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추천 0조회 023.12.20 23:18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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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6편 진리의빛.보조.기조실 23.12.20 07:21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6편 (42:36)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6편 < 수련자로서 첫 해 > 황홀한 축제가 끝나고 다시 일상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시간에 따라 바뀌는 공동체의 다양한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사랑하는 언니 폴리나, 예수의 아네스 수녀님과 함께 식당 일을 했다. 한편으로는 언니 곁에 있는 것이 위로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괴로웠다. 서로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이 우리 두 사람에게 매우 컸기 때문이다. 나는 폴리나에게 내 마음을 기꺼이 털어놓고 내 생각을 그녀와 나누고 싶었지만, 한편 침묵을 요구하는 수도원의 규칙을 충실히 지키고 싶었다. 나는 지금 가르멜에 와 있으며 더 이상 뷔소네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으로서 나는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수련 첫해는 무엇보다도 3대 서원을 준비하는 데 소요되었다. 수도원의 일상생활은 그것을 실천하는 데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다. 착복 이후 가난한 생활을 익힐 만한 기회가 많았다. 청원자 시절에는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배정된 아름다운 물건에 대해 무척 기뻐했다. 어느 날 밤 나는 방에서 급한 볼일이 있어 선반 위에 놓아둔 작은 램프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끝기도 후에 대 침묵은 절대적인 것으로 그런 것에 대해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혹시 어떤 수녀님이 실수로 가져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예수님이 내게 원하시는 바를 곧 알아차렸다. ‘가난은 좋아하는 물건을 포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도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듯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적 빛이 하나 떠올랐다. 이렇듯 중요한 깨달음을 간직하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램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불편하고 보기 흉한 사물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작고 예쁜 물병이 내 방에서 치워지고, 그 대신 못생기고 흠 있는 것이 돌아왔을 때 진정으로 기뻐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를 정당화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내가 거둔 첫 승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작은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 수녀님이 창문 뒤쪽에서 깨진 작은 꽃병을 발견했다. 수련장 수녀님은 내가 그것을 떨어뜨렸다고 믿었으며,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나는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다짐했다. 겸손에 대한, 이 작은 연습은 교만을 위해서 유익했지만 내게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나의 좋지 않은 자애심과 안일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아주 작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나는 수녀님들이 잊어버리고 그냥 둔 망토를 개었으며 말없이 그것들을 정리했다. 이러한 작은 일들을 수없이 했다. 그리고 많은 병고를 겪으면서 성격까지 괴팍해진 나이 많은 페트라 수녀님을 돌봐드렸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그녀를 피하려 했는데, 아무도 그녀를 흡족하게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녁 식사 때마다 페트라 수녀님을 식당으로 모셔갔는데, 그것은 일정한 절차에 따라 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수녀님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만일 내가 너무 빨리 가거나 또는 너무 느리게 수녀님을 인도하면 수녀님은 꾸지람을 했는데, 그럴지라도 나는 수녀님을 보고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런 것들이 내게는 육체적 참여 행위보다도 더 유익했다.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나를 교만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이러한 참여 행위를 내게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느님은 사소한 행위 뒤에 사랑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때 나는 내 영혼을 비수처럼 찌르게 될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아빠는 착복식이 있은 지 4주 후 1889년 2월 12일에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고, 캉에 있는 착한 목자 요양원에 입원했다. 아빠는 환각 상태에서 무시무시한 전쟁터와 대학살 현장을 보았고, 대포 소리와 북소리 등을 들었다. 아빠는 당신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빼어 들기도 했다. 한순간이라도 혼자 있게 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 밖에도 그에게는 늘 친절한 보살핌이 필요했다. 요양원에서 아빠는 코스타드 수녀님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그녀는 정신병원의 책임자 수녀였다. 아빠의 정신병 요양소 체류는 우리 가족에게 심한 굴욕이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그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빠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얼마 안 되어 레오니와 셀리나는 잠시 이사를 했다. 1889년 2월 19일부터 5월 5일까지 착한 목자 요양원에서 가까운 빈첸시오 수녀원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들은 새로운 소식을 듣기 위해 매일 요양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레오니와 셀리나는 일주일에 한 번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아, 나는 아직까지도 고통스러운 그날의 흉보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말로는 내 고뇌를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다. 