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백문(百聞)이 불여일경험(不如一經驗)

제 8장. 백문(百聞)이 불여일경험(不如一經驗) 등평과 고대릉이 장백산을 내려왔을 때 산 아래의 날씨는 이미 여름으로 접어 들어 있었다.장백산의 유월은 이제 막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계절이었지만, 산 아래는 산 위보다 몇 달이나 빨리 계절이 가고 있었다.고대릉은 처음으로 보는 세상의 모습에 마냥 신기해 했다.산 아래에 그토록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각양각색 저마다의 모습으로 분주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세상의 산들이 모두 다 장백산처럼 높고 험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넓은 들이 있고, 큰 강도 있다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등평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가며 고대릉의 근골을 다시 한 번 세세하게 살펴보았다.그러나 역시나였다.고대릉은 더도 덜도 아닌,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근골일 뿐이었다.하지만 실망은 이미 충분히 한 바 있었기에, 등평은 이제 차라리 담담해질 수 있었다.'타고난 근골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내공의 기초는?'등평이 짐짓 농인 듯 스스로의 의학지식을 자랑하며 고대릉의 체질을 진맥해주겠다 하고는, 그의 맥문에다 아주 미약한 진기를 흘려 보았다.'허허! 이런 경우라니.... 참!'완전한 무반응이었다.만약 조금이라도 내공을 보유하고 있거나, 혹은 내공을 익힌 흔적이 있다면 분명 어떤 기(氣)의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고대릉의 기도와 안광(眼光)을 통해 그가 결코 정심한 내공을 지니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등평이 이미 짐작하고 있는 터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내공의 기초조차도 닦지 않았을 것이라고 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애초에 고대릉의 전신 주요혈맥의 타통여부 등을 세세하게 진맥해 볼 생각이었던 등평은, 그만 진기를 거두고 말았다.'더 이상의 확인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홍걸이 고대릉에 대해 장담하기를, 다른 것은 몰라도 내공 하나만큼은 충실할 것이라고 하였다.태중에 있을 때 홍리화가 복용한 그 숱한 영약영단 중 어느 것 하나 절세영약 아닌 것이 있었던가.비록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우여곡절을 겪긴 하였으나, 절세영약이 괜히 절세영약이겠는가.그 약효의 반의 반, 그리고 또 그 반의 반만이라도 고대릉에게 갔다면, 그 공능이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라 하였다.더구나 무영가에서 보유한 최고의 내공심법을 홍리화에게 주었으니, 십칠 년이 지난 지금 고대릉의 내공기반은 가히 그 어떤 무림명가의 후기지수들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다만 한 가지 홍걸이 우려한 것은, 고대릉이 글 밖에 모르는 조부와 아비의 기풍에 물들어 고리타분한 먹물이 잔뜩 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그리하여 홍걸이 등평에게 특별히 당부하기를, 한 일 년 정도 넉넉히 시간을 잡고 천하를 다니면서 고대릉으로 하여금 사내다운 사내, 영웅은 몰라도 최소한 효웅은 될 수 있는 당찬 포부를 가지도록 만들라고 한 것이다.사실 그것은 홍걸 자신의 포부이기도 했다.그러나 홍걸의 그런 기대와 포부는 시작부터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홍걸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였던 고대릉의 모든 것은 한없이 평범하기만 하였다.그토록 장담하였던 충실하고도 엄청난 내공은커녕, 내공의 기초조차 잡혀 있지 않았다.등평은 원래가 낙천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아무리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라도 당황만 하고 있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또한 애초부터 고대릉에 대해서 홍걸이 거는 과도한 욕심에 대해서는, 비록 심중에서였지만 십 분 동조하는 마음을 가지지도 않았었다.어떤 분야에서건 천하제일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때문이었다.절대의 고수라는 것이 기껏 영약과 무공 비급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만약 그런 것만으로 절대고수가 만들어 지는 것이라면, 고금의 각 시대에서 천하제일 또는 절대강자로 군림하였던 인물들은 모두 당대의 대부호가(大富豪家)나 명문대파(名門大派) 혹은 황가(皇家)에서만 나왔어야 했을 것이다.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수천 년 무림사에 이름을 남긴 절대강자들 중 명문대파나 황실, 대부호가의 출신들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도 되지 않으며, 오히려 내세울 만한 출신이 없거나 혹은 독행강호(獨行江湖) 하던 낭인무사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결국 절대의 고수라는 것은 단순히 내공만 높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절세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좋은 조건들이 남보다 빠른 진전과 쉬운 성취를 이루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나,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진정한 절대의 경지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굳건한 정신력과 치열한 승부욕,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했다.절대의 경지란, 얼마만큼 많이 가지느냐로 가름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얼마만큼 갈고 닦아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느냐에 달린 것이다.그런 점에서 홍걸이 단 한번 얼굴도 보지 못한 고대릉에게 걸었던 기대는 애초부터 그저 욕심이요, 집착에 불과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물론 홍걸 같은 이가 그러한 이치에 대해 아주 모를 리는 없었다.다만 등평이 짐작하건 대는, 수백 년간 이어 온 무영가의 염원에 대해, 그 감당하기 어려운 짐의 무게에 대해, 이제 홍걸 자신의 대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고야 말겠다는 욕심과 각오였으리라.와중에도 등평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고대릉의 성격이었다.비록 순박하고 투박하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홍걸이 염려했던 바와 같이 아주 고리타분하거나 꽉 막히지는 않았다.낯 설음이 가시자 오히려 자유분방하고 활달하달 수 있는 성격이 엿보였는데, 아마도 그런 성품은 친가보다는 외가의 기질을 물려받은 것이리라.그들의 여로(旅路)는 심양(瀋陽)과 금주(錦州)를 거치고, 장성(長城)을 넘어 북경(北京)까지로 예정되어 있었다.시간이 몇 배나 많이 걸릴 것임에도 불구하고, 등평은 일부러 말이나 마차를 구하지 않고 걸어서 갈 작정을 밝혔다."외조부님께서 편찮으시며, 저를 많이 기다리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고대릉의 당연한 물음에 등평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리 하는 것은 외조부님께서 미리 명하신 일입니다. 외조부님께서는 가주님을 빨리 뵙는 것보다, 보다 성숙된 모습의 가주님을 뵙기를 원하고 계십니다."고대릉은 잘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그러나 홍걸 뿐 아니라 고진당까지도 당분간 고대릉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등평에게 다 맡겨 놓은 터이니, 고대릉이 달리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한편 등평은 북경까지 먼 길을 가는 동안 세상과 부딪치면서 고대릉의 성격이 보다 원만해지고 둥글둥글해지기를 바랐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과 고대릉의 사이 또한 보다 친숙해지기를 바랐다.고대릉은 자신을 대하는 등평의 호칭과 태도에 대해서도 몹시 어색해 하고 당혹스러워 했다."의숙! 저를 어찌 그렇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왜 저를 가주라 부르시는 것이며, 또 가주라면 어느 가문의 가주라는 것입니까?"등평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무영가의 가주십니다. 무영가는 가주님의 외가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 온 가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영가의 충복입니다. 그러니 곧 가주님의 충복이 되는 것이지요."고대릉의 어조가 사뭇 단호해졌다."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조부님과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에는 전혀 그런 사정이 없으니, 저는 다만 어른들께서 이르신 대로만 의숙을 대하겠습니다. 또한 무영가라는 이름도, 제가 그 곳의 가주가 된다는 사실도 들은 바 없으니, 제게는 그냥 외가일 뿐입니다. 하니 앞으로는 그냥 제 이름을 불러주시고, 가주라는 호칭으로는 부르지 말아주십시오."제법 논리가 있고, 주장이 들어있는 말이었다.그러나 등평의 얼굴에서 빙그레한 웃음을 사라지게 만들지는 못했다."하하하! 알고 보니 가주님은 아직까지 남자가 되지 못하셨군요."고대릉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무슨 말씀이십니까?""방금 가주님의 말씀이 그렇지를 않습니까? 무릇 남자란 자신의 일은 자신의 주관에 따라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가주님은 모든 일을 어른들의 말씀에만 의존하려 하시니 말입니다."고대릉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으나, 이내 조금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단정하듯이 말을 내놓았다."저는 이 일로 의숙과 더 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할 것이니, 의숙께서도 그리 아십시오."등평의 얼굴에 맺혀 있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비록 말로는 주관이 없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실상 지금 보여 주는 고대릉의 모습에서는 제법 만만치 않은 강단과 고집이 엿보이고 있었다.그러나 등평은 다시 한 번 슬쩍 말을 비틀었다."하하하! 제가 어찌 가주님의 생각에 대해 함부로 가타부타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게는 충복으로서 가주님을 보필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가주님께 가주님의 입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게는 충복으로서 지켜야 할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가주님과 저는 각자의 입장에 대해 충실하기로 하고, 서로의 입장을 강요하지는 않는 것으로 하면 되겠습니다."고대릉이 빙글거리는 등평의 얼굴을 힐끗 흘겨보며 입매를 고집스럽게 비틀었으나, 더 이상 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다.등평은 앞으로 고대릉에 관한 일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에 잠긴 채 길을 걷고 있었다.이제는 설사 홍걸이라고 해도, 일을 되돌려 고대릉에게서 가주의 위를 박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아무리 무영가가 세상에 떳떳하게 이름을 떨친 가문은 아니라고 해도, 그 가법만은 지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가법에 의하면 무영가와 관련된 모든 일의 전권은 오로지 가주에게 속하게 되어 있었다.그러니 이미 가주의 위(位)에 올라 있는 고대릉에 대해서, 아무리 홍걸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처분을 내릴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다만 방법이 있다면, 다시 후계를 정한 다음에 고대릉 스스로가 가주의 위에서 물러나는 방법뿐이었다.하지만 그 방법 또한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고대릉이 스스로 가주의 위에서 물러나는 것이야 오히려 그가 바라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과연 누구를 후계로 세울 것인가?홍걸이 다시 가주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결국은 시간이 필요하였다.일단은 현재의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서, 한편으로 시간을 가지고 대안을 짜내는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바로 등평 자신의 몫이었다.문득 등평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아차!'자신이 혼자만의 생각에 젖어 있느라 한동안이나 고대릉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등평이 가장 잘하는 게 걷고 달리는 것이다.잘해도 보통으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 홍걸에게나 양보를 할까, 천하에서 세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잘했다.그런 그가 정신을 다른 데 두고서 무작정 걸었으니, 굳이 신법을 전개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의 걸음걸이가 일반인들이 걷는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을 게 당연하였다.더구나 대충 짐작해보니 그렇게 걸어 온 거리가 못되어도 사오리는 족히 되었을 듯 하였다.