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처 공 포 (大處恐怖)*
허 종 구
1
지우의 고향 구실은 유년 시절 그가 알던 세상의 거의 전부이었다. 마을은 북쪽의 제석산과 동쪽의 수만산, 서쪽의 안산 아래의 올밧골, 올방골, 건진골, 월당골, 진방골, 밋골, 문안골, 골안골, 새안골의 아홉 개 골짜기로 둘러싸여, 동서로는 1킬로미터, 남북으로는 1.5킬로미터 정도 길이의 좁은 분지 안에 있고, 오리 주둥이처럼 열린 남쪽으로 2킬로미터쯤 지나면 낙동강이 용틀임하듯 굽이치고 있었다. 이 곳에서 삼십여 호 일가 친척들이 수 백년간 대대로 가랑이 논밭을 일구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어릴 적 그의 기억의 속에 있는 언덕에서는 그는 할아버지가 진 지게에 연결된 새끼 줄을 잡고 ‘이랴 이랴’ 하면서 논밭이나 산을 쫓아 다녔다. 이웃마을의 결혼식·초상집에 마실갈 때도 할아버지는 그를 마스코트처럼 끼고 다녔다. ‘이놈이 나중에 뭔가 할 거여’ 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는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그의 부모는 아버지의 직장 일로 부산에서 살았고, 할아버지는 막내아들의 큰아들인 그를 손주들 가운데 특별히 애지중지하여 고향 마을에 두었다. 그는 조부모와 사촌들 틈에서 일찌기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법을 배웠다.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친척의 사업자금으로 빌려준 목돈이 친척의 부도로 회수할 수 없게 되어, 아버지는 부산에서 사업을 개시하려던 계획을 접고 그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조금 전 귀향하면서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어릴 적 마을에는 십여 년 전 한국전쟁 당시 마을 사람들이 겪었던 일들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 앞 낙동강을 교두보로 하여 남북이 대치하면서 인민군이 구실까지 점령한 당시 마을 주민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마을 입구 깊숙한 큰 바위 동굴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간난애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그들에게 붙잡혀 마을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마을 내 가장 큰 가옥인 그의 할아버지의 집에 인민군부대 지휘소를 설치하고, 우선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손바닥을 펴 보이게 하여 농사일 많이 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탄약 운반 등 보급업무, 펜대를 굴린 것으로 보이는 그의 아버지는 막사 행정일을 거들게 하였다. 후일 이 일로 그의 형제들은 다니던 공직에서 한동안 ‘보안 특이대상’으로 관리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마을 입구 낙동강 변 모래사장에는 미군 정찰기가 추락해 상당 기간 방치되어 있어 인근 마을 사람들의 진기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북한군이 후퇴해 철수하면서 전시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죄목에 반역자로 지목된 주민들이 제대로 된 재판절차도 없이 이웃 개경포 바위절벽에서 즉결처분으로 총살당하는 끔찍한 일도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어 내려왔다. 이에 따라 그는 어릴 적 하교하면서 동구밖 언덕으로 들어서서 동네가 적막하면 ‘또 전쟁이 났나’ 하고 깜짝 놀라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학교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그의 사촌형·누나들이 다니는 학교 운동회에 할머니를 따라 가보니 학교 운동장 주변에 먹을 것, 가지고 놀 것 등을 파는 가게가 있고 면 주민 잔치 처럼 흥청대었다. 학교에는 늘 그런 가게가 있는 줄 알고 학교에 사촌형 따라 가서 형의 책상 아래 숨어서 있다가 교사에게 발각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십오 리 정도 떨어진 강 건너의 중학교 학생이던 사촌형을 따라 한참을 따라 가다가 잡혀서 되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추운 겨울날 그의 할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부산의 아들집에 들리러 현풍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남지의 정류장에 정차하였다. 그가 손시리다고 하니, 인근 민가의 쇠죽 끓이는 아궁이로 그를 데리고 가서 손을 데워줄 때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따사롭게 미소짓던 모습이 파로나마 속에 한동안 늘 자리잡고 있었다.
2
지우가 초등학교 입학식 다음 첫 등교일 구실의 신입생 세명과 함께 학교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 동네 애들이 길을 가로막고 그들 주머니를 뒤졌다.
“가지고 있는 것 다 내어놓아!”
