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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장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과 성전 정화 및 정치 ․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등
구속사적 개관:
제 21-27장은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주께서 예루살렘에 평화의 당하기까지의 소위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의 왕으로 공식 입성하시어 십자가 수난을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본장은 이런 성 고난주간의 일련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예루살렘 입성으로 구속주요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의 공생애는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예수께서 지금껏 3년 간의 공생애를 가지신 것은 당신의 메시야 직을 되도록 숨기시며 결정적으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하시기 전에 자신의 구속 사역이 궁극적으로 가져올 천국 구원에 대한 신약 복음의 본질을 미리 밝히시고 선포하시기 위해서였다. 또한 당신이 십자가 수난을 통해 부활 승천하신 후 세상 끝날 재림하여 오실 때까지 지상에 교회를 세워 당신의 복음을 세세토록 전하게 하도록 당신의 사역과 그것이 가져올 천국의 참 실체를 곧 신약 복음의 주요 내용들을 특히 당신의 사도들에게 교육하는 데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는 이를 마감하고 마침내 자신의 메시야 직을 만방에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나아가 십자가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는 바 바로 본장이 이 사건과 기타 일련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은 먼저 1-11절이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인 성 고난 주간중의 일요일에 발생했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보도한다. 다음 12-17절은 월요일 발생했던 성전 정화 사건을 보도하고, 18-22절은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간에 걸쳐서 발생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그와 관련된 교훈을 보도한다. 그리고 23-27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권세의 근거에 대하여 도전하여 야기된 논쟁을, 뒤이어지는 28-46절은 예수께서 비유로 형식과 가식에 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해악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경고하신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 사건은 그야말로 구속사 그 자체를 응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사건 이었다. 먼저 이 사건은 지금껏 천국 복음의 전파와 자신의 사후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설립 유지할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시간 확보를 위하여 자신을 되도록 감추셨던 것과 달리 비로소 자신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메시야요 구속주이심을 이제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예수는 민중이 환호하는 가운데도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자신은 승리의 왕인 동시에 평강의 왕이요 참 자유를 주시는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둘째 이 사건은 그것으로 종결이 아니라 바로 지금까지 주께서 수행하셨던 공생애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구속 사역을 닷새 후에 성취하시기 위하여 즉 십자가 수난을 당하사 아담의 범죄 이후 발생한 구속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입성한 사건이었다. 이 입성 사건 당시에는 예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앞서 네 차례나 예고하신 바대로 예수께서는 심지어 지금 환호하는 민중이 곧 변하여 자신을 못 박을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 될 것조차 다 내다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이를 피하지 않으시고 그 죄인의 구속에 요구되는 죄 값을 당신의 피로 대신 치루시고자 입성하였던 것이다.
실로 이를 깨닫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환히 웃으시며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와 공로에 새삼 감동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여 예수를 그저 빵이나 세금 문제를 해결할 정치 지도자로 착각하다가 나중에는 주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그 당시의 민중들처럼 큰 범죄에 동참하는 어리석음과 악함을 버려야 하겠다. 한편 이 사건은 세상 끝 날에 전 우주의 심판자로 이 땅에 강림하실 예수의 재림 사건의 전 단계요, 또한 예표였다. 이 예루살렘 입성은 일단 구속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고자 하신 것뿐이었으나 훗날 재림 시에는 당신의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끝내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자의 죄대로 심판을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救境史的 觀點)에서 개관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주님의 사랑과 심판의 경고를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12-17절의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聖殿)을 주께서 정화하신 사건은 1차적으로는 참다운 신앙의 회복을,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사역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온갖 죄가 척결되어 바른 관계가 정립될 것을 상징한다 하겠다. 주님의 입성이 자유와 해방을위한 평화의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성전 정화 사건은 사단의 무리를 내쫓고 이기시는 심판과 승리의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겠다.
18-22절의 무화과나무 사건은 주님은 구원과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당신의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믿음의 열매를 맺지 않은 자에게는 심판을 행할 능력과 권세(權勢)가 있으시며, 또 이를 분명히 시행하실 것을 보여 주는 구속사적 경고이다. 또한 이런 능력과 권세의 주를 참으로 믿고 온전히 그의 일을 수행하는 자에게는 그의 이름으로 놀라운 믿음의 권세가 주어질 것도 교훈되고 있다.
한편 본장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23-46절에 나타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무조건적이고 악의적인 예수에 대한 도전과 음모 및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 및 경고의 말씀은 예수 공생애 초기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예수의 무고한 희생에 이르기까지 한 유대인의 예수 배척 전반과 관계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에 집중 설명키로 하고 지면상 본장에서는 각 논쟁에서 특히 강조된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 부분에 대해서만 개관해 보기로 한다.
먼저 23-27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대한 구약의 분명한 예언과 이들의 예수를 통한 성취, 예수님의 바르고 정의로운 교훈의 복음을 실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구약의 계시 자체와 비교하여 보지도 않고 무조건 곡해하여 예수의 권위의 근거를 물은 것은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완고함과 무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미 편견과 이해타산에 사로 잡혀 아무리 진리를 말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사실은 당신의 선구자였으며 자신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증거하던 자로서 당시의 민중들에게 의로운 선지자로 추앙받던 세례 요한의 세례의 기원을 되물어 진리를 그 자체로 보기보다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고려하는 그들을 역습하심으로써 그들을 침묵시키시는 놀라운 지혜를 보이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구속사의 진리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늘 세속적 입상에서 보고자 하는 자는 끝내 그 구속사의 실체를 보지 못할 것을 교훈해 준다.
다음 뒤이어지는 28-32절의 두 아들 비유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고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든지 간에 진리를 듣고 아는 자가 아니라 그 진리를 수용하고 순종하는 자가 구원(敎)을 얻을 수 있음을 교훈한다. 나아가 그 진리를 듣고, 알고, 형식적으로는 승인하면서도 참 순종을 결여하는 자는 인간의 판단과는 달리 오히려 더욱 악한 자임이 암시된다. 이는 구원을 주는 신앙은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믿어 순종하는 것이란 전 구속사적 진리를 요약해 주는 비유이다.
끝으로 33-46절은 구약 계시(舊約 啓示)를 먼저 받은 유대인이요 또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면서도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교의 오류와 정치 사회적 이해타산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모든 구약의 성취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까지 배척하게 된 자들의 오류를 경고한 악한 농부들의 비유이다 (33-39절). 그리고 바로 구약 선민이면서도 구약의 성취요 이를 계승 발전시킨 신약의 수여자로 오신 예수께 도전하는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이 그 악한 농부들이며, 그들이 당신을 해할 것이나 당신은 오히려 부활하여 신약교회의 머리요 그들의 심판자(審判者)가 되실 것을 예수께서 분명히 밝히시고 경고(40-46절) 하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먼저 주님은 살아계신 전 우주의 창조자신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자(聖子)로서 인간의 마음대로 순종해도 그만 안 순종해도 그만이요 그분의 뜻과 섭리를 자신들의 판단과 유익대로 왜곡해도 그만인 분이 아니라 훗날 주님에 대한 자세의 여하에 따라 분명히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구속사적 경고이다. 실로 주님은 세상의 일시적 철학이나 도덕을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그에 대한 순종의 여부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이(살후 1:8) 판가름 날 복음을 가르치신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한편 우리는 본 비유에 나타난 악한 농부들이 꼭 예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 국한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넓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가리우는 각종 세속 정부와 세속문화의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좁게는 주님의 진리를 안다하면서도 이를 왜곡하여 호도하는데 앞장서는 자유주의 신학자 및 이단 사설주의자들이 모두 다 각 시대의 악한 농부들이다. 성경전체는 물론 우리 주님도 거듭하여 주님의 복음만이 시대를 불문하고 전 구속사에 유일한 우리 구원의 엄정하고 은혜로운 표준이며, 이를 왜곡 호도하는 각종 이단과 문화가 등장할 것에 대해 경고하였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주인의 선하고 바른 뜻을 알면서도 이를 순간적 유익을 위하여 거스리는 악한 농부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그들의 세력과 권위나 화려함에 유혹당하지 말고 순결한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여(고전 15:2) 구속사가 최종 실현될 세상 끝 날에 주인이 축복으로 세울 새나라 곧 천국에 참예하여야 하겠다.