이제 우리 가족은 파괴되었다. 동정 어린, 또한 악의가 포함된 리지외의 소문은 계속해서 퍼져 나갔으며, 가르멜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들려왔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더욱 극심하게 했으며, 폴리나와 마리, 그리고 나를 밤낮으로 괴롭혔다. 이러한 사탄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아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겪은 내적 고통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며, 나는 그것을 묘사하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레오니와 셀리나랑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빠는 정신이 맑았을 때 어떤 의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명령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지요. 이제는 순종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왜 이런 시련을 내게 주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굴종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 최소한의 것이나마 겪어야겠지요.” 아빠는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당신의 자녀인 우리 역시 아빠와 함께 쓴잔을 마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빠와 함께한 고통의 시간이 우리 삶에서 가장 풍요로운 것이었음을 언젠가 천국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시련과 고통은 우리 마음을 자애심과 이기심, 그리고 교만으로부터 정화시켜 주었다. 우리는 그만큼 내적으로 자유로웠다. 나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했다. 이제까지 겪은 모든 경험을 토대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행복을 느꼈다. 어린 시절과 관련된 모든 것과 나는 결별을 해야만 했다. 뷔소네의 임대 계약이 만료되었으며 다시 갱신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던 것이다. 이시도르 외삼촌은 약국을 팔고, 리지외에 다른 집을 샀다. 외삼촌은 캉에서 돌아온 레오니와 셀리나를 당신 집에 받아들였다. 외삼촌 가족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니스 별장에서 여름을 보냈다. 그들은 레오니와 셀리나도 그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초대했으며, 아빠는 다시 요양소로 가셔야 했다. 1889년 7월 17일 요양소의 한 간호사가 원장 수녀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긴 시간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의 두 딸 레오니와 셀리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두 딸이 시골 니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좋습니다! 내 딸들에게 외삼촌이 좋다고 할 때까지 그곳에 오래 있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딸들이 나 때문에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아요. 나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이렇듯 존경하올 그분의 인격은 위대하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살아있는 각론이었습니다. 그분은 정말 경탄할 만한 분입니다. 그분은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나 최고로 여깁니다. 그분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헌신하는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가르멜에 있는 두 언니에 대한 가족적 유대는 동료 수녀님들에 대한 보편적 관계로 점점 더 양보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제 부득이 마리와 폴리나를 그들의 수도명으로 불러야 한다. 마리는 그녀의 세례명을 그대로 가지면서 예수 성심의 마리 수녀라고 불렸으며, 폴리나는 예수의 아네스 수녀라는 이름을 받았다. 우리는 수도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길을 발견해야 하며 충실히 그 길을 가야 한다. 이제 내게는 예수님밖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가 헤어진 지 몇 달 후에 셀리나가 방문했다. 셀리나는 선물로 담쟁이 잎을 가지고 왔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뷔소네의 정원을 둘러보면서 나를 위해서 딴 것이었다. 우리가 즐겨 나눈 대화의 주제는 이러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자.’ 우리는 또한 천국에 대한 이야기로 서로를 위로해 주었다. 흩어진 우리 가족은 궁극의 그리고 영원히 그곳에서 다시 결합하게 될 것이다. 나는 뷔소네에 대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통은 빨리 사라져. 천국에서는 뷔소네의 잔재가 여기 지상에 남아있든 또는 천국으로 옮겨지든 세상에 관한 한 마찬가지 아니겠어? 마치 아무것도 갖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야 해. 우리는 모든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소유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야.” 이제까지 내가 써 내려온 것은 수도 생활 초기 2년 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통해 깨달은 하느님 은총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을 쓸 수 있을 것이다. < 긴 약혼 시절 > 착복과 서원 사이의 시기를 수련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상대방을 서로 그리워하며 결혼식의 응답을 통해 최종적으로 서로에게 결합하고자 하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약혼 시절에 비유한다. 관습적으로 수련기는 1년이다. 이렇게 볼 때 1990년 1월 11일에 가르멜 수도원에서 나는 최종적으로 예수님과 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날을 고대했다. 그러나 수련기가 끝나갈 무렵 서원 서약 청원을 막는 사건이 일어났다. 원장 수녀님은 지도 신부님이 내 청원을 분명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드라트루에트 신부님은 내가 서원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장애물은 아빠의 병환이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무척 실망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처음에는 이 엄청난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나는 기도에 파묻혔다. 어느 날 서원에 대한 내 열망 속에는 이기심이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나를 봉헌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제부터 내 소망을 이루고자 예수님을 강요하지 말자.’