그들은 큰 동네 애들의 기세에 눌려 눈깔사탕·땅콩·딱지 등 소지품을 모두 뺏겼다. 이런 일을 처음 당했는데, 이것이 그가 점차 큰 마을이나 도시의 각급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성장기에 겪던 첫 ‘대처공포(大處恐怖)’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걔들은 한 살 아래로 다음 해 입학한 애들이었다.
초등학교의 그들 학년은 한 반이 전부로 60여 명이었다. 그중에는 늦게 입학하여 그보다 세 살 더많은 동급생도 있고 하여 한동안 구실 밖의 한 반 친구들과 사귀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차츰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공부가 쉽고 재미있어져 학급의 리더 역할도 맡으면서 적응해 나갔다.
그런데 그들 반 여학생 중에 늘 1등을 하는, 면 소재지 마을의 방앗간 집 딸 아린이가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말 못할 아픔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첫 결혼에 실패한 여성을 작은 소실로 맞아 구실 마을 입구의 강변 인근 마을에 두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수시로 그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리면서 쫓아내려고 애를 쓰는 중에, 그 작은 어머니가 그의 옆집으로 이사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차마 전통적 양반 일가 마을에서는 행패를 부리기가 곤란했던지 다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어머니는 마을에서 방앗간을 하며 지냈는데, 양반 마을 덕분에 그런 일을 더 이상 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면서 늘 마을 사람들에게 고마워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아린이가 작은 어머니 집에 들린 어느 날 그의 집에 와서 그와 같이 놀고 간 이래로 그녀의 모습은 한동안 그의 마음속에 남몰래 터 잡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동급생 하윤이가 뽀얀 얼굴, 큰 눈에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부르던 노래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 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저어 가요'
는 한동안 그를 얼마나 설레게 했던가.
그의 할머니는 네 자녀에게서 난 열여덟 손주를 강아지 새끼 보듬듯 애지중지하며 돌보았다. 어느 날 그의 동생이 동네 이웃집 큰애에게 맞아 코피 흘리면서 찾아오니, 그의 할머니가
"누가 내 손주를 이렇게 했나?"
하면서 지팡이 짚고 그의 동생을 데리고 내려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 할매 손주 상에 그렇게 받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다"
부산에서 실망해 낙향한 그의 아버지는 늘 소소한 먹고살기 문제에는 손 놓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어머니 뜻에 따라 낙동강 주변 유목정의 주점에 있던 아버지를 모셔 오러 그가 가도, 아들을 곁에 두고 놀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지우의 중학교 입학시험장에 담임 선생과 함께 응원차 와있다가, 끝나자마자 세 명이서 시내 극장의 쇼를 보며 즐거워하던, 당시 그가 보기에도 철없는 한량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그의 고향 군내의 시골에서 경성의 여학교에 다니다 방학 때 잠간 고향집에 내려왔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집안 어른들이 진주한 미군들이 여학생들을 겁탈한다는 풍문을 듣고 상경하지 못하게 해서 그게 학교 공부의 마지막이 되었다. 그녀는 당시 두메산골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일종의 ‘신지식인’으로서 대리만족 차원인지 부엌일 하면서도 자식의 구구단 외우기나 웅변연습을 점검하는 등 자식 교육에는 열성이 대단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그를 동구밖 큰 바위 산신에게 양자로 보냈다고 하여, 어린 마음에 한동안 그가 집을 나가 거기에서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걱정하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촌 형들은 대구의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주말이나 방학에 시골집에 내려오면 그의 학업 성적표를 보고 격려하면서 공부를 가르쳐주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들려줘서 후일 그가 그 학교로 진학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마을에서 일어난 특별한 세 가지 일은 동네 사람들은 물론 어린 그에게도 큰 충격으로 오래 기억에 남았고, 당사자와 자식에게는 운명을 가르는 일이 되었다.
첫째 일은, 동네 고지기의 아들이 젊은 과부와 눈 맞아 사랑을 나누다가 동네에 소문이 나서 청년들이 밤중에 그 과부 집을 덮치려는 순간, 그녀를 업고 동네 앞산 숲속으로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을 어린 그가 현장에서 목격한 것이다. 그 청년의 신분이 낮다고 해도 과부와 사랑을 나누는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늘 떠나지 않았다.
