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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3일 주일 메시지
누가의 두 번째 하나님 나라 이야기 07
제목: 판데믹 시대와 교회
초대교회로부터 배우는 교훈
사도행전 6~8장
설교 목적
지금은 바야흐로 판데믹의 시대다.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방역과 보건이 국민의 생존과 국가의 번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종교활동도 큰 제약을 받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던 예배당 집회가 제한되거나 금지되고 있다. 앞으로 교회는 어떻게 될까? 판데믹 시대는 우리에게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판데믹 시대에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참고
2020년 9월 6일 설교:
세기적 위기 앞에서
http://cafe.daum.net/Wellspring/VrBi/44
2020년 9월 13일 설교:
판데믹 시대의 신앙생활:
http://cafe.daum.net/Wellspring/VrBi/45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 관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지역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고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 선민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어간다는 기존의 가치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대변혁의 시대에 필요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판데믹의 시대에 교회는 변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 물어야 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설교를 통하여 나는 그 실마리 중에 하나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설교 개요
1. 문제제기: 판데믹의 시대
2. 초기교회가 마주한 문제와 해결책
3.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가져온 변화
4. 새소망교회 40주년에 맞는 대전환기
5.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준비태세
1. 문제제기: 판데믹의 시대
금년 2월 말에 시작된 비대면예배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예배는 본래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것인데 주일낮예배를 가정에서 드려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그 동안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앞으로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이 호전되어 다시 예배당에 모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교회는 방역을 철저히 하고 정부지침에 따라 간소하게 예배를 드리면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지난 8월에 두 달 동안 우리는 교회당에 모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현장예배를 재개했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가나 싶었는데 겨울로 접어들면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갑자기 대폭 늘어났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다시 가정에서 주일낮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금년을 마치는가 봅니다.
다행히 세계 각국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제약회사들은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이미 영국을 필두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코로나19 예방백신의 접종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년까지는 판데믹 사태가 종식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번 겨울만 잘 견뎌낸다면 내년에는 코로나를 독감 정도로 여기고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판데믹은 쓰나미처럼 우리 사회 전반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북반구 시베리아 북쪽 끝자락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빙하가 녹으면 수천 년 동안 얼음 아래에 있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판데믹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지금 우리 시대의 문화와 경제, 종교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었는지 하나 둘씩 드러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특별히 종교의 경우에 예배당 건물 중심의 신앙생활을 근본부터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습니다. 이것은 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근본 목적을 신학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 단순하게 생각하면 앞으로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판데믹 시대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아야 하는 문제와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통하여 초대교회는 어떤 문제들을 만났으며 그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살펴봄으로 오늘 우리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초대교회가 만난 문제는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2. 초기교회가 마주한 문제와 해결책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사도들을 중심으로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성령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그 무리들은 거대한 세상에 하나의 물방울처럼 아주 작고 연약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만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을까요?
초대교회가 만난 문제를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이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열두 사도단에 결원(缺員)이 생겼습니다 (행 1장).
②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술 취한 것 아니냐?’고 비방했습니다 (행 2장).
③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주었을 때, 그 일로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과 그 무리로부터 예수 이름으로 전도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행 3~4장).
④ 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이 모두 체포되어 유대인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고 매질을 당했습니다 (행 4장).
⑤ 교회 안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내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거짓말을 하다가 한날에 사도들 앞에서 혼이 떠나고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행 5장).
⑥ 교회가 점점 성장할 때 교회 안에 갈등이 일어나더니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행 6장).
