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章 조부(祖父)는 창천 하늘을 나는데 손자(孫子)는 걷기도 전에 주저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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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일사임쌍성(天有一師臨雙聖)
인중삼공제사마(人中三公制四魔)
하늘에 일사(一師)는 쌍성(雙聖)을 내려다보고
사람 중엔 삼공(三公)이 있어 사마(四魔)를 누르다.
당금 천하무림의 판도는 이러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듯이 정파(正派)가 있고, 사파(邪派)가 있으며, 영웅호걸(英雄豪傑)과 기인협사(奇人俠士)가 천하를 주유(周遊)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사마외도(邪魔外道)와 흉신악살(兇神惡煞)의 무리들이 횡행하였다. 그 중에도 유난히 뚜렷하여 만인의 위에 받들어지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앞의 대련(對聯)에 일컬어진 열 사람이었고, 무림인들은 그들을 무림십대고수라고 불렀다.
─`천유일사(天有一師), 하늘에 한 스승.
천(天)은 하늘이지만 또한 황궁(皇宮)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늘, 황궁에 거하는 스승.
바로 내시의 몸으로 사례태감(司禮太監), 동창대영반(東廠大營班)을 거쳐 국선공(國宣公)의 작위(爵位)까지 받은 전(前) 황사(皇師) 매요신(梅堯臣)이 무림십대고수의 수좌(首座)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히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권력의 정점을 누렸고, 황궁제일고수(皇宮第一高手)로 기공(氣功), 병기(兵器), 권장지각(拳掌指脚)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의 무공에서 당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웠으니 천하제일고수라는 이름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그의 올해 나이 백십오 세.
다른 별호는 사양하고 황사(皇師)로 불리기를 고집하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 내시의 신분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을 최상의 자리를 한때나마 차지했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라고들 했다. 그가 쌍성을 내려다본다는 것이 첫 번째 글귀의 뜻이다.
─`쌍성(雙聖), 두 성인.
황궁이 세속 권력의 정점이라면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는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이다.
그래서 소림사(少林寺) 방장대사(方丈大師)와 무당파(武當派) 장문진인(掌門眞人)은 누가 그 자리에 앉든 당연히 무림 십대고수의 두 자리에 떠받들려져 온 것이다.
당금 무림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현(現) 소림장문인 대보선사(大保禪師)는 학승(學僧) 출신이고, 현(現) 무당장문인 육수정진인(陸守靜眞人)은 말 그대로 도인(道人)이라 세속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 소림과 무당이 각기 대표하는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과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의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하나 아무도 확인해 보지 않았고, 감히 소림사나 무당파를 찾아가 확인해 볼 사람도 없으니 소문은 단지 소문으로 그칠 따름이었다.
─`인중삼공제사마(人中三公制四魔), 사람 중엔 삼공이 있어 사마를 누른다.
앞의 셋에 비해 비교적 자주 얼굴을 보이는 인물들이 나머지 일곱 고수였으니 삼공(三公)과 무림사마(武林四魔)가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련에도 나타난 바, 서로 적대적이었다.
삼공의 첫 번째는 형산파(衡山派)의 원로인 뇌공(雷公) 원굉도(袁宏道)였다.
사람들은 형산파에 원굉도가 있다는 것은 무림 천년사(千年史)의 기적이라고들 했다. 당금 구대문파의 말석에 간신히 매달려 있고, 성세에 따라서는 가끔 구대문파에서 빠지기도 하는 형산파의 초라함에 비할 때, 기형적으로 강한 고수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원굉도로 인해 형산파는 구대문파의 하나가 된다는 말까지 있으니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형산파는 별로 이렇다 할 독문절기(獨門絶技)가 없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고작 해야 초대 조사(祖師)가 남긴 원공권(猿公拳), 원공검(猿公劍) 정도가 절기로 일컬어지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강호에서 행세하기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절정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무공들이었다.
그러나 원굉도의 무공은 달랐다. 그는 족히 무림십대고수의 위치를 차지할 만큼 강했다. 단지 그 혼자만 강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원굉도는 형산파 초대 조사의 직계후손으로 어려서 기연(奇緣)을 만나 물경 삼 갑자(三甲子)에 이르는 엄청난 내공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전설상에만 내려올 뿐 실제로는 가능치 않다고 알려졌던 형산파의 장법인 일격휴(一擊休)를 익힐 수 있었고, 형산파 사상 최고수의 지위에 올랐다. 문제는
‘한방[一擊]이면 끝난다[休]’는 뜻의 엄청난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은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이 일격휴가 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익히지 않으면 시전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 있었다.
혀가 부드러워 삼 갑자의 내공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지, 사실 삼 갑자, 백팔십 년이란 보통 사람이면 그 나이 먹도록 살아 있지도 못하는 장구한 세월이다. 그런 세월 동안 매일같이 내공을 들이파고 있어야 쌓이는 기운이 삼 갑자의 내공이니, 기연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꿈도 꾸지 못하는 경지인 것이다.
그런 내공이 없으면 일격휴를 익히지 못하고, 혹 그런 내공이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굳이 일격휴를 익힐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단계를 밟아 내공을 그 수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면 이미 다른 무공의 달인(達人)이 되어 있을 터인데 굳이 그것을 익힐 이유가 있을 것인가.
물론 없었다.
왜 그의 별호가 뇌공인가?
하늘의 번개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아무데에도쓸모는 없다. 사람 중에는 원굉도가 꼭 그랬다. 그는 형산파에서 지닌바 무공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못하고, 또 배우려는 사람도 없는 유일한 장로(長老)인 것이다. 뇌공이라는 별호는 그의 이런 점을 풍자한 별호였다.
본인이 그 별호에 숨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암흑장천에 번뜩이는 번개처럼, 사막에 홀로 우뚝 선 바위산처럼 멋은 있으나 쓸모는 없는 노인이 되어 홀로 늙어 가고 있었다.
삼공의 두 번째 인물은 금문공(金門公) 맹방평(孟方平)인데, 뇌공 원굉도가 지닌바 무공 때문에 특이한 인물이라면 그는 직업 때문에 특이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금문(金門)은‘관부(官部)’를 의미하는 것. 금문공 맹방평은 바로 관부의 인물, 그것도 범죄자를 잡는 포두(捕頭)인 것이다.
원래 무림인이라 하면 무공이 강한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따로 직업이 있는 사람이 무공까지 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을 해 먹고 살 것을 버노라면 무공수련을 할 시간이 없기 마련이고, 수련 시간이 짧아지면 그만큼 무공이 강해진다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남의 집 하인 노릇을 하면서도 온갖 노력을 다해 고수가 된 사람도 있다곤 하지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아 가며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고수가 된 수에 비하면 없다고 해야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직업상 무공이 강하고, 또 강해야 되는 사람도 있으니 전쟁을 직업으로 삼는 군부(軍部)의 인물들이 그렇고, 범죄자를 잡아야 하는`
─`꼭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 흉악범들은 칼을 빼 들고 덤비기도 하니 포두도 죽지 않을 정도만큼은 강해야 할 것이다`
─`포두가 그렇다. 그리고 그것도 직업이라고 인정한다면 녹림도(綠林徒), 즉 도적들도 그런 부류에 들어갈 것이다. 포두와 마찬가지로 꼭 싸워야 재물을 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 재물을 목숨보다 귀중하게 생각하는 자들을 털기 위해서는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맹방평은 그 중 포두였다.