외울 말씀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9)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주님의 성전 숙정
12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열매 없는 무화과에 대한 주의 저주
18 ○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
23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두 아들의 비유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의 비유
33 ○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유대 지도자들을 향하신 경고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
본문 & 자료노트
지도-21:1 감람산 벳바게의 위치
보감-21:1-1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목적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 마지막 즈음 예루살렘 성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으시기 위해 슥 9:9에 예언되어진 대로 입성(入城)하셨다. 이 전에는 그토록 당신의 메시야이심을 감추려 하시던 주님께서 이제는 오히려 공개적으로 자신을 왕으로 선언하시면서 겸손히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이다. 이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는 입성하실 당시에 밝혀진 1차 목적과 일주일 후의 수난과 죽음, 나아가 3일 후의 부활 이후에나 밝혀질 더 깊은 2차 목적이 있다. 다음에서 그것을 알아보자.
1차 목적
1) 메시야직의 공식 선언
2) 다윗의 자손 왕 선언
3) 겸손하신 왕 선언
4) 평강의 왕 선언
2차 목적
1) 영원한 의생 사역 성취
2)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
3) 죽음을 가져오는 사단의 힘
4) 영광과 승리의 왕이 되심
5) 승천 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심
6) 재림 때 심판주의 자격을 가지심
주요 주제-21:4,5 신.구약이 연속성과 점진성
본권 신약 총론 특별자료 참조.
도표-21:1-11 예수의 공생애 일람
본권 사복음서 개로 특별 자료 참조.
도표-21:5-10 예수의 겸손을 보여주는 주요 사실들
예수님은 본래 지극한 존귀함을 받으셔야 할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다. 그런 분이 택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또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도 지극히 겸손하게 죄인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사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 놓으셨다. 이는 죄인들을 향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과 겸손을 잘 보여주는 바, 예수의 겸손을 보여 주는 주요 사실들을 모아 보았다.
1.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심(빌 2:7)
2.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심(마 1:18-25)
3. 겸손히 부모님께 순종하며 섬기심(눅 2:51)
4. 조그마한 마을 나사렛에서 사심( 마 2:23)
5. 사람처럼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심(마 3:13-15)
6. 제자들 중에 섬기는 자로 계심(눅 22:27)
7.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마 21:5-10)
8.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요 13:5-14)
9. 사람들에게 고난과 모욕을 당하심(마 26:27'28)
10. 성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빌 2:8)
역사배경-21:12,13 신약 시대 예루살렘의 상업 발달의 요인과 성전에서의 상업 행위 본문은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 성전 안의 장사치들을 내어 쫓으신 기사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왜 많은 장사치들과 환전상이 성행했는지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신약 시대 예루살렘의 상업 발달의 몇 가지 요인과 성전에서의 상업 행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상업 발달의 요인
예루살렘은 팔레스틴 땅의 중심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 좋은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산악지대이며 단 하나의 남북 도로만이 이 지역을 통과했기 예문이다. 또한 주변에는 많은 동굴들과 은신처가 있기 때문에 강도들의 불법 행위도 극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상업이 발달하게 된 요인으로서 크게 경제적 요인과 종교적 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① 경제적 요인: 예루살렘과 그 주변
토양은 암반성 석회질 토양으로 곡물 재배에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곡물 등의 생활필수품을 거의 수입에 의존했다. 더욱이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주민들뿐만 아니라 1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축제 순례자들의 식량까지도 해결 했으므로 대부분 곡물을 요단강 동북 지방에서 수입해 왔다. 또한 이러한 생활 필수품 이외에도 예루살렘에는 천연 자원이 절대 부족하였다. 특히 당시 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원인 철이 전혀 생산되지 않아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이러한 수입을 위해 필요한 자금은 기름이나 포도주, 또는 식초 등을 수출하여 마련하였다. 이처럼 수입과 수출이 빈번히 일어났기 때문에 지리적 여건이 매우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상업은 번창할 수 있었다.
② 종교적 요인: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할 수 있었다. 즉 성전 제의를 위해서 질이 좋은 목재와 곡물, 희생 짐승 등이 대량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광장에서는 항상 희생제물용 짐승 거레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축제 순례자들은 해마다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였다. 특히 유월절 축제 때는 세계 각처애서 물려 들었는데, 이들이 모두 희생제물을 드렸다고 본다면 얼마나 맡은 가축 공급이 이루어져야 했는가는 능히 상상해 볼 수 있다.
한편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 이외에 소위 '축제용 십일조'(Festival Tithe)라고 하는 제 2의 십일조가 있다(신 12:5-19). 이것은 첫째 십일조를 바친 백성들이 그 나머지 소출(9/10) 가운데서 다시 1/10을 구별하여 내는 것으로서' 모두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 축제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볼 때 절기 때에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많은 물자와 자금이 유통되었는지는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2. 성전에서의 상업 행위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처음 제사장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그래서 일부 상인들은 장사할 자리를 얻기 위해 제사장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했으며' 결국 제사장들의 비호 아래 '이방인의 뜰'에서 폭리를 취하며 장사를 해오게 되었다.
특히 희생 제사를 위한 제물의 경우 그 제물이 흠이 없는가에 대한 검열이 까다로웠고' 대부분 집에서 가져온 제물들은 부적격한 것으로 판단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성전 안에서 검인을 받은 제물들이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그리고 속죄제물의 값이나 유월절 직전에 성전에 찾아가 납부했던 성전세 등은 다른 나라의 돈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나라 특히 로마의 화폐를 특별히 성전세용으로 만든 유대인의 은돈으로 바꾸어 추는 환전상들이 번창하게 되었으며' 이때에 이들은 엄청난 환전료를 요구하였다.
이러다보니 자연 예루살렘 성전 안은 물건을 파고 돈을 바꿔주는 장터로 변했고' 제사장들의 묵인 아래 타락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다.
3. 교훈
이상을 통해 우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한 이유와 더 나아가 당시 성전 제사가 상업주의로 변질됨으로써 예배의 의의가 상실돼버린 상황을 이해해 보았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도 진정한 예배의 의의는 상실한 채 세상의 배금주의에 휩싸여 상업화, 세속화돼가고 있지는 않는가 자못 각성해 보아야 하겠다. 진정 예배의 진정한 내용은 상실한 채 교회 내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쉬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선언하지 않으시겠는가!
지리 배경-21:1 감람산
본권 막 13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21:9,15 신약의 주요 15대 원어
원어 의미
1. 호산나 구원하소서(마 21:9)
2. 골고다 해골의 곳(마 27:33)
3. 에바다 열리라(막 7:34)
4. 아바 아버지(막 14:36)
5. 달리다굼 일어나라(막 5:41)
6. 아포스톨로스 사도(눅 6:13)
7. 로고스 말씀(요 1:1,2)
8. 독사 영광(요 1:14)
9. 실로암 보냄을 받았다(요 9:7)
10. 유앙겔리온 복음' 좋은 소식(롬 1:16,17)
11. 카리스마 은혜' 은사(롬 3:24)
12. 피스티스 믿음(롬 4:24)
13. 에이레네 평화(롬 14:17)
14. 아가페 사랑(고전 13:2-4)
15.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계 22:20)
도표-21:9-11 예수에 대한 묘사와 칭호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참조.
