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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_정종열_KOICA
1_ABOUT KOICA
대한민국의 국제개발 사업을 주관하는 외교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3]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대왕판교로 825 (시흥동)에 위치하고 있다. 설립 직후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해 있었으나 이후 이전하였다.
청사는 세종연구소와 공유중이며, 세종연구소가 5공 때 '일해재단'으로서 부당하게 취득한 자금으로 지어진 만큼 국가에 귀속된 것이 외교부에 넘어온 것이다. 후에 공공기관 지방이전의 기조에 따라 대학로에 있던 코이카도 이전을 결정했고, 마침 외교부가 크고 아름답게 지은 일해재단의 건물을 소유했기에 대학로 부지를 매각하고 이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대학로의 옛 부지는 철거 후 서울대학교병원 연구센터가 들어섰다. 국가기록원 서울기록관과도 공유중이다.
2_MISSION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포용과 상생의 개발협력으로 인류 공동번영 과 세계평화 증진 기여
3_VISION
글로벌 가치를 실현하고 상생의 국익을 창출하는 선도적 글로벌 개발협력기관
4_HISTORY
As a recipient (1945-1995)
참혹한 1950년 한국 전쟁 의 여파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은 한국의 국가 생산 능력의 3분의 2를 파괴하고 실업률을 치솟게 했습니다. 종전 후 거의 10년이 지난 1961년, 한국의 1인당 GNP는 82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국내 저축 수준은 거의 무시할 만했습니다.
이 힘들고 종종 절망적인 시기에 한국 사람들은 외국의 도움 없이는 겨우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원조는 주로 식량, 의복, 의약품, 원자재와 같은 필수품 공급에 제공되었습니다. 해외 원조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걸쳐 국가의 적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주요 원천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950년대 말까지 외국 원조가 사실상 유일한 자본 원천이었습니다. 1953-1960년의 재건 기간 동안 한국 수입의 70% 이상은 외국 원조에 의해 조달되었습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된 이후 대외원조는 한국의 경제·사회 발전에 보다 실질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 지도부는 국가 발전과 사회 안정에 강력하게 헌신했으며 지불 적자의 격차를 메우고 국내 저축 및 투자의 부족을 상쇄하기 위해 외국 자본과 지원을 유도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정부는 수많은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조금 규모는 감소하고 국내 저축률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는 상당한 양의 상업 및 양허성 차관을 건설적이며 해외로부터 신기술을 도입했습니다.
1960년대 외국의 원조는 자본과 투자의 주요 원천이자 경영능력과 산업기술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 기간 동안 주요 기부자는 국제 개발 협회(IDA), 유엔 개발 계획(UNDP), 세계 은행, 아시아 개발 은행(ADB) 및 미국 국제 개발청(USAID)과 같은 양자 기관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해외경제협력기금(OECF).
As a donor (1990s-present)
1997-98년 금융 위기와 뒤이은 경기 침체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한국은 오늘날 전후 성공 사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적절하게 설계된 개발 전략과 해외 원조의 효과적인 활용을 통해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선박, 철강, 자동차 및 반도체의 주요 생산국입니다. 1996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했다.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 성과와 정책에 많은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경제·기술협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기부 역사는 1960년대 중반 한국 정부가 USAID의 후원으로 개발도상국의 기술 직원을 초청하여 훈련을 제공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이후로 1967년 전문성 공유, 1977년 현물 원조, 1984년 타당성 조사를 포함하여 개발 협력을 위한 여러 다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개발에 대한 한국의 독자적인 기여는 최근의 현상이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초반부터 남북협력 정신을 바탕으로 빠르고 역동적인 발전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직접적인 경험이 다른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982년에는 소위 국제개발교류프로그램(IDEP)이 정부 관료와 정책입안자들을 초청하여 강의, 세미나, 워크숍, 견학으로 구성된 교육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IDEP를 비롯한 정부의 기술협력 프로그램은 개발도상국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고, 이러한 수요 증가에 힘입어 한국 정부는 보다 일관되고 체계적인 개발협력 채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1987년 개발도상국 정부에 개발사업에 대한 양허성 차관을 제공하는 경제개발협력기금(EDCF)을 설립했다.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설립되어 무상원조 및 기술협력 프로그램을 관리하였다.
