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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제자가 가져야 할 덕목들과 열 문둥병자의 치유 및 재림과 종말의 교훈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이전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특히 12:1-19:27까지는 예수님의 행동(action)보다는 죄로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그리고 유일한 인자(人子)로서 불완전한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주시는 예수의 교훈(instruction)에 관한 기사가 더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 1-10절은 주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여러 덕목들의 몇 가지 실례를 제시한다. 중반부 11-19절은 유명한 소위 열 문둥병자 치유 사건의 전후 기사를 보도한다. 후반부 20-37절은 바리새인이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그 도래의 시기를 물은 것에 즈음하여 그 나라가 이미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킬 것으로 약속된 그리스도(Christ)이신 당신의 강림으로 도래하여 영적으로 내재하고 있음과 아울러 그 나라가 영육 간에 완전하게 도래할 시점인 예수의 재림과 종말의 징조와 그때 있을 성도와 죄인의 구별에 대하여 예언하신 내용의 보도이다.
1-10절의 제자의 덕목(德目)은 우리의 구주(Saviour)이신 인자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새 인간이 된 성도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가져야 될 박애(1-2절)와 용서(3-4절)의 덕목들 그리고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가져야 될 믿음의 확신(5-6절)과 절대적 헌신(7-10절)의 덕목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성도가 주의 제자(disciple)로서 가져야 될 덕목의 전부가 아니라 그 몇몇 실례로서 제시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의 근본,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성도는 구주 예수 안에서 과거의 죄를 씻음 받고 천국의 시민권을 얻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사는 존재이다.
따라서 자연히 전혀 새로운 마음과 행동을 갖게 마련이다. 곧 주님 안에서 자아의 실체를 발견하고 회개하여 거듭난 자로서 여호와 제일주의, 계시 의존주의의 원리에 따라 이웃과 하나님을 향하여 전혀 새로운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으로 우리가 어떤 신앙의 덕목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진정성과 성숙도를 보여 주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시간 겸허히 자성(自省)하며 천국을 지향하는 구속사의 축복된 대열에 서고자 하는 자로서 아니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이미 서 있는 자로서 나는 과연 어떤 덕목들을 소유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11-19절의 열 문둥병자 치유 사건, 곧 이제 예수께서 결정적으로 당신의 구속 사역을 완수 하시러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전도 여행을 시작한 시점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영원한 인자(人子)이신 예수께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의 대조되는 양상과 궁극적으로 참 구원을 얻은 자가 가져야할 바른 자세에 대하여 심오한 구속사적 교훈을 전해준다.
열 문둥병자 모두가 일단 함께 육체적인 병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아홉 명의 유대 출신 문둥병자는 그저 자기 흥에 겨워서 떠나갔고 오직 이방인처럼 멸시받고 천대받던 사마리아 출신의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해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육체의 치유뿐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선포까지 듣게 되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를 먼저 받은 유대인이 육적 선민의 지위에 연연하여 그 구약(舊約)의 성취로 오사 새로이 신약(新約)
의 복음을 주신 주님께 참으로 감사하며 순종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이방인은 주께 감사하며 경배하여 결국 최종적인 구원을 먼저 얻을 것을 예표한다. 한편 이는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단 모두 함께 복음의 은혜에 접할 것이지만 많은 자들이 육적 차원에서만 이를 받아들여 복음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최종 구원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여 진정 주께 감사치 않으나 극히 일부의 택한 자만이 주의 복음의 참 가치를 깨닫고 주께 감사하며 최종적인 영원한 천국 구원까지 얻을
것을 보여 준다.
이제 이런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성경과 주의 종들의 사역을 통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널리 선포되는 주의 복음을 그저 육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진정 그 복음을 주시는 주님의 그것이 영원한 구원과 관계된 것임을 깨닫고 참으로 주께 감사하며 최종적인 천국 구원을 획득하고 있는가!
후반부 20-37절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바리새인(Pharisees)의 질문과 그에 대한 주(the Lord)의 응답은 다음처럼 세분될 수 있다. 먼저 20절 상반절에서 한 바리새인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시기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에 주께서는 20절 하반절에서 21절에 걸쳐서 먼저 하나님나라의 실체도 제대로 모른 채 그 도래의 시기만 묻는 바리새인에게 그 실체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셨다. 그리고 22-37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영육 간에 온전히 실현되는 때인 재림과
종말에 있을 놀라운 양상들과 성도와 죄인의 구별에 대하여 예언적 계시를 주신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런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리새인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과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의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당시 예수는 오고 오는 세대의 세계 만민의 메시야(Messiah)로서 이제 십자가 구속사역을 통하여 당신과 택한 자들을 구원하여 천국을 도래시키시고자 마침내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여행을 하고 계실 때였다.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곡해하여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는 자신들 유대인만을 위한 분으로서 이 지상에 자신들이 지배자 민족되는 나라를 만들어 줄 세속적, 정치적 해방자로 곡해하고 있었다. 이에 이 바리새인은 당신 자신을 메시야로 선포하시는 주님에게 그러면 당신이 세울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야의 나라가 언제나 도래할 것이냐고 주를 믿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실체도 모르면서 질문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전날 아담의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구속사역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회복할 우리 주 예수의 강림으로 영적으로는 이미 이 지상에 임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의 축복이 영육 간에 온전히 실현되는 것은 오직 이 세상의 종말 뒤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에서인 것이다. 이에 이미 영적으로는 분명 도래하였으나 아직 그 온전한 실현은 유보된 하나님의 나라의 상태를 일컬어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온전히(already not yet) 임한 것은 아니라고 표현한다.
