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산행일자] 2008년 11월 30일 일요일 2.날 씨] 구름한점, 시계 아주 좋음,0.7-9.7도(체감온도 영하 10도 쯤) 풍향 서북서 4.0-서남서 7.3m/s 최소습도 22% 3.산행코스] 한티재(03:36)-헬기장(841m;04시)-파계재(816m;04:04)-파계봉(4:25,997m)-헬기장(0:16)-마당재(4:45,979m)-(톱날능선;미정재,5:49,986M))-서봉(06:53~58)-동봉(07:30) -식사(07:33~07:50)-우회로-갓바위 5.6km이정표(08:52)-도마재;수도사 갈림길(09:17)-신령재(09:18)-형제바위(09:25)-갓바위3.5km(09:41)-팔공약수터,동화사갈림,바른재(09:43)-운부봉,930봉(10:05-13)-능성재(10:26)-느패재헬기장(10:32)-갓바위 1.8/은혜사 5.5km 갈림봉/897.6봉(10:38)-인봉,은해봉(11:05)-북지장사 갈림(11:27)-선본사갈림,선본재(11:35)-갓바위(11:51-12:03)-팔관정(12:12)-관암사(12:20-22) -능성동 갓바위 주차장(12:40) ![]() 4.산행시간] 9시간 4분 5.산행인] 산시조 외 좋은사람들 산악회 회원. 6.교통] 좋은사람들 산악회 버스 7.지명유래]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팔공산; 국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터를 두었다고 해서 처음은 공산이라고 불렸는데 고려 왕건 태조가 견훤군과 대전시 신중경, 김학 등 8명이 의사하였다 하여 팔공산이라 불려오고 있음.(국토지리정보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6권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와 대구읍지에 따르면 공산(公山)은 팔공산(八公山)이라고도 일컫는데, 부의 북쪽으로 50리,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岳)이라고 일컫고, 중악(中岳)이라 여겨서 중사(中祀, 중악에 제사 지냄)하였다. 둘러 있는 것은 대구부 및 하양·신령·부계(缶溪)·인동·팔거(八筥) 등의 읍이다. 산봉우리 위에 삼동석(三動石)이 있으며 화산(花山)으로부터 뻗어내린 산이라고 적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부악(父岳), 공산(公山) 또는 신라오악(新羅五岳,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중 중앙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악(中岳)이라고 불리었다가 고려시대에는 공산으로 불리고 조선시대에 와서 팔공산이란 명칭이 정착된 듯 하다. 팔공산에 대한 명칭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많은 이설(異說)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1) 사대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 중국 안휘성의 팔공산에서 전진(前秦)왕 부견이 진군(晉軍)과의 싸움에서 대패한 것을 왕건과 견훤의 싸움에 빗대어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 2) 여덟 장군이 순절한 산이라는 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의 공산싸움에서 고려 장군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등의 여덟 장군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순절한 것을 기려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3) 8간자(簡子)를 봉안한 산이라는 설 ; 동화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심지대사가 영심(永深)대사로부터 받은 간자를 동화사에 봉안했다하여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4) 