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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회]
적유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미처 자신이 어떻게 합세를 하기도 전에 신황이 장로들의 태반을 쓰러트리고 악귀처럼 자신에게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절기인 절수구조(截手九爪)를 펼쳐냈다.
천산파의 절기인 절수구조는 조공의 정상을 달리는 무공 중 하나로 강력한 내공을 바탕으로 펼쳐낸다.
이것의 무서움은 강력한 조공의 위력뿐만 아니라 조공에 당한 상처를 타고 극한의 음한지기가 몸 안으로 침투해 심맥을 얼린다는데 있었다.
때문에 절수구조에 당하면 그 순간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잠시 후에 온몸의 혈관을 타고 번지는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쉬이익!
순간 허공이 온통 적유세의 손가락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신황이 피할 방위까지 모두 계산한 채 펼쳐지는 절수구조였다.
신황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적유세에게 날아오던 탄력을 그대로 살려 양팔을 교차로 휘둘렀다.
서거억!
“으악!”
신황의 팔에서 월영인이 교차되며 적유세의 손바닥이 갈라졌다.
“뭐냐?”
적유세는 급히 갈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지혈시키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으로도 신황이 펼치는 수법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그것은 그의 식견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이런 식의 무예를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외성의 차이라고나 할까.
적유세가 물러서는 만큼 신황이 접근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빨리 접근했다. 그는 적유세로 하여금 물러설 틈을 주지 않았다.
휘리릭!
그의 몸이 회전을 하며 다리가 마치 톱날처럼 뻗어났다. 월영인을 두른 그의 다리, 그것은 심각한 위협으로 적유세를 위협했다.
“칫!”
적유세는 혀를 차며 절수구조의 세 번째 초식인 응절수로 신황의 다리를 긁어왔다.
마치 매의 발톱처럼 변한 그의 손가락에 푸르스름한 기가 맺히고 그것은 신황의 월영인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서거억!
순간 날카로운 파육음이 나고 적유세의 손가락 네 개가 뭉텅 잘려나갔다.
“크읏!”
그제야 적유세는 신황의 무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지만 저 자는 무형의 검을 만들어 팔다리에 차고 있다.
그러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자신의 네 손가락을 희생시켜 얻어낸 값진 정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씨이익!
신황의 몸은 계속 그를 몰아쳐 오고 칼날 같은 바람은 여전히 적유세의 전신을 압박해왔다.
적유세는 마치 몸을 미꾸라지처럼 흔들어 빠져나가려 애를 썼으나 그럴 때마다 신황의 몸에 가로막혔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신황의 월영보는 그야말로 철벽 그 자체였다.
은은한 역광을 안고 환상처럼 움직이는 그 모습에 천산파의 문인들의 눈에서 조차 당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들의 태상문주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감탄의 빛을 떠올렸다.
그들의 눈에는 마치 달빛이 신황의 몸을 따라다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피리릿!
적유세의 몸에 다시 한줄기 혈흔이 떠올랐다 흩어졌다. 그는 절수구조를 버리고 표설천운장(飄雪穿雲掌)을 펼쳤다.
그의 조공이 신황의 무공보다 성취가 높지 않은 이상 맞부딪쳤다가는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마치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기운이 신황과 그의 사이에 휘몰아쳤다. 마치 버들바람처럼 시작해 강력한 회오리바람으로 발전한다.
그것이 표설천운장의 요채였다. 때문에 가벼운 손짓인 것 같지만 그 미묘한 움직임이 가져오는 결과는 생각보다 컸다.
파파파팟!
신황의 옷이 격렬하게 퍼덕거렸다. 그만큼 그의 몸에 가해지는 압박도 심해졌다. 순간 갑자기 신황의 앞 가슴팍이 열리고 설아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캬-우-우-웅!
포효하는 설아, 그것은 마치 신황을 탓하는 것 같았다. 왜 아직까지 처리하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신황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마치 유부에서 악령이 우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그만큼 그것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배가 시켰다.
순간 신황의 움직임이 변했다. 마치 칼 같은 분위기, 몸놀림조차 그렇게 변했다. 현월보(弦月步), 바로 초승달의 그림자 변화를 보고 만든 보법이었다.
