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세덕사(世德祠)의 유래(由來)
세덕사(世德祠)의 유래(由來)
매년(每年) 음력(陰曆) 3월의 첫째 공휴일(公休日)을 택(擇)하여 대전(大田) 세덕사에서 봉행(奉行)하는 향사(享祀)에는 우리 남양홍씨 당홍계의 후손들이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이 참사(參祀)하여 경건(敬虔)(뜻; 경의를 단정하게)한
마음으로 선조(先祖)님께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 사우(祠宇)가 언제 어떻게 하여 대전에 세워졌는지 그리고 어는 선조님이 입비(立碑)가 모셔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소상(昭詳)하게 알지 못하는 자손들도 없지 않을 것으로 믿어 그 연혁(沿革)을 잠시(暫時) 소개(紹介)하고자 한다.
(1) 세덕사(世德祠) 건립(建立)의 배경(背景)
세덕사를 대전 유성(大田儒城)에 건립하게 된 동기(動機)는 일찍이 대전 유성에 낙향(落鄕)하여 뿌리를 내리고 누대(累代)에 걸쳐 수백년간(數百年間) 세거(世居)하여온 남양홍씨 익산군파(益山君派)의 일문(一門)인 13세 익산군 휘(諱) 운수(云遂)의 장남(長男)이신 14세(世) 휘 유룡(有龍)의 5 세손(世孫)으로 입향조(入鄕祖)이신 19세(世) 휘 석복(碩福)께서 유성에 정착(定着)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80여년(餘年)의 세월(歲月)이 흐르는 동안 자손(子孫)들이 번연(蕃衍)(뜻; 번성하게 늘다)하고 영화(榮華)를 누리고 살아오고 있으나 선조의 입비(立碑)를 모시고 세일제(歲一祭)의 향사(享祀)를 올릴 사우(祠宇)가 없음을 송구(悚懼)스럽게 생각하여 오던 중 문중(門中)이 뜻이 모아져서 사우건립(祠宇建立)의 합의(合議)가 이루어져 19세(世) 진사공(進士公) 휘(諱) 순복(順福)과 아우 되시고 입향조(入鄕祖)이신 생원공(生員公) 휘 석복(碩福) 형제(兄弟)분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28세(世)에 이르기까지 29위(位)의 종지손(宗 支孫)(뜻; 종손)과 배위(配位)를 함께 배향(配享)한 유성사(儒城祠)를 건립하게 된 것이 일차적(一次的)인 동기(動機)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익산군파 유성종중에서 자체적(自體的)인 위선사업(爲先事業)으로 문중의 사우(祠宇)를 건립하려는 계획(計劃)을 수립(樹立) 추진(推進)하는 과정(過程)에서 중앙종회에 협의차 그 뜻을 전달한바 마침 중앙종회에서도 선시조인신 학사공(學士公) 휘(諱) 천하(天河)의 입비가 봉안(奉安)된 사우가 전국 어는 곳에도 없음을 송구(悚懼)스럽게 생각하여 사우건립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던 중 차제(此際)에 교통(交通)의 요충지(要衝地)로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接近性)이 용이(容易)하여 당일참사(當日參祀)가 가능(可能)한 대전에 사우를 건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일치하여 대전 유성구 지족동의 현 위치에 유성사(儒城祠)와 함께 세덕사(世德祠)를 건립하고 선시조이신 학사공 휘 천하(天河) 태사공 휘 은열(殷悅)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16파조의 입비를 종향(從享)으로 봉안하게 된 것이다.