여덟 고을에 걸친 산이라는 설 ; 칠곡, 하양, 영천, 신령등의 여덟 고을에 걸친 공공(公共)의 산이라는 뜻으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5) 8성인(聖人)이 득도해서 나온 산이라는 설 ; 원효의 제자 8인이 천성산에서 공산에 들어와 세 스님은 삼성암에서, 다섯 스님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고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에 의해 현재의 팔공산이란 이름이 정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하의 내용 중 명기되지 않은 것은 대구매일 http://www.imaeil.com/“[八公山下] 팔공산을 天山으로”에서 인용한 것임 - 봉우리 ; 산만대이 삼성봉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구 동구 경계 1,150m 파계봉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구 동구 경계 991m 서 봉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구 동구 경계 1,041m 비로봉 경북 군위군 부계면, 영천시 신녕면, 대구 동구 경계 1,192m 동 봉 경북 영천시 신녕면, 청통면 경계 1,155m 염불봉 경북 영천시 신녕면, 대구 동구 경계 1,150m 인 봉 경북 영천시, 경산시, 대구 동구 경계 897m 노적봉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구 동구 경계 887m 관 봉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구 동구 경계 745m 가. 장꼬방봉; 파계봉(△991.2m);994m 봉우리의 이름을 주민들은 '파계봉' '물불산'이 아니라 '장꼬방 말랭이'라 했다. 장꼬방은 장독, 말랭이는 정상(頂上)이라는 뜻이다. 그 봉우리가 장독을 닮았다는 비유일 터. 그래서 지금 말로 풀면 '장꼬방봉'인 셈이다.gps 상 1000m 나. 삼성봉(서봉);서봉은 그 바로 밑에 있었다는 '삼성암'(三聖庵)이라는 절의 이름에서 따 '삼성봉'이라 부르는데 별 이의가 없는 듯 했다. 등산단체들은 새해가 되면 삼성암 터에서 시산제를 지낸다고 했다. 주능선 종주 때 등산인들이 자고 가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저녁엔 낙조가 좋고, 밤엔 대구 야경이 절경이라 했다. gps 상 1160m 다. 八公山 東峰( 미타봉 1167;1155m) : 칠곡군 치계면, 영천시 신령면, 대구시 동구 팔공산이 얼마나 희고 밝은 산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명마산 가는 줄기. 화강암 관입으로 형성된 이 산의 특징이 선명히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은 동봉 혹은 미타봉이다. 이 봉우리는 그 요체가 능선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바위 군을 아랫도리로 거느렸다.gps 상 1180m 라. 念佛峰(1036.1) : 영천시 신령면, 대구시 동구 ; 동봉의 이름으로 남사면 사람들이 기억해 낸 이름은 '염불뒷덤'이었다. 염불암 위에 있어 그렇게 불렀다는 것. 요즘 말로 풀자면 '염불봉'에 해당될 터이다. 대구시 연구보고서인 '팔공산'(1987)도 등산로 설명 편에서 이걸 '염불봉'이라 지칭했다. 공원고시 역시 "1150m봉이 염불봉"이라고도 지목해 놓고 있는 바, 1167m봉을 그렇게 파악했을 개연성도 없잖아 보인다. 팔공산 동부 능선에 이것 말고는 1100m를 넘는 봉우리가 없기 때문. 