이름 그대로 활시위를 당긴 것처럼 신황은 적유세의 공세를 꿰뚫고 그에게 접근했다.
파파팟!
허공에 가득 차는 그의 다리 그림자, 그 위력이 범상치 않은 것을 아는 적유세는 다시 그의 공세를 피해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신황의 반응이 더욱 빨랐다. 허공에 떠 있던 두 다리가 바닥에 내려앉을 찰라 한발로 대지를 박차고 다시 몸을 회전시켰다.
그에 따라 그의 다리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월영인, 그것은 적유세가 피할 방위를 모두 차단한 채 마치 폭풍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파파파팟!
월영인은 순식간에 적유세의 온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무슨?”
감각이 없다. 무언가 지나간 것 같은데 말이다. 때문에 그의 얼굴엔 의문이 떠올랐다.
신황이 걸어온다. 완벽한 무방비의 상태.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그는 다시 표설천운장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크헉!”
갑자기 적유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토해져 나왔다. 동시에 전신에 힘이 빠지며 그의 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끄어어!”
마치 육지에 올라온 문어처럼 축 늘어져 꿈틀거리는 거의 모습, 신황의 월영인이 그의 주요 근맥을 자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을 주려해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턱!
신황은 싸늘한 눈으로 적유세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주르륵!
적유세는 반항한번 제대로 못해본 채 마치 개처럼 신황의 팔에 끌려 땅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끌려갔다.
일문(一門)의, 그것도 천산파의 태상문주가 당하는 치욕스런 모습이다.
살아남은 장로들이 다시 신황을 향해 덤벼들려 했다. 죽으면 죽었지 이런 치욕은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황의 눈을 보는 순간 행동을 딱 멈추고 말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 그의 눈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만약 건들면 이 순간 그는 이곳 천산파에 남은 모든 인원과 생사를 겨룰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불행히도 그들의 힘은 신황에 견줄 수 없다.
그것이 신황과 손을 겨뤄본 장로들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가슴속 깊이 조금 더 근원적인 곳에서 신황에 대한 공포감이 스멀스멀 잠식해 일어난 생각이지만 본인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춤 주춤!
천산파의 문인들이 물러서며 신황의 앞길을 비켜주었다. 그 누구도 신황과 눈을 마주치길 꺼려했다. 혹여 라도 눈을 마주친 사람은 급히 고개를 밑으로 깔아 신황의 눈을 피했다.
신황은 자신이 끌고 온 적유세를 앉은 채로 굳어있는 백우인의 시체 앞에 던졌다.
철퍽!
백우인의 시체 앞에 마치 용서를 비는 것처럼 엎어진 적유세의 몸, 신황은 그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용서를 빌어라.”
“끄으어~! 용··용서해줘.”
체면도 뭣도 없었다. 지금 이순간 적유세의 가슴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전신의 근맥이 잘려나간 육체적인 고통, 그리고 신황에 대한 절대적인 공포감뿐이었다.
살고 싶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 그것만이 적유세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자신의 다리 쪽으로 꿈틀대며 다가오려는 적유세를 향해 신황이 말했다.
“용서를 빌어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네 놈이 잡아와서 죽인 이 아이에게다. 만약 네가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지 못하겠다면 천산파의 모든 사람을 죽일 것이다.
모든 제자들의 사지를 끊어내 처참하게 죽일 것이고, 이곳의 식솔들, 하다못해 천산파에서 기르는 개새끼 한 마리까지 모두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는 맹세이다.”
부르르!
장내를 가득 뒤덮는 신황의 살기에 사람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절대적인 공포였다. 이것은 무공의 고하차이가 아니라 조금 더 근원적인 문제였다.
이미 심령이 신황의 기세에 제압이 되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마치 뱀 앞에선 쥐가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신황의 말에 적유세는 허겁지겁 백우인의 시체에 대고 말을 쏟아냈다.
