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 이한응의 [춘양구곡]에 반영된 유가적 심미 의식
이원걸(문학 박사)
Ⅰ. 머리말 Ⅱ. 생애와 저술 1) 생애 2) 문집 체계 3) 시문학 특징 Ⅲ. [춘양구곡] 창작 배경 1) 산수 자연 인식론 2) 향토 산수 애호 정신 3) 퇴계의 산수자연관 수용 4) 한거자락의 시적 형상화 Ⅳ. [춘양구곡]의 형성과 전개 양상 1) 봉화의 구곡 원림 2) 춘양구곡의 지리적 특성과 설정 배경 3) 운곡천의 원두와 유선(서시․1곡) 4) 사미정과 풍대의 향기(2곡․3곡) 5) 연지와 창애정의 고절(4곡․5곡) 6) 쌍계와 서담에의 전설(6곡․7곡) 7) 한수정과 도연의 추억(8곡․9곡) Ⅴ. 마무리 |
Ⅰ. 머리말
중국 10대 명산의 하나인 복건성福建省에는 무이산武夷山이 있다. 이 산은 송대宋代 대유학자로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朱子(1130-1200)가 무이산 아홉 굽이에 성리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구곡가九谷歌’를 지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주자는 1곡에서 우뚝 솟은 대왕봉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을, 2곡에서 ‘옥녀봉’ 산수의 수려함을, 3곡에서 3천년을 버틴 ‘홍판교虹板僑’와 ‘가학선관架壑船棺’을, 4곡에서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웠다는 ‘선조대仙釣臺’를, 5곡에서 주자가 학문을 완성했다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6곡에서 무이산 제일의 바위산인 ‘선장암’을, 7곡에서 ‘도원동산문桃源洞山門’을, 8곡에서 여인의 젖가슴을 닮은 ‘쌍유봉雙乳峰’을, 9곡에서 ‘무릉도원이 따로 없고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고 노래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은 주자가 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이었기 때문에 남달리 존모했다. 특히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무이구곡’을 경영하고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은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여 그의 삶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삶속에 이를 체현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조선의 유학자들도 도처에 ‘구곡’을 경영하면서 ‘구곡시가’를 짓고 자연과 예술․철학이 융합된 거대한 ‘구곡문화’를 형성해 왔다. 영남 유림들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수용하여 ‘안동’․‘봉화’․‘문경’․‘성주’ 등지의 27곳의 ‘구곡’을 경영하였다. ‘구곡원림’의 경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명승지 아홉 곳을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처럼 경영함으로써 주자의 사상과 문학 정신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구곡시가의 창작은 기록상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의 「운문구곡雲門九曲」․「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가 그 시초이다. 박하담은 1536년(중종31)에 경북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을 비롯한 동창천東創川 일대의 빼어난 승경勝景을 ‘구곡’으로 경영하면서 「운문구곡가」를 지었다.
한국문학사에서 주자의 「무이도가」 수용은 성리 이념 체계의 강화와 함께 산수 문학사에 주요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조선조 16세기 지식인들 사이에 「무이도가」 차운이 유행했는데 이런 경향은 구곡시 창작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무이지를 탐독하거나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는 시대적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이후 조선조 유학자들은 주자의 ‘무이구곡’ 운영 형태를 계승하여 자연 풍광이 수려한 곳을 골라 구곡원림을 운영하며 구곡 관련 시문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 구곡시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구곡시는 성리 이념과 산수흥치를 시적으로 형상한 작품이다. 그동안 구곡시는 관련 연구를 통해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구곡시 연구 성과로는 구곡시 연구, 「구곡도」 연구, 구곡 관련 조경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로써 영남 구곡 원림 설정 및 경영의 대체가 파악되었으며, 구곡 시 창작 전통 체계도 이루어졌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영남 구곡문화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구곡문학의 대략을 연대별로 정리하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도산구곡陶山九曲」․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고산구곡高山九曲」․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무흘구곡武屹九曲」․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1599-1678)의 「오대구곡梧臺九曲」․우암尤巖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화양구곡華陽九曲」․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곡운구곡谷雲九曲」․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황강구곡黃江九曲」․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의 「성고구곡城皐九曲」․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1664-1730)의 「횡계구곡橫溪九曲」․옥소玉所 권섭權燮(1671-1759)의 「화지구곡花枝九曲」․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1715-1795)의 「석문구곡石門九曲」․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우이동구곡牛耳洞九曲」․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1778-1864)의 「춘양구곡春陽九曲」․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의 「포천구곡布川九曲」․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1832-1893)의 「옥계구곡玉溪九曲」․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1862-1938)의 「이산구곡駬山九曲」 등 구곡이 우리나라 산천 곳곳에 있지만 구곡시가를 남긴 대표적인 곳으로 ‘구곡’이라 이름 지어진 곳은 전국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경북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출중하게 명현 거유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수려한 산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구곡문화가 선진적으로 형성되었다. 봉화의 경우 ‘춘양’․‘법계’․‘구룡산구곡’ 등지에서 구곡이 경영되었다.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1778-1864)은 봉화군 춘양면에 춘양구곡을 경영하였는데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특히 이 지역은 병자호란 이후 태백오현 잠은潛隱 강흡姜恰(1602-1671)․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1594-1660)․포옹抱翁 정양鄭瀁(1600-1668)․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1604-1680)․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1595-1654)이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류로 합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가 수백 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나며 광활한데 춘양 지역은 그 중심에 처해 있다. 그래서 산세가 깊어 골짜기를 따라 시냇물이 흘러내려 구비를 형성해 가경佳境을 선사하고 있다.
경암은 ‘적연笛淵’으로부터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설정하고 「춘양구곡가」를 지었다. ‘춘양구곡’은 현 봉화군 법전면 어은동에서부터 춘양면 서동리 춘양중학교 앞까지의 운곡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물굽이를 따라 아홉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현실정은 당시의 자연 경관과는 개발로 인해 다소 변모되어 있다. 그 제1곡은 ‘어은동’, 제2곡은 ‘사미정’, 제3곡은 ‘풍대’, 제4곡은 ‘연지’, 제5곡은 ‘창애’, 제6곡은 ‘쌍호’, 제7곡은 ‘서담’, 제8곡은 ‘한수정’, 제9곡은 ‘도연서원’이다. 물굽이의 총 길이는 8.6km이다. 전 구간 도보 및 차량을 이용한 관광이 가능하다. 지금은 이곳들이 개발로 인해 훼손되고 폭풍우에 휩쓸려 예전의 아름답던 그 풍광은 온전하지 못하다.
본고는 봉화 춘양의 절경을 표현한 경암 이한응의 「춘양구곡」에 반영된 산수자연관과 심미 철학적 의미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경암의 생애와 저술 양상을 검토하고 시문학에 대해 개괄 정리한다. 이어 「춘양구곡」의 창작 배경으로 ‘산수 자연 인식론’․‘향토 산수 애호 정신’․‘퇴계의 산수자연관 수용’․‘한거자락의 시적 형상화’ 양상을 검토한다. 아울러 ‘봉화의 구곡 원림’․‘춘양구곡의 지리적 특성과 설정 배경’을 정리한 뒤, 구체적으로 「춘양구곡」의 전개 양상을 검토하여 「춘양구곡」에 반영된 경암의 심미 의식을 검토하고자 한다.
Ⅲ. 생애와 저술
1) 생애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1778-1864)의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자는 중모仲模, 호는 경암敬菴이다. 시조는 고려 때 현리로서 생원시에 합격한 석碩으로, 밀직사密直使로 증직되었다. 아들 자유子攸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이르렀다. 그는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후일 안동安東으로 이거移居했다. 손자 정禎은 강개慷慨하고 큰 포부를 지녔으며 말 타고 활을 잘 쏘았다. 모적毛賊을 정벌한 공으로 이급二級의 벼슬을 받았으며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역임했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정禎은 계양繼陽을 낳았는데 단종端宗 때 진사進士가 되었지만 은둔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호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했다. 그는 예안禮安의 온혜溫惠로 이거移居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계양溪陽은 우堣를 낳았는데 호는 송재松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판서戶曹參判에 이르렀다. 송재는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당대에 추앙을 받았다. 형 찬성공贊成公 식埴과 계현사啓賢祀에 병향幷享되었다. 이분들은 퇴계退溪(1501-1570)의 숙부로서 퇴계를 훈적訓迪한 공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대를 지나 고조부 동표東標(1644-1700)의 자는 군칙君則, 호는 난은懶隱이다. 난은은 도학과 문학으로 중망을 받았으며 출처대의에 분명하여 ‘소퇴계小退溪’라는 칭호를 받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손위遜位 때 상소문으로 극간極諫하여 청절淸節이 빛났다. 1741년(영조17)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으로 추증되었으며, 자손들을 관직에 등용하라는 하교와 함께 ‘역주청의수립탁연[力主淸議樹立卓然]’이라는 증첩贈帖을 하사받았다. 이어 1784년(정조8)에 ‘충간忠簡[危身奉上曰忠 正直無邪曰簡]’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다. 증조부 제겸濟兼은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호는 두릉杜陵이다. 조부 중경重慶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호는 운고雲皐이다. 부친은 진굉鎭紘으로 호는 계애溪涯이다. 모친은 하산성씨夏山成氏인데 통덕랑 현인顯寅의 따님으로 응교應敎 이성以性의 현손玄孫이다.
경암 이한응은 1778년(정조2) 2월에 태백산 남쪽 봉화군 춘양읍 녹동鹿洞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크고 준수했다. 불행하게 3세에 모친을, 7세에는 부친을 여의고 이웃집 할머니 손에 자라났다. 조금 자라나서 백조伯祖 누실옹陋室翁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을 깨우쳤다. 이에 누실옹은 “우리 문호를 크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게다”라고 하며 극찬했다. 평소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어릴 때 입을 벙긋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학문을 즐겨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처럼 열심히 노력하였다. 심지어 침식을 잊을 정도였는데 지치고 땀이 날 정도로 공부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이를 보고 지나칠까 염려하여 만류하였지만 경암은 마지못해 응해서 쉬곤 하였다. 10여 세부터 옛사람들이 추구하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했다. 과거 공부는 즐겨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권유에 의해 응거하다가 서른 살이 된 이후로 과거 공부를 단념했다. 오직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편안하게 여겼다.
바르게 책상에 앉아 독서하고 사색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성현의 말씀에 유의하여 한 말씀이나 한 글자라도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하고 체득했으며 서체도 단정했다. 이따금 시를 지었는데 ‘염락溓洛’의 의취意趣가 있었다. 그러다가 부천공鳧川公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학동이 매우 많았는데 경암이 가장 어렸다. 당시 경암은 날씨와 관계없이 늘 아침 일찍 일어나 많은 아이들 보다 앞서 서당 문 밖을 깨끗이 쓸고 화롯불을 준비해 두고 문밖에서 굻어 앉아 스승을 기다렸다. 이에 스승 부천공은 그를 기특히 여기 ‘후일에 반드시 크게 될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경암은 조실부모하여 두 어버이를 모시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겼는데 기일이 되면 목욕제계沐浴濟戒하고 제사를 모시며 곡읍哭泣하기를 노년이 될 때까지 하였다. 두 형과 우애가 있게 지냈는데 출입할 때 반드시 마당에 내려와 공경스럽게 대하여 항상 화기애애하였다.
항상 선현들의 말씀을 ‘잠명箴銘’으로 나타냈으며 산수를 애호하여 가끔 시로 표현했다. 항상 ‘거경居敬’ 공부에 주력했으며 정자程子․주자朱子․퇴계退溪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삼아 ‘함양수용경진학재치지涵養須用敬進學在致知’ 열 자를 벽에 써서 걸어두고 조석으로 보고 이를 실천했다. 백씨白氏가 경암이 살던 곳과 10리 정도 떨어진 하곡荷谷으로 이사를 왔다. 백씨는 위장병을 앓았는데 경암은 약물과 침구로 손수 치료했다. 그러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백씨가 별세하자 경암은 슬퍼하며 장례를 치렀으며 형수를 지성으로 섬겼다. 백씨의 두 조카가 요절하여 가정 형편이 매우 곤란해지자 중씨仲氏와 상의하여 돕고 중씨의 둘째 손자를 백씨의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게 했다. 또한 숙모를 지성으로 섬겨 반찬 공궤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씨와는 팔십 평생을 함께 지내면서 화목하게 지냈다. 문밖을 출입할 때 항상 문아래 마당에 내려와 기다리며 공경을 다해 섬겼다. 맛난 음식 한 그릇이라도 얻게 되면 반드시 형과 함께 나누어 먹었으며 의복도 그렇게 하여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실제로 그는 평생 산림처사로 자처할 만큼 선비로서 ‘수신修身’과 ‘근학勤學’에 전념하였다. 자제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과정에서 ‘분경奔競’의 폐단을 보고 과거 응거를 그만두길 당부하면서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수신’과 ‘근학’으로 주어진 목숨을 다하면 그만이다”라고 하였다. 경암의 글은 ‘궤격은심詭激隱深’하거나 ‘조탁화식彫琢華飾’하지 않고 ‘평이간고平夷簡古’하여 옛 작가들의 규범을 잃지 않았다. 시 짓는 것은 여사餘事였지만 내용은 ‘전아웅심典雅雄深’․‘간화박채刊華剝彩’하여 ‘우의재도寓意載道’의 내용으로 ‘염락아송溓洛雅頌’의 풍운風韻을 띄었다. 서법 또한 고건古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익히지 않았어도 천성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 누정이나 편액한 기문에서 경암의 글씨를 얻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경암은 평생 후진 양성에 뜻을 두어 이만준李晩埈 등의 문인을 두었으며 또한 저술에 전념하여 주자朱子․장식張軾․여조겸呂祖謙과 이황李滉의 저서 중에서 622조의 글을 뽑아 14권의 속근사록續近思錄을 만들었다. 그는 이황의 학설을 따라 ‘사단四端·칠정七情’은 ‘인심人心·도심道心의 다른 명칭’일 뿐이며 ‘인심은 기氣를 주로 하고 도심은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 하였다. 또 ‘인심·도심은 사단·칠정의 총명總名이고 사단·칠정은 인심·도심의 조건條件이라’ 하였다. 또한 ‘이이李珥와 기대승奇大升의 학설은 현혹되기 쉽지만 결코 옳지 않고 이황의 학설이 옳다’고 하였다. 또 ‘실리實理의 작용은 능연能然의 소이所以라 하여 사단․칠정이 대대對待할 때 나뉘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관심이 깊어 ‘혈구絜矩’의 의미를 ‘추기탁물推己度物’로 표현하였다. 또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을 설명하여 ‘삼강령을 기본으로 하고 지지知止 다음을 공효功效로, 성의誠意를 긴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성인聖人과 중인衆人을 구별하여 ‘성인은 천天과 합하고 현인賢人은 천을 배우지만 중인은 천과 어긋나므로 각자 구별을 두어 수양할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서예와 시문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1849년(헌종15)에 추천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이듬해인 1850년(철종1)에 봄에 영남 고을 선비들이 청량산 ‘오산당吾山堂’에서 강회를 가졌는데 모인 자가 600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경암은 도산서원 원장으로 즉석에서 좌장으로 추천되어 대학 「변론문답辨論問答」에 응답하였다. 이에 경암은 탁월한 박학다식한 실력으로 질문에 박아정해博雅精解한 대답을 하여 좌중을 경탄케 하였다. 이로부터 경암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만년인 1851년(철종2)에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경의재敬義齋’라고 편액하였다. 작은 연못을 파서 두르고 강학 활동을 펼치며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아울러 퇴계의 ‘징분질욕懲忿窒慾’․‘신기독愼其獨’을 써서 걸어두고 심신을 수양했다. 1857년(철종8)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1860년에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1864(고종1) 11월 16일에 별세하니 향년 87세였다. 이듬 해 3월에 구가동九佳洞 두릉杜陵의 묘소 좌측 간좌艮坐에 이장했다. 1898년(광무2)에 봉화읍 소천현小川縣 황목리荒木里 갑좌甲坐로 이장했다. 저서로 경암집敬菴集 15권이 있다. 부인은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정간공貞簡公 약포 정탁의 8세손으로 사인士人 필육必陸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도상道相이며 차남은 헌상憲相이다. 첫딸은 정지기鄭之夔에게, 둘째 딸은 류진석柳進奭에게, 셋째 딸은 서상렬徐相烈에게 각각 시집갔다. 장남 도상은 아들을 낳지 못해 헌상의 아들 흥로興魯를 양자로 맞아 후사를 이었다. 도상의 맏딸은 이수연李洙淵에게 시집을 갔다. 정지기의 아들은 의규儀逵, 류진석의 아들은 도능道能이다. 류진석의 맏딸은 김구하金龜河에게, 둘째 딸은 정호관鄭好寬에게, 셋째 딸은 진사 이만윤李晩胤에게 시집갔다. 서상렬의 양자는 재두在斗이며 맏딸은 박해익朴海翼에게, 둘째 딸은 이희동李羲東에게 시집갔다.
2) 문집 체계
경암선생문집敬菴先生文集은 목판본 15권 12책이다. 이 책은 1885년(고종21)에 손자 이흥로李興魯 등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간기刊記가 분명하지 않지만 경암의 「묘지명」이나 「서문」을 보면 사후, 아들 헌상憲相, 경장景章 등이 이수영李秀榮과 함께 유고를 정리한 지 7년에 유집 간행의 작업을 시작하다가 경장景章이 죽었다. 이에 경장의 아들 흥로가 이수영에게 부탁하고 또 외손 류도능柳道能이 수 백리 밖에서 저자의 유고를 보내며 유집의 간행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므로 경암 사후 22년 만인 1885년에 이수영이 「묘지명」을 쓴 기록을 보아 그 때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권1에는 시가 실렸다. 권2에는 시가 실렸다. 권3에는 「서書」 14편(柳相祚1․姜海隱8․趙奎應2․姜擎厦1․柳耳仲2)이 실렸다. 권4에는 「서書」 18편(柳致明2․趙炳相1․成聖思1․李相羲1․李致休1․姜景仁․李致宇1․鄭先壁1․李天裕1․權道和1․李昌瑞1․李迪裕1․趙彦明1․朴元愚1․朴性翁2)이 실렸다.
권5에는 「서書」 28편(金道明1․黃中琯1․金重垕1․李士實2․李應淵1․金燦圭1․朴周鍾2․李洛鉉1․姜楗2․金輝濬3․金景玉2․姜稷1․權騝1․滄洲士林1․洪起華2․黃繼夏1․金景典1․友人1․鄭夔1․吳世潤1․柳道能1)이 실렸다. 권6에는 「서書」 20편(李仁行1․李汝用1․李義卿1․李近道1․李源伯1․李君睦2․李彙主1․李彙炳1․李彙載1․李彙蘭1․李泰魯1․李彙承1․李博汝4․李秀行1․李謹休2)이 실렸다.
권7에는 「서書」 17편(李彙白1․氣翁1․孤山門中1․李汝擴6․李漢綺1․李漢中1․李江叟1․李得魯1․李憲相1․李敎英1․李明魯1․李興魯1)이 실렸다. 권8은 「잡저雜著」인데 「自省錄」이 실렸다. 권9에는 「잡저」 16편(伊川先生立子說辯․讀韓子鄠人對․讀韓子對禹問․讀葛庵論西厓心無出入說․近思錄葉註疑義․心經刊補箚疑․論語箚疑略․中庸疑義․讀韓南塘經義記聞錄․四端七情說․木匜說․圓冠說․禮說․蛛網說․義媼傳․遊鹿門錄)이 실렸다.
