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골 귀족 ◦ 중국 유학 ◦ 양산 통도사 ◦ 황룡사 9층 목탑 |
① 해동화엄종을 창설하고 대중들에게 관음신앙을 전파하였다.
② 대국통이 되어 승정 기구를 정비하고 불교 교단을 총관하였다.
③ 당나라 승려 현장의 제자가 되어 유식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④ 많은 저술을 통해 불교계의 사상적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문제 해설
지문의 내용은 선덕여왕 때 활약한 자장 율사의 내용으로 그는 진골 출신의 대국통으로 승정 기구를 정비하고 불교 교단을 총괄하면서 계율종을 통도사에 개창하고, 자장의 건의로 호국불교인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정답은 ②번이다.
(1)신라 불교 특징
불교가 왕실과 결합해서 발전하였고, 계율종이 발달하였다. 특히 신라에서 널리 받아들인 불교의 중심 교리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윤회설인 업설(業說)과 미륵불 신앙이었다. 이는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통하여 왕의 권위를 높여 주는 한편,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해 주는 신라 불교만의 특징이다. 아울러 미륵불이 나타나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미륵불 신앙은 진흥왕 때 조직화된 화랑 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신라 사회에 정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의 용화낭도이다. 미륵불 신앙은 신라 하대와 조선 후기에도 유행했다.
(2)신라 불교의 발전(삼국유사 중고기:법흥왕~진덕여왕)
➀법흥왕 : 이차돈의 순교로 527년 불교 공인, 불교식 왕명 사용(삼국유사의 중고기 시작)
➁진흥왕 : 고구려 승려 혜량을 맞아 국통으로 삼고 불교 교단 조직하고 왕즉불 사상을 활용하여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황룡사를 건립하였다.
➂진평왕 : 석가족의 환생이 신라왕실이라는 진종설을 유포하면서 새로운 사회 윤리와 국가 정신 확립하기 위하여 원광에게 세속 5계를 짓게 하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독려하는 걸사표를 짓게 했다. 본인과 부인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부모인 백정과 마야부인으로 했다.
➃선덕 여왕 : 진골 출신의 대국통인 자장이 계율종을 통도사에 개창하고, 자장의 건의로 호국불교인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를 건립하였다.
<사료 분석> 호국 불교 자장이 연못가를 지나갈 때에 홀연히 신인이 나와서 예를 표하고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어떠한 곤란이 있습니까?” (자장이 말하기를)“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 땅에 이어졌고 남쪽으로 왜인이 인접되었고, 또 고구려·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외침이 심하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이옵니다.” 하였다. ...... 신인은 또 말했다. “황룡사의 호법룡은 나의 맏아들이오. ......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여 오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을 하여 왕업(王業)이 길이 태평할 것이오.” 「삼국유사」 |
통일 신라 중대의 불교
1. 불교의 특징
(1)불교사상의 종합적인 이해체계의 정립 : 통일기인 7세기 후반에 들어와 신라인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종합하여 불교 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체계를 정립하였다.
(2)불교의 대중화 : 7세기 전반기에 지배층 중심의 불교를 비판하고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어 갔다. 이 운동은 혜숙, 혜공, 대안 등의 승려들이 주도하다가 원효에 의해서 그 종교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대중화 현상으로 민중불교인 정토신앙의 유행과 점찰법회의 시행, 밀교의 유행과 현세적인 관음신앙 신봉, 아미타정토 신앙이 있다.
CF) 불교대중화
⑴ 통일기 : 혜숙, 혜공, 대안, 원효(정토사상)
⑵ 8세기 : 진표(점찰계법과 미륵신앙)
⑶ 10세기 : 균여(성속무애와 성상융회 사상과 보현십원가)
⑷ 무신집권기 : 원묘국사 요세(천태종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불교대중화)
(3)불교 교단의 예속화: 국가 권력이 불교 교단을 예속화 시켰다. 특히 화엄종은 전제왕권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4)5교의 성립: 신라 중대는 종파 불교인 5교가 성립되면서 화엄종과 법상종이 중심 교파였으나 사상적으로는 원효의 화쟁사상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5)정토신앙(아미타와 미륵신앙)과 관음신앙의 유행: 아미타 신앙과 미륵신앙으로 대표되는 정토신앙과 현세의 고난을 구제하는 관음신앙이 유행하였다.