이에 예수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모르고 그 도래의 시기를 묻는 자에게 그것이 이미 도래하여 세상에 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후에 다시금 그것이 온전히 임하는 날은, 유대인의 착각과 달리 이 세상에 어느 한 완전한 나라가 세워지는 날이 아니라 현 우주와 세상이 폐지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종말(終木)의 날이 될 것이며 그 때 선과 악의 구별도 있을 것임을 경고하신 것이었다. 현 역사의 종말과 그 후에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오직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초월성과 역동성의 근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왜곡했던 본문의 바리새인처럼 우리가 영원히 거할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현 역사와 인간의 미래에 대하여 인본주의적 맹신에서 우러나온 낙관으로 일관하고 있는가? 심지어 기독교인 중에서도 믿음의 축복을 이 지상에 속한 것으로 국한시키는 우(愚)를 너무도 자주 범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어리석음은 주님의 재림과 역사의 종말 이후 닥칠 선과 악의 구분을 너무도 간과하면서 안이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우리는 절대자 하나님의 창조 당시 즉, 태초의 사람의 범죄로 오염된 현 세상의 역사, 재림과 종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연결되는 구속사의 본질을 통찰하여야겠다. 그리하여 먼저 이 땅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참 관계를 왜곡시키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분명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임을 기억하여 방심하거나 또 종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 역사의 출발점임도 기억하여 두려워하지도 말고 다만 그날에 선과 악의 영원한 분리가 있을 것임을 명심하여 주어진 현실을 새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선한 순례의 기회로 삼아 성실하면서도 소망 중에 전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외울 말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박애와 용서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확신 있는 믿음
5 ○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무조건적인 헌신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열 문둥병자의 치유
11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시어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17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 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20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 재림의 날
22 ○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침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
재림 날에 있을 환난과 심판
26 노아의 매에 늰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 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음)
37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17:22-37 다가오는 종말과 성도의 현실 생활
본 장 연구 자료 참조
원어 연구 -17:1 실족케 하는 것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로는 '스칸달론'의 복수형되는 '스칸달라'가 쓰였다. '스칸달론'의 본래의 의미는 '덫'(trap)이나 '올가미', '길에 놓여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 등을 뜻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올무' (계 2:14)와 '넘어지게 하는것' (마 13:41) 및 '부딪히는 돌'(롬 9:33), '거리끼는 것'(고전 1:21; 요일 2:10) 등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은유적으로는 '아무개를 죄에 빠지게 하는 것', '다른 사람을 범죄하도록 유도하는 것'(롬 14:13), 사람으로 하여금 참 진리로부터 떠나 거짓 가르침을 좇게 하는 것'(롬 16:17)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고전 1:23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 했다. 이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결코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이 그들에게는 그를 메시야로 믿는 데 있어 장애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스칸달라'의 의미는 단순한 이웃이 아니라 신자 공동체에 속하는 구성원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떠나 '배교 행위를 하게 하거나 죄에 빠뜨리게 하는 모든 종류의 유혹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과 유사한 의미로 롬 14:13에서는 '형제를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스칸달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킨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잘못된 교훈이나 거짓 교리, 또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본이 되지 않는 행동 등을 다 포함한다고 하겠다.
신학 용어-17:22-30 주의 날(Day of the Lord)
본문은 예수의 재림의 날에 일어날 양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인자의날' (22,24,30절), 곧 '주의 날'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종말의 날을 나타내는 구약 용어인 '여호와의 날'에 대응하는 신약용어이다. 따라서 주의 날과 여호와의 날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관점만 다를 뿐 둘 다 세상 종말의 날을 지칭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의 구속 사역에 관련된 비밀을 단 번에 다 계시하지 않으시고 각 시대에 따라 점차적으로 계시하셨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여 '계시의 점진성' (Progressiveness of Revelation)이라고 한다. 이러한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구약 시대에는 그 뜻이 명료하지 못했던 성경의 용어가 신약 시대에 와서 명료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여호와의 날'과 주의 날'이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세부 설명은 암 5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고, 여기서는 구약의 '여호와의 날' 개념이 어떻게 신약의 '주의 날' 개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는가를 살펴보자. 한편 여기서 다루는 '주의 날'을 구약의 안식일에 대칭되는 신약의 '주일'(Lord's Day)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1. 용어의 이해
'주의 날'(Day of the Lord)이란 기본적인 개념에 있어서는 구약의 '여호와의 날'과 같다. 그러나 좀 더 그 개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호와의 날'이란 개념 속에는 그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 중 누구와 관련이 있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주의 날'은 '주'(헬. 퀴리오스)란 칭호가 성부 하나님을 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제 2위 성자 그리스도를 가리킴으로 그 주체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는 구약에서는 그 날에 일어날 모든 일들이 제 2위 성자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었음이 아직 계시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의 날'(벧후 3:10)이란 표현 이외에 '그리스도의 날'(빌 1:6,10), '주 예수의 날'(고후 1:14), '인자의 날'(눅 17:22), 또는 단순히 '그 날'(고전 3:13) 등의 다양한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2. '주의 날'의 시기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정확히 어느 시기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선서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날로만 이야기 하고 있다(사 2:12,17,19; 슥 1:14-16). 그리하여 '전쟁의 날'이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때와 같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과 관련하여서도 '여호와의 날'이란 표현이 시용되었다(사 2:19; 겔 7: 7; 34:12).
그러나 신약에서 '주의 날'은 분명 예수의 재림과 그에 연속된 전우주적 심판과 종말의 날이라고 밝히고 있다(22,30절). 즉 그 날은 역사의 어느 한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역사가 종결되는 순간이다.
물론 구약에서 언급된 '여호와의 날'도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기는 하나 신약의 '주의 날'과 같이 세상의 종말을 분명하게 언급한 것은 아니며 다만 예표적인 성격을 가진다.
3. '주의 날'의 양상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주로 전쟁, 천재지변 등의 재앙이 임하는 날로 묘사된다. 물론 여호와의 날을 크고 두려운 날(욜 2:31), 우주적인 심판이 가해지는 날(슥 1:14-14; 습 1:14-18), 그리고 새 하들과 새 땅이 창조되는 날(사 65:17-19)로서 소개되기도 하나 신약에 나타난 바처럼 분명치는 않다.
신약에서는 이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되 번개가 번뜩하여 하늘 이편에서 저편에 비췸 같을 것이며(눅 17:24)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논을 것이며(벧후 3:10-12)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새로 조성된 온 세상을 통치할 것(계 11:15; 19:11-21) 등 그 날에 일어날 양상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재림 주이신 그리스도의 심판도 그 당시 생존한 일부 계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 곧 역사상 존재하였던 모든 인간들에 대하여 시행될 것을 말하고 있다. 곧 주의 날에는 전 우주 역사의 종말과 새 세상이 개시되는 그야말로 현 역사의 대단원이 종결될 것 이상의 사실들에서 우리는 '주의 날' 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의 개념보다 훨씬 확장되고 또 구체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어떤 용어들을 이해할 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보면 그 뜻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신․구약에서 각각 다르게 묘사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도 잘 조화시킬 수가 있다.
