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민들레꽃 속에 장미꽃 80송이가 어떻게 들어있다는 말인가? 제목이 뭔가 이상하여 헷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은 하얀 민들레꽃은 근래 우리집 글쓴이의 중단편 소설을 엮어서 문학사계가 기획출판한 소설집의 제목이다. 그 안에 수록된 하얀 민들레 꽃은 한국소설에 발표했던 중편소설인데 유튜브의 지니라디오에 업로드 되어 방문자가 14만을 넘는 인기가 있어 소설집 제목으로 내세운 모양이다. 소설집은 권위 있는 문학잡지에 발표했던 9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장미꽃 80송이는 그중 한편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그동안 글을 쓴다, 장편소설을 출판한다. 소설집을 낸다 요란스러워도 꽃을 소재로한 소설은 한편도 없었다. 화훼장식을 하는 나로서는 조금 서운했다. 화훼소비가 부진할 때는 꽃시장에서 농림수산식품부가 꽃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제작해서 방영주면 좋겠느니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최근에는 TV에 꽃집 광고를 방영하게 되었지만 몇 천만원짜리 광고도 별로 실효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제발 꽃을 소재로 한 소설도 한편 써보라고 권했다. 꽃꽂이 인구가 많으니 책도 많이 팔릴 것이라고 했더니 귀가 솔깃했던 모양이다. 출판을 앞두고 부랴부랴 장미꽃 80송이를 탈고해서 소설집 끝에다 엮었다. 읽어보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나와 근 40년을 살면서 나를 돕기 위해 많은 일본책을 번역해 주었고 데먼스트레이션과 레슨의 통역을 해준 통에 화훼장식과 꽃꽂이 심지어 일본의 릿가(立華)에 이르기까지 이론적 지식이 풍부하다. 장미꽃 80송이는 주제의 이야기 속에 꽃꽂이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꽃을 꽂는 자세와 기법, 나의 뜻을 전하고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꽃이라는 실증을 감동 있게 나타내고 있다. 가장 반가워할 줄 믿고 농림수산식품부 화훼담당자에게 기증본을 보냈으나 콧방귀 소리도 없다. 꽃을 소재로 한 소설만 들어 있으면 책을 많이 팔아주겠다는 약속은 어기고 있지만 많은 카페에 올려 사람이 읽고 화훼소비 진작에 일조가 됬으면 좋겠다. 장미꽃 80송이 이춘원 오월의 꽃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갖가지 종류의 많은 꽃과 붐비는 고객이 여기저기서 하이파이브를 한다. 금요일 아침, 선영은 장미꽃을 눈여겨보면서 좁은 통로를 누비다 단골꽃집으로 갔다. “향기 나는 장미가 보이지 않네요.” “향이 있는 장미는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조금 더 있어야 나와요.” “어쩐담?…” 선영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다 핑크색 장미 한 단을 골랐다. 옆집에서 보라색 프리지어를 샀다. 다시 소재집으로 갔다. 엉성하게 묶은 정금나무가지 단을 가리는 눈이 매서웠다. 몇 가지 작은 꽃과 잎들을 사서 친정으로 차를 몰았다. 벌써 해가 중천에 걸려있었다. 꽃꽂이를 강습하는 선영은 한 달에 두세 번 친정에 꽃꽂이를 해놓는다. 유난히 장미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옆에서 지켜보다 한마디 아쉬움을 술회한다. “예쁘다만 향기가 없구나. 장미는 색과 모양도 아름답지만 향기가 있어서 그렇게 인기가 좋았지….” 장미향이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랴만 향이 짙은 올드로즈 계통은 색이 단조롭고 모양도 깔끔하지 못하다. 향은 없어도 모양과 색이 다양한 요즈음의 신품종 장미가 꽃꽂이 작품을 구성하기에는 더 적합하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 그윽한 향기가 여인들을 매혹시켰던 재래종 장미는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난 것이다. 박람회를 다녀온 어머니와 아버지의 전화를 연달아 받고 선영은 몹시 불안한 기색이었다. 어제 갑자기 어머니가 일요일 저녁식사에 불러들인 것도 심상치 않은지 바로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 역시 어머니의 기분이 꼬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박람회를 다녀와서 혹시라도 집안에 불화가 있다면 선영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향기 나는 장미꽃을 찾았던 것 같다. 친정의 아파트는 낡았어도 선영은 옛정을 떼지 못했다. 비록 지방공무원이지만 아버지가 목에 잔뜩 힘을 주던 국장님을 퇴직하고 산 강남의 내로라하는 아파트다. 