(6)내세신앙의 유행: 현세신앙인 미륵 하생신앙에서 내세신앙인 미륵 상생신앙으로 바뀌었다.
2. 불교 사상가
(1)원효(元曉, 617~686) ☜ 매우 중요
➀불교의 이해 기준 마련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십문화쟁론」,「화엄경소」 와 같은 명저를 남겨 불교를 이해하는 기준을 확립하였다.
➁일심(一心) 사상 : 원효는 모든 것이 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내세워 여러 종파의 사성적인 분파의식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의 모든 저서에 흐르는 사상으로 육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➂화쟁(和諍) 사상 : 여러 종파의 사상적인 대립을 극복하고자,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십문화쟁론」에서 화쟁 사상을 주장하였다.「십문화쟁론」은 범어로도 번역되어 인도 불교계에 영향을 주었다.
※불교 통합 운동
원효(화쟁사상), 광종의 불교 통합운동(교선통합모력, 교종은 균여의 화엄종으로 통합,선종은 중국 법안종을 수입하여 통합, 천태학 연구(의통,제관), 의천(천태종,교관겸수), 지눌(조계종, 정혜쌍수),보우(중국 임제종 도입하여 선종 9산의 재통합 주장)
➃정토종(아미타 신앙) 보급 : 원효는 당시 유행한 현세구복적,귀족적인 불교를 비판하면서 무지한 대중에게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하면 극락세계(➝내세 구복적 성격)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미타 신앙은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서방 정토, 즉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신앙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아미타전,극락전 등으로 불리는 법당으로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아닌 정토신앙을 상징하는 아미타불이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정토신앙은 전 불교적 현상으로 왕실에서 노비까지 모든 신라인들이 신봉한 사상이다.
➄유심안락도: 원효가 그의 저술인 『무량수경종요』를 더욱 깊이 부연하여 정토사상(淨土思想)을 논술한 책이다. 죄업으로 가득한 중생은 누구나 참회함으로써 그 위치가 달라진다는 불교정신을 심어주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➅무애(無碍) 정신 강조: 원효는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라고 하는 무애, 즉 무애의 자유정신을 강조하는무애가를 부르면서 무지한 대중들을 교화하였다.
⑦법성종 개창 : 교종의 하나인 법성종(해동종)을 선덕여왕 때 건립된 분황사를 중심으로 개창하였다. 그는 법성종과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교학 불교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여 해동종이라는 독자적인 불교 사상 체계를 구축하였다.
⑧인물탐구
㉠아명은 설서당으로 경북 경산에서 출생했다.
㉡보덕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과 자장으로부터 불법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당 유학 포기: 의상과 2차 당 유학 중 해골 바가지 사건으로 유학을 포기했다.
㉣요석공주과 설총: 무열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 라 칭했다.
㉤무애가: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을 부르면서 포교했다.
㉥저서: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부 240권이나 된다.
㉦대승기신론소:인도의 마명이 저술한『대승기신론』에 관한 원효의 주석서로,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라 부르며 즐겨 인용한 저서이다.
㉧금강삼매경론:『금강삼매경』에 관한 원효의 주석서이다. 원효가『금강삼매경』의 주석서를 내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 경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 저술은 당나라 학승들에 의하여 소가 아니라 논으로 추앙되기까지 하였다.
㉨서당화상비: 9세기에 건립된 서당화상 원효대사에 관한 비석이다.
㉩대성화쟁국사:고려 숙종에 의해서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2)의상(625~702)☜ 중요
➀해동 화엄종 개창 : 당에서 법장과 함께 지엄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당 고종의 신라 침공 계획을 알고 671년(문무왕 11) 귀국한 뒤 문무왕의 정치적 자문을 맡으면서, 영주에 부석사를 세우고 해동 화엄종을 개창하였다.