지도-17:11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보감 - 17:11-19열 문둥병자 치유 사건의 영적 교훈
1. 열 문둥병자가 멀리 떨어져 서서 예수를 만남(12절)
인간은 원래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임(롬 3:23,24)
2. 열 문둥병자가 한 소리로 예수님께 긍휼히 여김을 간청함(13절)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서 말미암는 것임(롬 9:16)
3. 예수께 열 문둥병자 모두 치유함을 받음(14절)
인간은 모두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음(행 15:11)
4. 치유 받은 한 문둥병자가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돌림(15절)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함(고후 4:15)
5. 사마리아인인 한 문둥병자만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사례함(16절)
자신의 죄인된 처지를 진정 깨닫는 자가 은혜에 더 감사케 됨(눅 7:41-43)
6. 한 문둥병자만이 사죄와 구원의 은혜까지 받음(19절)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받음(요 1:16)
주요주제-17:20,21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주요주제-17:24,26,30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17:1-10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본장은 예수님께서 베레아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유대지방에서 사역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과 수평적 관계인 이웃과의 삶에서,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인 하나님과의 삶에서 가져야 할 덕목들과 교훈들을 가르쳐 주는 장면을 소개한다.
이 교훈은 모두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1,2절). 예수께서는 그가 떠난 후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하셨다(마 24:11). 누가는 그 예언의 성취를 초대 교회 상황에서 경험했다. 그래서 누가는 본문의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맡은 종으로서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와 마가도 기록하고 있는 것(마 18:6,7; 막 9:42)으로 당시 외식적인 행위로 사람들을 미혹하던 바리새인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소외시켜 이들이 믿음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작은 자 하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눅 15:7,10).
둘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에 경계하고 회개할 때에 용서하라는 교훈이다(3절), 마태도 이 교훈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 18:15,22), 이렇게 누가가 기록한 교훈이 마태복음에 분산되어 기록된 것은 예수님께서 같은 교훈을 여러 번 다른 상황에서 말씀하셨거나 복음서의 저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예수님의 교훈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들도 범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고 그들이 죄를 범할 때에 경계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회개하였을 때에는 무한정으로 용서하는 사랑을 베풀라고 하신다(4절). 사실 죄를 지적하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하고 없었던 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도 그런 사랑을 베푸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사 1:18; 마 7:19; 요일 4:19-21) ).
셋째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5,6절; 마 17:20).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교훈들이 너무 높은 차원이기에 예수님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믿음의 양을 요구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심으로써 믿음의 질적인 문제를 말씀하신다. 즉, 겨자씨는 비록 작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는 지극히 작은 믿음으로도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믿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메시야에 대한 참된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전 초대 교회의 기틀이 되었다.
넷째는 주님의 종으로서 겸손한 헌신의 당위성에 대한 교훈이다(7-10절). 주인을 충실하게 섬기는 종은 어떠한 보상이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마땅히 행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종된 제자들은 자신이 받은 직분을 충실히 수행한 후에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기보다는 다만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10절). 주님께서 충실한 제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겸손과 순종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몸소 종의 형체로 오셔서 겸손한 희생을 보이신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빌 2:7,8; 골 3:17).
17:1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본절에서부터 4절까지는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 것과 형제의 죄를 끝까지 용서할 것을 가르치신 교훈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교훈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하는 제자들의 논쟁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었다(마 18:1-35).
실족케 하는 것. - 여기어 '실족케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은 본래는 짐승을 잡는 올가미나 함정을 가리키는 말로, 이는 고의적으로 올무를 만들어 남을 영적, 육적으로 죄악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한다(마 18:7). 즉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도록 하는 고의적인 모든 유혹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시 140:5).
없을 수는 없으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넨데크톤'은 신약에서 이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단어로, 이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이 불가피함으로 보여준다. 사실 부패한 인간의 도덕성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실족케 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힘써(눅 22:44) 그러한 자리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화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아이'는 본래 극한 슬픔의 탄식을 나타내는 감탄사인데, 여기서는 단순히 그런 비탄의 소리로가 아니라 (삼상 4:7) 냉엄한 심판의 선언으로 쓰이고 있다. 즉 영원한 형벌의 무서운 저주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언은 이미 지독한 외식에 빠졌던 바리새인에 대하여(눅 11:42) 선언된 바 있다.
17:2 작은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크론'은 '작은 자들'로 번역되어야 하는 바, 이 작은 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어린이들(little children souls, LB)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Manson), 혹자는 제자들로(Michel), 또는 복음을 받아들인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Grundmann). 그런데 본문에서 '작은 자들'을 수식하는 '이', 즉 '투톤'이란 대명사가 쓰인 것으로 보아 단순히 어린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연자 맷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윌로스'는 '몹시 어렵게 ', '힘들게'란 의미의 '몰리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곡식의 큰 알맹이를 작은 가루로 만드는 기구인데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과는 달리 나귀를 이용하여 돌리는 매우 큰 맷돌이다. 한편 맷돌을 목에 매어 수장하는 것은 고대 로마와 수리아, 그리이스의 사형제도 중의 하나인데 공공질서를 파괴한 극악한 자에 게 내려졌다.
