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한인 선교 역사를 시작합니다.
태국의 개신교 선교는 1828년 8월에 시작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태국에 와서 생명을 바처 선교를 하였습니다. 한국은 후발 주자로 1956년에야 최초로 한국 선교사가 태국에 옵니다. 두가정의 섬교사가 같은 해에 태국에 들어오는데 1956년 6월 4일에 도착한 최찬영/김광명 선교사와 1956년 11월 초에 도착한 김순일/김윤희 선교사가 그들입니다. 선교사님 두가정은 당시에도 탁웡한 능력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다가 태국으로 오신 경우이고 김순일/김윤희 선교사님은 육군 군목과 일본에서의 유학 등으로 영어는 물론이고 탁월한 능력을 갖춘 분들이었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후배 선교사로 초창기에 태국에 오신 선교사님들이 이렇게 탁월한 능력을 가지신 분들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분들의 사역을 돌아보며 보다 더 정확한 기록을 남긴다는 자세로 저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해방후에 최초로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이신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자서전격인 최찬영 이야기와 필요한 자료를 참조하였고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김광명 선교사의 소천시에 그의 연혁에 대하여 밝힌 것등에 대하여도 참조하였고 비록 자서전에 나온 것이라고 해도 의문이 가는 것에 대하여는 다시한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억지로 맞추려고 시도하지는 않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은 그것대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기회가 되면 아직도 살아계신 최찬영 선교사님에게 문의를 해보아야겠지요.
기록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자료를 기준으로 하되 의문이 드는 것은 다시 한번 확인한다. 두번째는 태국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할 것이며 가능하면 연도별로 기록할 것입니다. 최찬영 선교사님도 태국에서의 사역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태국에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기술할 것이며 객관적인 평가를 할 것입니다. 저는 선교사는 선교사역을 통하여 평가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선교사는 부부의 이름을 같이 기록하는 것으로 합니다. 특별한 경우 혹은 혼자서 한 경우에는 한 사람의 이름만을 기록할 것입니다. 먼저는 최찬영/김광명 선교사의 파송이 갖는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나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임으로 부적절할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그후에 그들의 선교 사역과 선교 여정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덧붙일 것이다.
1.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해방 이후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한국 교회가 1913년에 중국의 산동성에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등 3명을 보낸 이후로 해외의 다른 나라로 나간 선교사는 1956년 6월의 최찬영/김광명 선교사가 최초이다. 그후 동년 11월에 태국으로 김순일/김윤희 선교사가 왔고, 1958년에는 고신에서 대만에 김영진 선교사가 갔고, 1961년에는 이대 파송으로 전재옥 교수가 파키스탄으로 갔으며, 1965년에는 말레이시아로 김성욱/이동숙 선교사가, 1966년 3월에는 태국 치앙마이로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송예근 선교사가 파송되었으며, 1968년에는 김응삼 선교사가 홍콩으로 파송되었다. 위의 경우에서 보듯이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한국교회에서 해방 이후에 타민족 선교를 위해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준비된 선교사였다.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준비된 선교사였다. 최찬영 선교사는 간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방후에 한국으로 돌아와초등학교 교사를 봉직하였으며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미군 통역관을 경험하였고 육군 군목을 경험하였다. 이후 생명의 말씀사에서 총무로 단기간 봉사하였으며 195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계획하다가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반면 김광명 선교사는 고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 대학을 졸업하였고 정식 의사는 아니었지만 결혼전에 장기려 박사를 도와 부산의 복음병원에서 같이 일을 하던 의학도였다. 