선영은 옛날처럼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반길 줄 알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없었다. 집안은 썰렁하다 못해 냉기가 감돌았다. 선영은 휴대전화를 들더니 다시 놓고 사온 꽃을 욕실로 옮겼다. 줄기를 물속에 담그고 끝을 잘라서 그대로 물통에 꽂아두어 물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삼십여분이 지나 선영은 꽃을 꽂기 시작했다. 먼저 정금나무 단을 풀어서 한 가지씩 들고 요리조리 돌려서 구부러진 모양을 살핀다. 잎을 속아내고 옆가지를 잘라내 선으로 다듬었다. 꽃가위 소리가 공허한 거실의 정적을 깼다. 수반에다 제일 긴 가지를 세워서 주지로 꽂았다. 멀리 떨어져서 모양을 바라본다. 주지의 각도를 조정하고 또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으로 긴 가지를 뉘어서 꽂는다. 그리고 짧은 가지를 주지의 반대편에 꽂았다. 장미꽃도 표정을 꼼꼼하게 살피더니 꽂아 놓은 가지에 키를 대본 다음 중간을 잘랐다. 주지 앞에 같은 각도로 꽂았다. 어머니를 위해서 주로 기본형을 꽂는다. “왜 가지들이 많이 남았는데 긴 가지 세 개만 엉성하게 꽂는다니?” 어머니가 이것저것 물으면 선영은 수강생을 가르치듯 자세히 설명한다. “김 여사님, 한국꽃꽂이는 잎이나 나뭇가지의 아름다운 선, 그 선이 이루는 공간, 꽃이 모인 뭉치의 삼요소를 중요시해요. 주로 자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조형이에요. 꽃과 소재가 갖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특징을 돋보이게 표현합니다. 가운데의 여백에서 느끼는 정(靜)과 정금나무의 율동감이 있는 선(線)을 대비시켜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꽃을 꽂는 것도 쉽지 않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셔요. 자연속의 식물을 바탕으로 자기의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면 됩니다. 화기와의 조화도 중요하구요.” 귀를 기울이고 진지하게 듣는 김 여사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이런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아버지 황 국장이다. 무슨 득이 있다고 돈을 주고 꽃을 사오느냐고 비꼰다. 꽃을 꽂아 놓는 것도 탐탁스러워하지 않는다. 기왕 사왔으면 모두 꽂지 아깝게 다 잘라 버리느냐는 등 핀잔을 한다. 그럴 때마다 김 여사는 황 국장의 뒤통수에다 입을 삐죽하고 눈을 흘기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올해 팔순인 김 여사는 황 국장보다 두 살 더 많다. 어릴 때 친구인 부모들이 사돈 삼자는 농담이 현실로 이루어진 경우였다. 부부가 된지 60년이 되어가지만 서로 다툰 일이 없었다. 그건 사이가 좋아서 만이 아니었다. 싸움은 서로의 힘이 비슷할 때 일어난다. 공무원, 계장, 과장 그리고 국장이란 관직의 위세에 눌려 어머니 김 여사는 오직 복종을 부덕으로 알고 살았다. 남편은 가정보다 공무가 먼저였고 아내는 상사의 다음이었다. 아침밥 독촉해서 새벽 같이 출근하면 밤늦게 돌아왔다. 집안의 분위기는 딱딱한 사무실 같았다. 한 때 사모님 소리를 듣긴 했지만 가족여행은커녕 부부가 다정하게 나들이를 한 적도 없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식들 공부 외에는 오직 저축이었다. 선영이 꽃꽂이를 배운 것은 대학교 때 어머니가 권해서였다. 신부수업이라고 했지만 내심은 자신이 하고 싶던 꽃꽂이를 딸이 하기를 바랐다. 평생 집안에 좋아하는 꽃 한번 사다가 꽂아놓지 못한 아쉬움을 딸을 통해서 즐기고 싶었던 게다. 마음이 착하고 속이 깊은 선영은 다음 달로 다가온 팔순생신날은 가족끼리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파티를 하기로 오빠네와 계획을 짰다. 그리고 어버이날에 모처럼 두 분이 데이트하시라고 꽃박람회 입장권을 사들였다. 어머니는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으나 이내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반면에 아버지는 미간이 찌부러졌다. 마땅찮은 표정으로 선영을 흘겨봤지만 효심을 나무라지는 못했다. 박람회에 가는 날, 선영이 카네이션 꽃다발을 들고 차를 몰고 왔다. 박람회 근처까지 태워다 드리기로 어머니와 약속을 했었다. 황 국장은 무슨 파티에라도 가는지 콤비이긴 하지만 넥타이 차림에 중절모자를 쓰고 구두를 신고 나섰다. 어린애처럼 거울 앞에서 이옷 저옷 입어보며 꾸물거리는 어머니를 짜증스럽게 재촉했다. 옛날에 입었던 핑크색 점퍼를 찾아 입은 김 여사는 행복해 보였다. 봄 날씨가 눈부시게 화창했다. 차를 타려고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박람회 구경은 첫 발짝부터 삐끗했다. 