지리 배경-21:17 베다니
막 14장 자료 노트 참조.
난제 해설-21:18-22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막 11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21:21, 의심하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디아크리노'( )이다. 이 단어 외에 '의심하다'를 뜻하는 단어로 '디스타조'( )가 있는데' 이것은 '이중적 태도를 갖다'라는 뉘앙스(nuance)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4장의 원어연구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 쓰인 '디아크리노'는 신약 외에 일반 문헌에서는 '의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알았다. 이 용어는 '심판하다'라는 뜻의 '크리노'( )에 '디아'( )가 접두됨으로써 그 의미가 강화되어 '철저하게 분리하다', '철저하게 구별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이 단어는 '분별하다'(마 16:3)', '분간하다'(행 15:9)', '살피다' (고전 11:31)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본문을 포함하여 신약성경에서 8번 '의심하다'(doubt)라는 뜻의 확대된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순수하게 믿다'라는 의미와 대조적으로 부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코치코치 캐묻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행 11:2). 이는 본문에서 예수께서 아직 제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하여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사 말라 죽게 한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이는 믿음이 있다면 자연적인 현상 너머 초자연적인 일까지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복된 믿음은 '보지 않고도' 즉 이성적으로 캐묻기 전에 먼저 의심 없이 믿는 믿음이다. 이것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몰이성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나 초이성적인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판단하여 꼬치꼬치 캐묻는 것 자제가 잘못된 것이기에 오히려 먼저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도표-21:28-29 예수님의 비유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예수 시리이즈' 참조.
21:1-11 예루살렘 입성
본장에서부터 7장까지는 예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전후에 있었던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그 중에서도 본장은 주일에 있었던 예루살렘 입성(入城)과 더불어 시작되는 예수님의 고난 주간 가운데서 첫째 날(1-11절)과 둘째 날(12-17절) 그리고 셋째 날(18-46절)에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에 우리는 본장의 내용을 통해 이미 여러 차래에 걸쳐서 갈등과 대립을 빛은 바 있는 예수님과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 사이에 더욱 격렬한 긴장이 야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은 고난 주간 중 첫째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진정 예수님이야말로 구약 성경(슥 9:9)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거해 준다. 정녕 메시야이자 왕이신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심과 아울러서 자신의 지상 생애에 있어서 남은 마지막 한 주간이 고난의 연속으로 점
철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은 모두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메시야에 관한 슥 9:9의 예언이 정확히 성취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성경의 예언 역시 조금도 어김없이 성취될 것이다. 물론 재림의 예수께서는 더 이상 새끼 나귀가 아니라 승리의 백마(白馬)를 타고 세상에 양하실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전하고 영원한 왕권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계 19:11-16).
② 성도들은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본받아 배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모습은 지상의 메시야 왕국에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이던 제자들의 모습(마 20:20-28)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때때로 성도가 마음의 평안과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인데' 그럴 떼마다 우리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다시 한 번 본받아 배우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마 11:28-30; 빌 2:3' 5).
③ 성도들은 무슨 일이 있든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을 변치 말아야 한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결국 그들은 한 주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소란을 부렸다(눅 23:18,21,23). 아마 당시의 유대 백성들은 수많은 이적을 행하신 바 있는 예수께서 드디어 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지만. 자신들의 기대가 무산돼버리자 극도의 분노를 표출시킨 듯하다. 하지만 성도는 자신의 세속적 야망이 달성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거나 충성을 중
단하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된다(합 3:17,18; 요 6:66-68).
2: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근처까지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본서에는 언급이 없으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 성밖 베다니에 도착하여 마리아에게 기름부음을 받으신 후 거기서 하룻밤을 주무신 후에 이튿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나타난다(요 12:1-12). 즉 예수께서는 금요일 해지기 전에 도착하셔서 안식일에 마리아에게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일요일에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감람산. -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시내 건너에 위치한 해발 약 800m 높이의 산으로, 감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감람산과 관련해서는 막 13장 자료노트, ‘감람산'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벳바게. - '무화과나무의 집'이란 뜻으로, 공관복음의 병행 구절(막 11:1; 눅 19:29) 이외에는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베다니와 벳바게가 함께 언급되어 있고, 예수께서는 지금 베다니에서 유숙하시고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다. 따라서 벳바게는 베다니와 인접한 마을로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의 감람산 동편 기슭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람산 벳바게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두 제자를 보내시며. - 이 두 제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에 따라서는 ① 베드로와 요한, ② 야고보와 요한, ③ 고침 받은 여리고의 두 소경일 것이라고 추측하나 어느 견해가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어 나귀를 끌어오게 하신이유이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전지하신 신성을 드러내어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신분을 명확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둘째,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예언(슥 9:9)을 성취하시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셋째,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공개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21:2 나귀와 나귀 새끼. - 마가와 누가는 나귀 새끼만 있었던 것으로 언급한 반면(막 11:2; 눅 19:30), 마태는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사실만을 강조하기 위해 나귀 새끼만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는 보다 본래적 사실에 충실하여 기록한 까닭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필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예언(슥 9:9)의 성취에 있다 할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메시야적 본질을 무리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무리들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칠 즈음에 이르자 그를 메시야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9절). 물론 그들은 예수를 압제받고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오인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를 촉진시키고 제정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눅 19:42 ; 사 9:6). 이 평화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요, 사람과 사람간의 화목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 이 구절은 맞은편 마을에 나귀 새끼를 징집하러 가는 제자들이 충분히 직면할 수밖에 없는 예상 질문이다. 본문에서는 나귀 주인과의 대화가 생략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막 11:5,6; 눅 19:31,32). 물론 나귀의 주인이 나귀를 선뜻 제자들에게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흠모하고 따랐던 넓은 의미의 제자였음을 짐작케 해 준다. 따라서 마태의 의도는 '본 구절'이 예상하는바 실제 상황에 초점을 두지 않고, 이 예상되는 질문에 따르는 예상 답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여기서 '주'(퀴리오스)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처음 사용하는 말로,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신적 속성을 직접 드러낸 말이라 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보다 뚜렷이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즉시 보내리라. 이 말에 대해 혹자는 나귀의 주인이 바로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잡수신 집의 주인이며, 따라서 나귀도 미리 예약되어 있어서 '주가 쓰시겠다'하면 즉시 보내기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Lenski).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말미암아 나귀 주인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나귀를 서슴없이 바치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21:4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 이 구절은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마태복음을 쓴 마태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전형적인 문장이다(마 1:22; 2:15; 8:17; 12:17; 27:9). 한편 이 구절에서 사용된 접속사(히나)는 그 용례가 목적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그런 취지에서 볼 때, 나귀를 둘러싼 이야기(1-3절)는 예수 자신이 스스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이심을 계시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음을 말해준다.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 본 구절의 인용문은 사 62:11과 슥 9:9의 말씀이 조합된 형태로 인용되어 있다. 아래의 도표를 참조하라.
