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6. 05
달러를 주도하는 기존 금융자본 세력은 가상자산(암호화폐)의 달러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들도 저렴한 송금 수수료, 송금의 즉시성 등 암호화폐 기술만큼은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러한 입장은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의 언급에서 엿보인다. 국제결제은행은 얼마 전 “암호화폐 시장의 급성장이 금융시스템 안정을 해칠 위험이 있는 만큼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의 특성을 파악하고 직접 발행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국제결제은행이 이런 권고를 한 이유는 기술혁신의 대세를 거역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많은 중앙은행들이 탈중앙형 암호화폐의 기술을 모방하여 국가가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디지털화폐 개발에 나섰다. 특히 중국 인민은행이 가장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중국은 2014년부터 이미 디지털화폐 개발을 시작했다.
전 IMF(국제통화기금) 총재이자 2019년 11월부터 EU(유럽연합) 중앙은행 총재를 맡고 있는 크리스틴 라가르드도 암호화폐 긍정론자이다. 그녀는 “암호화폐가 기존 화폐와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암호화폐가 더 이상 무시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밝혔다. 라가르드 총재는 국가기관이 힘이 없고 국가 통화가 불안정한 국가에서는 암호화폐가 기존 통화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녀는 영국 중앙은행(영란은행) 콘퍼런스에서 앞으로 법정화폐는 디지털화폐로 가야 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달러 같은 다른 국가의 통화를 채택하기보다는 암호화폐를 사용하는 국가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 기존 화폐보다 암호화폐가 쉽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많이 퍼질 경우 잠재적 성장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암호화폐 시장이 더욱 안정된다면 이러한 시나리오는 더욱 빨리 진행될 수 있다.”'
▲ 지난해 10월 나이지리아 무하마두 부하리 대통령(왼쪽)이 디지털화폐인 ‘e나이라’ 런칭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 뉴시스
범죄자들이 더 이상 돈을 숨길 수 없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역시 미국이 물리적인 화폐를 폐지하고 디지털화폐로 전환할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듀크대 캠벨 하비 교수 역시 “비트코인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돈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며 종이화폐가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거래 내역이 정부의 블록체인에 기록될 수 있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돈을 숨기거나 세탁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이야말로 국가 디지털화폐의 장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연방코인을 “연방정부가 모든 거래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는 디지털화폐”라고 정의하면서 초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정부 통제를 벗어날 수단으로 생각했던 블록체인 기술이 오히려 국민들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하비 교수에 의하면, 정부들이 국가 차원 디지털화폐에 대한 아이디어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마이너스 금리를 손쉽게 시행하는 등 암호화폐가 통화정책 관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여러 중앙은행들은 자신들만의 코인을 고려하고 있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정부 차원 디지털화폐 ‘e-krona’의 발행을 적극 검토하고 있고 중국, 러시아, 네덜란드, 캐나다, 핀란드, 이스라엘, 싱가포르, 에스토니아, 파푸아뉴기니와 다른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가 암호화폐인 ‘크립토루블’ 발행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 중앙은행은 연구논문에서 금본위제와 비슷한 비트코인본위제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흥미를 끌었다.
미국은 중앙은행디지털화폐 개발에 다소 소극적 내지 중립적이었다. 윌리엄 더들리 전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2017년 11월 뉴저지 럿거스대학 연설에서 ‘비트코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투기 활동에 가깝다. 화폐로서 필수적 요소인 ‘가치 안정성’이 없다. 다만 비트코인 기술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 단계에서 말하기는 너무 이르지만 연방준비제도가 디지털화폐를 제공하는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연방준비제도의 ‘연방코인’ 아이디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다. 유럽에서도 그리스 금융 사태를 계기로 ‘유로코인’과 같은 아이디어가 탄력을 받았다. 특히 영란은행이 적극적이었다. 당시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는 “암호화폐는 미래 금융 부문의 잠재적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영란은행은 2015년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 발행을 중요한 연구과제로 설정했다.