홱!다급한 마음만큼이나 바람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린 등평의 눈앞에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다보고 서있는 고대릉의 모습이 들어왔다.한순간 안도와 함께 괜한 반가움이 왈칵 솟아오르는 등평이었다."가주님!""예?"멀뚱히 반문하는 고대릉을 보며 등평의 얼굴로 한 가닥 묘한 흥미로움이 떠 올랐다.등평이 고대릉의 아래 위를 한번 살펴본 다음에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힘들지 않으신가 해서요."고대릉이 따라 웃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걸을 만 합니다. 그런데 의숙께선 걸음이 무척이나 빠르신 편이더군요. 걸음걸이도 특이하시고."고대릉의 표정으로 아주 살짝 호기심의 기운이 스치는 것을 등평은 놓치지 않았다."하하하! 이제 보니 가주님은 날카로운 안목을 지니셨군요. 과연 저의 걸음걸이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고대릉의 표정에 다시금 완연한 호기심의 빛이 되살아났다."그것이 혹시 무공이라는 것입니까?"등평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무공일 수도 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냥 일종의 요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힘을 덜 들이고도 좀 더 빠르게 걸을 수 있는 요령이지요. 어떻습니까? 저에게 걷는 방법을 한 번 배워 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무공이라면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방금의 호기심과는 달리, 고대릉의 대답에는 별 망설임이 없었다.그것을 보고 등평은 고대릉에게 무공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편견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편견은 아마도 고진당이나 고행선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일 터였다."가주님! 여기서 북경까지는 장장 수 천리에 이르는 길입니다. 가주님이 저의 걷는 방법을 배우신다면 우리는 좀 더 빠르게, 좀 더 편하게, 그리고 보다 많은 것들을 보면서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고대릉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저는 본래 걷는데 자신이 있습니다."등평이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무공을 굳이 배우지 않으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말씀 드렸다시피 저의 몸이 이미 충분히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무공이다 뭐다 하여 지나치게 신체를 괴롭히면 마음에 마(魔)가 들기 쉽습니다. 몸의 병은 맞는 약을 쓰면 쉬 고칠 수 있지만, 학문을 익히는 이의 마음에 마가 한 번 들면 헤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등평이 바로 말을 받지 못하고 잠시 생각하다, 문득 크게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세상만물은 그것에 대해보고 듣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존재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도 아닌 자기자신의 신체를 단련한다고 해서 마음에 마가 낀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근본적으로 어떤 잘못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무공이란 것은 신체만을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 닦는 것입니다. 자고로 문무(文武)라 하여 선현들 중에서도 문과 무를 함께 익혀 정진하셨던 분들이 적지 않은 까닭도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문과 마찬가지로 무의 도 또한 경지에 올라갈수록 몸이 아니라 마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숨도 돌리지 않고 단숨에 쏟아 내는 등평의 말에 고대릉은 일시 기가 죽은 듯하였다.그러나 그는 곧 등평의 말을 받았는데, 그 목소리에 자못 불퉁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이미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의숙께서는 과연 달변이십니다. 만약에 배움이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라면, 저는 아직 의숙의 배움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니 역시 더는 논쟁을 하지 않겠습니다."말을 끝내자마자 입을 꾹 다문 고대릉의 모습에서 제법 매운 심통이 엿보였다.그러나 등평이 누구인가.그가 어디 열 일곱 먹은 순진한 소년 하나를 어르지 못할 인물이던가."하하하! 가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쥐꼬리만도 못한 식견으로 감히 가주님과 논쟁을 하려 하였다니, 분수를 몰라도 한참이나 모른 짓이었습니다. 다만 본래 제가 드리고자 했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닌지라,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고대릉은 별로 들은 척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내색을 않으려 하지만, 심통이 나있다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져 있다.등평이 짐짓 두 손까지 비벼 가며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사실 저의 걷는 방법은 무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무공을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제대로 무공으로 되기 위해서는 독문(獨門)의 내공이 필요하고, 또한 복잡하고 난해한 여러 가지의 변화를 익혀야만 합니다. 저의 생각에 가주님이 배우셨으면 하는 것은, 그 이전의 단계로 단순히 바르게 걷는 방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주님이 우려하시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다만 말 그대로 보다 작은 힘을 들여 편하게 먼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이니 배워서 나쁠 것은 결코 없다고 하겠습니다."등평이 말을 끝내고서 고대릉의 눈치를 살피는데, 고대릉이 얼굴에 불그스레하게 홍조를 띠면서 다분히 고집스러운 어조를 뱉어 냈다."의숙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저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 있거니와, 저의 몸은 충분히 튼튼하니 다만 걷는 것이라면 의숙께 폐를 끼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문득 등평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하! 좋습니다. 역시 가주님은 본질을 정확하게 짚으시는군요. 사실 우리가 북경까지 가는 데 소용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굳이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 번거로움을 취할 까닭이 없는 것이겠지요."고대릉의 앞으로 한 걸음 앞서 나가면서 등평이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자신이 한번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고집을 세운다? 후훗! 그것도 좋겠지. 우둔하여 자신의 주장이 없거나, 혹은 너무 총명하여 우직한 고집이 없다면 사람들 속에 있기는 좋을 것이나, 그러나 사람들의 위에 서기는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어린 가주는 또 한 가지의 괜찮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후훗! 앞으로도 점차로 찾다 보면, 어쩌면 그는 또 다른 몇 가지의 장점들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 그가 또 어떤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지 찾아보는 재미에 조금씩 빠져 보는 것이다.'등평의 생각은 간단했다.고집이 센 사람을 설득하기란 보통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쉬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바로 그가 고집을 세우는 바가, 사실과 어떻게 다른지를 직접 체험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앞장을 선 등평이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여전히 내공을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그는 걸음걸이에 무영은천비의 기본동작들을 제대로 적용하였다.느긋하니 뒷짐까지 쥐고서 마치 유람 나온 사람처럼 주변 경관을 구경해가며 여유있게 걷는 모습이었지만, 실상 등평은 지금 한 걸음에 보통 사람의 보폭에 비하면 근 두 배는 됨 직한 거리를 쭉쭉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그러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거의 뛰다시피 해야 겨우 그의 걸음걸이를 따를 수 있을 정도였다.한참을 걷다가 등평이 슬쩍 뒤를 돌아보니, 고대릉은 뺨이 발그레하니 달아오르고 호흡이 약간 거칠어진 외에는 큰 무리 없이 잘 따라오고 있었다.겉보기와는 달리, 고대릉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의 사람치고는 제법 괜찮다고 해야 할 정도의 체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후훗! 비록 내공으로 화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영약의 효험을 아주 못 보지는 않은 것인가?'등평이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빨리했다.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오감능력으로 뒤따르는 고대릉의 상태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원래 이 장 정도 뒤에서 열심히 따라오던 고대릉이, 일시 사 오장 뒤로 처지고 있었다.'그럼 그렇지.'등평이 다시 걷는 속도를 늦추려 하다가는 일순 묘한 표정이 되었다.'이것 봐라?'고대릉이 다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완연히 거칠어진 숨소리로 보아서 고대릉은 지금 거의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듯 하였는데, 어쨌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곧 처음과 같이 이 장 정도로 좁혀졌다.등평의 입 꼬리가 설핏 뒤틀리며 위로 말려 올라갔다.'좋아! 언제까지 달릴 수 있을 것인지 두고 보자.'등평이 속도를 늦추지 않고서 그대로 걸어(?)나갔다.그렇게 근 십 리 정도를 갔을까?헉! 헉!헉! 헉!고대릉의 호흡은 거의 턱에 받쳐 있었다.그러나 고대릉은 연신 밭은 숨소리를 내뱉으면서도 뒤로 처지지는 않고 꾸준히 달리고 있었다.급기야 등평의 얼굴로 놀라움 반, 감탄 반의 기색이 떠올랐다.'이 건 뭔가 좀 이상하다. 아무리 타고난 체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내공 한 점 없이, 더군다나 신법을 전혀 익히지 않은 몸으로 이런 속도를 유지하며 줄곧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특이체질인가? 혹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가?'등평의 입 꼬리가 다시금 묘하게 비틀렸다.그것은 그가 어떤 일에 대해 지극한 흥미를 가질 때의 표정이었고, 또한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밀 때의 표정이었다.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돌연 앞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가더니, 금방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눈앞에서 갑자기 등평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자 뒤 따르던 고대릉은 일시 멈칫하는 듯 하였으나, 그대로 원래대로의 속도를 유지하며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등평은 크게 우회하여 고대릉의 모습을 잘 지켜볼 수 있는 거리에서 나무와 바위 등에 은신하며 고대릉을 따르고 있었다.고대릉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거칠게 뱉어 내는 호흡은 마치 대장간의 풀무질 소리를 연상시켰다.그러나 제대로 틀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달리는 자세는 아직까지 크게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속도 또한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대로 더 달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등평이 눈빛을 반짝이며 고대릉의 몸 놀림을 세심히 지켜보았다.그러다 등평의 입가로 설핏 미소가 스쳤다.고대릉의 몸놀림 속에서 어색하나마 몇 가지 무영은천비의 기본동작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허허! 오성(悟性) 또한 제법 쓸만하다는 뜻이렸다?'애초에 등평의 의도가 그저 고대릉의 고집을 꺾는 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그는 고대릉에 앞서 걸으면서 일부러 크고 정확하게 동작을 취함으로써, 고대릉이 힘겹게 쫓아오는 중에 자연스럽게 무영은천비의 기본동작들을 익힐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원래 그가 고대릉에게 가르치려 하였던 것이 다만 자세와 몸을 움직이는 기본요령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고대릉이 그저 대강의 동작만이라도 따라 익히기를 바란 것이었다.