권10에는 「서序」 7편(洞約序․月隱金公實記序․琴易堂裵公文集序․靜齋曺公實記序․澄江吉公逸稿序․臥遊堂朴公文集序․續近思錄序) 및 「기記」 4편(喬峰軒記․逸白盧記․約齋記․溪齋記)․「발跋」 8편(書李士實所藏武夷九曲圖後․書李工自省四十目後․書樂天水北金公兩世遺事後․書工夫節略後․書講規後․書汝擴改過說後․書朱子與黃勉齋書贈柳壻進奭․書朱子與受之魏應仲書贈族曾孫敎弘)․「잠명箴銘」 4편(元日箴․杖銘․硯匣․席銘)이 실렸다.
권11에 「상량문上樑文」 2편(九佳菴上樑文․豊隱李公祀講堂上樑文)․「고유문告由文」 2편(葛庵先生綜牒焚黃告由文․潛菴先生金公贈職焚黃告由文) 및 「제문祭文」 8편(洪枟․鄭必睦․族丈․柳麟祚․權鳴遠․李鎭璜․從兄․李泰相)․「애사哀辭」 4편(李致迪․金繪明․洪煥猷․權載淨) 및 「묘갈명墓碣銘」 8편(贈吏曹參判竹林權公神道碑銘並序․贈參判申公墓碣銘並序․襄貞公李公墓碣銘並序․伊溪南公墓碣銘並序․慵訥齋李公墓碣銘並序․上舍金公墓碣銘並序․學山金公墓碣銘並序․龍峯金公墓碣銘並序) 및 「묘지명墓誌銘」 9편(魯庵金公․處士柳公․再從姪聖輔․祖妣孺人順興安氏․先兄處士公配宣城金氏․六小娘․再從弟孟遇․再從姪士謙․再從姪婦淸州鄭氏)이 실렸다.
권12에 「행장行狀」 11편(藏谷先生權公․素庵金公․孤松朴公․問月堂吳公․處士金公․風臺洪公․忠武衛副司勇吳公․處士洪公․處士李君․進士洪君․再從妹柳夫人李氏)이 실렸다. 권13에는 「가장家狀」 6편(曾祖考杜陵府君․王考通德郞府君․從大父僉知中樞府事陋室公․從大父通德郞莊窩公․先府君․先妣夏山成氏)․「청량정사강의淸凉精舍講義」가 실렸다. 권14 「부록附錄」에는 「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배문록拜門錄」․「기술記述」․「제문祭文」․「만사輓詞」가 실렸다.
3) 시문학 특징
경암은 탁월한 문예 역량을 시문학에서 유감없이 발휘해 내었다. 300여 수를 넘는 그의 시 작품을 에 다양한 표현과 학문 경향 및 인격미를 엿볼 수 있다. 산수자연에서 체감하는 미적 감수성을 내재한 성리 이념과 결부시켜 자연을 통해 심성을 수양하며 내면의 정화를 거쳐 ‘수신’과 ‘정심’의 미학적 승화를 이룬 작품이 많다. 그런 과정에서 ‘산수’는 매우 주요한 시적 소재로 제공된다. ‘퇴계’를 비롯한 ‘선조’와 ‘선현’을 추모하며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을 적극 표현하는가 하면 일찍이 퇴계가 주창한 「무이구곡가」에 대한 전통을 이어 춘양을 배경으로 수려하게 형성된 구곡문화를 개척하는데 이바지했다.
「춘양구곡」 검토에 앞서 경암 시문학의 특징과 산수에 대한 미학적 사고 이해 및 퇴계와 연관된 ‘구곡시’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시문학을 대별해 정리한다. 첫째, 목가 서정을 표현한 작품에서 농촌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고 체감하는 농촌 목가적 정경과 그러한 정서를 치밀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때로 우의적 표현을 통해 동식물의 특성을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형제 우애와 자녀의 교육을 권면했다(食菜病泄戱吟求和林舘兄․早春道中․孟春坐林舘․風琴․老翁歎․見縶羊有感․八月聞鸚․採葛歌․咄惜五章․與太素翁․與太素翁․寓感三首․示憲相兒․二月大雪中偶看李相國集…烏竹杖引代簡贈呈族弟近道). 둘째, 산수 자연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자연과 함께 교감하며 참된 은자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자연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며 내면 정화를 거쳐 자연과 합일된 경지를 묘사한 작품이다. 때문에 경암에게 자연은 단순한 미적 감상 향유 대상이 아니라 그 이상 심원한 의미를 지닌 정신적 치유와 마음의 안식을 주는 매개로 작용한다(詠屋․寓洪濟寺․春帖․雨後晩步․秋日懷友․滄厓會遊適有故未赴作側體一首示意․滄厓亭偶吟․考槃臺․鹿門道中․會飮林舘走次主人韻․閒中偶吟六言二首․趙友奎應來留四未亭余病不赴…桃李․暮春會飮漁村瀑布․峽洞訪具贊叔․朝吟․溪亭贈趙奎應․戱吟一絶示奎應求和․戱和嵋山從兄見嘲․道中․溪亭偶吟․周村慶流亭敬次退陶先生韻三絶示宗君․壬午暮春與權日升訪趙奎應…尋山寺聞磬․有感․山房夜吟․閒居吟․酒泉臺․北水詞․秋夜仲氏家玩松月․九月晦日朝泛殘菊花於酒飮而有感․九日菊花未開偶看李芝峯集…題落葉․十二月二十八日大雪…閒中卽事․偶吟․睡覺․溪行․訪金塘寺舊址․三月晦日用先集次杜工部暮春韻․朝吟․山菴偶題․洗杖․四月陪仲氏訪杜洞後谷․池上․壬子四月晦陪仲氏…族孫近休見訪贈詩走次二首․聽蟬).
셋째, 산수자연인식론과 연관된 작품이다. 이러한 시작품에서 경암의 산수자연에 대한 기본 인식론과 퇴계의 산수자연관과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퇴계가 향토 자연을 애호하고 승경을 사랑하였던 정신을 계승하고 이른바 ‘선유船遊’의 전통을 이어 ‘무이도가시’에 차운한 것 등 「춘양구곡」 창작의 배경을 검토할 수 있는 작품이다(三江船遊口占․詠梅․幽蘭․仙遊亭玩月․八月二十二日權美仲作川之遊…漁樂臺․臨別口占戱聞從兄․己卯三月梅花盛開敬次退陶先生韻․獨坐․閏四月作天燈之遊…三月桃李盛開梅花頗有瘁枯之態因占一絶․浮石聚遠樓敬次退陶先生韻․白雲洞景濂亭敬次退陶先生韻․獨酌․種樹․次林舘見贈․題芭蕉葉․孔泉․上元月․次姜丈淸之․梨花洞․路別奎應一行․歸坐有感又次前韻二首․和退溪先生次金敦敍讀書有感․趙有春求我蘭花贈一絶․偶吟․萱花․次趙景休寄贈․歲壬辰維夏自酒泉訪鄭子敬…喜晴․偶吟․喬峯軒吟․尹學甫槐亭次太素韻贈主人․漁溪古辭․上元夜敬次退溪先生溪堂對月韻․沙上月夜與諸友步出郊外…偶吟․謹次表兄姜海隱大明山菴韻․鹿門語樂臺․仲春敬次退陶先生春日閑居六絶․春日敬次退陶先生溪堂偶興十絶․哀燕․梅花枯死久未更種遂步東坡韻以寄意․敬次武夷櫂歌․春陽九曲詩並序․棗木顚拔歎․山菴偶吟․陶山謁廟後敬次先生改卜陶山書堂地有感韻․淸吟石敬次松齋先祖韻二首․山南行次朱子北紀行十二章韻․光影軒敬次溪上光影塘韻․後齋偶吟二絶․夜吟․詠春․坐池上軒․野鶴․五色菊吟․元相姪家賞蓮․後齋偶吟․詠菊).
넷째, 기행의 정서와 철학적 사유 및 감회와 서정 자아를 반영한 작품이다. 일련의 작품은 심회 토로와 서정성이 반영된 정서를 함축한 내용이다(西行道中․寶劍行․次濟而兄觀海詩․感懷二首․癸酉仲夏寓土杜谷村舍因記年前…又次林舘韻贈別․次趙奎應․惜別․戊寅二月五日同友人遊栗里村․玉淵亭吟․元日有年邁學退之歎因賦我生吟․奎應來留溪亭寄詩次韻以贈․佛影寺․閑山嶺望海․聖留屈․觀海․樓嶺口占․太白山望京臺․華寺滯雨同行作苦雨詩因次以解之․石浦道中․望京臺憶姜擎廈․與諸友遊東峽臨谿喫飯…栢川洞․穿川․贈碧峯師․步川沙次存齋上暴魚韻․注谷洞口․蓮峯淵次趙稚顔․蒼巖道上․泣嶺․癡軒亭․竹島望海․龍湫次白穉文․冥棲菴次軸中韻․繼祖菴․歸路與權日升兄弟拈白香山韻共賦․有感․記夢․仲氏甲日詩․四美亭次太素翁韻․三月二十八日次老杜韻․翠寒臺․松月齋謹次板上韻․病起書懷․除夕敬次晦翁雪亭韻․九日又次陶靖節韻․十月十日又次陶詩丁酉九月韻․病裏詠懷․耳聾次子美韻․眼盲次樂天韻).
다섯째, 교유 활동을 담은 작품이다. 관련 시에서 경암의 교유 양상과 산수 자연 속에서 거하면서 평소 친분이 있는 분이나 벗을 비롯한 친척 및 자녀들 사이에 주고받은 시문이다(奉別再從兄洛行․與諸益遊漁村瀑布各賦二絶題石面․次再從兄林館韻․趙奎應遊法溪書堂遂與諸名勝唱和…夏寓水月菴次漁洞李公韻․錦仙亭謹次板上韻․次從兄遠遊․酬林舘韻․贈柳耳仲․次景望韻․次趙上舍景珍贈行二首․重陽日適逢姜景晦贈一絶․次棣華亭韻․次友人亭韻․次斗南新居韻․季秋上澣江叟與權美仲訪我…洪穉器雙湖亭次泰素翁韻․又次太素見贈․次姜叟新居韻․己亥臘月就溫九佳菴…次姜景仁見贈七首․紫岸處士遺址․正月二十二日大雪…李友士實訪我後齋…口呼答族姪元緯韻․次族姪博汝重修草堂韻․九日吟․贈博汝․答族孫汝擴韻․次贈汝擴․次李昌瑞松湖亭韻).
여섯째, 성리학 이념 지향을 반영한 작품이다.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여 결국 ‘정심’을 추구하는 생활의 실천과 선현과 선조 ‘퇴계’․‘난은’을 추모하며 그들의 행적을 따라 근신과 수신으로 일관된 삶을 지향하는 면모가 반영되어 있다. 경암 시문학의 범주는 산수 자연이라는 신성한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은일 처사답게 산수 자연 속에서 심성을 바르게 하며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합일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성리 이념을 시적으로 형상하여 경암 시문학의 핵심을 간취할 수 있는 작품이다(春日謾詠․登埰薇亭․偶成自笑․贈別濟而族兄․木屐渡略彴․夜坐․元日甚雨敬次退溪先生十六日雨韻․次權仲美滄亭會席韻․次趙奎應先亭重修韻․暮春訪奎應溪亭․過瓢隱先生遺墟․謹次姜丈淸之戱贈韻․又次一絶以反之․送趙秀士明逸․周村慶流亭敬次退陶先生韻三絶示宗君․立春․四從叔名其廬曰四難…自警․讀眉叟記言有感․步川沙次存齋上暴魚韻․觀魚臺次徐景望․景牧齋․杖廟庭竹有感․雲山書院謹次板上韻二首․洗心臺․丹山書院拜牧隱影幀․謝趙景休用前韻見贈二首․和退溪先生次金敦敍讀書有感․求求鳥․親疎吟․癸巳七月旣望積雨忽霽…伏次川西新居上樑六偉韻․退溪先生四十九歲和李白紫極宮詩…次族叔晦文見贈韻․石崙寺謹次周愼齋次紫極宮感秋詩…國望峯敬次退陶先生韻․白雲洞又次先生韻․次柳柳州讀書韻․穉可山寮拈韻․姜海隱所藏闕里檜圖歌․癸卯春就溫樂西菴…賀權孟遠壽席․示憲相兒․敬次晦翁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韻․次朱先生酬張南軒韻…和姜海隱沐浴歌․敬次退陶先生金剛山韻․除夕吟․蓬萊石吟並序․淸涼下山後三日…葛菴先生給牒焚黃日感吟․詠懷․看兒輩書春祝寓警․次栢湖亭重修韻․謹次金淸陰集有感韻․次贈金景玉․答金景典韻․送外孫柳道能․思道能還家二絶․雪月․辛酉二月六日行與魯孫冠禮).
일곱째 ‘애재류’ 형식인 다양한 형식의 ‘만시’에서 사우 관계나 친척의 죽음을 애도하며 망자의 생전 업적을 회고하며 성리학 사유를 반영하였다(輓姜淸之丈․輓鳧川從叔․溪巖金先生輓․川城歸路訪金公達臥龍菴…輓權姨兄․哭趙奎應․哭柳參奉公晦․輓成內兄․葛菴李先生輓․輓安丈․輓金僉樞․輓姜擎廈․輓權上舍․追哭洪子悅․輓鄭思軒․輓金參奉德涵․哭權表弟鳴遠․哭權聖重․輓柳豊安君․賦四居韻輓再從兄林舘․哭權聲遠․謹次忘窩藜杖韻․輓從兄漢籌四絶․哭柳徵君耳仲․輓參判族兄․輓李愼可․輓從祖叔․輓洪丈․輓趙有春․輓柳高城․輓金丈․輓權聖能․哭鄭建夫․哭柳季溫․輓姜海隱․輓金進士以凝․哭再從姪益相․哭江叟․輓琴繼聞․輓族兄美伯․輓近道․輓柳穉述․輓權參判汝車․輓族弟義卿․哭金參議穉祥․輓金景玉․輓金參奉․輓姜景仁․哭李應蓮․輓徐文若).
Ⅲ. 「춘양구곡」 창작 배경
1) 산수자연 인식론
경암의 산수 자연 미학에 대한 심미 의식을 시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산수는 누구에게나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적으로 산수에 귀의하는 자만이 체감할 수 있다.
맑은 유람 호방한 흥 이전에 없더니 淸遊豪興蓋無前
돌아오니 아득히 한 바탕 꿈일세. 歸坐依然一夢邊
동정을 맞게 해야 의미가 있나니 動靜適宜方有味
이제 알건대 참으로 신선과 멀지 않네. 如今始信不離仙
시인은 이즈음 맑고 호방한 흥취를 마음껏 누린다. 속세와의 결별에 이어 자연 귀의의 희열을 느낀다. 지난 세월 세상사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일장춘몽과 다를 바 없다. ‘출’과 ‘처’를 분명히 할 때 ‘동’과 ‘정’의 의미도 선명히 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암은 산수자락의 의미를 제대로 체득하였고 그가 살고 있는 춘양은 신선 세상과 다르지 않은 별천지이다. 그러기에 자연은 변함이 없이 존재하는 특별한 신의 선물이다.
많은 들꽃 국화처럼 보이고 野花多假菊
산촌 새들 진짜 새라네. 村鳥摠眞禽
참과 거짓을 말하지 말지니 莫將眞假議
꽃과 새는 저마다 무심하다네. 花鳥自無心
들꽃이 무수히 피어 국화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게다가 많은 새들이 울음 우는 탓에 ‘국화’나 ‘산새’의 진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구태여 ‘참’과 ‘거짓’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것을 따지는 발상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꽃과 새가 무심하다’고 함으로써 ‘변함없는 산수자연’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산수의 주인은 누구일까?
산수는 본래 주인이 없나니
한가한 자가 주인이라네.
산수자연은 애당초 주인이 없다. 한가하게 이를 간파하여 즐기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래서 ‘산수’와 ‘주인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산수가 주인을 만나고 못 만남은 운수에 그 사이에 존재한다. 굽어보고 올려다보며 감흥이 일어 공경하며 선생의 시에 차운해 시 한 수 짓다.
산수 자연과 주인의 만남과 그렇지 못함은 특별한 인연에 달려있다. 산수의 절경을 알아보는 심미안을 가진 자만이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암은 ‘관찰력’을 중시한다. 이른바 ‘주마간산’식으로는 진정한 자연 대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성긴 비 뭇 산의 빛을 보니
나그네 위해 면면이 보여주는 것 같네.
조용히 보니 사물마다 빛
모두 목욕해 빛난 것 같네.
칠월 기망의 이름 오래 되었는데
장차 개인 뒤에 보려네(…)
이내 구름이 몰려가
은근히 나에게 보게 해주네.
경암은 객관 자연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여 자연이 선사하는 풍광과 미적인 현상을 체감하며 희열을 느끼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 심미안을 갖췄다. 그래서 자연 대상을 주시해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사실적인 시를 창작하였다. 시 창작 과정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한 심미의식을 경암은 이미 터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산수 자연에 대한 인식 논리의 하나로 객체인 자연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자연 경관 및 자연 경관에 펼쳐진 사물의 동태를 시간적 추이나 변화 양상을 핍진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은 하단의 시에서 갠 하늘을 보고자 희망했는데 이를 기다린 듯이 구름이 몰려가 시인에게 광풍제월의 현상을 선사했다. 산수 자연 감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시인과 산수자연의 교감 양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산수 자연은 이러한 심미안을 가진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대는 봉래산 나는 태백산 유람 君去蓬萊我太白
하늘 끝에 앉아 조용히 시를 읊는다. 擡頭天末坐沈吟
멀리 일만 이천 봉 위 달을 생각하니 遙知萬二千峯月
우리 두 사람 마음을 골고루 비쳐주네. 分照吾人兩地心
효은 강필효는 봉래산 기행을 하고 있고 자신은 태백산 기행을 하고 있다. 먼 하늘 끝에서 서로의 일정을 회상하며 시를 짓는 풍류미학을 드러냈다. 먼저 상대방의 자연 감상 현실을 상정했다. 상대방이 봉래산에서 일만 이천 봉을 만끽하며 즐길 것을 회상하였다. 문득 휘영청 밝게 떠오른 달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상대방과 자신의 간극을 하늘에 오른 달이 메워준다. 하늘의 달은 거리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정서를 지닌 자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휘영청 밝은 달은 상거감을 극복시키고 상호 일체를 형성케 하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자연은 멋을 알고 이러한 정서에 동화되는 이들끼리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진전된다. 산수 자연 공유 의식은 산수자연에 귀의함으로써 얻는 효과로 파급된다.
누대 앞 강물에 더위 식히고 濯熱臺前水
누대 위 바람에 서늘함 느끼네. 乘凉臺上風
선인들 뵈올 수 없으나 前人不可見
물고기 보는 즐거움은 여전하다네. 魚樂至今同
비 그치자 밝은 햇살 새벽 창에 들어오고 雨霽淸暉曉戶明
고운 산새 어디선가 아침을 알려오네. 珍禽何處送新聲
조용히 귀 기울여 마음을 여니 犂然傾耳心開地
천기가 절로 통해 한결같이 청아하네. 天機自通一樣淸
첫 번째 시에서 누대 앞 강물에서 발을 담그고 세수를 하여 무더위를 식히고 누대 위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청량감을 만끽한다. 누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며 유학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 수고한 선현의 행적을 추모하였다. 그분들을 직접 뵐 수는 없지만 아쉬운 정념과 추모 정서가 일어난다. 하지만 그 분들이 누렸던 물고기의 유영을 바라보면서 심신을 정화하고 자연 속에서 심성을 도야하던 면모를 재현할 수 있어 기쁘다. ‘물고기 바라보는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장자莊子와 혜자惠子의 물고기 논쟁이다. 이처럼 장자와 혜자는 논리적 언쟁을 많이 했다. 장자는 사람이면서 고기의 마음을 알겠다는 만물제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반면, 혜자는 자신의 입장이 없이 상대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관어觀魚’의 역사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기록될 만큼 유구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관어는 귀족층의 오락의 일종이 됐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는 ‘예종이 대동강에 가서 배를 타고 물고기를 구경했다’고 했으며 우왕이 ‘비와 우박이 내리는 날인 데도 불구하고 물고기를 보다가 발가벗고 물에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물고기의 자유스러운 ‘군집유영群集遊泳’을 ‘안분지족安分知足’ 또는 ‘원천적인 즐거움의 상징’으로 여겼다 한다. 다시 말하면 ‘어관觀魚의 경지’는 ‘달관達觀 경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달관의 경지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심정’을 말한다. 유유히 흘러가는 냇물은 그 분들이 지향했던 정신의 지속적인 유동 상태임을 암시한다. 후학의 입장에서 그러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에 구분들과 일체감을 형성해 자연 속에선 진락을 누린다.