둘째 일은, 그의 동급생 도윤(6.25 전사자의 유복자)의 과부 엄마에 관한 것이다. 그들 마을 동급생 네 명이 저녁에 그의 집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도윤의 사촌 누나가 도윤에게 '집에 일이 있으니 바로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데리고 갔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다음 날 그는 동네 청년들이 도윤의 옆집 유부남 아저씨가 인척인 도윤엄마와 정을 통했다는 소문이 면내에 퍼져 동네 창피가 되었다면서 그 아저씨에게 ‘덕석말이’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전날 밤 도윤 모자가 바로 동네 뒷산을 넘어 대구로 미리 피신하였다는 애기를 들었다. 그 후 그는 중학교에 진학해 대구의 하숙집 근처를 가다가 우연히 핼쑥한 모습의 도윤 모자를 한번 보았을 뿐 다시는 마을에 돌아오지 못하고 지금껏 도윤을 보지 못하였다.
셋째 일은, 그의 동네의 동급생인 은우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은우의 아버지가 유목정 주막에서 노름하다가 소 판 돈을 다 잃었다고 누가 은우의 엄마에게 전하니, 그녀가 밤중에 주막에 들이닥쳐 노름판을 뒤집어 놓았다. 은우의 아버지가 창피해서 못살겠다고 낙동강변의 개구리 덤 절벽을 향해 가니, 그녀가 그 절벽까지 따라가며 말했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뛰어내려!”
은우의 아버지가 홧김에 투신하였고, 다음날 그 아버지 시신을 얼음 강물에서 찾아 장사지냈다. 그 후 은우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자동차 정비업소에 사환으로 들어가 와신상담하면서 일을 배워, 그 회사를 인수해 큰 회사로 일구었다. 고향에서는 부친의 불운을 딛고 성공한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3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 여름방학에 고향 집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일 등으로 그해 담임이 세 명이나 바뀌긴 했지만, 지우는 운좋게 사촌형들이 다닌 대구의 중학교에 그들 학교로서는 5년만에 입학하였다. 그는 입학 직후 동급생들을 보니 대부분이 공부 잘하고 잘 나가는 집안 출신으로 보여 스스로 위축되었다.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는 어느날 등굣길에 우산이 없어 고향에서 하듯이 헌 윗옷을 교복 위에 걸치고 교실 안에 들어서니, 애들이 웃고 박수치며 놀려대었다.
그리고 그의 학교에는 정규 교과목으로 유도가 있었는데, 첫 학기 중간고사 성적을 반의 개인별 번호순 2인 1조의 대련결과로 공격·방어 기술을 평가하여 채점한다고 공지하였다. 22번인 그는 반 제일의 싸움꾼 주먹 대장인 21번인 석대와 대련을 하게 되었는데,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고 보아 기선을 제압해 선제공격으로 득점한다고 내심 작전을 세웠다. 당일 심판의 ‘차려’ ‘경례’ 구령과 동시에 그는 온 힘을 모아 그를 우측 엉덩이 위로 들어올려서 단숨에 바닥위로 내려쳤고, 바로 ‘한판 승!’의 심판이 내려졌다. ‘차려’ ‘경례’의 구령을 들으며 고개 들어 보니 의외의 결과에 난감해하는 석대의 표정이 보였고, 순간 불안의 그림자가 뇌리에 어른거렸다. 그날 방과 후 석대의 ‘학교 밖 어디에 가서 애기 좀 하자’는 제의에 따라 같이 가는데, 석대의 단짝 친구 상관이가 따라 붙었다.
그들은 십여분 지나 공사장 공터에 도착했고,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오늘 대련 시작도 하기 전에 네가 공격해서 내가 졌는데, 잘못했지?”
“심판이 한판승이라고 판정한 것은 정상 공격으로 인정한 것이잖아!“
이때 상관이가 끼어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네가 대련 시작 구령 전에 공격했어!“
"너희 둘 한 패이구나!"
그의 항변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상관의 어퍼컷이 그의 턱을 강타했고, 그는 순간적으로 이 자리에서 싸움꾼 두 명을 상대하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들어 바닥에 쓰러졌다가 일어서자마자 냅다 집으로 뛰어갔다.