OECD 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공적개발원조는 22억 달러로 8.6% 감소했다.
5_MAJOR POLICY DIRECTIONS
- 시민사회단체 및 민간부문의 KOICA 사업 참여를 독려
- 비구속 원조 확대.
- ODA 규모와 무상원조 비율을 확대
- 협력국의 니즈에 부합하는 성과중심 경영시스템을 구현
- 한국의 개발 경험과 비교 우위를 협력 프로젝트에 적용
- '선택과 집중' 원칙을 유지
- ODA 이행역량 강화
6_BUSINESS
- 한국국제협력단은 제1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사업을 - 한다.(한국국제협력단법 제7조).
- 자금·시설 및 기술 지원 등이 결합된 국제개발협력 사업
- 개발컨설팅 사업
- 연수 사업
- 전문 인력 파견 사업
- 해외봉사단 파견 사업
- 재난구호 등 인도적 지원 사업
- 국내외 민간단체와의 협력사업
- 외국의 원조기관 및 국제기구와의 협력
- 국제개발협력에 관한 이념 및 정책의 수립 등을 위한 조사·연구
정부가 위탁하는 사업
제1호부터 제10호까지의 사업에 따른 교육 훈련·홍보와 그 부대사업
그 밖에 국제개발협력을 위하여 필요한 사업
7_DETAIL WORK
대외 무상 원조 사업
상기한 대로 외교부 산하 준정부기관으로,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즉 공적개발원조의 기제 아래, 대(對)개발도상국 무상협력사업을 전담하고 있다. 원조수여국에서 원조공여국으로 발전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인 우리나라는 전담 기관의 대내외적 필요성에 기반하여 한국국제협력단법에 의해 1991년 연건동 청사를 시작으로 2008년에 현재 본부인 성남 신청사까지 확장이전되었다. 국가별/대륙별 협력 사업(주로 프로젝트형)이나 국제기구 협력 사업, 민관 협력 사업, 개도국 연수생 지원 사업, 해외 긴급 구호 사업, 그리고 하기한 해외 봉사자 파견 사업을 주 업무로 하고 있으며, 국가별 프로젝트 사업이 사실상 주업무이지만 일반인에게는 해외 봉사자 파견 사업으로만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40개국 이상에 해외 사무소가 있으며 심지어 USAID 대응 사무소도 있지만, 해외 사무소가 있는 국가 중 봉사단원이 없는 국가도 있다.
글로벌연수사업
연수사업 '씨앗(CIAT)'은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발전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개도국 공무원, 기술자, 연구원, 정책결정자 등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국가대표 인적자원개발(HRD) 사업이다.
개발도상국 공무원 대상 초청연수사업은 우리나라가 시행한 최초의 대외원조사업으로, KOICA 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1963년 아직 개발도상국이던 한국이 남남협력의 일환으로 미국 USAID의 재정지원을 받아 초청연수를 실시하였으며, 1965년에는 이미 한국은 자체 재원으로 초청연수를 시작하였다(국제개발협력의 이해, 한국국제협력단(2013)).
이후 1991년 KOICA가 설립되어 그 해 36개 과정에 362명이 초청되었으며, 매년 초청인원이 증가하여 2013년에는 총 4,800여 명의 개발도상국 공무원, 전문가들이 한국의 개발경험과 지식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였다. 초청연수사업은 ‘한국의 개발경험 전수’라는 목표와 함께, 개발도상국에서 신흥공여국으로 거듭난 한국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경제·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개도국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으며, 이에 부응하는 성과를 거두어 오고 있다.
지구촌 체험관
현재 KOICA가 개발지원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수여국들의 문화를 접하기 힘든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별 전시, 글로벌 전시, 기타 여러 전시들을 하여 간접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성남과 영월 각 두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 성남 신청사의 본관에서 숲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지구촌 체험관은 기존에 염곡동 월드프렌즈교육원 1층에 있었던 지구촌 체험관을 부지 안에 있는 1층짜리 건물로 이전 개관하게 된 것이며, 영월 지구촌 체험관은 영월 월드프렌즈교육원에 있다.