복건성(福建省) 창포현(滄浦縣)의 노포두(老捕頭)이자, 약관 열여섯에 포두가 되어 올해 나이 백 세가 넘어가도록 포두 생활을 했으니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동안 포두로 생활하는 사람이 그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오랜 세월 포두 일을 했으면 충분히 승진하여 대포두(大捕頭)나 총포두(總捕頭)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 포두였고, 죽는 날까지 포두로 살기를 원했다.
한때, 복건성의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가 그를 복건성 총포두로 승진시키려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미 무림십대고수의 일 인이었던 그를 일개 포두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직무유기(職務遺棄)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맹방평이 단지 무공만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사건에 대하여서는 예리하기 그지없었으며, 소위 몇 대 고수 운운하는 이름을 지녔으면 당연히 부릴 수도 있는 교만함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완벽한 포두였다. 그런 사람이 총포두가 되는 것은 누가 봐도 옳은 인선(人選)이었다.
그런데 그는 상부에서 총포두의 임명장(任命奬)이 오자 사직해 버렸다.
그리고 매년 있는 포두 모집에 다시 지원했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오직 포두로 남겠다는 뜻을 단호하게 표명한 셈이었다. 그는 결국 오늘날까지 포두로 남아 있었고, 그 후로 다시 그를 승진시키려는 시도는 없었다.
사마와 삼공이 적대적인 이유도 사실은 이 금문공 때문이라는 것이 중평(衆評)이었다.
무림에서 정(正)과 사(邪)가 양립(兩立)하지 못한다지만 보통은 그냥 서로를 인정하며 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포두와 범죄자는 절대 양립할 수가 없다. 포두의 눈에 인간은 범죄자’와 ‘잠재적 범죄자’의 두 종류로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포두가 보기에는 사파의 무리, 특히 사마와 같은 자들은 무림고수이기 이전에 범죄자에 불과하며, 맹방평은 포두인 것이다. 그러니 맹방평과 무림사마의 사이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평생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마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일이었다.
삼공의 마지막 사람은 진자앙의 조부, 천기공(天機公) 진자룡(陳紫龍)이었다. 천기(天機)라는 말은 ‘하늘이 만들어 낸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말이 사람에게 주어지면 극찬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것이 없었다.
사실 진자룡은 여러모로 완벽한 인물이었다. 명문가문 출신에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고수, 젊어서는 용감한 협의지사(俠義志士)였으며 나이 들어서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성품의 무림명숙(武林名宿)이었다.
아들, 며느리도 고수요, 손자, 손녀 다 있으니 가정도 다복하다 할 수 있고, 십대고수의 하나이니 무림에서 차지하는 지위도 낮지 않은데다가 형제들이 관계(官界)와 상계(商界)에 진출해서 그쪽 방면의 영향력 또한 적지 않았다. 이리저리 부족한 데라곤 없는 사람이 그였던 것이다.
그가 가진 무공내력 또한 그러했다.
곤(棍)은 만병지모(萬兵之母)에 곤조도사(棍祖刀師)라고도 했다. 즉, 모든 병기는 몽둥이[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곤에는 모든 병기들의 쓰임새의 원형(原形)이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간직되어 있다.
창검(槍劍)처럼 찌를 수도 있고, 도(刀)처럼 베어 갈 수도 있다. 퇴(槌)처럼 칠 수도 있고, 봉(棒)처럼 때릴 수도 있다. 그래서 병기를 배울 때는 먼저 곤에서부터 시작해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 법이었다.
진자룡은 바로 그 곤을 주무기로 삼고 있었다. 단지 평생 곤만을 무기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는 곤에서 출발해 만병(萬兵)을 섭렵한 뒤 다시 곤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곤을 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즉, 굳이 손에 익은 무기가 아니라 아무것이라도, 의자 다리 하나만 잡아도 능히 천만인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진자룡이었으니, 이른바‘손에 지푸라기 하나만 들어도 천하무적’이라는 말이 그를 위해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러니 적어도 병기에 관해서는 그가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일부 호사가(好事家)들은 당금 무림십대고수의 수좌인 황사 매요신보다 오히려 그가 더 강할지도 모른다고 숙덕거리기도 했다.
사마(四魔)는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사실은 그들의 정확한 이름이 알려진 적조차 없었다. 그 사마의 첫 번째가 불같이 급하다’라는 뜻의 별호를 가진 대력귀왕(大力鬼王) 급여화(急如火)였다.
그는 이름처럼 성질이 급하고 포악하여 말보다는 주먹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 자였다. 불행히도 그의 무공이 고강하고 주먹이 단단하여 죽고 다친 자가 부지기수였으니, 그런 그가 무림사마 중 일 인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자신, 달리는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 불릴 만큼 무공이 고강한자인데, 거기다가 그만큼이나 포악한 여덟 의형제들을 모아 강북제일(江北第一) 방파(幇派)인 화륜맹(火輪盟)을 만들고 맹주로 군림하고 있으니, 아무도 그를 건드리려는 자가 없었다.
그들 아홉 의형제를 구대흉신(九大兇神)이라 부르는데 그 대형이기도 했다.
사마의 두 번째로 꼽히는 사람은 이발불요(二發不要) 운리무(雲裏霧)였다.
그는 천하제일의 자객(刺客)이다. 이름 그대로 위로는 구름이 덮고, 아래에는 안개가 감싼 듯하여 신출귀몰(神出鬼沒)하게 사람을 죽이고 숨어 버리니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 관해서 단 하나 알려진 것은 자객행(刺客行)의 도구가 활이라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은 자의 이마에 꽂혀 있는 화살 한 발이 그를 말해 주는 유일한 단서였다.
어디서 어떻게 쏘았는지도 모르는 그 화살 한 발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천하제일 자객 운리무는 천하제일의 명궁(名弓)이기도 하며, ‘이발불요(二發不要)’, 즉 ‘두 번 쏠 필요가 없다’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쾌여풍(快如風)은 천하제일의 도둑이다. 무림이란 조금은 이상한 세계라 도둑이나 거지, 심지어 살인강도조차도 관대하게 보아 주는 법인데 이 사람, 쾌여풍만큼은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자로 낙인이 찍혀 무림사마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는 처음엔 고금제일이라 일컬어지는 경공술(輕功術)과 사천당문(四川唐門)을 무색케 하는 절묘한 암기술(暗器術)로 도둑질을 했었다. 그때까진 그도 신투(神偸) 일진풍(一塵風)이라는 제법 운치 있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무림사마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소위 돈 맛을 알고서부터라고 했다. 원래 도둑질이라는 것이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인 데다가 재능이 있고 보니 욕심은 점점 커지고, 돈이 없어서 못 쓰지, 있기만 하면 쓸 일은 수두룩한 것이 세상이었다. 그러니 그가 도둑질에서 강도로, 나중에는 혼자보단 여럿이 낫다고 떼강도 단을 조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진행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지금 강남북을 휩쓰는 최강의 강도단, 광풍사(狂風社)의 대두목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무림사마 중 가장 비난을 받는 인물은 영리충(伶蟲)이었다.
세상에는 살인보다도, 강도보다도 더 비난받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 행동이 세인의 도덕적 감정을 예민하게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강간(强姦)과 같은 일이 그것이었다. 강호에서 색마(色魔)가 살인마(殺人魔)보다 더욱 비난을 받고, 때로는 온갖 치사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영리충은 색마(色魔)였다. 그것이 그가 무림사마 중 가장 비난을 받는 이유의 첫 번째였다.
그가 비난을 받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젊은 모습 그대로.
