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년 당나라의 신라 침공과 뙤다리[唐橋](후)
648년 신라 김춘추金春秋와 당唐 태종太宗 사이에 맺어진 밀약은 나당동맹으로 이어졌고, 이는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어 전쟁이 일어났다. 670년 신라의 백제 고지故地(熊津都督府) 점령, 고구려 부흥운동復興運動 세력과의 연합에 따른 오골성烏骨城 전투는 나당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신라는 670년 오골성 전투에서 말갈병과는 교전하였으나, 당군唐軍이 도착하자 즉각 퇴각하여 당군과의 직접적 교전을 피했다
674년에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의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였다. 또한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雞林道大摠管으로 삼고, 이필과 이근행이 보좌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는 사실상 당이 신라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때 당이 신라 공격을 선언한 이유는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당교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정황상 이대로 추정 되는데 <삼국유사> 기이편 제1권 태종 춘추공太宗春秋公에 실린 내용이 문경시청 당교사적비에도 있다.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響唐兵鴆之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境地”
“또 신라의 옛 기록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 김유신장군이 그 모의를 알고 당군을 짐주로서 유인해 모두 죽게 하고 땅에 쓸어 묻었으니 지금의 상주경계에 있는 다리가 바로 당교이다.”
뒤에 만들어진 지지인 <여지도서> 함창현 교량에 '당교는 관아의 북쪽 6리에 있다'고 하였다
당교는 뙤다리로 뙤는 중국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당교부근에 당교원(唐橋院)이 있었는데,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남긴 글에 단청을 한 다락집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임진왜란에는 왜군의 군사 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