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창작강의 (아니마, 아니무스외 )
1. 아니마, 아니무스
2. 긴장
3. 낯설게 하기
4. 화법
5. 상황
1. 아니마, 아니무스
아니마, 아니무스는 스위스의 정신 분석학자 C.G.융이 분석 심리학에서 사용한 용어로, ‘영혼·정신’을 뜻하는 말이다.
융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정신의 구조적인 면을 형성하는 보편적 경향을 지칭하는 말로 '원형'이라는 개념을 분석 심리학에 도입하였는데, '아니마(anima)'는 남성의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의 원형적 심상을, '아니무스(animus)'는 아니마의 남성형으로 여성의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남성성의 원형적 심상을 가리킨다.
예술가들은 처녀, 여신, 달, 태양, 물, 강, 산, 사자, 독수리 같은 아니마, 아니무스의 원형을 작품에 투사시켜 예술로 형상화시킨다. 이는 비단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념이나 사상 등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그것이 공산주의 이념이든, 기독교 사상이든, 낭만주의 사상이든 그것은 아니마, 아니무스의 투사 대상이 되면 사랑의 대상이 되어 광신적으로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돈이나 알코올, 도박 같은 것도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단 이런 물질에 아니마, 아니무스가 투사되면 그것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맹신의 대상이 된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알코올로 모든 괴로움을 씻을 수 있다고 믿고,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애착은 이성을 능가하기도 한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인류가 조상 대대로 이성에 관해 경험한 모든 것들의 침전물이며 모든 경험들의 총화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인간의 정신 속에 전승되어 온 남성의 여성적, 여성의 남성적 요소들이다. 성모 마리아상, 모나리자, 동양의 달의 연인이나 관음보살 등은 아니마에 해당되고 타잔이나 전쟁 영웅이나 간디, 이순신 등은 아니무스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훌륭한 사람들의 일생에서도 아니마, 아니무스의 원형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성 오거스틴의 어머니, 맹자의 어머니라든가 율곡의 어머니들이 이에 해당된다. 문학 작품 신곡의 베아트리체, 정몽주나 한용운의 님 같은 데서도 아니마 아니무스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한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전문
위 작품은 남성인 신동엽 시인이 쓴 시이다. 화자는 청자에게 명령 투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원형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껍데기, 쇠붙이, 한라, 백두 등은 남성성 심상으로 아사녀, 초례청, 흙가슴 등은 여성성 심상으로 형상화되었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양면이 텍스트에 균형있게 배치되어 있다.
융은 정신 세계를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로 나누었다. 무의식 세계를 집단 무의식, 개인 무의식,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 퍼소나 등으로 분류하고 그 위에 의식 세계를 설정했다.
특히 집단 무의식은 어떤 사람이 정신적 위기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의식 표면에 나타나 그 일부를 보여준다. 항상 의식에 작용하며 우리들의 실생활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시창작은 의식 세계에 있는 생각을 갖고 쓴다기보다는 무의식 세계를 의식 세계로 끌어올려 작품을 형상화시킨다고 보아야한다. 이러한 작업은 의례히 많은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그래야 작품다운 작품을 쓸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무의식을 작품의 해석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퍼담아도 넘쳐나는 벌레 우는 물빛 가을
차운 돌계단을 서성이던 잎새는
골똘히 웅크려 앉아 가을 편지 쓰고 있다
-박영식의 「가을 편지」전문
아내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 속에는
열 손가락 백금 반지 다이아보다 눈부시는
우리가 가꾸며 사는 황금빛 별 하나가 있다
-홍진기의 「별」전문
성난 파도 앞에 근육질이 살아난다
빛나는 작살 끝에 툭툭 튀는 구릿빛 생애
몇 해리 두고 온 고향 낮달로 돋아난다
집어등 불빛 쫓아 일상을 입질하던
풀려나간 삶의 궤적 밧줄을 되감아도
그믈에 장미 꽃잎만 부서지며 오는 아침
만선의 기쁨도 잠시 실어증에 걸린 폐선
소금 친 지난 청춘 해무를 피워물면
내향에 낮게 깔리는 뱃고동의 실루엣
좌판대에 몸을 굳힌 등 푸른 고기 떼들
난바다 가로질러 회귀를 꿈꾸고 있다
흰 눈발 툭툭 쳐내는 저녁 불빛 아래서
임성화의 「아버지의 바다」전문
여성적 요소인 아니마와 남성적 요소인 아니무스는 시의 언어 배치에 중요한 개념이다.
박영식의「가을 편지」는 잎새가 퍼소나로 등장한다. 그 잎새는 차운 돌계단을 서성이다 어느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가을 편지를 쓰고 있다. 지은이는 무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잊어버렸던 옛 여인을 떠올리며 가을 편지를 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물빛 가을’, ‘잎새’, ‘가을 편지’의 시어들은 여성적인 요소인 아니마로 시의 감칠맛을 더해주고 있다.