아무리 대단한 화화공자(花花公子)라고 하더라도 그 전성기는 스물에서 마흔까지 청년기를 전후한 이삼십 년이 고작이기 마련인데 영리충은 주안과(朱顔果)라도 먹었는지 장장 백여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화화공자의 짓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더 흉악하고, 사실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영리충이 그 긴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원한을 맺고 다녔어도 아직 단 한 사람도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사 매요신과 겨룰 수 있는 인물로 삼공 중 진자룡이 손꼽힌다면, 사마 중에서는 유일하다고 할 정도의 고수가 바로 그 영리충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한 사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흉악한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벌을 받지 않고, 하물며 불로장수(不老長壽)라는 최상의 복까지 누리고 있는데도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영리충은 무림사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고 있었다.
이렇게 혹은 검(劍)으로 혹은 도(刀)로, 또 혹은 권(拳)과 장(掌)으로 무림십대고수가 일세를 풍미한 지 근 백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과 같은 말은 세속(世俗)에서는 진리처럼 받아들여져도 이들 십대고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고 중원제일, 혹은 천하제일이라는 엄청난 이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법이었다. 무림의 세계도 이 법칙에는 예외가 아니니 무림십대고수를 정점으로 하는 백년간의 균형 잡힌 시대도 언젠가는 막을 내릴 것이었다. 십대고수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불사의 신공을 익히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들은 세월이라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 앞에 천천히 시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무림의 관심사는 십대고수가 언제, 어떻게 자신들의 자리를 내놓게 될 것인가, 그 뒤는 누구의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 대의 무림십대고수는 당대 무림십대고수의 문하에서 나올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 즈음에 진자앙은 여섯 살이 되었다.
진자앙이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이 처음 드러난 것이 그날, 진자앙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생일이었다. 아마도 이화복령사의 부작용으로 짐작되는 그의 이상한 체질이 처음 드러난 날도 그날이었다.
그 두 가지는 같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났다.
2
진자앙이 여섯 살이 되던 그날은 진가장의 후계자가 처음으로 무공에입문하게 되는 날이었다.
진자앙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무공입문의 길에 들어섰을 때,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진가장 비전의 내공심법인 오칠비결에 따라 심장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원래‘태청존신연기오시칠후결’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심법은 할아버지인 진자룡이 젊었을 때 우연히 만난 도사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도사는 그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구결을 알려 준 뒤 어디론가 깊은 산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이런저런 경로로 알아 본 바에 의하면 원나라 때 그 성가를 드높였던 전진교(全眞敎)의 고인(高人)인 듯했다.
전진교는 명나라로 접어들며 천사도(天師道)니, 모산파(茅山派)니, 혹은 용호궁(龍虎宮) 등등의 여러 종파로 나뉘면서 무림세력으로서의 성가는 사라져 버렸지만, 가끔 강호에 나타나곤 하는 옛 무공은 그 위력과 정통성을 알려 주곤 했는데, 진자룡이 전수받은 내공심법은 전진교의 정통 심법이었던 것이다.
내공심법, 혹은 비결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한 도인체조(導引體操)에서부터 단전호흡법(丹田呼吸法), 기공을 연성하거나 강기류( 氣類)의 특별한 공능을 얻을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련법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고 복잡다기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그 안에 가짜, 엉터리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름만 그럴듯해서 멋모르고 내공수련입네 하고 따라 하다가는 속에서부터 망가져 병신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명망 있는 각 명문정파의 공인된 내공심법을 알아주는 법이었다. 도가(道家)면 도가, 불가(佛家)면 불가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내공심법이요, 신공기공(神功奇功)이 그것이었다. 또한 적어도 몇 백 년 동안 검증된 것들이 그것이었으니. 단지 대부분의 것들이 말 그대로‘비전(秘傳)’이라 자파의 사람들에게가 아니면 전해지지 않으며, 그것도 무공의 성취 단계와 문파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더 알려 주곤 하는 것이다.
진자룡은 그런 정통의 내공심법 중에서도 정통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전진파의 신공을 얻은 셈이니 운이 좋다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내공이 진보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련하는 데에 큰 위험이 없으며, 꾸준히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더욱더 큰 효능을 얻게 되는 수련법 중의 하나가 그것, 오칠비결이었다.
“오칠비결은‘가(呵)’희( )’‘취(吹)’‘호(呼)’‘오()’담( )’합( )의 일곱 구결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내공입문은‘백수(白壽)’, 그러니까 아흔아홉의 나이에도 정정한 할아버지 진자룡이 구결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섯 살 아이라기에는 제법 큰 체격을 가진 어린 진자앙은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원래는 알아듣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하는 것이지만, 여섯 살 어린아이라 해도 진자앙은 똑똑하고 영민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대충 그 뜻은 짐작하고 있었다.
거기에 자상한 할아버지는 아이가 알아듣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가’ 자 구결을 운용할 때는 심장에서 입으로 한 마리 주작(朱雀)이 나오고, ‘희’일 때는 위장에서 정수리로 아홉 마리의 백학(白鶴)이 날아 올라가며, ‘취’일 때는 신장에서 귀로 현무(玄武)가 나오고, 호’일 때는 비장으로부터 누런 사자(獅子)가 나오느니라. ‘오’일 때는 간에서 코로 하얀 호랑이가 나오고,‘담’일 때는 뇌에서 눈으로 기린(麒麟)이 나온다. 마지막으로‘합’일 때는 앞서 말한 여섯 영물이 단전(丹田)으로 모여 한 마리 청룡(靑龍)을 이루나니, 이것이 심법을 완전히 일주천(一周天)했을 때 생기는 일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식(調息)을 할 때 그렇게 상상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가’‘희’‘취’‘호’‘오’‘담’의 여섯 구결은 하나같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탁한 기운을 뿜어 내고, 본신의 참된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이며, 마지막 ‘합’ 자 구결로 그렇게 끌어올린 기운들을 거두어들여 내공으로 모으는 것이다.”
그것이 일주천이지만 처음에는 그 일곱 가지 과정을 따로따로 해야 했다. 각각의 구결을 통해서 진기를 끌어올리는 수련부터 한 뒤, 그것이 능숙해지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공을 만들게 되는 것이었다.
진삼산이 보충 설명을 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열심히 수련하면 미미한 열기 같은것이 심장을 감돌아 나와 핏줄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미미한 열기가 뜨겁게 느껴지면 구결은 완성이야. 그때 조심스럽게 조식을 마치면 된다.”
진삼산은 거기에 덧붙여서 미미하나마 열기가 만들어지는 데에 자신은 사흘이 걸렸고, 그것이 뜨거워지기까지 석 달이 걸렸지만, 그것으로도 고금에 보기 드문 빠른 성취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첫날부터 잘되지 않는다고 서둘지 말라는 아버지로서의 충고였다.
충고는 필요가 없었다.
진자앙은 눈을 감고 구결을 외기 시작한 지 촌각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심장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조금 이상했다. 아버지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그는 조금 이상하다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진자룡과 진삼산은 기겁을 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의 전신이 불에 달군 쇠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성취가 빨라도 그렇게 빠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진기(眞氣)를 만들고, 그 진기를 주천(周天)시킴으로써 내공을 형성하는 것이 심법의 기본이라 할 때, 지금 진자앙이 보인 모습은 내공이 형성된 후에나, 그것도 상당한 내공이 형성된 뒤에나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주화입마(走火入魔)라고 생각하기에도 너무 빨랐다. 무슨 주화입마가 무공에 이제 갓 입문한 아이에게 찾아온단 말인가.
