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카페에 올라온 글들 중 16세기 개혁주의 신조의 글들이 비교적 많았습니다. 오늘은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 중 거목인 헤르만 바빙크가 『개혁교의학 개요』에서 지혜문학에 대해 설명한 것을 이 네모박스 글 아래에 올립니다.
『개혁교의학 개요』는 바빙크의 대작 『개혁교의학』(두꺼운 책 4권)을 한 권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벌코프가 두꺼운 『벌코프 조직신학』을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으로 요약한 것과 비슷합니다. 벌코프의 신학은 바빙크의 신학을 밴치마킹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빙크의 글과 결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자연적 은사라는 말이 이왕에 나왔으니, 칼빈의 설명을 기독교강요 1권3장1절에서 들어 보는데요. 가독성을 위해 본문 아래 댓글로 올립니다. 자연적 은사라고 하니까 더 생소해 하실 분들을 위해 "일반계시"를 중심으로 설명한 『IVP 성경주석: 시편•지혜서』의 설명도 댓글로 올립니다. |
예언과 시편 외에 호크마, 즉 잠언 혹은 지혜 문학이 있다. 요담의 우화(삿 9:7 이하), 삼손의 수수께끼(삿 14:14), 나단의 비유(삼하 12장), 드고아의 여인의 행동(삼하 14장) 등에서 드러나듯이, 이것 역시 자연적인 은사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혜 문학은 특별히 솔로몬에게서 그 고유한 성격을 갖게 되었고(왕상 4:29-34), 그 이후 바벨론 포로기 이후까지 다른 지혜자들의 잠언에서 (잠 22:17 이하), 욥기, 전도서, 아가서 등에서 계속되었다. 예언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시편은 하나님의 종들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때에 나오는 메아리를 표현하며, 또한 잠언이나 지혜 문학은 그 하나님의 뜻을 실제적인 삶과 행실과 관련짓는다. 이 지혜 문학 역시 신적인 계시라는 기반에 근거를 둔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이다(잠 1:7). 그러나 이 문학은 계시를 민족들의 역사나 영혼의 주관적인 체험과 관련짓지 않고, 일상적인 생활,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친구와 사회, 사업과 직업의 생활에 적용시킨다. 이것은 예언처럼 높은 차원에서 활동하지도 않고, 예언처럼 멀리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시편처럼 그렇게 깊이 탐구해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온갖 잡다한 일들 - 사람들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서 관심조차 두지도 않는 그런 경험들 - 을 주목하며, 사람들을 그런 경험들의 수준 위로 끌어올린다. 하나님의 섭리의 의로우심을 믿는 믿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혜 문학은 인간적인 면에서 전반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모든 시대에 걸쳐서 보존되는 것이다.
모세의 책들 속에 원칙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바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율법과 그의 뜻이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의 선포와 노래하는 자들의 노래와, 지혜자들의 잠언 속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 “제7장 성경”, 『개혁교의학 개요』(크리스천다이제스트).
첫댓글 위 글과 결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자연적 은사라는 말이 이왕에 나왔으니, 칼빈의 설명을 기독교강요 1권3장1절에서 들어 보기로 합니다. --- "자연적 은사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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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3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뿌리 박혀 있었다.
1절. 자연적 은사의 성격
A.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논란할 어떤 것도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모든 사람 각자에게 심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아래에 계속)
웨민이나 도르트 신조의 본성의 빛도 맥락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위에서 계속)
B.만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어디선가 발견된다고 하면 이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보다 시대에 뒤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이교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
비록 다른 면에서 볼 때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항상 무엇인가 종교의 씨앗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관념은 인류의 정신을 깊이 점령하고 있으며, 집요하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나라, 도시, 간단히 말해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가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기독교강요의 내용까지 같이 보니 따로 다른 자료를 찾아볼 수고가 줄어들어 좋아요^^
본문과위 댓글에서 자연적 은사라고 하니까 더 생소해 하실 분들을 위해 "일반계시"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IVP 성경주석: 시편•지혜서』을 보면 조금 더 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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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적인 관점에서 고려할 때, 잠언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람이 일반 계시를 활용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실재하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잠언은 도덕과 신앙을 사람들이 경험하는인생의 일부분으로 전제한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인간의 지혜와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게끔 자신을 내어 준다. 잠언도 그것을 격려한다. 또한 잠언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잠언은 현실 세계가 신앙과 도덕적 확신의 문제를 포함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잠언은 이런 점들을 배경으로 해서 좁은 의미에서 우리의 경험을 설정한다.
(아래에 계속)
잠언이 특정 책도 되지만 지혜문학 전체를 의미하는 것도 되지요?
2. 잠언은 배움과 종교, 도덕을 하나로 묶는다. 잠언은, 예를 들어 교육, 상담, 사업의 원리가 종교적·도덕적 고찰과 무관하지 않고 이런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잠언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배우는 것에 대해 '긍정'과 '부정'으로도, 혹은 '긍정 반 부정 반으로도 대답할 수 있다.
『IVP 성경주석: 시편•지혜서』, p.286.
야! 이 글 하나로 종합적인 공부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공감 및 댓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잠언이 참 어렵다고 생각했었습니다.ㅠㅠ 마음을 집중하여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변해 솔로몬의 통찰의 묶음으로 여겨지기도 해서요... 바빙크박사님의 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생각해 보아야 겠습니다.🤔📑👍
통찰과 성찰의 힘이 느겨지는 아파르님의 댓글에서 저도 선한 도전을 받습니다. 좋습니다!
일반적이다, 자연적이다 ↔ 특별하다! 이런 식의 구도가 신학에 많은 것 같아요. 오늘 이 글도 잘 읽었습니다.
구도를 잘 파악하신 것 같아요^^ 거기에 플러스(+), 구분되지만(distinguish) 분리되지는(separate)도 더하면 금상첨화입니다.
바빙크의 글을 통해서 자연적 은사(일반계시)로서 지혜 문학이 발전하여 온 과정을 짧게나마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또한 모세오경의 율법과 하나님의 계시와 뜻이 선지자들의 선포와 시편 기자들의 노래와 지혜자들의 잠언 속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설명이 아주 와닿네요.
좋은 댓글과 따뜻한 공감에 감사합니다.
칼빈, 개혁주의 신조들, 바빙크의 신학 등이 다른 듯 하지만 비슷비슷 하게 말하면서 개혁주의 바운더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참으로 배울 것을 많이 말하신 분이 바빙크라고 생각합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하나의 권역, 바운더리를 형성한 것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