이것이 그가 맞은 두 번째 ‘대처공포(大處恐怖)’의 시작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그는 현지 대도시 출신 급우들이 합종연횡으로, 그동안 초등학교에서 리더로서 행세해오던 그를 포함한 시골 출신들에게 ‘조리돌림’ 하듯 따돌리는 낯선 모습에 절망하게 되었다.
지우는 입학 후 달 반 쯤에 폐결핵 판정을 받아 수업 중 인근 종합병원에 외래진료를 받으러 수시로 가게 되고, 결국 의사의 권유로 한 달간 휴학을 받고자 담임에게 애기하니, 그는 몹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헀다.
"우리 반이 전교 1등 반 되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글렀다"
그 말이 어린 마음에 엄청난 비수로 다가왔고, 지우는 그가 한 말을 나중에 후회하게 하리라고 다짐했다. 한달 간 집에서 열심히 자습을 한 후 복학하여 바로 치른 첫 중간고사에서 반에서 2등을 한 후로 담임은 다시는 수업 중 병원외출에 대해 딴지를 걸지 않았다.
이렇게 학과 선두레일이 올라타니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2학년 때 지우의 외사촌 형이 막 대학을 나와 모교에 부임해 그들 학년의 세계사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의 형이 학기 말 방학 숙제로 ’삼국지를 읽고 등장인물별 특성을 분석, 제출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원사의 '소년 삼국지' 끝의 '주요 인물 요약'을 베껴내어 점수를 받았으나, 그는 형이 돌봐줄 것이라는 약간의 믿음과 함께 베껴내는게 별 의미가 없다고 보아 이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기말 학과시험 성적 만점 90점에 과제 0점을 받아 장학생에서 아슬아슬하게 탈락하였다.
지우는 3학년이 되어서도 계속 성적이 최상위권을 유지하여 동일계 고교 진학을 권유하는 담임에게 끝까지 타 명문 고교 원서를 들이밀어 원서 마감시각 임박해 교장 직인을 받아 원서를 접수했다. 그가 고교입시 첫 국어시험을 치르는 날 그의 어머니와 이모가 응원차 교내에 와 있었다. 그는 교내 신문사 게시판의 모범답안으로 채점해 어머니에게 만점이라고 자랑하고 있는데, 옆의 여고생이 ’2교시 시작종 울렸는데 빨리 들어가라‘고 하여 수험장에 뒤늦게 입장하였다.
감독 선생이 말했다.
“이미 시험지 배포되어 시험 치르고 있으니 나가!”
그는 수 분간 꿇어앉아 울며 사정하고 난 후에야 겨우 허락받아 2교시 수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너무 당황하여 실력대로 제대로 문제를 풀지 못해 결국 떨어질 수 없는 시험에서 그의 인생 최초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 후 그가 대구의 이모 집에 칩거하고 있을 즈음 그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2차 고교입시를 보아라‘고 했지만, 그는 ’검정고시 공부해서 바로 서울의 명문대 입학하겠다‘고 했다. 그러면 ’일단 구실로 내려가자‘고 하여 같이 고향행 버스를 탔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마을 입구 종점에 내리자마자 ’2차 원서 내겠다‘고 하면서 다시 대구로 올라와 2차 고교에 원서를 내어 합격하였다.
4
지우가 그 고교에 입학하고 보니 그의 중학교에서 중간 정도 실력의 애들도 동급생으로 있어 공부할 신명이 나지 않았다. 학과공부는 거의 손을 놓고,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시집 기타 다양한 분야의 책을 한 주에 두세 권 정도씩 계속 빌려 읽어나갔다. 그러다 그도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습작 수필·소설을 쓰기 시작하였고, 문예반에 들어가 그가 쓴 산문을 읽어본 지도 교사에게서 칭찬을 받으면서 이에 더욱 몰입하였다.
그해 한글날 기념 교내 백일장이 열렸는데, 전교생이 교실에서 주어진 주제인 ‘새벽’ 에 대하여 시나 산문을 2시간 이내 지어내는 대회이었다. 그런데 그는 마침 얼마 전 새벽 4시경 이웃 교회당 종소리에 잠이 깨서 중심가인 대구역까지 왕복 2시간의 도회 길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는 아침 해가 어둠을 서서히 몰아내는 장면과 함께, 가족을 위해 기도하러 교회 나가는 사람, 새벽 일하는 사람, 술 취해 귀가해 부부 싸움질하는 사람, 역에서 노숙하는 사람 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사회를 다시금 되돌아본 기억이 났다. 일사천리로 글을 써 제출했고, 도내 백일장을 휩쓸던 2·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산문부 1등상을 받았다.