황 국장이 교통이 복잡한 곳을 왜 차로 가느냐고 지하철로 가자는 것이었다. 모녀는 불만이었지만 황 국장의 말은 항상 명령이나 다름없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남편을 팔순 노인은 힘들게 따라갔다. 환승역에서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뒤쳐져도 황 국장은 나몰라라 혼자 가고 있었다. 지하철을 내려서는 현기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다시 박람회장까지 걸어간 김 여사는 지쳐있었지만 기를 쓰고 주제관으로 갔다.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줄서있었다. 황 국장은 창피해서 어떻게 줄을 서냐고 다른 곳부터 보자고 했다. “선영이가 주제관을 꼭 보라고 합디다. 인기가 있으니까 줄을 서는 것이지요. 줄 좀 서면 어때요. 먼저 봅시다.” 김 여사는 말하면서 줄 끝으로 가서 섰다. “그럼 혼자 들어가서 구경하구려.” 결국 각자 구경을 하고 한 시간 반 뒤에 주제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줄은 길어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안으로 들어갔다. 생전 보지 못했던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이 정글처럼 꾸며져 있었다. 혼자 홀가분한 김 여사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통로 양쪽을 번가라 보느라 앞으로 나갈 줄을 몰랐다. 주제관을 보고나서 동선을 따라간 곳은 무역관이었다. 부스마다 외국에서 들여온 식물 등으로 특색이 있게 꾸며놓았다. 작은 화분을 나누어주는 곳이 있었다. 얻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황 국장이었다. 약속시간이 10분이 지났다고 짜증을 냈다. 당황한 김 여사는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갔으나 얼른 출구를 찾지 못했다.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려고 역방향으로 돌다가 방향감각을 잃고 허둥댔다. 온몸에 땀이 났다. 마침 안내가 있어서 도움을 받아 겨우 들어왔던 입구로 갔다. 잔뜩 찌푸린 황 국장이 씩씩거리며 노려봤다. 김 여사는 이런 경우에 익숙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지청구를 듣고만 있었다. 더 심하면 눈물을 훔치면 되는데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났다. 쉽게 상황이 끝난 것이다. 간이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부부는 노천의 전시장을 둘러봤다. 화훼판매장이 있었다. 갖가지 화분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난과 선인장은 신기한 종류들이 많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던 김 여사가 빨간 꽃이 피어있는 제라늄 화분을 들더니 얼마냐고 물었다. 무료한 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던 황 국장이 대뜸 다가왔다. “살려고?” 크게 뜬 눈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네, 하나 사서 기르고 싶어서요.” “쓸데없이 무어하려 사. 귀찮기만 하지.” “나는 제라늄 향내가 좋아요. 집안에 있으면 개미나 벌레가 없어져요. 꺾꽂이하면 뿌리도 잘나고 꽃도 사시사철 피어요.” “허허. 그냥 가요.” “온 기념으로 이것 하나만 살게요.”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가게 주인은 눈치 빠르게 얼른 비닐봉지에 담아서 건넸다. “거, 쇼핑백에 담아줄 수 없어요?” “쇼핑백은 가시다가 찢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황 국장은 비닐봉지를 창피해서 어떻게 들고 가냐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닐봉지를 받아든 김 여사는 바삐 뒤를 쫓아갔다. 그때 스피커에서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훼농장으로 가는 버스가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구경하실 분은 타주시기 바랍니다.” “여보, 나온 김에 화훼농장 한번 가봤으면 좋겠어요.” “이 사람 갈수록 태산이네. 벌써 힘이 드는데 농장에 뭘 볼게 있다고 가요?” “꽃을 기르는 농장을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허허. 참, 그냥 가자니까. 벌써 네시가 넘었어요.” 김 여사는 가보고 싶은지 대답을 않고 멈춰서있었다. “그러면 당신 혼자 구경하고 오구려. 나는 피곤해서 먼저 가야하겠소.” 