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만은 않은 일이기도 했다.자세한 설명도 없이 다만 다른 사람의 몸놀림만 보고서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다는 것은, 제법 뛰어 난 오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힘든 일이다.결국 등평은 고대릉 길들이기(?)에 겸하여 그의 오성까지를 평가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한편으로 등평의 얼굴에서는 한 가닥 의혹이 점점 더 짙어져 가고 있기도 했다.그것은 궁금함이자, 또한 지극한 흥미였다.'좀 묘하다.'고대릉은 벌써 십오 리가 훨씬 넘는 거리를 일정한 속도로 계속 달리고 있었는데, 비록 많이 지친 모습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포기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그런 고대릉의 모습을 단순히 체력과 끈기로만 생각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함이 있는 것 같았다.언뜻 보기에 고대릉은 몸의 무게가 주는 부담을 그다지 크게 받는 것 같지를 않았다.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의 몸을 아래로부터 받치고, 또 뒤로부터 밀고 있는 듯이 말이다.문득 등평은 엉뚱한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고대릉에게 본격적으로 신법을 한번 가르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재질이 뛰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등평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대릉의 신법에 대한 가능성은 대단한 것이었다.내공 한 점 없이, 그리고 신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하나 없이도 지금과 같은 놀라운 지구력과 속도를 보이고 있지 아니한가.그러나 등평은 이내 고개를 가로 젖고 말았다.우선은 당사자인 고대릉이 무공을 배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절대로 등평 자신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홍걸이 고대릉에 대해 걸고 있는 그 무조건적인 기대로 볼 때, 만약 등평이 임의대로 고대릉에게 무영은천비를 가르친다면, 아마도 홍걸은 앞뒤 사정 볼 것 없이 당장에 등평을 쳐죽이려고 할 것임에 분명하였다.물론 신법 그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 무영은천비가 천하에 현존하는 신법 중에서 뿐만 아니라, 가히 고금제일을 다툴 수 있는 신법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그러나 나름의 독특한 내공운용방식 때문에 다른 종류의 무공을 함께 익히는 데는 결정적인 제약이 따른다는 문제가 있었다.도산검림(刀山劍林)의 강호무림에서 아무리 독보적인 신법을 지니고 있다 해도, 다른 무공을 겸비하지 못했다면 세상을 오시하며 어깨에다 힘을 주고 다니기는 어려운 노릇이 아니겠는가.다만 한 가지, 고대릉은 이미 내공의 기초를 닦을 나이가 지나도 한참이나 지났다.그러니, 지금 다른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다 해도 어차피 경지에 이르기는 요원하다고 해야 했다.그러나 무영은천비라면 사정이 다르다.무영은천비의 내공체계는 그야말로 특이하였다.상중하 삼 단전(三丹田)의 균형적인 수련 대신에, 좌우 용천(湧泉)의 이 단전(二丹田)만을 극단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이다.그러기에 상대적으로 수련자의 내공입문 시기에 영향을 훨씬 덜 받는다고 할 수 있었다.고대릉의 사정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어차피 다른 무공으로 대성하기 어려울 바에는,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무영은천비를 익히는 것이 백 번 나은 선택이 될 것이었다.비록 천하에 군림하지는 못한다 해도, 어떤 의미가 되었건 신법 하나로 천하를 종횡무진 누벼 보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일 테니까.무영가의 역대 가주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휴우!"등평은 가느다랗게 긴 한숨을 뱉어 내었다.'어쨌든 한 가지의 큰 가능성을 건졌으니, 아주 나쁜 지경은 면했다.'그리고 그렇게 급할 일은 없었다.무영은천비를 익히는 일에 대해서는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홍걸과 고대릉 두 사람이 점차로 서로의 전후사정을 다 이해하고 난 다음에 결정해도 결코 늦지 않을 일이었다.좀 늦게 시작한다고 해도 넉넉잡고 스물 안쪽에만 시작한다면, 고대릉은 이미 대단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니 아마도 역대 어느 가주에 못지않은 훌륭한 성취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었다.문득 등평은 자신이 고대릉의 숨겨진 재능 하나를 발견한 사실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그 사실이 등평으로 하여금 피식 웃게 만들고 말았다.'훗! 별일이군. 처음의 실망이 너무 컸던 탓인가?'정말 별스러운 일이었다.평상시 늘 웃음을 달고 사는 등평이었지만, 그 중 진정으로 웃는 웃음은 극히 드물었다.남들은 그를 두고 낙천적이라고 했지만, 실상 등평 자신은 세상사에 대해 상당부분 냉소적이어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드물었다.그런 그가 이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고대릉에게 벌써부터 자못 세심한 관심을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아무리 고대릉이 무영가의 신임가주라고 해도 말이다.그러나 아직까지는 등평 그 자신조차도 잘 알지 못했지만, 그가 고대릉에게 가지는 관심은 냉철하고 분석적인 관심이 아니었다.그것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생겨나 버린, 조그맣지만 따뜻한 인간적인 관심이었다.등평은 다시 숲을 우회하여 달려 나가서 고대릉의 이십 여장 앞에서 속도의 보조를 맞추었다.잠시 더 달려가다가 등평이 걸음을 멈추고 고대릉이 가까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가주님! 좀 쉬어 가도록 하지요.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저는 이제 지쳐서 더 이상 가기가 힘이 듭니다."고대릉도 등평의 그 말이 일부러 지어 하는 말인지를 뻔히 알았지만, 그 자신도 굳이 계속 가자고 고집할 처지가 아닌지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길게 숨을 돌리고 난 후,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고대릉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등평을 쳐다보았다.그 눈길에 은근히 놀라고 감탄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난데없는 한바탕의 달리기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등평에 대한 고대릉의 평은 그렇게 좋지를 못하였다.조부 고진당조차 인정했을 만큼 대단한 식견을 지닌 등평이었지만, 막상 며칠을 겪어 보고 나니 의외로 점잖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면들이 보였던 것이다.그러나 이제 다시금 새롭게 발견한 등평의 재주가 실로 놀랍지 아니한가.비록 학문이나 식견이 아닌, 한낱 발을 놀리는 재주에 불과하긴 하지만 말이다.고대릉도 등평이 은연중 자신에게 걷고 달리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비록 배우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 바는 있었지만, 등평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으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방법을 흉내 낸 것도 사실이었다.그러나 고대릉은 그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사실 고대릉이 지금 가지고 있는 문과 무에 대한 관념은, 그 자신의 주관이라기보다는 부친과 조부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큰 것이었다.이미 등평이 평가한 바와 같이, 고대릉의 타고난 품성은 의외로 자유분방 하였다.비록 고집이 있을지언정, 무엇을 배우는데 있어서 규범과 기준의 틀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방금도 등평의 재주를 흉내 내면서, 그 방법이 실제로 대단한 효과가 있음을 알고는 등평에 대해 감탄과 함께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그렇게 그들은 주종간(主從間)으로서, 또 의숙질간(義叔桎間)으로서, 또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 사이로서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하지만 세상사에 대해 통달하고 노회(老獪)하다 스스로 자부하는 등평조차도, 사람 사이의 정이 언제 어떻게 시작해서 얼마나 빨리 쌓여 간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통달하지 못하였다. 등평과 고대릉이 장성(長城)을 넘어 북경에 도착한 것은 해를 넘겨 새해를 맞이한지 열흘 여가 지난 때였다.그 동안 등평에게는 급할 일이 전혀 없었다.고대릉 역시 처음으로 접하는 세상의 문물이 신기하기만 하다 보니, 외조부의 병환 걱정이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별로 없었다.그 동안 고대릉은 그가 지금까지 나고 자라온 십칠 년 세월동안 보고 익힌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그렇지 않아도 한창 세상 일에 대해 물 빨아 들이는 솜과도 같을 시기가 아닌가.등평에게는 별 변화 없는 반 년 간이었지만, 고대릉에게는 엄청난 충격의 연속인 반 년 간이었다.고대릉이 겉보기에는 순박하고 순진한 것만 같아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일이나 상황에 대해서 그냥 생각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늘 나름대로의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등평은 고대릉의 그같은 성품에 대해 솔직히 성가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어 하였다.그러한 주관이란 것은 단순히 학문을 많이 배운다고 해서, 혹은 세상을 오래 살았다고 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그것이야말로 타고난 기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크든 작든 하나의 가문을 이끌어 나가려면 그런 기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대릉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조그만 장점들을 하나씩 새로 발견해 낼 때마다, 그럴수록 등평의 욕심도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이제는 본격적으로 세상물정에 대해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그 치열한 생존의 법칙에 대해서도 알아 가야 할 때이다. 어차피 무영가의 존립기반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니까.'사실 등평은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좀 더 느긋하게 마음을 먹기로 하였다.일이란 것은 섣불리 욕심을 부릴수록,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인 법이니까.특히나 마음을 키워 나가는 일에 있어서는 조그만 착오로 자칫 치유하기 어려운 위축과 소심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단련해 나가야 한다.'외가라고 찾아간 북경 외곽의 장원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있었다.물론 처음부터 홍걸은 거기에 없었던 것이지만.막연해 하는 고대릉에 대해 등평은 느긋하기만 하였다."외조부께 아마도 무슨 급한 사정이 생기셨나 봅니다. 그러나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허허허! 비록 병환 중이시라고는 하나, 천하에서 외조부님을 곤란하게 만들 일이란 별로 없을 테니까요."비록 석연치 않고 궁금한 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고대릉은 캐묻지 않았다.등평이라고 그간 외조부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리 없다는 생각과, 만약에 물어서 나올 대답이 있었다면 묻기 전에 등평이 먼저 얘기를 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어쨌든 이곳은 장백산에서 수천 리 떨어진 북경이었다.고대릉으로서는 이제 등평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나 마찬가지의 신세인 것이다.원단(元旦)의 들뜸과 흥청거림은 잦아들었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종종걸음이 분주하였다.한겨울 북경의 날씨는 살을 엔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추웠다.등평은 목구멍을 화끈하게 타고 넘어가는 독주 한 잔이 절로 그리워졌다.다분히 의미가 담긴 눈으로 등평이 슬쩍 고대릉의 옆모습을 살폈다.아직까지 고대릉에게는 고리타분한 먹물기질이 다분하였지만, 그러나 순박한 산골소년 하나 꼬시는 일쯤이 등평에게는 하등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또한 사춘기 소년하나를 타락(?) 시키는 일은 등평의 양심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다.양심이라는 것이 본래 스스로가 하는 일이 옳다고 믿는 마음이 아니겠는가.당평은 스스로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옳다고 믿는 사람이었다.'남자가 어른이 되는 첩경 중의 하나가 바로 주색잡기(酒色雜技)지. 영웅호색이라는 멋진 말도 괜히 생겨난 말은 아닐 게야.'사실 굳이 영웅이 아니라도, 사내치고 주색을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 될 것이며, 더구나 본능적으로 넘치는 시기에 색을 마다하기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해를 넘겼으니 고대릉의 나이 이제 열 여덟.