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망곡
(1)
강호만큼 복잡한 은원(恩怨)관계가 존재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은혜를 주고받는 것이야 주위의 부러움과 세간(世間)의 좋은 모범(模範)이 되어, 그것이 설사 천리 밖 주정뱅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해도 나쁜 일이 아니겠지만, 어디 강호란 곳이 그러한가?
친구보다는 원수가 많은 곳이 강호이고, 제 손으로 그 한을 다 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자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살수집단(殺手集團)이었다.
무림(武林)이라는 말이 생긴 이래로, 살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어느 시대, 어디에서도 곱지 않았다.
무림의 본질인 협(俠)과 의(義)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비무조차 존재하지 않는 살인의 세계, 그것이 바로 살수의 세계가 아닌가?
기습에 의한 살인. 그것이 제 아무리 예술과 같은 살인술(殺人術)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아니라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을 죽이는데 성공하였다고 해도 아무도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기존의 무인들이 보기에는 비겁한 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저주받은 천형(天刑)의 운명이 살수라지만, 그런 그들 중에도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불꽃처럼 짧은 생(生)을 살다 갔지만, 무림인들에게 살수의 무서움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사람 사이의 갈등(葛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살수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 숨겨진 칼날의 무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 칼날을 밝은 빛 아래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파일방을 위시한 강호대파(大派)들의 토벌단 구성으로 해결되었다.
수많은 살수조직들이 혈배(血杯)를 마시는 순간, 벌떼처럼 달려드는 토벌대에게 도륙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수조직은 끊임없이 생겨났다.
강호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권단체(利權單體)들 보다 가장 큰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유혹은 죽음의 공포보다도 강렬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살수문파들의 활동은 은밀하고, 신중해졌다.
반면 토벌활동은 몇 년을 걸쳐 쉬지 않고 계속되기 어려웠고, 여러 문파의 연합체이라는 성격상 결국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구파일방들은 그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살수조직들을 눈감아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할 수 있다는 당금 가장 무서운 살수조직 중 하나인 사망곡(死亡谷)에 한 통의 밀서(密書)가 날아들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 불리는 사망곡주(死亡曲主)였지만, 그는 그 한 장의 밀서 때문에 머리를 싸매며 고심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사망삼살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가뜩이나 창백한 곡주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거절해야 합니다."
일살(一殺)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살은 누가 보아도 살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학식과 덕망이 가득한 중년문사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일살은 가장 뛰어난 살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안과 밖이 하나같기가 힘들다는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깬 인물이었다.
그는 겉만 문사 같았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박한 지식과 앞을 내다보는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망곡이 강호의 가장 무서운 살수문파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일살의 그러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이살(二殺)과 삼살(三殺)의 말은 달랐지만 뜻은 하나였다.
곡주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임도 하지 않은 무림맹주를 암살했다가는,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몰리게 될게 뻔합니다."
일살의 말은 백 번 생각해도 옳은 말이었다.
지금 강호의 모든 시선이 새로운 맹주에게 향해있지 않는가?
이 시점에 암살시도라니?
이건 애초부터 거론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한통의 밀서였다.
일언지하 거절해야 할 단순한 사안이었지만, 밀서를 보낸 쪽은 이러한 것을 미리 염두에라도 두었는지 자신들의 정체를 당당히 밝혀놓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의뢰인의 이름은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 않아도 우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네."
모두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해도 위험하고 안 해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것을 모르는바 아니었지만, 일살의 의지는 단단했다.
“비록 우리가 성공한다 해도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토벌대의 선두에서 우리를 공격하겠지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신세를 이야기함이리라.
하지만, 문제는 배가 고픈 사냥꾼이 바로 개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잊으셨습니까? 그곳엔 그가 있다는 것을? 아직도 그가 그곳에 있다면…."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일살이 말한 그곳이 어디인지, 그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어찌 잊으랴? 잊기를 바랬던 것이다.
십년 전의 악몽 같은 일들이 떠올랐다.
사망칠살(死亡七殺)을 사망삼살(死亡三殺)로 만들어 버린 사내.
당시의 사망칠살은 강호의 가장 뛰어난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살인(殺人)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고, 실패를 모르는 무적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혼자 행동했고, 그럼에도 그들의 살수행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사신(死神)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에게 내려지는 죽음만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막내 칠살(七殺)이 살수행(殺手行)에 실패하고 죽음을 당했을 때,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위험한 임무였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의뢰였다. 의뢰자가 바로 마교였던 것이다.
모두가 함께 갔어야 했지만, 그들은 원칙을 깨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을 손가락질 하는 무인들을 향한 그들만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심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칠살이 죽었다.
언젠가는 모두들 그렇게 될 운명임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가장 어린 막내가 먼저 간 것이 안타까웠다.
유난히 막내와 가까웠던 오살(五殺)이 다음날 사라졌다.
그러나 복수를 하기는커녕, 남은 형제들에게 슬픔과 증오의 크기만을 더하며,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또 다시 살수행은 실패를 한 것이다.
이번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살수행의 성공이나, 복수의 기쁨은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원칙을 깨고 합공을 시도했지만, 사살(四殺)과 육살(六殺)의 죽음만 더 한 채 그들은 그곳을 빠져 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것이다. 그 동안 아무도 그 일을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복수를 하고자 하는 생각도 버렸고, 슬픔도 분노도 모두 잊었다.
의뢰를 실패한 것에 대한 마교의 보복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잊어버렸다고 생각된 과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지키고 있는 한….”
일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살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삼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차라리…."
잠시의 침묵을 깨고 일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살의 말에 모두들 침을 삼켰다.
