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聖 杜甫의 詩心에 醉한 밤 [2010년 02월 02일(화)맑음]
- 杜甫 草堂에서 欽善齊로 이어지는 길 -
○ 杜甫는 이태백과 함께 중국 시단을 대표하며 궁핍한 삶을 원망하지 않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회상의 부패와 부조리에 대한 강한 비판과 서민들의 소박한 삶에 대한 깊은 우수와 비애를 절실하게 표현 했던 민초 속에 파고든 선각자로서 그의 일생을 조명한 “오 마이 뉴스” 기사를 발췌하여 살펴본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淺淚 恨別鳥驚心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성 안에 봄이 왔으나 초목만 무성하네. 시대를 슬퍼하니 꽃을 봐도 눈물이요, 이별이 한스러워 새가 울어도놀라는 구나.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봉화는 석 달이나 계속 타오르고, 집에서 온 편지가 너무나 소중하구나.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만 짧아져,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조차 못 꽂는구나. < 두보의 대표적인 시“春望”>
☞ 중국 시문학의 성인(詩聖)으로 추앙받은 두보(杜甫, 712~770)는 허난(河南)성 공(巩)현 출신으로, 조정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에 오랫동안 살았다. 쓰촨(四川)과 별다른 인연이 없던 두보가 청두(成都)에 오게 된 이유는 안사의 난 때문이다.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명운을 바꾼 대전란 이었다. 8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당나라 인구는 무려 70%가 감소했다. 전란 전 890만 호에서 293만 호로 약 3000만 명의 인명이 죽어간것.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악의 킬링필드였다
안사의 난은 중흥의 길을 걸었던 당조를 급속히 몰락시켰다. 당 현종은 한때 개원의 치를 이끌었지만, 환관과 외척의 전횡과 부패를 막지 못해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을 자초했다. 반란은 율령제의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 시대적 혼란상과 더해져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부패한 관리의 수탈로 경제적 기반을 잃은 중소 농민층이 반란군에 적극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서 흥기한 반란군이 장안을 향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현종은 양귀비 및 몇 몇 측근과 함께쓰촨으로 달아났다. 쓰촨으로 가는 도중 양귀비는 황제 측근과 호위군의 강요로 자살했다. 현종도황위를 태자에게 양위하고 쓸쓸히 남은 생을 보내야 했다.
두보의 시 세계에는 이런 시대상이 잘 녹아있다. 두보는 현실주의 시인으로 당나라 쇠퇴기 및 전란기에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민중의 정서를 잘 반영했다. '봄의 소망'은 안사의 난을 배경으로 전쟁에 철저히 파괴된 나라와 거듭된 피난으로 급속히 늙어버린 두보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오늘날 시성으로 추앙받는 것과 달리, 두보는 관직에 대한 욕심이 무척 컸다. 원대한 꿈을 성취하고자 쉰 살이 다 되어서까지 과거에 나섰다. 하지만 두보는 과거를 주관하는 고위 관료와 인과관계가없었다. 글재주는 있었지만, 권력과의 끈도 재력도 없었던 두보는 줄곧 낙방해야만 했다. 늙어서까지 고위 관료가 되어 뜻을 펼치고자 했지만 조정과 시대는 두보를 버렸다. 두보는 이런 절망감을 시 창작으로 승화했다. 특히 안사의 난으로 참혹한 전쟁을 체험하면서, 두보는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과 가슴 저리는 아픔에 주목했다. 전쟁을 통해 진정한 민중시인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 江 村 (강 촌) > 淸江一曲抱村流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長夏江村事事幽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다.
自去自來梁上燕 제비는 마음대로 처마를 들고나고
相親相近水中鷗 수중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 다. 老妻畵紙爲棋局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는 구나
多病所須唯藥物 다병한 몸에 필요한 것이란 오직 약물뿐 微軀此外更何求 미천한 이내 몸이 달리 또 무엇을 바라리오
○ 시성의 곁에서 숱한 생각을 잠재우고 오직 시심이 전수되었으면 하는 과분한 희망을 걸어 본다.
○ 중국기행의 마지막을 보내는저녁 사천요리 전문 식당인 欽善齊에서 중국요리 진수를 요리값과 맞먹게 무한리필로 민속주 參杞固酒를 겯들여 먹고 마시며 모두가 대취하여 파안대 소로 영업마감 시한을 넘겨가며 즐겁고 흔쾌한 시간을 가졌다.
○ 7박 8일 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국 서도기행은 이렇게 끝을 맺게되 었다.12명의 단촐하지 않은 회원들이 상념의 날개를 달고 광대무변한 중원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슴에 담고 굴곡진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보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유익한 시 간을 공유하도록 이끌어 준 벽산 선생 님과 우봉 박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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