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과 조선의 양반들
: 제주섬에 왔던 조선의 양반은 누구인가? 제주에 온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제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는 3월 내내 서울에서 제주로 일주일에 한번씩 왔다갔다했다. 김포에서 비행기 타고 한 시간 남짓, 제주에 도착해서 제주 문화 탐방 과정을 들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시간을 거슬러 조선 시대에 제주에 내려오는 것은 어땠을까? 한양에서 한 달 넘게 걸리는 여정, 험한 바다를 만나면 목숨을 내어 주어야 하는 이곳, 제주. 아무리 풍경이 아름답다고 제주섬까지 육지에서 자발적으로 내려오지 않았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섬에 올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양반들. 제주목사 286명, 현감 250~300명, 제주 판관들. 제주목에 발령받고 좌천된 기분으로 내려왔을 관리들과 조선에 바른 소리를 하다가 유배당한 선비들200여명. 오현단, 제주 연북정, 조천 비석거리에서 제주섬에 왔던 조선의 양반을 떠올린다.
오현단을 둘러싼 제주성곽을 보며
제주 시내에 자리잡은 오현단은 구도심 한가운데에 섬처럼 자리잡고 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오현단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다. 근래에 복원한 것이며 육지 방식으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쌓았던 제주성벽을 상상해본다. 탐라성을 확장하여 제주읍성의 성곽을 1.4km~1.5km 둘러쌓았으며 산지천을 해자로 삼아 안에서는 나지막하게 쌓아 적을 대비할 수 있게 하였을 터, 그러나 지금은 제주읍성 성곽 150m만 남기고 없어졌다고 한다. 그 일부가 측후소 근처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의 답사는 추후 숙제로 남긴다. 그러면 제주 성곽을 쌓았던 돌들은 어디로 갔을까? 1920년 ~1930년대 일제가 제주항 매립에 사용했다고 한다. 연배가 있는 제주 출생은 그들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 돌을 가져가면 사탕 한 개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제주항 건설에 동원되었고, 한 나라의 유적이 그렇게 허물어졌음을 증언하는 대목이다.
<재건한 제주 성곽>
오현단의 근원인 귤림서원
담벼락 넘어 제주 시내를 보면서 제주에서 자란 이들(?)은 여기에 오현고등학교가 있었고, 칼호텔 자리에는 제주여고가 있었고, 중앙 성당에는 신성여고가 있었고, 이곳이 한 때 유명했던 오현로였고.. 그들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린다. 이곳은 한때 오현재단 소유였는데, 이곳을 팔고 1972년에 오현고를 화북동으로 이전하였고, 이곳은 지금 사유지이고 이러면서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오현고등학교가 있었나? 오현단이 왜 여기에 있나?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귤림서원’이 있다.
서원이 되기 위해서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어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강학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와 ‘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향교도 마찬가지여서 공자, 맹자, 존경할 만한 선비를 모셨던 대성전과 강학 공간이었던 명륜당이 있다. 그러나 제주에는 마땅한 서원이 없었다.
제주목사 이괴는 제주의 후학 양성에 힘썼던 목사이다. 그는 고득종의 집터에 학사를 짓고 ‘장수당’(‘재’의 역할)이라 하였고, 이후 제주판관 최진남이 제주에 유배된 김정의 묘(‘사’의 역할)를 장수당 근처로 옮기고 귤림서원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이 일대가 귤밭이었다고 한다. 영주십경에 속하는 ‘귤림추색’이라 함은 이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귤밭을 배경으로 유생들이 공부를 하는 서원이었을 것이다. 서원에는 성현의 위패를 모셔야했는데, 귤림서원에는 누구를 모셨을까? 제주와 인연이 있는 조선의 선비들, 김정, 김상헌, 정온, 송인수, 송시열을 모시게 된다. 그리고 제주 유생들이 귤림 서원을 세우고자 하니 사액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귤림서원은 조선 숙종이 사액 현판을 내려준 ‘사액서원’이 된다.
오현은 누구인가?
귤림서원에 위패를 모셨던 다섯 분이 바로 ‘오현’이다. 이곳에는 제법 그럴 듯한 오현비가 서 있는데 1998년에 오현고 동창과 제주시가 협찬하여 만든 것이다. 시대순으로 돌아가며 오현을 소개해 본다.
김정: 기묘사화때 쫒겨나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분이다.