2019년 8월 미국 잭슨홀회의에서도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는 “미 달러의 지배적 지위가 글로벌 경제 안정성을 해치고 있다. IMF가 달러를 대체할 화폐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기축통화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카니 총재는 “미국은 국제 무역에서 10%, 글로벌경제 생산량에서 15%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 무역 거래 중 절반과 글로벌 증권발행 중 3분의2가 달러를 통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달러의 과수요가 글로벌 금융안정을 해친다는 게 카니 총재의 지적이다. 그는 골드만삭스 출신이라 누구보다 월스트리트 사정에 해박한 사람이다.
디지털화폐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중국은 2016년 블록체인과 디지털화폐를 대상으로 상업은행이 참여하는 테스트를 최초로 실시한 데 이어 2020년에는 선전, 쑤저우, 슝안신구, 청두와 동계올림픽 개최 장소에서 폐쇄식 테스트도 진행했다. 2021년에는 디지털화폐 테스트 지역을 상하이, 베이징 등 대도시와 역외로 확대했다. 선전에서는 홍콩 주민을 대상으로 역외 사용 테스트를 최초로 실시하기도 했다.
또 인민은행은 2021년 2월 홍콩자산운용사인 HKMA, 태국·아랍에미리트 중앙은행과 공동으로 다자간 중앙은행디지털화폐 브리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 디지털화폐의 역외결제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개인 소매거래 중심의 시범 테스트에서 벗어나 디지털위안화 국내 시범사용을 6대 은행 중심으로 상시화하는 한편, 인근 국가를 대상으로 역외 사용 테스트 범위도 확대하면서 기업간거래(B2B) 등 다양한 거래에서의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 미국 워싱턴DC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건물. 디지털화폐에 다소 무관심하던 미국도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연구 개발을 지시했다. / 뉴시스
브릭스 등 경제블록별 암호화폐의 등장
중국 4대 국유은행 중 하나인 농업은행의 전자지갑을 보면 디지털화폐 그림 속에 실물 화폐처럼 발행연도 등이 포함된 고유번호가 들어가 있다. 이는 추적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현재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알리페이처럼 QR코드를 스캔해 돈을 지불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송금 기능도 있다. 또 스마트폰 두 대를 서로 맞대는 ‘부딪치기’ 기능도 있는데 이는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지 않은 곳에서도 근거리 통신기술을 활용해 서로 돈을 주고받는 기능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능은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일대일로 국가들에 아주 유용할 것으로 보여 향후 디지털위안화의 개도국 전파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디지털화폐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중국이 세계 최대 무역국이기 때문이다. 향후 중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수출입 품목이 디지털위안화로 거래될 공산이 있다. 특히 디지털화폐는 전송이 빠르고 편리하며 환전 및 송금 수수료가 저렴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어 미래화폐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경제블록별 암호화폐가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이 2017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다변화 주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 주목받는다.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대두에 맞서 중국은 세계화와 자유무역 수호를 기치로 내걸고 미국 등 서방국가에 대항해 세계 질서를 다극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러시아도 적극 동조하고 있다.
이미 브릭스는 무역거래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13년 브릭스 통화안정기금을 발족시켰고 2016년에는 브릭스개발은행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2018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는 5개국의 국책 개발은행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블록체인 공동연구에 참여하는 5개 은행은 브라질개발은행(BNDES), 러시아 국영 대외경제개발은행(VEB), 중국개발은행(CDB), 인도수출입은행(Exim Bank), 남아프리카공화국개발은행(DBSA) 등이다. 이들 브릭스 5개국은 전 세계 인구의 약 40%, 전 세계 경제 성장의 50%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영향력이 큰 편이다. 브릭스 5개국 간 중앙은행디지털화폐 자동교환 시스템 혹은 아예 통일 브릭스디지털화폐가 탄생하면 그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산유국 디지털통화의 맹주를 자처하고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가 공동으로 개발한 중앙은행디지털화폐는 출시를 목전에 두고 있다. 산유국 디지털통화가 별도로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탈(脫)달러 움직임은 여러 경제 블록별로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 브릭스 암호화폐가 순조롭게 순항을 시작하면 이어 중남미연합과 아프리카연합 같은 지역 암호화폐도 등장할 수 있다. 결국 기존의 법정화폐와 중앙화 디지털화폐들이 세력 다툼을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입지가 많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통화의 ‘분권화와 다양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각국 중앙은행이 추진 중인 디지털화폐는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화폐다. 그런데 국민들 입장에서 자신들의 계좌가 추적당한다고 생각하면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디지털화폐의 운영체계를 이원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곧 중앙은행에서 상업은행으로 디지털화폐를 보낼 때는 추적 가능한 디지털화폐를 보내지만, 상업은행과 개인 또는 기업 간 거래에는 추적 불가능한 익명성이 보장된 암호화폐 시스템과의 연동을 검토하고 있다.