가히 피 끓는 청춘이라고 해야 할 시기가 아니던가.어스름 무렵.등평과 고대릉은 북경 중심지의 금화궁(金華宮) 앞에 있었다.금화궁!북경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루다.등평은 이번에 제법 격이 있는 기루를 택하였다.원래는 홍등가(紅燈街)로 갈까 하였으나, 고대릉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돈을 좀 쓰기로 하였다.어차피 등평에게 있어 돈이란 것은 마치 물과도 같은 것이었다.늘 넘칠 만큼 있었고, 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현지조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금화궁의 안쪽은 다시 일품관, 이품관, 삼품관의 세 구역으로 나뉘어졌다.그 중 가장 등급이 낮은 삼품관이라 할지라도 일반 민초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의 거금이 필요하였다.등평과 고대릉은 지금 삼품관의 출입문 앞에 서 있었는데, 높다란 담장너머로 보이는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의 위용이 자못 대단하였다.탕! 탕!등평이 뒷짐을 지고 대문에 달려 있는 쇠고리를 두들기자, 이내 통문이 열렸다.등평이 쭈뼛거리는 고대릉의 손을 이끌어 통문을 들어서자, 단정한 용모의 중년사내 하나가 그들을 맞았다.깨끗한 백의 문사복 차림에 유순한 얼굴, 그리고 은은한 기품까지 느껴지는 온화한 미소.사내의 정중한 예우에 고대릉이 일시 당황스러워 하며 두 손을 모아 쥐고 마주 고개를 숙였다.그 동안 보고 들은 바가 있어 기루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까지 순진하지는 않은 고대릉이었다.그러나 눈앞에 비치는 모든 것이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안쪽으로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가산(假山)이 있고, 연못이 있고, 잘 꾸며진 화원이 있었다.사이사이로 길이 나있었는데, 적당한 간격으로 석등(石燈)들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조금은 얼이 빠진 모습의 고대릉을 보며 빙긋이 웃고 섰던 등평이 문사복의 사내에게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받게."은자 한 냥이었다.접객을 업으로 하는 사내에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횡재였다.당장에 사내의 허리가 확 접혔다."아이구! 대인 어르신! 뭘 이런 걸 다....!"등평이 사내에게 슬쩍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귓속말로 속삭였다."우리 공자님이 이런 곳에는 처음 나들이 하시는 길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적당한 애들로 특별히 신경을 좀 써 주면 좋겠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사내의 허리가 다시 한 번 넙죽 접혔다."여부가 있겠습니까? 적당히... 아주 적당히 잘 익은 아이들로 골라서 준비를 시키겠습니다."등평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사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고는, 서너 걸음 앞쪽에서 정원 구경에 여념이 없는 고대릉에게로 걸어갔다.세상의 반은 여자라고 하지만, 그러나 미인을 보는 경우란 그리 흔하지 않다.하지만 기루에서라면 얘기가 다르다.조금만 과장을 하자면, 사실 예쁜 여자는 기루에 다 모여 있다.아담한 방에 술상이 차려지고 곧 이어 들어 온 화사한 미모의 두 기녀들을 보고, 고대릉은 금방 수줍어 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홍화(紅花)와 이화(梨花)라는 이름의 기녀들.기녀들의 나이를 짐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등평은 한 눈에 그녀들의 나이가 둘 다 스물은 훌쩍 넘겼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소위 한물 간 퇴물급에 가까웠지만, 자신이 미리 주문(?)을 해 놓은 바였다.등평이 좀 더 농익은 교태가 흐르는 홍화를 자신의 곁에 앉히고, 짐짓 얌전을 빼는 이화를 고대릉의 곁에다 앉혔다.이화의 숨겨진 교태가 오히려 홍화를 능가하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교태를 숨길 줄 안다는 것은, 그때그때 손님의 취향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맞추어 갈 줄 아는 노련함이 있다는 것이리라."호호호! 이분 공자님께서는 수줍음을 많이 타시는 모양이군요."홍화가 금방이라도 품에 안길 듯 등평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교소를 흘렸다.슬쩍 홍화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등평이 장단을 맞추었다."어허! 우리 공자님께서는 학문을 깊이 공부하시는 분이시라, 이런 곳엘 처음오시다 보니 잠시 어색해서 그러시는 것이다. 여하간 오늘은 그럴 만한 일이 있어 특별히 오신 것이니 잘 모셔야 할 것이야.""어쩐지! 공자님께서는 본래 글 읽는 문사님이셨군요. 호호호!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우선 소녀의 술부터 한 잔 받으시와요."홍화가 등평을 제쳐 두고서 먼저 고대릉에게 잔을 권하였다.고대릉이 설핏 이마를 찡그렸으나,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잔을 받았다.그리고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곧바로 비워 버렸다."아아! 어쩌면 저리도 시원시원하실까!"홍화가 박수라도 칠 듯 호들갑을 떨었다.고대릉이 비록 기루 출입은 처음이지만, 술은 이미 몇 차례 마셔 본 적이 있었다.물론 등평이 영웅두주불사론(英雄斗酒不辭論)을 내세워 강권한 때문이었는데, 그렇게 두어 번 술 맛을 본 뒤로부터 고대릉은 의외로 곧잘 술잔을 비워 내게 된 바 있었다.이번에는 고대릉의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이화가 엷게 미소지으며 술병을 들어 고대릉의 잔을 채웠다.고대릉이 등평에게 배우기를 그렇게 배운 것인지, 아니면 기녀들과 함께 한 자리의 쑥스러움 때문인지, 또 다시 술잔을 냉큼 비워 버렸다.이화가 슬쩍 등평의 눈치를 보는데, 등평이 싱긋이 웃으며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이내 홍화와 시시덕거리기 시작하였다.이화더러 알아서 하라는 뜻일 터였다.이화가 다시 다소곳이 술잔을 따르는데,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슬쩍 가슴으로 고대릉의 팔을 스치는 것이었다.순간 고대릉의 어깨가 움찔하였다.팔을 지그시 누르고 지나가는 물컹한 살덩이의 감촉.그리고 진한 여인내의 살 냄새. 분 냄새.고대릉으로서는 어머니 홍리화 이외에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느껴 보는 여인의 느낌이었다.등평이 안보는 척 보고 있자니 고대릉은 이화가 주는 대로 연신 술잔을 비워 내고 있었다.이때까지 등평이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셔 봤지만, 고대릉은 아직까지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물론 고대릉이 스스로 조심하고 절제하기도 했었지만, 그 외에도 체질적으로 술에 대해 제법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때로는 꽤나 마셨다 싶은데도, 고대릉은 이상하게도 잘 취하지를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벌써부터 불콰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이화가 노련한 덕분이었다.고대릉 같이 순박한 인물에게 '날 잡아 잡수'하는 식의 들이미는 교태를 부리면 오히려 경계를 하게 된다.이화가 노련하다는 것은 간간이 고대릉이 시키는 말만 받아 하며 나름의 무게를 잡았고, 또한 다소곳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였다.이화의 그런 태도와 몸가짐이 고대릉에게는 일종의 기품으로 비친 모양이었다.사실 이화가 아주 교태를 부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다만 표시 나지 않게 은밀하고도 은근한 교태를 부리는 것이었다.전혀 의도하지 않은 듯 슬쩍 어깨나 가슴을 부대끼고는, 제가 먼저 놀란 양 흠칫 거리며 속눈썹을 바르르 떨곤 하였다.그러니 고대릉 같은 왕초보가 그 은근한 유혹을 어찌 견디랴.다만 이유도 모르게 목만 자꾸 마를 뿐이었다.등평의 입가로 의미심장 한 미소가 맺혔다.'흐흐흐! 오늘 잘 하면 가주에게서 쓸모없는 딱지 하나를 떼어 낼 수 있겠군.'고대릉은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호기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이화에게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려 놓고는, 내심 아차 하기도 했다.술이 과했다.과했다기보다는 급했다.기녀와 함께 하는 자리의 쑥스러움을 면해 보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사실 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기도 했다.몇 차례 술을 마시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주기(酒氣)도 결국은 하나의 기운이었다.술이 목구멍을 넘어가 내장으로 흡수되는 그 순간부터, 외단(外丹)으로부터 주기와 상생되는 기운이 흘러 들어와 주기를 어느 정도 중화시켰다.그런 현상은 술이 독한 종류일수록 좀 더 뚜렷하였다.물론 그런 외단의 작용으로도 주기의 전부 다를 중화시켜 내지는 못하는 것이어서, 일정량 이상을 마시게 되면 결국은 취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이전까지는 등평과 보조를 맞추며 마시다 보면, 그저 적당히 취기가 올라올 즈음에는 자리가 파하곤 하였었다.적당한 정도의 취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으므로, 고대릉의 술에 대한 인식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몸의 상태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뱃속의 열기가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자꾸만 쌓여 가고 있었다.고대릉은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마치 어릴 적에 앓았던 갑갑증이 다시 도지는 것만 같았다.더욱이 마음이 쓰이는 것은 지금 자신이 너무 들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내부에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존재 하나가 깊숙이 숨어 있다가, 이제 술기운을 빌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이윽고 고대릉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머, 공자님! 왜...?"이화가 따라 일어서며 살며시 팔을 부축하였다.그 사근 거리는 몸짓과 물씬 풍겨 오는 체향(體香)에 고대릉이 얼른 팔을 뺐다."아니, 아니오. 잠깐 측간에..."그제야 이화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밖으로 나온 고대릉은 정원사이로 난 백석(白石)깔린 소로(小路)를 따라 조금 걷다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는 석등 옆에 섰다.제법 매섭게 차가운 밤바람을 쐬자 얼굴이 시원해졌다.가만히 선 채 외단에 의식을 집중하자,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외단을 형성하고 난 이후로 지금처럼 의식적으로 집중해보기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평상시에 외단은 그가 집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늘 곁을 따라다니는 친근한 존재일 뿐이었다.조금 속이 가라앉은 고대릉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 앞쪽 나지막한 담장가운데의 쪽문이 거칠게 열렸다.이어 급한 걸음으로 들어 선 자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장한이었다.얼굴을 덮다시피 한 시커먼 구레나룻으로 인해 자세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보아 그는 많이 취해 있었다.휘청거리며 걸어 오던 털보장한이 고대릉의 앞에 이르러 문득 멈추어 섰다.장한은 고대릉과 비슷한 키였으나 딱 벌어진 가슴과 어깨로 인해 무척이나 다부져 보였다.노려보는 퉁방울 같은 두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벌겋게 핏발 선 눈에 취기와 함께 무슨 일엔가 잔뜩 골이 난 듯한 노기가 번득거리고 있었다.고대릉은 그만 눈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장한의 거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일이었다.장한이 그 시커먼 얼굴을 고대릉의 얼굴 가까이로 바짝 들이밀었다.이어 장한이 입술을 오므려 고대릉의 얼굴로 천천히 입김을 불어내었다."후~!"독한 술 냄새와 함께 견디기 어려운 역한 냄새들이 마구 뒤섞여서 덮쳐 왔지만, 고대릉은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온 몸이 얼어붙은 듯 하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 했다.문득 장한의 수북하게 자란 수염 사이로 하얀 빛이 보였다.장한은 웃고 있었다.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버린 고대릉의 모습에, 장한은 자못 통쾌한 듯 빙글거렸다.이윽고 몸을 돌린 장한이 다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그제야 고대릉은 긴 숨을 불어 내쉴 수 있었다."휴우!"얼어붙었던 그의 얼굴이 잠깐 풀렸다가는 이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그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그리고 고대릉이 마치 쥐어 짜내듯이 힘들게 중얼거렸다. 들릴 듯 말듯 나직하게."취객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용렬한 짓일 뿐이다."그러나 고대릉의 경직된 얼굴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털보장한이 향하는 곳은 바로 방금 전에 고대릉이 나온 방이었다.