목에 매이우고. - 연자 맷돌은 둥그렇고, 그 가운데 구멍이 뚫려 곡식을 넣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 맷돌의 윗돌을 끈으로 묶어 사람의 목에 맬 수 있었다. 사형을 당하는 사람은 손과 발이 묶이고, 목에는 자기의 몸무게에 버금가는 맷돌이 달린 채 물속에 던져졌다.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 바다라 함은 일반적으로 '깊음'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던져졌다 함은 고기밥이 되어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되는 형편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에 '나으리라'(뤼시텔레이)는 말은 '지불하다'는 의미의 '뤼오'와 '세금'이라는 의미의 '텔로'란 말의 합성어로서 '보다 더욱 유익하다', '~보다 낫다' 등의 의미로 쓰인 단어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뜻은 '작은 자'를 죄에 빠지게 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가를 보여 주는 의미로 '그런 죄'를 범하느니 차라리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말이다. 즉 믿음이 적은 자를 절대 실족시키지 말라는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17:3 스스로 조심하라. - 이는 앞절과 연결시켜 실족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NIV, Bruce) 뒤 따르는 용서에 대한 교훈으로 보기도 한다(KJV, Ellicott). 그러나 어느 한 쪽에 속한다고 보기보다 두 교훈을 모두 강조하고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한다고 봄이 좋다. 즉 예수께서는 믿음이 적은 자를 실족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용서를 가르치신 것이다.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 여기서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말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너를 거스려(NKJV) 죄를 짓되 거듭해서 짓거든'(NIV, LB)이란 의미이다. 또한 '경계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책망'(rebuke, KJV, NIV)과 경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네 형제가 너를 거스려 거듭 종교상, 도덕상의 죄를 범하거든 책망하라' 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라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죄를 깨닫도록 잘못을 시정해 주고 선포하라는 의미이다.
회개하거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는 '심사숙고하다'라는 의미의 '노이에오'에서 유래한 말인데 도덕적으로 가책을 느끼거나, 깊이 생각하여 잘못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에미'는 '보내다', '생략하다'라는 의미인 '에이미'에서 유래하여 '완전히 포기하고 면제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쓰이고 있어 번복될 수 없는 완전한 용서를 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7:4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너는 용서하라. - 7이라는 숫자는 유대인에게 '완전 수'이자 '무한 수'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말씀은 단순하게 용서하는 횟수를 의미하는 차원을 넘어선 '완전하고, 무한한' 용서의 개념을 말씀하신 것이다(엡 4:32). 특별히 유대인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최대한의 용서로 삼아왔는데 예수님은 그 수준을 완전히 넘어선 무한대의 용서를 말씀하셨고, 또한 친히 그것을 수모와 고통과 죽음을 맛보시면서 철저히 모범으로 보이셨다. 마 18:22 주석 참조.
17:5 사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파견하다', '발송하다'는 의미의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말로 '전권 대사'(ambassadur),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에게 사용되었다(마 10:2; 막 3:13-19). 마 10:2 주석 참조.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예수로부터 소자라도 실족시키지 말아야 할 것과, 무한정한 용서에 대한 교훈을 들은 사도들은 즉시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즉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교훈과 같은 높은 종교적, 도덕적 요구를 현재 자신들이 가진 믿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17:6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회답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본적 원리로 답변하셨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종종 발견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난초 씨)는 아니지만, 유대인에게 가장 작은 것을 표시하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모래나 먼지 등을 실례로 들지 않고 굳이 겨자씨를 예로 쓰신 것은 겨자씨는 비록 작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내재되어 있어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 17:20 주석 참조. 하여튼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것은 존재 여부만을 분간할 수 있는 극히 적은 양의 믿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만한 양의 믿음이라도 진실된 믿음일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자들 스스로는 적은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그 위에 많은 믿음을 더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의 양을 요구한 것이었고 예수의 회답은 믿음의 질을 지적하시는 것이었다.
뽕나무더러‥‥하였을 것이요. - 마 17:20이나, 막 11:23에는 '산'으로 표현되나 본문에는 '뽕나무'로 표현되고 있는데 모두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엄청난 기적으로만이 가능한 일을 나타낸다. 즉 산은 말할 것도 없고 뽕나무 스스로 뽑혀 바다에 옮겨 심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일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씀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유지와 의심 없는 믿음으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다.
순종하였으리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쿠센'은 '아래'란 말의 '휘포'와 '듣다'는 말인 '아쿠오'의 합성어 '휘파쿠오' 의 제 1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명령이나 권위에 유의하여 따르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는 뽕나무가 압도된 능력에 명령대로 행해지는 상태를 암시한다.
17:7 본절에서 10절까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전적인 헌신을 가르치신 교훈이다.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 - 밭을 갈고 가꾸는 농사 일이나, 양들을 돌보는 목축업은 당시 노예들이 도 맡아서 했던 것으로 본문의 종(둘론)은 노예임을 알 수 있다.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 강한 반어법으로 그럴 자가 없다는 말씀인데, 이는 종이 밖의 일을 마치고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곧 앉아 식사를 하라는 주인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17:8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수종들고. - '예비한다'는 말은 '적절히 준비한다'는 '헤테오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적합하게 준비한다'(헤토이마조)는 뜻인데, 이는 여러 음식들을 식성에 맞게 적절히 준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띠를 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존 뉘미'는 '몸을 꼭 졸라 맨 상태'를 의미한다. 즉 편히 일할 수 있도록 복장을 간편하게 만드는 것이며 어떤 궂은일이든 할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를 말한다. 결국 본절은 비록 밖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할지라도 집에 오면 몸과 마음을 헌신하여 주인이 편안히 먹고 마시도록 도와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17:9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 '종이 의무를 다했다고 답례를 하겠느냐?'라는 의미로, 답례를 하지 않는다는 강한 부정적 표현이다. 즉 종이 한 일은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지 어떠한 답례를 받을 사항이 전혀 아니라는 말씀이다. 결국 본절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할 때 답례나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는 말로 겸손과 충성을 교훈하고 있다.
17:10 무익한 종. - 이는 종 자신이 유해하다거나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종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그것이 칭찬을 들을 만한 일이나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와 같이 피조물인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봉사에 대해서 어떠한 대가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한 종의 직무를 다 할 수 없으며 부족한 직무 이행마저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있을 수 없다.
17:11-19 열 문둥병자의 치유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로 들어가셨다가 배척을 당하자(눅 9:51-56) 베레아로 우회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요단 동편으로 가시는 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11절) 문둥병에 걸린 10명의 사람을 고쳐주신 기사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어느 한 촌으로 들어가시자 그곳에 있던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께 가까이는 하지 못하고 단지 멀리 서서 자신들을 긍휼히 여길 것을 호소한다.