홍진기의「별」은 아내가 퍼소나로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황금빛 별 하나가 있다고 한다. 이마에 흐르는 아내의 땀방울이다. 그것은 열손가락 백금반지 다이아보다 더 눈부시다고 했다. 눈부신 별 하나, 땀방울을 가꾸며 산다고 했다. ‘땀’, ‘백금반지’, ‘다이아’, ‘별’ 등의 아니마가 독자들에게 감동의 맛을 더욱 깊게 해주고 있다.
여성인 임성화 시인은「아버지의 바다」에서 남성적인 특성을 지닌 시어인 아니무스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파도’, ‘근육질’, ‘작살’, ‘밧줄’, ‘폐선’, ‘뱃고동’, ‘좌판대’, ‘난바다’등의 시어들이다. 반면에 ‘낮달’, ‘꽃잎’, ‘실루엣’ 같은 여성적인 특성을 지닌 시어인 아니마들은 남성적인 강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보조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성의 여성성인 아니마와 여성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는 시를 쓰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어느 위치에 어떻게 이를 배치해 형상화시키는가에 따라 시의 맛과 생명이 결정된다.
아니마(anima)=남성의 여성성
아니무스(animus)=여성의 남성성
2. 긴장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와의 타협 공간이다. 작가와 독자가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이다. 거기에서 미가 형성된다.
휠라이트(P.Wheelwright)는 ‘긴장은 외연과 내포, 보조 개념과 원개념 사이에 있다.’고 했다. 외연은 1차적 언어, 사전적 언어를 말하고, 내포는 2차적 언어, 함축적 언어를 말한다.
1차적 언어 ‘초인’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이육사의「광야」담론에서의 ‘초인’은 2차적 언어 즉 ‘광복’, ‘희망’ 등을 의미한다. ‘광복’은 원개념이고 ‘초인’은 보조 개념이다. 이 때 광복과 초인 간에 거리가 발생한다. 시인과 독자가 만나 타협해야하는 곳이다. 작가는 거리를 넓혀야하고 독자는 거리를 좁혀야한다. 그 타협점에서 쾌락이 발생한다.
긴장 1차적 언어 ↔ 2차적 언어 = 타협
타협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일부
하나님을 ‘비애’, ‘살점’으로 처리했다. 거룩한 하나님이 비애, 살점이라니 시인의 일침에 독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이질적인 비유가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이 때 ‘하나님’은 ‘비애, 살점’과 충돌하게 된다. 어떻게든 이 두 단어 사이에서 타협을 해야 해석에 이를 수 있다. 그래야 충격이 흡수되면서 쾌락이 발생한다.
거리가 멀수록 긴장은 크지만 지나치게 멀면 독자는 거리를 조정할 수가 없다. 뜻을 얻는데 실패하게 된다. 멀되 뜻을 연결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정한 거리이어야 한다.
내가 사는 초초시암은 감나무가 일곱 그루
글썽글썽 여린 속잎이 청이 속눈물이라면
햇살은 공양미 삼백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 논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은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온다
-정완영의 「시암의 봄」전문
속잎과 청이, 속눈물 햇살과 공양미 삼백석, 세월과 뺑덕어미, 심봉사 지팡이와 봄의 비유들은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시인은 비유로 두 사물 간에 대립물을 만들어놓았다. 독자는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해야한다.
‘속잎’이 어째서 ‘청의 속눈물’이고 ‘햇살’이 어째서 ‘공양미 삼백석’인가. 속잎은 여리고 청의 속눈물도 여리다. 이 ‘여리다’란 지점이 시인과 독자가 만나는 곳이다. ‘햇살’은 지천이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다’라는 곳에서 ‘햇살’과 ‘공양미 삼백석’이 만난다. 이 ‘많다’라는 지점이 긴장하는 지점이고 충돌하는 지점이면서 해석 지점이다. ‘세월’은 또 ‘뺑덕 어미’라 했다. 속이고 달아나는 데에는 뺑덕 어미를 따를 자가 없다. 세월도 마찬가지이다.