송인수: 송시열이 자신의 가문 중에서 제목목사 출신인 송인수를 추대한다. 건강상의 이유라고 하는데 제주목사는 3개월 남짓하였다고 한다.
김상헌: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이로 우리에게는 애국충절을 노래한 시조(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로 유명한 분이다. 제주 반역 사건의 안무사로 2개월 있었다고 하는데, 이 기간 동안 ‘남사록’을 썼다.
정온: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자 자결하지 못하고 덕유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먹고 지냈다고 하는 선비이다. 영창대군을 죽인 배후를 찾아야한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에게 미움을 사서 제주도에 10년간 위리안치(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고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형벌로, 조선시대의 ‘가택연금형’임)되었다.
송시열: 조선시대 노론의 대부이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국모가 세자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가 제주도로 유배갔다고 한다. 유배당한 지 111일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오현은 조선시대에 충절을 지킨 선비이고, 개인적으로도 기구한 운명이다. 그러나 제주인의 시각에서 보면 진정 제주를 사랑하고 제주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이들은 아닌 듯하다. 제주에 유배당한 이가 3명, 제주 목사나 안무사로 잠깐 와 있던 관료 2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오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원에서 ‘사’의 역할을 하여 위패를 모실 수 있는 조건인 ‘시호’(죽은 후에 임금이 내려주는 특별한 이름)를 받았기 때문이다.
제주 출신으로 한양 판윤(지금의 서울 시장)을 지내고 양평대군과도 친분이 두텁고, 제주에 잣성을 쌓는데 기여한 고득종, 백성이 고생한다고 한라산에서 진행했던 산신제를 아래에게 지내게 하고, 채찍 하나도 국가의 것이라고 두고 갔다는 청렴결백한 목사 이학동, 전복을 잡는 ‘포작’이 힘듦을 알고 평생 전복을 먹지 않았다는 목사 기건. 이들은 ‘시호’가 없어서 귤림서원에 모실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귤림서원은 조선시대 유교의 가식과 허세인 듯하여 제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귤림서원에 모신 오현은 씁쓸함을 남긴다. 고득종은 여기가 자신의 생가터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현으로 모실 수는 없었지만 후대에 ‘향현사’라는 사당을 만들어 따로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약동 목사도 이 근처에 ‘영혜사’라는 사당을 짓고 모셨다고 한다.
지나치기 쉬운 하이라이트 오현단
사실 오현단은 나란히 서 있는 조두석(도마 모양의 비석) 다섯 개다. 아무 것도 새기지 않고, 크지도 않고 소박한 작은 비석.
한때 제주 유생을 길러내던 귤림서원은 사액 서원임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 때 정리되고 만다. 그때 오현단을 세운 것이다. 주변에 주객을 전도할 만한 큰 비석들이 서 있는데, 진짜 핵심은 조두석 다섯 개다. 그리도 오현단 뒤에 있는 검양옻나무가 멋스럽게 지켜주고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오현단의 검소함과 소탈함이 제주스럽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오현단과 검양옻나무만 있었더라면 더 고풍스럽고 멋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검소한 제주돌담이 그러하듯이 제주스럽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오현단에서 눈에 띄는 것은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문구이다. 서울 성균관에 있는 송시열이 쓴 글씨는 탁본하여 옮긴 것이라고 한다.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다.’ 서원에 어울리는 문구이며, 이 글을 쓴 송시열은 노론의 대부라 할 만하다.
검양옻나무는 가을이 되면 단풍이 예쁘게 든다고 한다. 고풍스럽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되면 오현단에 다시 와야할까? 어쩌면 하얗게 눈쌓인 오현단이 더 어울리지도 모르겠다.
위패를 모셨다는 곳은 자물쇠로 걸어 잠그고, 장수당이라는 곳은 안내소로 사용하고 있고, 하얀 건물은 노인정이라고 하는데, 맥락 없이 사용되고 있다. 제주성터로 제대로 복원되고 귤림서원도 고증을 거쳐 온전하게 복원되기를 바란다.
북쪽을 그리워한 이는 누구였을까? 연북정
제주에는 정자가 별로 없다. 연북정이 유일하다. 연북정 안내판에는 ‘연북정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유배온 이들은 ‘위리안치’가 된 경우가 있고, 제한이 많아서 성루에 올라서 임금님을 그리워했을 리는 만무하다. 조선시대 바다 바로 앞에 만들어진 조천 진성의 성루임을 감안한다며 북쪽의 임금을 그리워하는 이는 제주에 발령이 난 제주목사, 제주판관, 현감들이고, 빨리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이 담겨있는 곳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연북정이 제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제주 연북정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한때는 쌍벽정(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쌍벽을 이룬다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연북정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장관이다.
