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위치: 아프리카대륙 북동부
인구: 107,269,892명 (2023년 추계)
수도: 카이로
면적: 996,603㎢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이집트 아랍 공화국 (The Arab Republic of Egypt)
기후: 건조성기후
민족 구성: 이집트인(98%), 베르베르인, 누비아인
언어: 아랍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단원제
종교: 이슬람교(90%), 콥트교회(9%)
화폐: 이집트 파운드 (LE) 환율계산기
국화: 수련
대륙: 아프리카
국가번호: 20
GDP: USD 237,073,000,000
인구밀도: 100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eg
이집트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중 하나. 이집트는 동쪽으로는 이스라엘·아카바 만·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다. 이집트에는 겨울과 여름의 두 계절만 있다.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 여름은 일반적으로 무덥다. 이집트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며,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수도는 카이로이다. 남북길이 1,055km 남쪽 국경선에 면한 동서 최대너비는 1,250km다.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 만, 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환경
이집트는, 경관의 지배적인 특징인 북류하는 나일 강에 의해 크기가 다른 극도로 건조한 두 지역으로 나뉜다. 보다 큰 사막지대인 서부 사막(앗사흐라알가르비야)은 와디(건천)가 없는 낮은 대지이며, 보다 작은 동부 사막(앗사흐라앗샤르키야)은 석회암과 사암층의 대지로 와디에 의해 널리 개석되어 있으며, 남동부에는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동부 사막의 북동부에 있는 시나이 반도에도 와디가 많다. 시나이 반도 남부 산지에는 해발 2,642m의 이집트 최고봉인 캐서린(카트리나) 산이 있으며 동부 사막의 홍해 구릉지대(이트바이)에는 해발 1,800m가 넘는 산이 많다. 나일 강은 이집트 영내에서는 중요한 지류가 없으며, 가파른 벼랑들 사이에서 대략 8∼16km 너비의 바닥이 평평한 유역을 따라 흐르다가 카이로 북쪽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갈라지며 삼각주 저지대를 이룬다.
이 삼각주는 길이 160km, 너비 240km로 인구가 조밀하고 연중 관개가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자연 식생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건조한 서부 사막은 대체로 생명체가 없는 지역이지만, 수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막의 다년생식물과 풀이 자란다.
서부 사막보다 덜 건조한 동부 사막에는 이따금 비가 내려 몇몇 종류의 식물이 자랄 수 있는데 그중에는 타마리스크, 아카시아 및 수많은 종류의 가시관목, 작은 다육식물들, 방향성의 약초들이 있다.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 그리고 산재하는 오아시스들에서 이집트 농업의 거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며 인구의 99% 이상이 여기에 거주한다.
이집트에는 겨울(11∼3월)과 여름(5∼9월) 두 계절만 있다.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알렉산드리아에서의 1월평균기온은 11∼18℃), 여름은 일반적으로 무덥다(카이로의 7월평균기온은 29℃). 연강우량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175㎜ 카이로에서 약 25㎜ 남부의 아스완 부근이 약 2.5㎜로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또한 홍해 연안 평야에는 강우가 거의 없다. 광물매장량은 보통 수준이며, 철광, 석유, 천연 가스, 석고, 인산염과 우라늄 등이 산출된다.
국민
이집트 국민은 신체적인 특징상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는데, 이는 셈족과 함족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나일 강 삼각주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상(上)이집트(즉 나일 강 상류 유역의 남부 이집트) 주민들보다 중동의 다른 지역 및 유럽과 더 많은 접촉을 가져왔다. 소수민족 집단으로는 나일 강 유역 남부의 누비아인, 동부 사막 남부의 함족 계통의 베자인, 서부 사막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족이 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북아프리카의 평균수준이다. 연인구증가율은 세계 평균치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며, 유아사망률 역시 높다. 국민의 1/3가 15세 미만이다(2017). 정부는 신생아와 아동의 높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산모와 어린이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학령아동의 건강 관리에 비중을 두고 있다. 2023년 추계인구는 1억 726만 9,892명이다.