‘심봉사 지팡이’와 ‘봄’도 절묘하다. 심봉사 지팡이는 더듬거린다. 금세 따뜻하다가도 꽃샘 바람이 부는가하면 꽃샘 바람이 불다가도 금세 또 따뜻해지는 것이 봄이다. 봄도 그냥 쉽게 오지 않고 더듬더듬 온다. ‘더듬더듬 온다’라는 곳에서 지팡이와 봄의 이질적인 세계가 만난다. 이런 은유들은 긴장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작가는 허구의 세계에다 낯선 펜스들을 쳐놓는다. 허구는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일 수 있다. 시인과 독자가 만나 타협하는 그 곳이 바로 해석에 이르는 지점이다. 비로소 긴장이 해소되면서 쾌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피히테(J.G.Fichte)는 정․반․합으로 긴장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정․반․합의 소론은 인간의 인식력의 작용 전반에 관한 문제이며, 예술 작품의 수용 에서도 간과될 수 없는 소중한 이론이다. 감상자의 사유 체계는 ‘정’이고 예술가의 사유 체계는 객관화된 예술품 수용자에게 일종의 ‘반’인 것이다. 이 정․반․합에 문제 되는 것이 예술 속의 긴장의 문제이고 이 긴장은 새로운 합의 세계를 지향하는 수용자의 의식 속에 영원히 전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은 ‘반’이다. 작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긴장이다. 감상자의 사유 체계가 ‘정’이라는 말은 예술가의 사유 체계인 ‘반’을 조절, ‘합’으로 이끌어내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립물 간의 정․반․합은 긴장 개념의 입증에 좋은 기재가 될 수 있다.
매화가지 몸을 굽혀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정적의 한 순간 한 꽃잎 떨어져
찻잔에 파문도 없이 신의 길이 열린다
-백이운의 「속삭임」전문
위 텍스트에서는 ‘정적의 한 순간’, ‘한 꽃잎 떨어져’와 ‘찻잔에 파문도 없이’, ‘신의 길이 열린다’를 상정해볼 수 있다. 위 시조는 대립물 간의 긴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정적의 한 순간’과 ‘한 꽃잎 떨어져’는 ‘정과 동’이, ‘찻잔에 파문도 없이’, ‘신의 길이 열린다’도 ‘정과 동’이 서로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한 꽃잎 떨어져’는 동적이고, ‘정적의 한 순간’은 정적이다. 낙화가 정적을 깨뜨렸다. 물질과 비물질과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소리가 없는 것이 허구의 세계에서는 큰 소리를 낼 수도 있다. 충돌의 강도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현실 세계의 물질과 물질끼리의 충돌만이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허구의 세계에서는 물질과 비물질 간의 충돌도 소리가 크게 날 수 있다. 파문이 없다는 것은 물체가 수면에 닿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길이 열린다는 것은 파문이 인다는 증거이다. 파문이 일지도 않았는데 길이 열린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허구의 세계에서만이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이는 긴장 관계를 더욱 팽팽하게 조여주기 위한 하나의 시인의 수사 장치이다. 그것을 신의 길로 제시했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절대적인 존재가 여는 길은 그만큼 신성하고 거룩하다. 하찮은 꽃잎에도 신성성이 있다는 시인의 무언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사유 체계는 반이고 독자의 사유 체계는 정이다. 반과 정이 사실의 옳고, 그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반은 긴장을 유발시키기 위해 예술가들이 만들어 놓은 작위적인 장치들이고 정은 독자들이 사유하고 있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자동화된 장치들이다.
정이든 반이든 텍스트에서의 긴장은 지정된 한 장소나 시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어디서, 언제, 어떻게,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긴장은 누구에게나 일정한 곳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쌍방간의 긴장으로 일어난다고도 볼 수 없다. 예술가나 독자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는다. 텍스트는 사실 시인이 정이고 진실이라고 생각해서 창작된 예술품이다. 감상자가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은 언제나 상대의 작품은 반으로 읽혀져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 때 의미가 확산된다. 반과 정, 시인과 독자는 서로에게 조정을 요구한다. 시인과 독자가 순서야 어떻게든 합의를 이루어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긴장 반(시인) ↔ 정(독자) = 합 타협
몇 점의 자료들을 소개한다. 대립물들의 긴장 관계가 어느 선에서 유지되고 있는지는 분석에서 얻어지는 것보다는 느낌에서 얻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인은 독자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장치를 정교하게 만들어낸다. 독자는 어떤 식으로든 이를 분석해 자기 편으로 끌어드린다.
창작은 분석이라는 독자들의 도마에 올려놓는다. 시의 시시비비는 얼마나 긴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어떤 시는 깜짝 놀라지만 그 긴장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시는 처음에는 놀라지 않지만 긴장이 오래 가는 경우가 있다. 물론 후자가 명시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꼼꼼히 시를 읽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창작의 지름길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풍덩! 나는 천둥벌거숭이 천하장사다
봤지 하늘 박살나고 구름 쫙 흩어지는 거
저 뱀도 잔뜩 겁먹고 설설 기잖아 에헴!