(2) 사업추진경위(事業推進經緯)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모든 일이 뜻대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호사다마격(好事多魔格)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으나 숭조(崇祖)의 일염으로 위선 사업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적극협력(積極協力)한현종(顯宗)이 있었기에 모든 난관(難關)을 극복(克服)하고 우리 홍문(洪門)의 숙원사업(宿願事業)인 사우(祠宇)건립의 성사(聖事)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즉(卽) 유성문중에서는 1980년도에 누대선조(累代先祖)의 향사를 합사(合祀)하기로 결의(決意)하고 우선(優先) 사우건립(祠宇建立) 재원(財源)을 마련하기 위해서 구성동(九城洞) 소재 선천(宣川) 부사공(府使公)의 위토(位土)를 매각(賣却)하려 하였으나 국가로부터 공공용지로 수용(收用)되어 불가하게 되자 1982년도에 다른 곳의 종중토지 900평(坪)을 매각하여 사우 건립자금의 일부를 확보한 후 1983년도에 우선 공사를 착공하게 되었는데 중앙종회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종친 독지가(篤志家) 순호씨(淳浩氏)가 현지에 찾아와서 자기는 평생의 소원이 홍문을 위한 뜻있는 위선 사업을 하는 것이라면서 위성문중의 사우와 함께 옆자리에 중앙종회(中央宗會)에서 계획 중인 전기(前記) 선시조 학사공과 시조 태사공 및 16파조를 배향(配享)하는 사우를 건립하여 중앙종회에 기부(寄附)하겠으니 소요부지(所要敷地)를 매각(賣却)해 줄 것을 요청(要請)하자
유성문중(儒城門中)에서는 크게 감동(感動)하여 무상(無償)으로 양여(讓與)하겠다는 의사(意思)를 밝히고 종중임야 2,000평을 사우건립(祠宇建立) 부지로 중앙종회에 헌납(獻納)하니 이에 감동한 순호씨(淳浩氏) 역시(亦是) 당시로서는 거금(巨金)인 일억원을 쾌척(快擲)(뜻; 금품을 마땅히 쓸 자리에 내어 놓음)하여 1983년 11월 자신의 소망(所望)일뿐 아니라 우리 홍문(洪門) 전체의 숙원사업이기도 한 사우건립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84년 10월 드디어 공사가 완공됨으로서 성역화사업(聖域化事業)이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사이면(工事裏面)에는 또 다른 우여곡절(迂餘曲折)도 많았는데 그것은 유성문중에서 자체적(自體的)으로 추진(推進)하던 유성사(儒城祠)는 1983년 10월에 이미 건축허가(建築許可)를 얻어 착공(着工)하였으나 그보다 1개월 늦게 건축허가(建築許可)를 얻은 중앙종회의 세덕사(世德祠)는 허가를 득(得)한 연후(然後)에도 바로 착공하지 않고 지연(遲延)되어 문제(問題)가 발생할 우려(憂慮)가 없지 않았다.
그것은 그 무렵 육군교육사령부가 사우(祠宇) 건립예정지(建立豫定地) 부근(附近)인 반석동에 이전(移轉)할 계획이어서 12월 이전에 조기(早期) 착공하지 않을 경우 허가취소(許可取消) 될 위기(危機)에 처(處)하게 되어 우선 유성문중에서 대신(代身) 착공신고를 하고 기초공사(基礎工事)를 시작(始作)한 후 중앙종회와 순호씨(淳浩氏)에게 급(急)히 열락 하여 신속(迅速)한 자금지원을 요청 공사를 진행하던 중 1984년 8월 유성사가 90% 세덕사가 70%의 공정(工程)에 이르렀을 때 공사 담당(擔當)한 고건축업자(古建築業者)인 홍준택씨(洪俊澤氏)의 부도(不渡)로 위기(危機)를 맞기도 하였으나 관계법(關係法)에 의하면 인건비(人件費)는 사업주(事業主)가 그리고 자재비(資材費)는 공사담당자(工事擔當者)의 책임사항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비상대책으로 긴급협의 끝에 상호원만(相互圓滿)한 합의가 이루어져 각자의 책임부담으로 공사를 계속(繼續) 추진하여 유성사는 1984년 9월 30일에 그리고 세덕사(世德祠)는 11월 30일에 드디어 준공(竣工)되어 유성문중과 중앙종회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3) 공사(工事)의 개요(槪要) 및 위패(位牌)의 봉안(奉安)
이상과 같이 선조(先祖)를 경모(敬慕)하는 유성문중(儒城門中)의 숭조지심(崇祖之心)으로 사우(祠宇) 건립 부지를 기증(寄贈)받은 중앙종회의 사우 건립계획이 위선 사업을 필생(畢生)(뜻; 평생)의 염원(念願)으로 사재(私財)를 쾌척(快擲)하여 사우 건립 자금을 제공(提供)한 순호씨와 부지(敷地)를 기증한 유성문중을 대표(代表)한 종구씨(鍾九氏)의 헌신적(獻身的)인 노력(努力)으로 사우건립 공사가 마무리된 후 사우의 명칭(名稱) 위패(位牌)의 봉안(奉安) 향사(享祀)의 일자(日字) 사우의 관리 문제(問題) 등이 논의(論議)되었는데 공사 개요와 위패의 봉안에 대하여 요약(要約) 기술(記述)하면 다음과 같다.
