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난 지 49일째 되는 날이다. 요즘 늘 그렇지만 이른 새벽에 깨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을 보고, 느릿 느릿 노동력이 소요되지 않는 일을 하고 운동 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며칠 전 강의자료를 준비하다가 김현 선생의 책을 다시 들췄고, 내가 원하던 글의 다음 페이지에 있던 또 다른 글 한 편을 발견했다. 전에도 읽은 글이었지만, 다시 읽는 마음은 전과 달랐다. 실감의 차이였는데, 거의 있고 없음의 관계와 같았다. 글의 제목은 <아버님의 죽음에 대하여>. 그이의 하늘이 무너지고, 한달이 지났을 즈음 쓰여진 글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아버지에 대한 회상,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삶의 지표들에 관해 담담히 써내려간 짧은 글이다.
글은 느낌을 넘쳐선 안된다.
내가 도달한 최근의 생각이다. 이 말은 창작하는 심리적 태도에 그치지 않고 창작방법에 대한 재고이기도 하다. 김현 선생의 글은 느낌을 넘치는 정도가 아니라 느낌을 절제한 글이다. 내 생각을 실증해 주는 고마운 글이다. 그런데 그 절제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평상시 닦아온 내공을 빼놓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글을 썼을 때, 김현 선생이 아주 젊었었다는 사실도 그의 절제를 도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현 선생의 아버지는 유서를 남겼지만, 나의 하늘은 글을 통해서나 말을 통해서나 남긴, 아무런 유지가 없다. 그렇지만 내게는 아버지가 남긴 유지가 차고 넘친다. 유지의 형식을 빌진 않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그이의 잔잔한 음성이, 장마져 불어난 시냇물이 사나흘 빠져나가, 이제는 평상시의 수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한결 맑아진 물살이, 골골골 흐르는 소리마저 투명하게 내 귀 안으로 흘러들어온 덕분이다. 49재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그 소리를 다시 듣는다. 내 몸 안을 울리는 아버지의 말씀, 49일 동안, 혼자서, 오직 그이 혼자서 얼마나 먼 길을 걸어가셨을까. 소리는 이렇게 가까이 들리는데...
이렇게 써내려 가면 글쓰기에 대한 최근의 내 각성이 흔들릴지도 모른다. 하늘이 무너지기 전, 딱 한달 전,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서 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던 날에 쓴 글이 있다. 글을 써놓고 부끄럽고 염려되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글. 조용한 시간에 일어나니 갑자기 그 글이 떠올라 다시 살펴본다. 이렇게도 얄궂은 운명의 글도 있던가. <지상의 그리움>이라는 제목의 글. 사후적으로 다른 의미로 미끄러지는 글. 미끄러져 간 어디선가 <지상의 그리움>은 무의식의 핏줄이 어떤 예감을 당겨서 쓴 글이 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 김현 선생의 절제를 흉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49재날, 내 하늘을 하늘로 보내드리는 글을 담담한 마음으로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사전에 쓴 글로 나의 미천한 사후적 추모를 대신 한다. 하늘이 무너지기 전, 그날로부터 하루도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면 하는 꿈 같은 바램을 담고. 그러나, 지상의, 천상의 명령에 따라 오늘 나는, 아버지를 잘 배웅해 드려야 한다. 이 모순을 오늘이 지나기 전에 해결할 수 있을까.
지상(地上)의 그리움
며칠 전 아버지가 또 가출을 감행하셨다. 작년부터 시작된 잦은 집 탈출의 원인은 어머니의 잔소리. 몇 년 전 찾아온 어머니의 의붓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최근에는, ‘아버지가 총각시절부터 끌고 다녔다는 여자가 밤마다 찾아와 행악을 한다’는 데까지 이어졌다. 평생을 지켜본 바 아버지의 능력이자 미덕 중 하나는 ‘참고 견디는 일’이다. 그 유전자만은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기 싫으셨던지 오직 자신의 여윈 몸 안에 꼭꼭 다 여미고 아버지는 여든 다섯 해를 살아오셨다. 그런 아버지가 가출을 하기까지, 얼만큼의 귀 아픈 시간이 있었을까,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신 말씀으로는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아는’, 나와 형제들과 아버지께는 생면부지 ‘듣보’인 ‘그 여자’에 관한 것을 빼면 너무나 온전하고 밝고 적확하기까지 한 사리판단, 따뜻하고 온유한 헤아림으로 당신 가족의 여집합들을 헷갈림에 빠뜨리신다.