“미.......안하네. 늙은이가 영물에 눈이 멀어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네. 크흑!”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적유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닭똥같이 떨어져 내렸다. 냉혈한으로 평가를 받던 적유세가 흘리는 눈물은 그만큼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땅바닥을 기며 눈물을 흘리는 자가 과연 그들의 태상문주란 말인가? 찢어지는 가슴에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용서해주게. 제발 용서해 주게. 늙은이의 망령에 자네한테 잘못했네. 그러니 제발 용서해주게.”
적유세는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억지로 움직여 백우인의 바지 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자신의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자신 때문에 천산파의 수백문인이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절박하기만 했다.
캬르릉!
설아가 신황의 품속에서 뛰어 나와 백우인의 어깨에 올라탔다.
설아는 이미 딱지가 져서 굳은 백우인의 얼굴을 구석구석 핥아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눈물이 엉겨 붙은 그의 두 눈이 공허하게 드러난다.
죽어서도 딸에 대한 걱정 때문에 두 눈을 감지 못하는 남자, 그의 원통한 눈이 적유세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허헝! 내가 잘못했네. 그러니 우리 문파의 제자들만큼은 살려주게.”
적유세의 음성에는 울먹임이 숨겨있었다.
차아앙!
신황의 팔에 다시 월영인이 맺혔다. 그러나 백우인의 발목을 부여잡고 늘어진 적유세는 전혀 그런 사실을 몰랐다.
피리릿!
신황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다 내 잘못................”
적유세의 말이 멈췄다. 갑자기 굳어진 혀, 그리고 싸늘히 식어가는 그의 눈동자.
덜컥!
적유세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신황은 백우인의 시체에 다가가며 말했다.
“이 아이도 그런 고통 속에 죽어갔다. 남겨진 사람을 걱정하며 눈을 감지 못한 채 말이다.”
신황의 눈에는 어느새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백우인의 시체를 등에 없었다. 설아가 그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는 백우인의 시체를 등에 업은 채 천산파를 나서기 시작했다. 다시 천산파의 사람들이 그의 앞길을 비켜준다.
어느 순간 신황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멈춘 곳에는 천산팔로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향후 백년간 천산에서 천산파의 활동은 용납하지 않겠다.”
“그것은..................”
이장로가 말을 더듬었다. 백년간의 봉문, 말이 좋아 봉문이지 사실상 문 걸어 잠그고 망하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가.
“그것이 싫으면 이곳에서 나가. 천산에서의 활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내 경고를 무시하고 활동한다면 그날이 천산파의 마지막 날일 것이다.”
신황의 어조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일말의 협상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태상문주가 죽었는데도 슬퍼할 틈도 없이 문파의 앞날을 걱정하게 생긴 것이다.
이장로는 이빨을 뿌득 갈며 힘들게 말을 뱉어냈다.
“좋.........소! 앞으로 천산에서 활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조심하시오. 이곳 천산파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주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 중원에 계신 문주님과 정예들은 우리들과 비교할 수 없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앞으로 귀하는 두발을 뻗고 자기 힘들 것이오.”
신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모습에 이장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용기가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단 그때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야. 결코 이렇게 허술하게 끝내지 않을 테니까.”
수십의 사람이 죽고 태상문주가 죽었는데 그것이 허술하단다. 신황의 광오한 말에 이장로는 숨이 막혀왔다.
신황은 이장로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캬우우웅!
만월 아래서 마치 진혼곡처럼 설아의 울음소리가 천산을 울렸다.
신황은 아룡을 깨워 같이 탑리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아룡은 끝없이 대성통곡을 했다. 백우인의 옷자락이 모두 그의 눈물로 젖을 정도로 말이다. 신황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만약 지금 마음속의 울화를 풀지 않으면 평생 그것이 화가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세 사람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이미 싸늘히 식어 산자의 기운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백우인의 모습에 경악을 했다.
“어떻게.............!”
“너무해! 흑!”
마을의 아낙들이 하나둘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물은 곧 대성통곡으로 변했고 마을 전체를 비통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이 사람.............!”
박영감과 최 씨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백우인의 뺨을 만져보고 나서야 그가 죽었음을 인정했다.
그들은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십 수 년이 되었어도 잊지 않고 매년 몇 차례 이곳에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왔던 백우인이다.