사 2:11 |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
슥 9:9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나귀 새끼니라 |
마 21:5 |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
이상과 같은 도표에서 본절에 인용된 인용문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본절은 사 62:11에서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라는 문구만 인용을 한 반면, 즉 9:9에서는 대부분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다만 여기서는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라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②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본절은 예수님 자신이 오실 메시야임을 밝히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것은 슥 9:9은 말할 것도 없고, 형식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사 62 :11까지도 연관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 62:11에서는 메시야가 구원을 베푸실 존재로 부각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슥 9:9과 사 62:11 말씀을 신학적으로 융합한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점을 강조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이 메시야는 '네' 왕이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배척한 그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마태는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 왕은 세상의 왕처럼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귀에게, 즉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진리이다. 한편 여기서 '시온'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했던 산성으로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이라 칭했던 곳인데(삼하 5:7 주석 참조), 이후 예루살렘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결국 여기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주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시 45;12; 사 47:1)
21:6 제자들이 가서. - 그 당시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없었지만 일단 복종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마가복음(11:4-6)에서는 더 자세한 내용을 기록해 주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 대해서는 마가의 병행 구절과 해당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1:7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 옷을 나귀 새끼 등에 얹은 행위는 일반적으로 왕을 영접하거나, 왕의 즉위를 나타낼 때 행하는 극적인 예절에 속한다. 실제로 구약에서 예후가 왕이 될 때 이런 행위가 있었다(왕하 9:13). 한편 '그 위에 얹으매'와 '그 위에 타시니'라는 구절에서 '그'(아우톤)라는 대명사가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혹자는 예수께서 두 마리의 나귀를 교대로 갈아타셨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Strauss). 하지만 여기서 '그'는 나귀 새끼 등에 얹혀있는 겉옷이나 다른 부착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Meyer, Wordsworth).
21:8 무리의 대부분은. -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 '매우 큰 무리'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음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무리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것으로 나타난다. 이로 보아 예수의 입성식에는 예수를 뒤따르던 자들과 예수를 마중 나온 자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다.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여기서 '나무가지'는 '종려나무가지'였다(요 12:13). 그런데 종려나무가지는 보통 승리의 상징으로(계 7:9, 외경 마카베오상 13:51) 여겨져 주로 왕이 지나는 길에 펴놓거나 그것을 들고 흔들었다. 결국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편 것은 예수를 왕으로 환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오랜 메시야 대망에 살던 무리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가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 평강의 왕이요, 대속주로서의 왕이었음이 판명될 때, 이들의 열렬한 환호는 폭도의 저주로 변해버렸다(마 27 :23).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 - 이 구절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기쁨의 정도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일부는 환호하는 군중들을 헤치며 예수의 행진을 도왔고, 일부는 곧바로 예수의 뒤를 따라 큰 무리를 이루었던 것이다. 마치 오랜 가뭄에 지쳐버린 나무들이 단비에 흥겨워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 - 의역하면 '메시야 만세'란 뜻이다. 즉 여기서 '다원의 자손'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의 대명사였고(마 1:1 주석 참조), '호산나'는 본래 '구하옵나니 구원하소서'란 뜻으로(시 118:25) 하나님께 대한 기원의 말이었으나, 차차 기쁨과 환호 등을 나타내는 구호로 변화되었다. 하여튼 본절은 무리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야로 추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이 구절은 시 118:26절의 인용이다. 이 말은 본래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 했던 말이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메시야를 부르는 말로 사용되었다.
21:10 온 성이 소동하여. - 마태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본절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집약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여기서 '소동하여'(에스에이스데)라는 단어는 어원상 지진에 의해 땅이 흔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예수의 입성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큰 파문이 일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조사 자료에 의하면 유월절 행사 기간 예루살렘 성에 운집한 사람의 수는 대략 270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다(Carr).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당국은 민란과 반란에 매우 과감하게 대처했는데, 특히 유월절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 해방 운동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로마 당국으로 하여금 모종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 역시 민심이 예수께 이반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서둘러 예수 살해 음모를 진행시키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 간에 줄을 긋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목적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이는 누구뇨. - 이 질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잘 몰랐던 사람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아마도 예수를 잘 몰랐던 예루살렘 주민이 했거나 아니면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외국 거주 유대인들이 했을 것이다.
21:11 무리. -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동행했던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당시 예수님을 환호하는 대열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 이 구절은 예수의 정보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입력된 핵심적인 성구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무리들은 예수님을 '선지자'(호 프로페테스)로 소개하는데, 이는 그들이 모세에게 예언된(신 18:15; 요 1:22) '그 선지자'가 예수님을 예언한다는 사실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사렛이란 출신에 대한 정보는 비록 예수 자신이 베들레헴에 출생하셨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줄곧 성장하신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별명은 공생애 기간 동안 따라 다녔던 명칭으로서(막 1:24; 10:47; 16:6; 요 1:45; 19:19),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취하셨던 별칭이었던 점이 주목된다(행 22:8). 이런 사실들은 마태가 예수님이 나사렛인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이 무리들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했음(마 2:23)을 보여 주고 있다.
21:12-17 성전 정화
앞 단락에서는 고난 주간 중 첫째 날(주일)에 있었던 예루살렘 입성에서의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의 모습을 보여준데 이어서, 본문에서는 둘째 날(월요일)에 있었던 타락한 성전을 향해 극도로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즉,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고 즉시 그들을 내어 쫓으시는 단호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예수님의 분노와 단호함은 개인적인 이해 관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타락한 유대종교를 결코 용납하실 수 없는 주님 자신의 공의로운 성품 때문이었다. 원래 '돈 바꾸는 일'과 '비둘기파는 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명목 하에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명목일 뿐 실제로는 제사장들과 상인들 간의 이권을 노린 담합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 12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때문에 예수께서는 의로운 분노를 행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공생애 사역의 초기에도 이미 한번 행하신진 바 있다(요 2:13-22). 그런데도 예루살렘 성전이 여전히 장사꾼들로 들끓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유대 종교가 얼마나 세속화되어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① 성도들은 그 어떤 명목과 구실로든지 교회 안에 상업주의와 물질주의가 침투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이 매매하게 된 것은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키 위함이었지만, 간교한 이권 추구에 불과했기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처사였다. 오늘날에도 온갖 구실을 다 동원하여 교회를 기업화시키려는 자들이 있는데, 이처럼 잘못된 현상을 보고도 성도들이 방관만 하고 있거나 심지어 동조하는 것은 장차 주님께로부터 엄한 책망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행위이다.
② 성도들은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결코 불의와 죄악으로 인해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고전 3:16,17; 고후 6:16). 특히 성도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바 되어 이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고전 6:19,20; 10:31).
21:12 성전에 들어 가사. - 여기서 성전은 헤롯 성전을 가리킨다. 헤롯은 당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B.C. 19년부터 8년에 걸쳐 성전을 새로 지었었다. 물론이 성전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까지 46년간이나 확장공사가 부분적으로 계속되었다(요 2:20). 헤롯 성전과 관련해서는 눅 19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헤롯 성전은 헤롯 왕의 정치적 통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세워졌던 관계로 헤롯 성전을 둘러싼 추악한 이권 개입이 많았었는데, 본절에 나타나는 매매하는 자들도 이런 성전 비리와 관계가 깊다. 한편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간 날짜에 대해서 마태는 예루살렘 입성 사건 이후 곧바로 성전을 숙정하신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와 다르다. 즉 예루살렘 성의 입성 사건 당일 예수님은 성전을 방문해 그저 한 번 둘러보시고 다시 베다니로 물러가 하룻밤을 유하셨다가 다음 날, 즉 월요일에 성전을 숙정하신 것이다(막 11:11,1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이와 같이 시간 간격을 두지 않고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숙정 사건이 연속적으로 있었던 사건처럼 보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보다 명백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성전 숙정의 시기 문제이다. 마태를 비롯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성전 숙정 사건을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반면, 요한은 공생애 초기의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요 2:13). 이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성전 숙정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에 두 차례 있었다는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각 복음서의 독특한 신학적 주장과 그 맥락에서 '성전 숙정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의 서두에 기록된 '성전 숙정 사건'은 마태의 '성전 숙정사건'과 동일한 내용의 다른 사건을 담고 있더라도 그 의미와 주장에 있어 각각 특별한 상이점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 예언의 진정한 성취자이신 예수께서 유대교의 마지막 보루인 성전을 방문하신 것은 이제 더 이상 성전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성전 무용론을 선언하시기 위한 현장 조사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매매하는 모든 자. - 이들은 대개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필요한 물품을 판매 상인들을 가리킨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부터 제물로 드릴 소나 양을 직접 가지고 오기도 했지만 많은 외국 거주 유대인(디아스포라)이나 먼 지역 사람들은 성전 주위에서 아예 제물을 구입할 요량으로 빈손으로 성전을 방문하곤 했다. 또한 설사 직접 제물을 가지고 온다손 치더라도, 당시 부패한 제사장의 검사 기준이 까다롭고, 여러 가지 책을 잡아 잘 허락해 주질 않았었다. 제사장의 이런 처사는 물론 성전 내의 상인들과 담합하여 성전 수의금을 남기려는 잇속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서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오는 자는 대부분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하는 자에게서 제물을 구입했어야만 했던 실정이었다. 또한 이 매매 과정에서 생기는 이익금의 일부가 제사장에게 흘러가는 것은 물론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거룩한 성전을 검은 돈이 횡행하는 지경까지 오염시킨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셨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음으로써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신 것이다.
