서둘러 올걸’ 후회하는 마음,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이 휘몰려 왔다.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그리웠던 어머니와 함께했던 포근한 그 밤, 잊을 수 없다. 어찌 그리 밤이 짧던지. 이튿날 고향의 맑은 새벽공기 마시며, 행복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축제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1박 2일로 고향 축제 ‘조양제’가 있는 날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을마다 갖가지 음식을 준비해 놓은 부스를 찾아다니며 향수를 달래고, 그리운 고향 맛도 즐길 수 있었다.
마을마다 준비한 가장 행렬은 멋졌다. 음악을 좋아하는 한 친구가 조성면민의 노래를 작곡하였고, 친구의 구성진 노래가 운동장에 흘러나왔다.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다. 또한, 후배가 하늘을 흩날리는 불꽃놀이를 준비했다. 이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고향 밤하늘을 10여 분 동안 아름답게 수놓았다.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친구들은 고향을 지키며 농협에 근무하는 친구 집에서 정겨움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지금은 서릿발 내린 친구들의 그때 모습들이 몹시 그립다.
나의 어머니는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고. 세상을 살아갈 힘과 사랑을 준 분이다.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결핵은 상당히 난치병이라고 여겼다. 나는 불행하게도 결핵과의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그동안 결핵이라는 전조 증상도 느끼지도 못하였다. 아주 건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란 기색도 없이 약 먹고 치료받으면 완치되겠지 하고 가볍게 여겼다.
결핵을 발견하고는 가족에게 전염될까 봐,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에는 마스크를 사용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채 옆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결핵은 약을 잘 먹고 영양소를 잘 섭취하고, 안정을 취하는 것, 이 대조건이 맞아야 했다. 약은 한 주먹이나 될 정도로 먹어야 했고, 주사도 매일 투입해야 했다. 어머님은 생활고로 인하여 한때 병원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지만 간호사가 하는 일을 어깨 너머로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딸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매일 딸의 엉덩이에 놓아 주셨다.
농촌 일은 날마다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날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매일 주삿바늘을 소독하여 주사를 놓아 주는 정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사를 맞은 내 엉덩이는 거북이 등처럼 단단하게 멍이 들어, 주삿바늘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손으로 내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리면서 주사를 놓아주었고,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도 해주었다.
내 나이 칠십을 넘어 생각해 보니 나의 청춘 시절에는 면 소재지에 병원이나 보건소도 없었고, 있었다 한들 매일 치료를 받으러 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문맹이었던 어머니는 지혜롭게, 또 용기 있게 난관을 헤쳐나갔다.
어머니는 농부의 아내로 살아가기도 버거웠을 텐데 단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이, 오로지 희생으로 이겨냈다. 그리고 삼대 독자인 아버지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고, 육 남매 교육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늘 일깨워 주었으며, 학비 조달에 힘들어도 힘들다는 기색 없이 튼실한 신앙으로 자식들을 성장시켰다. 특히, 어머니는 두 오빠가 장로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 바람대로 두 오빠가 장로는 되어 주지 못했지만, 그 대신 국가 공무원 되어 기쁨을 안겨 주었다.
슬하에 딸 넷은 밤 9시가 넘어 귀가하지 않으면 전전긍긍하며 염려하던 어머니, 그 덕분에 세상을 이길 힘을 얻었고, 값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작은오빠가 대학 입학 당시 집에 쌓아놓은 일 년 농사 볏단을 태워 버려, 그해 겨울내 우리는 태운 밥을 먹어야 했고, 오빠는 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또한 막내동생은 공주사대를 가려고 했는데, 그마저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에 어머니가 애통해 했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격동의 세월 6.25 전쟁 당시 큰오빠 청년 시절, 밤이면 인민군이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시절, 어머니는 엄동설한 돼지우리 위에 쌓아놓은 볏더미 속에 아들을 잠재웠다. 그때 어머니는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잔다는 게 너무 미안했던지, 선잠을 지새우다시피 하며 볏더미 속에 잠자는 아들의 몸을 만져 보며 꿈틀거리면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그만큼 어머니는 유달리 큰오빠에 대한 기대가 컸다. 고달픈 어머니의 삶이 오빠로 하여금 대리 만족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육 남매를 평생 손수 지은 옷으로 행여 추울세라 더울세라 입혀 주셨던 어머니, 당신은 허리띠 졸라매고 자식들에겐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어머니, 그 사랑이 빈곤 속에서도 빈곤을 모르고 행복했던 시절을 보내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그 얼마나 고달픈 생활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죄스러워 고개 숙여진다.
육 남매 뒷바라지에 만신창이 된 어머니는 관절염이 심하여 걷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누워만 지냈다. 어머니는 결국 욕창이 생겼다. 고생했던 어머님에게 받았던 그 사랑 돌려 드리고파 오빠 내외분이 똥오줌을 받아 냈고, 몸을 씻어 드리며 온갖 정성을 들였다. 그랬건만 그 효도도 멀리한 채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그때 오빠가 애통해 하는 모습을 차마 곁에서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나 역시 투병 생활을 겪고도 살아서 건강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어머니에게 감사할 뿐이다.
일생을 희생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우리의 거목이다.
오늘은 어머니가 70 평생을 살았던 고향 집에 육 남매가 모였다.
어머니!
지금도 그 목소리가 쟁쟁하게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고, 대문 열고 어머니가 들여오는 것만 같다.
평생을 우리 곁을 있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떠났다. 이후, 어머니의 그늘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