- 허일의 「왕개구리」전문
알겠다, 밤낮으로 듣고 보라는 저 명창
득음이 희로애락 걸러서 떨쳐버려
조금도 군소리 없는 희디흰 저 후련함
- 서벌의「폭포」전문
사랑아 너도 한 때 미쳐 불타지 않았니
비내리는 포도에서 짓밟히고 마는가
헤매다 어쩔 수 없어 낙엽으로 누웠다.
-권혁모의「숙명」 전문
3. 낯설게 하기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의 형식주의 비평가들에게서 나온 개념이다. 쉬클로프스키는 ‘기교로서의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를 강조했다. 일상 인식, 자동화에서 벗어나 이를 낯설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 언어의 일탈이 사물의 원모습 회복이라는 예술 본질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쉬클로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여러 가지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지각을 어렵 게 만들어 이를 지각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한다. 지각의 과정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 미적 목적이므로 가능한 한 연장시켜야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 로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스무 고개나 수수께끼, 우문우답 같은 것도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한 방식이다. 스무고개는 제시된 문제를 스무 번의 질문으로 알아맞히는 재치 놀이이다. 처음부터 낯설게 만들어 스무 번의 질문과 ‘예, 아니요’의 대답만으로 알아맞힌다. 낯선 큰 카테고리에서 익숙한 작은 카테고리로 좁혀나가는 것이다.
“생물입니까?”
“예”
“식물입니까”
“아니요”
이런 식으로 하나씩 좁혀가 20번째의 질문까지 온전하게 답을 맞혀야한다.
수수께끼는 사물을 빗대어 말하며 그 뜻이나 이름을 알아맞히는 놀이이다.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해야 알 수 있는 낯설게 하기의 한 방식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수수께끼가 있다. 머리를 풀어헤친다는 것은 일단 미친 사람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로 올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미친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면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한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그렇게 말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문우답에 참새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
참새가 날아가다가 포수의 머리 위에 응가를 했다. 화가 난 포수가 참새에게 ‘넌 팬티도 안입냐’하고 물었더니 참새는 ‘넌 팬티 입고 똥누냐’ 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참새가 팬티를 입을 일도 없거니와 팬티를 입고 응가할 일도 없다. 사람들은 특별한 일인 줄 알고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상적인 것을 뒤집어 낯설게 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의사 진술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의사 진술은 사실의 세계에서는 거짓이나 시의 세계에서는 진실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그렇게 봄부터 울었나 보다’라는 시구가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물과 공기와 햇빛이 필요하지 소쩍새의 울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울어보았자 국화꽃은 피지 않는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물과 공기와 햇빛이 필요하다’ 라고 말하면 시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소쩍새는 봄부터 울었나 보다’라고 말하면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거짓이나 시의 세계에서는 진실이다. 이런 것도 낯설게 하기의 방법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참말로 서러운 사람은 파도가 없다
참말로 그리운 사람은 바람이 없다
그 많은 파도와 바람이 방파제에서 부서진 것이다
- 신웅순의 「내 사랑은 45」전문
그 많은 파도와 바람이 방파제에서 부서져서 참말로 서러운 사람은 파도가 없고 참말로 그리운 사람은 바람이 없다는 말인가. 순전한 거짓이다. 서럽거나 그리운 사람은 파도나 바람이 있다는 말인가. 사람에게 파도나 바람이 있을 리 없다. 서러움이나 그리움을 파도나 바람에 비유해서 그렇게 의사 진술한 것이다. ‘그냥 보고 싶다던가 기다린다던가’ 라는 말을 사용하면 될 것을 굳이 파도, 바람, 방파제 같은 비유를 끌어내어 표현했다. 일상적인 말을 낯설게 표현한 것이다.
문빗장도 풀지 않고 지레 길을 나서더니
눈과 귀 다 놓치고 껍데기로 돌아왔네
이렇게 놓인 돌 하나 알 수 없는 그 행방
-이승은의 「물음표」전문
‘?’를 문빗장도 풀지 않고 지레 길을 나섰다. 그리고는 눈과 귀 다 놓치고 껍데기로 돌아왔다. 물음표를 이렇게 놓인 돌 하나 알 수 없는 그 행방이라고 했다. 물음이나 의심을 나타내는 부호쯤으로 설명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에둘러 표현했다. 낯설게 만들지 않고는 물음표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것이 예술이다. 시가 자동화된 일상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의 가슴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라면 낯설게 하기는 시의 본질에 충실한 하나의 창작 방법임에는 틀림 없다.
낯설게 하기는 하나의 창작 방법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자기만이 아는 주관적이고도 무모한 낯설음이어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이 있어야하고 독자로 하여금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시뿐만이 아닌 설명이나 논증의 글에도 낯설게 하기는 글쓰기의 필수 조건이다. 남들이 많이 쓰고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라면 흥미를 끌 수 없다. 무엇인가 새로워야 한다.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남다른 시선,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함은 물론 남다른 노력과 꾸준한 인내심도 있어야한다.