집을 나서신 아버지의 출처는 당신 댁에서 차로 이십 분도 안 걸리는, 둘째 아들네, 바로 ‘우리 집’이다. 세종의 자기 건물에서 실내골프연습장과 오리백숙집을 손수 운영하는 형은 사업차 하루도 쉴 날이 없고, 두 동생은 이 도시와 이 나라의 바깥에 있다. 대학과 평생교육기관에서 강의를 하고, 나머지는 남는 시간인 내가, 아버지 가출의 비호자이며 보호자가 되는 것은 자의반 타의반, 당연지사다.
둘째 아들네로 오시는 것이니 엄연한 의미에서 가출이랄 수 없고 노부부가 ‘서로 보호자’인 처지에 한 나절도 숨겨질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가출 결심은 곧장 전화로 내게 전해지고, 부모님 댁에 가서 아버지를 모셔 오고, 하루나 이틀만에 그이가 “이제 그만 ‘네 어머니’에게로 가야겠다”고 하시면 다시 모시고 가는 것도 내가 사전에 어머니께 다 알려드리고 나서 하는 일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가출의 무게가 덜하는 건 결코 아니다. 나날이 잦아지는 횟수 만큼이나 어머니와 분리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의지도 단단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아버지와 둘이 되어서 나누는 얘기는 어머니와 둘이 되어서 나누는 그것처럼, 다 함께 하는 자리에서 나누는 그것과는 다른 얘기들이다. 둘째 아들을 하고만 공유하는 이야기가, 두 분 사이에는 비밀이, 만들어진 것이다. 비밀이란 60년 넘은 연인 사이에 감추어야 커지는 신비감이나 매혹이 아니라 순전히 서로에 대한 고자질이다. 도덕적 가치가 개입할 수 없고 사리판단이나 시시비비의 대상이 못 된다. 치매가 근본원인이라는 걸 어머니를 빼고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치매의 ‘ㅊ’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며, 가족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요양원’은 절대 사절이라고 앞막음까지 해버리신다. 어디서 요양원 공포증이 생기신 것일까. 의사와 상담하여 진단을 받고 약을 드시면 진행을 늦추고 호전될 수 있다는 충고도 어머니에게는 악담에 불과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형제들 간에 합의와 협력이 중요한데, 형과 나는 근본인식이 다르다. 형은 현상유지파이고, 나는 근본해결파인 탓이다. 현상유지파는 느긋하고 근본해결파는 성마르다. 근본해결파는 빨리 결론에 닿길 원하고 현상유지파는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진단하느라 통화 시간을 아주 길게 쓴다. 정치적 논쟁처럼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성마른 쪽의 감정선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오갈 무렵, 통화가 종료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그 시간들은 결과적으로 현상유지파의 의도가 관철된 세월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 세월의 표정은 나날이 달라져 잦은 언쟁, 깊어지는 치매, 그리고 잦아지는 아버지의 가출과 귀가의 반복으로 이어져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몸과 마음의 상처들을 포함한 얼룩들을 노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기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셨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요사이 ‘아버지가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하고 있다. 그 말들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내후년이면 아버지는 이 지상의 분이 아니다. 요즘 나는 가족들에게서 이와 관련된 언설이 나오는 걸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내 안의 깊은 직감이나 얕은 느낌들은 벌써 ’아버지와의 이별‘을 나와 친연한 것으로 연결시키려는 육체적 실감을 포함하고 있다. 이건 솔직한 고백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 혹은 그이를 댁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시간의 감정적 밀도는 순간순간 달라지는데, 존재론적 밀도의 변화다. 존재란, 왔다 간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시리즈 세 번째 영화에서 내게 강렬하게 남은 대사는 이것이다. 왔다, 간다. 존재들끼리의 가장 명백한 실존적 상황도 두 가지, 만남과 헤어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고 죽는다. 아버지가 그러할 것이고 어머니도 그러할 것이고 나도 그러할 것이다. 이 숙명을 누가 피하랴. 불과 몇 십년을 사이에 두고, 누구는 그 뻔하게 다가오는 진실에 어둡고 누구는 육체가 확인시켜주는 사실을 육체로 받아안고 수긍하는 것 뿐이다.
한 달 전 아버지는 당신이 근무하셨던 마곡사 인근의 국민학교에 가보고 싶다고 청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의 표현으로는 마곡학교다. 그 학교들에 근무하셨으면서 제 이름이 아니라 정안학교, 월산학교, 인풍학교, 이런 식으로 명명하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가족들을 시골에서 대전으로 이사시켰는데 당신은 예상과 달리 거기로 발령이 나셔서 인연을 맺은 마곡학교. 그래서 나에게 마곡사는 조계종 교구본사나 김구 선생의 피신처라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중년시절 마곡학교와 더불어 떠오른다.