@ 1983년 11월 공사(工事)의 착공(着工)을 앞두고 우선(優先) 전통양식(傳統樣式)의 고건축설계(古建築設計) 및 공사를 담당(擔當)한 업자(業者)를 물색(物色)중 대전시 종친(宗親) 기능보유자(技能保有者)인 홍준택씨(洪俊澤氏)를 찾아 협의한 후 공사를 담당케 하고 설계(設計)를 위탁(委託)하여 전문설계사(專門設計士)인 신라건축사무소(新羅建築事務所)의 박태우씨(朴泰雨氏)에게 위임(委任)하여 설계(設計)를 완료(完了)하였음.
@ 1983년 11월 30일 건평 26평의 본당사우(本堂祠宇)와 4평의 문루(門樓) 그리고 22평의 재실(齋室) 신축공사(新築工事)를 착공(着工)
@ 1984년 4월 8일 전국(全國)에서 종친(宗親) 200여명이 참석(參席)하여
상량식(上梁式) 거행(擧行)
@ 1984년 6월 28일 서울 서부예식장(禮式場)에서 종중(宗中) 원로(元老)와 중앙종회 임원 및 각 지역 종친회장 각파(各派) 대표 등이 합동하여 사우의 명칭 위패의 봉안 향사 일자 사후 관리 등 제반사항(諸般事項)을 협의(協議)
@ 1984년 11월 30일 본당사우를 비롯하여 문루 담장 재실(齋室) 등 건축물의 공사가 완공되어 설립자(設立者)인 순호(淳浩)씨가 중앙종회에 기부(寄附)
@ 1985년 3월 31일 사우(祠宇) 및 재실(齋室)의 현판(懸板)과 관상수(觀賞樹)의 식재(植栽)등 경내(境內)의 조경작업(造景作業) 완료(完了)
@ 1985년 4월 3일 세덕사 보존회가 발족(發足)되어 회장(會長)에 창섭(滄燮)씨 부회장에 순호(淳浩)씨와 종구(鍾九)씨 그리고 감사(監事) 1명과 각파별로 2명의 이사(理事)가 선임(選任)되었고 병행(竝行)(뜻;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한 번에 아울러서 행함)하여 세덕사 건립의 주역(主役)인 유성문중과 순호씨의 공적을 영원(永遠)히 기리기 위한 기적비(紀蹟碑) 제막식(除幕式)을 거행(擧行)
@ 1985년 4월 21일 전국각지에서 약(約) 1,500명의 후손들이 참석하여 위패를 봉안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추후(追後)에는 매년 음력 3월의 첫째 공휴일(公休日)에 정기적(定期的)으로 춘향제(春香祭)를 봉행(奉行)키로 하였으며 위패의 봉안은 선시조이신 학사공 휘 천하(天河)와 시조이신 태사공 휘 은열(殷悅)을 주벽으로 모시고 세대(世代)와 계파(系派)의 서열(序列)에 따라
주벽의 좌측(左側) 소열(昭列)에는 재신공파의 2세(世) 휘 난(鸞)을 비롯하여
중랑장공파의 6세(世) 휘(諱) 후(厚) 좌복야공파의 8세(世) 휘 연(演)
문정공파의 13세(世) 휘 언박(彦博) 판중추공파의 13세(世) 휘 어수(彦修)
시중공파의 13세(世) 휘 승찬(承纘) 상서공파의 13세(世) 휘 승조(承祚)
익산군파의 13세(世) 휘 운수(云遂)의 순(順)으로 8위(位)의 파조(派祖)가
그리고 주벽의 우측(右側) 목열(穆列)에는 예사공파의 4세(世) 휘 복(?)
이부랑중공파의 8세(世) 휘 륜서(倫?) 남양군파의 13세(世) 휘 주(澍)
판밀직공파의 13세(世) 휘 언유(彦猷) 대언공파의 13세(世) 휘 승서(承緖)
시랑공파의 13세(世) 휘 승열(承列) 감령공파의 13세(世) 휘 승연(承演)
당성군파의 13세(世) 휘 운형(云衡)의 순(順)을 8위(位)의 파조 등 모두 16위(位)의 파조(派祖)를 소목(昭穆)에 종향(從享)으로 배향(配享)하였다.