동일 대상을 놓고 '동봉'과 '염불뒷덤'이라는 이름이 뒤섞여 사용되자 이를 혼동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런 여러 정황들로 미뤄보면, '동봉'으로 지칭되는 봉우리의 1차 명칭은 '염불봉'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하지만 '염불봉'이란 명칭의 사용은 팔공산에서 이미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는 중이다. 1167m봉에 이어 나타나는 1085m봉에다 그 명칭을 붙여 놓은 등산객들이 적잖고, 5천분의 1 지도는 그 다음다음에 나타나는 1036m봉에다 염불봉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놓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혼란은 옛날부터 발생해, 팔공산 밑에 사는 사람들끼리도 "염불봉에서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는 서로 다른 봉우리들로 나뉘어져 기다리느라 결국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지명 조정 작업이 필요할 터이다. 마. 新寧峰(990) gps 상 1005m : 영천시 신령면, 청통면, 대구시 동구; 주능선은 도마재(955m)로 잠시 몸을 낮췄다가 997m 봉우리로 올라서면서 동쪽으로 '신녕지맥'을 내려보낸다. 신녕과 청통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신녕천의 둑 역할을 겸하고, 한참 달린 후에는 그 남사면으로 '거조암'을 품어 안기도 하는 중요한 산줄기. 유봉(신녕)지맥 분기봉임. 바. 雲浮봉;gps 상 935m: 주능선이 동화사골 뒷담의 역할을 끝내는 것은, 930m봉에서 큰 산줄기가 하나 서사면(西斜面)으로 내려간 때문이라고 했다. 그 산줄기가 동화사골과 구분지어 주는 골은 느패골(골프장골)이다. 그런 다음 주능선은 잇따라 동사면으로도 줄기를 하나 내니, 그 북으로 거조암이 있는 청통면 신원리 마을, 남으로는 은해사골이 포진한다. 이 줄기의 출발점이 되는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으나, 본래 이름이 찾아질 때까지는 일단 '운부봉'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놔 보자. 거기서 출발한 줄기가 얼마 달리지 않아 가지 줄기를 내서는 두 줄기 사이의 골 안으로 '운부암'(雲浮庵)을 품어들였으니 말이다. 사. 은해봉(시루봉 882m봉);느패재를 지난 주능선은 느패골 뒷담 산에 해당하는 882m 봉우리로 높아지면서 동쪽으로 또 한 개의 산줄기를 낸다. 은해사골 남쪽 줄기이자 와촌 갓바위골의 북편 줄기. 영천시와 경산시, 청통면과 와촌면의 경계선이 되는 줄기이기도 하다. 봉우리 윗면이 상당히 넓어 마치 광장 같다. 남북 방향 주능선과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가지 산줄기가 만나 ├ 형의 완벽한 삼거리를 이뤘다. 가지 산줄기를 한참 따라 가도록 의자들이 쭉 가설돼 있어 공원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다. 와촌 솔뫼기(솔목) 마을의 한 어르신은 그 봉우리 이름을 '시루봉'이라 기억해 냈다. 하지만 완전한 조사가 이뤄질 때까지는 우선 '은해봉'이라는 가칭을 부여해 놔 보자. 누군가가 현장 돌 표석에 '능성재'라 새겨 놨으나, 결코 속아서는 안될 엉뚱한 일일 터. 아. 印峰(露積峰, 887m) : 대구시 동구, 경산시 와촌면 -인봉 팔공산의 남쪽에 있는 산이며 산봉우리가 도장(印)과 같다하여 인봉이라 불려 온다 함.(국토지리정보원) -노족봉 산 형이 노적(露積)을 쌓아 놓은 것과 같다하여 노족봉이라하다 와전되어 노족봉이라 부르고 있다.(국토지리정보원) 돌 봉우리 두 개가 토끼의 두 귀같이 솟아 있는 모양이다. 남사면의 동네 노인들은 예부터 '방아쌀개덤'이라 불렀다고 했다. 디딜방아의 부품에 비유했을 터. 그럴 경우 더 적확한 비유어는 '방아볼씨덤'이 될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부르기 쉽도록 '방아덤'으로 표기해 보자. 방아볼씨보다도 디딜방아의 두 다리 형상에 가깝기도 하다. 이 방아덤과 관봉 사이에 돌 봉우리가 두 개 나타난다. 방아덤 쪽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은 볏가리를 닮았다. '노적가리'와 같은 말로 쓰이는 볏가리는, 볏단을 한데 모아 둥그렇게 쌓아 올린 뒤 비가 내려도 스며들지 않도록 윗부분을 불룩하게 지붕처럼 만든 것이다. 이 봉우리에서 중요한 산줄기 하나가 출발한다. 서쪽으로 흘러내리며 느패골과 도장골(북지장사골)을 구분 짓는 줄기가 그것이다. 