그렇게 진삼산과 진자룡이 생전 처음 보는 괴사(怪事)에 황당해 하고있는 동안 진자앙은 위험한 지경에 들어가고 있었다. 진자앙의 몸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는 것이다. 옷이 타는 연기였다.
안력이 뛰어난 진자룡은 진자앙의 몸이 잔뜩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하얗게 빛나며 그 열기로 옷을 태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혈맥을 짚어 봤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내공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손자의 몸을 조사해 보았었다. 혹시라도 이화복령사의 피와 내단이 내공수련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자의 몸 안에는 이화복령사의 영향으로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몸에 열이 많고, 나이에 비해 체구가 커서‘혹시 이화복 령사의 영향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영향이 그것 이상의 어떤 것으로도 나타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소위 영약을 먹고 막강한 내공을 얻어 어린 나이에 무림에 위명을 날린 인물치고 나중에 잘됐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금 무림의 십대고수만 해도 특별한 영약을 먹어 강해졌다는 사람은 없었다.
정도(正道), 사도(邪道)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고련에 고련을 거듭해서야 오늘의 성취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천부의 재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진자룡의 생각이었다. 영약과 같은 것은 그런 면에서 우연히 얻어지는 행운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수련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손자인 진자앙도 어떤 영약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그였다.
그리고……!
‘잘될 확률보단 잘못될 확률이 더 높으니……!’
약을 먹고 잘되는 경우보다는 잘못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약 먹어서 정상이면 그게 잘된 것이다’라는 속담도 있고, 지금 그의 손자가 당한 처지가 그렇지 않은가!
진자룡은 손자의 내공수련을 더 진행시켜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중단시킬지가 고민이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혹시라도……!
‘어쩌면 천고에 드문 기연을 내가 방해하는 것인지도……?’
혹시 이화복령사는 그의 손자의 몸에 큰 이득을 남겨 준 것인지도 몰랐다.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큰 기운이 손자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지금 내공수련을 통해서 격발되었는지도 몰랐다.
잘하면, 잘만 하면 그 엄청난 기운이 모조리 내공으로 전화되어 몸속에 쌓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도 욕심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연기가 걷혔다. 진자앙이 몸에 걸친 옷가지가 모두 타버려 더 이상 연기를 낼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진삼산이 소리 죽여 진자룡을 불렀다. 진자앙이 하얗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진자룡은 얼굴을 굳히고 진자앙의 앞에 가서 앉았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어느 쪽으로 하든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입을 절반쯤 벌리고 가볍게 숨을 토해 보거라!”
낮은 목소리였지만 진자앙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운기를 마치라는 신호.
그러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진자앙이 그냥 내버려두고 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이 기는 했지만 안정적으로 흐르고 있던 열기였다. 그러나 이제 의식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자 열기는 갑자기 둑을 무너뜨린 격류처럼 거세게 흘러 진자앙의 온몸을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이 강한 힘이었다. 진자앙의 몸은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처럼 안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자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진자앙을 향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내민 손바닥으로 기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운기를 멈추라고 한 것은 스스로 기의 흐름을 멈출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진자앙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진자앙의 힘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공으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아니었다. 진자앙의 체내에 있는 원인 미상의 힘은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통제 할 수 없는 힘이 체내에 있다는 것은 주화입마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진자룡은 앞으로 내민 두 손을 천천히 진자앙의 가슴팍에 붙였다. 그의 본신 내공으로 진자앙의 체내에 돌아다니는 열기를 제어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치이익`─`!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에 물이 떨어지면 날 듯한 소리가 진자앙의 가슴팍과 진자룡의 손바닥 사이에서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진자앙의 몸에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격발되어진 진자룡의 호신강기(護身 氣)가 내는 소리였다. 물론 오칠비결을 익힘으로써 얻어지는 수많은 공능 중 하나에 의한 것이었다.
손자의 가슴팍 전중혈(田中穴)에 손을 댄 진자룡은 놀란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손자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이다.
열기는 용암처럼 뜨겁고, 그 기세는 말 그대로 ‘미친 말’과 같았다.
아무런 법칙도 방향도 없이 마구 날뛰고 있는 이 열기를 잠재우지 않는다면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속 구결을 외어라!”
그는 나직하게 손자에게 말하고 진기를 손자의 몸에 주입했다. 그 자신의 진기로 날뛰는 열기를 제 길로 이끌어 보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과한 욕심이었음이 금세 드러났다. 진자앙의 몸속에서 날뛰는 열기는 백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쌓아 온 그의 공력으로도 제어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곳에 몰아넣기라도……!’
열기를 손자의 몸 한곳에 몰아넣기라도 해야 이후 제한적이나마 내공을 익힐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진자룡은 손자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열기
를 통제하는 것조차도 어렵다는 것을 곧 알아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밀어 내려 한다고 할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약간이라도 힘이 세다면 당연히 밀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단지 약간 힘이 센 것만으로는 안 되고, 완전히 상대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진자앙의 몸 속에 돌아다니는 기를 통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원리리라.
진자룡의 내공이 진자앙의 몸 속 열기보다 강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자룡의 내공이 진자앙의 그것보다 월등히 강해서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있어야 했다. 지금 그것이 안 되고 있었다.
진자룡의 이마에 땀이 솟구쳤다. 기실 내공을 쓴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땅을 몇 십자 파느라 힘이 들어 흘리는 땀과 내공을 소모해서 흘리는 땀은 그 성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내공을 수련한 기간이 길수록, 그렇게 해서 얻어진 내공의 조예가 깊으면 깊을수록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인데, 지금 진자룡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위험신호였다. 진자앙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열기에 밀리고 있는 것이
다.
안절부절못하며 보고 있던 진삼산이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했다. 진자룡의 등에 손을 대고 자신의 진력(眞力)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격체전력(隔體傳力)이라 불리는 행동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도 서로의 손을 잡거나 몸에 손을 대거나 하면 기(氣)가 서로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한 사람의 기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내공수련을 한 사람들은 이것이 보다 강하고, 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진자룡과 진삼산 부자는 내공의 깊이와 크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성질의 내공을 지녔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성질의 내공을 지닌 사람들보다 기를 주고받기가 더 쉬웠고, 도움 되는 면 역시 적지 않았다. 같은 성질을 지닌 기(氣)끼리는 친화력(親和力)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자룡은 부쩍 힘을 얻어 진자앙의 몸 속에 기를 쏟아 부었다. 방금까지 전혀 가닥이 잡히지 않던 열기가 그제야 약간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력으로도 열기를 제 길로 이끄는 것도, 또 내공수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곳에 몰아넣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참 만에 진자룡은 손자의 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열기는 끌어올려지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자앙의 몸 구석구석으로 분산되어 숨어 버렸다. 다시 내공을 끌어올리려 하면 열기도 다시 준동(蠢動)할 것이다.
결국 그들 삼대는 오늘 아무것도 이루어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앞으로도 진자앙은 내공을 익히지 못하고 말 것이다.
“가서 쉬게 하거라. 그리고……!”
진자룡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공을 모르는 무가의 후계자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모험을 해서 손자를 잃는 것보다는 그쪽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내공은 가르치지 말고, 호신술(護身術)이나 몇 수 가르쳐 보거라!”
그렇게 해서 진자앙의 내공입문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단지 그것 뿐이라면 무공에 소질이 없다고는 못할 일이었다. 진자앙의 경우는 장애가 있어 내공을 익히지 못하는 것뿐이지 무공에 소질이 없다고 표현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랬다.