두 번째 시에서는 비 그치고 햇살이 창문에 비치는 고용한 아침 풍경을 담고 있다. 게다가 고운 산새가 울음 울어 아침을 일린다. 이에 시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마음을 연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내면의 성찰을 시도하는 단계로 진입한다. 천기가 통해 내면의 정화를 통해 청아한 경지를 누린다. 자연과의 교감과 일체감 형성을 통해 내면의 정화를 이루는 현상을 포착했다. 결국 경암은 자연의 신비로운 경관과 멋을 아는 이만이 산수자연을 차지하며 그러한 미적 체감을 하는 자들과 산수 자연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고 나아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정화와 수양의 과정까지 이룰 수 있다는 산수자연 심미감을 지녔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암의 산수자연 인식론은 일반 유학자들이 공유했던 산수자연관과 다름이 없다. 특히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답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향토 산수 애호 정신
경암은 춘양의 녹문산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퇴계가 청량산을 ‘우리 산’이라고 애호했던 정신과 통한다.
녹문산은 우리 집에서 소유한다.
녹문은 가장 궁벽하고 깊은 산 속에 있다.
춘양의 지역적 특성에 맞게 은둔형 선비가 살기에 적합한 녹문산은 궁벽하고 깊은 산이라고 하면서 퇴계가 청량산을 ‘우리 산’이라 했던 전례처럼 경암 역시 녹문산을 ‘우리 산’이라고 하였다. 녹문산을 깊이 사랑했던 애정의 흔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향토 산수 자연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춘양 산수 자연 애호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지금 세상 누가 진실을 아는가 今世何人能識眞
기괴함으로써 새롭다고 다투네. 惟將奇詭競爲新
산과 물을 보는 것 이와 같으니 看山看水亦猶是
반드시 수고롭게 물 건널 필요 없다네. 不必勞勞遠涉津
현실 세상의 부조화를 언급했다. 기괴함을 새롭다고 다투는 세인의 안목이 도리어 우습다. 세리와 세상 명리에 목숨을 걸고 아웅다웅하는 세태를 풍자하였다. 이에 대한 극복 대안은 언제나 변함없이 참된 면모를 보여주는 자연 귀의하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먼 곳을 유람하며 기괴함을 찾는 것은 크게 권장할 일이 아니다. 향토 산수 자연에 대한 애정 의식을 반영했다. 다음 시도 이런 정서가 담겨있다.
지팡이 짚고 달빛에 은빛 모래 벌 밟고 聯笻乘月蹋明沙
조용히 감상하며 읊조리니 경관도 좋구나. 緩賞微吟景轉多
들판 빛 하늘 두르고 먼 산굴은 아득해 野色環天迷遠峀
시냇물 언덕 둘러 초가집 감추었네. 溪痕繞岸隱茅家
교묘한 그림자 숲 사이로 아른거리고 巧印疎影婆娑樹
때로 그윽한 향기 꽃에 역력히 우러나네. 時到幽香的歷花
승경에 정이 끌려 늦게 돌아오고 勝牽情興歸來晩
하필 수고스럽게 멀리 유람할 필요 있나. 何必勞勞遠涉波
은자의 평온한 삶을 표백하였다. 달빛 아래 지팡이 짚고 은빛 모래를 밝는 청아한 분위기가 전개된다. 달 빛 아래 펼쳐진 경관도 아름답다. 들판의 푸른빛은 하늘을 두르고 멀리 보이는 산의 동굴도 아득하다. 언덕을 돌아 흐르는 시냇물은 초가집을 감추듯 평온하다. 달 빛 아래 일렁거리는 그림자와 함께 이따금 그윽한 향기가 우러나와 시인의 후각을 상큼하게 한다. 승경에 젖어 흥취가 절로 발한 나머지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평온한 춘양의 절경에 흠뻑 취해 굳이 먼 곳으로 기행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향토 자연 애호 사상이 강하게 담긴 작품이다. 이와 함께 향토 자연 속에서 시를 짓고 주석을 겸비한 모임을 갖는 것도 예외일 수 없다. 이러한 표현은 그의 시에 종종 보인다. 머물면서 시 짓고 술 마시며 즐기니 정서를 반영한 작품도 있다. 향토 자연 애호 사상과 함께 사우 교유 양상도 살필 수 있다.
마음 편하고 경관 더욱 좋네. 心定境愈僻
한가한 집에 찾는 이 적고 門閒客少過
난초 향기 깊은 골짜기에 풍기네. 蘭香深處聞
솔바람 소리 찬 날씨에 윙윙거리고 松韻歲寒多
흥에 따라 시 지으니 고아스럽네. 遣興詩全古
가슴 시원하고 술은 반쯤 올라 開懷酒半酡
초연히 석양 길에 서서 超然立暮道
목청껏 노래 부르네. 爲我一高歌
좋은 경관 아래 살면서 난초 향기 맡고 솔바람 소리 들으며 흥에 따라 시를 짓는다. 이에 가슴이 시원하고 흥이 올라 목청껏 노래 부르는 낭만정서를 표현하였다. 흥에 따라 시를 술 마시며 즐겁게 살아가는 전원 취향의 평온한 서정성이 함축되었다. 이러한 산수 자연에 대한 인식이나 향토 자연 경관 애호 사상은 퇴계의 산수자연관과 다르지 않다. 퇴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 계승 전통은 후계後溪 이이순 李頤淳(1764-1832)에게서 확인된다. 황지에서 달음질을 시작한 낙동강은 태백산을 거칠게 달려 와 퇴계가 ‘우리 산’이라 애창했던 청량산 앞을 지난다. 이제 낙동강은 거친 숨결을 늦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 유유한 흐름을 연출한다. ‘병풍처럼 고운 석벽’․‘유리알처럼 맑은 자갈’․‘은빛 반짝이는 모래’․‘비취색 물빛’으로 흐르면서 도산의 멋진 풍광을 자랑해 보인다. 이처럼 아름다운 도산의 자연 경관은 일찍부터 이중환의 주목을 받아왔다.
강촌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가 제일이다. 도산은 두 산이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이루고 산은 크게 높지 않다. 그래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이곳 도산에 이르러 골짜기를 벗어나 비로소 강이 된다. 밖으로 큰 강이 흐르는데 양쪽 산이 석벽을 이루고 또한 그 산의 아래쪽이 물에 잠겨 경치가 뛰어나다. 물은 나룻배가 건너기에 넉넉하고 마을 안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강촌으로 명품 지역인 예안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낙동강이 도산에 이르러 강을 이루며 강 양쪽으로 석벽을 이루는 산과 그 산 아래에 펼쳐진 정경을 기록했다. 낙동강이 태백산을 거쳐 청량산에 이르면 주물주가 빚어낸 천연적 굽이를 돌면서 못[沼]을 만들고, 내[川]와 협(峽)을 형성했다. 강을 이룬 낙천은 청량산을 지나 고산, 단사, 천사의 아름다운 물굽이를 연출해 내었다. 이 물줄기는 도산서당 주위에 이르러 동서로 병풍처럼 고운 산을 맞이한다[東翠屛․西翠屛]. 병풍 아래 곱게 흐르는 강물은 유리처럼 맑고[琉璃水色], 맑은 강과 어울린 산은 비단처럼 곱다[錦繡山光]. 그래서 퇴계는 영남의 낙동강이 물 가운데 임금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청량산을 찾아가면서 7곡에 이르러 벗 이문량(1498-1581)에게 써준 시에 그림 속을 거니는 것 같다는 감탄사를 발했다. 후계는 「도산구곡」(9)에서 9곡의 지리적 배경과 퇴계의 시를 인용한 경위를 밝히면서 다음처럼 청량산의 승경을 극찬했다.
선생께서 「무이구곡도발」에서 ‘삼십육 동천’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있다면 ‘무이산’이 당연히 첫째일 것이다’ 라고 했다. ‘육육봉’은 열두 봉을 말함이다. 그러나 ‘육육봉’과 ‘삼십육동천’의 차이가 없다면 이제 ‘육육봉’을 ‘삼십육 동천’ 가운데서도 첫째로 삼을 수 있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무이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치가 있는 곳’일지라도 ‘청량산’만한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도산구곡」의 절정인 청량산의 모습은 장관이다. 열 두 봉우리는 저마다 독특한 풍광과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청량산은 퇴계가 강학하던 공간이다. 후계의 청량산에 대한 인식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계는 중국 명산대천을 대표하는 36동천이 있다 해도 그 가운데 ‘무이산이 가장 으뜸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청량산은 무이산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므로 ‘청량산과 무이산은 동격’이 된다. 그렇지만 ‘청량산은 무이산 여러 경관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산수 자연 공간’이라고 했다. 때문에 ‘청량산의 승경’은 ‘무이산의 그 어떤 경관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난 곳’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결론적으로 청량산은 ‘36동천’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무이산’보다 고품격의 경관을 지녔으므로, ‘청량산은 36동천 가운데서도 최고의 품격을 지닌 으뜸 산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계는 선조 퇴계처럼 아주 특별하게 청량산을 애호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후계는 평소 도산의 산수를 사랑하여 좋은 절기가 되어 날씨가 맑으면 친한 벗들과 선현의 유적지에서 모임을 갖거나 홀로 그곳을 거닐며 산수를 감상했다. 특히 후계는 만촌으로 우거한 1786년(정조10)에 지은 「광암폭포」라는 시의 서문에서도 도산 경내 산수의 절경을 찬미했다. 위처럼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이 발휘되어 있다.
우리 고장은 본디 산수의 고장이라고 불려졌다. 이름난 구역과 빼어난 경관을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곳은 시장과도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이러한 샘과 수석이 빼어난 경관이 있으니 참으로 사랑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후계의 도산 산수 애정과 미학적 감수성이 「도산구곡」 창작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와 연관된 작품이 1796년(정조20) 가을에 지은 「강루팔영」이다. 후계가 살던 ‘부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주변의 여덟 정경을 여덟 군데 설정하고 이를 칠언시로 읊고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낙동강이 청량산에서부터 남으로 흘러 우리 고을 경내로 들어 와 30여 리를 흘러가는 동안 골짜기를 따라 기이하게 빼어난 경치를 이룬 곳이 많은데 선성을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라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라촌 역시 강가에 있는데 옛사람들이 강 가까운 곳에 누대를 세워 더위를 피하고 놀며 즐기는 장소로 삼았다. 한석봉이 누대 현판에 ‘부라원’이라고 편액했는데 누대는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 남아 있다. 여기에 오르면 두 강물이 나란히 흐르고 돌 여울물이 고운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쪽으로 부용봉 고운 나무들이 자라고 북쪽으로는 영지산이 푸르게 둘러 있다. 강가에는 모래가 벌판에 이어졌는데 평평하고도 넓게 이어졌다. 어떤 때는 가까이 어떤 때는 멀게 보이지만 고개만 들면 모두눈앞에 다 들어온다. 올해 여름에 마을의 벗과 서당의 학동들과 함께 날마다 이곳에 와서 노닐었다. 누대 위에 앞 시대 선배들이 이곳 경관을 기록해 둔 흔적을 보았는데 모두 오래되어 흐릿해 알아 볼 수 없었다. 한적한 누대로 오래된 집이 시골 목동들이나 장사꾼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 되고 말아 여기를 지나가는 자들로 하여금 예전에 이곳이 강산이 빼어난 곳인 줄 알지 못하게 하여 안타까웠다. 이에 누대 시판에서 산과 강이 배합되어 풍경이 아름답다고 언급된 곳을 추적해 여덟 군데를 얻었다. ‘산 아래 마을’, ‘강가의 벼와 삼’, ‘영지산의 아침 구름’, ‘부용의 가을 달’, ‘서쪽 나루터 배의 돛대’, ‘남쪽 물가의 낚시’, ‘넓은 모래 벌 잠든 새’, ‘긴 들판의 소 풀 먹이는 광경’이다. 예전에 누대 앞에는 수백 그루의 푸른 소나무가 있었다 한다. 이는 성재 선생께서 손수 심었고 월천 옹께서 명을 받아 관리했는데, 불행하게도 베임을 당해 이는 여덟 경관에서 빠졌다. 드디어 경관에 따라 칠언절구를 짓고 모두 합해 「강루팔영」이라 이름 지어 누대의 실체를 살리고자 했다. 후일 이 같은 일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이 시에 이어 시를 지어준다면 이 누대는 그 명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시는 병진년 팔월 보름이었다.
후계는 청량산의 맑은 물이 고산, 단사, 천사를 거쳐 탁영담, 분강을 지나 부라에 이르는 동안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내는 점을 강조했다. 선성 고을의 강산이 수려한 점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하며 부라원의 내력도 소개했다. 부라원은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채 목동이나 행상들이 임시로 머무는 폐허로 변했다. 이러한 현실을 후계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멸되고 퇴색된 누대 위의 기록에서 예전에 이곳 경관 빼어난 여덟 곳에 언급을 확인했다. 그러나 제대로 글자를 식별할 수 없어 다시 누대의 시판을 추적하여 언급된 승경을 토대로 하여 현장 답사 및 지리적 고증을 거쳐 팔경을 재설정했다.
후계의 문헌 고증과 현장 답사를 통한 도산 산수 탐구 정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어 후계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이곳 팔경에 대한 찬미가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러한 정신 지향은 도산구곡시가 후대 사람들에게 지속되어지기를 바라는 심정과 동일한 맥락이다. 마지막 여덟 번 째 시만 보기로 한다.
풀 짙은 강의 남쪽 가랑비 그치니 草綠江南細雨收
가을 교외에 피리소리 가득하여라. 一聲羌笛滿郊秋
넓은 들판 여기저기 소 떼 있어서 平蕪處處成群象
완연하게 화공이 그려둔 그림일세. 宛是陶工畵裏牛
강의 남쪽에는 초원이 넓게 펼쳐졌고 교외에는 목동들의 피리 소리가 가득하다. 푸른 풀밭과 경쾌한 피리 소리는 목가 정서를 드러내기에 훌륭한 시적 소재이다. 넓은 들판에서 여기저기 무리 지어 풀을 뜯는 소떼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그의 다른 시에서도 확인된다.
농운정사와 분천의 나무 흐릿한데 隴雲汾樹兩依依
이른 아침 해뜰 무렵 낙엽이 지네 朝日初昇落葉飛
단풍 내린 긴 교외 길을 걷노라니 花蹄倦踏長郊路
황홀해 그림 속을 거니는 것 같네 怳若身從畵裏歸
후계가 선영의 입석을 위해 이른 아침에 말을 타고 분천을 거쳐 도산을 지나면서 지은 시이다. 이른 아침 분천과 도산서원 농운정사의 나무들이 안개에 가려져 흐릿한데 이른 아침 해 뜰 무렵에 낙엽이 지고 있다. 단풍이 비단처럼 깔린 길을 말 타고 지나가는 나그네 심정은 황홀하다. 마음도 단풍에 물들고 나그네 시흥도 가을 정취에 물들었다. 이 때문에 시인은 흡사 그림 속을 걷는 것 같다. 시에 그림이 담긴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후계의 미적 감각이 시적 완성도를 높였다. 이 역시 향토 강산에 대한 애정의 시각에서 생산된 작품이다.
이러한 후계의 향토 자연 애호 정신은 ‘자연 친화 정서’와 ‘목가 낭만 정조 표현’ 등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후계는 도산의 강과 산이 조화된 절묘한 경승에 매료되어 위와 같은 도산 산수의 절경을 찬미하며 여덟 경관을 재설정하여 시로 형상했다. 이러한 도산 산수에 대한 애정과 우월 의식이 도산구곡 창작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런 후계의 도산 산수지현 의식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체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퇴계와 후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의 전통을 경암이 계승했음은 물론이다.
3) 퇴계 산수 자연관 수용
평소 경암은 선조인 퇴계를 존숭하였다.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답습했음은 물론 이거니와 산수 자연관 역시 퇴계의 그것을 추종하였다. 사실 「춘양구곡」 창작 동인도 퇴계의 「도산구곡」 창작 정신을 답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도산에서 도장을 열었으니 陶山闢道場
문에 들어서자 가슴 뭉클해지네. 入門懷慨傷
사도 퇴폐한 지 오래 되어 嶊頹今幾世
자연스레 혼미하고 광란스럽네. 居然昏且狂
경암은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이어 상덕사를 참배하였다. 선조인 퇴계께서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광경을 떠올리니 절로 가슴이 뭉클하였다. 하지만 사도가 피폐되어 온 세상이 혼미하고 광란스럽게 되었다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자신은 퇴계를 사숙하여 기 실마리를 이어가고 있다며 자부했다.
퇴도를 사숙한 지 그 얼마나 지났나 私淑陶山世幾下
아득한 실마리 긴 밤처럼 이어졌네. 茫茫墜緖爲長夜.
퇴계를 존숭하며 성리학적 전통과 심오한 철학 사상을 이어가길 다짐하는 내면의 심지를 반영했다. 긴 밤처럼 퇴계의 유훈이 이어졌다고 함으로써 퇴계의 정신적 지향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속됨을 강조했다. 이처럼 퇴계를 존숭하는 정신은 퇴계가 즐겼던 산수 유람의 행적을 답사하면서 더욱 간절히 표현된다.
「국망봉경차퇴도선생운」
「백운동우차선생운」
「중춘경차퇴도춘일한거육절」
「춘일경차퇴도선생계당우흥십절」」
「도산알묘후경차선생개복도산서당지유감운」
산수가 주인을 만나고 못 만남은 운수에 그 사이에 존재한다. 굽어보고 올려다보며 감흥이 일어 공경하며 선생의 시에 차운해 시 한 수 짓다.
임술년 여름에 주천에서부터 정자경과 함께 두루 다니며 방문했다. 자경과 그의 며느리가 기쁘게 맞아 웃으며 술을 대접했다. 태백산을 유람하면서 공경하며 「퇴계잡영」을 감상했다.
경암은 이처럼 퇴계를 존숭하며 퇴계가 생전에 산수를 유람했던 곳을 탐방하면서 퇴계의 학문 정신을 추모하며 이를 계승해 나가려는 의지를 굳혔다. 일련의 시에 선조 유촉지 탐방에 따른 추모 정서를 집약하고 퇴계 존모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담아내었다. 그래서 퇴계의 가르침을 실천하길 다짐한다.