이 봉우리의 이름을 국가 공식 지도는 두 가지로 헷갈리게 표기하고 있다. 2만5천분의 1 지도는 인봉(印峰)이라 했다. 그러면서 거기서 출발한 산줄기가 한참 내려 간 지점에 있는 봉우리를 노족봉(老足峰)이라 적어 놨다. 그러나 같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만든 5천분의 1 지도는 그 두 이름을 뒤바꿔 표기했다. 위의 것을 노족봉, 아래 것을 인봉이라 써 뒀다. 즉, 토끼 귀 같이 생긴 것은 '방아덤'이다. 볏가리 같이 위가 불룩하고 덩치가 큰 봉우리는 '노적봉'이다. 노적봉에서 흘러 내려간 산줄기의 북지장사 윗부분에 있는 돌 봉우리의 이름은 '인봉'(도장바위)이다. 자. 冠峰(갓바위, 852) : 대구시 동구, 경산시 와촌면 노적봉을 지난 뒤 주능선에서 만나는 반듯한 육면체 모습의 것은 '농바위'이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관봉이다. 갓바위 부처님이 자리 해 밤낮으로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고 부산·울산에서 매일 여러 대의 정기 버스가 다니는 전국적인 기도처이다. 관봉은 흔히 주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로 꼽힌다. -고개만대이 한티재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725m 파계재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대구 신무동 920m 신녕재 경북 영천시 신녕면 수도사~동화사 930m 능성재 경북 영천시 청통면 운부암~동화사 820m 선본재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선본사~동화사 820m 가. 한티재(720m), 근래에 인기가 부상한 재로서 한티재는 자동차 시대로 제철을 맞았고, 한티재를 출발한 팔공산 종단도로는 남산리 구간을 통해 내려가다가 앞의 그 분수령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산리 구간으로 접어든 뒤 곧 대율리 구간으로 이어진다. 한티재 밑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둔덕마을(남산리). 남산계곡의 중심골인 '지푼실' 옆 산줄기 위에 자리 잡았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지푼실'은 '깊은 골'이라는 말 그대로 그렇게 깊어 보일 수가 없다. 오랫동안 이 골 안의 유일한 가구였다는 집 어르신은 "지푼실은 막바지에서 도덕골과 도리미양지골로 갈라지며 도리미골로 올라가다 만나는 평평한 '노적바탕'을 지나면 '용무재'(마당재)가 나온다"며 "그 재를 넘어 용무골로 다녔었다"고 했다. * 팔공산의 광산 개발사는 고려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영천 청통·신녕면 일부를 영역으로 했던 '이지현'에서 그때 벌써 은이 생산됐다는 것. 한때 '은소'(銀所)라 불리기도 했다는 신녕 왕산리 계곡에는 지금도 '은점'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 '은점광산'에서는 그 후 고령토도 생산됐으며, 인접 청통에서는 '석천광산' '구정광산' 등이 개발돼 금 은 구리 납이 채굴됐다고 했다. 금광이 가장 많이 밀집한 곳은 한티재 남쪽의 동명면 득명리 일대였던 듯 했다. 그곳에는 어르신들이 "마치 벌집 같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갱들이 많았었다고 했다. 한티골을 구분 짓는 역ㄴ자형 산줄기 일대가 온통 광산으로 개발됐기 때문. 지금 관공서에서 기억하고 있는 광산은 '대득광산' 정도이지만, 동네 사람들은 '홍코' '신일호' 등 광산의 이름을 줄줄이 외고 있었다. 일제 때만 해도 득명리 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무엇보다도 토박이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많았다. 한티 마을에도 백석꾼까지 있었다. 거기다 광산이 개발되고 그 사택단지가 세워지니 인구가 더 늘었다. 지금의 기성리 농협 자리 맞은편에 사무실을 둔 전기회사까지 갖춰졌을 정도. 