낯설게 하기의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상징, 은유, 인유, 아이러니, 패러디 등과 같은 수사적인 방법들도 있을 수 있고 거리, 화자, 시간, 공간, 전경, 배경 같은 문학적 장치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낯설게 하기=사물로부터의 일탈, 스므고개, 수수께끼, 우문우답
수사, 문학적 장치
몇 개의 자료들을 예시해 본다. 어떤 것들이 낯설게 만들었는지 그것을 자신의 글쓰기 방법으로 차용, 연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빰에는 이슬이오 가지에는 꽃이로다
곱게 쌓여노니 미인의 살결일다
비단이 밟히는 양하여 소리조차 희고나
- 조운의 「눈」
빰에는 이슬, 가지에는 꽃이라 했다. 볼에 내리는 눈은 녹아 이슬로 맺힌다. 눈물이다. 그러나 가지에는 눈이 쌓여 하얀 꽃이 된다. 꽃이다. 하나는 액체로 표현하여 여인을 눈물로 하나는 고체로 표현하여 여인을 꽃으로 형상화 시켰다. 미인의 살결은 하얀 눈이다. 비단같은 눈을 밟으니 소리조차 희다고 했다. 시각을 청각화시켜 눈을 소리로 더욱 아름답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눈을 이슬과 꽃으로 낯설게 만들었고 또 이를 살결로 소리로 촉각화, 시각화시켜 낯설게 만들었다.
풀여치 가을 속을 포로록 뛰어든다
달빛 밤 정으로 쪼아 축대 허무는 귀뚜리
바람은 고운 잎새를 따 빗소리를 뿌린다
-박영식의 「가을 소나타」전문
풀여치는 가을 속을 뛰어들고 귀뚜라미는 달빛 밤을 정으로 쪼아 축대를 허물고 바람은 잎새들을 따 빗소리를 뿌리고 있다. 이쯤 되면 가을을 다 말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이 가을 소나타이다.
풀여치와 귀뚜리, 바람 셋이 하나는 가을 속에 뛰어들어 하나는 축대를 허물고 하나는 빗소리를 뿌린다고 했다. 이렇게 일상의 일탈은 낯설게 하기의 좋은 실례가 된다.
몸 져 누운 꽃이 더 붉어 젊은 영정 같다
그 누가 남겨 놓은 쓸쓸한 물음표일까
세기의 죽음으로서 끄지 못할 불길 하나
- 김경의 「동백」전문
몸져 누운 꽃을 보고 젊은 영정 같다고 했다. 누가 남겨 놓은 쓸쓸한 물음표일까. 세기의 죽음으로도 동백의 낙화를 끄지 못한 불길 하나라고 했다.
동백의 낙화를 영정, 물음표, 불길로 의미를 최적화시켜 낯설게 만들었다. 낯설음은 독자로 하여금 많은 사색을 하도록 만드는 예술적 장치이다. 그래야 궁극적인 미를 느낄 수 있다.
4. 화법
신라 진평왕이 재위에 있을 때 당나라 태종이 홍색, 자색, 백색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 세되를 보내왔다. 진평왕은 대신들과 덕만 공주에게 아름다운 모란꽃 그림을 보여주었다. 진평왕은 대신들에게 당 태종이 그 꽃을 보내온 이유를 물었다. 대신들은 진의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훗날 선덕여왕이 된 덕만 공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 꽃은 아름답기는 하나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진평왕이 물었다.
“왜 이 꽃에는 향기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꽃이 활짝 피었는데도 벌, 나비가 날고 있지 않습니다. 여자가 국색이면 남자들이 저절로 따르는 법인데 벌, 나비가 따르지 않으니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진평왕은 꽃씨를 대궐의 뜰에 심었다. 1년 후 모란꽃이 활짝 피었다. 과연 향기가 없었다. 그림에 없는 ‘벌과 나비’로 ‘향기 없는 모란꽃’을 말한 것이다. 시창작은 이와 같다.
신라 활리역에 지귀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지귀는 미모에 반해 선덕 여왕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사랑한 까닭에 눈물로만 세월을 보냈다. 몰골이 초췌해졌다.
어느날 여왕은 국태민안을 위해 영묘사로 행차했다. 그 말을 들은 지귀는 그 절 탑 밑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지귀가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선덕여왕은 잠들어 있는 청년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조용히 얹어놓고 환궁했다. 지귀는 잠을 깼다. 지귀에게 이 안타까운 사연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마음에 불이 일어 그 탑을 에워싸더니 마침내는 불귀신으로 변했다. 이 불귀신이 결국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것을 막기 위해 시를 지어 나라에 공표했다. 이 때부터 신라 풍속에 시를 대문이나 벽에 써붙여 화재를 막았다고 한다.