항상 웃는 얼굴, 다정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웃음을 짓게 하던 그였다. 딸아이의 걱정에 잠을 제대로 못자면서도 항상 밝게 살려고 노력하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 그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다. 백우인이 불쌍했다. 그의 딸이 불쌍했고, 그의 아내가 불쌍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의지로는 멈출 수 없을 만큼 많은 눈물이 났다.
신황은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들러 정성스럽게 백우인을 씻겼다.
몸에 묻은 피와 더러운 먼지를 깨끗이 닦아주고 아룡이 가져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리고 난 후에야 그는 백우인의 시체를 엎고 마을의 제일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생각 같아서는 월영봉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마을사람들이 찿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언덕으로 올라갔다.
마을사람들은 그의 뜻을 깨닫고는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집에서 지난가을 준비해 두었던 장작들을 한 아름 안고 언덕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을 모아서 언덕위에 제단을 만들었다.
신황은 그 제단위에 백우인의 시체를 눕혔다. 아직 백우인의 눈은 감겨있지 않았다. 원통한 그의 눈은 아직까지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인 것 같았다. 신황이 손을 뻗어 눈을 감겨주려 했지만 백우인의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또다시 흐느꼈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딸아이가 불쌍해서 눈을 감지 못할 거야. 어떻게 눈을 감누.”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인데............, 하늘이 어찌 이렇게 무심한지.”
얼마나 착하고 열심히 살아온 지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소맷자락을 눈물로 적시며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눈을 감지 못하는 백우인의 귀에 신황은 속삭였다.
“네 딸은 내가 반드시 고쳐주마. 그래서 누구보다 건강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만들어주마. 이것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이다.”
말을 하는 내내 신황은 자신의 가슴 한쪽을 만졌다. 아까 백우인의 몸에서 꺼낸 구지영초가 담겨있는 함이 느껴졌다.
백우인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함이다. 얼마 되지 않는 무게지만 신황에게는 천근만근의 그 어떤 보물보다 무거운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다.
스르륵!
마치 신황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백우인의 눈이 감겼다. 그 모습에 마을사람이 또 한 번 놀랐다. 아마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그의 영혼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신황이 백우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주고 물러섰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한사람씩 백우인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각기 백우인과의 이별의식을 치뤘다.
“그동안 수고했네. 이젠 편히 쉬게.”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난 평생 아저씨를 잊지 못할 거예요.”
“잘 가게나. 이젠 여기서 편히 쉬어.”
그들은 차례를 지켜 백우인에게 한마디씩 하고 물러났고 마지막으로 아룡이 눈물을 흘리며 작별의식을 치렀다.
“미....안해요. 아저씨! 내가 약해서, 내가 지켜주지 못했어요. 만약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내가 분명히 지켜드릴게요. 잘 가세요. 아저씨.”
아룡은 자신이 약함을 탓하고 있었다. 분명 또래 보다는 강하지만 세상의 풍파에 맞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아룡마저 물러서자 신황은 삼매진화를 일으켜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불길이 맹렬한 위세를 자랑하며 백우인의 시체를 감쌌다.
신황은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으로 일렁거리는 그의 얼굴에 환상처럼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사라졌다.
그날 백우인은 한줌의 재만 남긴 채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모두 태운 채 사라졌다. 신황은 백우인의 재를 조그만 항아리에 담아 집으로 내려왔다.
그날 이후 신황은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이미 백우인이 온다고 했을 때 모두 끝내놓았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었지만,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서 아룡에게 조금 더 강한 무공을 전수해주기 위함이었다.
이전에는 그나 아룡이나 강한 무예를 전수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룡에게 무공을 전수하고 자세가 잡힐 때까지 바로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가 혼자서도 익힐만한 수준이 되자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신황의 집으로 찾아왔다. 비록 이별이 아쉽기는 했지만 왜 그가 떠나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그들은 신황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소중하게 만들어온 옷을 신황에게 내밀었다. 전에 그들한테 받았던 옷은 이미 천산파와의 격전 끝에 모두 헤어졌기에 옷이라고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신황이 아룡을 가르치는 며칠 동안 그들 역시 밤을 세며 옷을 만든 것이다.