장한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방문을 왈칵 열어젖히고는, 가죽신을 신은 그대로 방안으로 들어갔다.곧 이어 터져 나오는 장한의 고함소리."오호라? 너 이년! 과연 니년이 여기에 있었구나. 오늘밤 내가 지불한 은자가 얼마인데, 육시랄 년이 감히 나한테 헛물을 켜게 만들어? 흐흐흐! 이 금욱(金旭) 나리가 어떤 분이신지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흐흐흐! 오늘 이 나리가 제대로 한 번 맛을 보여 주마."곧 이어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 하나가 애걸하였다."아이고. 나으리! 제발 고정하시와요. 소첩은 그저 나으리께서 술이 과하시길래, 그저 잠시간 쉬게 해 드리려던 것뿐이었습니다."이화의 목소리였다.그런데 지금 그녀의 목소리와 어투는 고대릉이 방금 전까지 듣고 느끼던 그 이화의 것이 아닌 듯, 낯설게 만 들렸다."으음! 저 자의 행패가 너무 지나치구나."고대릉이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그러나 막상 그의 발은 여전히 바닥에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당장에 달려가서 장한의 무례를 나무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에 앞서, 좀 전 장한의 거칠게 번뜩거리던 눈빛과 시커먼 수염 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치열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다.이전까지 느껴 보지 못하다가 오늘 갑자기 겪게 된 두려움이라는 괴물이, 지금 고대릉의 몸을 꼼짝도 못하도록 꽁꽁 묶어 놓고 있었다.등평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장한과 이화의 목소리만 계속하여 들렸다."흐흐흐! 좋다. 이 나으리는 이제 충분히 쉬어서 넘치는 힘을 주체를 못할 지경이다. 이제 나는 네게 특별한 맛을 보여 줄 작정이니, 너는 냉큼 일어나서 나를 따라오도록 하여라."이어 한결 간드러지게 늘어지는 이화의 목소리가 뒤따랐다."나으리! 잠깐만요. 먼저 가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소첩이 금방 뒤쫓아서 가겠사옵니다."그러나 이화의 교태가 장한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듯, 바로 이어 장한이 거칠게 호통 치는 소리가 났다."어허! 이 년이 감히 또다시 서툰 장난을 치려고 해?"그리고 잇따르는 소리들.술상 뒤집히는 소리.뺨 때리는 소리.그리고 이화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뒤따랐다.와장창!쫘악!"아아악!"일순 고대릉이 덩달아서 진저리를 치더니, 무작정 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이런..."방은 이미 엉망이었다.술상은 내동댕이 처져 있고, 이화는 방바닥에 쓰러져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등평은 방 한구석에 서 있었는데, 그의 등 뒤로 놀라고 겁에 질린 모습의 홍화가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고대릉이 자세히 보았다면, 지금 등평이 전혀 놀라기는커녕 마치 구경꾼과도 같은 느긋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테지만, 그러나 고대릉에게는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얼어붙어 있던 그의 몸을 떠밀어 무작정 달려오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화의 비명소리였다.물론 돈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술 시중을 들어주고 자신에게 정성을 보여 주었던 여인이 바로 눈앞에서 거친 사내에게 포악질을 당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러한 분기(忿氣)가 고대릉으로 하여금 일시나마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멈추시오. 아무리 기루라고 해도 분명 경우는 있을 터인데, 지금 이 무슨 안하무인의 행패요?"고대릉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려 나왔다.장한의 눈이 일시 의아함을 띠고 고대릉을 향했다.그리고 같은 순간 등평의 눈빛에도 한 가닥 깊숙한 흥미가 동하고 있었다.'호오? 호통까지나 친다? 저 순박함 속에도 제법 강단이 숨어 있었단 말이지? 아니면 술기운 덕인가?'어느 모로 보나 유약해 빠진 먹물의 행색이 뚜렷했지만, 그래도 호통을 치고 나서는 고대릉의 기개는 제법 늠름한 데가 있었다.이어 고대릉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 애절한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화를 일으켜 세워 자신의 뒤쪽으로 돌려 세웠다.그리고는 앞으로 두어 걸음을 걸어가 장한을 향해서 우뚝 버티고 섰다.장한의 눈에서 취기가 가시는 듯 했다.건들거리던 장한의 몸이 바로 서며 허리와 어깨선이 쭈욱 펴졌다.몇 차례 희번덕거리던 장한의 눈동자에 진득하니 살기와도 닮은 기운이 실려 가고 있었다.등평의 어깨가 두어 번이나 움찔거렸다.그러나 그는 결국 지켜보는 쪽을 택하기로 하였다.'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아니 불여일경험(不如一經驗)이다. 일부러는 돈 주고도 하기 어려운 경험이니, 크게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한 번쯤 겪어 보게 하는 것도 괜찮으리라.'장한의 살기 어린 눈길과 자신의 눈길을 겨우 맞추고 서 있는 고대릉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언제 누구하고 작은 다툼이라도 해본 일이 없었던 고대릉이었다.그럴 기회도 없었거니와, 다른 사람과 다툴 일을 만든다는 자체가 이미 선비로서의 처신을 잘못한 것이라고 배운 터였다.'이 자가 비록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성정을 지니고 있으나, 차근차근히 이치로서 사리분별을 따지면 될 터... 설마 사람을 치기까지 하랴?'그러나 머리와는 달리 가슴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뭐라고 말을 시작하기는 해야겠는데,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버티고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힘에 겨웠다.바로 그 때."이 새끼!"한 소리 거칠고도 짧은 고함소리와 함께 장한이 고대릉의 얼굴을 향해 곧게 주먹을 뻗어 쳐냈다.순간 고대릉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가는 곧바로 꽉 감겨 버렸다.차마 장한의 주먹을 바로 보지 못하고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택하고 만 것이다."제길!"등평이 자신도 모르게 실망과 안타까움의 외마디를 뱉어 내고 말았다.그런데 바로 그 때, 묘한 일이 벌어졌다.겁에 질려 잔뜩 움츠린 고대릉의 허리가 살짝 비틀리며, 장한의 주먹을 얼굴 바로 옆으로 닿을 듯 말듯 스쳐 보낸 것이었다.'엇?'등평의 눈빛에 이채 한 가닥이 스치고 지나갔다.'대단한 반사신경이다.'그것을 반사신경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한 묘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방금의 그 회피동작은 전혀 고대릉의 자의식에 의한 것이 아닌, 어떤 본능적인 반응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그러나 요행은 거기까지였다.장한은 결코 기세만 앞세워 겁만 주는 빈 허우대가 아니었다.주먹이 허탕을 치는 순간 앞으로 쏠린 장한의 몸이 그대로 고대릉의 몸을 덮쳐 버렸다.이어 두 손으로 고대릉의 어깨를 제압한 장한의 양 무릎이 눈부시게 작렬하였다.대단한 민첩성이요, 놀라운 연결동작이었다.장한의 동작은 결코 술 취한 사람의 몸놀림 같지 않았으며, 숱하게 몸에 붙여 자연스럽게 된 익숙한 동작들이었다.퍽!팍!장한의 양 무릎이 번갈아 고대릉의 복부와 가슴을 찍었고, 고대릉에게서는 숨 막히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욱!우욱!등평의 안색이 다시금 잔뜩 굳어졌다.털보장한의 몸놀림에서 특별히 이거다 할 만큼 무공을 익힌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 딱딱 끊어 치는 파괴력과 짜임새 있는 동작이 결코 사람을 한두 번 패 본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등평은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그대로 둔다면 고대릉의 몸 몇 군데가 부러지고 터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 같았다.'아무래도 괜한 짓을 벌인 것이다.'그런데 씁쓸한 표정으로 막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던 등평이 문득 몸을 멈춰 세웠다.그의 눈빛이 다시 빛나고 있었다.'으음! 버티고 있다?'고대릉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구부려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차마 상대를 바라보지도 못하겠다는 겁에 질린 자세였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와중에도 고대릉의 몸은 순간순간 미묘한 꿈틀거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고대릉의 그 작은 반응들이 미묘하다는 것은, 장한의 타격을 맞고 난 이후에 보이는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마치 상대가 어디를 때리려는지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고대릉의 몸은 조금씩 미리 반응을 하고 있었다.그럼으로써 고대릉의 몸은 가해지는 타격의 충격을 완충시키고, 또한 최소화시켜내고 있었다.그러나 고대릉의 입에서는 연신 억눌린 신음소리가 토해지고 있었다.그것은 고대릉의 몸이 보이는 그러한 기묘한 반응들이 결코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였다.'겁에 질려 있지만, 타고난 감각이 있다? 저만하면 맷집도 제법 괜찮다고 할 수 있고... 흐음! 어쨌든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으니, 조금 더 두고 볼만하다.'등평은 그의 어린 가주가 당하는 장면을 조금만 더 참고 지켜보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사실 이때쯤에 등평의 마음은 아주아주 약간, 느긋해져 가고 있었다.털보장한의 공격이 다양해지고 있었다.고대릉이 싸움에는 전혀 문외한이며 감히 반격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알아채었으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게 된 것이다.마치 일인연무라도 하는 것처럼 장한의 장권각퇴(掌拳脚腿)가 화려하게 폭발하였다.퍽!팍!팔꿈치로는 등을 찍고, 주먹으로는 옆구리를 쳤다.콰악!퍼억!짧게 복부를 치고, 숙여지는 상대의 등판에다 발뒤꿈치를 내려찍었다.쿵!그러고도 고대릉의 몸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장한의 눈에서 일시 흰자위가 번뜩거렸다.그러더니 이윽고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는 고대릉의 목을 오른팔 속으로 가두고 조이기 시작하였다."뒈져! 새꺄!"이내 고대릉에게서 급하게 숨넘어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컥!""커억!"등평이 슬그머니 움직였다.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 하나를 집어 든 그가 장한의 뒷쪽으로 가만히 다가섰다.그리고,퍽!술병이 박살나며 장한의 몸이 일순 멈칫하였다.이어 장한의 전신에서 맥이 풀리며, 그의 신형이 서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쿵!고대릉의 입에서 길게 되돌리는 숨결이 터져 나왔다."휴우우!"겨우 허리를 바로 세우고 선 고대릉의 눈에 부서진 술병의 손잡이를 잡고서 멋쩍게 웃고 서 있는 등평의 모습이 보였다. 등평은 고대릉을 데리고 서둘러 기루를 빠져 나왔다.이 바닥의 특성상, 일단 소란이 벌어졌다면 잠시라도 더 머물러서 좋을 일은 없었다.그리고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그 난리를 쳤는데도 기루의 어깨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점도 못내 찜찜하였다.기루에서 벌어진 일은 기루의 문을 나서는 순간 없던 일로 되는 법.어쨌거나 이럴 때는 일단 자리를 뜨고 보는 것이 최선의 처신이었다.화대로 이화와 홍화에게 각각 은자 한 냥씩.그리고 술값으로 은자 다섯 냥.모든 소란의 원인인 이화는 은자 한 냥을 받아 들고서 쌩긋이 웃었다.뺨을 맞고 거친 욕설을 들었으나, 그러면 어떠랴.그녀는 오늘 드물게 큰 돈을 화대로 챙긴 것이었다.그것이면 다른 모든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등평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서면서도 고대릉은 이화에게로 향한 멍한 눈빛을 거두지 못하였다.그런 고대릉을 향해 이화는 생글거리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기루의 대문을 벗어나며 등평은 쓰게 웃었다.뜻밖의 소란 덕분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맘먹었던 그의 좋은 일은 아주 물 건너 가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가난한 민초들이라면 몇 달은 족히 먹고 살 엄청난 은자를 치루고도 말이다.대신 등평은 예정하지 않았던 소득을 얻었다.고대릉을 위한 소득이었다.비록 지금은 아리고 쓰리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고대릉에게, 머지않아 훌륭한 보약으로서의 약효를 발휘할 것이 틀림없었다. 기루에서 나온 이후 고대릉은 내내 말이 없었다.등평도 굳이 그에게 말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다는 아니겠지만, 고대릉이 겪었을 내심의 충격을 등평이 아주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한낱 시전의 부랑배에 불과한 자의 기세에 압도당해버렸고, 또 그 자의 폭력에 대해 따지고 꾸짖기는커녕 감히 대항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터였다.그러니 그 치욕감과 모멸감, 그리고 부끄러움이 어떠할 것인가.아마도 한동안 고대릉은 견디기 어려운 자괴감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적당한 객잔에 방을 얻어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 날.