지귀의 가슴에 얹어놓은 팔찌로 선덕여왕의 휴머니즘을 말한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선덕여왕의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말하지 않고 휴머니즘 대신 팔찌로 말을 해준 것이다. 이것이 시이다.
윤석중 작 홍난파 곡 동요「낮에 나온 반달」이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길러 갈 때
치마끈에 딸랑딸랑 채워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신다 버린 신짝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 짝 발에 딸각딸각 신겨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 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 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 줬으면
화자는 낮에 나온 반달을 바라보며 반달은 해님이 쓰다버린 쪽박, 신다버린 신짝, 빗다버린 면빗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반달을 바라보며 쪽박, 신짝, 면빗으로 할머니에 대한 사랑, 아기에 대한 귀여움, 누나에 대한 우애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대로 말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가 아니. 하고 싶은 말은 보물처럼 숨겨놓아야 한다. 독자들이 그 보물을 찾았을 때의 희열은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다.
조선시대 시조나 그림에서 승려와 양반가 여성들의 성관계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조선시대 부녀자들은 절에 갈 수 없었다. 이런 법은 조선시대에 철저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다. 사실 법회나 불공, 기도를 드리러 간다는데 부녀자들의 사찰 출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사찰 출입은 부녀자들이 집과 남성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승려와 부녀자와의 접촉은 사찰뿐만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에서도 이루어졌다. 제도적으로 막는다고 해서 인간의 본능조차 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승려와 부녀자와의 성묘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장시조(사설시조)이다.
중놈도 사람인양 하여 자고 가니 그리워라
중의 송낙 나 베고 내 족두리 중놈 베고
중의 장삼 나 덮고 내 치마란 중놈 덮고
자 다가 깨달으니 둘의 사랑이
송낙으로 하나 족두리로 하나
이튿날 하던 일 생각하니 흥글항글 하여라
중을 사람 취급 안했던 시대였다. 중과 관계한 어느 여인이 중을 보내고 지난 밤의 즐거웠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함께 자는 데에는 신분 차별과 도덕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신분은 사람이 만들고 성은 신이 만든 조화이니 음양의 교합은 인간에게도 당연지사가 아닌가. 송낙은 중이 쓰는 모자이며 족두리는 부녀자들이 쓰는 모자이다. 송낙과 족두리로 중과 부녀자를 대신했다.
창 밖에 어른어른하니, “그 뉘오신고?”
“소승이 올소이다.
어제 저녁에 노시(老媤)보러 왔던 중이러니
각씨네 자는 방 족두리 벗어 거는 말곁에
이내 송낙을 걸고 가자 왔네.”
“저 중아, 걸기는 걸고 갈지라도 훗말 없이 하시소.”
어느 중놈이 지난 밤에는 늙은 시어머니와 사랑하고
오늘은 며느리를 찾아와 사랑을 청하고 있다.
노시는 ‘시어머니’를, 말은
말코지로 ‘물건을 걸기 위하여 벽 따위에
달아 두는 나무 갈고리’를 말한다.
며느리는 자신의 몸은 허락하겠지만 대신 소문이 나지 않도록 소승에게 부탁까지 하고 있다. 후자의 말수작에서 보고 싶다는 말, 사랑하고 싶다는 말 같은 언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족두리 걸어두는 말 곁에 송낙을 걸어두는 것으로 대신했다. 직접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했다. 숨은 이야기가 그려진다.
남녀를 송낙과 족두리로, 장삼과 치마로 대신했다. 후자의 말수작에서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족두리 걸어두는 말 곁에 송낙을 걸어두는 것으로 말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미지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의미는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이런 표현들은 시에서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그림도 시처럼 그림으로 숨은 그림을 표현해야한다.
송나라 휘종 황제의 그림 이야기이다.
화가들에게 감추어진 절을 그리라고 했다. 어떤 화가는 숲속 사이로 절 집을 희미하게 비치게 그렸고 어떤 화가는 숲 위로 절 탑이 삐쭉 솟아 있는 그림을 그렸다. 또 어떤 화가는 절은 그리지 않고 깊은 산 속 작은 오솔길로 물동이를 이고 올라가는 스님을 그려놓았다.
휘종은 그림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이 그림을 보아라. 내가 그리라고 한 것은 산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절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라고 했는데, 다른 화가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절의 지붕이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절을 그리는 대신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을 그렸구나. 스님이 물을 길러 나온 것을 보니,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이 너무 깊어서 절이 보이지 않는 게로구나. 그가 비록 절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물을 길러 나온 스님만 보고도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 이것 이 내가 그림에 1등을 주는 까닭이다.