현재 성남 지구촌 체험관은 리뉴얼 작업 중이며, 재오픈 날짜는 아직 미정이다.
해외 자원봉사
KOICA 자원봉사단에 참여하면 여러 경제적 낙후국가에 가서 기술 및 의료, 교육 등 여러 분야의 자원봉사를 평균 1~2년 동안 하게된다. 2020년 현재 WFK봉사단 종류에는 KOICA 일반 봉사단, 프로젝트 봉사단, 드림봉사단, KOICA 자문단 등이 있다. 기본적으로 여느 해외봉사 프로그램과 달리 1~2년[7]의 장기 복무 형태를 띄므로, 어지간한 인내심만으로는 버티기 힘들 뿐더러 안전 사고 등에 휘말리지 않는 운도 많이 필요하다.
분야는 낙농업에서 첨단기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국제협력단에서 주력으로 하는 분야는 한국어 교육과 컴퓨터 교육. 실제로는 (한국에서의 업무 특성상) 간호 분야의 인기가 높았으며, 파견국의 치안이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믿고 맡길 수 있는 (국제협력봉사요원이 있을 당시에는 특히) 태권도 분야도 많다.
선발 단계에서부터 안내는 1~2년간의 파견을 안내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당연히 중도에 귀국할 수 있으며 아래에 설명할 지원금 때문에 대체로 1년간은 파견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2년을 다 채우더라도 최대 1년을 연장을 할 수 있고, 최대 3년동안 활동이 가능하다.
해외 봉사라는 것 자체는 우리 나라가 6.25 전쟁 이후 겪었던 참상을 극복하는 데에 세계 각국의 선진국이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해주던 당시의 모습과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이러한 지역에 국제협력단이라는 국가기관이 나라의 명예를 걸고 해외봉사단원을 파견하는 것이므로 최근 유행하는 NGO 해외봉사가 짧으면 며칠, 길어봐야 몇 주 기간이고 보통은 참여비를 지불하는데다 현지에서 단체로 활동하며 파견 전 교육 및 파견 도중 지원이 허술한 것과는 정 반대의 특성을 갖는다.
대표적으로 해당국가에 가서 생활하는 생활비나 여러 비용을 지원하며, 매월 60만 원 정도의 귀국준비금이 국내의 은행계좌에 예치되다가 6개월 이상 해외 봉사 후 귀국하게 되면 일시불로 지급된다.
또한 현지 파견 후에는 물론 60여개의 수혜국 각각의 사정이 천차만별이지만, 대체로 한국의 '시' 정도 규모 도시에 적게는 1~2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인원이 배치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모두 다른 기관으로. 즉 파견된 근무 기관에는 한국인이 나홀로 있으며 슛 볼은 나의 친구 다른 한국인 봉사단원을 만나려면 최소 차로 30분은 가야한다. 다만 운이 좋은 경우라면 같은 동기끼리 같은 기관에 파견이 되는 경우도 있고, 선임단원과 같이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남자 단원의 경우는 더 열악하여, 아예 혼자 파견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유일하게 필리핀과 르완다, 오세아니아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영어를 (제2)모국어로서 사용하는 국가가 거의 없으므로 파견지에서는 간단한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국내 및 현지도착직후 합산 4개월여의 현지어 교육을 받게 된다. 근무지로의 배치 이후에는 한국어 교육과 같은 특수한 분야가 아닌 이상 한국어를 쓰는 현지인이 있을리 만무하고 운이 좋다면 영어를 아는 현지인이 있어서 가끔 농담이나 건네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얄짤없이 현지어를 써야한다.