서신에 지극한 훈계 있으니 書紳有至訓
실추하거나 엎어지게 못해. 造次懼墜覆
곧 앞으로 나가길 힘쓸지니 正爾勵前程
감히 순숙해 지길 바라리. 那敢望純熟
퇴계의 가르침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그 교훈을 실추하거나 엎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더욱 학문에 매진하면서 유훈을 실천하길 다짐했다. 이러한 의지는 퇴계가 산수 자연을 애호했던 사상을 답습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경암은 나무 심기를 즐기는 성품을 지녔다. 경암의 이런 성품은 대추나무가 손상당한 것을 애석해 한 데서도 발견된다. 이 역시 퇴계의 산수 자연 애호 사상을 답습한 사례이다. 이는 퇴계가 도산서당에 화단을 만들어 ‘연’․‘송’․‘죽’․‘매’․‘국’을 심은 뒤에 ‘절우사’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퇴계는 평소 매화를 좋아하여 매형이라고 불렀다. 퇴계는 식물인 매화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이처럼 존중하며 고결한 벗으로 대했다.
그리고 퇴계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에도 제자들에게 분재한 매화에게 물을 주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평생 매화를 곁에 두고 애정을 기울였다. 퇴계에게 매화는 너무나 소중한 벗이었다. 매화의 고결한 인격을 그리워하여 그러한 인격을 구비한 매화를 벗으로 대했다. 퇴계는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연꽃 가운데 유독 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퇴계는 매화를 가장 먼저 ‘절우사’에 심었던 것이다. 이제 경암의 시를 보기로 한다.
나무 심는 것 즐겨해 性本好種樹
집 둘레에 겹겹이 심었네. 重爲茅齋栽
전나무는 산에서 옮겨왔고 樅自山阿移
오동은 숲에서 가져왔네. 梧從林屋來
그 사이로 목단을 심고 牧丹間其列
도리도 심었다네. 桃李又成培
대 없어 속될 까 염려되고 懼俗偏無竹
만나는 이마다 매화 찾았네. 逢人必問梅
이처럼 색색이 갖추었으니 如何色色備
좋은 시절에 활짝 피겠네. 佳節爛漫開
전나무․오동나무․목단․도리․대나무․매화를 집 둘레에 심고 사시사철 이들을 감상하게 했다. 나무의 특성상 저마다 고유한 속성을 지닌 만큼 ‘절개’와 ‘군자’ 등의 이미지와 배합되게 하였다. 경암은 화훼를 이종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만끽한다.
봄이 산문에 이르러 일마다 평화롭고 春到山門事事幽
따뜻한 바람 가랑비에 근심이 사라져. 和風細雨解塵愁
난 정리 국화 이종 때에 맞게 하고 培蘭移菊皆時政
뜨락에 서서 자유롭게 소일하네. 荷鍤中庭只自由
이와 함께 경암은 퇴계가 즐겨했던 매화를 무척이나 애호하였다. 관련 작품을 수록했다.
황매화에 비 내리고 雨度黃梅樹
바람 불자 온갖 꽃 피었네. 風來百合花
종일 찾는 이 없어도 盡日無人問
맑은 향기 절로 일품일세. 淸香自一家
옥 같은 줄기 얼음 같은 꽃잎 신기한 조화 玉骨氷腮造化新
붉고 자줏빛 없어도 천진한 모습 손색없네. 不庸紅紫損天眞
비단처럼 곱고 담박하게 단장한 봄 맵씨 練艶淡粧春意態
시인묵객의 시에 눈 속에 핀 정기 살아나네. 蕭騷冷韻雪精神
안동 고을 깊고 적막한 산촌 花山深處寂寞村
매형에 의탁해 시혼을 달래네. 惟有梅兄托吟魂
눈 내린 밤 이 마음은 평온한데 芳心寂寞白雪夜
달은 기울고 매화 향 흩날리네. 暗香浮動月黃昏
얼음 옥처럼 맑아 세상사 멀리하니 氷淸玉潔逈塵雜
정원의 많은 꽃 가운데 으뜸일세. 百花䕺裏冠一園
(…)
문 닫고 홀로 지내니 杜門守幽獨
매일 정회가 담박하다네. 孤懷日自淡
시절이 따뜻하고 고우니 時物正暄姸
춘풍이 이미 세 번 불었네. 春風已暮三
매화가 날 오라 부르시니 梅仙肯超我
일어나 두세 번 찾아갔네. 起來再三探
암향은 절로 차갑고 暗香氣自冷
성긴 그림자 애당초 담박해. 疎影質本澹
흐릿한 밤에 함께 즐겨 依依參夜橫
달빛 아래 아침 이슬 내리네. 皎皎露朝濫
그대는 장부 행차하시니 君是丈人行
춥고 괴롭겠지만 감당하리. 寒苦力自擔
높은 절개 반짝이며 綽約任高潔
속진 멀리한 아름다움 품었네. 藏艶遠塵暗
날마다 배회하리니 日夕可徘徊
어찌 속된 선비가 넘보랴. 肯遣俗士瞰
위와 같이 경암은 퇴계가 ‘매형’이라고 불렀던 매화를 애호하였다. 매화의 속성을 따라 고결하며 청아한 선비 퇴계의 형상을 답습하고자 했다. 아울러 각종 화훼에 대해서도 매우 애호하였다. 이는 퇴계가 ‘절우사’에 ‘매화’․‘난초’․‘대나무’․‘국화’ 등을 심고 벗처럼 지냈던 것과 동일하다.
이른 추풍이 불어오는데 不識秋風早 (난초)
어느덧 네 잎이 돋았네. 居然已四䕺
향기 찾아 갔더니 聞香起訪去
정원 가장 깊은 곳에 있구나. 園草最深中
비온 뒤 훤추리가 雨後萱草花 (훤추리)
빈 뜨락에 조용히 피었네. 空庭寂寞開
호랑나비 한 마리 惟有玄文蝶
이따금 찾아든다네. 時時獨訪來
연못에 푸른 연꽃 심었더니 盆池種碧蓮(연꽃)
연잎 크기가 대야만 하네. 蓮葉大如盤
비 맞고 바람 따라 흔들리니 帶雨隨風動
고운 구슬이 동글동글 구르네. 明珠互轉團
봄바람에 매일 꽃 피우더니 東風日吹開 (도리)
봄바람에 매일 꽃 지고마네. 東風日吹落
필 때는 그렇게 곱더니만 開時何灼灼
질 때는 이렇게 허무하네. 落處還寂寞
피고 질 때 봄바람 같건만 前後一東風
홀연히 후박이 다르네. 忽焉殊厚薄
인정도 이와 같이 人情從可知
슬프더니 기쁘다네. 焉用悲且樂
희고 붉어 오색이 갖춰져서 白白紅紅五色推(국화)
대청 앞의 마루 가에 활짝 피었네. 軒前堂上爛漫開
늘 즐겨 감상해도 싫증나지 않으니 常對愛賞無倦意
서리 이겨내는 절개 돋보인다네. 凌霜淸節勝含來
창 앞에 국화 심었더니 꽃이 침범했지만 種菊窓前衆卉侵
봄여름 동안 화려함 다투지 않았네. 經來春夏不爭榮
한 밤에 찬 서리 내린 뒤에 一夜天霜嚴打後
늠연한 굳은 절개 분명하게 보였네. 凜然勁節自分明
이처럼 경암은 퇴계가 산수자연을 애호하면서 심성 수양과 학문 연찬에 전념했던 바와 같이 자연을 애호하며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이바지했다. 아울러 그는 자연 귀의를 통한 심성 도야와 자연합일의 경지를 이룬 것을 시로 담아내었다.
대청 아래 작은 연못 고요한데 軒下小塘靜
연못가 산체나무 우거졌네. 塘邊嘉檓繁
이따금 홀로 앉아 有時成獨坐
뜻이 맞아 할 말 잊었네. 意會自忘言
하얀 두 마리 학 皎皎雙白鶴
머리 맞대고 모래 벌에 섰네. 交首立明沙
가까이 가도 피하지 않고 近人機不動
강 하늘엔 황혼에 해 기우네. 江天夕陽斜
눈 위의 달 비할 바 없이 밝고 雪月皎無比
하늘과 땅이 문득 경관을 바꾸었네. 乾坤頓改觀
기질지성을 이겨내야 可知由氣質
본성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네. 本性自全完
쓸쓸한 가을에 달은 밝은데 潦落秋生月正明
문에 기대앉으니 마음이 맑아지네. 倚門閒坐一心淸
이에 내가 만물임을 인식 못할 정도 此時不覺身爲物
천지가 탁 트여 만고가 푸르네. 天地廓然萬古情
자연과 친화 내지 교감을 이룬 상태에서 자연과 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룬다. 그래서 미물도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이런 경지에 이른 시인은 속세의 잡념인 기질지성을 극복하고 심성의 정화를 이룬 경지에 몰입된다. 이러한 경지 역시 퇴계의 산수자연관 체득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전원 은거의 정취
이제 경암이 은거하면서 누리는 은거 미학과 낭만 정조가 담긴 작품을 보기로 한다.
오년 동안 집을 지어 經營五載屋
산뜻하게 서까래 몇 개 얹었네. 蕭灑數架成
성품처럼 나직하고 좁게 했지만 湫隘從吾拙
상큼하고 우뚝해 지형에 맞추었네. 爽塏得地形
한가해서 풀 자란 것 바라보고 砌閒看草長
조용한 집엔 산새들 지저귀네. 家靜任禽噪
주인이 술에 취해 잠들자 主人方醉臥
객이 와도 깨우지 않네. 客到信無報
안석에 기대 냇물 소리 듣고 隱几灘聲遠
사립문 열어 산 빛을 들이네. 開門岳色堆
앉아 담소하다 밤이 되었으니 坐談移夜色
강의 달은 구름 걷고 비치네. 江月捲雲來
비에 젖어 소나무 윙윙 대지 않고 雨濕松無響
산은 높고 길은 비스듬하네. 山高路轉迤
흰 구름은 골짜기에 휘감겼고 白雲深鎖洞
석양 절간에 경쇠 차갑게 들려오네. 寒磬暮寺起
밤마다 달빛은 창문을 열게 하고 夜夜月開戶
아침이면 안개가 사립문 잠그네. 朝朝霧掩扉
세상 일로 어이 그리 분주한가 世事何紛紜
스님은 산문 밖에서 돌아오시네. 僧從山外歸
나무 심어 울타리 두르고 栽樹因爲籬
시냇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 듣네. 臨溪澹聽瀯
날마다 여기서 시 읊으니 日夕在滋詠
공경의 벼슬도 부럽지 않네. 不願公與卿
궁벽한 맑은 낙동강 가에서 擬窮淸洛上
먼저 고인의 향취를 찾았네. 先啄故人扃
종일 산가의 흥취를 누리니 盡日山家趣
찬 강에 빗소리 섞여 들려오네. 寒江雜雨聲
고기야 넌 무엇이 즐겁니 問魚何所樂
푸른 물결 누비며 노니구나. 蒼波任自躍
술자리 파하자 암벽의 꽃잎 흩날리니 酌罷巖花飛
나도 나만의 즐거움에 빠져든단다. 吾亦樂吾樂
어계 노인 황운은 漁溪老友黃雲甫
순진하여 고인의 풍모 지녔네. 純眞不失古人模
내가 오래 술 마셔 흥 없음을 알고 憐我久無盃酒興
주막 근처에 주석을 마련하였네. 亟謀野飮延近壚
청풍교 옆 석계 언덕의 靑楓橋上石溪畔
대여섯 노인 모두 백발일세. 五六老叟還白鬚
장작불 피워 고기 굽고 푸성귀 곁들여 焚柴煮魚雜野蔌
술을 마련해 자리 잡고 앉았네. 儼然麴生來座隅
즐거이 술 잔 들고 양껏 마셔 欣然對酌不計數
향기론 시내 산 노을 보며 배를 두드리네. 溪香山靄笑膚腴
일에 따라 부대끼는 것 말해 무엇해 從事督雜何足辯
시 짓고 근심 떨친다는 말 틀림없네. 詩釣愁帚誠不誣
고운 나무그늘 따라 석양에 산보하니 取來淸陰步夕照
이 즐거움 산밖에는 없을 것일세. 樂哉此樂山外無
궁벽한 곳에서 좋은 시절 즐기니 僻處愛佳節
산촌의 봄이 숲에 돌아왔네. 山村春返林
묵은 잣나무에 연기 노을 맴돌고 老栢煙霞纏
네모난 못은 세월만큼 깊어라. 方塘歲月深
대 사립문 초막에 선비가 시 읊고 竹戶吟醒士
바람 부는 헌에서 거문고 연주하네. 風軒喧古琴
그윽한 흥취 여기에 있으니 幽興此間在
때로 함께 와서 담소 나누세. 時來共說心
산골 소나무 백 척이나 높고 澗松高百尺
산의 달은 가지 끝에 달렸네. 山月出其枝
일렁거리는 그림자 보느라 要看婆娑影
일부러 느릿느릿 배회한다네. 徘徊上故遲
독서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讀罷悠然起
물길 따라 내키는 대로 간다네. 從流任所之
내게 무슨 일 있냐고 하지만 問我緣何事
마음이 평온하여 세상사 잊었네. 心閒不自知
산새는 창문 엿보고 지저귀고 山鳥窺窓喚
뜰의 꽃은 비 맞아 산뜻하네. 庭花帶雨明
문득 한 번 웃으며 깨닫건대 覺來還一笑
즐거운 마음 이내 맑아지네. 意更惺惺
마음 한가해 깊은 골짜기 찾으니 意閒尋僻磵
다리 아프면 이끼 낀 자갈밭에 쉬네. 脚捲坐苔磯
숲의 새 울며 사랑스런 짝을 찾고 林鳥喚幽侶
산속 꽃 석양 빛 머금었네. 山花帶晩暉
가도 가도 원두는 보이지 않고 進進源無盡
돌고 돌아 산길은 아득하여라. 回回徑轉微
고인들 모두 아득하시니 古人皆綿邈
슬프게 돌아가고픈 마음일세. 悵望卻言歸
깊고 텅 빈 계곡이 열리니 窈然虛曠洞天開
희고 맑은 달빛은 누대 가득하다. 皎皎淸光月滿臺
주인이 앉아 맞고 보내는 것 단절하니 主人定坐斷迎送
나그네가 굳이 찾아올 것인가. 客子何曾枉訪來
옛 마을 저무는 노을 아침 안개 속 古洞暮霞朝霞裏
맑은 강 한 굽이 두 굽이 사이일세. 淸江一曲二曲間
다시 고정에 올라 봉자 운의 시를 쓰며 再到孤亭題鳳字
홀로 앉아 읊으며 앞산을 마주보네. 沈吟獨坐對前山
이와 같이 경암은 산수 자연 속에서 진정한 멋과 낭만을 누리며 평온한 삶을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내면의 수양과 성리학자로 지향해야 할 유가 이념을 실천하였다. 산림처사의 전형을 확보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암의 산수자연관이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퇴계의 「도산구곡」의 전통을 이어 그가 춘양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한 것 역시 그러한 정신 지향을 반영한 실증이다. 이러한 요인이 결국은 「춘양구곡」 창작 동인으로 작용했다. 「춘양구곡」 창작 배경 가운데 하나인 선유船遊의 행적을 보기로 한다.
5) 선유의 전통
실제로 경암의 「춘양구곡」 창작 동인은 배를 타고 노니는 선유의 전통에서 비롯된다. 다음 시는 실제 그러한 유흥을 즐겼던 경암의 풍류한적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낙동강 선유의 풍경을 담고 있다.
좋은 날 함께 낙동강에서 노니니 勝日同遊洛水隈
무궁한 맑은 경관 돌아가길 잊었네. 無窮淸賞却忘迴
밝은 달 빛 물 위에 내려 고요하고 澄輝月上涵漣靜
궁벽한 촌가 인적이 언덕 너머 들리네. 喧語村深隔岸來
바람 잦아 배 저어 맑은 물 헤쳐가고 風靜船橫明鏡裏
붉은 꽃 수놓은 절벽은 그림 병풍일세. 花紅壁立畵屛開
이즈음 술기운 약해질 까 염려되어 此時酒力猶嫌小
봄 산을 대해 앉아 다시 한 잔 마시네. 坐對春山更一杯
좋은 시절에 벗과 함께 낙동강 선유를 즐긴다. 낙동강 좌우에 펼쳐진 수려한 경관은 신선 세계에 몰입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래서 일행은 돌아가길 잊었다. 시간이 경과하여 저녁이 되어 박ㄹ은 달빛이 밤의 아름다운 풍광을 펼쳐 보인다. 낙동강 고요한 수면 위로 잔잔한 달빛이 비단처럼 곱게 펼쳐진다. 이러한 시각적 심상의 흐름에 이어 시골 마을의 인기척을 삽화함으로써 청각적인 운치도 더했다. 언덕 너머로 인가가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며 시골 저녁 풍경을 눈에 선연하게 배치했다.
이 화폭에 인가는 담기지 않았다. 시적 화자의 귀를 통해 들리는 농민들 목소리를 담음으로써 민가의 존재와 강촌의 풍광을 느끼게 하였다. 어느덧 바람이 잦아들고 노 젖기에 적합하였다. 노를 저어가면서 양쪽 절벽을 아름답게 장식한 단풍 절벽을 보노라면 화려한 비단 채색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심미 의식이 작용하여 작품의 미학을 제고했다. 극한 유흥의 순간과 고조된 희열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시인은 이즈음 술기운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다시 술잔을 당겨 그러한 유흥을 이어나가길 희망하였다.
이러한 선유의 전통을 후계 이이순을 통해 확인해 보자. 후계의 도산 산수에 대한 애정은 풍월담 선유를 통해 실현된다. 퇴계는 1562년(명종17) 7월 기망에 적벽 고사를 본받아 문인들과 월천곡의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계획했지만 큰 비를 만나 실행하지 못했는데, 후계는 이로부터 261년이 지난 1823년(순조23)에 선조가 이루지 못한 뱃놀이를 추진하기 위해 다음처럼 기획했다.
풍월담은 낙천의 남쪽, 부용봉 아래에 있는데 경관이 빼어나지만 명칭은 순박하다. 가경 경신년(1560)에 문순 선생이 월천 옹과 함께 여기에 서 노닐었다. 선생은 귀가해서 월천에게 서찰을 보내 이 연못의 칭호에 대해 논하기를, “월천은 우리 고장 강산 가운데 제일이다[吾鄕江山之 第一]”라고 했다. 풍월이라는 미칭은 응당 최고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풍월담’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연유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임술 년(1562) 음력 7월 16일에 선생이 소동파 고사에 의거하여 월천․후조․읍청․설월․일휴․성재 제공과 함께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고자 계획했지만 비가 내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절二絶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임술년 7월에 기쁘게 적벽의 가을을 맞아, 풍월담에서 서로 만 나 난초 같은 고운 배를 띄우네[戌七欣逢赤壁秋 相邀風月泛蘭舟]” 등의 시구가 이것이다. 풍월담이 이미 아름다운 칭호를 얻었으며 승경 유 람 약속에 이어 시를 지어 전파하면서 사람들에게 풍월담이 우리나라의 적벽임을 널리 알려지게 한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 을 잇는 자가 없이 어언간 200여 년이 지났다.
