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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목회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칼빈의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칼빈도 그의 형제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기 위해 노용 땅을 매각하고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길이 막혀 우선 제네바를 통해 스위스로 들어갔다. 제네바에서 하룻밤 이상을 지체하지 않으려 했지만 최근에 교황권 축출에 성공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의 강권에 못 이겨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기욤 파렐은 칼빈보다 20년 연상으로 성격이 급하고 추진력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칼빈 만큼 논리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파렐은 회심 이후 가톨릭과 결별하고 1521년경 개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향에서 노골적으로 활동하다가 바젤로 피신하고, 다시 몽베이야르로 가서 공개적으로 새로운 복음을 설교했다. 1533년에 피에르 비레와 함께 제네바로 돌아온 파렐은 이듬해 시민들의 지지를 힘입어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접수하고 설교했다. 여기서 미사가 아닌 성만찬을 실시하였다. 1536년에 도시 의회와 시민들은 ‘복음에 따라서 산다’는 결정을 하였다. 파렐은 개혁을 일부분 성공시켰지만 제네바 교회에 필수적이었던 조직과 신학적 근거를 주기에는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칼빈을 강력하게 붙잡고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칼빈은 파렐과 동행하면서 처음에는 신학고문을 해주는 정도에 머물렀으나 1536년 10월 초, 로잔에서 가톨릭측과 개혁교회측 사이에 논쟁이 붙었을 때 그의 진가를 확실히 발휘하였다. 성만찬과 교부들에 대한 풍부한 인용과 지식으로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역은 제네바 교회의 직제(constitution)에 관한 "조문"(Articles)을 작성한 것이었다. 칼빈은 성만찬을 매주일 시행하기를 원했으나, 의회는 일 년에 네 차례만 실시할 것을 주장하여 그 안을 받아들였다. 칼빈은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회에 감시인을 세울 것을 요청했다. 이것이 “감시인들”의 창설이었고, 칼빈주의 교회의 신제도가 되었다. 주교제 대신에 장로제를 택한 것이다. 이때 장로들은 국가에 의해 임명된 것으로 도덕적 측면을 감시하였고 개교회의 지침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장로들이 교회의 권한에 맡겨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려야 했다. 칼빈 생전에는 그가 생각했던 참된 장로제의 성립을 보지 못했다. 조문의 두 번째는 회중 전체가 부르는 시편 찬송을 다루었다. 그것은 초기 교회를 되살리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셋째 조문은 어린이용 교리문답을 마련한 것이었다.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되는 교육과 신앙고백서”로 된 이 교육서는 1536년판 기독교강요의 요약이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교육하기에는 너무 많은 내용을 지니고 있어서 교육적으로 부적합하였다. 교육서에 부가된 21개 조문의 신앙고백서는 교회 회원이 될 때 사용되었다.
조문은 4인으로 구성된 최고대표자의회에서는 받아들여졌으나, 200인 의회에서는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칼빈, 파렐, 맹인 목사 코로는 신앙고백을 선서하지 않은 자들은 공회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통고했다. 의회는 누구에게나 성찬 베풀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으므로 영적인 권위와 성찬의 지침을 시행하는 권리가 목사들에게 속하는지 도시 의회에 속하는지의 여부를 밝혀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200인 의회는 제네바의 의식보다 덜 급진적인 베른의 의식(세례반, 성만찬에서의 누룩 없는 빵 존속, 대축제들 준수)에 따라서 살기로 결정하고 목사들에게 그 결정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이 일로 설교자들은 설교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바젤로 간 칼빈과 파렐은 스트라스부르에 와서 일을 맡아 달라는 부처(Martin Bucer) 일행의 편지를 받고 곧 그들과 합류하였다. 칼빈은 파렐의 강요로 프랑스 망명자들을 위해 설교하였다. 스트라스부르는 교통의 요지로 독일의 루터파들이 프랑스의 복음전파자들과 네덜란드의 재세례파들, 스위스의 츠빙글리파들과 공존했다. 칼빈은 이곳에서 3년간 개혁을 이끌고 있던 부처의 친구이자 제자가 된다.
부처는 칼빈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7세나 연상이었던 부처는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제1세대들을 접촉하는 인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루터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재세례파와 투쟁했던 인물로 간주됐다. 칼빈의 조직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기독교강요』와 『교리문답』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의 실천신학은 여전히 정리되어야 할 것이 많았고, 동시에 제네바에서의 그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그에게 새로 태어나는 교회의 조직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는데, 부처학파 속에서 이러한 점을 크게 도움 받을 수 있었다.
성만찬의 훈련에 대해서 부처는 1531년부터 그 필요성을 느껴, 교구의 감시자(surveillant, Kirchenpfleger)들을 세웠다. 교구마다 세 명씩, 시 의회와 구역 행정관단과 교구회에서 동수를 취했는데, 그들은 국가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처는 장로를 임명하는 것은 교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부처는 교회 안에 목사만 있어서는 안 되며, 4중의 직제, 즉 목사, 박사, 장로, 집사의 직제를 최초로 만들었다. 칼빈은 이것을 제네바개혁에 적용하였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배워온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주일 아침마다 예배에서 사용되는 죄의 고백문은 부처가 작성한 독일어 텍스트에서 칼빈의 문체의 특징과 장중함을 더하여 1542년부터 제네바의 예배에서 사용하였다. 또한 1537년에 발행했던 교리문답과는 매우 다르게 쓴 『교리문답』도 부처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목사로 일할 뿐만 아니라 교수로도 활동했다. 자크 스튀름(Jacques Sturm)이 1538년에 설립한 대학에서 신약성서를 매일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에 중요한 신학적 업적을 이뤘는데, 1539년 『기독교강요』(Institution chrētienne, nunc vere demum suo titulo respondens) 제2판을 찍었다. 이것은 거의 2절판으로 17장으로 구성되었고 주제들도 방대했다. 2년 후에는 프랑스어 1판을 출판하였다. 최초로 주석서를 출판한 것도 스트라스부르에서였는데 『로마서 주석』이었다. 또한 “사돌렛에게 보내는 서간”을 썼다. 자크 사돌렛(1477-1547)은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주교였는데, 그는 추기경으로서 1538년에 제네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다시 로마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하였다. 제네바 사람들은 이 편지를 베른으로 보냈고, 베른 시민들이 칼빈에게 답신을 요청한 것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던 아픈 기억을 배재하고, 자신의 신앙 고백을 종종 담으면서 사돌렛을 심하게 질책하는 편지를 썼다. 칼빈은 『노래로 된 시편들과 성시들』이라는 시편집도 출판하였다.