득명리에는 신사(神社)가 세워져 일본의 경조일에는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참배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캐 낸 광석을 운반하기 위해 그때 벌써 그 높은 곳까지 길이 만들어져 목탄차가 다녔다. 그 길을 넓혀 1990년대 초 팔공산 종단도로를 삼았다. 팔공산 곳곳에 널린 것도 대개는 금광이어서, 남원리 헌방마을 뒤 가산 줄기에만도 금광 갱구가 4개나 있고 그 중에는 수직으로 파 내려간 것도 있다고 했다. 심지어 도덕산 북사면에서까지 금 채굴 작업이 진행됐다는 얘기도 있었다. 나. 파계재(830m), 파계재는 예부터 통행인이 많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주막촌이 부계 쪽에 형성돼 있었을 정도라 했다. 주막촌이 형성됐던 곳은 지금의 수월정사 부근, 세 집이 모여 있어 '시찌배기'로 불렸다고 했다. 대율 출신 홍상근 군위군의원은 "부계에서 대구는 흔히 50리 길이라 말해져 왔다"며 "옛날엔 한티재나 파계재를 통해 대구의 학교나 시장으로 넘어 다녔다"고 했다. 본인 역시 학생 시절 쌀과 땔감(장작)을 지고 파계재를 넘어 다녔고, 그의 자형은 하룻만에 파계재 너머 서문시장 장을 봐 오기도 했다는 것. 파계재는 이같이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국가 표준 지도가 위치 표시를 잘못 하고 있었다. 2만5천분의 1 지도는 물론 심지어 5천분의 1 지도까지 나서서 파계재라 표시하고 있는 부분은 파계사 뒷부분에서 주능선이 남쪽으로 조금 불거져 나온 곳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면 이 부분은 능선이 낮아진 곳이 아니라 오히려 급등하는 구간이다. 주능선이 장꼬방봉을 향해 치솟기 시작하고, 거저산에서 올라 온 가지능선이 치솟아 오르는 경유점이다. 높이가 무려 935m나 된다. 재라기보다는 봉우리로 오해될 정도로 두드러진 지형인 것. 그래서 파계사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우뚝 치솟은 그것이 장꼬방봉(세칭 파계봉)이 아닌가 드물잖게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옛 어른들이 '물불산'이라 잘못 지목했던 것도 이것 아니었나 싶다. 봉우리처럼 보이면서 물불골의 뒷담에 해당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다. 마당재(948m), 마당재는 남사면의 부인사 일대와 북사면의 부계 남산리를 연결한다. 파계재에 이은 또 하나의 중요한 통로. 가산서 온 주능선이 마당재에 도착하기 직전 헬기장 터가 있다. 라. 미정재(963m), 1087m봉은 주능선이 주봉을 출발해 서쪽으로 달리며 느지미재, 삼성봉(서봉) 등을 거친 후 다시 한참 추락했다가 솟아오르는 봉우리이다. 1087m봉을 지나 서쪽으로 더 가면 주능선은 990m대로 낮아지고 가장 낮을 경우 963m까지 추락한다. 이 제일 낮은 곳에 '미정재'가 있다. 마. 느지미재(오도재 1080m), '느지미재'라는 이름은 흔히 '오도재'라 부르는 그것이다. 하지만 그 밑 마을인 용수동 사람들은 그걸 전통적으로 느지미재라 불러 왔다고 했다. 오도재란 명칭은 그 너머의 오도암에서 따 등산인들이 붙인 이름인 듯했다. 바. 장군메기(1128m, 생부처메기), 주봉과 미타봉 사이에 있는 재의 이름은 좀 복잡하다. 북사면의 백학마을 사람들은 '생부처메기'라 불렀지만, 남사면 사람들은 '장군메기'라고 했다. 생부처메기는 그곳에 높다랗게 서 있는 석불상에 인연한 이름일 터. 장군메기라는 호칭에는 이곳 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던 지역민들의 기억이 깔려 있는 듯 하다. 재 북쪽에는 '장군수'라는 샘도 있다고 했다. 장군메기는 등산 열풍으로 급부상한 것으로 관측됐다. 주봉과 미타봉(동봉) 사이에 있는 장군메기는 높이로 봐 재가 형성되기 곤란한 곳. 주민들도 "옛부터 길은 있었으나 오르기 힘들어 자주는 안다녔다"고 했다. 그런 약점까지 뛰어 넘으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등산 붐 덕분. 남사면에서 올라가 북사면의 치산계곡으로 통하기 좋다는 것이다. 