입국이민이나 출국이민은 전통적으로 아주 적었으나 국외로 이주하거나 외국에서의 임시취업을 원하는 사람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인구는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에 크게 밀집, 카이로 도시주(都市州)를 포함한 하(下)이집트 지방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한다. 그러나 전체 이집트인의 절반은 아직도 시골생활을 한다. 20세기 동안 도시화가 꾸준히 진행되어왔지만, 수치상으로 나타난 도시화의 일부는 시골의 성격이 많이 남아 있는 여러 부락들을 중소도시로 지정한 행정제도의 개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언어
거의 13세기 동안이나 아랍어가 이집트의 문어이자 구어였다. 639년 아랍인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언어인 콥트어가 종교와 일상생활에서 다 같이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러나 12세기까지는 거의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콥트어는 콥트 교회에서 전례용(典禮用) 언어로만 존속하고 있다.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는 아랍어의 구어방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방언으로, 특히 수도 카이로에서 사용되는 방언이 일종의 표준역할을 하고 있다. 이집트 방송의 영향으로 다른 아랍국가에서도 잘 통용되는 편이다. 고대 이집트어의 계통을 잇는 콥트어는 콥트인들의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등,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일상 언어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주요 외국어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있다. 일부 외국인의 경우에는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도 사용된다. 대다수가 아랍어를 사용한다.
이집트의 공식 언어는 아랍어이다. 주로 이집트계 아랍어가 68% 정도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26% 정도의 국민들이 사용하며 주로 나일강 상류 지대에서 사용되는 사이디 아랍어(Sa'idi Arabic), 동부 이집트계 베다위 아랍어, 수단 아랍어, 도마리어, 노빈어, 베자어, 시위어 등이 있다. 또한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탈리아어도 조금씩이나마 사용되고 있으며, 가장 최근으로는 암하라어와 같은 아프리카계 언어들도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점차 퍼져나가고 있다.
문화
사회적·문화적인 전통이 아랍·이슬람의 전통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집트 문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범세계적이며 서구의 영향을 많이 드러낸다. 서구의 충격은 현대 이집트 소설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주제의 하나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198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나기브 마푸즈가 있다.
이집트는 상대적으로 문화 검열이 심한 아랍 세계와 중동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며 인구도 많은 덕택에, 아랍 계열 국가들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국가이다. 현재 아랍과 중동의 문화는 이집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집트가 50년대와 60년대에 확보한 중동 세계에서의 발언력 덕분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보통 외국인들은 이집트 문화라 하면 고대 이집트 문화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나, 현대 이집트는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오랫동안 영향을 받아왔기에 거의 아랍 문화와 유사한 부분이 오히려 더 많은 편이다. 다만 아예 고대 이집트와 단절된 것은 아니어서, 이집트에서 주로 쓰이는 아랍어 계열 방언인 이집트 아랍어는 고대 이집트어의 단어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19세기 초의 이집트 계몽주의자인 리파 알 타타위는 고대 이집트에 대한 향수를 기반으로 이집트 사회에 계몽주의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고대와 중세 이집트에 대한 재발견과 탐구를 목적으로 이집트학 학교를 세우고 이집트의 역사, 언어, 문화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이집트의 문화적 르네상스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절정을 찍었고, 이 시기에 무함마드 압두흐, 아흐메드 루트피 엘 사예드, 무함마드 루트피 고우마, 타우피크 엘 하킴, 루이스 아와드, 카심 아민 살라마 모우사, 타하 후세인, 마흐무드 모크타르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집트가 과학과 세속주의에 기반하여 개인의 자유를 더 보장하여 주는 사회로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BC 2925년경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통일되었는데, 이는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고, 이후 약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계속해서 지배자의 위치를 이어갔다. 역사가들은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의 고대사를 고왕국·중왕국·신왕국으로 구분한다.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이집트 미술, 이집트 법, 이집트 종교).
아시리아의 침략은 BC 7세기에 일어났으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것은 BC 525년이었다.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으로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이 왕조시대에는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헬레니즘 세계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시는 헬레니즘뿐만 아니라 셈족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머지 않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최고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구심점이 되었다.