그것은 진자룡과 진삼산의 은근한 바램이기도 했는데, 그 바램이 깨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무얼 배워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세상에 가끔은 있는 법이다.
진자앙이 바로 그랬다.
3
“예전엔 그런 일을 믿지 않았지만……”
사방득은 말을 해놓고도 왜 예전엔 그런 일을 믿지 않았던가 의문스러워졌다. 어떤 일에 보통 사람보다 특별히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일에 보통 사람보다 특별히 소질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런데 왜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믿지 못했던 것일까. 어쨌든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 진가장의 후계자가 무공엔 통 소질이 없다는 게 사실인가 보더라.”
사방득은 말을 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무공에 천부적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통 소질이 없어 구제불능인 사람도 있다. 그거야 하늘이 내린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 그 당연한 사실이 영 믿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진가장의 후계자’가 무공에 소질이 없다는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동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문, 역대에 걸쳐서 숱한 영웅호걸을 배출했고, 드디어 당금무림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라 할 무림십대고수의 하나를 배출한 그 광동 불산의 명문 진가장이 무공에 소질이 없는 후계자를 낳았다는 것이 영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방득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문제의 그 후계자는 나와도 아주 인연이 없지는 않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의 그 후계자’가 태어난 날 등가산을 뒤집었던 그 사건을…… 소문에 의하면 그때 약을 잘못 먹은 후유증으로 내공도 익히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 소문이 맞다면, 아마도 맞을 가능성이 높지만, 진가장의 후계자가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된 것, 그리고 오늘 그와 그의 아들이 여기 진가장에 오게 된 것은 모두 그날의 일 덕분이었다.
덕분이라……!’
덕분.
진가장의 후계자에겐 안 된 일이었지만 그의 아들에겐 이보다 좋은 일이 없게 되었으니 덕분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어쨌든 네게는 다시없는 기회인 셈이다.”
사방득은 그의 옆에 서 있는 아들, 사문기(史雯麒)를 내려다보았다.
사문기 역시 아이답지 않게 깊고 총명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렷한 눈동자와 반듯한 콧날, 널찍한 이마와 하얀 살결은 광동 학성의 명문 사가장의 후계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용모였다.
올해 나이 열둘. 진가장의 후계자와 같은 나이였다. 그리고 이제 그 무공에 소질 없는 진가장의 후계자를 대신해서 진삼산의 제자가 될 다섯
명의 소년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림십대고수 중 하나, 그리고 그 십대고수 중 가장 정교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소문난 천기공 진자룡의 진전을 물려받게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잘된 일이지.’
사가장이 비록 유서 깊은 가문이라 하나 진가장에 비하면 한참이나 아래요, 진자룡의 무공에 비하면 무공도 아니었다. 아들이 진자룡의 무공을 잇고, 그래서 결국 진가장의 정통을 물려받는다면 그와는 달리 천하를 무대로 활동하는 대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에게는 평생 두 번 오기 힘든 기연(奇緣)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진가장의 후계자…… 진자앙이라 했나? 그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사방득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심중으로는 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진자앙에게 미안한 감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한 달 전의 이야기였다.
유명한 일이지만 진가장에는 딸이 일곱이나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중 아래의 셋을 제외하고는 모두 출가(出嫁)했다.
장녀 진홍아(陳紅娥)는 삼수 동가장, 둘째 진주아(陳朱娥)는 사회 운양문, 셋째 진황아(陳黃娥)는 이웃 서초산(西樵山)의 비룡문(飛龍門), 그 리고 넷째 진초아(陳草娥)는 조금 멀리 시집을 가서 강소성(江蘇省) 양주(楊州)의 명문, 악씨세가(岳氏世家)의 며느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대가문에 진가장에서 보낸 서찰이 도착한 것이 바로 한 달 전이었다. 진삼산의 제자 될 인재를 구하는 바, 이왕이면 약간이라도 연원이 있는 사대가문에서 구하고 싶으니 적합한 인재가 있으면 추천 바란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진삼산의 제자라는 것이 결국엔 천기공 진자룡의 후계라는 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들 사대가문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기연, 기연 하지만 기연 중에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보다 나은 기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당금 강호에 진자룡보다 더 훌륭한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급거 집안의 나이 어린 아이들 중에 진자룡의 후계가 될 만한 인재를 선발하고 명문자제로 부끄럽지 않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그들 사대 가 문의 큰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사대 가문 말고도 한 군데에 더 똑같은 서찰이 간 곳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사가장이었다.
사가장은 원래 진가장과 교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돈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고, 다른 인척 관계도 없으니 사대가문에 비하면 친밀함의 정도에 있어서 한층 떨어진다고 해야 했다. 그런데도 인재를 구하는, 말하자면 추천장(推薦狀)이 온 것이다.
혹시 배달이 잘못되었나 해서 은밀히 알아 본 바, 전일 진자앙 실종 사건 때 사방득이 보여 준 일처리의 방식에 감명 받은 진삼산이 특별히 사가장을 지정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원래 무가(武家)의 후계는 가문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문파 내의 비결이 누설될까 봐 사위조차 성을 바꿔 데릴사위로 데려오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은 그 중에도 심한 경우라고 빼놓고서라도 절강(浙江)의 남궁세가(南宮世家), 하북(河北)의 팽씨세가(彭氏世家), 진주(晉州)의 언가문(彦家門) 등등이 다 같은 성씨를 가진 후손 중에서 후계를 구하지 타성 받이를 들이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가장이 그 전통을 깨려 하고 있었다. 자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진자앙이라는 정통의 후계자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자룡의 무위를 흠모하는 천하의 무림인들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인 셈이었다. 그래서 사방득도 자기의 막내아들 사문기를 데리고 진가장으로 온 것이다.
사방득은 아들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이제 본심을 얘기할 때였다.
“알다시피 이번에 진가장에는 너 말고도 네 명의 인재가 더 온다. 그렇게 다섯이 진 대협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진정한 후계자는 그 중 하나다.”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사방득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말을 반복했다. 사실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고, 말하지 않을 것도 아니었지만 스스로에게 확신이라도 시키는 듯이 반복하는 것이다.
분명한 일이었다.
제자는 다섯이라도 후계자는 하나였다. 결국엔 하나만이 남을 것이었다. 그것이 무림의 법도요, 전통이었다.
물론 사방득이 진가장의 재물이나 명망을 노리는 것은 아니었다. 재물은 그들 사가장에도 많았고, 설사 그가 찢어지게 가난하다 해도 그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진가장의, 아니 그 전에 진자룡의 후계자가 됨으로써 얻어질 것들에 비하면 재물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방득은 아들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지금 그의 입술 사이로 스며 나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듯이.
“네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리라고 이 아비는 믿는다.”
사문기는 어리지만 명민한 아이였다. 그는 아버지가 말을 안 해도 알 것이라며 한 말들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이 그에게는 일생에 두 번 만나기 힘든 귀중한 기회라는 것,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잘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다섯 중에 최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하에 우뚝 선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는 천하에서 사문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학성의 사가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때는……!
‘진가장이 아니라 사가장의 후계자를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사문기는 고개를 바로 들고 당당하게 진가장의 연무장에 들어섰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훨씬 더 큰 뜻을 가진 아이였던 것이다.
연무장에는 사가 부자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네 명의 소년과 네 명의어른이 모여 있었다.