한 등산인은 "여름철엔 미타봉으로 올라갔다가 이 재를 통해 공산폭포에 내려가 목욕한 뒤 저녁녘에 돌아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사. 도마재(신령재 955m), gps 상 960m 도마재는 영천 치산리 등의 사람들이 대구로 다니던 통로였다. 그곳 사람들은 너무도 몸에 익게 다녔던 길이라 이 길과 그 이름에 대해 한낱 의심스러워하는 바도 없었다. 치산계곡의 동애골을 타고 올라가 이 재를 넘으면 동화사 폭포골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도마재는 북사면으로 아주 완만한 경사지까지 갖춰 이젠 등산코스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아. 바른재(850m), 동사면의 '폭포골' 끝에 있는 '바른재'는 거조암골로 통하는 길목. 하지만 늘어난 자동차에 역할을 넘겨줬는지 재 바로 너머 약수터 즈음에서부터 길이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자. 느패재(△897.6 능성재 820m), : 대구시 동구, 영천시 청통면, 경산시 와촌면 ; 경산시 와촌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며 옛날 포항행의 큰 길이라 한다.(국토지리정보원) 느패재도 '능성재' '능선재'로 엉터리 표기되고 있었다. 대구-경북의 공원관리사무소가 곳곳에 안내판을 붙여 엉터리 이름을 널리 전파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 더욱이 느패재는 위치 표시에서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영천 신녕과 청통 노인들은 '느패'라는 것이 주능선 동사면의 은해사 골 제일 안쪽 운부골에 있는 땅 이름이라고 했다. 주능선 바로 밑에 있으면서 여러 산줄기들에 둘러 싸여 평평하고 널따란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 얼마 전까지도 몇몇 농가가 그곳에 살면서 밭을 일궜다고 전했다. 그 위에 있는 재가 바로 느패재. 이 점은 그곳으로 나무하러 다닌 적 있다는 노인들에 의해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되는 공통의 사실이었다. 대구 공산쪽 어르신들은 "이 재는 느패재로 불리거나 동국여지승람에서처럼 능패령(能覇嶺)이라 불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느패골이라는 골도 있다고 했다. 지금 골프장이 있는 골이 그것. 이 골은 본래 백안동의 동네 산이어서, 논에 거름으로 넣을 풀을 베거나 나무를 하는 등 동네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활동 터전이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 마을 출신 송상무씨는 "봄철에 특정한 날을 잡아 동네에서 산신제를 올린 뒤 동시에 풀베기를 시작하곤 했었다"고 기억했다. 서사면의 느패골(골프장골)과 동사면의 은해사골 및 거조암골을 이어 온 느패재는 등산이 아니라 주민의 생활에 꼭 필요한 오래된 통로였다. 위치상으로도 갓바위와 도마재 사이 5km 구간의 중간에 위치해 실용성이 더 높았을 터. 신녕향교 하 도 전교는 "군위-우보-고로-신녕 사람들이 대구로 가는 주 통로가 느패재였다"며 "그 길을 유지하기 위해 동네 일꾼이 '팔공산 길 닦으러 가이소' 하고 외고 다녀 사람을 모았었다"고 기억했다. 포항 가 소금 사서는 신녕 와 자고 느패재 넘어 대구로 팔러 가던 옛 얘기도 나왔다. 공산쪽 마을의 권오식 노인회장은 "옛날에는 선본사 물품들도 모두 느패골-느패재를 통해 운반됐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골프장 건설로 서사면의 길이 끊김으로써 이 재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골프장 쪽 길은 낙엽에 덮이고 흘러내리는 흙에 묻혀 길 줄기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동편 운부골로 난 길도 걷기가 쉽잖아, 골 안에 있다는 '느패'라는 곳을 확인하려 접근을 시도했지만 산돼지에 놀라 물러서야 했다. △넓은 곳이어서 느패로 불렸을 것이라는 추측과 △늪 같은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으리라는 추측 및 △능패령에서 느패령으로 변화하면서 생겼으리라는 풀이가 제시됐다. 