말하지 않은 스님의 물동이 그림으로 산속의 보이지 않은 절을 그린 것이다. 이것이 시이다.
벌과 나비를 그리지 않고 향기 없는 모란꽃을 그렸고, 팔찌로 휴머니즘을 그렸다. 남녀의 사랑을 송낙과 족두리로, 보이지 않는 절을 물동이를 인 스님으로 말을 했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다른 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신윤복의 「기다림」
이미지를 포착하고 추적하는 힘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으로 여러가지 사건들을 추단해낼 수 있다. 이 여인은 송낙을 말아쥐고 담장 쪽을 연신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연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화가는 몇 가지 구체적인 상황만을 제시했다.
여인의 신발은 짚신이다. 민가 여염집 아낙일 시 분명하다. 꽃이 핀 것으로 보아 화창한 봄날이다. 봄은 모든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다. 송낙을 말아쥔 것으로 보아 연인은 중이다. 여인 옆에는 큰 나무 하나가 서 있고 여인은 연신 뒤를 바라보고 있다. 독자는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사건의 전말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이것이 시이다. 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미 전달에 있다. 이를 위해 시인은 언어로 숨은 그림을 설계하고 독자는 시인이 설계한 숨은 그림을 찾아내야 한다.
섬뜩한 칼끝이 불의 꽃으로 핀,
온 몸이 절절 끊어 시뻘건 쇳물로 핀,
아 식어 내리 꽂히기 전 쪼개져 붉게 진다
- 김영수의 「칸나」전문
칸나꽃이 질 때 쇳물이 쪼개져 붉게 진다고 했다. 칸나꽃을 쇳물로 말했다. 얼마나 삶이 아쉽고 처절했으면 그랬을 것인가.
하나 더 감상해보자.
풀벌레 울음 소리 옥양목 가위질 같다
차가운 별빛은 물에 씻어 박은 듯
잊고 산 세상일들이 오린 듯이 또렷하다
- 서숙희의 「처서 무렵」
처서 무렵 한 때의 수채화이다. 그림은 붓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시는 언어로 그림을 그린다. 초·중장은 맑고 깨끗한 바깥 풍경이나 종장은 잊고 산 시인의 내면 세계이다. 이즈음이면 여름 내 습기찬 옷가지, 이불 홑청도 꺼내어 말려 두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내내 잊고 산 것들일 게다. 새삼 꺼내놓으니 그 때 그 기억들이 또렷하다는 것이다. 묻어두었던 습기 찬 기억들, 더더욱 아픈 기억들은 계기가 되면 또렷하게 떠오른다.
종장이 압권이다.
바위에 새긴 고전 층층이 쌓였구나
한 권쯤 슬쩍 뽑아 달빛에 읽어 보면
구운몽 팔선녀들이 까르르 나오실까.
- 김옥중의「채석강 단애」
층층히 쌓인 돌을 고전 책으로, 등불을 달빛으로, 슬쩍 뽑은 책을 구운몽으로 대신했다. 팔선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춤이라도 출 것 같다는 것이다. 시조의 멋은 이런 것이다.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거나 다른 말로 말을 하거나 한다. 상황만을 제시해줄 뿐이다. 이것이 시인의 화법이다.
5. 상황
“엄마, 그만 먹어?”
맛있는 음식을 어머니와 같이 먹던 딸애는 음식이 조금 남은 접시 위를 바라보며 안타 까이 묻는다. ‘그만 먹으란 소리보다 더하구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어머니는 수저를 놓는다.
“엄마, 그만 먹어?”
아직도 적지 않게 음식이 남아 있는 접시 위를 보며 딸애는 걱정스레 묻는다.
“응, 별맛이 없네.”
‘엄마, 그만 먹어?’란 문장은 제발 그만 먹으란 뜻이 될 수도 있고 좀 더 먹었으면 하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똑같은 문장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말하는 쪽과 듣는 쪽이 동시에 어떤 상황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담화는 어떤 상황을 반영하는 게 아니고 어떤 상황 그 자체이며, 억양은 의미를 좌우하는 언어의 일부가 된다. 어떻게 말해지느냐에 의해서 무엇이 말해지는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같은 문장이라도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엄마 그만 먹어?” 는 ‘제발 그만 잡수세요’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조금 더 잡수세요’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같은 문장이라도 말해지는 것과 말해져야 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예술 작품도 시대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기호의 의미는 그 시대의 사회 상황 속에서 체현되어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시이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트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의 「민간인」 전문
「민간인」에서 말해진 것은 시간과 장소, 그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술이 전부이다. 작자는 이러한 단순한 사건을 알리기 위하여 기술한 것은 아니다. 민족의 비극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술했을 뿐이다. ‘말해진 것’과 ‘말해져야 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이 문장 안에 공존하고 있다.