하기야 중절모자 쓰고 구두신은 사람에게 농장에 가자는 것이 무리였다. 황 국장은 신경질을 내고 들어왔던 후문쪽으로 걸어갔다. 김 여사는 원망스러운지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었다. 황 국장은 곧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김 여사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쫓아갔다. 그러나 이리저리 헤매도 찾지 못했다. 전화를 걸었다. 한참 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박람회장을 나와 바삐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화분이 무거운지 자꾸 다른 손에 바꿔 들었다. 어께가 처지고 숨을 헐떡였다. 잠시 서서 쉬었다 다시 걸었다. 만만해서 들고 가려고 했던 제라늄 화분이 점점 벅차보였다. 황 국장을 만나기는 틀린 것 같았다. 길가의 미니정원에 벤치가 있었다. 김 여사는 화분을 놓고 한숨을 토하면서 주저앉았다. 쉬는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거렸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계속해서 눈물이 나는지 연방 손수건이 눈으로 갔다. 조금 후에는 어깨가 들썩였다. 이윽고 울음이 멈추더니 비닐봉지 속의 제라늄을 들여다봤다. 손을 넣어 꽃을 어루만졌다. “친구하고 싶었는데 몸이 옛날 같지 않구나…. 점점 무거워지는 걸 보니 너도 가기 싫어서 떼를 쓰는 모양이다. 그래, 나도 갈 길이 멀단다.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우리 집에 가서 천덕꾸러기 되느니 좋은 주인 만나서 잘 크렴.” 제라늄과 이야기를 하고나서 비닐봉지를 옆에 놓아둔 채 자리를 떴다. 천천히 걸어가다 멈추고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비닐봉지를 돌아봤다. 놓아두기가 아쉬운지 잠시 바라보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까와 달리 얼굴에는 서글픈 표정이 가시고 앙다문 입에 분노가 서렸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집은 비어있었다. 피곤하다고 가버린 황 국장이 돌아왔던 흔적도 없었다. 샤워를 하고 김 여사는 소파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박람회 구경 잘하고 왔다.” “좋았어요? 구경도 많이 하시고?” “그래, 꽃도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공부가 되셨다고요?” “네 덕분에 값진 인생 공부를 했다.” “잘하셨네. 아버지도 좋아하셔요?” “그 양반 어디 갔는지 집에도 없다.” “같이 오시지 않았어요?” “먼저 가버렸단다. 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이만 끊으마.” 선영의 말소리가 들리는 걸 그만 전화를 끊었다. 바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갔다. 황 국장이 집에 돌아온 것은 저녁 8시가 넘어서였다. 현관에서 평소와 달리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이 사람이 아직 안 왔나?” 중얼거리며 키를 누르고 들어갔다. 주방으로 가서 밥솥을 열어보았다. 깨끗이 비어있었다. 그는 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의 어머니 전화 없었니?” “어머니 다녀오셨다고 전화 왔었어요. 왜 같이 오시지지 않았어요?” “뭐라고 하더냐?” “덕분에 값진 인생공부했다고 하시던데요?” “뭐? 인생공부? 밥도 하지 않고 어디 갔지?” “어머니에게 전화해 보셔요.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니다. 그래 알았다. 전화 끊으마.” 망설이다가 다시 아들집에 전화를 했다. 며느리가 받았다. “너의 시어머니 거기 오지 않았냐?” “넷? 함께 박람회에 가시지 않으셨어요?” “내가 좀 뒤에 왔는데 집에 없구나. 알았다.” 전화를 끊고 황 국장은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서 소파에 앉았다. 맥주를 마시면서 TV를 켜고 보다가 다시 꺼버렸다. 10시가 넘도록 김 여사는 소식이 없었다. 황 국장의 얼굴은 점점 불안한 기색이 먹구름처럼 드리웠다. 배에서 꼬르락 소리가 났다. 맞장구를 치듯 현관문에서 삑삑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황 국장은 소파에 앉은 채 현관을 노려봤다. 김 여사가 고개를 숙이고 비틀거리며 들왔다. 술냄새가 풍겼다. “아니, 이 사람 술 마셨어?” 일그러진 얼굴에 눈을 부릅뜬 황 국장이 소리쳤다. “그래, 마셨어요. 내 평생 술 맛도 모르고 살았지요. 좀 마셔 봤어요.” 혀가 꼬부라진 소리였다. “허? 이사람 돌았군.” “그래 돌았어요. 박람회 가서 돌아버렸어요. 세상에 팔십평생 처음으로 남편과 나들이 가서 버림을 당하다니…. 내가 헛세상 살았지. 