다만, 국가기관이 보내는 봉사단원이다보니 신변안전의 문제가 있기에 TV에서 보이는 해외봉사활동처럼 신발도 못신는 아프리카 꼬맹이들에게 의자 만들어주고 책상 만들어주는 정도의 일은 전혀 없다. 실제로 치과위생사 분야로 파견을 나간 단원이 한국대사관 바로 옆 병원에 배치돼서 한국대사관 직원, KOICA 직원, KOTRA 직원들 스케일링만 줄창 하다가 회의를 느껴 중도귀국 하는 사례가 있었다. 반면, 이러함에 불구하고 파견국의 인프라가 너무 나빠 컴퓨터 분야로 파견을 나간 단원은 학교에 도무지 전기가 들어오질 않아 전원이 꺼진 컴퓨터를 앞에 놓고 2년동안 자판 연습만 시키고 돌아오는 경우도 다수.
기본적으로 한국국제협력단은 인적 자원의 지원만을 하는 것으로 방침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현장지원사업이라 하여 단원의 분야에 맞춰서 물적 자원도 지원하고 있다. 이전에는 학교 건물을 지어주는 등의 토목지원도 종종 있었으나 하도 사기를 많이 당해서[12]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건물은 잘 지어주지 않는 편. 더군다나 현장지원사업은 최대 5만 USD까지만 신청할 수 있으므로 점점 물가가 올라가는 개도국의 경제상황, 조금이라도 더 돈을 남겨먹으려는 현지상황 등을 고려해보면 5만 USD로 건물을 짓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요즘엔 건물 리모델링을 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구매해주는 경우가 대부분.
사실 봉사단 사업으로는 세계적으로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국내봉사로 비유해보자면, 평창 동계올림픽 자원봉사에 지원해서 갔더니 봉사자가 계약업체 선정해 가로등 설치, 화장실 설치 등 자그마한 사업을 하라는 셈이다. 이러다보니 국가별로 2~3만불짜리 자그마한 사업이 몇십개에 달하지만 사실 진행하는 봉사자가 내가 했다 뿐이지 실제로 어디에 얼마나 혜택이 돌아가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파견된 단원들은 기본적으로 KOICA 소속 행정원의 통제와 관리를 받게 되나, 각 국 오지에 뿔뿔히 흩어진 50~100여명의 봉사단원을 대사관 옆 KOICA 사무실의 2~3명밖에 되지 않는 턱없이 적은 수의 행정원이 관리하다보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부지기수. 행정원들은 차기 봉사단원의 수요조사까지 겸하는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봉사단원들의 관리가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실제로 국제협력봉사요원을 포함한 봉사단원들은 근무지/주거지를 이탈하는 경우 안전확보를 위해 반드시 합당한 사유와 함께 이동신고서를 제출하게 되어있으며, 승인을 받아야만 이동할 수 있는데, 종교활동을 위해서 교회에 가야하는데 교회가 근무지에서 두시간 떨어진 수도에만 하나 있어서 일요일에 외출을 해야합니다 하는 상황에서 이 룰이 단원과 행정원의 귀차니즘 앙상블에 의해 잘 지켜지지는 않으며, 지켜진다 한들 안전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또한 봉사단원들은 마찬가지로 안전확보를 위해 운전이 금지되어 있는데, 수요처 조사를 부실하게 해서 교통편은 커녕 포장도로조차 없는 현지 시골마을에 파견을 시켜놓으니 어불성설이 된다.
이처럼 빈곤속의 빈곤(?)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해외봉사단원의 생활이다.
2020년 기준으로 1달 국내 재정착 적립금이 월 60만원으로 2년 만료시에 1,440만원에 달한다.또 국가별 생활비도 나라별로 다르긴 하지만 현지인 기준 중산층 가족 생활비정도는 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단원이 단신 생활하는 점을 감안하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봉사단원으로서는 생활하고 아껴서 가끔 가까운 국외여행을 준비할 정도는 충분하다. 이미 일본 자이카 단원보다 물질적 지원이 많은편으로 정부 파견 단원중에서는 미국, 독일, 영국 등 주요 국가 봉사단 지원금액을 압도하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이때문에, 코이카에서 주장하는 글로벌 인재 양성의 취지에 맞지 않는 생계형도 점점 많이지는 추세이다. 2년짜리 봉사를 나라만 바꿔가면 3~4번씩 하거나 봉사단, 해외인턴 등을 전전하다가 나이만 먹고 취업시기를 놓쳐 코이카 언저리에 떠도는 유형의 사람도 많아지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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