풍월담의 지리적 배경과 위치와 선조 퇴계가 향토 제현들과 함께 소동파의 ‘적벽고사’에 근거한 선유를 기획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아쉬움을 일깨우며 풍월담의 명칭 내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 여기서 주요한 대목은 퇴계가 이곳 월천의 풍광을 들어,우리 고장 강산 가운데 제일이라는 찬사를 했던 점이다. 이로써 월천은 퇴계를 통해 최고의 풍광을 지닌 강산의 미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후계는 이 ‘풍월담’을 명명한 분이 바로 ‘퇴계’ 선조였다는 점에서 추존 의식이 절로 우러났던 것이다. 후계는 선조를 비롯한 선현들이 선유를 이루지 못했던 점을 상기하면서 그 풍류 정신의 맥락을 계술하고자 내심 희망하였고 다음처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금년[임술년] 7월 16일에 고을의 후생들이 망령되이 선배들의 고사를 추모하여 선유를 실행하고자 역동서원에서 모이기로 약속 을 했다. 그 일을 주관한 이는 역동서원 원장이고, 그 모임을 협조한 이는 도산서원 원장이다. 선유에 참여한 자는 노소와 관동 을 포함해 모두 25인이었다. 오담에서 배를 띄워 물결을 따라 풍월담으로 내려갔다. ‘오담’은 ‘동취병’이 남쪽에서 뻗어 온 자락 의 끝부분에 있고, ‘풍월담’은 ‘서취병’이 북쪽에서 뻗어 온 끝자락에 있으니 이른바 ‘동쪽에서 뻗어 서로 이어졌다는 것’과 ‘서 쪽에서 뻗은 것 이 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으로 형세가 합쳐진 곳이다. 그런데 강물은 동취병에서 흘러나와 서취병에 부딪혀 남 으로 흘러 오담이 된다. 또 동으로 흘러 풍월담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배는 물길을 따라 동에서 내려오고 달은 물을 거슬러 서행하여 두 못 사이에서 만나 함께 배회한다. 이는 한 구역 가장 기이하고 빼어난 경관으로 천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된 오묘 한 곳으로 적벽도 이 경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에 풍월담이 도산 강산의 첫째 승경이 되는 점과 달 오른 밤에 뱃놀이를 하 기로는 가장 좋은 구역임을 알게 되었다.
후계는 임술년(1802년) 칠월 기망에 25명 인사들과 함께 역동서원에 모였다. 이어 ‘오담’에서 배를 띄우는 선유를 감행하였다. 이 행사를 전반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한 분은 역동서원 원장이고, 협찬을 아끼지 않았던 분은 도산서원 원장이다. 이어 ‘오담’과 ‘풍월담’의 지리 환경적 특성을 사실적인 안목으로 자세히 기술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은 아주 빼어난 경관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월담’은 중국 ‘적벽’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도산 산수 승경에 대한 찬미를 연속적으로 발하였다. 이 대목에서도 후계의 도산 산수 승경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적벽 놀이처럼 퉁소를 불고 노래하는 풍류가 없어 배에 탄 아이들에게 ‘적벽부’를 합창케 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선유 하는 노래를 대신하게 했다. 이윽고 어디선가 두 세 명의 촌동村童이 강으로 와서 적벽부를 외우며 화답하는 자들이 있어 가 만히 듣고 보니 저절로 장단을 맞추게 되어 ‘노래에 따라 퉁소를 불어 물속에 잠긴 교룡을 춤추게 하고 과부를 울게 하는 것’ 같았다. 불러서 함께 배를 타고 몇 리를 가다가 ‘풍월담’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반타석이 있었는데 백 명은 앉을 만 했다. 이에 배를 묶어 두고 배에서 내려 바위 위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셨다. 한참 지나서 노를 거꾸로 저어 물결을 거슬러 올라와 오담으로 돌아와 배를 세웠다. 밤이 이미 깊었지만 술을 세 순배하고 나서 배에서 내려 물길을 따라 역동서원의 재사에 들어 갔다.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앉아서 감상하며 다하지 못한 흥을 붙였다. 이 밤 내내 능히 백 년의 빼어난 일을 다 이룬 셈이다. 동녘이 훤하게 밝아 모임을 파하고 헤어질 무렵에 모두 말하기를, “어제 밤 선유 행사를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 기에, 드디어 제목을 달아 이처럼 기록하였다. 그리고 “예전 임술년에 지은 시 두 구를 추모하는 차운시를 지어 이 기록 뒤에 붙여두라”는 하명이 있었는데 재주 없는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라고 부탁하였다.
구체적인 선유의 광경을 기록했다. ‘적벽고사’처럼 퉁소를 마련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적벽부를 구성지게 부르게 하고 뱃전을 두드리며 흥을 돋우었다. 그런데 기약하지 않았던 촌동들이 들이닥쳐 선유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적벽가를 높게 부르며 어느덧 ‘풍월담’에 이르러, 반타석에 앉았다. 거기서 분위기 좋게 술을 마시며 풍류 정취에 젖어들었다. 다시 배를 타고 ‘오담’으로 돌아와서 역동서원 재사에 투숙하는 일정을 기록했다. 이미 상기된 흥을 주체할 수 없어 오동나무에 달이 걸린 흥취를 만끽하노라니 어느덧 밤을 지새우고 만다. 이 밤 내내 한 평생 이루지 못했던 풍류 서정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바이다. 일행 중 이러한 감흥을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제안에 따라 하계는 이 일의 전말을 기록해 둔 것이다.
내가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 고장에서 경승지로 배를 띄울 만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반드시 풍월담을 택해 선유를 한 것은 지난 1562년 임술년의 옛 일을 이어가기 위함이다. 그 때 비록 비가 내려 선유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분들이 남긴 시를 외우노라면 호탕하게 가슴 속에서 텅 빈 배가 저 강과 바다에 떠다니는 기상을 느끼게 되니 당시 선유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무에 올라 바람을 쐬겠다고 하던 대답을 봄 행단에서 비파를 연 주하던 날에 했으니, 곧 증점이 일찍이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지 않았더라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때문에 옛 사람들이 욕기동자가 되길 원한다는 말을 쓰곤 했다. 이제부터 누군들 풍월담에서 선유하길 원하지 않을 이 있겠는가? 게다가 배에 탔던 사람들 가운데 태반이 선생의 후손이다. 또 여러 선배 가문의 후손들로 동참한 자들도 있으니 이는 모두 선조들의 유지를 추모하려는 마음에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오래오래 널리 그러한 감회를 느껴보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선유는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유지를 이어가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 기사를 적어 풍월 담 기망의 선유를 계승한다는 서문을 짓게 되었다.
기실 이 대목에서 후계는 이 선유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도산 경내에 선유할 장소가 많지만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1562년에 향토 선현들이 이루지 못했던 선유를 이어가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분들이 비록 선유를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남긴 시를 읽으면 선유한 이상 선유의 광경이 재현되므로, 선유 이상의 의미를 담보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 사례로 증점의 ‘욕기동자’ 고사를 인용하였다.
아울러 이 풍월담 선유에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퇴계의 후손이며 당시 그 선유에 참여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후손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결국 이 행사의 추진 목적이 선조들의 유지를 계술해 나간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위의 풍월담 선유에는 퇴계의 월천 산수 강산 찬미 의식을 강조하는 한편 당시 선유를 계승하자는 후계를 비롯한 향토 후학들의 선현 추모 의지가 융합되어 이러한 선유 행사 추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 가운데 퇴계를 비롯한 후계의 도산 산수 강산 제일주의 정신이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퇴계처럼 도산 산수 자연 애호가였다. 경암의 경우 다음 작품에서 선유의 즐거움을 지속해 나가고픈 마음을 담았다.
곡수유상 예전처럼 단란하네. 曲水流觴勝事團.
물굽이 산굽이 길은 구불구불. 水曲山回路百轉.
물굽이 산굽이 경치는 더욱 아름다워. 水曲山回境轉幽.
산 사이 물굽이 山間與水曲
위 작품은 실제로 그가 춘양구곡을 경영하고 창작하는 과정상 주요한 기제가 되었다. 이제 이러한 창작 배경 이해를 토대로 해서 춘양구곡 여행을 떠난다.
Ⅳ. 「춘양구곡」의 전개 양상
1) 봉화의 구곡원림
경상북도 최북단 지역에 자리를 잡은 봉화는 동쪽으로 울진군과 영양군을, 서쪽으로는 영주시를 경계로 한다. 남쪽으로는 안동시,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태백시․삼척시와 경계를 이룬다. 특히 봉화는 전체 면적의 83%가 산악지대이다. 북쪽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이 분기하는 지역이어서 ‘태백산’․‘구운산’․‘금산’․‘선달산’ 등 높은 산이 자리하고 북동쪽 역시 높은 산이 물굽이처럼 뻗어 경북 최고의 산악 지역으로 꼽힌다. 산이 높으니 자연히 골짜기가 깊고 그 사이로 맑은 냇물이 흘러내림으로써 천연의 수려한 경관을 선사한다. 봉화의 중앙을 남서로 관류하면서 작은 지류를 모아 흐르는 내성천을 비롯하여 작은 시냇물이 봉화의 계곡과 들판을 적신 뒤 낙동강에 유입된다.
이처럼 수려한 산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봉화 지역에는 무수한 산림처사들이 선현을 추모하며 조상을 모시며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고결하게 하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퇴계를 존숭하여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棹歌」와 이를 화운한 퇴계退溪의 「한거독무이지차구곡가운십수閒居讀武夷誌次九曲櫂歌韻十首」는 그들의 삶에 있어 매우 주요한 시가 아닐 수 없다. 퇴계의 구곡시는 은거하는 사림들에게 시 창작의 전범 기제로 작용되었다. 봉화 지역에 거주하는 산림처사 역시 퇴계의 도산구곡시 전통을 이어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구곡시를 창작했다.
봉화에는 구곡원림이 네 군데 존재한다. 경암敬菴 이한응李漢應(1778-1864)이 춘양면과 법전면의 운곡천雲谷川을 중심으로 경영한 「춘양구곡春陽九曲」이 있다.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1764-1848)가 법전면 일대를 중심으로 설정한 「법계구곡法溪九曲」과 봉화군 명호면․안동시 도산면에 걸쳐 설정한 「대명산구곡大明山九曲」이 있다. 그리고 노봉蘆峯 김정金亻正(1670-1737)이 물야면 오계에 설정한 「오계구곡梧溪九曲」이 있다. 이처럼 봉화의 선비들은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성리학의 도가 구현된 고장을 만들며 구곡시 창작 정신과 성리학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2) 춘양구곡의 지리적 특성과 설정 배경
경북에서 맨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봉화는 강원도 태백․영월․삼척과 접하는 고을이다. 동해를 끼고 있는 울진을 빼고 나면 영남 내륙 지방에선 최북단에 속한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높은 분수령을 동서로 끼고 있는 환경 때문에 영남의 대표적인 오지로 꼽혀 왔다. 이러한 봉화의 북쪽에 위치한 춘양은 더욱 깊은 산골이다. 봉화는 이처럼 궁벽한 곳이지만 유명한 유학자들의 숨결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러한 전통은 운곡천雲谷川을 따라 흘러왔다. 운곡천은 백두대간 태백산 줄기인 ‘문수산文殊山’․‘옥석산玉石山’․‘각화산覺華山’ 등에서 발원해 춘양면 서벽리․애당리를 적시고 법전면 소천리를 거쳐 명호면 도천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물줄기다.
춘양구곡春陽九谷은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춘양면과 법전면으로 흐르는 운곡천 8.4km에 걸쳐 설정된 구곡원림이다. 운곡천에 춘양구곡을 처음 설정하고 경영한 이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경암 이한응(1778-1864)이다. 백두대간과 운곡천을 끼고 있는 춘양은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이와 함께 덕망이 높은 학자들이 은거하며 강학 활동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던 유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산수자연과 함께 은거구지隱居求志하는 유학자들이 있기에 경암은 이곳을 구곡으로 설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암은 태백산 서남쪽 두 골짜기에서 나온 춘양 물이 남으로 흘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길이가 거의 100리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태백산은 신령함과 빼어남이 충만한데 춘양이 그 가운데 자리하기에 그윽하고 깊으며 넓고 넉넉하여 아름답고 무성한 기운이 가득하다고 했다. 경암은 이러한 춘양의 산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신령하고 청정한 공간임을 감안해 구곡 설정에 임했다.
춘양은 냇물이 그 가운데를 지나면서 맑고 차가우며 달고 깨끗하여 굽이굽이를 이룬다. 중간 십여 리에 서로 마주할 정도의 가까운 곳은 애당초 빼어난 곳은 아니지만 먼 지역의 사람들이 기이한 곳으로 여긴다. 때문에 농부들이 심은 뽕나무와 그들이 정성껏 가꾼 삼이 무성히 자라고 연기와 노을이 끼는 여느 곳과 별반 차이가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경암이 춘양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암은 ‘춘양’의 지역 특성을 찾아냈다. 춘양은 외진 고을이지만 덕이 높은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고 풍속과 예절이 빛나고 우아해 세인들이 칭송하는 곳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경암은 이곳 춘양이 성리학의 도가 구현되는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되기에 최적합한 곳임을 착안했다. 아울러 춘양은 빼어난 산수가 ‘은구隱求’와 ‘양진養眞’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춘양의 산수와 인물은 이를 알아보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다며 춘양 산수자연과 인문지리적 특장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경암이 설정한 춘양구곡의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가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 배경과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춘양은 성리학 전개와 통합의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될 요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춘양구곡」 검토에 앞서 퇴계의 ‘도산구곡시’ 정신을 계승한 후계 이이순의 「도산구곡」 설정을 보기로 한다. 이러한 전통을 경암이 계승했기 때문이다. 후계는 실제로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아홉 굽이를 자신이 직접 설정하고, 구곡시를 지었던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퇴계는 실제로 구곡 경영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난삼아 칠대 삼곡시를 짓다’라는 시에서 ‘월란암’ 주변의 산수 가운데 ‘초은대’․‘월란대’․‘고반대’․‘응사대’․‘낭영대’․‘석담곡’․‘천사곡’․‘단사곡’을 ‘칠대’와 ‘삼곡’으로 읊었는데 물이 산을 감고 돌아 흐르는 곳은 세 곳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퇴계는 더 이상 무모하게 구곡의 범위를 확대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후계는 현장 답사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도산구곡의 정확한 위치를 서술한 서문을 작성하고 구곡시를 남겼다. 이러한 후계의 정신은 위에서 검토한 「강루팔영江樓八詠」의 추적과 재설정 및 시작詩作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말하자면 후계는 향토선현들의 유촉지에 대해 각별한 애정 의식을 지녔으며, 이런 의식을 기반으로 문헌적 고증과 탐사를 통해 지난 역사와 문화 복원에 이바지했던 인물로 평가해야 한다. 「도산구곡」 서문을 검토해 보면 후계의 면밀한 작가 의식이 드러난다.
세상에서 ‘도산’을 일컬어 ‘무이’라 한다. 지역상 서로 떨어진 것이 1만여 리이고 시대상 서로 떨어진 것이 오백여 년 인데 두 산이 서로 이름을 가지런히 하는 것은 참으로 양항숙이 ‘땅은 사람이 뛰어나기 때문에 같아진다.’고 말한 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땅의 빼어난 경치 또한 서로 멀지 않으니 두 선생이 지은 「잡영」을 살펴보면 「무이잡영」의 12 수와 「도산잡영」 18절이 또한 절절이 서로 부합된다.
후계는 ‘무이’와 ‘도산’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무이’와 ‘도산’의 밀접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자와 퇴계의 학문적 연관성을 공고히 한다. 주자가 강학을 하던 ‘무이’와 ‘도산’은 지리상 일만 여리 떨어져 있고, 시대적으로도 이미 오백 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두 곳은 상호 근친성을 확보하고 있다. 결국 후계는 양항숙의 말을 빌려 땅은 뛰어난 사람으로 인해 같아진다는 논리를 들어 반증해 보인 것이다. ‘무이’가 주자로 인해 그 절경이 천하에 회자되듯이, ‘도산’은 퇴계가 있기 때문에 ‘무이’와 같은 승경을 지닌 곳이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무이잡영」 12수과 「도산잡영」의 18절은 동일한 성리학 사유 의식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점에서 상호 유사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무이구곡’이 배를 띄울 수 있는 것처럼 도산의 ‘낙천’도 선유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무이’와 ‘도산’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때문에 주자가 은거구도했던 ‘무이’처럼 ‘도산’도 그러한 성리학 성지 공간으로 자리매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후계는 서두에서 ‘도산’과 ‘무이’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 두 곳은 성리학 유풍이 깃들고 철학적 사유가 구현되며 천인합일이 이루어진 신성한 지역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어 ‘무이구곡’과 ‘도산구곡’의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해명한다.
이에 한두 동지들과 물을 거슬러 오르며 굽이를 따라 노닐면서 강산의 승경을 토론하였다. 저 ‘영지산’과 ‘부용봉’이 구름 끝에 솟은 것은 ‘만정봉’과 ‘옥녀봉’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학소암’과 ‘갈선대’가 가파른 절벽에 임한 것은 ‘금계 동’과 ‘선장봉’과 매우 닮았으며, ‘동취병’과 ‘서취병’은 참으로 ‘대은병’과 같다. ‘청벽’과 ‘단사’는 그대로 ‘벽소’와 ‘도원’ 이다. 처음에는 수많은 골짜기와 바위들의 그윽하고 깊은 곳을 찾았는데, 끝에는 시내의 근원에서 별천지의 기이한 절경에 임하여 가득히 얻어 호연히 돌아오니 거리가 멀고 세월이 아득하다는 한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산천과 운물이 서로 닮았을 뿐만 아니라 천지 사이에 우리 도가 한 가지 기맥이 북에서 남으로 서로 관통하기 때문 이다. 이에 마음에 감동을 받고 언어로 표현된 것을 구비에 따라 차운하여 구비마다 지난 일을 기록해두었으니 후일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 ‘청량산’은 ‘무이산’과 다르지 않으며 지리상 멀지도 않은 곳임을 알게 하기 위해 이렇게 기 록했다. 또 도산지를 편찬하여 구곡의 승경을 실어 무이지와 짝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 청량산의 복이 아닌가? 나는 이로 인해 깊은 기대를 갖고 있다.
후계는 동지들과 함께 ‘무이’와 ‘도산’의 산천 지리적 유사성에 착안하여 구곡의 위치 설정에 대해 토론을 했다. 도산의 ‘영지산’과 무이의 ‘망정봉’을 견주었다. 이어 도산의 ‘부용봉’과 무이의 ‘옥녀봉’을 비교했다. 이어 도산의 ‘학소암’을 무이의 ‘금계봉’에, 도산의 ‘갈선대’를 무이의 ‘선장봉’에 비교했다. 도산의 ‘동취병’과 ‘서취병’을 무이의 ‘대은병’에 비교하였다. 이는 매우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도산서원이 ‘동취병’과 ‘서취병’에 위치한 것처럼 무이정사가 ‘대은병’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이다. 퇴계가 학문을 강학하던 도산서원이 도산구곡의 제5곡에 있고, 주자가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대은병’이 무이구곡의 제5곡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 도산의 ‘청벽’을 무이의 ‘벽소’에, 도산의 ‘단사’를 무이의 ‘도원’에 비교하면서 도산의 지리적 특성이 무이의 지리적 특성과 상호 부합됨을 강조했다.
이어 도산의 ‘청량산’과 무이의 ‘무이산’은 짝을 이루고, 도산지와 무이지도 절묘한 대를 이룬다. 이로써 ‘무이’와 ‘도산’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퇴계의 학문 정신이 깃들어 있고 유학의 정수가 온축된 성지로서 명실상부한 공간임이 확증된다고 했다. 이제 후계는 도산과 무이의 상호 부합성을 인지시키고 나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구곡 설정에 자신이 직접 나선다. ‘청량산’에서 ‘운암’까지 명승지를 충분히 관찰하고 「무이구곡」에 견주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다음처럼 구곡을 설정한다.