“곰 가죽을 잘 다듬어서 만든 옷이라네. 털을 모두 뽑고 수십 수백 번 가죽을 무두질해서 얇게 만들었네. 덕분에 날씨가 더워도 덥거나 습기가 차지는 않을 거야.”
신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네준 옷을 방안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옷은 그의 체형에게 딱 맞았고, 형태도 신황의 마음에 딱 들 정도로 좋았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박영감이 마지막으로 여행용 망토를 걸쳐주었다. 이곳에서 난주까지는 수천리 길, 노숙할 일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배려해서 주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신황이 마을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들을 대신해 박영감이 손 사례를 쳤다.
“고맙긴 우리가 더 고맙지. 우인이의 자식을 구하러 가는 길인데. 우리가 능력이 안 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그래! 어여 가게. 우인이가 속타 하겠네.”
“알겠습니다.”
신황은 마을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마을을 나왔다.
신황은 오로목제(烏魯木齊)를 목적지로 정했다.
백우인의 집이 있는 감숙성의 난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크라마칸 사막을 지나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막의 접경지역에 있는 오로목제를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까지 거주하고 있던 천산의 탑리 마을에서 오로목제까지는 물경 천리 길, 때문에 그는 중간에 있는 마을에서 말을 사서 오로목제를 향했다.
돈이라면 이제까지 판 가죽들만으로도 충분했고, 또한 그의 품에는 예전에 운남에서 발견했던 금강석과 몇 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있었기에 그리 걱정할 것 없었다.
아직 이곳 신강은 한 겨울이었기에 매우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고 있었다.
때문에 관도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모두 집안에서 따뜻한 화롯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을 것이다.
캬우웅!
그의 품에서 설아가 꼼지락 거린다. 설아는 신황의 망토 속에 몸을 숨긴 채 이제까지 자고 있었다. 그런데 움직이는 것을 보니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난 네가 아직까지 어떻게 천산에서 살았는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추위를 싫어하면서 말이다.”
신황은 설아의 머리를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설아가 오히려 신황의 손에 머리를 비비며 그르릉 거렸다.
이 녀석은 고양이의 습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추위에 견딜 수 있는 특별한 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추위를 싫어하고, 말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였다.
또한 웬만한 맹수정도는 손쉽게 죽일 수 있으면서도 혼자의 힘으로 사냥을 하는 것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천산에서 혼자 살아왔는지 정말 용할 정도였다.
오로목제로 가는 길은 관도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길을 잃을 위험은 없었다. 하지만 가는 여정이 긴 만큼 중간에 객잔에 들려 잠을 청해야 했다.
따뜻한 중원이라면 모를까 이곳 신강에서 노숙하는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신황은 추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멀쩡한 객잔을 놔두고 노숙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반드시 객잔에서 잠을 잤다.
이제 하루정도면 오로목제에 도찰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이 늦었기에 신황은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다행이 이곳은 여행자들이나 상단을 위한 객잔이 많이 있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객잔에 들어서자 쾌쾌한 공기가 풍겨온다. 후끈한 땀 냄새와 열기, 수많은 남자들이 모여 있기에 이곳의 분위기는 왠지 달아올라 있었다.
신황은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방에 짐을 푼 후 식사를 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왔다.
탁자에 앉은 그는 간단히 요기할 것과 술을 시킨 후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때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천산파가 한바탕 혈겁을 당했다며?”
“어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그것을 지금 물어봐. 요즘 이곳 신강 전체가 그이야기로 떠들썩한데 말이야.”
“내 일 때문에 바깥에 있다 오지 않았겠나.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
그들은 이곳을 왕래하는 상인들 같았다. 그들은 요즘 신강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글쎄! 천산파가 커다란 혈겁을 입었다는구먼.”
“천산파가 혈겁을 입어?”
“어허! 이사람 정말 요즘 소식에 대해서 먹통이구만. 아무것도 몰라.”
“거 사람 애태우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 보라니까.”
남자의 닦달에 친구인 듯한 남자가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키며 말했다.
“크으~! 좋다. 그럼 내 얘기해줄 테니 귀 잘 씻고 듣게나. 그러니까 며칠 전의 일이었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천산파에서 우리 같은 상인 한명을 천산파로 끌고 갔던 모양이야.