돈 바꾸는 자. - 일명 환전상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화폐 사용은 로마의 화폐가 더 널리 통용되었는데, 이 화폐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당시 반 세겔의 성전 세를 거두었던 제사장들은 유대 화폐로 성전 세를 바치도록 했다. 물론 이것은 명목상 우상이 새겨진 화폐를 성전에서 통용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명분 이면에는 이를 악용하여 로마 화폐를 유대 화폐로 교환해 주는데서 오는 차액을 착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 환전상 역시 예수님의 의로운 노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둘기 파는 자. -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제물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소나 양을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비둘기를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하셨다(레 12:6,8; 눅 2:24), 그런데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자들은 그 가격을 높게 책정함으로써 '비둘기' 제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들 역시 '돈 바꾸는 자'와 마찬가지로 성전을 둘러싼 각종 이권에만 혈안이 되어버린 파렴치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신약시대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둘러엎으시고. -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상업 행위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이때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다고 기록했는데(요 2:15), 본서에는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여기서 한번쯤 제기할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본 사건에 대한 명칭 문제이다. 통상 본절의 사건은 '성전 숙정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성전 숙정'을 한다고 했을 때 이 명칭의 뜻은 소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두고 볼 때 과연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성전을 소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두고 볼 때 과연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소제하러 오셨는가, 아니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대신 참 길이신 자신을 제시하러 오셨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전자의 가정이 맞다면 '성전 숙정' 사건이라는 명칭에는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한편 후자의 질문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즉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여 다시 원래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대신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면, '성전 숙정'이라는 명칭은 예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진단을 하면서 이 사건의 적합한 명칭으로 성전 소란 사건'을 제시해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당시 헤롯 성전의 규모로 볼 때 예수의 행위는 극히 제한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평소 성전에는 질서를 유지하는 경비대가 상주했을 뿐 아니라 유월절과 같은 절기에는 항상 민란을 경계하기 위해 로마군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당시의 정황을 두고 볼 때 만약 예수의 행위가 전 성전의 질서에 영향을 끼칠만한 행위였다면 즉각 경비대나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 어느 곳에도 이들과의 직·간접적인 마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예수의 소란 행위는 극히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② 예수의 행위는 선지자적 예언 행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선지자들은 종종 이스라엘의 장래에 펼쳐질 전망을 상징적으로 행동하곤 했는데, 이를 '선지자적 예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가 곧 멸망할 이스라엘을 목전에 두고서도 돈을 주고 땅을 매매하는데, 이것은 장차 회복될 이스라엘을 염두에 둔 선자지적 예언 행위에 해당한다(렘 32:6-15).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바, 실제로 성전을 깨끗이 할 목적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성전의 파산 선고를 상징하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통해서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위는 '성전 소란 사건'으로 개명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이것은 사 56:7의 인용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성전의 본래적인 목적과 용도를 밝히신 것이다.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 렘 7:11의 인용으로 제사장들이 성전을 사악한 욕심을 채우는 장소로 전락시켰음을 통박하신 말씀이다. 한편 예레미야는 이 구절을 말하면서 도적의 굴혈이 된 성전이 파괴될 것을 선언하셨는데, 예수께서 또한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헤롯 성전이 파괴될 것과 보다 나은 성전으로 대체될 것을 밝히신 것이라 할 수 있다.
21: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 본 구절의 내용은 마태만이 기록하는 바, 이것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가 오면 구약의 예언대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등(사 35:5,6) 치유의 역사를 베풀 것이라는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이심을 밝히기 위해 본절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성전 출입이 제한된 신체장애자들을 성전에 불러들여 거기서 그들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께서 성전보다 더 큰 자임을 보여주는 사건임과 동시에(마 12:6), 예수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성전인 교회의 참 본질을 보여 준다. 즉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의 차별과 차이는 무시되고, 오직 모든 믿는 자들이 차별 없는 한 형제·자매로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 예수가 성전에서 하시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제일 먼저 그리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예수의 일련의 행위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침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의 성전에서의 행위들은 비록 성전을 중심으로 각종 이권과 명예와 지위를 누렸던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게는 분노를 살만했다고 할지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한 호응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당시 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민심의 이반과 자신들의 불순한 신앙의 폭로, 그리고 이로 인한 기득권의 침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서 예수에게 적대감을 표시했던 것이다.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 - 여기서 '이상한 일'은 이상하고 탁월한 일을 가리키는 말로,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일을 비롯해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를 고치신 일을 가리킨다(Bruce).
21:16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 이 질문은 예수께서 계속하여 어린 아이들이 찬송한 것을 허용한데 대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항변이다. 비록 유대풍습에 랍비를 찬양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로 찬미를 하게 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들은 예수를 찬양을 받을만한 랍비 정도로도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어린 아이들이 불렀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를 지칭하는데, 이런 사실은 그들에게 신성 모독죄에 해당할 정도였다. 또한 이런 상황을 즐기는 예수는 분명 그들의 눈에 바알세불과 같이 보였을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 - 이 대답은 예수께서 자신이 어린 아이들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 이 구절은 시 8편의 인용문으로 이것은 본래 비록 분명하지 못한 발음과 화음이지만, 하나님을 높이는 젖먹이의 찬송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열납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어린 아이들의 찬양을 메시야에 대한 온전한 찬미로 해석하고 있다.
21:17 그들을 떠나‥‥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 예수께서는 성전 숙정을 하신 후 다시 베다니로 물러 나오셨다. 여기서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2.5c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요 11:18) 감람산 동편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베다니에 대해서는 막 14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21:18-22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
본문은 앞 단락(12-17절)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과 함께 예수의 고난 주간의 둘째 날(월요일)에 발생한 사건에 관한 언급으로 일명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라 불리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막 11:12-14,20-26에도 언급되고 있는 바, 마가는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18-19절)과 제자들이 무화과나무의 마른 것을 발견하고 예수께서 그에 관해 교훈하신 것(20-22절)을 분리하여 전자는 성전 정화 사건 이전에 있었던 일로 후자는 성전 정화 사건 이후 그 다음날(화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런 양 복음서의 차이는 마가가 연대기적으로 사건을 기술한 반면, 마태는 사건을 시간적 순서와 관계없이 같은 주제로 묶어 기술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건진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길가에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했으나 그 열매를 얻지 못하자 저주하셨다(19절). 그런데 이때(태양력 3,4월)는 무화과가 열릴 때(5,6월)가 아니므로 예수의 무화과나무 저주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 하나의 상징적 행동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이신 것이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성전 정화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그것은 두 사건이 다 같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성전 정화 사건이 타락한 유대 종교에 대한 파산을 선언한 것이라면(1절 주석 참조).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상징적인 두 사건은 A.D. 70년에 있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구체화된다.