차. 선본재(820m); 선본사 안의 금당골을 따라 올라가면 주능선이 800m 수준까지 낮아지는 구간이 나타나고, 등산 지도들은 이를 선본재라 표기해 놓고 있다. 그러나 그 낮은 구간의 양쪽으로는 절벽 같은 급경사가 쏟아져 내려 사람 통행이 불가능하다. 모양만 재일뿐인 셈이다. 8.유산기] ![]() ![]() 경상도지역의 산 가운데 대구의 진산이라는 팔공에 가보지 못했던 차에 팔공산종주를 기획한 산악회에 합류하여 다녀오기로 한다. 팔공에 유명하다던 공산팔경(公山八景:無心峰<비로봉> 흰구름, 祭天壇 소낙비, 적석성(積石城.公山城) 밝은 달, 百里嶺 쌓인 눈, 錦屛墻 단풍잎, 浮屠庵 폭포, 藥師峰 새벽별, 桐華寺 저녁 종소리)중의 하나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은근하였고. 날씨를 나중에 살펴보니 일주일 전에 11mm의 강수량을 기록했던 탓인지 능선 상에는 눈이 쌓였고 음지는 얼어붙어 위험했었다. 과연 백리령 쌓인 눈은 만끽했다 할 수 있을까? ![]() ![]() ![]() ![]() ![]() ![]() ![]() ![]() ![]() ![]() 서거정은 '대구 10경'의 하나로 '公嶺積雪'(팔공산 능선에 쌓인 눈)을 들었다. 첩첩 산줄기 공산이 천 길인데 公山千丈倚峻層 하늘 가득 쌓인 눈이 이슬까지 맑게 하네 積雪漫空沆瀣澄 신령이 무심찮음 이로써 알겠으니 知有神祠靈應在 매년 정월 원삼일에 풍년을 여는 구나 年年三白瑞豊登 反骨시인 매월당은 '팔공산을 바라보며'(望公山)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험준한 공산이 우뚝 솟아서 公山峻聳嶸 동남으로 막혔으니 몇 날을 가야할꼬 却東南幾日程 이 많은 풍경을 다 읊을 수 없는 것은 多少風光吟不得 초췌하게 병들어 살아가기 때문일세 只緣憔悴病中生 이 시인처럼 마음의 병이 들고, 육신이 쇠약하여 갈 수 없기 전에 가보고 싶은 산야를 누벼보는 것도 그 또한 지극한 즐거움이 아닐까? 가기 전에 날씨는 미처 살피지 못했어도 이곳저곳 웹을 탐색해보니 대구매일신문의 다음 기사가 가장 정확한 것으로 생각되어 자료로서 옮겨두며, 지명 유래에서도 국토지리정보원이 아닌 매일신문의 기사에서 인용하였다. 다만 산행기록은 기존의 이정표를 존중하여 기록하는 것이 후답자에게 참고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은 http://www.imaeil.com/“[八公山下] 팔공산을 天山으로”에서 인용 “흔히 말하는 팔공산의 주능선은 가산(901m)에서부터 주봉(1193m)을 거쳐 관봉(852m)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 주능선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16개의 중요한 산줄기들을 내려 보낸다. 동서남북 방향에 각 4개씩. 그 줄기들 사이에 같은 숫자의 큰 골짜기가 형성돼 마을들이 자리 잡는다. 서쪽부터 보자면, 주능선은 그 끝 가산에서 3개의 줄기를 낸다. 한 줄기는 더 서쪽으로 달려 또 하나의 커다란 산군(山群)을 형성한다고 소개했던 황학지맥. 두 번째는 북쪽으로 달려 의성 단밀까지 내리 뻗는다 했던 위천지맥이다. 그 서편 기슭에 5호선 국도와 금화리, 천평리(가산면) 계곡들을 분포시킨다. 동편 기슭에는 사창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산면의 마을들이 있고, 그 하류에는 군위 효령면의 고곡리가 넓은 들에 퍼져 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줄기는 남서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조그만 두무실골(동명 학명리)을 형성한 뒤 팔거천을 따라 남하하면서 5호선 국도의 동편 등성이를 이룬다. 이 줄기는 양지마을 뒷산까지 이어진다. 남원천을 사이에 두고 송림사를 바라다보는 곳. 이렇게 세 개의 줄기를 떨어뜨려 둔 뒤 주능선은 가산을 출발해 한티재로 향한다. 5km조금 넘을 이 구간은, 과장해 말해 사람 비킬 공간이 없고 빗방울조차 머물 수 없는 칼날 능선. 