우리 같은 상인들이야 천산파 같은 커다란 문파에서 문제 삼으면 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그 상인도 그렇게 당한 모야이야.”
“하긴 우리같이 힘없는 중소 상인들이야 무림인들이 건들면 당할 수밖에.”
“그런데 그 상인과 아는 누군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 사람이 천산파에 쳐들어갔다네. 처음엔 천산파에서 코웃음을 쳤지.
아, 생각해보게. 천산파가 어디 보통 문파인가? 최소한 이곳 신강에서 만큼은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하는 문파가 아닌가.
그런 곳에 단신으로 쳐들어왔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그래서 무시를 하려고 했지. 그런데 그 남자가 움직이면서 모든 게 달라졌네.”
꿀꺽!
어느새 장내의 사람들이 모두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흐뭇하게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 하네. 그의 손이 한번 움직이면 반드시 한사람이 죽었고, 그가 하는 발길질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나가떨어졌다고 하네.
그리고 그는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지만 손발이 마치 검 같은 기운을 내뿜었다고 하네.
그의 손에 외당의 제자 수십 명과 천산파의 미래를 이끌어갈 기재라던 빙혼삼십육검의 절반이 도륙 났고, 장로들마저도 상당수가 죽었다네. 그리고 놀라지 말게.”
“..................”
“천산파의 태상문주인 천산노조 적유세 마저 그의 손에 죽었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 이곳 신강은 난리가 났다네. 새로운 살성(殺星)의 탄생 때문에 말이야.”
사람들은 천산파를 도륙 낸 남자를 두 가지의 호칭으로 불렀다. 어떤 이는 달빛 아래 검을 휘두르는 듯한 모습에 월영검마(月影劍魔)라고 불렀고,
어떤 이는 마치 어둠의 일부가 된 듯한, 아니 그자체가 거대한 어둠인 듯한 모습에 명왕(冥王)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두 가지 다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는 호칭이었다.
지금 신강은 월영검마, 혹은 명왕에 대한 소문으로 들떠있는 상태였다.
혼자서 천산파 전체를 상대하고 백년간 봉문을 지시한 남자.
이제까지 그 누구도 이곳에서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남자. 그에 대한 이야기로 사람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정신없었다.
무림은 항상 새로운 인물에 열광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기존의 인물들이 오랫동안 무림의 최정상에 군림하고 있을 때는 말이다.
‘불과 며칠 사인데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나 있던가?’
신황은 쓴 웃음을 지며 술잔을 들었다. 자신의 동생은 죽어 한줌의 재가 되 있는데 자신은 불같은 명성을 얻다니.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그는 쓰디쓴 술을 들이키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오로목제에는 유달리 상인들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이곳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는 주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황은 오로목제에 도착한 즉시 말을 팔았다. 이제까지 말을 잘 타고 왔지만 사막을 통과하는 데는 낙타가 더 유용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마시장에서 말을 판뒤 튼튼한 낙타 두 마리를 사서 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런 연후에 시장 통을 돌아다니면서 사막을 횡단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사기 시작했다.
오로목제에는 시장이 매우 잘 발달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거니와 신강의 성도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덕분에 신황은 별 어려움 없이 구하고자 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천산에 들어오기 전 천하를 십여 년 동안 떠돌았고, 그 과정에서 노숙이나 이런 사막지대에서 필요한 물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두툼한 양가죽으로 된 이불과, 커다란 수통 몇 개, 그리고 소똥을 잘 말려서 만든 연료가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다.
사막의 밤은 낮과는 정반대로 살을 엘 만큼 춥다. 때문에 두터운 이불을 갖추지 못한다면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잘 말린 소똥은 은은한 열을 내면서도 오래 타 땔감 대용으로 쓰기 딱 좋았다. 때문에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에게 있어 필수적인 준비물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객잔에 돌아온 신황, 그는 간단한 음식을 시켜놓고 설아와 장난을 쳤다.
톡!
때구르르!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건드리며 공처럼 저만치 굴러갔다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앞발로 신황의 손가락을 건드리며 또다시 놀아달라고 한다.