사실 문둥병은 의식상 부정한 병으로 취급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께 호소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긍휼을 호소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자신들의 질병을 치유하실 능력이 있는 분으로 신뢰했음을 의미한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그들의 호소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는데(14절)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들의 간구를 응답하여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셨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문둥병자들은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 깨끗함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치유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을 제외한 유독 사마리아인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 나아와 사례했다는 것이다(15,16절). 사실 사마리아인은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되자 앗수르의 민족 혼합 정책에 순응하여 우상을 섬기며 자신들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한 탓에 유대인들에게 이방인과 같이 취급된 자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마리아인만이 다시 돌아와 사례하고 다른 유대인들은 그냥 돌아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며 예수를 배척한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과 겸손하게 복음을 영접하여 구원을 이룬 이방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한편 예수께 돌아와 사례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을 듣게 되는데, 이는 모든 인류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인의 질병이 완쾌되었음을 선언하신 말인 동시에 구원자 하나님으로서의 영적 구원의 선언이기도 하다. 결국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치유함을 받기는 했으나 사마리아인과 같은 영혼의 질병은 해결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받았으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랐던 유대인들을 대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기는 받았으나 구원의 은혜에 이르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신앙의 낙오자들을 대표한다고 할 것이다.
I7:11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 본문에서 갈릴리보다 사마리아가 앞서 나온 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데 역순이기 때문에 혼란을 야기시킨다. 즉 갈릴리가 가장 북쪽에 있고 그 아래 사마리아가 있으며 맨 남쪽에 예루살렘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마리아가 먼저 나왔다는 견해(Grundmann)와 열 명의 문둥병자 중 사마리아인이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 지명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Marshall) 둘 다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했으나 사마리아인들에게 배척을 받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갈릴리에서 베레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상들과 합류하기 위해 가신 것이다(눅 9:51-56). 이 여정에 대해서는 마 19장 자료 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17:12 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메'는 '저장되다', '만들어지다'는 '케이마이'에서 유래한 말로 '조그마한 읍이나 마을' 등을 가리킨다. 본문의 지명이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한 촌으로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한적한 마을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둥병. - 주로 열대지방과 동양에 많은 만성 전염병 중의 하나로 일명 한센씨 병이라 불리 는 질병이다. 한편 문둥병(leprosy)의 그 전염성과 파괴성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질병에 걸린자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생각했다. 문둥병에 대해서는 레 13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열 명. - 이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6절). 이것은 문둥병자들이 있던 곳이 두 지역의 경계선이 만나는 곳(11절)이므로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또한 절망적이고 극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끼리 민족성을 초월하여 함께 다닌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한편 문둥병자 네 명이 함께 다닌 기사는 있으나(왕하 7:3) 열 명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그 당시로는 매우 보기 드문 일로 부근에 그들의 거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멀리 서서. -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건강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었다(레 13:45,46). 따라서 문둥병들은 예수께서 가시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다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보고는 먼 거리를 두고 섰거나, 길 곁으로 돌아섰을 것이다.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긍휼히 여기소서. - 문둥병의 증상으로 보아 귀, 코, 입 등의 돌출된 살 등이 썩어 들어가기 때문에 큰 소리를 낸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희망인양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구하며 절규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도움의 요청이 아닌 믿음이 담긴 호소였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선생'으로 부르고 있지만 자기들의 병을 분명히 고쳐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17:14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 문둥병자들 입장에서 이 말씀은 더욱 많은 믿음이 요구되는 말씀이었다. 즉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씀이고 제사장에게 보인다는 것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에게는 털끝만큼의 작은 변화도 없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갔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도중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았다. 즉 예수님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믿음으로 가는 그들로 하여금 엄청난
믿음의 결과를 맛보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사람을 내외적으로 변화시킨다.
깨끗함을 받은지라. - 여기서 '깨끗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다리조'( )는 '정결하다', '순결하다'는 의미로, 이는 처참한 모습으로 썩은 문둥병자의 살이 다시 돋고, 녹아버린 손가락, 발가락 등이 다시 나며, 피부가 온전해지고, 머리카락, 눈썹 등의 떨이 다시 남으로써 정상인의 상태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실로 엄청난 일이 순종하는 단순한 믿음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
17:15 그 중에 하나가‥‥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이 사람은 즉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여기서 '큰 소리'(메갈레스 포네스)는 '아주 심히 큰 소리'를 의미하는데 아마도 찬양을 통해 감사했거나, 회개하며 하나님을 높였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의 나은 몸을 보이는 것을 미루고 예수께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죄 사함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먼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즉 성도들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은 물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우선적으로 세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17:16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 발아래 엎드린다 함은 최대의 경의와 존귀를 표하는 행위이다. 이는 지극한 은혜를 감사할 줄 아는 또한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였다. 물론 종이 주인에게나 신하가 왕에게 등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 달리 이 경우는 진실된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의 행위였다. 한편 '사례하니'(유카리스테오)라는 말은 '기쁨', '즐거움' 등을 뜻하는 '카라'에서 유래한 말로 '감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즉 어떠한 답례품으로서가 아니라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해 감사하였다는 뜻이다.
사마리아인이라. -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되자 그곳에는 많은 앗수르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앗수르 사람과 북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혼인 관계로 생겨난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인'이다. 이들은 주로 우상을 섬겼으며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을 섬긴 것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개'처럼 취급받던 사람들이었다(요 4:9). 이러한 사마리아인은 예수께 감사할 줄 알았던 반면, 유대인들은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몰랐는데, 이는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의 교만을 예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17:17 예수께서‥‥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본문은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을 엿보게 한다. 열 사람 중에 겨우 한 사람만이,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른 민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았던(사 5:14; 암 3:2) 유대인이 아니라 그 반대의 처지에 있던 사람만이 아닌가? 민족의 차별로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에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란 표현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17:1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온 자가 없느냐. -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적인 면의 감사를 받지 못한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신 것에 대하여 탄식하고 계신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대한 영광과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진정한 구원을 맛 볼 수 없었다.