너무 억울해서 술 한 잔 했습네다. 어쩔 거에요?” 말끝이 울음소리로 이어졌다. “시끄러워!” 목 놓아 울기 시작하자 황 국장은 소래기를 꽥 질렀다. 어이가 없는지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김 여사는 울면서 선영이가 쓰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 악몽 같았던 밤도 밝은 햇빛이 거두어가고 집안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조용했다. 김 여사는 부지런히 주방에서 밥상을 차렸다. 부부는 평소처럼 마주 앉아 아침식사를 들었으나 침묵이 흐르는 주방은 찬바람이 휘돌았다. 황 국장은 어제 일이 마음에 켕기는지 가끔 김 여사의 표정을 훔쳐봤다. 설거지를 마친 김 여사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걸었다. 낮은 소리였다. “아범아. 이번 일요일 저녁 애 엄마하고 집에 와서 식사해라. 아니야, 아이들은 데려오지 말고…. 꼭 와야 한다?” 다시 딸에게 아들과 똑같은 전화를 했다. “왜? 무슨 날이에요?” “아니다. 꼭 좀 오너라.” 선영이 더 묻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일요일 아침 김 여사는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근처 마트에서 반찬거리를 사왔다. 점심을 마치고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저녁때가 되자 보글보글 끓는 냄비에서 구수한 매운탕 냄새가 수증기에 실려 집안에 가득했다. 먼저 온 것은 선영의 부부였다. 거실의 작은 탁자에 놓인 꽃꽂이가 임자를 반겼다. 조금 후 아들네 부부가 들어왔다. 인사를 받은 황 국장이 눈이 둥글해서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당신 생일은 아직 아닌 것 같은데?” “언제라고 내 생일 기억해 준일 있었어요? 간단히 식사나 같이 하자고 불렀어요.” 황 국장은 지난 일을 추궁하려는 자리가 아닌가 짐작한 것 같았다. 얼굴이 긴장한 빛이 역력했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손수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서 식탁에 놓았다. 생태탕이 냄비 채 식탁에 오르자 모두 침을 꼴깍 삼키며 어른이 먼저 들기를 기다린다. “자네부터 한잔 하게.” 황 국장은 일부로 기분이 좋은 척 호걸스럽게 맥주캔을 따서 사위에게 권했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들라고 캔을 건넨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실 때였다. 김 여사가 오늘 가족회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의아한 얼굴을 마주봤다. “너희들에게는 미안하다마는 나는 너의 아버지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다들 나를 이해해 주고 당신도 이제 나를 놓아주세요.” 예상 밖의 폭탄선언에 모두가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황 국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래 살다 보니 별말을 다 듣겠네. 속 좁은 여인네가 또 삐졌군.” “삐지다니오? 이제 삐질 일도 없어요. 우린 이만 이혼합시다.” “이 사람 미쳤군. 어디서 이혼이란 말이 나와?” 말끝이 고함으로 울렸다. “네, 지금까지 육십평생 말대답 한번 못하고 살았지요. 나도 이제는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허? 정말 돌았군. 내가 싫으면 나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구려.” “그래요. 그러나 나도 집이 있어야 살지요. 이 집 쪼개주세요.” “뭐라고? 집을 쪼개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황 국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모두는 엄청난 사태에 겁에 질려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봉하고 있었다. 며느리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일어서지 말고 모두들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못들은 척 화장실로 간 며느리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사위가 일어서더니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김 여사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요 명의는 당신이지요. 하지만 나도 지분이 있습니다. 당신 그 알량한 공무원 저절로 된 것 아니지 않아요? 