그러면 다시 신황의 손가락이 설아의 이마를 건드리고, 또다시 때굴때굴 저만치 굴러갔다 돌아온다.
“훗!”
설아와 장난을 치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객잔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상인들은 그 광경이 재미있었던지 웃음을 띠고 발라보았다. 아마 그들의 눈에 설아는 보통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암향혈표지 평상시에는 고양이와 다를 바 없는 설아였으니까.
“음식 나왔습니다. 손님!”
점소이가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신황과 설아는 장난을 멈추고 곧 음식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설아는 날고기도 좋아했지만 사람들이 만든 음식도 좋아했다.
때문에 신황은 접시를 하나 얻어 설아의 몫으로 음식을 덜어주었다.
그렇게 둘이서 한참 음식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있는 탁자가 어두워졌다. 고개를 덜어보니 인상이 험상궂은 상당한 덩치가 그를 보며 누런 이빨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뭐지?”
신황은 음식을 들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고양이 너의 것인가?” “그런데................”
“돈은 주겠다. 나한테 넘겨라.”
남자의 눈에는 탐욕의 빛이 흘렀다. 그러나 신황은 남자의 뒤에서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짙은 지분으로 얼굴을 단장한 채 배시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 아무래도 기녀인 것 같았다.
남자는 기녀와 외출을 나왔다 이곳에 들렀고, 기녀가 신황과 놀고 있는 설아를 보자 호기를 부리는 것 같았다. 설아는 충분히 귀여웠으니까.
신황은 다시 수저를 들며 말했다.
“돌아가! 설아는 파는 물건이 아니니까.”
“흐흐흐! 멍청아. 팔지 않으면 그냥 넘겨주겠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나야 물론 고맙지.”
남자가 억지를 쓴다.
신황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위 상인들과 토박이들이 외면하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맹강위, 이곳 오로목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말이 좋아 영향력이지 실상은 뒷골목의 부랑배에 불과했다.
조그만 조직을 가지고 있는. 그러나 변변한 문파가 거의 없는 실정인 이곳에서는 제왕이나 다름없이 군림하고 있는 자가 바로 맹강위였다.
한마디로 이곳 오로목제는 그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느새 맹강위의 주위로 그와 같은 덩치 몇 명이 모여들었다. 맹강위가 이끌고 있는 조직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특유의 험상궂은 얼굴을 앞세워 장내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뒷골목의 부랑배들이 취하는 특유의 수법이었다.
“훗!”
신황의 입가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이런 환영을 받을 줄 몰랐다. 이런 열렬한 대접이라니. 이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캬르릉!
설아가 변한 신황의 기운을 느꼈는지 나직하게 울부 짓는다.
‘씨팔! 설마 잘못 건드린 것은 아니겠지.’
맹강위가 속으로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그가 이렇게 호기롭게 나선 이유는 신황의 모습이 그저 평범해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뒷골목에서 힘을 쓴다고 하지만 무림의 고수들을 상대로는 택도 없다는 것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시비를 걸때도 반드시 그 사람이 무림과 연관된 사람인지 잘 살펴보았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들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한 것은 이 근처를 지배하던 천산파가 봉문을 선언하였기 때문이었다.
천산파의 무인이 없는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치기어린 생각에서 일어난 일인 것이다.
“후후! 다시 한 번 말하마. 돌아가라. 그렇다면 한번은 용서해 주지.”
“뭐라고? 이 녀석이.....................”
신황의 말에도 맹강위는 호기를 부리려 했다. 가슴 한켠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기하나 없는 신황이 설마 무림고수일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중간에서 허무하게 잘려야 했다.
서걱!
신황의 손이 가볍게 탁자의 모서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마치 칼로 벤것처럼 잘라졌기 때문이다.
맹강위와 부하들의 얼굴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망할! 똥 밟았다.’
그들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손으로 탁자의 끝을 부수는 것이라면 그들의 힘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의 덩치는 장식으로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치 칼로 베어낸 것처럼 저렇게 매끈한 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공이 있는 무림의 고수들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맹강위, 그러나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혹시 불편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이곳 오로목제에서 어지간한 일은 제가 편의를 봐드릴 수 있으니까요.”