연북정 앞에 동그란 마당이 있는데, 예전에 진상품 점검 장소였다고 한다. 귤도 점검하고, 전복도 점검하고, 말도 점검하던 곳. 이곳이 바로 진상품 점검지였던 것이다. 제주인은 진상품을 올리느라 온갖 고초를 겪었고, 제주목으로 발령인 난 관리들은 육지로 올라갈 날만 고대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멍 때리고, 제주 경관을 만끽하는 장소이겠지만 조선 시대에는 제주민은 제주민대로, 제주로 발령난 관리들은 관리대로 짠한 장소이다. 경치가 더 아름다워 조선시대 그들이 더 짠하다.
나를 봐 달라는 벼슬아치의 소망과 백성의 소심한 복수가 담긴 비석거리
제주 연북정 앞에는 조천 비석 거리가 있다. 비석을 여러 개 만들어 세우면 비석거리가 되는데 1960년대 이후 이곳 저곳에 비석거리들이 만들어졌다. 동네에 무엇인가 기증을 하거나 거액의 돈을 기부하면 이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워준 것이다. 그러나 화북의 비석거리와 조천의 비석거리는 시대적으로 보거나 기능적으로 볼 때 그 의미가 다르다.
조천 비석거리에 있는 7개의 비석은 조선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제주 목사들의 것이다. 제주 민란을 진압하고 주동자를 직결처분한 공로를 세운 목사, 좀도둑을 잡아 사형시켰다는 목사 등등. 나라의 공을 세운 듯하지만 제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잔혹하고 성과주의적인 벼슬아치였을 것이다. 벼슬아치 입장에서 비석은 나는 이런 사람이니 한양으로 빨리 불러달라고 대놓고 만든 비석이 아닐까?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화북포구와 조천포구만 이용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 앞에 떡하니 만들어진 비석거리는 나의 업적을 알아달라는 벼슬아치의 간절함이었다. 반면 벼슬아치가 떠나고 난 후, 비석을 보면서 뒷담화를 했을 백성들, 아예 진절머리가 난 제주백성은 비석을 긁어서 지우고, 비석치기를 하면서 소심한 복수를 하였을 것이다. 비석 곳곳에 지워져서 훼손된 자국이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
지명으로만 알고 있는 오현단, 그저 임금을 그리워한 곳이라고 알려진 경치 좋은 연북정, 비석이 많이 세워진 비석거리로 지나칠 뻔한데, 조선시대를 거슬러서 조선시대에 제주라는 섬에 오게 된 사연있는 양반들의 사연을 접하고 보니 한편으로 짠하면서 씁쓸한 마음이 교차한다. 오현단, 연북정, 비석거리에서 제주라는 섬에 왔던 조선시대 양반을 만난다.
-우당 도서관에서 이지영 작성-
첫댓글 노트에 스을슬 끄적이듯
대충 메모 하시더니
아예 훌륭한 답사기 한편
만드셨구랴ㅎㅎ
일년살이로 바꾸면
이지영의 제주문화유산답사기‘ 초고가
나올 수도 있겠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은 후기인가 교재인가!!
수업에 참석하신 분들도, 못나오신 분들도 모두 이해하기 쉽도록 자세하게 쓰셨어요~^^
선생님의 말씀을 한자도 놓치지 않고 쓰셨다니 읽을수록 놀랍고 지영님의 생각까지 더해지니 선생님의 표현대로 이지영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일치기 후기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ㅋㅋ 절묘 😁😆
측후소가 뭔지 궁금 해서 자료 찾아왔어요 https://m.blog.naver.com/kma_131/223164787593
지영님다운 후기네요 덕분에 되새김하며 잘 공부했습니다 😁😘
역시 본업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감출수가 없으시군요!! 같은 기수라는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
김천석 선생님 모친이 말씀해주신 돌맹이 하나에 사탕 한개까지도 놓치지 않고 아주 섬세하게 쓰셨네요.
김천석선생님을 이지영님이 따라 다니면서 "제주 문화유산 답사기"를 만들어 출간해 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
김천석 이지영의 <제주 문화 탐방> 이라?? 문화탐방 교재가 되려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