이어서 교내 웅변대회가 있었다. 지우도 나가 볼까 생각하고 있을 때 반 친구 시후가 그에게 부탁했다.
“네가 글 잘 쓰니, 내 웅변원고를 좀 써줄래?”
그는 초등학교 때 여러 번 웅변대회 나간 경험을 살려 시후의 웅변원고를 대신 써주고 코치도 해주었다. 그 대회에서 시후도 역시 우승을 했다.
이러다가 그는 대학입학이 힘들겠다 싶어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영어·수학 과목을 중심으로 집중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3학년 첫 시험에 반 10등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1등까지 차지해 서울의 원하는 대학·학과에 합격함으로써 고교입시에서의 실수와 함께 고교 2년간의 문학 ‘몰빵 외도’를 극복하고 단숨에 그의 숨겨진 저력을 회복한 듯한 자존감에 만족했다.
5
지우가 입학한 대학 학과에는 훗날 큰일을 해보겠다는 야심가 내지 이상주의자 학생들이 재수를 해서라도 입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현역 출신은 십여 명에 불과하고 대다수가 재수 이상, 3수·4수생 까지도 있어, 현역 출신들은 동급생 중에서 동생 취급을 받았다. 다수의 서울 출신들은 그의 눈에 명문고 출신에 ‘금수저’ 자제로 보였고, 입학생 중 D재수학원 출신이 1/3이나 차지했다.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자신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처지로 느껴졌다. 그는 다행히 입학금 및 4년간의 등록금과 약간의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외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지만, 각종 친교 모임이나 과외활동에 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대학입시 스트레스를 단숨에 풀기라도 하듯 첫 학기에 여자대학 각 학과생과의 단체미팅 등 학과행사가 연달아 있어도 그는 대부분 끼지 못하였다. 어느 날 그 대학의 모교 출신 좌충 선배가 주말에 자기 여친이 다니는 여자대학생들과 그들 동문들과의 교외 미팅을 한다고 하면서 참가하라고 제의했지만, 그는 시간이 안된다고 하며 거절했다. 그다음 주 어느 날 학생들이 모여있는 교정에서 그와 마주친 그 선배가 ‘너 때문에 짝없는 여학생이 있게 되어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 걸 왜 모르느냐?’고 하면서 대뜸 라이트 훅을 내질렀다. 맞 대응을 하려다가 참으면서 느낀 모욕감과 분노는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팔매의 여운처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지우의 대학 시절에는 학원 내 군사교육(교련) 부활·확대와 ‘시월유신’(국회해산 및 정치활동 중지 등 비상조치, 유신헌법으로의 개정, 대통령 간선제) 반대 학원데모가 계속 이어졌다. 이에 따라 휴교·휴강이 반복되고 시험 대신 레포트 제출로 학업성적을 평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지우네 학과생들은 학과의 특성상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고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행태에 반감을 갖는 경향이 있어, 교내 학생 데모를 주도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보과 형사들은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교련 반대 데모의 여파로 2학년 가을 데모 주동 학생에 대해 징집연기를 취소하면서 군입대 조치가 내려졌다. 그의 동급생 중 수호 등 네 명이 용산역에서 전방 훈련소행 열차를 타게 되었다. 지우의 학과와 서클 친구들은 그들 입대자를 줄지어 목마 태우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운동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흡사 일제 강점기 대동아전쟁에 끌려가는 학우를 보내듯 눈물의 환송행사를 치렀다. 지우는 한동안 꿈속에서 절친 수호가 전방 훈련소 연병장의 고된 훈련 중에 진흙탕에서 딩굴면서 ‘원산폭격’ 기합받고, 교관이 쏘는 총알이 이마 위를 스치는 가운데 ‘밑으로 철조망 통과’하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또 다른 데모 주동 학우 충열이는 징집대상자인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피해 빌딩 옥상에 올라갔다가 추락해 꽃다운 20대 초반으로 생을 마감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그는 큰 꿈을 꾸며 시작한 대학생 생활이 주변 환경과 개인 사정으로 위축되면서 생애 세번째 ‘대처공포(大處恐怖)’를 맞아 그만의 성을 쌓아가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필기시험을 보면서 지우는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전공과목 시험은 대부분 논술식의 2~3 문제 출제이었는데, 단답식에 익숙한 대부분의 동급생들은 나름대로 준비하고서도 제대로 접근을 못해 좋은 학점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하게 시험준비를 하지 않고서도 소설 읽듯이 교재를 일별하고 나면 쉽게 논술식 문제에 대한 답안을 정리·제출하여 높은 학점을 챙길 수 있었다. 