울음을 터트렸다고 해서 영아를 바다에 던졌다는 말은 사건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는 말도 발화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이러한 수사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만이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동일한 사회적 지평에 속한 사람들만이 민족의 비극상을 이해할 수 있다.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최승자의 「가을」 전문
화자는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은 “세월아 가지마라, 가지마라 그랬죠”일 것이다. 그것이 역설이건 아이러니건 은유이건 상징이건 관계할 바 아니다. 분명한 것은 ‘말해진 것’과 ‘말해져야 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같은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상황이다. 어떻게 말을 해야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한 쪽만의 말로도 상대방의 말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시이다.
화자는 청자한데 ‘세월만 가라’했는데 세월이 화자인 당사자에게 왔다. 상대방에게는 ‘세월만 가라’했는데 세월이 화자에게 온 것이다. 그리고는 낙엽 한 잎 툭 떨어뜨리고 앞질러 가는 것이다. 세월 보고 ‘가지 말라’는 이것이 사실 화자가 말하고자 한 것인데 ‘세월만 가라’라고 대신 말했다.
이 두 가지 상황 ‘말해진 것, 세월만 가라’와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 세월아 가지마라’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조 한 편을 보자.
내 아픔 여울진 골에 그는 연기로 피고
팔을 벌리면 잡힐 듯 가깝다가도
잡으면 저만치 물러서는 늘 타오르는 모습
-한분순의 「환」전문
여기서 ‘내 아픔은 골’이고 ‘그는 연기’이다. 상황은 내 아픈 골에 그는 연기로 피어오른다. 또한 팔을 벌리면 잡힐 듯 하지만 늘 저만치 물러서는 타오르는 모습이다. 그는 연기이고 늘 타오르는 모습이다. 또한 잡힐 듯 가깝다가도 저만치 물러서는 모습이라고 했다. 이것이 말해진 것이다.
화자의 아픔이 여울져 있는 골이라는 것과 잡힐 듯 가깝다가도 물러서는 타오르는 모습이 말해지지 않은 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환영이 보일 정도로 화자의 심리 상태는 불안정하다. 여기서 말해진 것은 연기와 타오르는 모습이다.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은 열병에 시달린 사랑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연기와 타오르는 모습이 담재하고 있는 의미들은 서로 다르다. 하나는 연기요 하나는 불꽃이다. 초장과 종장의 상황은 똑같은 불이지만 하나는 연기로 하나는 타오르는 모습으로 나타나 초장과 종장의 화자의 심리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시에는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공존하고 있다. 종장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시조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움은 언제부터 산이 되어 서 있고
외로움은 언제부터 강이 되어 흐르는가
쪽배로 갈아탄 흰구름 천축국 하룻밤 여관
- 신웅순의 「묵서재 일기 3」
그리움이 산이 되어 서 있을 리 없고 외로움이 강이 되어 흐를 리 없다. 그런데 화자는 그렇게 진술했다. 쪽배로 갈아탄 흰구름, 천축국 하룻밤 여관이라 했다. 늘그막 인생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위 진술들은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을 대신 했다.
말해진 것, ‘그리움이 산이 되어 서 있는 것, 외로움이 강이 되어 흐르는 것’과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 ‘인간의 그리움과 외로움의 원초적인 본능’, 이 두가지 상황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쪽배로 갈아탄 흰구름, 천축국 하룻밤 여관’은 그립고 외로운 늘그막 인생을, 인생은 짧다는 늘그막의 고백을 대신 말을 하게 한 것이다. 말해진 것과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상황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시조 두 점을 소개한다.
상처 없는 영혼이 세상 어디 있으랴
사람이 그리운 날 아, 미치게 그리운 날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박시교의 「독작」전문
왜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인가? 네 생각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인가? 독자들은 갖가지 생각을 할 것이다. 상처를 받았을 텐데도 미련하게도 그리운 것이 사랑이고 정이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연애를 넌 너무 일찍 한 것 같다
바람막이 없는 혹한 다산이 시작되고
미혼모 어찌할 건가 하혈 펑펑 쏟아낸다
아픈 기억들은 하얀 지우개로 지우고 싶다
산문을 닫아걸고 사흘 밤낮 퍼붓는 저주
입술을 꼭 깨물고 선 눈물겨운 자태여!
-이영필의 「홍매」전문
미혼모의 아픈 사랑을, 입술을 꼭 깨문 눈물겨운 자태를 홍매라 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만이었을까.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아픈 기억들일 것이다. 지우개로 지우고 싶다니 얼토당토않다. 점점이 박힌 홍매들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것들이다. 말한 것들은 말해져야할 것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대신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