17: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까지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있었다. 이는 그가 예수께 얼마나 깊은 존경을 표시했는지 짐작케 한다. 한편 여기서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은 모든 인류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인의 질병이 완쾌되었음을 선언하신 말인 동시에 구원자 하나님으로서의 영적 구원의 선언이기도 하다. 다른 아홉의 문둥병자는 비록 치유함을 받기는 했으나 이 사마리아인 같은 영혼의 문제는 해결 받지 못했다. 이러한 비유에서 아홉 문둥병자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받았으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을 대표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기는 하였으나 구원의 은혜에 이르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모든 신앙의 낙오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20,21 현재적 하나님 나라
지난 단락(11-19절)에서는 예수께서 열 문둥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결국 진정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자만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됨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예수께서 하신 교훈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를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졌다. 이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었다(눅 11:20).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하나님 나라는 외적인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매우 정치적인 의미의 왕국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아직까지 아무런 외형적인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마치 허튼 소리나 계속하여 온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의 교훈을 비꼬기 위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결코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의미의 어떤 영토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임하는 곳으로의 개념이다(렘 31:31; 슥 13:1; 말 3:2). 이에 예수께서는 그의 도래와 함께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영적 무지에 빠져있는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20절), 하나님 나라는 외형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며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자들 가운데 임하는 것임을 설파하신 것이다(21절).
이러한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하나님 나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어느 요원한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에 이미 임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곧 그리스도인의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17:20 바리새인들이‥‥묻거늘. -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저의를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는 희롱의 동기에서 나온 것으로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인 아무런 변화도 생겨나지 않았는데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시자 그들은 심술에 찬 질문으로 예수님을 괴롭히고자 하였고, 예수님께서 마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허튼 소리나 계속하여 온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얼마의 기간이 걸리는가를 비꼬는 투로 물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그 같은 질문에 과연 대답할 수 있는 메시야인가를 시험하기 위한 까닭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눅 22:66-71). 셋째는 당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때였으므로(살후 2:1,2) 그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의도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바리새인의 속성상 첫 번째의 '희롱의 동기'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Calvin).
하나님의 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물질적인 의미로서 어떠한 영토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임하는 곳으로서의 개념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를 이스라엘을 이방의 정치적, 경제적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들의 땅에 임할 민족적, 정치적 왕국으로 생각하는 '인간적 시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시각(렘 31:31; 슥 13:1; 말 3:2)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여기서 '볼 수 있게'(메타 파라테레세오스)라는 말은 '철저한 관찰', '주의를 요하는 조사'(NIV) 등을 의미하는 말로 고대 헬라에서는 천체의 관찰, 또는 질병의 중세 관찰 등에 사용되던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육(肉)의 시작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은 미래에 가현적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그의 도래로 이미 임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17:21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 유대인의 시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외적인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나라였다. 때문에 그들은 '이곳' 혹은 '저곳'에 메시야가 통치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화와 부가 형성된 유토피아(Utopia)가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오해를 단호하게 교정하신다.
너희 안에 있느니라. - 본절은 '너희 마음속에 있느니라'로도 해석할 수 있고,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자를 취하면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의 마음속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악의와 외식에 가득찼던 바리새인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후자를 취하면 하나님 나라는 여기저기에 건설될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임했다는 말이 된다. 즉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는 눅 9:20과 요 1:26 등이 뒷받침해 준다.
17:22-37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의 양상
앞 단락(20,21절)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를 묻는 바리새인에 대한 답변으로 주신 예수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외형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임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를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계기로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때의 양상과 관련해서 주신 말씀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완성된 형태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었으며 그때에 비로소 이 땅과 하늘이 변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고 만물이 새롭게 변화될 것이었다(계21:1-8).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에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때와 관련된 몇 가지 교훈을 주고 계시다.
첫째는 재림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교훈으로(22-25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아직은 종말의 때가 아니라는 것(22,25절)과 종말의 때에는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23절), 그리고 주의 재림은 번개가 비췸같이 매우 갑작스럽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24절).
두 번째는 재림 전에 있게 될 세상의 제 현상에 대한 교훈으로(26-30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에는 이 세상이 노아의 때(창 6:1-7:24)와 롯의 때(창 19:4-25)와 같이 세속적인 욕망과 죄악에 빠져 홀연히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세 번째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으로(31-37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주의 재림 때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와 그렇지 못할 자가 구분될 것이므로(34,35절) 성도들은 예기치 않은 주의 재림을 깨어 준비하되 세상 것에 집착해서는 안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31:33절).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주의 재림에 관한 주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여 주의 재림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성도들을 유혹하는 이단 사조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세상이 악할수록 더욱 경건한 삶을 유지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③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며 장래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7:22 인자의 날 하루. - 여기서 '인자의 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메시야 왕국을 완성하실 종말의 때를 가리키는 말로(롬 13:12; 고전 5:5; 빌 1:6,10), '여호와의 날', 혹은 '주의 날'(사 11:10; 13:13; 렘 31:31)과 같은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 '하루'는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된 영광의 새 시대의 '첫 날'(벧후 3:3-10, Plummer)을 가리킬 수도 있고 여러 날 중 '하루'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Rigaux) 어느 쪽으로 보든 큰 무리는 없다.
보지 못하리라. -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예수께서 재림하시어 권세로 영광스럽게 다스릴 날을 아직은 재림의 때가 아니므로 '보지 못할 것이다'는 의미와, 둘째는 말세에 미혹과 고난을 이기지 못해 참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인자의 통치를 보고자 하나 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눅 18:8). 문맥상 전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17:23 너희에게‥‥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 예수의 재림 약속(막 9:1)을 이용하여 자칭 예수와 선지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미혹케 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시는 말씀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승천 후 당시 데살로니가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셨다는 소문이 난무했고(살후 2:1,2),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단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출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혹시키고 있다(딤전 1:7; 4:2). 마 24:23,24 주석을 참조하라.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 여기서 '가지도 말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아펠데테'( )는 '떠나지 말라'(do not go away, NKJV), '달려가지 말라'(do not go running, NIV)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이단에 미혹되지 말고 바른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떠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말이다. 그리고 '좇지도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데 디오크세테'( )는 '따라가지 말라'(not follow, NKJV, NIV)는 말인데, 이는 결국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에 미혹되어 그들을 따라다니지 말라는 뜻이다.