하지만 주능선은 출발한 지 2km도 못달려서 20km 전 구간 중 고도가 가장 낮은 부분을 선보인다. 높이 700m 이하. 그 목을 통해 남북사면을 이어주는 길이 났으니, 재가 된 목의 이름은 '선돌재'이다. 선돌(立石)이 있는 재라는 뜻. 그 선돌은 형상 따라 '할배할매바위'로 불린다. 북사면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선돌재를 넘어 동명 장을 봐 왔다고 했다. 돈 될 것이라고는 땔감밖에 없던 시절, 그 나뭇짐을 짊어지고 일대 생활권의 중심이던 동명을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치키바위(756m)로 올라서는 주능선은 거기서 제법 긴 줄기 하나를 남쪽으로 내려보낸다. 마지막 닿은 곳은 송림사 뒷산. 이 줄기의 서편이 남원리골이고 그 골을 흐르는 물길은 남원천이다. 일단 송림사 앞 동명저수지로 흘러들었다가 팔거천에 합류한다. 그런 다음 주능선은 가산∼한티재 구간 중 가장 높은 808m 봉우리를 거친 이후 786m 봉우리를 만난다. 이 봉우리로부터는 칠곡 가산면(사창천골)과 군위 부계면을 가르는 중요한 산줄기가 북쪽으로 흘러내린다. 줄기의 동쪽에 있는 남산리.동산리.대율리 등은 남천을 중심천으로, 팔공산의 중요한 주능선 대부분을 동네 앞 스카이라인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786m 봉우리는 팔공산 동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셈. 이 비중 높은 봉우리에 이름 없음이 한스럽다. 사창천골의 음지가라골 어른들은 '큰골 말랭이'라 부른다고 했다. '큰골'의 위에 있는 봉우리라는 뜻. 하지만 여기선 일단 '부계봉'이라는 임시 이름을 하나 부여해 줘 보자. 부계는 팔공산 북사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을이면서도 주능선 봉우리에 제 이름 하나 붙여 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 않은가.” 이번에도 역시 좋은산악회 팀에 합류한다. 인기 폭발하였던지 빈 좌석 하나 없이 가득 차고 지난번과는 달리 자기소개 시간 없이 산행설명 후 바로 취침모드다. 대구는 막히지 않으면 3시간 정도면 충분한 거리라 새벽3시면 도착하리라 생각하면서 너무 이른 시간에 출발시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B코스(팔공산 주차장-동봉-갓바위)로 가는 사람과의 시간을 얼추 맞추기 위해 한티재에 도착하자마자 출발을 서두른다. 부계봉(786m)에서 내려온 주능선이 한티재(약 720m)로 내려선 곳이고 이제부터 갓바위 주차장까지 약 16.5km의 코스다. ![]() 눈이 살짝 덮인 외길에는 "정상등산로"라는 표지판이 약 100m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약 20여분 후 한 봉우리를 올랐다 내려서면 헬기장이다.(841m;04시)이 곳에서 4분 내려서면 "동봉 6.2km" 라는 이정표가 있는 "파계재"다.(816m) 쉼 없이 계속 올라 약 3.6km지점에서 봉우리 하나 지나치니 일반지명으로 파계봉, 정확하게는 장꼬방봉이다. (4:25,997m) 쪼금 더 진행하면 봉우리 하나 넘어 바로 마당재헬기장이다.(4:45,979m) 또다시 오름길, 그러나 산길이 역시 좋으므로 약 15분 후 한 봉을 올라선다. 여기서부터 일부가 바위구간으로 되어 있는 톱날능선의 시작이다.(벼랑바위,5.6km지점,1050m) 이곳 구간을 지나면 미정재까지 내려서야 하고 바위가 얼어붙어 미끈거리는 것이 조심스럽다. 미정재 직전 바위를 내려서며 어둠속에 갈피를 못 잡아 동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50미터 가량 가다가 되돌아서기도 하면서 다시 東進한다. (미정재 5:49,986M) 그 후로 1시간동안 아슬아슬한 암릉 산행에 종아리엔 힘이 잔뜩 들어가고 정강이를 1번, 엉덩방아 2번을 찧으며 가능하면 동봉에서 일출을 볼 一念으로 쉬지 않고 내달린다.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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