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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중간사 스크랩 신구약중간시대
기획실 추천 0 조회 5 14.09.22 01: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구약중간시대

                                           -바벨론포로에서 바코크바 전쟁까지(587 B.C.- A.D.135)-

 

이종록(장로회대전신학교,구약학;선창교회협동목사)

I.들어가는 말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한 주전 13세기부터 주전 6세기말까지는 아무리 어려움이 많았다고 해도, 그래도 국가는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한 주전 587년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온전한 의미의 국가를 갖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세계역사의 주도권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페르시아에서 메대로, 그리고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정신없이 바뀌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을 잃은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그것 을 후손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비록 주권국가는 없어도 민족과 종교는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으로 신앙을 지키려고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지요. 유다의 멸망 이후로 바 코크바전쟁까지의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이 시간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이 시대를 보통 [신구약중간시대]라고 하지요. 이 시기에 유다인들은 자꾸만 변하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삶의 중심인 [야웨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변 여건을 창의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더욱 풍성하게 만 들었습니다.놀라운 일이지요. 우리는 유다인들의 이러한 모습을 더듬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급변하는 시대에 신앙을 지켜가는 삶의 지혜를 그들에게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구약시대의 사상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신약으로 전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신구약중간시대]를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신구약중간시대]를 이해하지 않고는 [신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II.유다교 역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어떠한 상황에 처했으며,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주전 587년 이후부터 바 코크바 전쟁까지의 역사를 개관해보기로 하지요.


              539       522       333 323           200           70.B.C.
--------+---------+-------+---+-----------+-----------+------------
바벨론 페르시아   메대     헬라 프톨레미     셀류시드      로마

(이집트) (시리아)

 

바벨론/바사/메대


587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함락. 바벨론 치하에서 성전의식거행금지로 안식일, 할례준수에 치중.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차별대우나 어려움을 받지 않음.
539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귀환 539 고레스(바사)-바벨론정복 고레스-민족의 독자성 인정/관습과 종교인정/아람어사용.
      사마리아공동체와의 반목과 갈등.
515 제2성전건축 522 다리오(메대)
445 느헤미야,에스라귀환/유다교시작

 

헬라제국시대


333 헬라통치시작/헬라화  333 알렉산더의 승리
      헬라어사용/헬라식으로 인명과 지명의 개명/헬라의 도시법적용/

      헬라문명-헬라건축물 : 극장,목욕탕, 경기장/의술/질문과 대답에 의한 논의방법수용.
323 프톨레미의 팔레스타인 지배  323 알렉산더의 죽음
200 셀류시드의 팔레스타인 지배
      셀류시드의 통치초기에는 유다인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으나,

      셀류시드의 통치자들은 철저한 헬라주의자들이어서, 강력한 헬라화추진 /경건한 유다인들의 반발.
175 대제사장 오니아스

175-16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요수아('야손'으로 개명)-오니아스를 축출하고 대제사장직탈취.
       메넬라우스-시리아왕에게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 매매.
       안티오쿠스의 거짓 사망소식에 야손의 대제사장직 복귀/메넬라우스추방
       안티오쿠스의 분노와 메넬라우스의 복귀.
169 안티오쿠스-예루살렘성전약탈/강력한 헬라화추진/유다인들의 반발
167 안티오쿠스-예루살렘에서 제우스신숭배/다니엘서
      모데인의 제사장 맛다디아의 반발로 인한 마카비혁명/하시딤들의 참여
164 안티오쿠스 사망


하스모니안왕가


164 유다 마카비-성전수복(12월25일:수전절[하누카]),예루살렘제의 회복, 대제사장 메넬라우스 제거
      하시딤들과 하스모니안왕가와의 갈등
      하시딤들은 시리아가 임명한 알키무스의 대제사장직 인정
      유다 마카비는 시리아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원함
160 유다 마카베오 죽음
153 요나단-대제사장 겸임/하시딤들의 실망-바리새파출현
      하스모니안왕가는 다윗의 혈통도 아니고, 대제사장 혈통도 아니었기에
대제사장직 겸임은 유다인들의 반발을 샀다.
143 요나단 피살됨
140 시몬-대제사장 겸임/하스모니안 왕조건설/평화로운 시대
      하스모니안왕가의 세속적인 통치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사해로 은둔
134 시몬 피살됨
134 요하네스 히르카누스즉위(~104)-대제사장직겸임/바리새파의 비판
128 히르카누스-사마리아 성전함락
107 사마리아의 멸망
104 아리스토불즉위/[왕]칭호사용-대제사장직겸임/바리새파의 비판
103 요나단([알렉산더 얀네우스]로 개명)즉위(~76)/대제사장직겸임
      헬라주의자인 요나단의 대제사장직 계승에 유다인들은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폭동이 일어났다.