어른은 어른을 보고 아이는 또래의 아이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방득과 사문기의 시선은 네 소년에게 모아졌다.
소개를 받지 않아도 짐작했던 것이지만 막상 소개를 받자 더욱 확실해졌다. 소년들은 사대가문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팔다리가 길어 훤칠하게 커 보이는 소년이 삼수 동가장에서 온 동평중(董平仲), 현재 열네 살이었다.
사회 운양문의 운한경(雲漢卿)은 약간 살집이 있는 데다가 눈과 입이 순해서 호감이 가게 생긴 소년이었다. 동평중과 동갑이었다.
서초산 비룡문의 문주 맹비룡(孟飛龍)의 아들인 맹대균(孟大均)은 한살 어린 열세 살인데 체격이 커서 실제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그러나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은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다.
양주 악씨 세가에서 온 악조린(岳照隣)은 올해 열한 살인데도 불구하고 깊은 눈빛과 네모진 얼굴, 과묵한 인상으로 통 아이답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사대가문에서 온 소년들과 어른들이사방득 부자와 인사를 마치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무장 저편의 문이 열리고 진자룡과 삼산부자가 들어왔다.
진자룡은 올해로 나이 백다섯을 자랑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허리도 구부러지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검은빛을 되찾고 있었다. 광동 일대에서는 이를 두고 진자룡이 전설에서만 내려오는 줄 알았던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를 성취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뒤에서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따라 나오는 희끗희끗한 잿빛 머리를 하고 있는 노인이 아들 진삼산이었는데, 그는 오히려 그의 아버지보다도 늙어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듯이 이마에 주름살이 잡혀 있어서 첫인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문기로서는 광마라는 그의 별호가 다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모시기 쉬운 사부는 아니라는 평을 사가장에서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진삼산의 뒤로 들어선 사람은 큰 체구에 비대한 몸집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엷은 녹색 무복(武服)을 입고 손에는 키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장창을 들고 있었다. 그림책에서 볼 수 있을 듯한 고리 눈에 위로 몇 갈래로 퍼진 눈썹이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그 특징적인 모습과, 진삼산과 마찬가지로 어쩐지 화가 난 듯한 인상이 그녀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노호 고대랑이 아니고서는 누가 그런 모습을 하고 진가장의 연무장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에 들어선 사람은 소년이었다.
맹대경보다 큰 체구에 반듯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서 얼핏 열다섯은 넘어 보이는 소년. 그러나 처진 어깨와 구부러진 허리, 눈가에 깔린 그늘이 어딘지 모르게 처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의 소년. 그것이 얼마 전까지 진가장의 후계자였다가 오늘부터는 아니게 된 진자앙이었다.
올해 나이 열둘.
사람들은 그를 금강두(金剛頭)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바보라는 뜻이었다.
돌대가리, 석두(石頭)라는 말로도 진자앙의 어리석음을 다 표현하지 못해 금강두라는 새로운 말을 지어 냈다는 것인데. 소문에 의하면 무공수련 중에 화가 난 그의 어머니 고대랑이 그렇게 부른 것에서부터 시작된 별명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진자앙이 특히 그의 어머니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인지도 몰랐다. 항간에는 고대랑이 딸만 귀여워할 뿐 아들 진자앙은 남의 자식 취급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양쪽에서 귀여움을 받고 있는 사문기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일이었다. 여기로 올 때만 해도 무공수련 기간 중에는 못 만나게 되었다고 어머니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지 않았던가.
대청의 문이 다시 열리고 진노육의 안내를 받아 한 노인이 들어왔다.
얼굴은 작은 데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이 주름살이 많고,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땅까지 닿을 듯이 긴 팔을 건들거리고 있어서 영락없이 원숭이 꼴인데, 몸에는 화려한 비단장삼을 걸치고 있어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문기는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그와 함께 서 있던 소년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 모양으로 옆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어른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 원숭이 꼴의 노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득을 위시해 각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황황히 앞으로 나서서 읍(揖)을 했다.
원숭이 노인이 긴 팔을 들어 휘저었다. 소년들은 다시 웃었다. 팔을 젓는 모습까지 어쩌면 저리 원숭이 꼴인가.
노인이 웃었다.
“내 꼴이 우스우냐? 원숭이 같어?”
그는 들어올린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짐짓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폭소가 터졌다.
사문기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황급히 입을 가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른들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잔뜩 민망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노인의 신분이 아이들의 웃음을 살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아무리 똑똑해도 아이는 아이고,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법이었다. 어른들이 몰래 눈짓을 해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쩌질 못하는 것인데 한 아이만 처음부터 표정을 단정하게 유지한 채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악씨 세가의 악조린이었다.
사문기도 얼른 얼굴을 굳혔다.
‘쟤도 이 노인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군!’
사문기는 이 노인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팔이 길면 대체로 원숭이와 흡사하게 보이는 법이지만 이렇게 흡사한 사람은 강호무림에 그리 흔치 않다고 들은 것이다. 가문 대대로 원숭이와 닮은 사람들이 이어 오는 곳, 심지어 원숭이와 닮으면 닮을수록 재질이 좋다고 인정되는 곳. 바로 형산파를 연 원씨가문(袁氏家門)이었다.
대대로 형산파의 문주 내지는 장로의 자리에는 원씨가문의 사람들이 있었다. 구대문파 중에서는 약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어쩌다가 고수가 하나 나오면 대개는 원씨 성(姓)을 가진 사람이기 마련이었다. 당대에도 그래서 형산파 제일고수이자 무림십대고수의 하나가 원씨 성 가진 사람이 아니던가.
바로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원숭이를 닮은 노인, 뇌공 원굉도였다.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자 원굉도가 다시 말했다.
“계속 웃어도 괜찮다. 난 유쾌한 아이를 좋아하거든.”
그러면서 그는 비단장삼 앞자락을 뒤적이며 이를 잡는 시늉을 했다. 이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악조린은 여전히 웃지 않았고, 이번에는 사문기도 웃지 않았다.
노인의 정체를 짐작한 듯, 아니면 어른에게 급히 주의를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린 나머지 세 소년도 억지로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여전히 대청이 떠나가라 웃고 있는 사람은 진자앙 하나뿐이었다. 그는 원굉도가 원숭이 시늉을 그만두고, 다른 어른들을 비롯해서 다섯 소년들까지 입가에 웃음기를 씻어 버린 뒤에도 계속 웃고 있었다.
진삼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고대랑의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진자앙의 웃음이 그제야 잦아들었다. 그는 그제야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애들을 웃기려고 했다고 한들 자신의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웃으면 기분좋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원굉도는 이미 눈살을 찌푸리며 묵묵히 서 있었고, 장내의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농담으로 넘어갈 때는 지난 것이다.
웃느라 붉어진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진자앙은 그 얼굴을 감추려 고
개를 숙였다.
사방득은 이 작은 사건을 보며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이지만 저렇게 눈치가 없을 수 있을까. 그것도 무가의 자손이.’
그러고 보니 진자앙에게서는 기가 죽어 있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딘지 미욱한 티가 나고 있는 것이다.
대개 덩치가 큰 사람이 미련해 보이기 마련이지만 사실과는 상관이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진자앙에게서 보여지는 미욱함은 단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덩치가 크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뜯어보면 영준한 얼굴, 깨끗이 차려입은 무복 안으로 드러나는 건장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답답하고 미련한 티가 물씬 풍기고 있는 소년. 그것이 진자앙이었다.
‘눈이 죽었군!’