로마인은 BC 30∼AD 395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그후 이집트는 행정적으로 동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관용령을 내림으로써 이집트의 공식 교회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오리게네스·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활동 무대였다.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비잔틴 군대가 아라비아의 침략군과 3년의 무력 충돌 끝에 이집트에서 철수한 642년에 끝이 났다. 그후 200∼300년 내에 이집트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바뀌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집트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일부였다.
그후 969년에는 파티마 왕조 칼리프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당한 독립과 중요성을 획득했다. 1171년에 이어 이집트는 아바스 왕조의 지배로 귀속되었다.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이 무너지고 맘루크들이 득세한 것은 1250년의 일이었다. 맘루크들은 아라비아 세계의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이용된 비아라비아·비이슬람의 노예들이었다. 그들이 이집트에 세운 왕조는 1517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집트를 이슬람 세계의 동부 아랍어 사용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때까지는 이집트의 아랍화가 거의 완성되었다.
1517년에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어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스리는 속주로 되돌아갔다. 맘루크 왕조 말기에 시작된 경제의 쇠퇴는 계속되었고, 그와 함께 이집트 문명도 쇠퇴했다. 1798년 프랑스군의 침략은 불과 몇 년 동안이었지만 이집트를 유럽의 정치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충분했다.
프랑스군이 떠난 뒤 이집트는 무하마드 알리의 수중에 들어갔다. 알바니아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알리는 오스만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하는 하나의 왕조와 제국을 일으켰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의 치부(致富)와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이집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졌고, 영국은 1882년 내란의 와중에 기회를 틈타 이집트를 점령했다(대영제국).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22년 명목상의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52년 쿠데타로 군주제가 타도되고,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이집트 본토 출신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잠시나마 시리아 및 예멘과의 연방 수립을 시도했으며,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다. 1956, 1967년에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엘 사다트는 나세르가 시행했던 강도 높은 사회주의 정책의 일부를 파기하려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공격해(1973) 시나이 반도의 작은 영토를 되찾았다.
그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81년 10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밑에서 부통령직을 맡고 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그뒤를 계승하여 사다트의 평화주도정책을 계속했으며, 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했다.
종교
이집트는 아랍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무슬림 인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6번째로 거대한 무슬림 국가일 정도로 이슬람교가 압도적으로 득세하고 있는 국가이다. 전세계 무슬림의 5% 정도가 이집트인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영향력도 아직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체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국교는 수니파 이슬람교로, 이슬람교의 위상이 매우 높다. 그 외 종교들의 분포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엇갈리는 경우들이 많은데, 보통 전체 국민의 85%에서 90%가 무슬림이며, 10%에서 15% 정도가 콥트 정교회 신자들이며 나머지 1% 정도가 타 기독교 분파나 기타 종교를 믿는다고 전해진다. 다만 다른 조사에서는 기독교 인구를 15%에서 20% 정도로 높게 잡기도 한다. 또한 수니파나 시아파 등 한 가지 종파로 딱히 분류할 수 없는 무슬림들도 꽤나 많아서, 대략 12% 정도의 무슬림들이 이 분류에 속한다.