특별히 김광명 선교사는 부친이 6.25때 순교하진 김예진 목사로순교자의 집안으로 믿음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유학을 가려는 찰라에 태국 선교사로 가라는 교단의 선교부의 제안을 받고 유학대신 선교사 길로 들어선 선교사이다. 당시 그들은 언어나 영성이나 사회적으로나 준비된 선교사였다. 그들은 유학을 보장받았으나 그 길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생애를 하나님께 들이고자 하나님께 헌신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3.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교회와 함께, 교단과 함께 선교사역을 시작한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는 교회의 파송을 받고 파생 선교단체 혹은 교단이 삼위일체를 이룰때 행복한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은 작금의 진리로 그와 같은 선교사들은 대다수가 무난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당시 장로교가 통합이나 합동으로 분열되기 전에 교단에서 선발하였고 영락교회(담당 한경직 목사)가 파송한 선교사였다. 당시 영락교회는 한국에서 선교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로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를 책임지고 파송하였다. 그들은 1955년 4월 24일에 영락교회에서 김성권 목사와 함께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고 여권을 마련하여 선교지로 나온 경우이다. 당시는 한국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여권을 만들기가 어려워 13개월이나 걸려 어렵사리 여권이 만들어졌고, 그나마 같이 헌신하였던 김성권 목사는 여권이 나오지 않아 선교사를 포기하여야 했다. 감사하게도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파송교회가 든든하였으며 한경직 담임 목사를 통하여 교단과의 관계도 돈독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특이할만한 사실은 파송교회의 담임 목사인 한경직 목사가 최찬영 목사를 영적으로 지도하며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계속 함께 하였다는 것이다. 한경직 목사는 그들의 결혼 주례목사이기도 하였고 최찬영 선교사가 첫텀을 마치고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데 태국 선교사로서 성서공회 총무를 하라고 권유하며 선교사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길을 제시하여 주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실 그의 사역은 현장 중심이 된 것보다는 기관사역이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파송교회와 파송 교단과 함께 일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것이 사실이다.
4. 최찬영/김광명 선교사의 사역은 기관 사역으로 평탄한 사역이었다.
파송교회와 파송 교단과 함께 일하기에 그의 사역을 대체로 평탄하였다. 이말은 결국 그의 사역은 태국 필드와는 그리 긴밀한 관련이 없는 사역이었다. 즉 태국 교회와 태국 사람들과 그리 많은 접촉이나 함께 함이 없는 사역이었다. 그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의 사역은 성서공회 총무라는 말이 어울린다. 실제로 그가 1956년 6월에 태국에 도착하여 1992년에 은퇴하기까지 그의 사역지인 태국에서 태국인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태국에 도착하여 언어를 배우는 기간(1956년 6월에 도착하여 7월부터 언어를 시작하여 1957년 말까지 태국어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에는 언제까지 언어를 하였는지 언급이 없다. 그가 선교사로서 사역을 시작한 것은 방콕의 삼얀 지역의 방콕 제2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만2년(1958.8월부터 1960년 8월까지)을 사역한 것이 태국에서의 사역의 시작이었고 실제로 태국인들과 함께 한 시간은 그의 생애가운데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김광명 선교사가 의사로서 자격이 안되었기에 의사로서 자격증을 따기 위하여 1966년부터 인턴이나 병원 사역을 위하여 부부가 미국과 태국에서 나뉘어져 있었으며 실제로 1966년부터는 김광명 선교사는 미국에서 거주하였던 것이다(신홍식 목사의 증언). 실제로 김광명 선교사님이 소천시에 그의 이력에도 1966년부터 미국에 가서 인턴을 하고 사역을 하였다는 것은 기록으로 나와있다. 신 목사님의 증언에 의하면 두 자녀를 미국으로 데리고 갔고 두 자녀는 최 목사님이 태국에 데리고 있으면서 자녀를 돌보기 위해 ㅊ히찬영 목사님의 어머님께서 태국에 오셔서 대신 돌봐 주셨다고 증언하셨고 그의 자서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최초의 선교사로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역이 태국의 선교 현장에 영향을 그리 많이 주지 못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언젠가 치앙마이에 있는 태국 성서공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의 성서공회 연혁을 달라고 하였더니 그들은 최찬영 선교사가 성서공회 총무로 일하였던 기간에는 역사로 포함시키지 않고 있었다.
5. 성서공회 총무로 특별히 중국에서 성서를 인쇄하는 문제로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다.