객지에 나와서 공무원시험 준비한답시고 나를 얼마나 고생시켰어요. 번번이 낙방한 삼년 동안 내가 공장에 다니면서 먹여 살리고 뒷바라지해서 합격시키지 않았습니까? 이 집을 장만할 때까지도 많은 고생을 했지요. 이 집 팔면 강북에 두체 살 수 있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합시다.” “마누라가 늙으면 호랑이가 된다더니 도깨비가 됐군. 난 그리 못하겠으니까 마음대로 하구려. 너희들도 생각 좀 해봐라. 너의 어머니가 완전히 돌았다.” “아니에요. 어머니는 마음의 상처가 크신 것 같아요. 아버지, 이제 옛날과 다른 세상입니다. 막무가내로 어머니의 뜻을 무시하지 마시고 타협하셔야 합니다.” 아들은 어머니 편이었다. 학창시절 ‘공무원’ ‘행정고시’ 닦달했던 아버지에게는 앙금이 남아있었다. 황 국장은 무역회사에 취직한 아들을 지금까지도 무시한다. “뭐? 막무가내라고? 타협? 그럼, 너의 어머니와 헤어지란 말이냐?” 벌컥 아들에게 화살을 돌렸으나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코 밑에 수염자국이 검실거리고 자식을 거느린 아들의 불평을 옛날처럼 호통으로 잠재울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의 권위는 살아있었다. 아들은 입을 봉하고 대신 선영이 어머니를 달랬다. “어머니! 그렇게 막다른 길은 안 돼요. 노여움 푸세요.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으면서…. 박람회 가시게 한 제가 잘못이에요.” 엄한 아버지기에 선영은 알랑거려서 예쁨을 받고 살았지만 속내는 엄마 편이었다. “어제일로 그런 것만이 아니다. 내 가슴을 째 봐라.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참고 사느라 간도 쓸개도 다 썩어버리고 없다. 이제 폐, 심장까지 다 망가져서 숨쉬기도 힘들다. 이대로 살면 쉬 죽을 거다.” “에잇, 듣기 싫어!” 큰 소리를 내뱉고 황 국장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날부터 집안은 어름에 소금을 뿌린 듯 얼어붙었다. 김 여사는 어디서 이혼서류를 만들어 와서 도장을 찍어달라고 졸랐다. 조르다가 사정을 했다. 황 국장은 화를 내기도 하고 달래 보아도 토라진 마음이 풀릴 기미가 없었다. 울면서 애원할 때는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밖으로 나가곤 했다. 아들 딸도 연락이 뚝 끊겼다. 시달린지 한달이 넘었다. 얼굴이 수척했다. 견디다 못한 황 국장은 딸을 만나러 나섰다. 선영의 꽃꽂이교실은 처음이었다. 전화로 위치를 물어 음료수 한 상자를 사들고 찾아갔다. “저를 부르시지 여기까지 오셨어요?" “이대로는 괴로워서 못 살겠다. 너희들이 어떻게 좀 해봐라.” “저희도 잘 말씀드리지만 워낙 완강하셔서…. 아버지가 너무 야속하게 대하신 것은 맞아요. 지금부터서라도 잘 하셔야 해요. 곧 어머니 팔순생일이지 않아요? 저희가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버지도 신경을 쓰셔요. 평생 선물 한번 사드린 적도 없으시지 않아요? 이 기회에 좋은 선물도 사드리고 해서 잘 달래셔요.” “하기야 선물 한번 사준 적이 없었지…. 너 말이 맞다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생일인들 치를 수가 있겠느냐. 알았다….” 난감해서 앉아있던 황 국장은 벌떡 일어나 딸네 교실을 나왔다. 종로 3가로 갔다. 금은방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 속의 금붙이와 보석을 들여다봤다. 가게 주인이 내다보고 안으로 들어와 편안하게 보시라고 말을 건넨다. 황 국장은 무안한 듯 돌아서려다 같은 연배여서 눈인사를 했다. 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차라도 한잔 들고 가시란다. 황 국장은 마지못한 척 가게로 들어갔다. 주인은 진열장 앞의 의자를 권하면서 커피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황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열장 속에 차려 놓은 여러 가지 종류의 반지와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주인은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타서 주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라고 했다. “아내가 팔순인데 반지나 하나 선물할까 해서….” 황 국장은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나이가 드신 분은 비취나 자수정 정도면 부담도 없고 좋을 것이라며 진열장에서 상자를 꺼냈다. 파란색의 타원형 비취반지와 볼록하게 둥근 보라색의 자수정들이었다. 값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주인의 조언을 받아 황 국장은 비취반지와 목걸이를 세트로 골랐다. 