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나서 등평은 여전히 넋이 빠진 듯 있는 고대릉의 손을 이끌어 북경시전(北京市廛)으로 향하였다.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등평의 목소리가 자못 수다스러웠다."북경에 왔으면 다른 건 몰라도 북경시전만큼은 꼭 들러 보아야 합니다. 천하에서 가장 크다는 삼대시전 중에서도 최대로 꼽히는 곳이 바로 북경시전입니다."등평은 북경시전을 보고 난 다음에는 곧바로 북경을 벗어날 생각이었다.고대릉은 무림인이 되어야만 했다.그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재 등평의 제일가는 사명이었다.그 사명을 위해 고대릉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보다 광활한 천하와, 또 강호무림의 참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그 광대무변의 자유로움과 다변함, 그 호쾌함과 웅대함을 보고 난다면...어쩌면 고대릉은 그 스스로가 무림인이 될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북경시전은 그 명성대로 여느 군소성도의 시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거래되는 물목(物目)들의 다양성, 상가와 상인들의 수와 규모, 그리고 잘 구획된 길과 그 길 위를 가득 메우다시피 한 인파의 규모가 또한 그러했다.고대릉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나, 그의 눈은 여지없이 은근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담고서 주변의 광경들을 살피고 있었다.열여덟!소년이기도 하고 청년이기도 하다.세상의 온갖 시름을 한 몸에 짊어진 듯 심각하다가도, 금방 눈앞의 흥미와 호기심에 온 신경을 빼앗겨 버리는 나이이다.'후훗!'등평의 입가로 문득 잔잔한 미소 한 가닥이 스쳐 지나갔다.고대릉을 앞 세우고 느긋하게 걷고 있던 등평의 눈빛이 일순 미미하게 반짝였다.소매치기였다.십여 장 떨어진 앞쪽.열 서넛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인파의 사이사이를 교묘하게 스쳐 다니며 다가오고 있었다.'꾼이군.'소매치기였다.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시전구경에 신이 나 있는 평범한 소년으로만 보였겠지만, 그러나 그런 방면에서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등평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녀석에게서는 제법 노련함이 돋보이고 있었다.하긴 그러기에 방수(傍手)도 없이 홀로 일을 나온 것이리라.그러나 등평의 눈빛은 곧 원래의 평이한 눈빛으로 돌아왔다.이런 시전과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물론 등평, 그와 같은 전문가들에게만 한정되는 경우이겠지만.그런데 그냥 못 본척하고 눈길을 거두던 등평의 눈빛이 다시금 반짝거렸다.불현듯 떠 오른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충격요법이라...?'충격은 줄 때 한꺼번에 주어야 효과적이다.물론 감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주어야 하겠지만.어차피 고대릉의 그 순박하고도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일은 아니었다.그렇다면 기회있을 때마다 자극을 주어 꾸준히 고쳐 나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주어지는 환경에 결국은 적응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사람이 아니겠는가.소매치기 소년은 이제 그들의 삼 장 앞에 와 있었다.'어라...?'등평이 내심 투덜거렸다.순간적으로 고대릉을 훑고 지나간 소년의 눈빛에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고대릉을 그저 빈털털이로 보았다는 얘기였다.하긴 제대로 보긴 보았다. 은자와 금화는 모두 등평이 가지고 있었으니까.기실 등평의 품속에는 적지 않은 은자가 들어 있었고, 더구나 등에 맨 봇짐 속에는 상상 이상의 금이 들어있었다.그러나 같은 전문가라도 엄연히 그 격이 달랐다.소매치기 소년의 안목정도로 등평에게서 조금이라도 금은보화를 가진 기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어엇!"돌부리에라도 걸린 것처럼 등평의 몸이 일순 비틀하더니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그 순간 등에 매고 있던 그의 봇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등평이 황급히 봇짐을 끌어당겨 품 속으로 안고서, 아주 조심스러운 눈길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그리고 등평은 소매치기 소년의 눈에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반짝거림을 보았다.'훗! 놈! 제법 자질이 있는 놈이었구나."봇짐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등평의 품안으로 안기는 그 짧은 순간에, 소매치기 소년은 봇짐의 벌어진 틈 사이로 아주잠깐 비쳤던 누른빛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등평이 기대했던 바였다."의숙! 괜찮으세요?"염려스럽게 묻는 고대릉에게 등평이 봇짐을 불쑥 내밀었다."아이고...! 가주님, 이거 잠시만 좀 들고 계십시오."등평이 절뚝이는 걸음으로 한 쪽 옆으로 비켜나 허리를 구부리고서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그리고 소매치기 소년은 고대릉의 옆을 지나쳐 갔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방향을 틀어 뒷 쪽으로부터 고대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그것은 마치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았다.제 자리에 서서 생각 없이 등평에게 눈길을 주고 있던 고대릉이 문득 크게 한 걸음을 옆으로 비켜선 것이었다.그리고는 스칠 듯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열심히 흙을 터는 체 하면서 등평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역시 그에게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감각이 있는 것인가?'어제 기루에서의 일과 방금의 일을 연계시켜 등평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소년은 아주 잠깐 당황하는 듯 하였으나, 이내 친근하게 씩 웃어 보였다.그리고는 빤히 고대릉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아주 태연스럽게 손을 뻗어 고대릉이 들고 있던 봇짐을 잡았다.고대릉은 영문을 모르고 그저 얼떨떨해 하는 기색이었다.아직까지도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내놔! 이 촌놈아!"버럭 외치며 소년이 봇짐을 와락 낚아챘다.그리고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다다다닥!그런데도 고대릉은 그저 놀라고 망연한 모습으로 벌써 저 만치 도망치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등평은 일시 실없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휴우! 촌놈이라...?'등평이 사뭇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저저... 저 돈 없으면 우리는 한푼 없는 거지가 되고 맙니다. 저 도둑놈을 잡아야 합니다."당평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얼떨결에 고대릉도 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등평이 고대릉에게만 급한 듯 행동을 했지, 막상 주위에다 소리를 쳐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고대릉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등평은 소매치기 소년의 뒤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따라붙으면서, 한편으로는 옆에서 함께 달리는 고대릉에게서도 주의를 놓치지 않았다.지난 반 년 간의 여정이 효과가 있었는지, 꽤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고대릉의 몸 놀림과 호흡은 조용하고도 침착하였다.등평은 괜히 신이 나는 기분이 되어, 옆의 고대릉이 보지 못하게 얼굴을 돌리고 실없이 혼자 웃었다. '니미랄! 재수 옴 붙었다.'소아자(小兒子)는 지금 전력으로 도망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달리는 것이라면 같은 패거리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으로 인정받는 소아자였다.그런데 처음에 어리숙하고 둔하게만 보이던 저 괴상한 놈들은, 벌써 일각 동안이나 끈질기게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게다가 자신은 이미 숨이 턱에 받쳐 있는데, 놈들은 조금도 포기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소아자는 악이 받쳤다.'겁 대가리 없는 놈들! 감히 이 소아자님으로 하여금 땀을 빼게 만들어? 오냐. 조금만 더 쫓아와 봐라.'소아자는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넜다.주변은 어느 듯 고만고만한 작은 집들과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토담으로 이루어진 골목들을 얼마나 돌고 돌았을까.어느 담벼락을 돌아가니 앞이 딱 막힌 막다른 골목이었다.그 곳에 소아자가 멈추어 서서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그런데 지금껏 쫓기던 기색에서 일변하여 소아자의 모습에서는 의기양양한 느긋함이 비치고 있었다."이봐! 도대체 뭘 믿고서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여기까지 쫓아 왔나? 자!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어디 맘대로 한 번 해 보셔!"등평이 찔끔하면서 슬며시 고대릉의 등뒤로 돌아갔다.소아자가 씨익 웃으며 기세를 돋구었다.그의 손에는 어느새 작은 단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쯧쯧! 그냥 대충 포기를 할 일이지. 그랬다면 서로간에 피를 보는 일까지는 없을 거잖아? 그까짓 금덩이가 아무리 귀하다 한들, 목숨보다 귀하진 않을 거 아냐?"이제 열 네댓이나 되었을 소년의 입담치고는 꽤나 걸쭉하였다.등평이 은근 슬쩍 고대릉의 등을 떠밀며 사뭇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 냈다."가주님!"고대릉이 엉거주춤하게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섰다.당혹스럽고 두려웠지만 눈앞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다만 어제와는 달리 몸이 얼어붙는 정도까지는 두려움이 밀려들지 않았다.비록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리기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무엇보다도 눈 앞의 상대가 그보다는 서너 살이나 어려 보이는 소년이라는 점에, 그래도 조금은 용기를 내 볼 수 있었다."이 보게. 소형제. 그러지 말게. 봇짐만 곱게 돌려준다면, 더 이상의 잘못은 묻지 않도록 하겠네."한편 소아자는 당평이 고대릉을 부르는 '가주님'이란 소리에 혹시나 뭔가 있나 하는 생각으로 괜히 찜찜해 하고 있었는데, 고대릉의 은근히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는 적이 안심하며 코웃음을 쳤다."흥! 소형제? 크헤헤헤! 촌놈이 그래도 어디서 주어들은 풍월이 조금은 있나 보군. 그러나 이 소아자님은 너의 소형제가 아니야. 노형(老兄)라면 또 몰라도....."한껏 고대릉을 비웃어 준 소아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이봐! 형들, 이리 좀 나와 봐! 이 촌뜨기가 무슨 가주라는데, 형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보여?"막다른 골목으로만 보이더니, 그 모퉁이에 아마도 좁은 샛길이 또 하나 있었나 보았다."클클!""크크큭!"겨우 참는다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골목 안쪽으로부터 네댓 명이 새로이 나타났다.소아자와는 또래이거나 혹은 나이가 좀 많은 축은 스물 가까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과 청년들이었다.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청년이 이죽거렸다."가주...? 큿! 가주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가주...! 요즘 촌에서는 그냥 개나 소나 다 가주라고 그러는 거얌마."키득거리며 웃는 그들은 언제 꺼내어 들었는지, 나무 방망이며 비수에다 쇠막대기까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건들거리고 있었다.그 때, 등평이 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고대릉이 돌연 한 걸음을 더 걸어 나간 것이다."이 자들이...?"고대릉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으나, 이번에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두려움에 분노가 뚜렷이 교차된 모습이었다.고대릉의 그런 모습은 등평에게 뿐만이 아니라 소아자 등에게도 뜻밖이었던 모양이었다.앞에 있던 소아자가 문득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그런 소아자의 표정에는 조심하고 경계하는 테가 뚜렷하였다.등평의 내심으로 한 가닥 뿌듯함이 새록 거리며 솟아올랐다.'어제 밤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주는 지금 스스로의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나쁘지 않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반드시 거처야 할 과정이다. 한 번 두려움에 좌절하고 나서 곧바로 극복해 내지 못한다면,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두려움에 맞서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등평의 생각대로 고대릉은 지금 훌륭하게 두려움에 맞서고 있었다.'이미 된 것이다. 