최찬영 선교사가 성서공회 총무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중국 성서공회의 일로 중국에 성경 출판과 인쇄를 위해 인쇄소를 설립한 것이다. 당시 그가 인쇄소를 설치할 때는 아직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벌이던 시대로 중공이 아직 남한과 수교를 하지 않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가 중국에서 성서를 인쇄하과정을 다 마치지 않았기에 는 공장을 만들고 이룬 업적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오늘날까지도 세게에서 성서를 인쇄하는 나라중에 한국과 중국이 쌍벽을 이룰 정도이니 당시 그가 중국에서 시도하여 이룬 그의 업적은 후세에 기리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찬영/김광명 선교사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로서의 그들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는 좋은 조건과 여건 속에서 파송 교회와 파송 단체와 함께 일하였다.
1. 최찬영/김광명 선교사의 태국 파송에 관하여
선교사의 파송은 파송 예배가 중심이 아니고 현장에 도착한 날짜를 기준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의 오래된 선교사들은 선교지 도착날짜가 아니라 파송예배를 기준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김정한 목사, 정승회 선교사).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1955년 4월 24일에 새문안 교회에서 태국 선교사로 파송하는 파송예배를 김성권 목사와 함께 파송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여권을 만드는데 13개월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김성권 목사는 여권이 나오지 않아서 결국은 선교사의 길을 포기하여야만 하였다.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는 13개월만에 여권이 나와서 동년 5월 24일에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있으면서 방콕에서 필요한 시장을 보고 그곳에서는 배를 타고 태국에 도착한 것은 1956년 6월 4일이었다. 최찬영/김광명 선교사님의 태국 선교는 1956년 6월에 도착하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의 선교관련 사람들은 1955년에 파송 예배를 드렸다고 하여 최찬영 선교사의 파송을 1955년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선교 현지에 도착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면에 있어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한가지 의문은 미국유학을 가기로 준비되어 있었다면 왜 여권을 마드는데 13개월이나 걸렸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혹시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2. 태국에서 도착한 후의 사역에 대하여
당시 태국교회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이나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한국 경제가 태국보다 못했고 선교사 역시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직제상 태국 목사들의 밑으로 가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태국 목회자와 같이 여행을 하는데 태국 목회자가 선물로 받은 빗자루을 잊고 그냥 왔는데 갑자기 생각이 난 태국 목회자는 최찬영 선교사에게 가서 빗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몸종을 부리듯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최찬영 이야기, 115면). 태국 목회자나 성도들은 처음에는 그에게 아짠이나 쿤이라는 존칭어를 그에게 붙여주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태국은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였고 6.25 동란시에도 한국으로 국군을 파송하여 도와준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1957년에 방콕 제2교회 담임 목사라는 사역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맞지가 않다. 왜냐하면 선교지에 도착하고 나서 최소 1년여는 현지어인 태국어를 배워야 했는데 김순일 선교사의 경우 1956년 11월에 도착하여 12월부터 1958년 2월까지 1년 3개월 이상을 언어를 배우고 사역지인 치앙라이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최찬영 선교사 또한 그의 책에서 1년여를 태국어를 배우고 설교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찬영 선교사 또한 1년여를 태국어를 배우는데 소일하였다면 최소 1958년 8월부터 1960년 8월까지 만2년을 방콕의 제2교회에서 교회 사역을 하였다고 기록디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김광명 선교사는 이미 태국에 올때 임신 6개월이라고 기록하였고 1956년 9월 29일에 아들 사무엘을 출생한 것이다. 그후 13개월이 자나서 1957년 10월 24일에 장녀를 혜란을 출생하였다. 그리고 오자마자 태국어 연수를 시작하였다고 한다면 아마도 1957년말까지는 태국어 공부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태국인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은 외국인 선교사에게 교회의 담임 목사 자리를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1년 반 과정의 언어 연수가 끝난 시점인 1958년 8월에 방콕 제2교회 담임목회자로서 사역에 가담하였다고 하면 이것이 좀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실제로 방콕의 삼얀교회를 방문하여 기록을 확인한 결과 1958년 8월부터 1960년 7월까지 방콕 제2교회 담임 목사로 사역한 기록을 확인하였다. 그후 김광명 선교사는 1956년 9월에 장남인 사무엘을 낳았고 1960년 9월에는 방콕 기독교 병원 원목으로 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역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머지 않아 1961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언제 안식년을 떠났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62년에 피츠버그 신학대학원 수학과 피츠버그 대학원 교육학 석사과정을 마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한국에 안식년겸 유학을 마치고 세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하여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62년 7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역추적한다면 대학원 과정을 1년 혹은 1년반 혹은 2년으로 할 경우에는 1960년 8월이나 1961년 봄에 안식년을 떠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1962년 6월까지 학업을 마치고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을 살피고 아이를 낳기 위해 한국에 1962년 7월에 도착하였으며 한달 후인 1962년 8월 17일에 차녀 미란을 낳았던 것이다. 기록은 그가 미국을 출발하면서 이미 태국의 성서공회의 총무로 취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본인이 성서공회를 방문하였을시에는 최찬영 선교사가 총무로 사역하였던 기간에는 아직 그들의 성서공회 역사로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아기를 낳은 후 3개월이 되던 때인 1962년 10월에 태국으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김광명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의료선교사인가?