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이렇게도 중요한 최종적 결합을 위해 충분히 준비했는가?’ 나는 더 이상 이기적 열망 때문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며, 유감스럽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와는 달리 열심히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오, 나의 하느님! 내가 서원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단지, 내 실수 때문에 당신과의 결합이 지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많은 아름다운 보석으로 멋지게 장식된 결혼 예복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 예복의 장식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때가 되면 나를 영원히 당신과 결합시키고자 하시는 당신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 내 사랑하는 분이시여!" 그날 이후 나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공동체 생활은 보석을 모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예수님은 내 마음속에 남한테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한테서도 무시당하고자 하는 동경을 심어주셨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몰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예수님의 영예,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나 자신을 그분께 넘겨드린다. 이렇게 기다리는 중에 공동체에 연중 피정이 있었다. 나는 피정을 지도하는 블리노 신부님과 면담할 때 내 희망을 털어놓았다. 곧 나는 위대한 성인이 되고자 하며, 가르멜 수도원의 개혁자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길 원한다고 고백했다. 블리노 신부님은 대단히 놀랐다. 그는 나의 고백을 교만하고 불손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소망을 적당히 낮추십시오.” “신부님, 왜 그래야 하지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오직 하나만을 원했다. ‘내 삶에서 예수님께 첫 자리를 드리자. 이제 내 안에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셔야 한다.’ 신부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피정 지도자의 지적에도 나는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으며, 내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셀리나는 나를 가장 잘 이해했는데, 왜냐하면 그녀도 그런 열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셀리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언니! 성덕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꿈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야.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이야. 언니는 알고 있잖아? 예수 성심에 대한 내 사랑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는 신랑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온전히 내 것이고, 나는 또한 온전히 그분의 것이라고 생각해. 나는 예수님과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얼굴을 맞대고 그분을 뵙는 것이 허락될 때까지 그렇게 할 거야.” 행복한 시간이 언제일지는 오직 예수님만이 아신다. 나는 날마다 그림 속에 있는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을 관상하는데, 그렇게 한 지가 벌써 두 달이나 되었다. 주님의 얼굴은 매 맞은 흔적이 완연했으며, 그의 눈은 내려앉았다. 우리가 요즘 읽고 있는 사순절 성경 구절은 이 그림에 대한 열쇠와도 같았다. 그것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예수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는 고통의 사랑,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를 받았으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은 고독한 아빠와 우리 친척들의 처참한 시련 위에도 밝은 빛을 던져주었다. 이러한 생각을 셀리나에게 써 보냈다. “아빠, 아, 셀리나!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언니에게 말할 수는 없어. 예수님은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안에서 가장 훌륭한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어. 아빠가 예수님과 그렇게 비슷해진 것을 어찌 한탄할 수 있겠어. 아빠의 얼굴도 사람들 앞에서 망가졌으며 굴욕을 당했어.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야. 사랑하는 언니, 우리는 고아가 되었지만, 사랑 안에서 기도할 수 있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래,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야!” 수련기가 8개월이나 연기된 후 드디어 드라트로에트 신부님한테서 편지가 왔다. 이제야 서원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주교님에게 써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공동체는 동의했다. 위고넹 주교님은 1890년 8월 초 동의서를 보내주었다. 관습에 따라 서원식은 두 번 거행되었다. 첫 번째는 1890년 9월 8일에 수도원 봉쇄 구역 안에서 거행되었고, 두 번째는 9월 24일 친척과 친구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거행되었는데, 일명 베일 축제라고 불렀다. 나는 1890년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개인 피정을 통해 예수님과의 결혼식 준비를 했다. 이 열흘 동안 전혀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지난번 피정 때처럼 내적으로 메말랐으며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예수님은 나를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이 보였다. 묵상할 때 한결같이 잠이 들었다. 그러나 부모님 품에서 잠든 아기가 깨어있는 아기와 똑같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잠든 당신의 아이를 똑같이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분은 내 모든 약점을 알고 계신다.’ 피정 동안 사랑하는 아빠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공식적인 서원식을 위해서 나와 셀리나는 한 가지 일을 꾸몄다. 아빠를 캉에서 모셔 오는 것이었다. 셀리나는 아빠의 쇠약한 건강 상태 때문에 서원식이 끝날 무렵 축하식에 참석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아빠는 면회실 창살 바깥에서 내게 축복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 서원식 전날 밤, 알 수 없는 의혹에 휩싸였다. 