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1 / 스웨덴보그(스베덴보리)
서음미디어에서 스웨덴보그 사후 250주년을 맞아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원제는 '死者의 書') 를 출간(개정판)하였다.
한참 스웨덴보그 (스베덴보리) 에 빠져있던 때여서 책을 진즉 샀는데, 책의 몇 페이지를 함께나누고 싶다는 생각만 하다가 이제야 올립니다.
172페이지
9. 3세계(三世界)에는 어떤 인간이 가는가?
나는 영계에는 상·중·하의 3세계가 있고 그 밖에도 '지하의 영계'라고도 할 수 있는 지옥계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기술했다. 영계의 일을 기록하는 마지막 장으로 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에 대한 답을 써 두기로 하겠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이었을 때의 생애와 죽은 후에 그 인간의 영이 가게 될 영계와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었을 때의 생애가 그대로 죽은 후에 그가 영원한 삶을 보낼 세계를 거의 결정해 버린다 ---
이렇게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은 종교 등의 가르침에 의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말해 온 것, 종교의 교의(敎義)처럼 종교상의 방편이며 가공적인 것을 나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하고 또 결과적으로도 종교에서 설파하는 바와 중첩되는 부분은 있어도 종교에서 말하는 바와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지옥계를 말할 때에 조금 언급해 두었으므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리라고 믿는다. 즉 종교가 말하는 바는 그 종교의 교의에 맞는 올바른 생애를 보내면, 죽은 후에 그 보수로서 행복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반면, 그 종교의 교의에 맞지 않는 잘못된 생활을 보내면 그 별로서 지옥에 떨어지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영들이 행복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또 반대로 지옥계로 들어가는 것도 따로 인간일 때의 생애에 대한 보수나 벌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었을 때의 생애에 있어서 그의 영적인 내심(內心)이 영계의 어느 세계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되어 가는가 하는 것에 의해서 죽은 후의 그의 영 자신이 자기의 의지에 의해서 자기 세계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된다.
이것을 좀 더 간단하게 알기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영계의 상세계는 중세계보다 밝은 빛이 충만한 세계이다. 그러나 밝은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예에서 말하자면 그의 눈이 그 빛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그 빛에 맞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만약 그의 눈이 그와 같은 밝은 빛의 강렬함에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좀 더 어두운 세계를 자기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영의 영적인 마음의 창, 즉 영류를 받아들이는 창이 그만큼 열려 있지 않으면 안되는 셈이 된다.
만약 중세계나 하세계의 영류를 맞을 만한 영류의 창밖에 갖지 못한 영이 상세계에 들어가면, 그 영류의 강렬함이나 빛의 밝음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며, 영적인 영원한 삶을 온전히 보내지 못하게 된다.
요컨대 영적인 영류의 창이 어떻게 열려 있는가 하는 것이 그가 살게 될 죽은 후의 세계를 결정하는 것인데, 그 창이 열려 있는 정도는 인간이었을 때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나 영적인 마음을 열었는가 하는 것의 결과이다.
그러면 어떤 인간의 생애가 영적인 창을 연 생애이며, 어떤 생애가 열려 있지 않은 생애일까? 여기에 와서 사람들은 또 하나의 의문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영이라든가, 영적인 창이라든가 영적으로 눈이 뜨인 인간의 생애라고 해도 영에 관한 일은 너무나도 심원하고 또 높은 경지여서 인간에게는 생각해 볼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더러 말하라고 한다면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을 잃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육체를 가진 물질계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영계와 물질계의 양쪽에 속하는 존재이므로 영적인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마음의 창이 열린 생애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계의 질서를 알고 이에 유순하게 따르는 생애를 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계의 질서는 인간에게 유순한 마음만 있다면 그 존재를 느낄 수도, 그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지성에 의해서 아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계와의 사이에는 상응(相應)의 이치라고 하여 많은 사물에 대한 상응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계, 자연계에 있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대응물 전부가 영계에도 있고, 쉬운 이야기로 영 그 자체가 육체의 인간과 너무나도 닮은 존재, 즉 인간의 상용물임은 이미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제까지 기술한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유순하게 하고 자연계를 바라다본다. 새와 짐승이나 곤충 등의 동물계, 나무와 같은 식물계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자연계의 질서에 의해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질서에 솔직하게 감탄하고, 그 질서에 따라 유순한 마음으로 생활하려고 하는 인간은 이미 그 마음속에 영계의 질서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계의 질서가 자연계의 질서와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질서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인간의 사려를 초월한 통일적 세계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이러한 질서를 가령 희미하게나마 자기의 마음속에 느끼고, 이 질서에 따라 생애를 보내는 사람들은 영적인 마음의 창이 열려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은 후에 영계로 들어가게 되면 즉시 영계의 질서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고 이에 따른 영으로서의 생활을 실천하려고 꾀한다. --- 이런 사람들은 상세계에 들어가는 사람 들인 것이다.
이 영으로서의 마음의 창이 그다지 열려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정도에 따라서 중세계 혹은 하세계에 살게 되고, 그 창이 전혀 열려 있지 아니한 사람들은 영계의 빛을 견디어 낼 수 없어 지옥계에 가게 된다.
종교등에서 말하는 교의는, 그 교의가 진정한 것이면 이에 따르는 것은 대개의 경우 영적인 마음의 창을 여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마음의 창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몇 번이나 내가 말한 "정직하고 솔직한 마음"인 것이다.
또 표면적, 외면적, 세속적 지식이 영으로서의 마음의 창을 열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많은 경우는 반대로 마음의 창을 닫아 버리는 일조차도 있다.
나는 영계에서 세상에 있었을 때 사람들에게 학자, 현자(賢者)로서 숭앙받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이성(理性)에 있어서는 사회적 지식 등이 없었던 사람들보다도 훨씬 뒤진 영으로 살고 있는 것을 몇번이나 보아 왔다.
그것은 지식이나 학문을 영적인 마음의 창을 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하지 않고, 반대로 이 세상을 사는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이것이 그들의 '정직한 마음'을 잃게 한 결과 때문인 것이다.
첫댓글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책 172-176쪽을 옮겼습니다.
이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