사방득은 그 미련함의 실체가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가의 자손이면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흑백이 분명한, 그래서 초롱초롱한 눈망울’, 혹은‘총기가 번뜩이는 눈동자’, 아니면 적어도‘오기와 투지가 가득 찬 눈빛’과 같은 것이 진자앙의 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자앙의 눈은 그저 크고 순하기만 할 뿐 무가의 자손다운, 살아있는 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제야 진자앙이 금강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다름없는 신세가 된 이유도, 그래서 아들을 비롯한 다섯 소년들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잡게 된 이유도 지금 진자앙의 모습을 보고서야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진자앙의 눈은 보통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은 눈이었다. 그러니 평범한 눈이라고 말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무가의 자손은 평범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눈을 무가에서는 죽은 눈이라고 불렀다. 무림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 또한 평범한 눈은 절대 아닌 것이다.
죽은 눈을 가진 아이, 진자앙을 보면서 사방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들에게는 이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아들이 진자룡의 후계자가 되는 데에 가장 큰 경쟁자는 동가(董家), 운가(雲家), 맹가(孟 家), 악가(岳家)의 네 소년이 아니라 바로 진자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이야 무공에 통 소질이 없다고, 그것도 조금 모자란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그러하다고 났지만, 그 내막이야 모르는 일이고, 또 앞으로도 모르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소질이 없다는 것은 대성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아주 못 배운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진자앙이 조부의 곤법(棍法)을`─`진자룡의 곤은 법(法)이 아니라 도(道)라고는 하지만`─`대충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된다면 남의 자식보다는 자기 자식에게 가산(家産)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무리 공정하고 사심 없다고 알려진 천기공 진자룡이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걱정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자앙의 눈을 보면서 그는 그런 우려들을 말끔히 떨쳐버릴 수 있었다.
소질이 조금 모자란 것은 노력으로 보충할 수가 있다. 그러나 눈이 죽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가 판단하기로는 진자앙이 그랬다.
응당 자기의 것이었어야 할 후계자의 자리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이 순간에도 원숭이 같은 노인의 꼴을 보며 웃음이나 터뜨리는 진자앙이 사방득은 한 순간 불쌍하게 여겨졌다.
진자룡이 측은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앙은 나가 있거라.”
이 자리에 그가 있어야 할 이유란 없는 것이었다. 진자앙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원굉도와 오대가문의 손님들에게까지 공손 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연무장을 나갔다.
원굉도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노부(老夫)는 형산파의 원굉도요. 오늘 광동 진가곤(陳家棍)의 당대 문주가 다섯 제자를 맞아들인다기에 증인이 되고자 이 자리에 참석했소. 진가곤의 위명에 비추어 볼 때 증인이 되기엔 부족한 몸이 아닌가 우려스럽지만 오랜 교분을 힘입어 감히 거절하지 아니하였소이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려 연무장 중앙을 가리켰다.
“제단을!”
거기 가려진 휘장이 옆으로 밀려 나가고 거기 진가장 역대 장주들의 위패와 제상이 보였다. 위패 위쪽으로는‘광동 진가곤’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가문으로 따지자면 광동 진가장이라 부르지만 무공내력으로 말하자면 광동 진가곤이라는 사승내력(師承來歷)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문과 사승이 분리된다는 것은 이번처럼 가문의 종손이 무공을 물려받지 못할 경우 가문의 재산은 종손에게, 무공과 명예는 제자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한 가문에 두 후계자가 생기는 셈. 그러나 무림인에게는 당연히 무공을 이어받는 사람이 진정한 후계자이기 마련이었다.
원굉도가 이제 한껏 엄숙하게 외쳤다.
“청조사(請祖師)의 예를 하겠소. 모두 기립하시오.”
이른바 배사지례(拜師之禮)를 하려는 것이다.
원굉도가 다시 외쳤다.
“제자들은 앞으로 나서라!”
다섯 소년들이 앞으로 한걸음씩 나섰다.
“나이 순서대로 향을 올리고, 조사(祖師)께 삼고두(三叩頭)하라!”
동평중, 운한경, 맹비룡, 사문기, 악조린이 순서대로 앞으로 나아가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모아 긴 향을 들고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린 뒤 향로에 꽂았다. 그리곤 위패를 향해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때는 머리가 바닥에 부딪쳐 소리가 나도록 하는 것이 예의였다.
원굉도가 다시 외쳤다.
“사조(師祖)께 삼고두하라!”
이들의 스승이 될 사람이 진삼산이었기 때문에 이 경우 사조는 진자룡이었다. 다섯 소년은 조사를 배례하고 난 뒤 태사의에 앉은 진자룡을 향해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스승께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라!”
구배지례라는 것은 스승에게 아홉 번 절하는 것인데, 매 한 번의 절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합계 스물일곱 번의 절을 해야 배사지례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다섯 제자의 절을 받은 진삼산이 일어나 입을 열었다.
“무(武)는 기예(技藝)나 힘 이전에 바른 마음이다. 마음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무예 또한 바로 자라지 못할 것이니……!”
제자들에게 첫 교훈을 내리면서도 방금 있었던 아들의 추태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진삼산은 침중한 안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4
집이라는 것은 굳이 방이 아니더라도 휴식을 취하며 조용히 앉아 쉬기에 적합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입구 옆, 계단, 복도의 한 귀퉁이, 창문가의 의자, 정원의 담장 아래 같은 곳이 그런 곳이다.
대개는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이 교차하는 지점, 즉 명암이 교차하는 지점인데 사람들은 흔히 자신은 어두운 곳에 남고, 시선은 밝은 곳을 향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진자앙은 그런 곳 중에 하나, 나지막한 담장이 한낮의 양광(陽光)을 반쯤 가려 주는 정원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멍하니.
어떻게 앉는 것이 멍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다들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앉아도 항상 멍하니, 멍청하게 앉아 있는다고 꾸중하신 적도 있었다.
사실 그렇게 볼 이유도 있긴 했다. 어디에 앉아 있으면 쉬고 있거나하더라도 뭔가 생각이 있기 마련인데 그는 지금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뿐이니 멍하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이다.
진자앙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러니까 무공을 못할 다른 이유가 있다면 진자앙도 이모저모로 생각할 일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도 안 되는 것을 어쩔 것인가. 누구보다도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도 했다.
피땀을 흘리며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그인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답답하기만 한 것이었다.
원래 그도 머리가 둔하다거나 해서 바보로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공에 진보가 없다는 것은 머리가 둔해서 글공부를 못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한 결점이었다. 진가장과 같은 무가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글보다는 무공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진자앙에게는 무공 방면으로 재주가 없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무림십대고수 중 하나였다. 그 말은 무림의 하고많은 고수들 중에서도 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만큼은 못해도 아직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기보다 강해 보이는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져본 적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누가 말한다면 진삼산의 성격을 모른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진삼산이 언제 상대를 골라서 싸웠던가. 그의 아버지 진자룡의 진전을 완전히 이어받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강호에서는 그래도 특급고수로 손꼽히는 진삼산인 것이다.
어머니는 어떤가.
무공을 놓고 말하자면 아버지보다도 강하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그녀의 난화삼십육로창봉술(蘭花三十六路槍棒術)은 창에 있어서는 일절(一 絶)에 속한다고 알려진 유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천부적인 감각이라니.
어머니의 감각은 야수의 그것과 흡사해서 보기 전에 먼저 알고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머니가 진자앙을 못마땅해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단 한 부분이라도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로 둔할 리는 없는 것이다.