그것은 갑자기 육지를 덮쳐 모든 것을 쓸어가는 폭풍과도 같았다. 나는 십자가의 길을 하던 중에 내 성소를 의심하게 되었다. ‘하나의 망상이나 꿈 또는 도피가 아닐까?’ 나는 가르멜의 삶이 시련과 고통에도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악마는 이렇게 속삭였다. “너는 수도원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만일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길을 계속해서 간다면 결국은 주교님과 수녀님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나는 내게는 성소가 없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영혼의 어둠은 그렇게 컸으며, 폭풍은 그렇게도 거세었다. 이런 절망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두려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이런 두려움에 대해 수련장 수녀님에게 말씀드린다면 나는 서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 뜻에 따라 가르멜에 머물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돌아가길 원했다. 지체 없이 수련장 수녀님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수녀님이 성당에서 나와주도록 청했으며,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내 영혼 상태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다. 다행스럽게도 수련장 수녀님은 이런 일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나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솔직한 고백을 통해 그 모든 의혹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다음 날 1890년 9월 8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이었다. 내 마음은 평화의 강물로 넘쳐흘렀다. 나는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이러한 평화 속에 원장 수녀님의 손안에서 그리고 모든 수녀님들 앞에서 가난과 순명과 정결을 서약했다. 이리하여 예수님과의 결합은 확정되었다. 나는 비할 데 없이 진실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비가 된 느낌이었으며, 이날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은총을 그에게 청했다. 나는 아무도 잊지 않았다. 특히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길 원했으며, 한 사람도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 또한 모든 가족을 위해서, 특히 아빠를 위해서 기도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아빠가 다시 건강해지길 기원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청하는 바를 종이쪽지에 적어 가슴에 품고 있었다. “오, 예수님! 내 거룩한 신랑이시여! 순결한 내 세례복을 더럽히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찾게 해주시고, 오로지 당신만을 발견하게 해주소서. 피조물들을 허무로 여기게 해주시고, 나 역시 피조물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하소서. 세상에 어떤 사물도 내 영혼의 평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소서. 오, 예수님! 나는 오로지 당신의 평화만을 청합니다. 평화를, 그리고 끝없이 무한한 사랑을 청합니다. 내가 한 약속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무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도록! 마치 작은 모래알과도 같아서 사람들이 그냥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나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내 안에서 당신의 뜻을 완성하실 수 있으리다.” 이 성대한 날 저녁에 신부장식, 장미로 된 화관을 성모님의 발아래 내려놓았다. < 눈물로 뒤덮인 축제 > 나는 베일 축제가 있기 직전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결혼식 청첩장을 작성했다. ● 성령의 아기 예수, 데레사 수녀의 청첩장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창조주시여! 세상에 유일한 통치자시여! 그리고 하늘의 여왕이신 마리아여! 당신들께 왕중왕이신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데레사 마르텡 양의 결혼식을 알려드립니다. 1890년 9월 8일 결혼식에는 여러분을 초대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수녀님들만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월 24일 잔치에 와주십시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그 축제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물론 나는 아빠와 셀리나, 그리고 레오니와 그 밖의 친척들의 재회를 기다리면서 대단히 기뻤다. 이 축제는 우리 모두에게 잊지 못할 체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아빠를 리지외로 모셔 오는 것에 이시도르 외삼촌이 반대한다는 것이다. 아빠의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그것은 아빠와 온 가족에게 우울하고 어두운 악몽 같았다. 이번 재회에 대한 기대가 아빠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빠의 축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어쩌면 아빠를 더 이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나는 고통 중에 셀리나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는 내일 오시지 못해. 언니에게 고백하지만 난 울었어. 그리고 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펜대를 옮길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흐르고 있어. 내가 얼마나 아빠를 보고 싶어 했는지 언니는 알고 있지? 예수님은 고아인 나를 보길 원하시나 봐.” 그렇게도 고대했던 결혼식 날이 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위고넹 주교님은 감기로 올 수 없게 되었고, 피숑 신부님은 캐나다에 있었다. 그 밖에 몇 가지 불쾌한 일들이 더 있었다. 모든 사건은 내 가슴을 슬픔과 고뇌로 가득 채웠으며, 나는 더 이상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물은 마치 두 줄기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내 얼굴 위에 흘러내렸다. 아무도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아네스 수녀님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베일 축제 전례가 진행될 성당으로 가는 길에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호되게 야단쳤다. “나는 수녀님이 왜 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수녀님은 가련한 아빠가 축제에 오시기를 바랄 수 있어요? 