수년전에 KWAM의 총무였던 김정한 목사는 김광명 선교사가 소천하였을때 그를 소개하면서 한국 최초의 의료선교사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였다. 김광명 선교사가 의과 대학을 나온 것은 맞지만 정식 의사가 된 것은 아니었고 태국에 도착하였을시에는 의사로서 병원사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임신 6개월이었고(?) 당장 외국어인 태국어를 1년 이상 배워야 했으며 온지 3개월만에 첫아이를 출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후 13개월만에 둘째아이를 출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 중에서 병원에 근무하였다는 기록은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린 사무엘에게 병원에 다니면서 이유식을 장만하는 일은 매우 힘든일이라고 하였다.그것도 갖난 어린 아이를 두고서 뱡원에 출근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태국은 자존감이 샌 나라여서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의사라고 하더라도 태국에서 다시 공부하여 의사로서 시험을 통과하여야 의사로서 일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가 방콕에서 의사로서 사역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금 주저함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저의 기준으로는 최초의 한국인 의료선교사는 1966년 3월부터 1968년까지 거의 3년 동안 멕켄 재활센타에서 의사로 사역하였던 송예근 선교사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김광명 선교사는 미국에 가서 인턴으로서 과정을 마첬고 병원의사로서도 인정을 받고 1974년까지 미국에 거주하며 병원에서 일을 하였다. 그가 1974년까지 미국에 있는 병원에서 사역하였다. 반면 송예근은 태국에서 정식으로 의사로서 병원에 근무하며 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한 교회인 산티탐 교회에서 한달에 한번 설교하며 그들에게 위생 교육과 산아제한 등을 실하며 의료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로볼때 김광명 선교사가 최초의 의료선교사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4. 그들이 태국에서 언제 철수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최찬영 선교사의 태국에서의 선교 사역과 성서 공회의 사역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태국에서의 사역을 15년이나 하였다고 하였으나 태국에서의 사역을 기록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956년 6월 4일에 태국에 도착한 최찬영 선교사는 그의 기록에 의하면 6월 15일에 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후 최찬영 선교사가 사역한 공식 기록은 1958년 8월에 방콕 제2교회인 삼얀교회의 담임 목사로 사역한 것이다. 담임 목사였던 위치안 왓기짜런이 유학을 가서 최목사님에게 담임으로 사역하도록 하신 것이다. 목사님은 성도들을 잘 목양하였고 많이 부흥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배는 오전에 세번을 드렸고 늦게 오면 자리가 없어서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고 한다. 교인 숫자도 1954년에 200명이었던 것이 최찬영 목사님이 담임이 되고난후 332명으로 늘어서교회 건축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샴얀교회 120주년 기념책자, 1998년, 12면) 그후 최찬영 목사님은 방콕기독병원의 원목으로 사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기간은 없다. 단 추측은 안식년을 가야했는데한번도 안식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담임 목사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을 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려고 할때 성서공회 총무직을 제안받았고 1962년 6월1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은 1966년에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직을 수행한 것이로 보이는데 연혁에는 62년에 시작을 같이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댓글 김광명 선교사님은 2017년 9월 16일에 미국에서 소천하셨다.
최찬영 선교사님은 2021년 10월 20일 미국에서 소천하셨다. 그의 묘지는 미국 LA. Frost Lawn Memorial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