칼빈은 그의 생애 동안 항상 격무에 시달렸다고 한다. 1539년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심부름꾼이 내 책의 첫 부분을 가지러 왔을 때, 나는 스무 장이나 되는 전지를(교정지로 80페이지 정도가 될 분량) 다시 읽어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강의가 하나, 설교가 하나, 써야 할 편지가 넷, 그리고 가라앉혀야 할 논쟁이 좀 있었고, 그리고 내가 대답을 해주어야 할 열 명의 방문객들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유아세례를 배격하는 제세례파들과 논쟁하였다. 이 논쟁은 대성공을 거두어 사람들이 수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다. 칼빈이 개혁 교회로 불러들인 재세례파들 중에 장 스트르되르(Jean Stordeur)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얼마 후에 흑사병으로 죽어버리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이때 칼빈은 아직 서른 살이 안됐고 연애경험도 없었다. 미망인의 이름은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였다. 칼빈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를 잡아끄는 유일한 매력은 그녀가 겸손하고 친절하며, 교만하지 않고 검약하며 참을성이 있고, 그리고 나의 건강을 염려해 준다는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지만 1549년 이들레트의 죽음으로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선량하고, 정숙하며 아름다웠다”는 평을 받은 그녀는 망명생활에서 오는 빈곤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이 시기에 칼빈은 책들을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칼빈은 자식이 없었다. 1542년에 유일한 아들이 태어났지만 며칠 내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제네바에서 논쟁 도중 칼빈의 반대자 중 한 명이 자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힐난했을 때, 그는 “내 아들들, 그들은 전 세계에 있다.”라는 말로 응수하였다.
칼빈은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여러 회담에 불려 나가면서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과 교분을 쌓기도 하였다. 멜랑히톤은 칼빈의 학식과 용기를 인정했으며 친밀감을 느꼈다. 칼빈은 『자유의지론』(Traité sur le Libre Arbitre)을 멜랑히톤에게 헌정했는데 이 책은 칼빈의 가장 중요한 저술 중의 하나이다. 루터와 칼빈은 교류가 없었으나 루터는 칼빈의 성만찬에 관한 책을 훑어보고는 ‘신앙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이며, 외콜람파드나 츠빙글리가 이 사람처럼 썼더라면 논쟁도 그렇게 길거나 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네바의 정치적 상황이 다시 바뀌어 1540년 기욤파(guiilermins)가 권력을 잡자마자 칼빈을 다시 돌아오게 하였으므로 이번에도 하는 수없이 칼빈은 자신의 마음을 죽여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네바로 돌아가서 죽는 날까지 제네바에서 개혁을 진두지휘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의 개혁을 이끌면서 독재자의 면모를 보였다고 하는 견해는 타당한 평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목사회를 지속적으로 주재하고, 신학 교수였고,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과 활발하게 서신교류를 하고, 종무원에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정신적인 권위가, 그의 신학이, 하나님께 바쳐진 헌신이 독재라고 불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종무원에 대해서 종교재판소처럼 간주되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그것은 칼빈주의 사상 속에서 교리를 실천하도록 독려하며, 망설이는 자들을 데려옴으로써 교회의 약한 지체들에 대한 목사들과 장로들이 함께 수행했던 뛰어난 ‘영혼의 치유’였다고 할 수 있다. 종무원의 훈련제도 이면의 사상은 하나님 경외사상이다. 특히 교제와 사랑의 성례전이 세속화되어서는 안 되므로 장로들에게 감시가 맡겨진 것이었다.
출교를 둘러싸고 제네바에서 일어났던 칼빈과 시 정부 사이의 갈등의 초점은 16세기라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영적인 권세와 시민적 권력 사이의 혼동이 계속되었다. 장로 임명과 출교 선언과 해제 선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포함하여 결재하려고 했던 것은 정부로서 역사적으로 시저교황주의(황제교황주의)로 이름 붙여진 정부의 주장에 대해서 칼빈은 격렬히 반대하였다. 칼빈이 반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부의 교회간섭이었고 이 문제로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는데, 돌아와서도 다시 그 문제와 싸워야 했다. 종무원은 시의 형법제도에 관계하지 않고 다만 종교적인 영역에서 잘못을 범하면 그들에게 성만찬 참여를 못하게 함으로써 훈계하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다. 칼빈은 시 정부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신정(theocratie)"은 시민생활을 지배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설교자로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만이 복종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정은 엄밀하게 말하면 성서정(bibliocratie)이었다.
4부에서 계속
첫댓글 정성이 들어간 글로 보이네요. 잘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책을 보고 한땀한땀 정리한 것이랍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