만일 아빠가 오시게 된다면 그분이 안 계신 데 대한 슬픔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어요.” 그것은 상처받은 내 영혼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마치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처럼 나는 고독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그럼에도 해방감을 주는 잔 밑바닥의 평화에 대해 깜짝 놀랐다. 예수님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나는 내 눈물조차도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지 않은가. 내가 성당에 들어섰을 때 모든 친척이 사랑하는 아빠를 제외하고는 수도원 성당에 모여 있었다. 주교 대리 신부님의 손에서 축성된 검은 베일을 받기 위해 수도원 성당 창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장 수녀님이 서원 베일을 내 머리 위에 올려놓은 다음, 조심스럽게 흰색의 수련자 베일을 벗겼다.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전례는 수도 공동체의 기도와 성가로 이루어졌다. 서원이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최종적으로 결합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서원은 주교님이나 그 대리자의 참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된다. 공동체 수녀님들과 친척들은 결혼식 입회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서원식이 끝난 다음 사제는 우리와 함께 장엄미사를 드렸다. 나는 창살 앞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으며, 친척들과 눈길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물론 나는 아빠가 무척 그리웠다. 나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비록 눈물로 가득했을지라도 아름다운 축제가 끝날 무렵 나는 행복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나의 사랑! 당신은 내 삶의 전부!' 베일 축제가 있은 지 8일 후 사촌 요안나 게랭이 결혼을 했다. 그녀는 가르멜로 우리를 방문했다. 그녀가 남편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는지 눈먼 장님이라도 다 보았을 것이다.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남편이 베푼 수많은 친절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렇게도 남편인 프란치를 사랑스러워 했다. 프란치의 눈빛만 보고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신중하게 들었으며, 신부가 얼마나 많은 친절로 신랑을 감싸주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요한나가 프란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리라고 결심했다. 나는 그녀의 열정에 감동되어 모든 행동에서, 전보다 더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 변절한 사제 > 서원식이 있던 1890년에서 91년 겨울은 무척 혹독했다. 나는 추위를 몹시 탔는데, 수도원에 난방을 한 방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 종일 난로 뒤에 숨어 있으련마는 내가 해내야 할 일들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제의방 담당 스타니슬라브 수녀님의 보조로 임명되었다. 초를 정리하고 분향 그릇을 깨끗이 닦고, 미사를 위한 성작과 성합을 준비하는 일을 도와드렸다. 나는 이런 일을 즐겁게 했다. 성합을 채우는 일은 거룩한 일이었다. 사제의 직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기뻤다. 연세가 많고 착한 스타니슬라브 수녀님은 내가 일을 조심스럽게 잘 해내는 것을 보고 기뻐했지만 결코 칭찬하지는 않았다. 식당 소임을 마친 후 아네스 수녀님은 성당과 공동 휴식 시간에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예수님께 영혼들을 데려가기 위해, 특히 사제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주어지는 고독을 좋아했다. 이 시기에 전직 수도회 사제가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이아젠트 로이송은 사제로,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련자를 거친 다음, 가르멜 수도자가 되었고, 후에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설교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869년 가톨릭교회를 떠났으며, 3년 후 개신교 신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다. 그 후 1879년에 프랑스 가톨릭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다른 여러 가지와 함께 교황 주의와 사제 독신제를 반대했다. 수많은 모임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프랑스 전체에 퍼뜨렸다. 셀리나는 내게 지방신문인 라크루아의 여러 논서를 보내주었는데, 논서들은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루고 있었다.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탈락한 수도자를 지탄했으며, 그를 혹평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셀리나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해. 하느님께서는 살인자 프란치니에게 하신 일을 그에게도 하실 수 있지 않겠어?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니까.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면 안 돼. 나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위해서 기도할 거야. 또한 마르가리타 마리와 그녀의 남편을 위해서도 기도하길 원해. 그녀는 신앙생활을 쇄신하고 그녀의 남편도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거야. 아, 언니! 우리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 돼. 우리는 그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잊어야 해. 나는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천 번이라도 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 |
무화
작성자 23.12.21 01:21
첫댓글
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6편
진리의빛.보조.기조실 23.12.20 07:21
[ 나는 위대한 <성인>이 되고자 하며,
가르멜 수도원의 개혁자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길 원한다고 고백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오직 하나만을 원했다.
‘내 삶에서 예수님께 첫자리를 드리자.
이제 내 안에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셔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