⑦ 스데반 집사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파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었습니다 (행 7~8장).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순탄하게 발전한 것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끊임없이 이런 저런 문제가 다가왔습니다. 그 문제들 앞에서 교회는 서로 마음을 모으고 피차 존중하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도들의 결원에 대해서는 교회의 추천을 받아 맛디아를 제비뽑기로 선출하여 사도직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할 때 온 회중이 성령충만을 받았는데 그들을 비방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그들의 비방이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성경을 통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믿는 사람이 더해졌고 교회는 더욱 뜨겁게 같은 마음으로 배우고 교제하고 기도했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제지(制止) 당했으며, 백성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가서 옥에 가두고 매질을 했습니다. 교회는 이런 가운데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다시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믿는 자들이 더욱 늘어 이제 남자들만 헤아려도 오천명이 되었습니다. 박해 속에서 교회는 더욱 뜨겁게 기도하고 같은 마음으로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성령을 속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은혜로 가득한 교회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같은 날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은 교회 전체를 새롭게 했으며 세상에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나타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위기 속에서도 더욱 그 존재가치와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새로운 위험이 닥쳤다고 소개합니다. 그 위험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로부터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때 언어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한쪽 진영이 소외되어 일어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겼고 서로 상대진영을 향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사도들은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하고 새로운 일꾼들을 선출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일곱 집사입니다. 이제 교회는 사도들과 집사들의 섬김과 업무 분담을 통해서 갈등을 해소하고 다시 안정을 되찾고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안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3.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가져온 변화
스데반 집사는 다른 집사들과 함께 교회의 추천을 받아 사도들로부터 교회를 돌보는 집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 집사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깊고 견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의 회당에 참석해서 유대인들로부터 여러 질문을 받으며 토론을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확신을 가지고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라고 성경을 인용하여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를 논쟁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후 사울은 체포영장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마리아로 달아났고 어떤 사람들은 지중해의 구브로 섬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1,200리(480km) 떨어진 안디옥까지 달아났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신앙과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는 성전이 있고 교회가 시작된 것도 그곳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박해 때문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은 더 이상 예배와 집회의 장소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또 다른 변화는 복음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사도에서 모든 제자들로 확대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열두 사람입니다. 흩어진 모든 곳에 사도들이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도가 아니어도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사도들이 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가능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성실히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거의 매일 집회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거의 사도급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는 일군들이 양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스데반 집사는 순교하기 전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증거하고 입증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당해낼 수 없던 유대인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쓰러뜨려야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 외에도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빌립 집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청하여 사마리아에서 그리스도께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가서 주께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가르쳤습니다. 빌립 집사는 다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고 돌아가는 한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이었는데 빌립 집사는 그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은 더 멀리 전파되었습니다(사도행전 8장).
스데반의 박해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렇게 흩어진 곳에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넘어서고 유대인의 인종적 장벽을 넘어 헬라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사도들이 전담했는데 이제는 역량 있는 누구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라는 새로운 상황이 가져온 변화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 동안 훈련을 받아 충분히 역량을 갖춘 사람들에게 그들의 은사를 드러낼 수 있는 마당이 펼쳐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안팎에서 여러 문제를 만났지만 그 가운데 단결하고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어려움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그들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교회가 마주하는 새로운 상황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마주하는 그 낯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의 지난 40년을 돌아보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판데믹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인도를 따라야 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4. 새소망교회 40주년에 맞는 대전환기
우리 교회는 지난 1981년 7월에 설립되었습니다. 내년이면 우리 교회는 40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 교회는 금호동 산동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40년 전 금호동과 행당동 지역은 아직 재개발이 시행되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시골에서 상경하여 꿈을 가지고 모여든 거주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낯선 타향에 온 사람들은 교회에서 은혜를 경험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서로를 격려하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때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고 생활에 여유는 없었지만 따뜻한 정이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설립자는 권동준 목사입니다 (13년 시무). 교우들은 담임목사를 믿고 따르며 뜨겁게 기도하고 부지런히 전도했으며, 교회는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처음에 지하에서 시작된 예배당도 여러 차례 옮기면서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비록 때때로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제때에 드릴 수 없고 달마다 예배당 임대료를 준비해야 하는 상가교회였지만 은혜가 충만한 시절이었습니다. 교회는 성전건축의 꿈을 가지고 십시일반 헌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에 제2대 담임목사로 곽종혁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6.5년 시무). 그 때 교회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부흥을 위해서 목회자는 열심을 냈고 교회 안에 각 기관도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행당동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많은 가정들이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가면서 교회는 어려움을 맞았습니다. 다른 교회와 합병을 추진하다가 무산되어 담임목사도 사임했습니다. 그래서 제3대 담임목사로 조종구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1년 시무). 그 일년 동안 교회당 옆에 있던 현수막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교회로 번져왔고 그 때 교회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교회가 안정되기도 전에 다시 목회자가 교체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렇게 2001년 11월에 제4대 담임목사로 이정재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10년 시무). 교회는 부흥을 위해 알파코스 등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했지만 부흥의 길을 찾지 못하고 다시 제5대 담임목사로 이영호 목사를 맞이했습니다(1년 시무). 