위패봉안도 (位牌奉安圖)
(4) 세덕사(世德祠)의 운영관리(運營管理)
세덕사는 1984년 4월 21이 입비(立碑)가 봉안된 이후 10여 년간 중앙종회 에서 관리운영(管理運營)하여 왔으나 1996년 2월 27일 중앙종회의 이사회(理事會) 결의에 의(依)하여 세덕사의 업무추진일절(業務推進一切)의 권한(權限)을 대전(大田) 충남종친회(忠南宗親會)에 위임(委任)하여 29일자로 통보(通報)됨에 따라 대전 충남종친회에서는 그 이후부터 위임(委任)받은 사항(事項)을 이행(履行)하기 위하여 1996년 3월 19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고문(顧問)을 비롯하여 회장(會長)과 부회장(副會長) 그리고 감사(監事)등 임원과 각 문중 대표로 구성(構成)된 20명의 이사를 선임하여 대전 세덕사 보존회(保存會)의 회칙개정(會則改正)과 동시(同時)에 새로운 보존회를 결성(結成)하고 그 후 세덕사(世德祠) 보존관리 및 춘향제(春享祭)의 봉행(奉行)등 위임(委任)된 사항(事項)을 충실(忠實)히 수행(遂行)하고 있다.
그러나 세덕사는 운영 관리에 대한 예산(豫算)이 별도(別途)로 확보(確保)되지 못하여 사우의 유지관리는 물론 제수(祭需) 준비(準備)와 참사자(參祀者)의 접대(接待)등 향사시(享祀時)에 필요(必要)한 제경비문제(諸經費問題)로 재정상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임원(任員)과 이사로부터 갹출금(醵出金)으로 충당(充當)하여 겨우 유지(維持)하고 있으나 세덕사는 전체 홍문이 영구(永久)히 보전할 성역이고 우리 모든 홍문의 자손들은 모름지기 옷깃을 여미고 선조님의 음덕(蔭德)에 감사하여 머리 숙여 큰절을 올리는 성전(聖殿)임으로 모든 종친께서는 세덕사의 운영관리와 제례 행사에 작은 정성(精誠)이나마 협찬(協贊)과 성원(聲援)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그간 세덕사의 운영관리와 제례행사에 공로가 많았던 중앙종회와 유성문중이 아니었으면 세덕사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정성어린 보살핌이 없었다면, 점차(漸次) 노후화(老朽化) 되는 사우의 유지관리나 향사(享祀)의 봉행(奉行)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중앙종회와 유성문중의 노고에 대하여서 심심(甚深)한 사의(謝意)를 표(表)하여 마지않는다.
세덕사의 운영관리의 권한(權限)이 사우가 위치한 대전 충남종친회에 위임된 이후에도 다행(多幸)히 보존회의 성규(性奎)회장님을 비롯하여 종구(鍾九) 상임(常任) 부회장님과 임원 여러분들의 지극(至極)한 정성과 헌신적(獻身的)인 노력으로 점차 모범적(模範的)인 보존회로 발전되어 위선 사업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과 같이 세덕사는 1984년 우리 홍문의 성전으로 자리 잡은 지 어느덧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與件)하에서도 유지관리에 힘써서 잘 보존되어 왔으나 급격(急激)한 도시(都市)의 팽창(膨脹)과 개발(開發)로 인(因)해서 이전이 불가피(不可避)한 사항에 처하게 되어 개발주역인 대전시 및 토지개발 공사측과 협의하여 더욱 발전적으로 현 위치(位置)보다 유리(有利)한 장소에 문화재적(文化財的) 가치도 더한 사우를 우리 문중의 요구대로 이전 신축해 주기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경제위기로 lMF라는 국제적인 구제금융 지원까지 받게 되어 점차적(漸次的)으로 보류(保留)된 상태에서, 최근 토지개발 공측에서 사정상 당초의 합의사항 이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의사를 전해옴에 따라, 보존회측의 종구 상임부회장으로부터 이전신축이 이미 합의되어 개보수의 필요성이 없게 됨으로서 누우시(漏雨時)에 누수(漏水)가 되어도 그대로 방치하여 건물이 부분적으로 훼손(毁損)되었으니 합의사항을 위반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력한 항의(抗議)에 토개공측에서 이에 대한 보상차원(報償次元)에서 주변(周邊)을 공원화(公園化)하는 것이 보다 유리할 수도 있어 일단 동의한 상태이나 개발 후에 지가(地價) 상승(上昇)에 따른 개발이익금의 일부를 환수(還收)한다는 개발 부담금의 납부여부가 문제점으로 제기(提起)되어, 미해결 현한과제(懸案課題)로 남아 있으나 조상님의 입비를 봉안한 사우의 건립부지는 지가 상승과는 무관(無關)하여 경제성을 논할 대상(對象)이 아니므로 개발부담금의 납부는 부당(不當)하다는 것이 우리 측의 입장(入場)이지만 어떻게 귀결(歸結)될지 예측(豫測)할 수가 없다.
(大田 淳國; 남양회보 2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