      요나단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해서 800명을 체포해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했다.
76 살로메 알렉산드리아 여왕(~67)/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에 임명
     히르카누스2세와 아리스토불2세의 대결


헤롯왕가


37 대헤롯(~4) : 하스모니안왕가의 사위/하스모니안왕가계열제거/반대자제거
4 아켈라오(~A.D.6) : 유다,이두메, 사마리아의 분봉왕
   아켈라오의 통치지역은 A.D.6부터 로마총독의 관할에 들어갔다.
4 헤롯 안티파스(~A.D.39):갈릴리,베뢰아의 분봉왕
4 필립(~A.D.34):북동 요르단의 분봉왕
41 헤롯 아그립파(~44):유다왕

 

로마총독의 통치


44 로마의 직접 통치
54 총독 펠릭스(~68)
60 총독 베스도(~62)
66 유다전쟁(~70) 52 네로(~68)
     지방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의 착취와 입성하는 로마군대의 유다인멸시로 인해서 유다인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70 예루살렘 정복과 멸망 69 베스파시안(~79)
73 마사다 요새 함락
132 바 코크바 전쟁(~135) 117 하드리안(~138)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의 성전터에 쥬피터신전을 건축하도록 하고, 할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이 이에 반발해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을 기념하는 동전을 만들었다. 희생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고, 봉기를 일으킨 해를 기원으로 연대를 계산했다. 랍비 아키바는 봉기의 주도자인 바 코크바를 [별의 아들],즉 메시야로 인정하고,거부하는 사람들, 특히 유다 기독교인들을 체포해서 처형했다. 그러나 바 코크바는 체포되어서 처형되었고, 아키바도 처형되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 폐허 위에 로마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쥬피터 신전을 건축하고,유다인들의 거주를 금지했다.


III.유다인들의 자세


A.국제정세수용


앞에서 말한 [유다교의 역사]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유다인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점령하는 강대국들에 대항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 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대국들에 저항하기보다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정복할 때, 유다인들은 알렉산더에게 항거하는 대신, 오히려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유다인들은 많은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후의 통치자들에게도 즉각적인 환영을 표함으로써, 여러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시대에는 유대인들의 병역이 면제되었고, 안식일에는 관청이나 재판에 출석하 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규칙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환영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 정파별로 입장차가 드러나서 때로 내부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고, 반감이 고조되고 전지역으로 확산되어서 유다전쟁이나 바 코크바 전쟁과 같은 유다독립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대체적으로 유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국제정세 를 수용하는 현실적인 결단을 했습니다.

B.외국문물수용


유다인들은 강대국의 문물과 사상도 별 거부감없이 수용했습니다. 물론 안티오쿠스4세의 지나친 헬라화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헬라를 비롯한 강대국들의 통치자들이 유대인의 관습과 종교에 비교적 호의적이었고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통치시대에는 결정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사상을 수용했으며, 특히 페르시아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사상과 결합시켜 [묵시]를 형성해냈습니다. 헬라시대에는 헬라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야웨신앙을 표현했고,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교육방식을 개선하기 위해서 헬라인들의 [문답식 교육방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디아스포라 유다인 공동체에서는 [필로]와 [요세푸스]와 같은 사람들이 스토아철학과 같은 헬라의 이성중시 사상을 받아들여서, 야웨신앙을 표현해 냈습니다.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독특한 율법은 주변 세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윤리적인 규범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헬라의 사상은 유다인들의 성경연구도 촉진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유다인들이 야웨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를 보게 됩니다.
[알렉산더의 동양진출로 서구의 사상이 동양에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사상이 서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원래 헬라에는 군주의 신권설이나 신국설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알렉산더의 동양진출로 이러한 사상이 서구에 알려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황제숭배사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동양의 신비종교들도 서양에 영향을 주었는데, 바벨론 사람들은 천체의 운행을 연구했고, 인간의 운명이 천체의 운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에 알아냈지요. 신의 죽음과 부활, 황홀경 ,구원, 구세주, 신적 계시들의 개념들도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C.야웨신앙고수
이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믿는 야웨 하나님이 참신이시고,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임을 역설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의 문물에 동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보다 선진의 문물을 수용해서, 유다인들의 고유한 신앙을 표현해냈습니다. 이방의 철학을 빌어서, 유다인들의 독특한 신앙을 다른 세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필로는 로고스 개념을 빌어서 구약의 하나님을 설명했습니다. 말이 쉽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IV.유다공동체