이영호 목사는 총회와 지방회의 인준을 받지 못하여 제대로 된 취임식도 갖지 못한 어수선한 상태에서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제6대 담임목사로 김준엽 목사(2년 시무)가 부임하여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 동안에 교회는 재산문제로 총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잦은 교체와 총회와 지방회의 부당한 간섭으로 교우들은 목회자와 상급기관에 대하여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신뢰가 깨졌고 교인들의 신앙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지난 2015년 1월에 제7대 담임목사로 조해강 목사가 부임해서 지금까지 6년째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1996년부터 교사와 집사로 섬기기 시작했고 1997년에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우리 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까지 7년 동안 집사와 전도사로서 사역을 했습니다. 저는 부교역자로서 우리 교회에서 세 분의 목회자를 섬기면서 우리 교회가 얼마나 부흥을 갈망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난 40년은 가난과 궁핍을 떨쳐버리고 성장과 부요(富饒)의 복을 갈망하며 몸부림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세대가 지나 아이들은 자라 부모가 되었고 우리의 가산(家産)도 제법 늘어나는 복을 받았습니다. 월세교회를 면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던 우리는 마침내 월세걱정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복도 받았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불안도 본교회 출신의 목회자를 맞이하여 어느 정도 해소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합심하여 기도했으며 교인들은 자신의 옥합을 여러 번 깨뜨리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40년을 지나고 보니 세상도 교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40년 전에는 동네마다 거리마다 아이들이 넘쳐났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귀합니다. 젊은이들이 일찍 결혼하여 자녀를 낳던 40년 전에 비하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미루고 가정을 꾸려 자녀를 낳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예배당에 모여 예배 드리고 기관별로 모임을 가지면서 친목을 도모하던 시절이 지나고 지금은 가족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개인의 활동이 많아져서 교회 안에 있던 크고 작은 모임들은 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금년에 우리는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판데믹의 재난을 맞이하여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1년 안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접종이 완료되고 치료제도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와 같은 판데믹 상황은 종료될 것입니다. 하지만 4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대전환기를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치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중심의 삶과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방에 뿔뿔이 흩어져서 사도들도 없이 신앙공동체를 세워야 하는 급변상황을 맞이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는 이 낯선 변화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5.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준비태세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환경으로의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대문이었습니다. 낯선 환경은 기존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으로 볼 때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두려운 일이겠지만 하나님은 사시사철 함께 하시며 여름의 장마와 한겨울의 한파 속에서도 주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며 주의 백성을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과정이었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경륜)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청년들과 아비들도 모두 예언자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배우고 가르치는 시대를 여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예비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대격변의 상황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풍년과 흉년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물며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 상황 가운데 어찌 그 뜻하신 바가 없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모두 성취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잘 준비하는 교회는 반드시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판데믹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새로운 문을 열고 들어가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1) 구도자로 살자
가장 먼저, 우리 신앙의 체질을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신앙생활의 모습은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성숙해왔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은 들판에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돌로 단을 쌓아 제물을 태워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집을 마련하여 그 안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가 아니라 예배와 성경연구를 통해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거룩한 행실과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주는 것이 참 신앙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 안에서도 신앙은 끊임없이 그 체질을 개선하면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의 제사를 드리던 종교는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예배로 발전했습니다.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 후에 그 제물을 나누어 먹던 신앙생활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나눔과 섬김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제사장의 가슴에 달린 우림과 둠밈으로 점치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연구함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더 깊이 이해하는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신앙을 돌아보면 몇 단계의 변화를 거쳐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들은 집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부흥회는 전국 각지에서 성황이었고 문학의 밤이나 성경학교는 언제나 젊은이들의 열기를 가득 채운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그 후에 주중 찬양집회나 열린 예배 등의 집회로 발전하고 일부는 문화사역의 형태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제자훈련을 위한 성경공부가 전국 교회에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고 은사운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신령한 체험을 통해 신앙의 역동성을 경험하고자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이 모든 것은 추억이며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짐승을 잡아 태워드리는 제의(祭儀)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마냥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것을 답습하려는 태도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신앙의 체질을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판데믹의 시대에 우리는 집회의 신앙에서 구도의 신앙으로 신앙의 체질을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대중집회를 통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우리가 집단적으로 각성하고 힘을 얻던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개개인이 진리를 추구하고 생각이 각성되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구도자로 세워지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진리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입을 통해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스스로 구도자가 되어 성경을 읽고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면서 확신 가운데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며 경륜입니다.
(2) 성전 공동체로 살자
우리 개개인이 주도적으로 구도의 길을 걷는 훈련을 한다고 해서 신앙공동체를 흩어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본래 성전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솔로몬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렘 31:33). 본래 하나님의 법은 성전의 지성소 법궤(法櫃) 안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인간의 지성소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인간이 성전이 된다는 말입니다. 전에 하나님은 건물로 된 성전을 거처로 삼으시고 거기에 거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시며 인간 안에서 말씀하시고 인간을 처소로 삼으셔서 인간을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이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여 가르쳤습니다 (고전 3:16, 6:19).
그런데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며 죄를 용서받고 중보기도를 드리며 복을 받습니다. 전에 이런 일은 성전에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면 이 일은 모두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평화의 중개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교회의 임무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하나님이 교회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과 직분을 맡기셨다고 했습니다(고후 5:18~19). 그것이 성전으로 사는 길입니다.