또한 레포트 제출로 시험을 대체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는 그가 고교 1·2학년 시절에 몰입한 다양한 독서와 글쓰기 습작이 지금으로 보면 논술공부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던 중에 학과성적 등이 감안되어 그는 학과 고시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통학시간의 부담을 줄이면서 학교와 고시공부를 병행하기에 좋았고, 뜻이 통하는 선후배 학우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는 행운도 얻었다. 게다가 거기에서 만난 지훈 선배의 소개로 그의 여동생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답게 감성이 풍부하고 섬세하며 여성스러웠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큰 그에게는 사랑스런 여동생 같고 조심스럽게 돌봐줘야 할 갓난 병아리 같기도 하였다. 그들은 만나면 수많은 애기를 나누면서 가슴 설레고, 헤어지면 금세 또 보고 싶은 사이가 되었다 이제 그의 대학생활은 앞을 가리던 안개가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드러나 신세계가 열리는 듯 하였다.
6
이제 환갑의 나이를 넘어선 지우는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졸업 50주년 기념으로 동기 모임을 모교에서 개최한다고 하여 고향에 내려왔다. 옛 학교와 동창들을 보니 그동안 지나온 시절의 곳곳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동창들은 대처( 大處)에서 오랜만에 귀향한 은우와 지우에게 궁금해서 물었다.
"빈손으로 객지에 나가 자리 잡는다고 다들 얼마나 고생 많았노? 언제부터 거기가 고향처럼 느껴졌나? 이제는 자식, 손주까지 대도시 사람 되었으니 거기가 고향이제?"
은우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 일도 있고 초등학교 마치고 바로 막일부터 해서인지, 주변의 텃세 땜에도 더 기죽고 힘들었지. 살만한 지금 조금은 달라졌지만, 돈 더 벌면 고향에 기부도 더 많이 하고 귀향해 그럴듯한 집 짓고 고향 사람들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
이어서 지우가 말했다.
'나는 서울 등 대처로 지역환경이 바뀌면,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이나 사회에게서 ‘대처공포(大處恐怖)’를 느껴 ‘고독한 아웃사이더’로서 위축감·외로움·소외감을 늘 끼고 살았지. 어린 시절에는 그게 공포나 트라우마로까지 다가왔어. 최근에 손주가 태어나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왜 사람은 누구나 울면서 세상에 나올까 하는 의문이 이제야 풀렸어. 태중의 양수 속에 떠 있다가 낯선 세상에 나오니 ‘대처공포(大處恐怖)’가 얼마나 심하겠어. 우는 게 당연하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지. 지나고 보니 그동안 나의 ‘대처공포(大處恐怖)’ 도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행복한 성장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고향이 따로 있는게 아니더구먼".
옛 동창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서 지우의 기운이 더욱 '업' 되고 있었다.
* 대처공포(大處恐怖):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공포를 느끼는 증상을 의학적 총칭으로는 ‘사회공포증(Social Phobia)’ 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 주인공 지우가 새로이 대도시 등으로 주변 지역환경(사회환경)이 크게 바뀔 때 마다 낯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외톨이 취급을 받으면서 느끼는 스트레스도 광의로는 그 초기 증세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임의로 붙인 것임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허선생님,
자전소설을 쓰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길게 끌고 가시는 것이 대단하십니다. 잘 읽었고, 완성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민샘,
어설픈 글 다 읽으시고 격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합평의견을 반영하여 6절을 대화체로 하면서 주제의식이 더 드러나도록 보완하고,
기타 일부 오.탈자를 보완하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ㅎ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권 선생님, 지난 학기 저의 습작인데도 일별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