이제 싸움에 이기고 지고 하는 것에는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이지. 오늘은 이정도면 충분히 된 것이다.'[가주님!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등평이 속삭이는 소리였다.바로 가까이에서 말하였기에 고대릉은 잘 느끼지 못했지만, 사실은 전음입밀의 수법이었다.고대릉이 눈을 크게 뜨고 등평을 돌아보았다.봇짐에 대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리라.등평이 얼른 말했다.[봇짐은 제가 틈을 보아 어떻게 해 볼 테니, 제가 신호하면 무조건 달리는 겁니다.아시겠지요?]고대릉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봇짐만 되찾는다면, 굳이 저런 막되 먹고 거친 자들과 함께 어울려 욕됨을 자처할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을 리 없었다."으와아앗!"갑자기 등평이 목이 터져라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소아자 등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그러나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그런데 소아자가 눈을 부릅뜨고 등평을 주시하고 있는 중에, 한순간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그 순간 소아자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퍼뜩 받았다.그리고 이내 손이 허전해졌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만 기겁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어엇!"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등평의 신형이 다시 또렷해졌다.그런 등평의 품에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봇짐이 안겨 있었다."가주님!"그 소리를 신호로 등평이 내달리기 시작했고, 그 뒤를 고대릉이 전력으로 따라붙었다.후다다닥!다다다닥!금세 정신을 수습한 소아자가 악에 받친 고함을 뱉어 내며 고대릉의 뒷꼭지를 쫓아 내달리기 시작했다."서라!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그 소리에 벌써 열 걸음이나 앞서 도망치고 있던 등평의 걸음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듯 했다.그러나 곧 다시 등평은 죽어라 하고 내달리기 시작했다."게 서라! 이 날도둑놈들아!"몇 마디의 고함소리가 잇따랐다.그리고쉭!쉬익!어린아이 주먹만한 돌맹이 몇 개가 고대릉의 귓가로 매서운 바람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고대릉이 더욱 힘을 내어 죽어라고 달렸다.매서운 날씨였지만, 얼마안가 고대릉의 이마와 등에서는 진득하니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달렸다.사실을 말하자면, 정신이 없는 것은 고대릉 혼자였다.지금의 이 상황은 고스란히 고대릉의 것이었고, 등평은 다만 함께 쫓겨 주는 입장에 불과하였다.그래도 전력을 다한 고대릉의 달음박질 속도는 제법 빨라서, 일각 여를 죽어라 달린 후에는 소매치기 일당들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가 있었다.일각 여를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서 죽자사자 달리는 데야, 제 아무리 뜀박질 하나로 먹고 사는 놈들이라고 해도 결국 나가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고대릉은 땀투성이가 되어 숨을 몰아쉬면서도 표정만은 제법 밝아진 듯 보였다.그의 표정에서는 뭔가 막혔던 것이 쑤욱 내려간 듯한 후련함마저도 비쳐 났다.그런 고대릉의 모습에서 등평은 일말의 보람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마저 느꼈다.고대릉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등평은 방금의 일에 대해 나름대로 부풀리고 재구성을 하여 마치 개선장군의 무용담처럼 자못 부산스럽게 수다를 늘어놓았다.고대릉도 등평의 얘기가 아주 재미없지는 않은 듯 간간이 웃음소리를 내었다.상황이 자신이 안배하고 예측한대로만 흐르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등평이 깨달은 것은, 한참을 걷던 그들이 마침 눈에 들어 온 주루로 향하던 순간이었다.갈증에다가 허기까지 진 참이라 잰 걸음을 옮겨 놓던 등평이 문득 고대릉의 옷깃을 잡아채며, 걸음을 멈추었다."가주님! 잠깐만..."뭔가 낌새가 좀 이상하였다.주루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 네다섯 명의 사내들이 버티고 서서 들고나는 손님들에게 사뭇 날카로운 눈길들을 던지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찾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설마 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비록 좀 전에 어린 소매치기 몇 놈들과 실랑이를 좀 벌이기는 하였지만, 그 정도로 저렇듯 공개적으로 패거리들을 풀어 놓을까 싶었다. 아무리 은원이 분명한 흑도 바닥이라고 해도 말이다.그리고 설사 그 일이 빌미가 되었다고 치더라도, 그 사이에 불과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패거리들이 저렇듯 진을 치고 지키겠는가 싶기도 하였다.그런데도 등평이 못내 찜찜한 것은 바로 그의 직감 때문이었다.본업이 또 그런 쪽인지라 등평은 결코 자신의 직감을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한편으로는 오히려 신봉하기까지 하였다.약간 긴장한 등평이 영문을 몰라 하는 고대릉의 소매를 끌어 막 발길을 돌리려 하는데, 마침 그들이 잠시 주춤거리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지, 사내들이 이쪽을 힐끗거리며 뭐라고 수군거렸다.그리고는 곧 그 중 둘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등평이 고대릉을 앞세우고 태연한 체 걸었다.그런데 등평과 고대릉을 살피며 가까이 다가오던 사내들 중 하나가 갑자기 외쳤다."이 놈들이다."설마 설마 하고 있던 당평은 일순 놀랐다기보다는 차라리 황당해졌다.'뭐...?'그 사이에 사내들이 뛰어오기 시작했고, 또 그 뒤에서 보고 있던 나머지 사내들 역시 달려오고 있었다.의문은 나중이고, 등평은 일단 달리고 보기로 했다.'제기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지금의 상황은 노회한 등평으로서도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놈들이 자신들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등평의 신경을 더욱 쓰이게 만드는 것은 놈들의 규모가 결코 허투루 볼 정도가 아니라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든다는 것이었다.처음의 추격을 따돌리고 나서 몇 개의 주루와 다루를 더 거쳐 왔는데, 그 때마다 어김없이 놈들의 패거리로 보이는 서너 명씩의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거나, 혹은 막 배치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이놈들 단순한 놈들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 속한 놈들이기에.... 그리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 난리를 치는 거지?'놈들은 제법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꽤나 집요하게 압박을 가해 오고 있는 중이어서, 등평은 이제 상황이 다소 험악해지고 있다고까지 여기게 되었다.그러나 이 정도로 조금이라도 위기를 느낄 등평은 아니었다.일단 도망가기로 마음먹는다면, 천하의 그 어떤 상황이라도 자신이 있는 그였다.물론 고대릉이 혹으로 달려 있기는 하였지만, 다른 곳도 아닌 북경인데 일이 험악해져 봐야 얼마나 더 험악해질까 싶었다.그리고 어차피 북경에 더 이상 머물 이유도 뚜렷이 없는 터에, 여차직하면 북경을 빠져 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있었다.조금 긴장한 가운데서도, 등평은 오히려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좋아! 어차피 주어진 상황이니, 일단은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다.'고대릉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지경이었다.어제 밤에 겪은 일만 해도 하도 엄청난 충격이라서 아직까지 제대로 다 삭여내지 못한 형편이었다.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새로이 겪고 있는 이 난리라니...조금 전의 소매치기 사건은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이 상황은 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도대체 왜,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마치 사냥당하는 짐승처럼 이렇게 마냥 쫓겨 다녀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그러나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의 급박함은 느낄 수 있었다.그러기에 의문을 물어볼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고서, 그저 등평이 이끄는 대로 이리 저리 무조건 도망만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심상치가 않다.'상황은 등평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급박하게 진전이 되고 있었다.등평으로서도 이제 더 이상은 이 상황에 대해 여유를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악착같았다.이건 무슨 현상수배라도 된 것처럼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일 듯이 쫓아오는데다, 조금 뒤쫓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돌맹이에다 표창까지도 마구 던져 대는 것이었다.'허! 이 놈들이 점점...?'대낮에 표창까지 던지고 설쳐 댈 정도라면, 이건 이미 보통의 시비 정도가 아니었다.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흑도조직간의 전쟁 정도나 벌어져야 볼 수 있을 법한 상황이, 엉뚱하게도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들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거의 쉬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닌 지도 꽤나 되었다.아무리 체력이 좋다 해도 이런 식이면 결국 견뎌 낼 수가 없었다.어느 골목 귀퉁이에 다다라서 등평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헉헉!"뒤따라 멈춰 선 고대릉이 숨을 헐떡거렸다."의숙!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영문이라도 좀 알게 해 주십시오."당연한 의문이겠지만, 등평으로서도 딱히 대답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지역 흑도세력들간의 분쟁에 끼어 들게 된 것 같습니다."고대릉이 숨을 고르고 있다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이렇게 무작정 쫓겨 다닐 일이 아니라, 차라리 저들을 만나 차근차근히 대화를 나눠 보는 것이..."말을 흐리고 마는 고대릉에 대해 등평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우선은 대강의 사정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등평이 고대릉으로 하여금 골목 귀퉁이 흙 담벼락의 움푹 패인 곳으로 바짝 붙어 서있게 하고는, 자신은 신형을 날려 골목 바깥쪽으로 달려 나갔다.날은 이미 저물어 저 만치 먼 곳에서부터 서서히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내를 앞세우고서 등평이 돌아왔다.사내는 상반신의 마혈을 제압당했는지, 걸음걸이가 자못 불안정했다.고대릉이 있는 곳까지 와서 사내를 바닥에 꿇어 앉히고 등평이 사내의 목덜미를 후려쳤다.퍽!"크으!"아혈이 풀리자 사내는 우선 답답한 신음소리부터 토해냈다."대체 뭐 하는 놈들이기에 우리를 쫓는 거냐?"등평의 물음에 사내가 얼굴근육을 풀려는 듯 인상을 한번 썼다가 이내 빙글거렸다."흐흐흐! 이봐! 살고 싶으면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접하면 안 되지. 이 주위는 완전히 봉쇄되었고, 너희들은 지금 꼼짝없이 갇힌 신세라는 말이지."등평이 말없이 사내의 품속을 뒤져 비수 한 자루를 찾아 들었다.그리고는 곧바로 사내의 목울대 바로 위에다 비수의 날카로운 끝을 가져다 대고 지그시 눌렀다."허억!"기겁하여 짧은 숨을 들이키는 사내의 귓가에 대고 등평이 나직이 속삭였다."이봐! 이 거 잘 드나?"뒷골목 건달들이 대부분이 저마다 자신이야말로 독종중의 독종이라고 어깨를 세우지만, 막상 그들처럼 제 한 목숨을 아끼는 자들도 드물다는 것을 등평은 잘 알고 있었다."자네가 알아서 쭉 읊어 봐.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확 그어 버리고 다른 놈을 찾아 볼 작정이니까, 좀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거야."사내가 움찔하였다가 미적거리며 입을 열었다."음...흠! 우리는 혈방(血幇) 소속이다."일순 등평의 이마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혈방이라면 등평도 모르지 않는 북경의 대표적인 흑도조직이었다.북경을 무대로 활동하는 삼대 흑도조직 중의 하나인데, 규모로는 다른 조직에 비해 월등하다고 할 정도가 아니었으나, 그 조직력에 있어서만큼은 가히 최고라고 정평이 나 있는 조직이었다.사내가 등평의 심란(?)한 기색을 읽은 모양으로 슬며시 기세를 세웠다."형씨! 형씨도 우리 혈방을 모르지는 않는 것 같은데, 이쯤에서 우리 얘기를 다시 해 보는 게...?"딱!등평이 왼손으로 여지없이 사내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그 바람에 오른손으로 겨누고 있던 비수의 끝이 얼마간 사내의 목을 파고든 모양이었다.사내의 목 줄기에서 한 가닥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이 자식이 반쪽자리 혓바닥이라도 그냥 대충 들어주려고 했더니 기어이 기어오르려고 하네. 이걸 그냥 확..."등평의 차가운 위협 한 방과 목 줄기를 타고 흐르는 뜨뜻한 느낌에 사내의 태도가 금세 일변하였다."