손바닥까지 비빈다.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짓고 허리를 굽실거리는 맹강위. 그것은 그의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후! 다른 것은 필요 없으니 햇볕만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희들 때문에 그늘이 지거든.”
“물론입니다. 대인.”
신황의 말에 맹강위 일행은 허겁지겁 여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캬우웅!
설아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르렁 거린다. 그것이 꼭 비웃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러나 맹강위 일행에게는 그 의미를 생각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 같은 남자 수십이 더 있어봐야 무림고수에겐 밥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 앞에서 오기를 부려봤자 쓸모없는 만용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를 가리면서 시비를 건다. 그것이 맹강위가 이제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생존뿐,
그렇게 따지고 보면 어쩌면 맹강위 같은 인물이 가장 오래 살아남을지도 몰랐다.
객잔에 있던 사람들은 왜 맹강위가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신황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강위가 그렇게 행동한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들이 아는 맹강위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두고 절대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신황에 대한 신경을 껐다. 어차피 그들과 신황은 남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좀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겠구나.”
캬우웅!
신황과 설아는 다시 식사에 열중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은 편히 식사를 할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의 앞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이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단단한 체격의 남자.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모습으로 탄탄한 내공과 무예를 소유한 것 같았다.
“안녕하시오. 난 북로표국(北路표局)의 소국주인 목유환(木幽丸)이라고 하오.”
남자가 자신의 소개를 하며 포권을 해왔다. 이렇게 정식으로 나오자 신황 역시 할 수 없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신황이라고 하오.”
신황의 인사를 받자 목유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 자리에 앉아도 되겠소?”
“앉으시오.”
신황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용건이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이것은 상당한 결례였지만 어차피 결례는 그쪽에서 먼저 한 것이다.
신황은 자신에게 무례한 사람에게까지 예의를 지켜줄 만큼 예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자 역시 그런 점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소. 다름 아니라 내가 조금 전부터 당신을 지켜보았는데 아무래도 무공을 가진 것 같소이다.”
목유환의 목소리는 호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흠이라면 예의가 없어 듣는 이에게 약간의 불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호탕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신황의 말도 짧아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혹시 사막을 건너실 생각이라면 우리 같이 건넙시다.”
“표국이라면 인원도 상당할 텐데 굳이 나를 합류시키려는 이유가 뭐요?”
“별다른 뜻은 없소이다. 단지 요즘 사막에 도적 때들이 횡행해서 대비를 하려는 것뿐이오.
올 때는 인원이 꽤 많았지만 우리가 지금 두 패로 갈려져서 인원이 부족하다오. 어차피 댁도 혼자 사막을 건너는 것보다 같이 건너는 것이 수월할 것 아니오.”
기실 목유환은 신황을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고 있었다.
비록 맹강위 등의 부랑배들을 쫓아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검을 든다면 그런 자들 수백이 달려들어도 가볍게 제압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목유환은 공동파의 속가제자이다. 어려서 공동산에 올라가 십여 년 이상을 수련했고,
지금은 가업을 잇기 위해 속세에 내려왔지만 하루도 공동파에서 익힌 검법을 수련하는 것을 거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가 신황을 포섭하려는 것은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타클라마칸 사막의 정세는 심상치 않았고, 그에 따라 약간의 대비책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화살바지 같은 것이 말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약간의 무공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신황은 입맛에 맞는 포섭대상인 것이다.
신황은 목유환의 눈에서 그가 자신을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읽었다.
잠시 그의 일행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표국의 무사들이 은근슬쩍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먼 길을 다녀온 듯 약간은 초췌한 얼굴들, 그러나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표물이 상당히 중요한 물건 같았다.
신황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절하겠소.”
그의 단호한 말에 목유환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무공을 익힌 자라도 혼자서 사막을 건너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었기에 반드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사막은 혼자 건너기에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오. 어쨌든 무운을 빌겠소.”
목유환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가 본 신황은 그리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는 아니었기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쪽도.”
신황은 포권으로 그를 보냈다.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것은 딱 질색이다.
지금 그는 한시라도 빨리 난주로 가야했다. 중간에 다른 일에 휘말려 시간을 낭비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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