진자앙은 한때 아버지 어머니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닮았으면 무공에 소질이 없을 수가 없고, 앉아서 백 장 밖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어머니를 닮았으면 감각이 예민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라는 것이 그의 질문이었다.
아버지는‘어머니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우리 가계(家系)에는 너 같은 경우는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물론 어머니의 가계에도 그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요컨대 그는 두 사람 중 누구도 닮지 않은 셈이다.
부모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순수한 호기심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의문을 토로(吐露)했다.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붙은 싸움은 할아버지가 와서야 겨우 진압이 되었다. 그리고 진자앙은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하나의 의문이 남아 있었다. 무공 소질이야 없을 수도 있다고 치자. 씨도둑질은 못 하는 법이라고 했지만 때로는 부모를 닮지 않은 아이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긴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체질은 무엇일까?
무공에 형편없는 소질을 가진 그에게도 한 가지 장점이라 할 만한 것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공에 대한 형편없는 소질과 더불어 그에게 한 가지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그의 체질이었다.
자라면서 그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큰 체격을 지니게 되었다. 진자앙은 여덟 살 때 이미 열 살이 넘어 보였고, 열두 살이 되자 아무도 그를 열다섯 아래로 보는 사람이 없었다.
옛날 같으면, 아니 요즘도 군문(軍門)에 투신하면 장군감이라고 불릴만한 체격을 가진 그였다. 거기에 그는 선천적으로 두꺼운 살가죽을 가지고 태어난 모양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상처도 잘 안 날 뿐만 아니라 혹시 났다 해도 금방 낳곤 했던 것이다.
특히 머리는 어지간한 것에 맞아서는 상처도 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손오공(孫悟空) 같은 돌원숭이라도 된 것처럼.
그래서 어머니가, 그리고 누나들이 붙여 준 별명이 그것이었다.
금강두!
‘돌대가리’, ‘석두(石頭)’라는 이름으로는 그의 노둔함과 단단한 머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금강석 대가리’라는 그리 명예스럽지 않은 별명을 붙여 준 것이었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이런 모욕을 당하면 참지 않을 것이다. 진자앙도 그랬다. 그는 비록 어리지만 그 별명이 무슨 뜻인지 알 만큼은 영리했고, 스스로가 사내임을 자각할 정도로 조숙했다.
그러나 별명을 지어 준 사람이 아귀 같은 누나들임을 감안할 때, 반격은 불가능했다. 잘못 대들었다가는 진짜 금강석으로 얼굴을 덮었다 해도 밭고랑이 패이고 말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진자앙보다 무공도 잘하고 힘도 세지 않은가.
그래서 진자앙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에게, 그 중에도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체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자앙은 아직도 그때, 그가 처음으로 내공에 입문하던 때를 기억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혈맥이 터져 죽어 버릴 뻔했던 그때의 사건을. 그 사건으로 내공수련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겼던 것일까?
진자앙은 할아버지에게 그것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 역시 다시는 묻지 않게 되었다. 항상 인자하던 할아버지가 그때만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진노육에게서 대충의이유를 듣고서야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던 많은 일들이 해명이 되었다. 그때에서야 자신의 이해하기 어려운 체질도, 할아버지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던 것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기가 막히고 억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따져 보면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렇게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던 것이다.
금강두라니!
원래 그가 그런 별명을 들을 정도로 둔한 아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지금도 그랬다. 무공 분야를 제외하면 어디로 보아도 튼튼하고 영민한 아이, 진자앙이 아닌가! 그런 그가 금강두 따위의 별명을 들어가며 참아야 하는가?
진자앙은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참는 바에야 누구보다도 더 잘 참으리라고 결심했다. 그것이 그 먼 옛날, 그가 태어난 날에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원망을 돌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친구까지 포함된 그들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진자앙이 여덟 살 되던 해의 일이었고, 한 해가 가고 또 몇 년이 가서 오늘 이렇게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생겨도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운명이 되었다.
진자앙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웃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웃는 것 외에는……!
빡!
소리가 들리고 한참 후에야 통증이 느껴졌다.
진자앙은 손을 들어 뒤통수를 만졌다. 뭔가 날아와 그의 뒤통수를 친
모양이었다.
“뭐지?”
손에는 볼록 솟아오른 부분이 만져졌다. 뒤를 돌아보니 여섯째 누나, 진소남(陳少藍)이 아까 연무장에서 본 소년 하나와 나란히 서 있었다.
진소남은 손에 또 하나의 돌을 들고서는 빙글빙글 웃으며 소년에게 말하고 있었다.
“보라니깐. 뒤에서 부르기만 해선 소용이 없어. 돌이라도 던져야 누가 온 줄 안다니까.”
그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은 사가장에서 왔다는 소년, 사문기임을 진자앙은 알 수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소년, 사문기.
여러모로 신기할 것이다. 동생을 부르는데 돌을 던져 뒤통수를 맞힌다거나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보다 그냥 불러서는 모르고, 돌이라도 던져야 돌아볼 정도로 아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진자앙은 돌에 맞아 부어오른 자리를 긁적거리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날 불렀었어?”
“부르지 않았으면?”
진소남은 뾰족한 목소리로 되묻고는 옆에 선 사문기를 의식했는지 한결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변명하듯 말했다.
“불러서 대답했다면 내가 왜 돌까지 던졌겠니?”
그게 이유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진소남은 돌아서서 걸었다.
“할아버지가 연무장에서 기다리셔!”
진자앙은 더 말하지 않고 일어섰다. 대답을 않는다거나, 온 줄 모른다고 꼭 돌을 던져야 옳을 것인가를 토론하기에는 진소남은 적당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 어미 닮아 우악스럽기만 한 년!
아버지가 전에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지만 사실 진소남은 셋째 누나인 진황아만큼이나 우악스러웠다. 아버지는 황아 누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었다.
─`제 어미 닮아 무식한 것이 힘만 쎄서……
‘제 어미 닮아서’라는 말은 아버지가 딸들을 평할 때마다 입에 달고
하는 말이었다.
‘제 어미 닮아 거칠고 무뚝뚝한 큰딸 홍아’는 그래도 개중 나은 편이고, ‘성질이 못된 둘째 주아’,‘멍청한 것이 힘만 쎈 황아’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듯이 뜻뜨미지근한 초아’,‘약은 청아’, ‘우악스런 소남’, 그리고 ‘얌체 소보’까지 모두‘제 어미’를 닮아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나들이 항상 욕만 먹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의‘제 어미 닮아’라는 문구는 물론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로 내놓지 않을 뿐 아니라 드물게 칭찬도 하곤 했다.
물론 그때는‘날 닮아’라는 말이 꼭 앞에 붙었다.
─`날 닮아 믿음직한 맏이 홍아.
이런 식이었다.
이상한 것이 어머니도 누나들을 칭찬할 때는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잘된 것은 당신을 닮고, 못된 것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것이 서로 반대이긴 했지만.
그러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진자앙을 칭찬한 적은 없었다.
단 한번도‘날 닮아’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빡!
이번에는 앞 이마가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연무장의 기둥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걷다가 부딪힌 모양이었다.
이상하게도 연무장에 들어설 때마다 한 번씩 부딪히곤 하는 그 기둥 “쟨 저게 인사야.”
앞서 연무장에 들어서던 진소남이 킥킥거리며 사문기에게 말했다.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진자앙을 보고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또 부딪히겠거니’ 하고는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기둥을 한번 어루만져 준 뒤 연무장에 들어섰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웃는 것 외에는……!’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