➁화엄 사상의 정립: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융무애사상의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➂「화엄일승법계도」 : 화엄 사상의 요체를 7언 30구 210자로 정리하여 제시한 책으로 실천과 수행을 강조하여 이후 화엄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➂전제 왕권 강화에 기여 : 의상의 화엄 사상은 업설에 근본을 둔 통일전 왕즉불 사상에 입각한 왕실`귀족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여 평민을 포함하는 전국가적 불교로 확대시켰다. 귀족층의 사치와 탐욕을 억제하면서 보다 평등하고 건전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여 통일 직후의 모든 계층과 지역을 아우르는데 기여하였으며, 진골 출신인 그는 특히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고려 숙종때 원교국사로 추증되었다.
➃관음 신앙 주도 : 화엄 종단에서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면서 불교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➄왕실과 귀족층의 사치 억제 : 문무왕이 경주에 도성을 쌓으려고 하자 민심(民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만류하였다.
⑥화엄 교단과 10찰 건립: 그의 사상은 3000 여명의 제자 가운데 아성으로 불린 노비출신의 지통, 빈민출신의 진정, 표훈,의적 등에 의해서 계승되고 사찰로는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옥천사, 갑사, 등 화엄십찰이 있다. 그 외에도 낙산사 홍련암이 유명하다.
⑦정토사상의 보급: 화엄종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이고, 소의경전(주 경전)은 화엄경인데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셔놓은 법당으로 그 당시 정토사상의 보급화가 컸음을 암시한다. 즉 아미타와 관음신앙이 화엄종의 중심사상이었다.
⑧백화도량발원문:양양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사료 분석> 화엄일승법계도 하나 안에 일체(一切)이며 다(多) 안에 하나요[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一切)이며 다(多)가 곧 하나이다[一卽一切多卽一]. 하나의 미진(微塵) 가운데 십방(十方)을 포함하고[一微塵中含十方], 일체(一切)의 진(塵) 가운데서도 역시 이와 같다[一切塵中亦如是]. 「화엄일승법계도」 |
(3)원측(613~696) : 신라의 왕손으로 진평왕 때 당에 유학하여 유식 불교의 깊은 뜻을 깨달아 당의 수도에 있는 서명사에서 자기의 학설을 강연하였다. 그는 현장의 사상을 계승한 규기와 논쟁하면서 불교 교리 이해에 대한 우월성을 보여 주었다.『성유식론소』와 『해심밀경소』등을 저술하고 법상종 성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의 사리탑이 시안의 흥교사에 있다.
(4)혜초(704~787):인도와 서역지방에까지 순례하고 기행문으로「왕오천축국전」을 썼다. 그는 중국 밀교의 초조인 금강지와 2조인 불공의 제자로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지는 밀교 연구자였다.「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 학자 펠리오(Pelliot)에 의해 중국 감숙성 둔황 석굴에서 발견되어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박물관에 있는데,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5)김교각(696~794): 신라 성덕왕의 첫째 아들로 719년에 중국에 가서 75년간 고행과 포교 활동을 전개하다가 주화산(구화산)에서 99세에 입적,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대보살인 지장보살이 되었다.
(6)진표의 법상종: 진표와 태현의 활약으로 점찰로서 본인의 과보를 반성하고 참회 수행하는 실천적인 미륵신앙이 김제 금산사를 중심으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에게 크게 유포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에게 영향을 미쳤다.
3. 5교의 정립
신라 중대에 교학의 종파불교가 5교로 성립되었다.