그런데 신축회관이 지어지고 있는 학교마당을 한참 둘러보신 다음, 캠핑용 의자에 앉자마자 아버지는 안 하시던 말씀을 하셨다. 꿈에 아버지 어머니, 너에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오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껏 꿈에 한 번도 안 보이던 분들이 오셨는데 어머니가 먼저 보이고 또 아버지가 보이길래, 나 어떻게 해요? 여쭈어보니,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더니 바로 사라지시더라. 꿈을 깨고 한밤중에 일어나 한참 울었다.
아버지는 눈물이 별로 없는 분이셨다. 할머니의 장례식 날, 관이 방을 나서면서 문지방에 놓인 바가지를 깨뜨리는 의식의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의연하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크게 통곡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그 눈물이 놀라웠다. 고모나 사촌누이들이 연신 내던 곡소리보다 단 한 번 내뱉은 그 짧은 통곡에서 모자지간 사별의 실감이 더 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처음 안 사실, 아버지가 저렇게 우실 수 있는 분이라니! 그게 사십 년 전의 일이니, 내 기억 속에 아버지의 낙루가 그 이후로도 그만큼 드물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요즘 아버지는 내게 자주 눈물을 보이신다. 꿈 얘기를 하시면서, 어머니 말씀을 하시면서. 그리고 말 없는 말을 한숨 속에 담으시면서. 그러면 내게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도 누군가의 예쁜 자식이었지. 귀여움을 받고 재롱을 떨던 시절은 멀고 이제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누를 길이 없어 꿈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려니.
며칠 전, 아버지와 나는 가출 길에 올라 평소와 다른 행로를 잡았다. 가출시간이 너무 일러서 아직 오전이었다. 아버지 집에서 아들 집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것 말고도 부자지간에 가출의 해방감을 만끽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동생에게 전화를 거니 마침 이 도시에 와 있었다. 삼십 분 후 삼부자가 된 일행은 아버지의 바람을 따라 공주로 향했다. 신관동에서 교원연수원 가는 길 어딘가에 전에 봐두셨던 실버타운이 있는데, 거길 가보고 싶다셨다. 전에 봐두셨다는 그날도 벌써 십 년도 넘는 언젠가였다. 아버지의 기억에만 의지해 찾아가다 보니, 공주에서 세종으로, 장기면과 장군면으로, 공주 출신인 나도 모르는 길을 한참이나 헤매다녔다. 그러는 사이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전 7시, 정오, 오후 7시. 1분도 늦으면 곤란한 아버지의 식사시간이었다. 정오를 삼분쯤 남기고 전의에서 공주로 난 길 가에서 있는 된장 정식집을 발견했다.
주차장에 차가 많이 있는 걸로 보아 맛집이 틀림없었다. 과연 실내에는 사람 천지였고, 몇 남지 않은 테이블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긴 기다림. 주방에 주인인 듯한 여자 한 사람, 그리고 홀에 서빙 일을 하는 여자 한 사람. 둘이서 눈코 뜰 새 없이 손발을 놀리는데도 일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정오에서 삼십분이 지나가는데도 우리 테이블에 밑반찬조차 깔리질 않았다. 이른 시간에 나오시느라 아침밥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다. 배고프시죠. 아니다. 괜찮다. 요새 별로 배가 안 고프다.
말씀과 달리 가출해서 어머니와 떨어진 지 몇 시간 째인 아버지의 얼굴은 수척했고 힘겨워보였다. 사범학교 다니실 때의 아버지, 170이 넘는 키, 기계체조부와 배구부에 속해 건장한 체격을 가지셨던 모습을 사진을 통해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늦은 점심을 기다리시는 팔순 중반의 아버지. 얼굴에 퍼진 버짐, 여름으로 가고 있는데도 긴 소매와 겨울 바지를 입고 보온을 하셔야 하는 마른 몸, 몇 가닥 남지 않은 흰 머리, 뼈가 드러난 목울대와 가슴. 아버지에게서는 가출 노인의 외로움과 궁색함이 하나도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고 있었다. 노인은 한 사람이 아니듯이, 노화도 한 단계나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노인과 노화의 나중은 뭔가를 감출 수 없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노인과 노화의 아주 나중 과정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생전 처음 보는데 낯설지가 않았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빛이 들어와 아버지의 자리를 환하게 비췄다. 그래서 아버지의 모습은 더욱 선연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나는 이 모습이야말로 아버지가 내게 주시는 ‘아주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감추지 못해서 드러난, 젊은 세상에게 들켜버린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자진해서, 스스로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감추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나는 내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 부끄러움도 없지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가 평생을, 남에게 친절했고, 착한 심성으로 살아오셨다는 걸 잘 안다. 아버지는 누구와 싸워본 적이 없고, 누구를 비난하거나 욕하는 걸 내가 들은 기억이 없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꾸밈이 없으셨다.