한편 이러한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지닌 자들이 되어야 한다(딤후 3:5). 만약 성도가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경건하고 진실된 것처럼 자신을 꾸밀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주님께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마 7:15-23; 약 1:22-27).
② 성도들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발견한 제자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 이요'라고 말씀하셨다(21절; 17:20). 만약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아무 것도 응답받을 수 없을 것이다(약 1:6,7).
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 본절에서의 '이른 아침'은 월요일 아침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다시 베다니로 물러가셨다가 월요일 아침 일찍 또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시장하신지라. - 예수께서 베다니의 어느 가정에서 유숙하지 않으시고 노천에서 밤을 지내셨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만일 예수께서 집에서 유숙하셨다면 아침을 들지 못했을리 없는 것이다(Robertson). 한편 예수께서 시장기를 느끼신 것은 그가 인성을 지니셨다는 표시이다.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틴 지방의 3대 과목의 하나로서(민 13:23; 신 8:8), 이 나무의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으로 불리기도 했다(Hendriksen). 이 무화과나무는 보통 3월 말에 싹이 나서 5,6월에 열매를 맺고 8-10월 사이에 수확을 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볼 때, 예수께서 그 열매를 구했던 때는 시기적으로 열매 맺는 시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월절이 있는 니산 월은 3,4월에 해당하는데, 무화과가 아무리 빨리 열매 맺는다 해도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 11:13)는 말이 첨가되어있다. 결국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취할 수 없었던 것은 정한 이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그리로 가신 것(막 11:12)은 그 나무의 잎사귀가 무성한 까닭이었다. 즉 무화과는 보통 잎과 동시에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무화과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리고 가신 것이다. 하지만 신적 지각력을 지니신 예수께서 무성한 나뭇잎에 속아 이처럼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사건이 본래 무화과 열매가 익는 여름에 있었던 일이나 마태가 편집 의도상 이곳에 배열했다는 것이다(Smith).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본 사건을 모든 공관복음서가 동일하게 예수의 고난 주간에 있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아야 한다. 즉 예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 자체를 하나의 상징적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잎사귀는 무성하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하시기 위해 그 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마르게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하곤 했다(호 9:10; 욜 1:7). 그와 같이 무화과나무는 여기서도 패역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다. 즉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종교적 의식만 번창하고 참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Alford). 결국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급박성을 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결과 그 잎이 마른 사건은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인 예표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사항은 막 11:13 주석을 참조하라.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곧 마른지라. - 예수는 잎만 무성한 채 열매를 맺고 있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저주를 내리셨다. 이 저주는 제자들도 이상히 여겼듯이 분명 이해하기 힘든 난제들이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분명 무화과나무가 제 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않았다면, 저주 그 자체가 어색하지 않느냐라는 점이다. 또 한 가지는 예수께서는 지금 무화과나무를 마치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격체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해석 또한 구구하다. 하지만 이 무화과나무가 신앙적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즉 예수께서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의식과 형식에만 치우쳐 실제는 신앙적 열매(갈 5:22,23)을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의 발생시기가 마태, 마가의 기록의 차이로 논란이 되고 있는데, 마태는 본문의 기록처럼 예수님의 저주와 무화과나무의 마름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보는 반면, 마가는 그 사이에 성전 숙정 사건(막 11:15-19)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님의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월요일 아침에(막 11:12-14) 있었고, 그 나무의 마름을 제자들이 발견한 것은 그 다음날인 화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로 기록(막 11:20-24)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양 복음서의 차이는 저술 방법의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마태는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나 연대기적 방법에 의존하기보다는 주제에 따른 배열을 더 선호하여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그 결과를 동일한 주제로 묶어 두 사건을 일련의 사건인 것처럼 기록한 반면, 마가는 보다 연대기적 배열에 충실하여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막 11장 자료노트,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보다 참조하라.
21: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 제자들의 이런 반응들은 전에도 자주 있었다(막 6:51). 특히 이들은 예수께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풀게 될 때 종종 경이감에 찬 감탄을 자주 했던 것이다. 본 구절도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경이와 감탄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21:21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시들어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제자들은 이 같은 능력의 출처에 대해서 질문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믿음'을 제시하면서, 믿음은 감람산을 사해 바다로 던져버리는 일까지도 가능할 것임을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확고한 믿음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막 9:23). 이 말씀은 예수님 사후 자신의 사역을 계승해가야 할 제자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 이 표현은 종종 믿음의 표적과 관련해서 사용되는데(고전 13:2), 눅 17:6에는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라는 표현으로 변형되어 표현되기도 했다. 본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마 17:20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1:22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서 된 일을 통해 믿음을 말씀하시고 믿음에서 다시 기도에 관해 말씀하신다. 기도에 관한 본절의 내용은 참 믿음에 근거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무엇이든지'에는 '불의한 욕심어서 구하는 것'(약 4:3)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참 믿음이란 불의가 내재될 수 없는 것이다. 하여튼 이 말씀은 참 믿음을 소유한 신자들에게 큰 축복의 약속이 아니라 할 수 없다.
21:23-27 권위 논쟁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성전 정화 사건(12-17절) 및 무화과나무 저주 사전(18-22절)이 있었던 다음날(화요일)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있었던 일에 대한 언급으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의 권위의 출처에 대한 산헤드린의 질문(23절)과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24,25,27절)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산헤드린의 예수에 대한 질문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예수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행하신 일련의 행위들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권세의 종류와 출처를 질문함으로써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한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께 권위 문제를 질문함으로써 만약 예수께서 이 문제를 적절히 대답하지 못할 경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효과를 거두고, 만일 그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그를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으로 고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를 너무도 잘 만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요한의 세례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스스로 시인하게 줬다(25-27절). 이에 대해서는 26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려는 악인들의 어떠한 노력도 무익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그들의 질문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결과만을 낳았던 것이다.
②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무리들은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21:23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 이때는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또한 성전 숙정 사건이 있었던 월요일이 아니라 그 다음 날인 화요일이다. 그리고 특히 본절을 마가는 병행 구절에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막 11:27)라고 기록하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수께서는 한 지점에서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 마가의 병행 구절은 더 세밀하게 보도해 주는바,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막 11:27)로서 이스라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께 나아와 질문한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드디어 예수의 행위를 본격적으로 제지하기 위한 구체적 조사에 들어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와 같은 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 ․ 정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인 성전 체계를 공공연히 위협하자, 예수를 음해할 묘수를 찾고자 하여 예수께 나아와 질문을 한 것이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이 질문은 예수의 권세에 대한 질문으로 이것은
이어 나오는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는 질문과 사실상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엄밀히 구분하자면 전자는 권세의 종류를 질문한 것이고, 후자는 권세의 출처를 질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여기서 '이런 일'이란 '예루살렘 성의 승리의 입성'과 '소경과 절름발이를 치유하신 일', 그리고 '성전에서 환전상과 상인들을 쫓아내신 일'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예수의 일련의 행위들은 당시 교권주의자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는 바 그들은 예수께 권세의 종류와 출처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만약 예수께서 이 질문에 자신의 권위를 적절히 해명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는 효과를 거두고 반면에, 자신이 하나님의 권세를 받았다고 해명한다면 신성 모독죄로 기소하여 예수를 아주 제거해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이 파놓은 두 가지 함정 중에 적어도 한 쪽에는 빠지게 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음모는 신적 지각 능력을 지니신 예수에 의해 여지없이 무산되고 오히려 그들의 사악함만 밝혀지고 말았다(26,27절).
21: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간악한 지혜의 예측을 넘어섰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의 흉악한 의도를 간파하시고 오히려 역질문을 통해 유대 지도자들을 난감하게 만들어 버리신 것이다.