교 단 | 중 심 사 찰 | 창시자 | 내 용 |
열반종 | 전주 경복사 | 보덕 |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에 반발, 백제 땅에서 창시,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
계율종 | 양산 통도사 | 자장 | 계율종은 삼국이 공통으로 중시한 종파로 통도사는 불보사찰로, 자장은 황룡사 9층탑을 건의함 |
법성종 | 경주 분황사 | 원효 | 대중불교에 기여하여 해동종으로 불리었다. 현세불교를 내세불교로 바꾸어 모든 중생은 성불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
화엄종 | 영풍 부석사 | 의상 | 전제 왕권 강화에 기여하고 하대에도 성장하여 고려초의 균여로 계승되었다. |
법상종 | 김제 금산사 | 진표 | 미륵사상과 망신창법으로 백제인에게 크게 영향 미쳤고 유식학의 일종이다. |
04. 선종의 전래와 발달☜ 중요
1. 전래
(1)도입 : 선종은 7세기 선덕 여왕 때 법랑이 전개하였으나, 교종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2)확산 : 신라 말기(신라 하대)에 화엄 사상을 공부하던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선종을 공부하고 이를 크게 유행시켰다.
2. 특징
(1)실천 수행의 중시: 선종은 교종의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기존 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문자를 초월하여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여,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실천수행을 중시하고 개인적 정신세계를 찾는 경향이 있었다.
(2)참선의 중시: 내면의 깨달음을 중시하여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3)선종의 이론
➀직지인심(直指人心): 교리를 캐거나 계행을 닦지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알게 하여 깨친다.
➁견성오도(見性悟道): 견성이라는 말은 자신의 본래 성품 곧 순수의식을 본다는 의미이 며, 오도라는 말은 자성을 보아 도를 깨우친다.
➁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 경전의 강술이나 언어 문자의 수단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로 가섭존자의 이심전심이 유명하다.
➂즉심즉불(卽心卽佛)즉심시불( 卽心是佛) :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 평소의 마음 그대로 가 바로 부처이다. 도를 깨달으면 내 마음이 부처이고 그 밖에는 부처가 없다는 말.
(4)개창자 : 주로 6두품 출신으로, 최초의 본산은 가지산파의 도의이고 마지막 본산은 수미산파의 이엄이다.
※ 선종 9산의 성립과 개산조
9산 선문 | 개산조 | 중심 사찰 | 위치 | 특징 |
가지산파 | 도의 | 보림사 | 장흥 | 9산 선문의 최초 창건 |
실상산파 | 홍척 | 실상사 | 남원 | |
동리산파 | 혜철 | 태안사 | 곡성 | |
봉림산파 | 현욱 | 봉림사 | 창원 | 김해 호족 김율희의 후원 |
사자산파 | 도윤 | 흥녕사 | 영월 | 흥녕사는 현재 법흥사로 개칭되고 도윤의 제자 징효가 중창 |
사굴산파 | 범일 | 굴산사 | 강릉 | 강릉 호족 왕순식의 후원 |
성주산파 | 무염 | 성주사 | 보령 | 낭혜화상비에서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사실 기록 |
희양산파 | 도헌 | 봉암사 | 문경 | 지증대사비, 사찰경제와 북종선 전래사실 기록 |
수미산파 | 이엄 | 광조사 | 해주 | 왕건의 스승 |
CF) 중국 선종계보정리
∙석가모니→가섭존자(서방1대조)→달마대사(동방1대조)→혜가→승찬→도신→홍인→신수(북종선)→희양산파 지증대사 도헌 ∙혜능(남종선-6대조)→우리나라에 전래(선종 9산)→고려 초 중국 법안종 수입→고려말 중국 임제종 도입(태고화상 보우)→조선 중기 서산대사 휴정(중조)→편양 언기,사명 유정→근대 경허선사→만공,수월→현대 동산→성철 대선사 |
오가칠종(五家七宗)이란 당, 오대 시대에 선종의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5개의 종파를 의미한다. 중국의 선종은 초조 보리달마로부터 제2조 혜가, 제3조 승찬, 제4조 도신, 제5조 홍인을 거쳐 신수의 북종선(北宗禪)과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으로 나누어졌는데, 남종선은 당대 중기 이후 점차 번영하였다. 특히 제6조 혜능의 제자인 남악회양과 청원행사의 계통이 당의 말기 이후 선종의 주류가 되었으며, 후에 그 계통이 5가 7종으로 분파하여 각자 특이한 종풍(宗風)을 선양하였다.