글을 쓰면서 나는 글이 어느 정도 꾸미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교직과목 이수을 포기하고 내 인생에는 가르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하던 청년시절로부터 지금껏, 내 무의식의 한 켠에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는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가.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시인이 오래 전에 남긴 이 한 구절을 가끔 되뇌인다. 시간의 풍화를 견디고 살아남는 시구에는 어떤 힘이 들어 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아니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긴 해도, 그 힘은 논리보다는 정서의 힘인 듯하다. 이 시구절에 나타난 정서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곁에 있는 대상을 향한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이다. 곁에 있는데 왜 그리운가. 이 역설을 논리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류시화 시인은 아주 든든한 우군이 수 천 년 전부터 그 정서적 역설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공자와 논어가 그것이다. 공자는 사상가이고 논어는 사상의 책이다. 그런데 나는 공자가 예인이며 논어를 문예학으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논어에 실린 글은 20장 512편이다. 모두 주옥같은 문장들이다. 그런데 그 중에 이색적인 글 한 편이 있다. 이 글은 논어 전편의 글 중에서 비슷한 대목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한 글이다. 여기서 공자는 아주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
9장 마지막 편.
“唐棣之華 偏基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子曰 :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당체지화 편기반이 기불이사? 실시원이!” 자왈 : “미지사야 부하원지유”
“산오얏꽃이 팔랑팔랑 나부끼네! 어찌 그대가 그립지 않으랴? 그러나 그대 집이 너무 멀구나” (시경의 이런 시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 공자가 말씀하시길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지. 진정 그립다면 멀 수 없다.”
류시화 시인은 곁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고, 공자는 그리운 대상은 멀리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사람은 그렇게 시를 쓰고 있고 한 사람은 그렇게 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운 대상은 멀리 있지 않다. 이 글을 처음 접하고 나는 너무나 어리둥절했다. 그리운 대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니. 하도 이상하여 논어의 여러 버전을 찾아보았다. 다 비슷한 해석을 내놓고 있었는데, 이가원 교수가 감수한 책에서는 이 말을 인(仁)과 연관지어 사랑의 실천 가능성으로도 부연설명하고 있었다.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멀리 있는 사람도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사랑의 실천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역설의 말이다. 지도상의 멀고 가까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분명 초월의 말이다.
지상의 삶은 초월의 세계로 가지 못하고 나날이 이별이 늘어난다. 이별이 늘어나는 만큼 지상에서의 그리움도 커져간다. 그리움을 커져가면 그대와 내가 가까워지는가. 시인과 예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과 예인의 말에 기대어 초월의 미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려보자. 지상의 그리움에도 역설은 있다. 멀리 있는 것만이 그리운 게 아니다. 나는 앞으로 오랜 세월, 며칠 전 아버지가 배고픔을 견디며 앉아 계셨던, 그 작고, 야위고, 기운 없던 그 모습을 그리워 할 것 같다. 아버지는 이미 내게 깊은 그리움을 심어주셨다. 나는 그 모습을 간직하고 살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되려나. 아버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아버지가 그립다.
그날, 우리 삼부자는 늦은 점심을 먹고, 아버지가 가고 싶어하셨던 공주 ‘원로원’을 기어이 찾아갔다. 아버지의 기억은 정확하셨다. 거기는 과연 신관동에서 충남 교원연수원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일요일임에도 장로 직함을 가진 여자분이 친정하게 상담을 해주었다. 1억원 이상의 보증금을 내고 한사람당 월 백 오십만원의 생활비를 지불해야 하는 실버타운에 아버지는 입주할 수 없었다. 나이가 아직은 만 85세 이하여서 자격이 있지만(1년 정도 여유가 있으셨다.), 상담여인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대번 요양원 입소대상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아버지와 동생과 나는 별 소득 없는 상담을 마치고 돌아서 나왔다.
며칠 전 가출은 이틀 만에 끝났고, 아버지는 어머니께로 돌아가셨다. 곧 또 연락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