사망곡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일살은 언제나 해결책을 찾아냈다. 다행히 사망곡주는 옹졸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자신보다 뛰어난 수하를 경계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망곡은 숱한 위기를 무사히 넘겨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지금도 일살은 사망곡을 수렁에서 건져내 줄 해결책을 찾아냈을 것이다.
일살이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라도 들려주는 노인처럼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가 이야기를 마칠 때쯤 모두의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이살이 이끄는 서른 명의 정예살수들이 소리 없이 사망곡을 빠져나갔다.
* * *
무림맹 주작단(朱雀團), 은영대(隱映隊) 제 3조장 허정(許程)의 발걸음이 그의 급한 마음만큼이나 빨라졌다.
그의 손에 들린 한 통의 전서에는 맹 내의 일급상황에만 사용된다는 자주색 매듭이 묶여있었다.
지난 해 초삼월에 있었던 강남 풍화장(風火莊)과 강북의 혈옥(血獄)과의 무력충돌 이후 근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게다가 곧 있을 맹주취임식을 앞두고 주작단원 전원에게 비상이 내려진 지금 이 자주색 매듭의 의미는 무척이나 컸다.
무림맹 최고의 무력단체라 불리우며 맹외(盟外)의 일을 담당하는 청룡단(靑龍團), 맹내(盟內)의 수비를 담당하는 백호단(白虎團), 맹주와 그 가족들의 호위를 담당하는 현무단(玄武團)과 함께 무림맹 중심 사단의 하나인 주작단은 강호의 모든 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일종의 첩보기관이었다.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허정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은영대 조장들에게만 특별히 전수된다는 강호팔대보법(江湖八大步法)의 하나인 은영보(隱影步)를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 경지까지 끌어 올렸다.
그가 그토록 급하게 달려가는 것은, 정보를 다루는 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때론 촌각(寸刻)의 차이가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성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바람처럼 달려오던 그의 신형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그가 멈춰 선 곳은 여지껏 달려왔던 풍경들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으며 그의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처음 이곳을 찾은 이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이곳이 바로 무림맹 내에서 가장 신비롭고 은밀한 조화림(彫花林)의 입구였던 것이다. 세외선경(世外仙境)의 아름다움 앞에서 허정의 행동은 보다 신중해졌다.
그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취해 목숨을 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조화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으로 오묘한 기문진식이 설치되어 있어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었던 것이다.
이곳에 이토록 무서운 절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작단주 사연랑(司蓮琅)의 거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보아선 단순한 꽃밭에 불과하지만, 이곳이 바로 오행(五行)과 사상팔쾌(四象八卦)가 역(逆)으로 혼합되어 만들어졌다는 무극오행진(無極五行陳)을 지나는 허정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삼 일에 한 번씩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의 위치가 바뀌었고, 그것은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이들에게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그가 한 발짝만 헛딛는다면, 오늘 아침에도 잔소리를 해댔던 그의 아내는, 저녁에 무림맹으로부터 남편의 죽음에 대한 위로금(慰勞金)을 받게 될 것이다.
허정은 재빨리 조화림을 빠져나와, 사연랑이 거처하는 작은 모옥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요?"
허정을 맞이하는 사연랑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녀였지만, 허정의 손에 들린 자주색 매듭을 보고는 가볍게 두 눈이 흔들렸다.
허정은 전서를 사연랑에게 공손히 건네면서 말했다.
“특급(特級) 상황입니다."
사연랑이 전서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사망곡?"
“네, 그들이 움직였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급(一級)으로 분류된 살수(殺手)가 서른 명이나 함께 움직였습니다. 게다가….”
“일급 살수가 서른 명씩이나?”
사연랑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지휘자가 바로 이살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사연랑의 기다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자는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걸로 아는데."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사망곡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기억해 내려 노력했다.
“이살이 일급살수 서른 명을 데리고 나갔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문제는 그들이 향한 행선지가 바로…."
“설마?"
사연랑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네, 바로 정주(鄭州)입니다."
사연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난 7년간 단 한 번도 살수행을 나서지 않았던 이살이 함께 움직인 것과 그 행선지가 바로 정주라는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마, 일선에서도 이점을 주목해서 특급(特級)정보로 분류한 것 같습니다."
불혹(不惑)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십대 후반의 나이 정도로 보이는 사연랑이었다.
언제보아도 시원해 보이는 그녀의 이마가 살짝 찡그러졌다.
십년 전 사망칠살은 가히 전설적인 살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후배살수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금분세수라도 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에 대해 모두들 의견이 분분했지만, 내막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연랑이 바로 그 드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들이 왜 은퇴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후 그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들이 몸담았던 사망곡을 강호최고의 살수집단으로 만드는데만 주력했다.
주작단에서는 그들이 사망곡에 은거한 채 살수양성에만 힘쓰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언제나 주시해 오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들이 왜 갑자기 다시 움직인 것일까?’
분명 뭔가 냄새가 났다. 하지만 행선지가 정주라는 점으로, 신임맹주와 연관시키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움직임은 포착된 상태고, 미리 밝혀진 이상 어떻게 대처하느냐 만이 남았다.
“현재 맹주 쪽에는 누가 나갔나?"
“철무호위가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호위는! 원래 맹주호위는 그의 담당이잖아?"
사연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휴가중이랍니다."
“이런.”
사연랑은 황급히 초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망곡의 이 위험스러운 움직임에도 내심 여유로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놀러갔단다.
‘도대체 이런 시기에? 무슨 생각으로?’
사연랑은 우이의 진면목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혁월의 집무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그 뒤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허정이 바짝 뒤따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