또한 성전에서 생명샘이 솟아나 온 천지를 치료하고 풍요롭게 한다고 예언자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겔 47장). 성전은 그처럼 이웃을 복되게 하고 회복하는 치료와 축복의 센터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전인 인간이 먼저 대접하고 먼저 용서하며 저주 대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성전으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건물 성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우리 개인의 삶의 현장에서 완성되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전에 성전인 예배당에 모이는 생활에 힘을 쏟았다면 이제는 이웃과 지역사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성전은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더 큰 성전이 되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공동체로서 교회가 지역사회와 우리 시대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연구하며 참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신앙의 두 번째 자세입니다. 그것은 성전의 본래 기능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을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예비하신 선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라고 끊임없이 말씀 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하늘을 열어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실 때 그 뜻을 받은 사람이 이 땅에서 순종과 헌신으로 그 뜻을 펼쳐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그 새로운 세상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세상이 열리는 것을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고 익히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그 시대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은 세계관의 변혁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은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자리잡은 시온산은 모든 신자들이 바라는 소망의 산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거룩한 도시라고 유대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할례와 율법준수를 통해서 길이 기념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이방인(gentile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이나 다른 종족이라는 말입니다. 자신들과 혈통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시절 많은 유대인들은 지리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하나님의 언약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의 얕은 이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 부르시고 그 땅에 성전을 세우시며 시온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르신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신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라고 부르신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에 명확하게 드러난 것처럼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열방에 빛이 되고 세상 만민을 축복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 그것이 예루살렘과 유대인이 하나님께 택함 받은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지 못할 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려 했고, 이방인들과는 거리를 두고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민족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성숙하지 않은 어린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굳게 붙들면 하나님의 경륜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장애물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앞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경륜을 소개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고 한 몸이 되며 한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시고 계획하신 일이었지만 동족에게는 감추어지고 비밀이 되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 신앙이 초기교회의 유대인들을 따라가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성에 갇히고 유대인이라는 혈통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은 온 세상에 축복이 되는 제사장으로서 열방의 친구와 형제가 되라고 맏아들로 부름을 받았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타지역과 타민족을 배척하고 배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개신교 신앙이 타종교와 세상에 대해서 1세기 유대인들과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저는 우려합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로 여기기보다 이 땅은 저주받아 멸망 받으며 장차 하늘에 있는 천상의 세계가 진짜 영생의 세계라고 보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에 빠지면 이 세상의 삶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거나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훈련과정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잠깐 머물다 지나가는 여관집으로 세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복락에 들어갈 사람은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뿐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고 오해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현실에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납니까? 그처럼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회는 세상을 벗이요 형제라고 여기기보다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개신교회는 차별금지법을 악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무슬림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며 가급적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슬림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은 국가의 안위에 심각한 위해(危害)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유럽이 바로 그렇게 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도 여러 시민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회는 동성애나 낙태문제 등에 대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하지만 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이 동족으로부터 율법을 폐하러 온 자라느니 성전을 허물고자 한다느니 하는 비난을 받았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인들은 길을 내고 중국인들은 성을 쌓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길을 내기도 하고 성을 쌓기도 할 것입니다. 길을 내려는 사람은 더 멀리 가서 소통하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성을 쌓으려는 사람은 외부의 강한 적을 막기에 자신의 능력으로 부족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예루살렘 중심의 배타적인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나 바울 중에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성숙합니까? 대답은 자명할 것입니다.
200년 전 조선은 서양의 배들이 입국하는 것을 막고 몰아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수교하고 더 멀리 나가고 있습니다. 섣부른 개항은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문을 열어 외국과 교류하지 않으면 조금 일찍 문호를 개방한 일본에게 짓밟히는 수모와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200년 전 이 땅에서 살아가던 우리 조상들의 앞에 놓여 있던 시대적 문제와 과제였습니다. 그 때는 과연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전환의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판데믹의 시대를 맞아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적 변화 앞에서 잘 준비하고 대처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할 수 있는 문을 찾아내고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가 주님이 주시는 새 시대와 새 세상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준비를 위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생각하고 배우는 구도자가 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세상의 축복과 회복을 위한 길을 찾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우리가 됩시다. 그리고 이런 역량을 갖출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고 익히며 그것을 꿈꾸고 행하는 우리가 됩시다.
하나님의 경륜은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이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각 시대에 그 시대의 임무를 밝혀주는 등불이며 낡은 생각을 깨트리고 더 크고 더 밝고 더 성숙한 생각을 갖게 해 주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지금 차분히 앉아 성경을 상고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고 그 빛으로 우리를 돌아보고 서로 진리를 알아가려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미래로 들어가는 새로운 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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