이단에 빠진 자들은 대부분 정통 교회에 다니던 자들로,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단의 무리의 미혹에 현혹된 자들이다(히 12:25).
17:24 번개가 하늘 아래‥‥그러하리라. - 예수의 재림의 양상을 보여 주는 구절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사람이 일시에 다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실 것을 보여 준다(계 1:7). 동시에 예수의 재림은 매우 급작스럽게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준다.
17: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 예수께서는 그가 영광의 재림주로 오시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이는 장차 그가 당할 십자가 고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특별히 여기서 '많은 고난' (폴라 파데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처참한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예수께서 당하실 십자가 고난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될 것인지를 암시해 준다. 또한 '먼저'(프로톤)는 다음이 뒤따른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로 먼저 십자가의 처참한 고통들을 당하신 뒤에 반드시 영광의 재림주로 오실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의 재림과 관련하여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 없는 영광을 얻으려는 제자들의 마음(마 16:22)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세대에게. - 여기서 '세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마'는 '혈족', '자손' 등을 뜻하는 '게노스'에서 유래한 말로 '기간'이나 사람들의 '시대'나 '세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눅 9:41)라고 일컬어졌던 당시의 '유대인들'로 볼 수도 있고, 나아가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재림 때까지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 - 여기에서 '버린바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키마조'는 '완고하게 거절하다', '강력히 거부하다'는 의미로,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을 암시한다(마 21:42).
17:26 노아의 때‥‥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 여기서 '노아의 때'란 노아의 홍수가 있던 때를 말하는 것으로(창 6:13-7:24),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자의 재림의 때'가 '노아의 때'에 비유된 것은 인자의 재림이 성격상 노아의 홍수와 마찬가지로 불현듯 돌연히 임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나 하지만 이것이 재림의 때를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도 이미 예측할 수 있도록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인자의 재림의 때도 그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그 때 만큼은 계시된 징조를 통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나타나는 징조를 통해 종말의 때가 가까움을 알고 그 때를 준비하되 그 정확한 시점을 단정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17:27 먹고 마시고‥‥시집가더니. - 노아 당시 사람들의 특징을 대변해 주는 구절이다. 사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시 된 것은 이를 정상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고 온갖 탐욕과 쾌락의 방편으로 삼았고(사 49:26; 호 10:13).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도 부도덕한 형태와 비정상적인 형태로 탐욕에 눈이 가려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완전히 뒷전이고 육체적 쾌락만을 좇는 죄악적인 삶이 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홍수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창 7장).
멸하였으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미'( )는 '죽음', '폐허' 등의 뜻을 가진 '올레드로스'에서 유래한 말로 '완전히 파괴하다', '철저히 멸망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본절은 노아 식구 이외에는 그 누구도 생존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7:28 롯의 때와 같으리니. - 이는 창세기 19장의 소돔 성의 상황을 말씀하는바 롯의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물질과 육체적 탐욕에 완전히 빠져 최소한의 종교심과 도덕성마저 상실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한편 롯에 관한 기사는 마태의 병행구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노아 때의 심판이 물에 의한 심판이라면 롯 때의 심판은 불에 의한 심판으로 두 심판은 다같이 최후 심판의 그림자이다.
17:29 불과 유황이 비 오듯. - 여기서 '유황'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온'은 '번쩍인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노란색 비금속 원소로서 결정체로 얻어진다. 유황은 연소될 때에는 푸른 불꽃을 내며 질식할 듯한 유독성의 아황산가스를 내뿜는데, 성경에서 유황은 배교자와 사악한 자들(신 29:23), 앗수르 왕(사 30:33), 에돔(사 34:9), 곡(겔 38:22), 악마와 모든 죄인들(계 21:8)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의 수단으로 나타난다. 이 유황이 불과 함께 비 오듯 퍼부었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형벌의 비참함과 그 무서운 실상을 보여 준다.
17: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 여기서 '나타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맆토'는 '드러내다', '많은 사람 앞에 공개하다'는 뜻으로, 이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재림하실 것을 암시한다. 하여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는 소돔과 고모라가 그렇게 일말의 소망도 없이 멸망당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러한 불 심판의 형편 아래 처하게 될 것이다.
17:31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 여기서 '지붕'은 당시 유대인들이 올라가서 쉬던 시원하고 조용한, 그리고 평평한 옥상을 가리킨다. 그 세간이‥‥내려오지 말 것이요. - 여기서 '세간'(스큐오스)은 '그릇', '도구', '장비' 등을 통칭하는 말로, 본절에서는 '세상의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마지막 날에는 세간을 챙길 틈도 없는 급박한 상황이 전개될 것임을 의미한다.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 역시 마지막 때에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17: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 '롯의 처'는 롯과 함께 소돔을 빠져 나오다가 단순히 호기심에서가 아닌 '세상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잊고 뒤돌아보다가 '소금으로 된 화석상'이 되어 버린 여자이다 (창 19:26). 여기서 '생각하라'(므네모뉴오)는 말씀은 단순히 '기억하라'는 차원을 넘어서 '마음을 집중하여 유의하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 멸망당하는 처지에 이르지 않도록 '롯의 처'에 대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이다(창 19장 자료노트, '롯의 처의 비극을 통한 교훈' 참조).
17:33 목숨. - 헬라어에서는 이를 몇 가지로 다르게 표시하는데, 하나는 '프쉬케'로 '호흡하다'란 의미의 '프쉬코'에서 유래하여 '생물학적인 생명', '개개인의 생명'(시 66:9; 마 2:20)을 뜻한다. 다음으로 '조에'가 있는데 이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생명', '하나님께서 보유하신 생명'(요 1:4; 11:25)을 주로 의미한다. 그러나 이 '조에'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의 생명에도 사용되고 있음(행 17:25; 요일 5:16)을 유의하여 문맥을 따라 진의(眞意)를 따져야 한다. 다음으로 '비오스'가 있는데, 이는 '살아있는 동안', '생활의 방식'(딤전 2:2), '생활의 수단'(막 12:44) 등에 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프쉬케'가 사용되고 있어 세상적인 욕망에 가득찬 '생명'임을 보여 준다.