21:25 요한의 세례가‥‥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여기서 '하늘로서'는 '하나님에게로서'라는 의미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직접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빌어온 완곡한 표현이다. 따라서 '하늘로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참된 계시 또는 권위 등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반면에 '사람에게로서'라는 말은 '하늘로서'라는 말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불완전하고 거짓된 계시 또는 권위 등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하여튼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에 대한 출처를 위해 교권주의자들에게 질문한 것은 그들의 자신에 대한 악한 음모를 분쇄하고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스스로 시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세례 요한을 죽인 사실에 대해 정죄함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며, 세례 요한이 평생 드러내고자 했던 예수에 대한 그들의 음해 음모가 얼마나 반신적(反神的)인 것인가를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요한의 임의적인 행위, 곧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무리들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던 까닭에 역시 백성들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세례 요한이 증거하는 예수의 권세까지도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결과를 낳아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만든 올무에 오히려 자신들이 결박되어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 예수의 역질문에 혀를 찔린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마땅한 답변을 위해 서로 궁리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을 뿐 진리에는 무관심했던 그들은 어떤 답변도 할 수 없었다.
21:26 백성이 무섭다. -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이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그들은 가장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무서워한 것은 백성들이 요한의 세례와 설교가 하나님께 속한 줄로 여기고 또한 요한을 선지자로 알았던 까닭에,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고 할 경우 정치적인 소요가 날 뿐 아니라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21:27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함으로써 자신들의 딜레마를 모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났다고 안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화의 과정을 지켜 본 백성들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즉 그들은 스스로 패배의 고백을 하고 만 것이다.
나도‥‥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예수님은 이미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처지를 간파하고 계신 것이다. 이들의 무책임하고 표리부동한 처사를 폭로하고, 예수 자신에게 임한 마수의 함정을 유유히 걷어내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의 출처에 답하지 않은 것은 마치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말씀의 실천과도 같다고 하겠다(마 7:6).
21:28-32 두 아들의 비유
본문은 권위 논쟁을 언급하고 있는 앞 단락(23-27절)의 연속되는 기사로 자신을 음해하려는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음모를 분쇄하신 예수께서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불의와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도입하신 비유이다. 이 비유를 보면 한 사람과 두 아들이 나온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은 '하나님'을, '맏아들'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을, 그리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비유에서 '맏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듯했지만 결국 순종하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을 맏아들과 같이 온갖 종교적 특권과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듯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과 메시야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알고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반면에 둘째 아들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반항적이고 반 율법적인 세리와 창기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으며,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32절). 때문에 예수께서는 세리와 창기들이 유대 교권주의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하셨다(31절). 결국 본문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함은 물론 그들에 대한 예수의 신앙의 선언까지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31절 주석 참조.
한편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7:21; 약 2:14-26). 두 아들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따르겠노라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실행하지 않았는데, 오늘날에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가장 잘 순종하는 것처럼 떠들면서, 정작 아무 것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마 25:41-45).
② 하나님 앞에서 너무 늦어 회개할 수 없는 죄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노라고 대답했지만, 결국 회개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해주시는 분이시다(요일 1:9). 따라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나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어서 결코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오를지라도, 바로 그것은 우리의 회개를 방해하기 위한 마귀의 술책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③ 하나님 나라는 혈통이나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얻어진다는 것이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해설자로 자처하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로 생각했지만, 결국 예수께 의롭다 인정받은 것은 교만했던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했던 세리와 창기들이었다.
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 이 구절은 두 아들 비유(28-32절)를 시작하면서 청중들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질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제껏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자신의 논쟁을 지켜보았던 청중들에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실체를 좀 더 분명히 밝힘으로써 그들의 거짓된 종교 행위에 백성들이 속지 않게 하기 위해,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백성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사실 23-27절까지의 논쟁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아직은 그들의 사회적 명분 때문에 자신들의 사단적 정체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입장에선 자신을 음해할 명분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을 백성들에게 하실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한 사람'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두 아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든 종교적 특권과 당시 유대 사회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께 반항적이고 반 율법적이었던 세리와 창기들을 가리킨다(Bruce, Calvin).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 여기서 포도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 예민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원래 비유는 한 가지 진리를 담는 그릇이라는 전제를 상기해 볼 때, 그 주변적인 개념인 '포도원'에 대한 상징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포도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자면, 그것은 교회 또는 세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1:29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 맏아들로 상징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와 종교적인 업무를 관장했던 자들로서, 누구보다 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어야 할 부류의 계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생각도 하지 않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는 실행하지 않았음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실로 불순종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21:30 싫소이다. - 둘째 아들은 일언지하에 아버지의 지시를 거절한다. 이것은 오직 자신의 탐욕과 쾌락만을 탐닉하는 자의 무례한 어투를 연상시켜 준다.
뉘우치고 갔으니. - 둘째 아들은 맏아들의 경우와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즉 그는 처음에는 무례하고, 경솔하게 행동했으나 곧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한 것이다. 이는 세리와 창기들이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구하며 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뉘우쳐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 사실을 가리킨다.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다 같이 아버지의 뜻을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았다. 즉 맏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고는 했으나 행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순종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합당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했다. 따라서 굳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아버지의 뜻에 가깝게 행했는지를 따진다면 당연히 둘째 아들이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뜻을 거절한 세리와 창기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 이상 입으로는 순종하는 척하면서 실제는 행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 보다는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듣는 것이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우선권을 세리나 창기에게 먼저 두셨다. 비록 세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리고 창기는 음란 때문에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곧바로 회개를 통해 과거의 삶을 청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너희는 바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뜻하는데, 여기서 본 구절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서에서 둘째 아들격인 세리나 창기보다 더 늦은 번호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본 구절이 형식상 '~보다'라고 하는 비교급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은 순서의 차이를 뜻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 18:9-14)에서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14절)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세리뿐이다. 그런데 표현상 비교급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본 구절의 비교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둘째 아들격인 세리와 창녀뿐임을 유의해야 한다.
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 31절과 23-27절에 언급된 권위 논쟁의 최종 결론적인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요한이 의의 도로 왔다는 말은 요한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들이 요한이 의의 도로 왔음을 믿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증거하는 예수의 사역까지도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예수께서는 여기서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를 메시야의 구속주로 믿었던 반면, 스스로 그들의 지도자로 자처했던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려 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1:33-46 악한 농부의 비유
예수께서는 앞 단락에서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신데 이어(28-32절) 본문에서도 역시 한 비유, 곧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함을 경고하고 계신다. 그러나 두 비유는 그 성격을 조금 달리 하는데 '두 아들의 비유'가 유대교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소극적인 측면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면 본문의 '악한 농부의 비유'는 하나님을 대적한 적극적인 측면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악한 농부의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가 지니고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사실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악한 농부로 비유된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종들로 비유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로 비유된 예수님마저도 죽이고 말 것이라는 사실(34-39절)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인들에게로 이어지는 사실(40-44절)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악한 농부의 비유는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시행되던 소작 제도를 사회적 배정으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구약 성경의 이사야서에 언급된 포도원 비유(사 5:1-7)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끝끝내 배척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배척하여 죽인 농부들의 사악한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으나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주님을 배척한 자들의 모습과 동일하다(요 11:3; 18-20). 따라서 바로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외에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②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초석이 되지만,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돌이 된다(44절; 벧전 2:5-8). 이것은 마치 십자가의 도가 멸
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고전 1:18,23,24).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 두 아들 비유에 이어 계속되는 악한 농부들의 비유는 막 12:1-12와 눅 20:9-18과 병행되어 있다. 특히 악한 농부들의 비유는 사 5:1-7의 포도원의 노래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두 아들 비유와 검토할 만한 사항들을 담고 있다. 두 아들 비유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는데 다소 소극적이라고 한다면, 악한 농부들의 비유는 보다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서 유대 교권자들이 세례 요한의 의를 거절하는데 그쳤다면, 후자의 비유에서는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선지자들을 죽여 버리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 집주인이. - 여기서 '주인'은 두 아들 비유의 '한 사람'과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로서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다.