가게를 나온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선물은 샀지만 잔뜩 얼어붙은 아내에게 주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하여간에 큰마음 먹고 샀으니 어떻게든 주어야 하고 그러면 노여움이 풀어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치미를 떼고 집으로 돌아온 황 국장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차를 타서 식탁에 놓아두고 돌아서려는 아내에게 황 국장은 잠깐 앉으라고 말했다. 김 여사는 어정쩡 앉으며 드디어 결심을 했느냐고 물었다. 황 국장은 슬며시 반지상자를 밀어 놓았다. “평생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 당신 생일인 것 같아서 모처럼 선물을 주고 싶어 마련했소. 그리 값진 것은 아니지만 내 성의니 받아주시오.” “살다보니 희한한 일도 다 보겠구려. 내 팔자에 선물은 무슨…. 나는 살 집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그런 것 받지 않을 것이니 빨리 결정해 주세요.” 김 여사는 일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 국장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다시 집을 나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의지가 되는 사람은 선영뿐인 모양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집으로 오시라는 걸 마다하고 그의 꽃꽂이교실로 불러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선영은 눈을 깜박이며 아버지의 안색부터 살폈다. “내 참. 꽤 비싼 돈 주고 비취반지와 목걸이를 사다주었더니 안 받겠다는구나.” 자초지종을 들은 선영은 딱하다는 듯 말했다. “비취반지를 사서 주셨다구요? 아버지는 공직생활만 오래하셔서 세상 물정이나 사람 마음을 너무 모르신 것 같아요.” “아니,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정말 살맛이 없다.” “육십년을 함께 사셨으면서 어머니의 취향을 그렇게 모르셔요?”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지금 심정은 죽어버리고 싶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셔요? 아버지, 어머니가 갖고 싶은 것은 비싼 보석이 아니에요.” “그럼 뭐라냐?” 마치 어린애 같은 울상이다. “진심어린 정입니다.” “정? 진심어린 정이라고?” “지금 반지는 새삼스럽지 않아요? 달래려는 사탕발림으로 생각하시기 딱이에요. 정말 고생한 것을 이해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면 어머니도 감동하시겠지요.” “사랑한다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 글쎄다. 너의 어머니는 집만 갖고 싶다는 구나.” “그래요, 집을 통째로 드리신다고 하세요. 하지만 어머니가 갖고 싶은 것은 반지도 집도 아닐 거에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신 것이 뭣인지 아세요?”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 “나에게 꽃꽂이를 배우게 했고, 내가 집에다가 꽃을 꽂아 놓을 때마다 그걸 바라보고 좋아하신 것을 그렇게 모르셨어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신 것은 꽃이에요. 아버지가 쓸데없이 꽃을 꽂아놓았다고 핀잔하실 때마다 어머니는 속상해 하셨어요. 모처럼 꽃박람회에 가서 마음대로 꽃구경도 못하고, 좋아서 사신 화분까지 버리고 왔으니 평생 쌓인 한이 폭발하신 거지요. 꽃으로 일이 벌어졌으니 꽃으로 풀어보시는 것이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꽃을 사다가 바치면 되겠구나. 너 꽃 좀 한 다발 싸주라.” “아버지! 제가 드린 꽃은 저의 진심입니다. 아버지가 시장에 가서 직접 사세요. 어떤 꽃을 주면 어머니가 가장 좋아할까 생각하시면서 꽃을 고르세요. 그리고 그 꽃에 미안한 마음과 사랑하는 진심을 담아서 드려보셔요.” “오냐 잘 알았다. 그럼 내일 꽃시장 좀 안내해주렴.” 다음날 아침 일찍 선영은 아버지와 꽃시장으로 갔다. 황 국장은 통로를 막듯 쌓여 있는 가지각색의 꽃을 보고 놀랐다. “누가 이 꽃을 다 사간다니?” “아버지만 꽃이 별로시지 요즘 젊은이들은 마음을 꽃으로 전한답니다.” 무슨 꽃을 사야할지 난감해하고 있는 황 국장을 안내하여 단골꽃집 쪽으로 갔다. “어머니는 향기가 좋은 핑크색 장미를 좋아하셔요.” 선영이 살짝 귀띔했다. 그 말을 엿듣기나 한 듯 단골집 사장이 불렀다. “꽃꽂이 회장님! 마침 오늘 향 좋은 장미 나왔어요.” 가까이 가자 장미향이 코에 스몄다. 황 국장은 그 장미 한 단을 달라고 했다. 옆에서 손가락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팔십송이. 