그러면 이제는 유다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지요. 여기서는 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것보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집단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A.팔레스타인 유다공동체

1.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율법학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유다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인 사회의 귀족들로서, 정치가들이었고,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사두개인보다 바리새인이 더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1)사두개파
사두개파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사두개]라는 말은 솔로몬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들은 왕정 시대와 유배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안티오쿠스 4세와 하스모니안왕가시대에는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으며, 성향은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영혼불멸, 천사론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극히 현실 타협적이어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유다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입장을 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독립을 꾀하는 셀롯당의 사람들에게는 증오의 표적이 되었지요. 사두개파는 유다인들의 봉기를 막는데 힘을 썼지만, 결국 주후70년의 유다전쟁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이 전쟁에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두개파는 괴멸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세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2)바리새파


바리새파는 마카비혁명에서 유래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다 종교탄압에 반발해서 경건한 유다인들([하시딤])이 이 혁명에 동참했는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스모니안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제의를 회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직을 겸임하고, 그것을 세습하게 되자, 이에 반대해서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가 되었 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입장차를 보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는 달리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집단보다 바리새파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지요. 주전 2세기 이후의 유다인 사회는 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제와 장로들이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데, 나중에, 기원전1세기에는 서기관들이 들어오게 되고, 후에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예수도 그들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이 바리새파계열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처럼 현실 타협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셀롯당처럼 폭력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야웨신앙을 파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를 [비폭력저항]으로 규정할 수 있겠지요. 바리새파는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서 힘을 기울였으며, 당시 6000여명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다는군요. 이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교제를 했으며, 물건구매도 공동체 내에서 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파]하면 비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만, 강대국들의 지배하에서 이들이 야웨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셀롯당


셀롯당은 과격한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달리 그들을 지배하는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만을 왕으로 인정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얻고자 했습니다. 주후 6년 아켈라오 해임 후에 로마가 직접 유다를 통치했는데, 유다인들에게 호적을 등록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실상은 세금징수를 위한 것이었지요. 여기에 유다인들이 반발했는데, 바리새파에서 분파한 셀롯당(리 더:갈릴리 유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셀롯당이 있었지요(시몬).

3.엣세네파와 쿰란공동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유다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종교지도자들이면서 동시에 정치지도자들이었다면, 엣세네파와 쿰란공동체는 현실세계에서 뒤로 물러나 사해근처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았습니다.


1)엣세네파


대략 400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결을 강조하고, 재산을 공유했으며, 비밀유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영혼불멸과 운명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판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2)쿰란공동체


쿰란공동체는 엣세네파의 핵심그룹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엣세네파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는 [의의 선생]에 의해서 창시되었으며,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성경필사와 성경연구, 주석작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남긴 [사해문서]들은 너무나 유명하지요. 이들은 철저히 서열을 중시했는데, 사제들이 최상층이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독의 후손들로 알려졌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과는 달리 [쿰란축제력]을 사용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반목하게 되었지요. 또 대제사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하스모니안왕가에 대해서도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의를 말합니다. 신자([빛의 자녀들])의 삶을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어둠의 자녀들])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보았고, 자신들이 그 투쟁의 전열에 서 있다고 생각했지요. 쿰란공동체는 부활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종말론적인 희망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와 메시야적인 왕, 메시야적인 대제사장의 도래를 기다렸습니다.