포도원. - 이것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산울 ‥‥ 즙 짜는 구유‥‥망대. - 여기서 '산울'은 산 짐승이나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가시와 같은 것으로 두른 담을 가리키며, '즙 짜는 구유'는 포도를 짜 즙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한 쌍의 웅덩이이다(사 5장 자료 노트 삽화 참조). 또한 망대는 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해 세워 놓은 일종의 원두막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시설들은 포도원을 관리하고 운영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들이다. 학자에 따라서 이것을 각각 율법, 예루살렘, 성전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Bengel), 너무도 알레고리한 색채가 짙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런 시설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돕고 보호하시기 위해 섭리하신 하나님의 각종 배려로 생각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Calvin).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 여기서 농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뜻하는데, 이들은 소작인이 일정 기간 이후에 주인에게 일정한 비율의 소작료를 바쳐야 할 의무가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바르게 정진시키는 역할로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타국에 갔더니. - 주인은 농부에게 포도원을 운영할 수 있는 조건들을 구해 주고, 포도원 관리 자체를 농부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그는 타국으로 갔다. 여기서 주인이 타국에 간 것은 농부의 완전한 책임 아래 포도원이 관장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의 신앙을 정진시킬 수 있는 여러 여건들을 제공하시고 그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자유 의지를 주셨음을 의미한다.
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 포도나무가 자라 결실하게 되었을 때로, 이 때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백성들의 신앙이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이다. 물론 여기서 '실과'는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로운 생활을 가리킨다.
자기 종. - 여기서 '종'들은 '농부'와 같은 소작인이 아니다. 이들은 주인의 명한 바대로 소작료를 농부에게서 받을 책임과 권한을 가진 자들이다. 따라서 농부는 그 종들을 주인의 대리인으로서 대우해야 했다. 이러한 '종'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선지자들을 때때로 보내시고 이스라엘 민족과 그 지도자들에게 믿음과 의의 행동을 요구하셨다(렘 35:15).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소작료는 많은 분쟁과 민란의 원인이 되었지만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농부가 주인의 종에게 행한 학대는 분명 농부 그 자신들의 악한 근성과 품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튼 농부들은 세를 받으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때리고(렘 20:1,2), 돌로 치고(대하 24:20,21), 죽이기까지(히 11:37)하는 극악한 불법을 저질렀던 것이다.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 이 구절은 하나님(주인)의 인내와 사랑을 동시에 말해준다. 자신의 법정 대리인인 종들을 무고하게 학대하고 죽였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그 농부는 죽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극악무도한 이스라엘 지도자들(농부)에게 심판을 보류하시고, 더 많은 자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다시 다른 종'이나 '처음보다 더 많이'라는 구절들은 또 한 번의 기회를 더 허락하신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였는지라. - 농부는 주인의 또 한 번의 기회를 마다하고, 전에 행하던 악한 습성대로 다시 보낸 종들을 학대하고 죽였다. 즉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오히려 그들의 패역을 일삼는데 악용하였던 것이다.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 여기서 '후에'(휘스테론)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때의 결연한 의지가 내포된 단어이다. 즉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내는 것은 농부의 패륜적인 행위에 대한 마지막 경고이자 회개에 대한 실낱같은 소망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데, 지금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의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시었다.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 최후로 아들을 보내시는 주인의 심정을 나타낸 구절이다. 아들은 이전에 급파했던 종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인의 분신이며, 주인의 형상인 것이다. 하여튼 본절에는 농부들에 대한 주인의 지극한 인내심이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 본 구절은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뜻으로, 이는 결국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알면서도 배척했음을 시사해 준다 할 것이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유업을 차지하자. - 주인의 아들을 알아본 농부들의 음모의 내용이다. 이것은 죄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바, 참으로 어리석으면서 흉악한 음모가 아닐 수 없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비신앙적 행각들이 부각되고, 이로써 민심의 이반과 기득권의 포기라는 상황에 직면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 살해 음모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방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죄인들의 죄를 확연히 드러내주는 심판의 척도가 아닐 수 없다. 하여튼 지금까지 제자들에게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살해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본절에서는 비유를 통해 자신을 죽이려한 당사자들 앞에서 그들의 속생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여지없이 파헤치고 계시는 것이다.
21:39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밖에서 죽게 될 것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다(요 19:17; 히 13:ll). 한편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안에서 죽여 밖으로 내어 던진 것으로 나타난다(막 12:8).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의 기록이 본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나 누가가 이처럼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서 죽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수난과 이 비유가 좀 더 연관이 되도록 의도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 된다(Argyle).
21:40 주인이 올 때에‥‥어떻게 하겠느냐. - 이 구절은 여태껏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주인이 올 때에'라는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직접적으로는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 때를 가리키고,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종말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21:41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청중들의 대답이다. 청중 중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들이 이 대답을 직접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 역시 다른 청중들의 대답을 방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청중들은 유다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그 농부를 심판해야 함을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들의 대답대로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에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살해당하고 그들의 이권의 터였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Josephus).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 -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말미암아 복음 전파의 주도권이 복음의 열매를 맺기에 합당한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을 뜻한다.
21:42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본절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신약에 여러 번 인용되고 있는바(행 4:11; 엡 2:20; 벧전 2:7) 유대인들이 배척한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이 영접하게 될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건물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돌로서, 이 돌을 중심으로 벽이 쌓이고, 심지어는 이 돌에 건축자의 이름을 새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돌은 건물을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돌이다. 그런데 유대인들 집을 짓는 전문적인 건축자라 자처하면서도 진정 가장 중요한 '모퉁이의 머릿돌'인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여 배척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의 무지의 극치가 드러난다. 반면 이방인들은 예수가 '모퉁이의 머릿돌'의 재질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보고 그들의 '모퉁이 돌'로 삼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배척한 예수를 이방인들이 생명의 주로 영접하여 영적인 건물로 지음을 받는 성도들의 영적 공동체인 교회를 세운 것을 가리킨다(엡 2:20-22).
21:43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 악한 농부들의 비유와 이에 대한 해석으로 천국 복음의 주도권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치 아니하고 배척하며 죽인 유대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영접하는 이방인들에게 넘어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이방인의 차지가 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 이는 생명의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준다. 여기서 '돌 위에 떨어지는 자'나 '돌에 의해 맞을 자'는 악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했다가 그가 대속의 구주임이 판명되자 실망하여 떠남으로써 실족하여 넘어진 자를 가리킨다면 '돌에 의해 맞을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대적함으로써 종내에는 재림주에 의해 철저히 심판받을 완악한 부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Bruce). 따라서 여기서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직접적으로는 당시 모든 일반 유대인을 가리키고, 보편적으로는 모든 불신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돌에 맞은 자'는 직접적으로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보편적으로는 사탄을 비롯하여 예수의 모든 대적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1: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계층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주로 평민들의 신앙생활을 관장했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들 두 계층은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전 구성원들의 신앙을 관장했던 주도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신약총론, '신약시대의 사회적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따라서 그들은 비록 마음의 동의는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의 비유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회개와 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하기 보다는 오히려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완악한 모습을 또 다시 드러내고 말았다. 즉 그들의 마음은 너무도 강퍅하여 도저히 회개하거나 뉘우칠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21: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 이 구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심지(心志)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부분이다. 즉 예수님을 더 이상 방치하다가는 자신들의 존립에 위기감을 느꼈던 그들로서는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고 싶지만, 문제는 자신들의 통치 기반인 민심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이후 그들은 예수를 죽일 수 있는 죄목과 명분을 찾기 위해 예수를 줄기차게 따라 다니다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비로소 예수를 체포한다(마 26: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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