여덟 단을 사세요.” “그렇게 많이? 뭐하려고….” “깍쟁이 아버님! 어머니 팔순 생일이지 않아요?” “그렇구나. 알았다. 여덟 단, 여덟 단을 주세요.” 부녀는 장미를 싣고 선영의 꽃꽂이 교실로 갔다. 잎을 다듬고 물올림하여 다발로 묶었다. 꽤 부피가 있었다. 예쁜 포장지로 싸고 또 그 위에 세로판지로 싸서 리본을 장식하여 네모진 전용 비닐백에 넣어드렸다. “제가 데려다 드리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냥 지하철로 가셔요. 눌리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현관 앞에서 꺼내서 다발만 들고 들어가셔서 드리셔요.” “오냐 잘 알았다. 고맙다만 내참, 말년에 이게 꼴이 뭐냐? 그럼 가마.” 황 국장은 80송이의 장미다발을 담은 비닐백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영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서있었다. 코끝이 찡 하는지 코를 훔쳤다. 지하철에 탄 황 국장은 경로석을 찾아 앉았다. 큰 비닐백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장미향이 짙게 풍겼다. “어머. 향내가 참 좋네. 장미꽃인가 봐요?” 옆에 앉은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승객이 말을 건넸다. “…” 황 국장은 대답을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배달 가신 가보네. 받는 사람은 좋겠다.” 대답이 없자 여자승객은 시무룩하며 혼잣말을 했다. 황 국장은 엉뚱한 소리에 어처구니가 없는지 짜부라진 얼굴이 벌게지며 실룩거렸다. 입을 앙다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움직임이 없었다. 장미꽃을 어떻게 줄까하는 걱정보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린 황 국장은 택시가 지나가자 세우려는 듯 멈칫했으나 차가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뒤따라오던 택시가 보고 앞에 섰다. 그는 오기가 나는지 손을 젓고 그냥 걸어갔다. 아파트의 경비실 앞에서는 헌틴캡을 깊이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갔다. 아파트 경내의 어린이 놀이터 한쪽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허공을 쳐다보다 눈을 훔쳤다.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모르지만 울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재잘거리고 나타나자 외면하고 얼른 일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는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억울해선지 분한 건지 뉘우침의 눈물인지 도무지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는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찰칵’ 문이 열렸으나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여 들어가지 않고 서있었다. 김 여사가 문을 열고 내다봤다.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지면서 흐느꼈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쳐들어 비닐백을 들이밀었다. 김 여사는 엉겁결에 비닐백을 받았다. 장미 향내가 짙게 나는데도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크게 우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놀란 김 여사는 무슨 일이냐며 황 국장을 팔을 잡아 끌어들였다. 집으로 들어간 황 국장은 거실 마루에 무릎을 꿇었다. “여보, 용서해주구려.” 고개를 푹 숙이고 새어나온 소리는 거의 울음소리였다. 김 여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흐느끼고 있는 황 국장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일어나시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용서…” “용서고 뭐고 얼른 일어서세요. 누가 볼까 두렵네요.” 황 국장을 일으켜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 여사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 꼴이 뭐래요. 나는 이런 남편 싫네요. 목에 힘주고 호령하던 당신이 좋았던 것 같아요. 육십년을 살아온 나의 팔잔데 어쩌겠어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