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방이야기(343) 오유지족
황포돛배가 나루터에 닿았다.
지게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옥색 두루마기에 챙 넓은 갓을 쓰고 강바람에 수염을 휘날리며 한발을 뱃전에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화주,
주 대인이 덩치 큰 지게꾼을 불러올렸다.
“이 고리짝을 지고 오현을 넘을 수 있겠나?”
“걱정 마십시오, 나으리.
여기서 소인보다 힘센 사람은 없습니다요.”
지게꾼 오 생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고리짝을 들어보던 오 생원이 깜짝 놀랐다.
광목 보자기에 싸인 고리짝이 보기보다 무거웠다.
“나으리,
납덩어리가 들었습니까.
왜 이리 무거워요?”
낑낑거리며 배에서 내려 나루터 바닥에 고리짝을 놓고 큰 숨을 토했다.
고리짝을 지게에 올릴 땐 다른 지게꾼의 힘을 빌려야 했다.
‘꺼∼억 꺼∼억’ 까마귀 떼가 안 그래도 음침한 하늘을 갑자기 시커멓게 덮었다.
일생일대의 큰 거래를 앞두고 불길한 생각이 덮쳐와 주 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부싯돌로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온통 새까만 옷으로 몸을 휘감고선, 함께 배를 타고 오며 계속 주 대인의 동정을 살피던 기분 나쁜 녀석도 하선해
힐끗 주 대인을 째려보고 성큼성큼 나루터 주막으로 들어갔다.
하선한 다른 승객들도 우르르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 대인은 시원한 평상에 앉지 않았다. 안마루에 벽을 등지고 앉았다.
등에 칼을 맞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자위책이다.
대여섯 놈이 앞에서 달려드는 건 품속의 단검을 빼 들면 너끈하게 모두 눕힐 수 있지만 등 뒤 불의의 습격은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는 한 속수무책이다.
주 대인은 너비아니에 청주 한잔을 마시고 오 생원은 마당 끝자락 멍석 위에 앉아 국밥에 탁배기를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를 앞둔 기나긴 여름날이라 아직도 먹구름 뒤에 숨은 해는 중천에 있었다.
주 대인이 앞서고 오 생원이 고리짝을 지고 주막을 나섰다.
오현 고갯길 초입부터 또다시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었다. 고갯마루에 올랐다.
땀에 흠뻑 젖은 오 생원이 옹달샘 바위 옆에 지게를 세웠다. 벌컥벌컥 샘물을 마시고 퍼질러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언제 따라왔는지 검은 옷을 입은 기분 나쁜 놈이 오 생원에게 속삭였다.
“자네가 짊어지고 온 저 고리짝 속에는 경면주사(부적과 염주 등을 만드는 붉은색 광물)가 가득해.
주 대인을 죽이면 경면주사는 자네가 가져가 평생 이 고생 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고,
나와 내 형제들은 살이 뒤룩뒤룩 찐 주 대인을 뜯어먹을 수 있잖아.”
“안 돼!
오유지족(吾唯知足)!
나는 지금 내 생활에 족해.”
“병신 같은 놈.”
검은 옷 괴한의 날쌘 발차기에 오 생원의 아구창이 돌아가 바위 아래 처박혔다.
풀숲에서 큰 걸 보고 나온 주 대인이 품속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검은 옷 괴한은 주 대인의 머리 위를 획획 날며 발차기를 노리고 하늘을 덮은 까마귀들은 부리와 발톱으로 주 대인을 쪼아댔다.
주 대인의 단검 솜씨도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너무 빨라 단검은 보이지 않고 검붉은 핏줄기만 허공을 물들였다.
검은 옷 괴한이 피투성이가 돼 땅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더니 까마귀로 변했다.
주 대인의 단검에 널브러진 까마귀들은 피투성이 사람으로 변해 꿈틀거렸다.
“이놈은 살인을 밥 먹듯이 했던 강도였고,
이놈은 유부녀를 겁탈하고 항거하던 여인들을 수없이 죽인 치한이었고,
이놈은 살인청부업자였고….”
아구창을 한손으로 받쳐 든 오 생원이 깨어났다.
피 묻은 단검을 물로 씻어 다시 품속에 넣은 주 대인이 오 생원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 생원, 훌륭하오.”
“뭐가요?” “
까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잖소.”
“당연하지요.
오유지족!
소인은 다른 사람과 저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숨을 고른 오 생원이 말을 이어갔다.
“지게꾼 생활은 힘이 들지만 마음은 한없이 편해요.
튼튼한 다리를 준 부모님께 감사하고, 품을 받아 집으로 가면 보글보글 된장을 끓여놓고 기다리는 마누라가 반기고,
조끼 주머니에서 엿을 꺼내서 내 새끼들에게 나눠 주면 웃음꽃이 피지요.”
오 생원이 바위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자 주 대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고향에 처박아둔, 십여 년째 소식도 듣지 못한 마누라가 보고 싶어졌다.
늙은 어머니는?
아이들은?
땅바닥에 퍼질러 앉은 주 대인이 갑자기 꿇어앉곤 오 생원에게 큰절을 하자 깜짝 놀란 오 생원이 주 대인을 일으켜 세웠다.
“으으으흑, 당신은 부처요.
나의 죄를 사해주시오.”
주 대인이 갑자기 고리짝을 굴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고리짝이 떨어지며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가짜 경면주사가 흩어지고
또 부딪힐 때는 밑에 깔렸던 아편이 허공에 날렸고 부질없는 주 대인의 욕망도 산산이 부서졌다.
품속의 단검도 절벽 아래로 던졌다.
주 대인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대를 풀어 오 생원에게 듬뿍 내주고 일어서서 합장을 한 후,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유지족’을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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