▲ 중국은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다. 지난해 6월 중국 교통은행 관계자가 디지털화폐를 테스트하고 있다. / 뉴시스
추적 기능의 이원화로 반발 무마
중국의 경우, 이원화 시스템을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중앙은행이 초당 30만건 이상 거래되는 소매시장까지 관여할 경우 통화 관리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액거래에서 개인의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다만 이는 무제한의 익명성 보장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익명성’ 보장을 의미한다. 곧 일정액 이상의 큰 금액의 거래는 실명 전자지갑을 통해 거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마약·도박 등 불법거래 자금으로 의심될 경우 정부는 영장을 발부받아 거래를 추적할 수도 있다. 곧 정부는 가능한 한 국민들의 거래 익명성을 최대한 존중하지만 필요 시에는 개인 거래내역을 추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빅브라더 사회의 본격적 도래다. 중국뿐 아니라 다른 중앙은행들도 비슷한 종류의 디지털화폐 결제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6개국 이상의 중앙은행이 암호화폐와 연동하여 디지털화폐를 개발 중이다.
달러인덱스와 관련된 6개국 모두 개발 중
중국 디지털화폐 테스트 발표를 계기로 디지털화폐는 세계 중앙은행들의 ‘핫이슈’로 떠오른 상태다. 브릭스 5개국 디지털화폐 공동연구에 이어 2020년 연초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 일본은행(BOJ), 캐나다은행, 스웨덴중앙은행, 스위스국립은행이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에 대해 공동연구 그룹을 만들기로 했다. 그 결과 디지털화폐는 달러인덱스와 관련된 6개국 모두가 개발하고 있다. 상기 6개국이 공동으로 사용 가능한 디지털화폐가 탄생하게 된다면 달러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기축통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암호화폐가 화폐의 본원적 기능을 미처 완비하지 못한 틈을 타 각국 중앙은행의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디지털화폐가 화폐 역사의 전면에 부상 중이다. 이와 함께 민간 섹터의 스테이블코인들도 먼저 시장을 장악할 준비를 하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2019년 페이스북의 ‘리브라 백서’ 발표 △JP모건체이스은행의 ‘JPM코인’ 발표 △2020년 중국 중앙은행의 디지털위안화 테스트 시작 등으로 세계는 지금 민간 스테이블코인과 각국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2021년 1월 국제결제은행(BIS)이 65개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 세계 중앙은행 86%가 디지털화폐를 연구하고 있으며, 그들 중 20%는 중단기, 곧 3년 이내 발행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반면 60%는 중단기적 발행 가능성이 낮다고 답했다.
바이든, 중앙은행디지털화폐 검토 지시
그간 방관자적, 중립적 자세를 견지했던 미국도 입장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지난 3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암호화폐의 장·단점을 평가하고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연구개발을 검토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백악관은 “암호화폐 규모가 5년 전 140억달러에서 2021년 11월 기준 3조달러를 넘었다”며 “미국인의 16%가 암호화폐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정명령에 따라 미 정부 기관들은 암호화폐 관련 소비자 보호, 투자자·금융기관 위험성, 암호화폐 접근성의 평등 정도를 조사할 전망이다.
중앙은행디지털화폐는 종이화폐와 달리 추적이 가능한 화폐다. 이에 따라 빅브라더의 출현을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향후 디지털화폐가 대세가 되면 그간 지하에 잠겨있던 종이돈들이 환전을 위해 모두 은행으로 들어가 소유주의 실명을 밝혀야 할 수도 있다. 자연스레 화폐개혁의 성격을 띠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차제에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단위 변경)’ 가능성도 제기된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가치는 그대로 두고 화폐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1000원을 1원(또는 1환)으로 낮추는 식이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1원은 기존 1000원의 가치를 갖게 된다. 이는 화폐단위 변경으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화폐개혁의 속도가 빨라짐을 의미한다.
홍익희 /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