내가 보건대 ‘청량’에서 ‘운암’까지 4-5리 가운데 명승지가 많은데 도산이 그 가운데 자리하여 상하를 관할하며 하나 의 동천을 형성한다. 시험 삼아 그 굽이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무이구곡’의 예에 따라 나누면, ‘운암’이 제1 곡, ‘비암’이 제2곡, ‘월천’이 제3곡, ‘분천’이 제4곡, ‘탁영담’이 제5곡에 있는데 여기에 도산서당이 있다. 제6곡은 ‘천 사’, 제7곡은 ‘단사’, 제8곡은 ‘고산’, 제9곡은 ‘청량’이다. 굽이굽이 모두 선생의 제품과 음상이 미친 곳이다.
후계는 자신이 직접 도산구곡의 위치를 추적하고 현장 답사를 거쳐 선조 퇴계의 유촉을 실사,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후계는 ‘시험 삼아 「무이구곡」의 설정 선례를 따라 「도산구곡」의 위치를 설정한다’고 했다. 「무이구곡」은 주자의 학문이 온축된 성지인 만큼 도산의 퇴계 유촉지에 한국 유학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런데 후계의 구곡 설정은 일부 다르다. 후계는 2곡을 ‘비암’,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다. 오가산지에 의하면, 2곡을 ‘월천’, 3곡을 ‘오담’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이유는 후계의 의식 근저에는 「도산구곡」은 「무이구곡」의 지형과 유사성을 확보해야 마땅하다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후계는 주자의 학문 전통이 퇴계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듯이, 「무이구곡」의 지형과 「도산구곡」은 외형상 일체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래서 「무이구곡」의 2곡에 있는 여성 이미지의 ‘옥녀봉’을 닮은 바위가 「도산구곡」의 제2곡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굳이 ‘비암’을 2곡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도산구곡」 제3곡에도 「무이구곡」의 제3곡에 있는 ‘가학선’을 닮은 벼랑이나 바위가 존재해야 한다고 신념했기 때문에, ‘부용봉’이 있는 ‘월천’을 제3곡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실제로 후계는 「무이구곡」 제2곡 ‘옥녀봉’을 의식하면서 「도산구곡」 제2곡에서 ‘비암’을 두른 푸른 숲의 모습을 여인이 머리를 길게 닿은 것에 비유하여 정감이 있게 표현했다. 이런 정신은 실제 구곡시 창작 과정상 현장 답사 후 구곡의 실제 위치와 관련 인물 행적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구곡시를 지을 때 반드시 퇴계 시문 가운데 한 두 구를 인용하여 창작한 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후계는 ‘무이’와 ‘도산’을 비교하면서 상관관계를 시종일관 강조한 점을 유추해 볼 때, 후계 의식 저변에 「도산구곡」과 「무이구곡」의 지형성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위와 같이 2곡을 ‘비암’으로, 3곡을 ‘월천’으로 설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후계의 구곡 설정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의 학문 계술 의식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산구곡 정신을 경암 역시 수용하여 「춘양구곡」을 창작했던 것이다. 이제 「춘양구곡」 여행을 떠난다.
3) 운곡천의 원두와 유선(서시․1곡)
태백산 남쪽은 맑고 신령하니 太白鎭南曲淑且靈
발원이 어찌 청결하지 않으랴. 發源寧不潔而淸
춘양 평평한 들판에 굽이굽이 흘러가서 春陽平野逶迤去
굽이마다 구역 이뤄 대대로 명성을 남겼네. 曲曲成區歲有聲
「서시」에서 태백산 남쪽이 맑고 신령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춘양을 관통해서 흘러가는 운곡천의 원두源頭가 청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제했다. 태백산의 신령한 기운을 흡수하여 흘러오면서 춘양 들판을 적시고 아홉 구비의 물길을 형성해 가는 자태가 아름답다.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들이 깃들어 살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던 궤적이 남아 있으므로 굽이를 거슬러 오르노라면 구곡시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굽이마다 절의와 도의를 함양했던 유현儒賢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대대로 그 명성이 전해져 오는 것을 체감한다. 그러한 성리학 전통과 정신 지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픈 내심이 솟구친 것이다. 경암은 「서시」에서 ‘춘양구곡’ 설정의 의미를 함축해서 표현했다. 구곡마다 전해져 오는 ‘춘양 선비들의 절의와 학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에 초점이 있다’고 천명하였다. 그 고유한 전통과 정신적 유산을 이어 성리학 전통이 계승되는 신성한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의도를 비쳤다.
일곡인 피리 소에서 배 띄울 수 있으니 一曲笛淵可以船
옥순봉 밑에서 어천으로 들어가네. 玉筍峰下注漁川
유선이 한 번 떠난 뒤로 찾는 이 없고 儒仙一去無人訪
발자취만 남았고 무학봉은 운무로 덮여있네. 芳躅空留舞鶴烟
적연 위의 석봉을 ‘옥순봉’이라 한다. 눌은 이광정이 정자를 지어서 ‘어은정’이라 했다. 북쪽 언덕에 ‘무학봉’이 있 다.
1곡은 ‘어은漁隱’이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춘양 들판을 적시고 흘러온 법전면 척곡리의 감의산을 만나 휘어 도는 물줄기다. 어은동은 감의산 북쪽 골짜기에 잇는 마을 이름인데,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어은골 계류가 운곡천에 합류하는 굽이를 ‘어은동漁隱洞’이라 부른다. ‘어은’은 ‘물고기가 숨을 정도로 깊은 곳’이란 뜻이다. 어은동 일대는 산줄기를 휘돌아 흐르는 운곡천 물줄기가 암벽에 부딪히면서 그 아래 깊은 소沼를 이룬다. 휘돌아가는 강물이 빚은 여울과 소, 그리고 암벽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우면서도 적막한 강산 자체인 느낌을 주는 굽이다. 운곡천 물길은 바위를 만나 크게 한두 번 굽이치고 흘러간다. 물이 부딪치는 바위소가 적연이고, 그 위로 솟은 암벽이 옥순봉이다.
현재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1674-1756)이 지었다는 ‘어은정’은 남아 있지 않고 ‘어은정’으로 추정되는 터만 남아 있다. 운곡천 하류에서 상류 쪽을 보면서 어은골 물과 합수되는 곳이다. ‘적연’에 대한 추적도 용이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 지형이 변하면서 없어진 것인 지 경암이 운곡천 굽이도는 곳에 물이 고여 만든 연못을 ‘적연’이라고 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지금은 모래가 강바닥을 덮어 배를 띄우지 못하지만 그 옛날엔 충분히 배를 띄울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곡천에 임해 높이 솟은 바위 봉우리가 ‘옥순봉’이다. ‘옥순봉’이나 ‘무학봉’에 대해 현재 발행된 지도에는 이러한 이름을 가진 봉우리를 찾을 수 없다.
1곡과 연관된 인물은 눌은 이광정이다. 눌은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다. 할아버지는 예산군수 경종慶宗이고, 아버지는 정언 주澍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군수 사필師弼의 따님이다. 1696년(숙종22) 진사가 되었으며, 영조 때에 참봉·감역·세마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에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았는데 그를 스승으로 모셔 안동부훈도장安東府訓都長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 조현명이 그를 문학과 행의行誼가 산남山南의 제일이라고 천거하였고, 뒤에 김재로金在魯가 영백嶺伯으로서 조정에 들어가 또 천거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성수침成守琛이 그 자리를 사양했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그 뒤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당시 재상이던 조영국趙榮國은 그가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그는 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 인물이며 저서로 눌은집이 있다.
경암은 ‘적연’에서 배를 띄웠다. 적연 위에 석봉이 있는데 ‘옥순봉’이라고 불렀다. 경암은 옥순봉 아래에서 배를 타고 어천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굽이는 현재 유선儒仙이 한 번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유선’은 한 때 이 굽이에 머물렀던 ‘눌은 이광정’을 말한다. 그는 어은동에 ‘어은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하지만 경암이 방문한 그곳에는 눌은이 떠나가고 그의 향기로운 자취는 무학봉을 덮고 있는 안개로 남아 애상스럽게 다가왔다. 여기서 무학봉을 두르고 있는 안개는 눌은을 재형상한 시각 이미지이다. 눌은에 대해 무한한 추모 서정과 성리학적 학문과 사상의 심원함을 사모하는 정신 지향이 반영되어 여운을 남긴다.
4) 사미정과 풍대의 향기(2곡․3곡)
이곡은 맑은 계곡의 시냇가 봉우리 二曲玉川川上峰
그윽한 정자에서 마주함에 사람 얼굴 같네. 幽軒相對若爲容
갈아도 갈리지 않는 너럭바위 위에 磨而不切盤陀面
천년토록 빛나고 밝은 달이 비치고 있네. 千古光明月色重
시내의 남쪽은 산이 매우 높고 빼어나며 아래로는 마암과 횡반이 아주 넓다. 옥천 조덕린이 ‘사미정’을 지었다.
2곡은 ‘사미정四未亭’이다. 제1곡 어은에서 운곡천을 따라 약 1k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시내가 넓어지며 맑은 물이 천천히 흐르는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이 ‘사미정’ 계곡이다. 경관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사미정 주변 경관은 산이 매우 높고 빼어나며 아래로는 마암磨巖과 횡반橫盤이 펼쳐진다. 시내의 바닥이 바위로 이루어져 그 위를 흘러가는 물이 더욱 맑다. 사미정에서 바라보는 이 굽이의 경관은 아홉 구비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둘째 굽이에 이르러 만나는 ‘옥천玉川’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1658-1737)의 호이면서도 운곡천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미정은 경북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554번지에 소재한다. 옥천 조덕린이 1737년(효종9)에 이곳 명승경관지를 찾아 정자를 건립하고 ‘창주정’이라 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중수하고 정자 이름을 ‘사미정’으로 바꾸었다. 이는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되었다.
2곡과 연관 인물은 옥천 조덕린이다. 옥천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으로 군頵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8년 3월에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와중에 휘말려 여러 번 유배를 당하였으나 높은 도학과 절의로 명망이 높았다. 1725년 노론과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조덕린은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 조의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 가운데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당쟁을 격화시킬 우려가 있었다. 이에 영조는 그를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 후 3년 뒤에 해배되어 귀향하면서 ‘사미정’을 지었으며 저서로 옥천집玉天集 18권이 있다.
경암은 옥천의 시냇가에서 솟아 있는 봉우리를 보았다. 옥천은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유헌’은 이 굽이 위에 세워진 ‘사미정’을 말한다. 유헌에서 바라보는 봉우리의 모습은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았고 갈리지 않는 ‘반타석’ 위에는 오랜 세월 밝은 달빛이 비추고 있다. 유헌은 조덕린의 체취가 남아 있는 ‘사미정’을 말한다. 정자에서 마주하는 냇가의 봉우리는 조덕린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갈아도 갈리지 않는 반타석은 조덕린의 성품을 상징한다. 운곡천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물인데 그 물위의 사미정 계곡에 이르면 바닥의 돌들과 어우러져 더욱 맑은 빛을 낸다. 경암은 이 산에서 옥천을 만나게 된다. 그윽한 산봉우리는 단아한 선비 조덕린의 얼굴이다. 그의 정신 기맥은 갈아도 갈리지 않는 반타석처럼 견고하며 오랜 세월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반타석’은 굳센 지조를 지켰던 ‘조덕린의 심성’을 비유하며 ‘시냇물’ 역시 고결한 심성을 지닌 ‘선비 학자 조덕린’을 상징하고 있다. 창공에는 휘영청 밝은 달빛이 반타석 위로 흐르는 냇물을 비추이고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자신의 굳건한 의지를 잃지 않았던 군자 선비의 전형 조덕린의 형상이 빛나고 있다. 올곧은 선비의 정신 지향은 달빛을 받아 더욱 영롱하게 빛난다.
조덕린이 만년에 세운 정자 이름이 ‘사미정’인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가 ‘사미정’을 지은 것은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하기 위함이었다. 조덕린이 종성에 유배된 지 3년째였다. 그 해가 정미년丁未年(1727) 정미월丁未月(6월) 정미일丁未日(22일) 정미시丁未時(13:00-15:00)였다. 이 날, 조덕린은 마침 중용中庸을 읽다가 공자의 말씀에 ‘군자의 도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거늘 오히려 능하지 못하다 하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마침 이러한 일시를 만나 한 움집을 지어서 살려고 생각하며 사미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조덕린은 공자가 군자의 도 네 가지에서 하나도 능하지 못하였다고 한 말을 음미하며 정자를 세웠는데 이름하여 ‘사미정’이라 했다. 이에 그는 네 가지 덕을 갖추기 위래 근신과 수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겸손한 선비 학자였다. 경암은 제2곡에서 강직한 선비의 전형 조덕린의 삶과 정신 지향을 추모하며 회고하였다. 이와 함께 그의 정신 지향성이 냇물이 간단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후대에 영속적으로 이어지질 염원했다. 결국 경암은 2곡에서 조덕린의 삶을 기리면서 밤하늘을 밝히는 어두운 달빛처럼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조덕린의 유덕幽德을 찬양하고 있다. 아울러 고고한 선비 정신을 후대에도 계승해 주길 바라는 염원도 담았다.
삼곡은 어풍대 앞의 가약선 三曲風臺架若船
차갑게 이곳에 자리한 것 어느 해일까. 冷然神御枉何年
물결 끊기지 않고 바위 언덕 오래되었는데 波流不盡巖阿古
우는 새와 지는 꽃 모두 가련하구나. 啼鳥落花摠可憐
홍풍대가 창건한 정사는 훼손된 지 오래이다. 바위 봉우리가 매우 기이하다.
3곡은 ‘풍대風臺’이다. 제2곡은 ‘사미정’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1km 정도 올라가면 ‘옥계정玉溪亭’ 앞에 이른다. 맑은 냇물이 사미정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운곡천 왼쪽에 옥계정이 있고 오른쪽에 풍대가 자리 잡고 있다. 풍대는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봉우리인데 운곡천에 인접해 있다. 현재 풍대 뒤로 난 도로 때문에 바위산 일부가 손상되었고 주위에 소나무․참나무․느티나무 등 바위가 자라 그 옛날 풍대의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 굽이는 여전히 풍대와 운곡천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한다. 사미정에서 굽은 운곡천을 따라 한 구비 돌면 평지마 건너편 물가에 단애가 있다. 굽이치는 운곡천에 퇴적 작용으로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옛 어른들의 말로는 ‘어풍대’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풍대’라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풍정御風亭’은 법전면法田面 소천리召川里에 소재하며 풍대風臺 홍범석洪錫範이 건립하여 학업을 정진하며 후학 배양에 힘쓰던 곳인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경암이 이 굽이에 이르렀을 때 풍대 홍석범洪錫範이 창건한 정사는 훼손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 당시에도 풍대 바위 봉우리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암이 이 지점을 3곡으로 설정한 이유는 풍대의 자취가 서린 곳이고 기이한 바위 봉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풍대가 건립한 정사는 없어졌지만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풍대 바위 봉우리에 큰 의미를 두고 설정한 것이다. 이후 이 굽이에 ‘옥계정玉溪亭’이 건립되었다. 옥계정은 김명흠金明欽(1669-1773)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해 의성 김씨 문중에서 지은 정자이다. 의성 문중에서 그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여 화장산에 건립하였는데 1939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옥계정에는 ‘옥계정’과 졸천정사拙川精舍‘라는 두 현판이 걸려 있다. 옥계정 뒤에는 옥계고택이 자리를 잡고 있다.
김명흠은 13세에 조덕린趙德隣의 문하에 들어가 조덕린의 언동거지를 눈여겨보고 마음에 새겨 문사와 구두를 익혔으며 몸소 실천하고자 했다. 김명흠의 자는 백해伯諧, 호는 옥계玉溪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부친은 김한기金漢基이며 모친은 거제반씨巨濟潘氏이다. 조덕린이 종성에 유배되자 그는 슬퍼하며 스승의 신원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식량을 보내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조덕린이 죽은 후에는 후사後嗣를 극진히 돌보았다. 이처럼 그는 인륜에 돈독한 모범을 보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덕을 선사한다. 그는 이광정李光庭․권만權萬․이중광李重光 등과 친교하며 학문의 영역을 넓혀갔다.
경암은 제3곡에 이르러 풍대에 걸려 있는 배를 보았다. 풍대의 윗부분이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자가 「무이구곡」 제3곡을 시로 읊으면서 언급했던 ‘가학선架壑船’을 의미한다. 골짜기에 걸려 잇는 배라는 의미는 그 옛날 ‘고월인古越人’이 이 굽이에 살면서 장례 지낸 배가 바위 벼랑에 그대로 남아 있어 주자가 이를 목격하고 시로 표현한 것에 근거한다. 고월인은 무이 계곡에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나무를 잘라서 배를 잘 만들었다. 이들은 무이 계곡에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고월인이 죽으면 배를 만들어 시체를 배 안에 안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다른 세계로 간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가학선’은 세월이 지나면 결국 그 형체를 잃고 만다. ‘풍대’가 그 옛날 역사적 배경만 전해진 채 현재 사라지고 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풍대 아래로 흐르는 물굽이는 영구불변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가변의 존재 가치가 유한성을 지닌 반면 영구불변의 풍대에 깃든 정신적 지향이 자못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풍대와 풍대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은 주자 성리학의 간단 없는 계승과 선현의 정신 유업이 영속적으로 존재함을 상징한다. 의성 문중에서 그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여 화장산에 건립하였는데 1939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경암은 3곡에서 마르지 않는 운곡천 물결이 거세게 부딪쳐도 풍대 바위는 끄덕도 않는데 생명을 가진 새와 꽃은 영원하지 않으니 가련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이는 인생의 유한함에서 오는 허무함을 비유한다. 그러나 단순히 생명의 한계만 한탄한 게 아니라, 유학자답게 유한성의 가변성을 극복하고 유도를 통해 무한성과 영원성을 지향하고 있다.
5) 연지와 창애정의 고절(4곡․5곡)
사곡은 연지에 바위 그림자 비추니 四曲硯池印石巖
갈매기 언약과 물고기 즐거움이 생동하네. 鷗盟魚樂日毿毿
만약 청련의 시구를 베끼게 한다면 若敎依寫靑蓮句
콸콸 솟는 물이 지금 절로 못을 채우리. 滾滾如今自滿潭
연지는 옥계 가에 있다.
제4곡은 ‘연지蓮池’이다. 연지는 ‘벼루못’이다. ‘벼루 앞쪽의 오목하게 파진 부분’을 말한다. 이곳에 물을 부어 먹을 가는 곳이다. 한편 지명에서 ‘벼루’라는 것은 순우리말인 ‘벼랑’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벼랑 아래에 있는 못’이라 하여 ‘벼루못’이라 불렀으며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면 ‘연지硯池’가 된다. 현재 이 연지 상류 쪽에는 관개용 농수 확보를 위해 보洑를 설치해 물이 가득하다. 3곡인 풍대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8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커다란 보가 나타난다. 이 지점에 운곡천이 굽어 돌고 시내가 넓어진다. 굽어 도는 곳에 바위 벼랑이 우뚝 솟아 있다. 긴 보 위로 맑은 물이 쉼 없이 떨어지는 굽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연지이다. 연지는 ‘벼루못’이란 의미인데 사람이 인공적으로 판 연못이 아니라 운곡천이 자연스럽게 만든 연못으로 추정된다. 보 위로 맑은 물이 쉼 없이 떨어지는 굽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연지이다. 그리고 이 못의 이름은 경암이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운곡천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옥류는 연지의 바위에 부딪히며 잠시 숨을 고른다.