어헉....? 대.. 대인!""좋아! 계속 읊어 봐. 혈방이 왜 우리를 쫓는지에 대해서부터...""그게.... 방의 외당(外堂)에서 대인일행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습지요.""글쎄, 왜?""예, 예! 소인이 주워들은 바로는 본 방의 서단북로(西單北路) 구역을 맡고 있는 금욱(金旭) 사두(蛇頭)가 지난밤 금화궁(金華宮)에서 대인께 크게 당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하더군입쇼.""금화궁...? 그럼 바로 그 털보 놈...? 허허허!"등평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거리며 웃다가 이내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 투덜거렸다."일이 좀 꼬인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깐 일로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여?"등평의 얼굴이 험하게 변하자, 사내가 움찔하며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오늘 오전에 세이로(洗二路) 구역에서 보고가 또 있었지요. 대인께 막대한 금이 있다고..."그제야 등평은 대충의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어제의 그 털보가 혈방의 사두일 것이라는 점은 미처 짐작도 못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만약 그 사건 때문 만이라면 혈방에서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는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보다 직접적인 발단은 바로 봇짐 속에 들어 있는 금 오십 냥이었다.금 오십 냥이면 은자로 천 냥에 해당하는 거금이니, 충분히 놈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였을 것이다.어쨌든 일이 꼬여도 아주 제대로 꼬인 셈이고, 그 꼬임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등평 자신이었다.사내의 혼혈을 짚어 담벼락에 기대어 놓은 다음, 등평의 머리 속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독하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는다면 혈방 정도는 한 번 맞상대를 해줄 수도 있었다.비록 등평의 무공이 신법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만으로도 하수들에게는 절대적일 수 있었다.더구나 일단 맞붙기로 한다면, 그에게는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방법들이 따로 있기도 하였다."으음!"등평의 이마에 한 가닥 고랑이 깊게 잡혔다.그 혼자가 아닌 이상, 맞부딪친다는 것은 역시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다.'아무래도 방향을 다시 잡아야겠군.'등평은 북경시전 쪽으로 다시 나갈 생각을 했다.어차피 북경의 복잡한 지리와 골목사정에 대해서는 적들이 더욱 상세히 알 것이고, 또한 주변은 이미 넓게 봉쇄가 되어 있는 형편이었다.그렇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주요 관부 기관들이 인접하여 밀집되어 있는 중심지 쪽으로 접근하는 게 여러모로 낫겠다는 판단이었다.대략의 계산이 잡힌 등평이 고대릉을 돌아보았다."가주님! 사정이 조금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고대릉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이쪽이다. 놈들이 저기 있다. 길을 막아."골 목 저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튀어나와 앞을 막아섰다.반대편을 살폈으나, 그 쪽으로도 이미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나 있었다.삽시간에 골목주변에는 사내들의 고함소리와 휘파람소리, 그리고 신호용 호각소리들이 난무하였다.'금방 개미 떼처럼 몰려 들겠군. 늦기 전에 포위를 뚫어야 한다.'고대릉의 손을 잡고 등평이 앞뒤 쪽의 정황을 빠르게 살폈다.그런데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자들의 기세가 지금까지 마주쳤던 흔한 뒷골목의 하오배들 같지가 않았다.고함은 치면서도 막상 움직임에는 서두름이 없었고, 그런 중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악착과 몸을 사리지 않겠다는 각오가 은근히 엿보이는 것이었다.등평이 문득 소매 속에서 단도 한 자루를 꺼내어서는 고대릉에게 내밀었다.그러나 고대릉은 단도의 날이 뿜어내는 예기(銳氣) 때문인지 선뜻 받지를 못하였다."가주님! 상황이 급합니다. 더 늦기 전에 놈들의 포위를 뚫고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한데 이제 본격적으로 난전이 벌어지게 되면, 저도 가주님을 돌보기 어려워질지 모릅니다. 결국 가주님의 안위는 가주님 스스로 돌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요컨대 지금은 목숨이 걸린 긴박한 상황입니다. 이거 저거 가릴 계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습니다. 머리 건 몸통이건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십시오."등평이 자신의 긴장을 조금 과장하여 어조에 담았다.일순 고대릉의 어깨가 작게 진저리를 쳤다.등평의 표정에 어린 결의와 비장함은 고대릉이 지금껏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자! 갑니다."등평의 신형이 고대릉의 앞 뒤로 번뜩거렸다.그의 신형이 번뜩이며 위치를 옮겨 다닐 때마다, 사내들이 얼굴을 부여잡고 나뒹굴었다.빡!빠악!팍!파악!상대를 상하게 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등평은 고대릉의 주위를 보호하면서 빠르게 길을 열어 나갔다.걱정했던 것보다, 고대릉은 제법 잘하고 있었다.비록 정말로 사람을 찌르거나 벨 엄두까지는 내지 못하였지만, 자못 실감나게 비수를 휘둘러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위협하였다.그런 고대릉의 모습은 등평을 일시 만족스럽게 만들었다.어제 밤 털보 앞에서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던 모습에 비한다면, 비록 어쩔 수 없이 하는 자위의 행동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지금의 고대릉은 가히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등평 역시도 그리 여유가 있는 형편은 못되었다.원래 살인에 대한 혐오가 있는 그인지라 치명적인 살수를 쓰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연신 나가떨어지면서도 적들은 전혀 물러설 기색 없이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었다.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고 할 것은 날이 점차로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이다.일단 이 자리를 빠져나가서 조금만 더 버틴다면, 날은 곧 완전히 어두워 질 것이다.일단 날이 어두워지고 나면, 등평이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조금은 더 늘어날 수 있었다.워낙 악착같이 달려드는 놈들이라 등평이 아주 잠시 그들과의 싸움하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를 했었나 보았다.퍼뜩 시선을 돌렸을 때, 고대릉은 그로부터 이장 여를 떨어져서 혼자서 나름대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언제 주워들었는지 고대릉은 손에 기다란 나무 몽둥이를 들고서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다.'좋군.'그것이 오히려 효과적이었다.고대릉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기세는 제법 매서웠고, 단도를 휘두를 때와는 달리 사람에게 직접 타격을 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리 망설이는 기색이 아니었다.그 때 마침 고대릉은 앞쪽으로 무작정 머리부터 밀고 들어오는 한 사내의 머리통을 향해 몽둥이를 내리치고 있었다.퍽!순간 사내가 머리를 감싸 쥐었고, 금세 사내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뭉클거리며 새어 올라왔다.그러나 사내는 그 와중에도 고대릉의 가슴을 향해 어깨를 부딪쳐 들어왔고, 피투성이로 변한 사내의 그 악착같은 서슬에 질려 버린 고대릉이 주춤주춤 뒤로 걸음을 물렸다.순간 등평이 다급하게 외쳤다."가주님! 뒤..."그러나 이미 늦었다.고대릉의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뒷 쪽에 있던 사내 하나가 비수로 고대릉의 왼쪽 어깨부위를 깊숙이 베며 지나가 버렸다."윽!"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고대릉이 몽둥이를 떨어뜨리며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고대릉의 백의장삼 어깨자락이 금세 짙은 선홍색의 선혈로 물들어 갔다."가주님!"등평에게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오며, 그의 신형이 한순간 흐릿해졌다.거의 동시이다시피 조금 전 고대릉의 어깨를 베고 저 만치 돌아 나가 있던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끄아아악!"사내의 왼쪽가슴 어림에 비수 한 자루가 깊숙이 꼽혔다.좀 전 고대릉의 어깨를 베었던 바로 그 비수였다.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은 사내의 몸이 서서히 무너질 때, 등평은 이미 고대릉의 곁에서 그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막상 눈앞에서 처참한 죽음을 보아서인지, 적들의 공세가 일시 주춤해졌다.고대릉의 어깨에서는 질퍽하게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등평이 급히 상처부위를 살피고 급한 대로 지혈을 하였다.상처는 가볍지 않았다.언뜻 보기에도 근육을 베고 지나가 자칫 신경과 혈맥까지 상하지 않았나 우려가 될 정도였다.잔뜩 일그러진 고대릉의 얼굴에는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어깨를 베인 고통보다는, 주변상황에 지레 놀라고 당황한 것이리라.자신의 어깨로부터 흥건히 배어 나오는 선혈.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가슴에 비수를 박고 죽어 나자빠진 사내.그 사내를 그렇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바로 등평이라는 사실.그러한 모든 것들이 고대릉에게는 차마 현실로 여겨지지 않고 있을 것이었다.등평의 얼굴에 이번 상황이 발생되고 난 이후 거의 처음이다시피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그리고 그 초조함은 이내 진한 분노로 바뀌어 갔다.주위를 둘러싼 적에게 분노하였고, 고대릉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그 스스로의 무책임하고 안일무사 한 처신에 대해 분노하였다.등평이 고대릉을 부축한 채 천천히 움직여 죽은 사내에게로 다가갔다.사내를 죽인 것은, 그에게도 최초가 되는 살인이었다.그러나 등평의 얼굴표정에서는 처음으로 행한 살인에 대한 어떤 감회도 보이지 않았다.다만 차가운 분노만이 번뜩이고 있었다.등평이 사체(死體)의 가슴에서 비수를 비틀어 뽑아냈다.촤아악!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올랐다.얼굴로 튀어 오르는 몇 방울의 피를 굳이 피하지 않고 맞으면서, 고대릉은 이제 차라리 담담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었다.그 순간 등평의 몸이 환영인 듯 앞으로 튀어나갔다.신형을 날린 순간 이미 앞쪽을 막아 선 사내들의 한 가운데를 파고 들어간 등평의 몸이 눈부시게 번뜩거렸다.그의 손에서 비수가 순간순간 번뜩거리며 이 곳 저 곳을 누볐고, 동시에 그의 양 발이 사방에다 무수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악!""큭!""으악!"순식간에 등평의 주변에서 얼굴이며 어깨며 가슴이며 옆구리를 감싸 쥔 사내들이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그리고 그 순간에 등평의 신형은 다시 고대릉의 곁으로 돌아왔다.불과 촌각에 불과한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고,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환상과도 같은 장면이었다.등평이 고대릉의 어깨를 감싸 안아 부축하며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의 입에서 살기충천한 고함이 뱉어졌다."비켜라! 앞을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갑자기 일변한 모습으로 폭발한 등평의 신위에 눌린 사내들이 일시 주춤거렸다.그러나 사내들이 포위망자체를 흩트린 것은 아니었고, 다만 진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상처의 범위가 너무 큰 때문이지 주변 몇몇 혈도를 짚어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릉의 어깨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흐르고 있었다.등평이 임시방편으로 고대릉의 왼 어깨 상처부위를 손바닥으로 넓게 감싸서 힘 주어 당겨 안았다.비수에 살기를 실어 전방을 위협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등평은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너무 쉽게 생각했고, 안이하게 대응했다. 내 위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가주의 형편에서 만약의 경우들을 고려했어야만 했다.'그러나 지금은 자책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어떻게 하든 지금의 이 위기를 넘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등평의 눈빛에서 살기가 크게 일었다.'어쩔 수 없다면 크게 살계를 여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사상자가 늘고 일이 커지면 관부에서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 때까지만 버틴다면, 그 이후에는 충분히 다른 방도를 강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