B.팔레스타인 유다인과 디아스포라 유다인


유다인들은 팔레스타인에도 살았지만, 여러 국가들에 흩어져서 사는 디아스포라들도 많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강력한 유다인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다인공동체에 비해서 당시의 조류에 비교적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의 철학사조들도 쉽게 수용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헬라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자유로운 자세를 보였습니다. 팔레스 타인의 유대인들이 부활과 종말론, 메시야대림사상을 갖고 있었다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불멸과 윤리를 강조하고, 율법을 도덕적 계명으로 재해석해냈습니다. 정경형성에 있어서도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여러 책들을 포함시켰습니다. 마카비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기 시작했으며, 본질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유다인들과 다름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야웨종교를 이방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가운데 필로는 헬라의 스토아철학(특히 로고스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야웨종교를 새롭게 해석해냈습니다. 요세푸스도 많은 저서를 통해서 유다교를 소개했습니다. 헬라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디아 스포라 유다인들은 헬라화 되어가고 또 헬라어를 사용함으로써 히브리어를 잊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야웨신앙을 확고히 가르치기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셉튜아진타](LXX,칠십인역)이지요.칠십인역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는 위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칠십인역성경은 후에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더 많이 사용되어서,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유다인들은 다른 역본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퀼라, 데오도션, 심마쿠스들의 헬라어 역본들이 만들어졌지요.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도 유다인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해내고, 또 전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C.사마리아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의 유다인 포로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함으로써, 사마리아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민족성과 야웨신앙에 있어서 정통성시비가 벌어진 것이지요. 초기에는 사마리아 공동체가 더 강력했지만, 후대에 가면 예루살렘 공동체가 강해져서,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세운 그들의 성소는 주전 127년에 히르카누스에 의해서 파괴되고 맙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데, 이것을 [사마리아오경]이라고 합니다. 이들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V.유다교의 특징들

1.[예언]에서 [묵시]로


신구약중간시대에 유다인들은 많은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이 기록들은 [외경]과 [위경]으로 분류되지요. 이 기록들 가운데 [묵시 문학]이 들어있습니다: 에녹서, 모세의 승천기, 에스라4서, 바룩의 묵시록, 12족장의 유언, 쿰란문서들. 묵시문학은 주전 2세기에서 주후 1세기 사이에 나타나는데, 페르시아와 헬라사상의 영향을 받았지요.[묵시](묵시를 가리키는 용어로는,[묵시적 종말론 ],[묵시문학],[묵시운동]들이 있습니다)는 이 세상을 악으로 가득찬 것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노력의 무위함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종말의 때에는 하나님의 군대와 악한 세력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우주적인 차원에서 종말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결국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고 의인들은 살아남게 되지요. 이런 시나리오를 갖는 [묵시]는 지상적인 메시야왕국을 말하는 [예언의 실패]로 인해서 나타났으며, 예언과는 달리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개방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측면도 있지요. 그리고 결정론적인 역사관을 보여줍니다. 유다 묵시사상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 코크바전쟁이 끝난 다음, 유다교는 묵시사상을 거부하고, 회당에서 묵시서를 읽지 못하게 하는데, 그래서 묵시사상은 유다교가 아닌 기독교로 이어지게 되지요 .묵시사상은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희망이 성취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신앙형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유다인들의 투철한 신앙계승의 모습을 보게 되는군요.

2.[성전]에서 [회당]으로


예루살렘성전이 여러번 파괴되고, 또 유다인들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삶으로써, 제사드리는 것이 사실상 어렵게 되자, 유다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회당을 짓고, 회당중심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당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대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회당은 유다인 자녀들의 교육의 장이었지요. 나중에는 팔레스타인에도 회당들이 세워졌습니다. 회당 은 바로 유다인들이 찾아낸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이지요. 여기서 기독교도 나오지요.

3.[말씀선포]에서 [말씀기록과 연구]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직접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가면 과거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그것을 보존하고 정리해서 모으고, 모아진 것들을 연구하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엄격한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들은 이 분야의 전문 가들이었지요.랍비들의 작업에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할라카]와 비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하가다]가 있습니다. 할라카는 후에 [미쉬나]로, 하가다는 [게마라]로 묶어지고, 할라카에 들지 못한 후대의 것들을 따로 모아서 이것을 [토셉타](증가분)로 부르게 되지요. 이것들을 모두 묶은 것이 바로 [탈무드]라는 것이지요.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가 있는데, 바벨론 탈무드가 후대의 것이고, 분량이 더 방대합니다. 이러한 유다 랍비들의 작업과 전승이 유다교를 풍성하게 만들어왔지요. 이것도 생 존의 요인이지요.

VI.나오는 말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신구약중간시대]의 유다인들의 삶은 바로 [이방문화와의 만남과 대결]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의 문물을 크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본질적인 [야웨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 속에 살면서, 이방의 문물을 수용해서, 자신들의 독특한 야웨 신앙을 주변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해 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과 그들의 신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시대가 변하면, 그에 따라 야웨신앙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함으로써, 자신들도 살리고, 야웨신앙도 지켜온 유다인들. 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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