경암은 제4곡에 이르러 석암이 비치는 연지를 바라보았다. 연지 가에 솟아 있는 돌 바위는 휘어 도는 운곡천의 흐름을 절제하였다. 세차게 흘러오던 맑은 물이 이 굽이에 이르러 휘어 돌며 잠시 속도를 늦춘다. 그 과정에서 수면은 잔잔하여 마치 넓은 거울을 펼쳐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이 수면에 돌 바위가 비치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만든다. 경암은 여기서 갈매기와 친하기로 한 약속을 이루고 물고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린다고 했다. 자연에 물러나와 갈매기와 노닐고 생동하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는 즐거움을 그렸다. 하늘에서 갈매기가 날고 연못에서 물고기가 유영하는 현상은 천리가 유행되는 자연의 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상징한다. 갈매기 맹세는 은거하겠다고 다짐한 은자를 비유하고, 물고기는 천리가 유행하는 현상을 비유한다.
경암은 4곡에서 은거하면서 천리가 유행하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청련靑蓮’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말한다. 그의 별호가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콸콸 흐르는 물이 못을 채우는 것 역시 자연의 이치이다. 인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천리가 ‘연비어약鳶飛魚躍’하듯이 물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유학자에게 물을 보는 ‘관수觀水’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경암은 연지에서 자연의 이치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배우며 깨닫고 즐기는 공간으로 삼고자 했다. ‘쏟아지는 물이 절로 못을 채운다’고 하였다. 원두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로 연못을 가득 채우고 싶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 평범하게 흐르는 진리를 경암은 예리하게 간파하여 인욕이 제거되고 천리가 유행하는 가운데 진락을 누리는 은자를 염원했다.
오곡의 창애정 높고 깊숙하니 五曲滄崖高且深
병풍처럼 가려 운림을 숨겼기 때문일세. 由來屛隱鎖雲林
그림자처럼 있던 그 분은 어디로 가셨나 依然影裏人何處
홀로 청산에 서니 만고를 회상할 뿐일세. 獨立靑山萬古心
푸른 벽을 이름 하여 은병암이라 하였는데 창애공이 정자를 지었다. 그 위에 청산사가 있다.
제5곡은 창애滄厓이다. 제4곡 연지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1km 정도 오르면 창애에 이른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운곡천이 큰 바위 벼랑을 만나는 지점에 이른다. 냇가 오른쪽에 우뚝 솟은 바위 벼랑이 제5곡 창애다. 운곡천이 크게 굽어 도는 지점으로 시내의 왼쪽에 ‘창애정滄厓亭’이 있고 오른쪽 산언덕에 ‘창랑정사滄浪精舍’가 있다. ‘주註’에서 ‘창애정사 위에 청산사靑山祠가 있다’고 했는데 현재로서는 ‘청산사’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당시에 세워졌던 사당 형태로 보이는데 지금은 흔적을 알 수 없다.
창애정은 이중광李重光(1709-1778)이 1742년(영조1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고 명현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공부에 전념하며 후진을 양성했던 곳이다. ‘창애정사’와 ‘창애정’은 마주보고 있다. ‘창애정사’는 장동교에서 오미쪽으로 오른쪽 산기슭에 있다. ‘창애정’은 새로 보수를 거쳐 산뜻하다. ‘창랑정사’는 난은懶隱 이동표 李東標(1644-1700)의 둘째 아들 두릉杜陵 이제겸李濟兼(1683-1742)의 덕과 학행을 추모하기 위해 광무 4년(1900)에 문중의 자손들이 건립한 정자이다. 두릉이 만년에 호를 ‘창랑’으로 했기 때문에 ‘창랑정사’로 이름을 지었다. 난은 이동표와 두릉 이제겸은 경암 이한응의 선조이다.
난은 이동표의 본관은 진보이다. 자는 군칙君則·자강子剛, 호는 난은懶隱이다. 부친은 운익雲翼이며 모친은 김기후金基厚의 따님이다. 1675년(숙종1) 진사가 되고, 1677년 증광회시에 장원하였으나 파방罷榜되었다가 168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7년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에 임명되었다. 1689년 왕명으로 한림을 뽑을 때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의 천거로 수천首薦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으나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여 죄를 입은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 등을 신구伸救하다가 양양현감으로 좌천당하였다. 그 뒤 사간원헌납·이조좌랑·홍문관교리 등에 임명되었으나 그 때마다 사직하고 귀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소퇴계小退溪’라 일컬었다. 낙향한 뒤에도 계속하여 사헌부집의·호조참의·삼척도호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사직의 상소와 함께 그때마다 직언으로 시정의 개선책을 건의하였다. 1741년(영조1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845년(현종11)예천의 고산서원古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9권 5책의 난은집懶隱集이 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두릉 이제겸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진성이며 자는 선경善慶·사원士遠, 호는 두릉杜陵이다. 조부는 이운익李雲翼이며 부친은 ‘소퇴계小退溪’로 불렸던 난은懶隱 이동표李東標이다. 두릉은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1714년(숙종40)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4년(경종4) 문과에 급제한 후 동몽교관․승문원정자를 역임했고 1727년(영조3) 율봉도찰방栗峯道察訪이 되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두을은 율봉에서 100리쯤 떨어진 증약관增若館에서 말 숫자를 파악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반란군이 율봉에 들어와 숨겨 놓은 역마를 모두 약탈해갔다. 이에 두을은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게 사태의 전말을 보고하는 한편, 영남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반란이 진압되어 그만두었다. 반란 진압 후 강필신姜必信의 무고로 평안도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다시 강원도 제천으로 옮겨 3년을 보낸 뒤 1735년 비로소 풀려났고 1741년이 되어서야 신원이 되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현재의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에 ‘창랑정사’를 짓고 초야에 묻혀 소요하였다. 눌은 이광정․강좌 권만과 도의로 친교하였다. 문집으로 4권 2책의 두릉집杜陵集이 있다.
경암은 제5곡에 이르러 깊고 높은 창애를 바라보며 창애정에 올랐다. 창애정이 은병암 안에 있었으니 은병암이 창애정을 두루고 있는 형상이다. 푸른 숲과 시내가 비경을 숨겨 이곳은 높고 깊은 곳이라고 했다. 경암은 문득 이 굽이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양성한 그가 어느 곳엔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그 주인이 어디선가 인기척을 하며 나타날 것만 같다. 주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만 창애정만 남아 있다. 경암은 이곳에서 그 옛날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창애 이중광을 추모하였다. 홀로 청산에 올라서니 만고를 회상하며 창애의 정신 지향성을 추모하며 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6) 쌍계와 서담의 전설(6곡․7곡)
육곡에는 쌍계가 바위 물굽이를 둘렀는데 六曲雙溪繞石灣
고봉이 중간에 솟아 중앙 관문이 되었네. 孤峰中突作重關
상전벽해 억겁의 세월 원래 그러했으니 桑瀛浩劫元如許
이 골짜기 안의 세상은 절로 한가롭다네. 壺裏乾坤自在閑
봉우리의 옛 이름은 삼척봉이다. 벗인 홍치기가 차지하여 쌍호정을 지었다.
제6곡은 ‘쌍호雙湖’이다. ‘창애정’을 뒤로 하고 운곡천을 오르며 물길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S자로 휘돌아간다. 운곡천 위로 놓인 장동교에서 오른쪽으로 둑길을 따라가면 150m 상류 지점에 나지막한 언덕이 나타난다. 홀로 있다 하여 ‘독산獨山’․‘독봉獨峯’․‘고봉孤峰’ 등으로 불리는 바위 언덕이다. 봉화에서 삼척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고 하여 ‘삼척봉三陟峯’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이 언덕 아래의 물줄기가 제6곡인 ‘쌍호’이다. 경암은 제6곡을 묘사하면서 쌍계가 석만을 두르고 높은 봉우리가 가운데 우뚝 솟아 문을 만든다고 하였다. ‘쌍계雙溪’는 ‘쌍호雙湖’를 의미한다. 노인들의 전언에 의하면 ‘연주정’ 옆에는 담潭이 있어서 옛적에 여기서 목욕도 많이 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깊지도 않고 수량도 적어 당시의 풍광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현재 주민들도 이곳에 쌍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다. 홍수로 인해 지형이 변함에 따라 그러한 자취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5곡 창애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2km 정도 오르면 시냇가에 임한 ‘삼척봉三陟峯’이 나온다. 삼척봉은 소나무로 덮여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봉우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삼척봉 위에는 ‘명부대明夫臺’가 있다. 삼척봉 아래에는 남양 홍씨의 ‘연주정戀主亭’이 있다. 연주정 뒤로 난 농로를 따라 가면 이 굽이의 전경을 온전히 볼 수 있다. 긴 보 위로 시내의 맑은 물이 흘러 삼척봉 아래에서 굽어 돌며 흘러간다. 경치가 그렇게 빼어나지는 않지만 삼척봉과 맑은 시냇물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경암은 이 굽이에 이르러 쌍호가 물굽이를 두르고 있고 삼척봉이 솟아 있는 굽이를 바라보며 상적벽해를 생각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사물이 변해가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원래 산이었을 이 봉우리가 변해 쌍계를 이루고 있으니 상전벽해라고 했다. 경암이 노래한 뒤 15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운곡천의 쌍호도 사라져서 한쪽 물길은 들판이 되었으니 역시 상전벽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경암은 관조의 자세를 취한다. 억겁億劫의 세월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독산 위에서 쌍호정 주변을 굽어보는 경암의 마음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사물이 변하는 가운데 그 안에 내재하는 한가로움을 포착하였다.
칠곡의 서담은 시냇물이 여울로 들어가니 七曲晝潭注入灘
우뚝한 절벽 물에 비쳐 더욱 달리 보이네. 丹崖涵碧更殊看
선을 살피던 당시 즐거움 도리어 안타까우니 卻憐觀善當時樂
경관이 맑아 탈속의 느낌으로 청아하다. 聲色空淸鶴夢寒
제7곡은 ‘서담書潭’이다. 제6곡 ‘쌍호’에서 운천곡을 거슬러 약 1km 정도 오르면 소로교小魯橋가 나타난다. 소로교 앞으로 긴 보가 놓여 있고 그 오른쪽에 높지 않은 바위 벼랑이 시내에 임해 있다. 서담은 이 바위 벼랑 아래 운곡천이 굽어 돌며 만든 못을 말한다. 경암이 이곳을 ‘서담‘이라고 명명한 것은 과거에 이곳에 서당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이 마을에서 언제 누가 서당을 운영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이 공부를 했는지 확인할 자료는 없다. 서당은 이미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았겠지만 그 옛날 이 지역의 학문이 이 서당에서 시작되어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을 것이다.
경암은 제7곡에 이르러 서담 물이 여울에 들어가고 붉은 벼랑이 푸른빛을 머금는 기이한 경관을 바라보았다. ‘서담 물이 여울에 들어간다’는 말은 운곡천의 맑은 시냇물이 서담에 들어갔다가 다시 흘러가는 광경을 의미한다. 붉은 벼랑은 이 굽이 오른쪽에 자리한 벼랑을 말한다.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왔다가 흘러가고 붉은 벼랑에는 갖가지 풀과 나무가 예쁘게 자라나 푸른빛을 더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굽이에 서당이 있었을 것이며 그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도들의 정다운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관선觀善하던 즐거움’은 예기禮記에서 ‘선비가 서로 본받아 좋은 점을 배운다[사상관이선士相觀而善]’라고 한 것에 근거한다. 당시 서당에서 공부하던 즐거움을 말한다. 유가儒家의 공부는 선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고 이것은 선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색’은 목소리와 얼굴빛이고 ‘학몽’은 신비하고 기이함을 꿈꾸는 것이다. 경암은 이곳에서 그 옛날 서당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목소리와 얼굴빛이 저절로 맑아지고 신비하고 기이함을 꿈꾸던 생각이 사라졌다. 연못 주변의 경관을 보면서 탈속의 고고한 경지를 누리는 것 같다고 했다.
7) 한수정과 도연의 추억(8곡․9곡)
팔곡인 한수정 가에 들판이 열리고 八曲寒亭際野開
선계의 초연대 높이 솟아 맑은 물 굽어보네. 仙臺超忽俯澄洄
길손은 선현의 발자취 멀어졌다고 탄식 말지니 遊人莫歎遺芳遠
가을 달이 연못 속으로 밤마다 찾아온다오. 秋月潭心夜夜來
정자는 한수정, 헌은 추월헌, 대는 초연대라고 하였다.
제8곡은 ‘한수정寒水亭’이다. 제7곡 서담에서 운곡천을 거슬러 약 800m 정도 오르면 한수정을 만난다. 춘양 들판이 펼쳐진다. 춘양 들판 한복판 운곡천 물가에 자리 잡은 한수정은 1608년(선조31) 권래權來가 지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원래 조선 중기 문신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이 건립한 ‘거연헌居然軒’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화재로 이 건물이 소실되자 그의 손자인 권래가 이 건물을 세우고 이름도 새로 ‘한수정’이라 고쳐 붙였다. ‘한수정’이란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하는 정자’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주변 경광이 시냇물과 소나무가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충재 권벌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이다. 부친은 성균생원 증영의정 사빈士彬이며, 모친은 주부 윤당尹塘의 따님이다. 1506년(중종 1)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고변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이조정랑·호조정랑·영천군수·장령·승정원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부친이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간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밀양부사를 거쳐 한성부좌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고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1539년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 춘추관지사로 세자우빈객을 겸하였다. 병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장령·의정부우찬성을 역임하고,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나자 정순붕鄭順朋·허자許磁·임백령林百齡 등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유인숙柳仁淑·류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해 9월 우의정 이기와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2)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태천泰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삭주朔州로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별세하였다. 1567년에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다. 1591년(선조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忠定이다. 충재는 관직에 있는 동안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중종 대에는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문집에 9권 5책의 충재집冲齋集이 있다. 그의 일기초日記抄인 충재일기冲齋日記는 한원일기翰院日記 2책․당후일기堂後日記 1책․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신창함추단일기新昌含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으로 되어 있다. 이는 개인 일기라기보다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커서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석천石泉 권래權來(1562-1617)의 본관은 안동이며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낙이樂而, 호는 석천石泉이다. 조부는 행 의정부좌찬성行議政府左贊成 권벌權橃이다. 부친은 동미東美이며 모친은 진주류씨晉州柳氏로 류의柳義의 따님이다. 관직으로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경암 이한응의 「춘양구곡」 가운데 팔곡八曲에 읊은 ‘한수정寒水亭’은 원래 조부가 지은 ‘거연헌居然軒’이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자 권래가 다시 건물을 짓고 이름을 ‘한수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수정은 현재 경북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암이 한수정에 이르자 한수정 주변으로 ‘추월헌’과 ‘초연대’가 있었고 ‘피당’이란 연못이 있었다. 경암은 한수정에서 이 지방 유학 연원을 생각하였다. 봉화 지역 유학의 번성에 충재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춘양 들판 가운데 한수정이 자리 잡고 있다. 아울러 선대가 우뚝 솟아 운곡천의 한 굽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대는 초연대를 말하는 것 같다.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선인들의 향기가 멀게 만 느껴진다고 탄식을 발한다. 후인들은 시대가 멀어 권벌과 권래의 가르침을 쉽게 접할 수 없다고 탄식했다. 하지만 경암은 이 굽이에서 선인들의 고결한 행적과 여향이 그리 멀지 않다고 강조한다. 가을 달이 밤마다 연못 가운데로 찾아오는 것에 착안하여 충재 권벌과 권래의 충정과 기상이 청아한 가을 달빛으로 치환되어 밤마다 연못을 비춘다고 하였다. 그러한 청아하고 곧은 기상이 바로 충재의 기절과 권래의 선비 정신이라고 하였다. 경암은 이 구비에서 가을 달에 투영된 충재와 권래의 정신 지향을 회상하며 추모 서정을 발휘하였다. 밤이면 밝은 달빛이 연못에 찾아들 듯 선현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전해오기 때문에 위안을 받는다고 하였다.
구곡의 도연서원 다시 넓은 기상 九曲道淵更浩然
봄 날 누에서 아련히 긴 시내 바라보네. 春樓迢遞見長川
우리 도는 전처럼 서원이 있는데 의지하니 依舊賴有宮墻在
십리의 풍광이 마치 겨울 속의 하늘같네, 十里風烟鏡裏天
제9곡은 ‘도연道淵’이다. 한수정에서 운천곡 물길을 9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춘양구곡의 원두인 제9곡 도연에 이른다. 도연은 도연서원을 상징한다. 아울러 제9곡에 있었던 연못이라 하겠다. 도연은 춘양구곡의 극치를 이룬다. 도연서원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을 모시던 곳이었지만 1858년에 훼철되었다. 현재 현재 춘양중학교 운동장 동쪽이 서원 자라로 알려져 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두 개의 삼층 석탑인 봉화 서동리 삼층 석탑이다. 이곳은 신라 고찰이었던 남화사覽華寺의 옛터로 알려져 있다.
한강 정구(1543-1620)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종손으로, 조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부친은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모친은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따님이다. 6대조 총摠과 그 아우인 탁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둘째 형인 곤수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 및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였다. 한강은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573년(선조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다. 1603년에 남명집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1608년(광해원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남인 정파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송시열과 예학禮學에 대해 논쟁한 남인의 핵심이자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청남의 영수로서, 조선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학문적으로도 독특한 개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주자성리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두면서 고학古學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도가적道家的인 성향도 깊이 드러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허목의 가계는 소북小北계로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대 북인 정권이 몰락하자 남인에 편입된 근기남인近畿南人이다. 동인에서 퇴계학파의 남인과 갈라진 북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계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계의 연합체로서 비순수 성리학적 학풍을 갖고 있었다. 허목은 화담학에 연원을 둔 가학家學과 외조인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년)의 은자隱者적 처세의 영향을 받아 초야에 묻혀서 성리학뿐 아니라 도가道家 사상 등 다양한 학문적 편력을 했다.
번암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이다.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유후裕後의 방계 5대손이며, 시상時祥의 증손이다. 조부는 성윤成胤이고, 부친은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이다. 모친은 이만성李萬成의 따님이다. 홍주 출생으로 1735년(영조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한림회권翰林會圈 때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사관직을 거쳤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무덤이 있는 산을 탈취했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충청도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1755년 나주 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郎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승정원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이 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이후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나자, 이 해 윤5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다. 복상 후 1764년부터 개성유수·예문관제학·비변사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로 재임 중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767년부터 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한성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72년 이후 세손우빈객·공시당상貢市堂上이 되었다. 1775년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에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로 인하여 서얼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과 함께 약방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좌참찬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또한 정조 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하여 정1품에 이르렀다. 이 사노비절목은 점차 사노비의 수효를 감소시켜 1801년(순조1)의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80년(정조4)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 때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을 실시했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에 사직하였다.
도연서원은 인재를 기르던 역할을 수행했고 도연은 맑은 물을 계속해서 운곡천에 공급하였다. 도연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춘양을 성리학이 전개되고 성리 이념이 구현되는 성리학의 문화가 개화된 고장으로 만들었다. 춘양을 비롯한 봉화 지역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익히고 도를 공부했으니 춘양구곡의 원두요 극처로 삼기에 충분했다. 학문적 영기가 충만한 도연서원의 풍광을 묘사하고 쉼 없이 흘러가는 냇물처럼 유학의 도가 흘러가길 염원하였다. 아울러 도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은 춘양의 굽이를 적시면서 춘양을 맑은 고을로 만들었다. 성리학 정신이 집중된 도연서원의 성리학적 기맥이 운곡천을 형성하여 춘양 전역을 골고루 적신 것처럼 성리학 전통이 운곡천처럼 쉼 없이 흘러내려 성리학 문화가 전개되는 춘양을 만들었다. 경암은 그러한 염원과 소망을 이 「춘양구곡’을 통해 시문학으로 형상했다.