당말 남악 회양의 제자 백장 회해의 선을 이은 위산 영우 및 그 제자 앙산 혜적의 위앙종이 번영하였으나 송초 선맥이 사라졌고, 또한 백장의 제자인 황벽 회운의 제자 임제 의현에 의하여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선풍으로 하는 임제종(臨濟宗)이 성립하였으며, 후에 자명 초원 문하의 황룡 혜남과 양기 방회에 의하여 각각 황룡파 ·양기파가 성립되었다.
청원행사의 계통에서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으로 나누어진다. 고려 초 광종 때 법안종을 도입한다. 따라서 위앙, 임제, 조동, 운문, 법안과 같은 종파는 모두 직접 혜능(慧能) 남종(南宗)을 계승한 것이지만, 각각 서로 다른 종풍(宗風)을 형성하였고 위의 다섯 종파에 임제종에서 분파한 황룡파(黃龍派)와 양기파(楊岐派)를 합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한다.
(3)호족의 후원 : 선종은 지방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려는 호족의 취향에 어울렸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선종 승려 가운데는 호족 출신이거나 6두품 출신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지방 호족 세력과 관계를 맺으면서 각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여러 종파를 이루었는데, 그중에서 유력한 것이 9산(九山)선문이었다.
3. 역사적 의의
(1)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 확대 : 선종은 본래 중국의 당에서 새로운 문화 운동의 하나로 성립된 종파였기 때문에, 신라에서도 선종을 수용함으로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어 특히 신라와 고려의 한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2)고려 왕조의 사상적 기반 : 선종은 도당 유학생들의 반(反)신라적 움직임과 결부되어 고려 왕조 개창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3)조형 예술의 침체와 승탑(부도)의 등장 : 불교 의식을 배격하고 좌선을 중시하여 나타난 현상으로 선종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과 고승의 일대기를 기록한 탑비가 유행하였다.이것은 호족들의 정치적인 성장으로 인하여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건립되었다. 대표적으로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홍법사지 염거화상탑, 쌍봉사 철감선사탑(사자산 개조 도윤),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최치원의 사산비명의 하나),보림사 보조선사탑비, 쌍봉사 철감선사탑비,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등이 유명하다.
(4)지방 문화 역량 증대:선종은 중앙 귀족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을 내세우며 등장한 지방 호족과 뜻을 같이하면서, 지방을 근거지로 성장하여 지방문화의 역량이 증대되었다.
<사료 분석> 신라 말기 선종 불교의 영향 820년대 초에 승려 도의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당나라 서당 대사의 깊은 뜻을 보고 지혜의 빛이 스승과 비슷해져서 돌아왔으니, 그가 그윽한 이치를 처음 전한 사람이다. ...... 그러나 메추라기의 작은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큰 붕새가 남쪽으로 가려는 높은 뜻을 헐뜯고, 기왕에 공부했던 경전 외우는 데만 마음이 쏠려 선종을 마귀 같다고 다투어 비웃었다. 그래서 도의는 빛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어 서울에 갈 생각을 버리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다. 봉암사 지증 대사 적조탑비 비문 |
※교종과 선종의 비교
시기 | 지지 | 발달 | 사 상 | 영 향 | |
교 종 | 중대 | 왕실 귀족 | 5교 | 제전행사불경 중시 권위의식 강함 세속불교, 신라체제유지,왕즉불 사상, | 전제왕권 강화 기여(화엄종) 조형미술 발달(석가탑,다보탑, 불국사,석굴암 |
선 종 | 하대 | 호족 | 9산 (6두품 중심) | 견성오도,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좌선사색중시 개인적 성격, 대중성 산중불교로 발전 반정부적 성격 | 신라 권위에 대항→반신라 사상→조형미술 쇠퇴→중국문화 이해폭 확대→고려시대에 한문학 발전에 기여→무신정권때 조계종으로 발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