이집트는 7세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세가 가장 강했으나, 이후 이슬람교가 전래된 이후 점차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슬림들은 대략 1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사회 전반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이슬람 세계 전반을 좌우하는 지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현대 이집트에서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시기에 이슬람교가 국교가 되었으며 샤리아가 법의 기본 근거가 되는 등 이슬람의 세가 매우 강해졌다. 대략 1,500만 명 정도의 이집트인들이 이슬람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을 믿고 있으며, 수피즘 지도자들은 현재 이집트인들이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실제 신도 수는 1,500만 명보다도 많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집트는 현재 수니파 무슬림들이 강세이기는 하지만, 시아파 무슬림도 조금은 존재하고 있다. 현재 이집트의 수니파 무슬림의 수는 대략 100만 명에서 22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최대 300만 명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다. 19세기 등장한 이슬람 개혁주의 분파인 아마디파는 약 5만 명 정도에 이르고, 극보수적인 수니파 종파인 살라피파가 대략 500만 명에서 600만 명 정도에 이른다. 특히 카이로 지방에 이슬람 모스크들이 많이 모여있는 것으로 유명하여서, 별칭이 ‘1,000개 미나레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집트 기독교 신자들의 90%가 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 신자이다. 그 외에도 콥트 가톨릭 교회, 혹은 이집트 복음교회나 개신교회 등에 속해있다. 특히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와 같이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들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교회들도 찾아보기 쉬우며,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 가톨릭 등 타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종교들도 볼 수가 있다. 과거에는 그리스 민족이 이집트에 살면서 거대한 그리스 정교회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아르메니아인들도 거대한 규모의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도 한때는 이탈리아인들과 몰타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상당히 세를 자랑했었으나, 이슬람교를 추종하는 나세르 대통령과 민족주의 세력들이 득세하자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쪼그라들고 말았다.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의 고향으로, 정교회는 1세기에 창립되었으며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교회이다. 또한 969년에 개교한 알 아즈하르 대학교도 이집트에 있는데, 현재 알 아즈하르 대학교는 수니파 이슬람교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들 중 하나이기도 하며 세계적으로도 2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이집트는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오직 3개의 종교만을 인정하고 있다. 바하이교나 아마디 종파 등 타 종교들은 이집트인들에 의하여 배척받는 경우들이 많으며, 이들을 국가안보 위협 대상으로 간주하는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소수 종교들을 믿는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공인받고 신분증에도 이를 등록하기를 원했고, 결국 2008년에 법원에서 만일 신분증에 개인이 믿는 종교가 없으면 공백으로 두는 것도 허락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인구의 90%가 이슬람교 신자이고, 10%는 기독교 신자이다. 이슬람교 신자는 대부분 수니파이고, 기독교 신자 대부분은 이집트의 전통적 기독교인 콥트교에 속한다.
이집트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이집트와 한국은 1961년 12월 영사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1962년 5월 카이로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후 1995년 4월에 대사급으로 격상되었으며, 한국은 1995년 5월에 주 이집트 한국대사관을 개설했다. 이집트는 1995년 6월에 주한 대사관을 개설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이집트에 진출해 큰 성과를 올렸다. 이집트는 1999년 4월에 무바라크 대통령이 국빈 방한한 이후 각 부처 장관의 방한이 이어졌다. 한국은 1999년 2월에 김종필 국무총리, 2006년 3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했다. 2014년 이후 3차례 양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한편 이집트는 북한과 1963년 8월에 국교를 수립하고 상주공관을 설치했으며, 카이로에 북한문화원을 두고 있다. 이집트와 북한 양국 사이에는 과학기술협정, 군사원조협정, 해운협력협정 등이 체결되어 있으나 두 나라의 교역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1980년대부터 이집트가 실리외교에 치중하자 실질적인 교류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한국에게 이집트는 수입 89위, 수출 42위의 무역상대국이다(2017년 기준). 2020년 기준 이집트의 대한국 수출액은 3.4억 달러, 수입액은 12.1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석유제품, 식물성물질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합성수지 등이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문화협정(1968년 8월), 항공협정(1979년 9월), 전력기술협정(1985년 6월), 무역협정(1996년 3월), 사증(비자)면제협정(1998년), 원자력협력 협정(2001년 8월) 등이 있으며, 2006년 3월에 투자협력 양해각서와 수출보험협력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한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이집트 시장 진출을 돕기 위해 카이로무역관을 설치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2005년 9월에 아인샴스대학에 아랍권에서는 최초로 한국어과가 개설되었으며, 해마다 카이로에서는 케이팝(K-pop) 경연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또한 한국·이집트 친선협회가 결성되어 있어 양국 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 10월에는 한국의 문화, 예술, 역사, 사회, 스포츠 등을 이집트에 소개하고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수도 카이로에 아랍권 최초의 한국문화원이 설립되었다.
2017년 기준 이집트에는 949명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3,239명의 이집트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