Ⅴ. 마무리
주자의 「무이도가」 수용은 성리 이념 체계 강화와 함께 한국 산수 문학사에 주요한 동기를 제공했다. 16세기 지식인들 사이에 「무이도가」 차운 유행에 이어 구곡시 창작으로 이어졌다. 구곡시는 성리 이념과 산수흥치를 시적으로 형상한 작품이다. 구곡시가를 남긴 대표적인 곳으로 ‘구곡’이라 이름 지어진 곳은 전국에 무수히 많다. 경북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출중하게 명현 거유를 배출하였다. 이 때문에 수려한 산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구곡문화가 선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경암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진 운곡천을 배경으로 ‘적연’에서 ‘도연’까지 구곡을 설정하고 「춘양구곡」을 지었다. 「춘양구곡」에 반영된 산수자연관과 심미 철학적 의미를 검토하였다.
경암 이한응의 본관은 진보, 자는 중모, 호는 경암이다. 시조는 고려 때 현리로서 생원시에 합격한 석이며 노송정 계양의 직계 후손이다. 그로부터 5대를 지나 고조부 난은 동표는 문과 급제 출신으로 출처대의에 분명하여 ‘소퇴계’라는 칭호를 받았다. 증조부 두릉 제겸은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을 지냈으며 조부 중경은 통덕랑을 역임했다. 부친은 진굉이며 모친은 하산성씨이다. 경암은 3세에 모친을, 7세에는 부친을 여의고 이웃집 할머니 손에 자라났다. 10여 세부터 ‘위기지학’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했다. 과거 공부는 즐겨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권유에 의해 응거하다가 서른 살이 된 이후로 과거 공부를 단념했다. 조실부모하여 두 어버이를 모시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겼는데 기일이 되면 목욕제계하고 제사를 모시며 곡읍하기를 노년이 될 때까지 하였다. 두 형과 우애가 있게 지냈는데 항상 화기애애하였다. 항상 선현의 말씀을 ‘잠명’으로 나타냈으며 산수를 애호하여 시로 표현했다. 항상 ‘거경’ 공부에 주력했으며 정자․주자․퇴계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삼아 이를 실천했다. 평생 산림처사로 자처할 만큼 선비로서 ‘수신’과 ‘근학’에 전념하였다. 후진 양성에 뜻을 두어 이만준 등의 문인을 두었으며 또한 저술에 전념하여 성리학 관련 저술이 많다. 서예와 시문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1849년에 선공감역, 1857년에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 1860년에 돈녕부도정이 되었다. 1864 11월 16일에 향년 87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저서로 경암집 15권이 있다.
경암집은 목판본 15권 12책이다. 이 책은 1885년에 손자 이흥로 등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권1과 권2에는 시가 실렸다. 권3과 권4에 서간문 32편이 실렸다. 권5와 권6에 서간문 48편이 실렸다. 주로 성리학 관련 논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권7에 서간문 17편이 실렸다. 권8은 잡저로 ‘자성록’이 실렸다. 권9에는 잡저 16편이 실렸다. 권10에는 서문 7편 및 기문 4편, 발문 8편, 잠명 4편이 실렸다. 권11에 상량문 2편, 고유문 2편, 제문 8편, 애사 4편, 묘갈명 8편, 묘지명 9편이 실렸다. 권12에 행장 11편, 권13에 가장 6편․‘청량정사강의’가 실렸다. 권14 부록에 가장․행장․묘갈명․묘지명․배문록․기술․제문․만사가 실렸다.
경암은 탁월한 문예 역량은 300여 수를 넘는 시문학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산수자연에서 체감하는 미적 감수성을 내재한 성리 이념과 결부시켜 자연을 통해 심성을 수양하며 내면의 정화를 거쳐 ‘수신’과 ‘정심’의 미학적 승화를 이룬 작품이 많다. 그런 과정에서 ‘산수’는 매우 주요한 시적 소재로 제공된다. ‘퇴계’를 비롯한 ‘선조’와 ‘선현’을 추모하며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을 적극 표현하는가 하면 일찍이 퇴계가 주창한 「무이구곡가」에 대한 전통을 이어 춘양을 배경으로 수려하게 형성된 구곡문화를 개척하는데 이바지했다.
시문학 특징을 검토했다. 첫째, 목가 서정을 표현한 작품에서 농촌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고 체감하는 농촌 목가적 정경과 그러한 정서를 치밀하게 담아내었다. 둘째, 산수 자연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자연과 함께 교감하며 참된 은자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자연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며 내면 정화를 거쳐 자연과 합일된 경지를 묘사했다. 셋째, 산수자연인식론과 연관된 작품이다. 이러한 시작품에서 경암의 산수자연에 대한 기본 인식론과 퇴계의 산수자연관과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었다. 퇴계가 향토 자연을 애호하고 ‘선유’의 전통 정신을 계승하는 등 「춘양구곡」 창작의 배경을 검토할 수 있는 작품을 보았다. 넷째, 기행의 정서와 철학적 사유 및 감회와 서정 자아를 반영하였다. 다섯째, 교유 활동을 담은 작품이다. 여섯째, 성리학 이념 지향을 반영한 작품이다.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여 결국 ‘정심’을 추구하는 생활의 실천과 선현과 선조 ‘퇴계’․‘난은’을 추모하며 그들의 행적을 따라 근신과 수신으로 일관된 삶의 지향성을 반영하였다. 일곱째 ‘애재류’ 형식인 다양한 형식의 ‘만시’에서 사우 관계나 친척의 죽음을 애도하며 망자의 생전 업적을 회고하며 성리학 사유를 반영하였다.
「춘양구곡」 창작 배경을 검토하였다. ‘산수자연 인식론’에서 경암은 자연의 신비로운 경관과 멋을 아는 이만이 산수자연을 차지하며 그러한 미적 체감을 하는 자들과 산수 자연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고 나아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정화와 수양의 과정까지 이룰 수 있다는 산수자연 심미감을 지녔다. 이러한 경암의 산수자연 인식론은 일반 유학자들이 공유했던 산수자연관과 다름이 없으며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답습한 것이다. ‘향토 산수 애호 정신’ 검토에서 경암이 춘양의 녹문산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이는 퇴계가 청량산을 ‘우리 산’이라고 애호했던 정신과 일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먼 곳을 유람하며 기괴함을 찾는 것은 크게 권장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향토 자연 속에서 시를 짓고 주석을 겸비한 모임을 갖고 산수 자연에서 풍류한적의 즐거움을 누렸다. 이러한 산수 자연에 대한 인식이나 향토 자연 경관 애호 사상은 퇴계의 산수자연관과 다르지 않았다. 퇴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 계승 전통은 후계 이이순의 경우를 통해 확인되며 경암 역시 그러한 정신을 계승했다. 후계의 이러한 도산 산수에 대한 애정과 우월 의식이 도산구곡 창작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런 후계의 도산 산수지현 의식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체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퇴계와 후계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의 전통을 경암이 계승했음은 물론이다.
‘퇴계 산수 자연관 수용’ 검토하였다. 경암은 선조인 퇴계를 존숭하여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답습했음은 물론 이거니와 산수 자연관 역시 퇴계의 그것을 추종했던 점을 파악했다. 「춘양구곡」 창작 동인도 퇴계의 「도산구곡」 창작 정신을 답습한 사례였다. 퇴계를 존숭하는 정신은 퇴계가 즐겼던 산수 유람의 행적을 답사하면서 더욱 간절히 표현되었다. 이처럼 퇴계를 존숭하며 퇴계가 생전에 산수를 유람했던 곳을 탐방하면서 퇴계의 학문 정신을 추모하며 이를 계승해 나가려는 의지를 굳혔다. 일련의 시에 선조 유촉지 탐방에 따른 추모 정서를 집약하고 퇴계 존모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담아내었다. 이러한 의지는 퇴계가 산수 자연을 애호했던 사상을 답습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경암은 퇴계가 산수자연을 애호하면서 심성 수양과 학문 연찬에 전념했던 바와 같이 자연을 애호하며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이바지했다. 이 역시 퇴계의 산수자연관 체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원 은거의 정취’를 검토하였다. 은거 미학과 낭만 정조가 담긴 작품을 보았다. 경암은 산수 자연 속에서 진정한 멋과 낭만을 누리며 평온한 삶을 유지하면서 성리학자로 근신하며 유가 이념을 실천하였다. 그는 산림처사의 전형성을 확보하고 철저하게 성리학자의 삶을 실천했다. 이러한 경암의 산수자연관이나 향토 산수 애호 정신은 퇴계의 산수자연관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퇴계의 「도산구곡」의 전통을 이어 춘양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한 것 역시 퇴계 추존과 학문 사상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요인이 결국 「춘양구곡」 창작 동인으로 작용했다. ‘선유의 전통’ 검토에서 경암의 「춘양구곡」 창작 동인은 배를 타고 노니는 선유의 전통에서 비롯된다. 실제 그러한 유흥을 즐겼던 경암의 풍류한적의 정취를 시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런 선례는 후계 이이순의 선유 행사에서 발견되었다. 후계의 추진 목적이 선조들의 유지를 계술해 나간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후계 이이순은 선조 퇴계가 이루지 못한 선유를 실현함으로써 선조 유촉지 회고 정서와 선조 퇴계의 학문 계승을 다짐했던 의식을 볼 수 있었다. 경앙 역시 이러한 선유의 전통성을 잇고 향토 유현들의 학문 정신을 계승해 나가길 다짐하였다. 이러한 정신 기맥이 결국 ‘춘양구곡’ 창작의 동인이 되었다. 시문에 그러한 전통이 녹아 있음을 보았다. 이런 작품은 실제로 그가 춘양구곡을 경영하고 창작하는 과정상 주요한 기제가 되었다.
‘봉화의 구곡원림’ 현황을 보았다. 경상북도 최북단 지역에 자리를 잡은 봉화는 전체 면적의 83%가 산악 지대이다. 게다가 수려한 산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봉화 지역에는 무수한 산림처사들이 선현을 추모하며 조상을 모시며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고결하게 하는 학문에 전념하였던 곳이었다. 이들은 퇴계를 존숭하여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퇴계의 구곡시는 은거하는 사림들에게 시 창작의 전범 기제로 작용되었다. 봉화 지역에 거주하는 산림처사 역시 퇴계의 도산구곡시 전통을 이어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구곡시를 창작했다. 봉화에는 경암의 「춘양구곡」․해은의 「법계구곡」․「대명산구곡」․노봉의 「오계구곡」이 있다. 이처럼 봉화의 선비들은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성리학의 도가 구현된 고장을 만들며 구곡시 창작 정신과 성리학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춘양구곡의 지리적 특성과 설정 배경’ 검토에서 ‘춘양구곡’은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춘양면과 법전면으로 흐르는 운곡천 8.4km에 걸쳐 설정된 구곡원림이다. 백두대간과 운곡천을 끼고 있는 춘양은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이와 함께 덕망이 높은 학자들이 은거하며 강학 활동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던 유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산수자연과 함께 은거구지하는 유학자들이 있기에 경암은 이곳을 구곡으로 설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경암은 이러한 춘양의 산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신령하고 청정한 공간임을 감안해 구곡 설정에 임했다. 실제로 경암이 설정한 춘양구곡의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가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 배경과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춘양은 성리학 전개와 통합의 신성한 공간으로 설정될 요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춘양구곡」 검토에 앞서 퇴계의 ‘도산구곡시’ 정신을 계승한 후계 이이순의 「도산구곡」 설정을 보았다. 이러한 전통을 경암이 계승했기 때문이다. 후계는 자신이 직접 도산구곡의 위치를 추적하고 현장 답사를 거쳐 선조 퇴계의 유촉을 실사,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후계는 ‘시험 삼아 「무이구곡」의 설정 선례를 따라 「도산구곡」의 위치를 설정한다’고 했다. 「무이구곡」은 주자의 학문이 온축된 성지인 만큼 도산의 퇴계 유촉지에 한국 유학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런 점에서 후계의 구곡 설정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의 학문 계술 의식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산구곡 정신을 경암 역시 수용하여 「춘양구곡」을 창작했던 것이다.
「춘양구곡」 ‘서시’에서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들이 깃들어 살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던 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대대로 그 명성이 전해져 오는 것을 체감했다고 표현했다. 경암은 그러한 성리학 전통과 정신 지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싶다고 하였다. 구곡마다 전해져 오는 ‘춘양 선비들의 절의와 학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에 초점이 있다’고 천명하였다. 그 고유한 전통과 정신적 유산을 이어 성리학 전통이 계승되는 신성한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함이라고 전제하였다.
‘1곡(어은)’에서 경암은 한때 이곳에 어은정을 짓고 강학활동을 하던 눌은 이광정을 떠올렸다. 방문한 그곳에는 눌은은 떠나가고 그의 향기로운 자취는 무학봉을 덮고 있는 안개로 남아 애상스럽게 다가온다고 하였다. 무학봉을 두르고 있는 안개는 눌은을 재형상한 시각 이미지이다. 눌은에 대해 무한한 추모 서정과 성리학적 학문과 사상의 심원함을 사모하는 정신 지향이 반영되었다. ‘2곡(사미정)’에서 경암은 옥천의 시냇가에서 솟아 있는 봉우리를 보았다. 유헌에서 바라보는 봉우리의 모습은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반타석’은 굳센 지조를 지켰던 ‘조덕린의 심성’을 비유하며 ‘시냇물’ 역시 고결한 심성을 지닌 ‘선비 학자 조덕린’을 상징하였다. 강직한 선비의 전형 조덕린의 삶과 정신 지향을 추모하며 회고하였다. 이와 함께 그의 정신 지향성이 냇물이 간단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후대에 영속적으로 이어지질 염원했다.
‘3곡(어풍대)’에서 풍대 홍범석이 어풍정을 건립해 학업을 정진하며 후학 배양에 힘쓰던 자취를 찾았지만 정사는 훼손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풍대 바위 봉우리만 자리하고 있었다. 풍대가 건립한 정사는 없어졌지만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풍대 바위 봉우리에 큰 의미를 두고 설정했다. 풍대가 그 옛날 역사적 배경만 전해진 채 현재 사라졌지만 풍대 아래로 흐르는 물굽이는 영구불변으로 존재하였다. 영구불변의 풍대에 깃든 정신적 지향이 자못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풍대와 풍대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은 주자 성리학의 간단 없는 계승과 선현의 정신 유업이 영속적으로 존재함을 상징하였다. 경암은 이러한 풍대의 정신 지향을 지속해 나가길 다짐하였다.
‘4곡(연지)’에서 석암이 비치는 연지를 바라보았다. 연지 가에 솟아 있는 돌 바위는 휘어 도는 운곡천의 흐름을 절제하였다. 경암은 여기서 갈매기와 친하기로 한 약속을 이루고 물고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린다고 했다. 자연에 물러나와 갈매기와 노닐고 생동하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는 즐거움을 그렸다. 경암은 연지에서 자연의 이치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배우며 깨닫고 즐기는 공간으로 삼고자 했다. ‘쏟아지는 물이 절로 못을 채운다’고 하였다. 원두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로 연못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경암은 자연 속에 평범하게 흐르는 진리를 간파하여 인욕이 제거되고 천리가 유행되는 가운데 진락을 누리는 은자를 염원했다.
‘5곡(창애정)’에서 창애정에 올랐다. 문득 이 굽이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양성한 그가 어느 곳엔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그 주인이 어디선가 인기척을 하며 나타날 것만 같다. 주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만 창애정만 남아 있다. 경암은 이곳에서 그 옛날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창애 이중광을 추모하였다. 홀로 청산에 올라서니 만고를 회상하며 창애의 정신 지향성을 추모하며 변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6곡(쌍계)’에서는 쌍호가 물굽이를 두르고 있고 삼척봉이 솟아 있는 굽이를 바라보며 상적벽해를 생각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사물이 변해가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원래 산이었을 이 봉우리가 변해 쌍계를 이루고 있으니 상전벽해라고 했다. 경암이 노래한 뒤 15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운곡천의 쌍호도 사라져서 한쪽 물길은 들판이 되었으니 역시 상전벽해라 하겠다. 경암은 관조의 자세를 취했다. 억겁의 세월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며 독산 위에서 쌍호정 주변을 굽어보는 경암은 사물이 변하는 가운데 그 안에 내재한 한가로움을 포착하며 관조하였다.
‘7곡(서담)’에서는 ‘서담‘이라고 명명한 것은 서당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서당은 이미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았겠지만 그 옛날 이 지역의 학문이 이 서당에서 시작되어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을 것이다. 붉은 벼랑은 이 굽이 오른쪽에 자리한 벼랑을 말하며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왔다가 흘러가고 붉은 벼랑에는 갖가지 풀과 나무가 예쁘게 자라나 푸른빛을 더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굽이에 서당이 있었을 것이며 그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도들의 정다운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경암은 이곳에서 그 옛날 서당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목소리와 얼굴빛이 저절로 맑아지고 신비하고 기이함을 꿈꾸던 생각이 사라졌다. 연못 주변의 경관을 보면서 탈속의 고고한 경지를 누리는 것 같다고 했다. 학문 연원 추모와 계승 의지를 담았다.
‘8곡(한수정)’에서는 이 지방 유학 연원을 생각하였다. 봉화 지역 유학의 번성에 충재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선인들의 향기가 멀게 만 느껴진다고 탄식을 발했다. 후인들은 시대가 멀어 권벌과 권래의 가르침을 쉽게 접할 수 없다고 탄식했지만 경암은 이 굽이에서 선인들의 고결한 행적과 여향이 그리 멀지 않다고 강조했다. 가을 달이 밤마다 연못 가운데로 찾아오는 것에 착안하여 충재 권벌과 권래의 충정과 기상이 청아한 가을 달빛으로 치환되어 밤마다 연못을 비춘다고 하였다. 그러한 청아하고 곧은 기상이 바로 충재의 기절과 권래의 선비 정신이라고 하였다. 경암은 이 구비에서 가을 달에 투영된 충재와 권래의 정신 지향을 회상하며 추모 서정을 발휘하였다. 밤이면 밝은 달빛이 연못에 찾아들 듯 선현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전해오기 때문에 위안을 받았다.
‘9곡(도연서원)’에서는 도연서원은 인재를 기르던 역할을 수행했고 도연은 맑은 물을 계속해서 운곡천에 공급하였다. 도연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춘양을 성리학이 전개되고 성리 이념이 구현되는 성리학의 문화가 개화된 고장으로 만들었다. 춘양을 비롯한 봉화 지역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익히고 도를 공부했으니 춘양구곡의 원두요 극처로 삼기에 충분했다. 학문적 영기가 충만한 도연서원의 풍광을 묘사하고 쉼 없이 흘러가는 냇물처럼 유학의 도가 흘러가길 염원하였다. 아울러 도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은 춘양의 굽이를 적시면서 춘양을 맑은 고을로 만들었다. 성리학 정신이 집중된 도연서원의 성리학적 기맥이 운곡천을 형성하여 춘양 전역을 골고루 적신 것처럼 성리학 전통이 운곡천처럼 쉼 없이 흘러내려 성리학 문화가 전개되는 춘양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경암은 그러한 염원과 소망을 이 「춘양구곡’을 통해 시문학으로 형상했다.
정심의 학덕을 갖춘 선비 경암 이한응은 은거와 강학의 최적지 봉화 춘양 고을에서 퇴계 정신 계술 문학 운동이었던 도산구곡 창작 정신 계승하여 춘양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며 춘양구곡을 창작하여 도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은 춘양을 맑은 고을로 만들 듯 도연서원의 성리학적 기맥이 운곡천을 형성하여 춘양 전역을 골고루 적신 것처럼 성리학 전통이 운곡천처럼 쉼 없이 흘러내려 성리학 문화가 전개되는 춘양을 만들었다. 경암은 그러한 염원과 소망을 이 춘양구곡을 통해 시문학으로 형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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