보존하고자 하는. - 여기서 '보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조'는 '보호하다', '완전하게 만들다'(마 27:40)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육신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벗어난 생명의 보존이 가능하겠는가?
잃는 자는 살리리라. - 이는 육체적인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는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죄악에 덮인 옛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날 것(롬 6:11)과 나아가 세상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육신을 죽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구원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17:34 밤에. - 여기에서의 '밤'은 이어 나오는 35절의 '낮'과 대조되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삿 6:27). 그리고 이는 항시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요 7:6). 많은 사람이 '평안과 휴식'을 취하는 때에 '도적같이' 밤에 오셔서 믿는 자로 하여금 데려감을 당하게 하는 것은 주의 재림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과 인간 형편들의 대조적인 면을 명확하게 보게 한다.
두 남자. - 여기서 '남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오'는 특별한 한쪽 성(性)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쓰이는 단어이다. 따라서 일부 영역본(NIV)에서는 '두 사람'(two people)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두 남자'든, '두 여자'든, 아니면 '한 남자와 한 여자'든 같이 잠을 잤던 것으로 보아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주의 데려감은 그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는 데려감을 받지 못하고 버림당하는 자의 비참함을 상대적으로 보여 준다.
데려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랄람바노'는 '맞이하다', '허락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멸망 받을 자리에서 구원하여 영광의 자리로 영접할 것임을 뜻한다.
버려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에미'는 '따로 떼어놓다', '포기하다'(마 4:11; 막 2:5; 눅 8:51)는 의미로 믿지 않는 자를 종말 심판의 날에 멸망 받을 자의 자리에 남겨두어 멸망 받게 하심을 뜻한다.
17: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 여기서 '여자'에 사용된 헬라어는 34절에서 '남자'에 사용된 헬라어와 같은 '뒤오'( )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맷돌 가는 일은 대개 여자가 하는 일임에 비추어 볼 때 본절에서는 여자가 분명하다. 하여튼 본절의 두 여자는 34절의 두 남자와는 대조적으로 낮에 일을 하고 있다가 상반된 결과를 맞이하였다. 맷돌을 가는 일은 음식을 만드는 일로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이 일 중에 데려감을 당했다는 것은 전절과 마찬가지로 부지불식간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것과, 그 형편의 상반된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이상의 데려감을 받은 사람과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창 17:1; 롬 13:1)에 따른 것으로, 인간 편에서는 믿음과 그에 따른 열매로 결정되어 질 것이다(마 25:31-46).
17:36 (없음). - 일부 사본(베자 사본) 등에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 24:40)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고대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17:37 주여 어디 오니까. - 이 말은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엉뚱한 반응으로 '이러한 일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란 질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되어질 일들과 재림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림과 심판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 이 말씀은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 어디나이다'라고 답변하신 말이다(삼상 2:10; 계 18:10). 이 말씀은 먹을 시체가 있는 곳마다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 있는 곳마다 심판이 임한다'는, 즉 '세상 모든 곳에 그리스도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죄로 부패된 이 세상 어디에나 예수님께서 동시에 재림하시며, 또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연구자료
다가오는 종말과 성도의 현실 생활 자세
본문은 예수께서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함락과 세상 끝날 당신의 재림으로 도래할 역사의 종말(終末)에 대한 예언을 오묘하게 복합시켜 주신 말씀을 보도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경은 여러곳에서 현 우주와 역사의 종말을 명백히 거듭 밝히고 있다(사 2:12; 렘 23:5,6; 고전 15:51,52; 살전 4:16; 벧후 3:10; 계 20:12; 21:1,2). 이를 일단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일단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 하셔서 현재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 다시 재림하실 것이다. 그때에 당시 생존한 인간은 물론 무덤에서 일시에 모두 다 함께 부활할 아담 이래의 모든 인류 및 사탄과 그를 따르던 귀신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여부로 심판을 받아서 각각 지옥(Hell)과 천국(Kingdom of God)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현 우주와 역사는 최종 종결될 것이며 향후 성도와 죄인이 각각 나뉘어 처하게 될 천국과 지옥은 종말을 맞을 현 세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New Heaven and New Earth)이 될 것이다. 곧 성도와 불신자, 선과 악이 혼재하는 오염된 현 우주의 역사가, 주님의 재림과 그에 연속되는 심판으로 최종 종결되는 시점,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여부에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마침내 개시되는 시점으로서의 종말은 기독교 구원론의 한 핵심 개념이다.
이에 본고는 종말과 관련된 여러 측면 중에서도 다가오는 종말의 필연성과 그럼에도 당장은 현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중적 상황에 처한 성도의 기본자세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1. 종말의 필연성
하나님은 태초에 전 우주를 실로 순결하고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진 존재인 천사의 우두머리였던 사탄(Satan)이 먼저 타락하여 일부 천사를 함께 타락시켜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물론 마침내 첫 사람 아담(Adam)까지 유혹시켜 하나님에 대한반역을 그 본질로 하는 범죄에 동참시켰다. 한편 전 피조물의 대표였던 사람의 타락으로 하여 전 우주까지 심각히 오염되게 되었다(롬 8:19-22).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전에 사람이 맺은 언약에 따라 아담은 즉각 영원한 죽음과 형벌에 처하게 되었다(창 2:16,17). 그랬다면 인간의 역사는 그 순간 영원히 단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은 지극한 창조주의 사랑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새 기회를 주시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의 죄 값을 다른 존재가 대신 지고 희생하는 대신 인간은 회개하면 그 대속 희생의 공로가 그에게 적응되어 그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되는 소위 구속(救贖)의 법(法)을 새로이 제정해 주셨다. 그리고 그 구속은 궁극적으로는 제 2위 성자이신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향후 전개될 장구한 역사(歷史)를 구약과 신약시대로 가르셨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예수의 궁극적 대속 희생을 예표하는 동물 희생 제사의 법과 여러 예언으로 보여지는 우리 주 예수의 강림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역사가 진행되게 하셨다. 반면 일단 예수께서 초림하사 구속 사역이 이미 성취된 신약시대에는 주께서 다시금 재림하여 구속 사역이 최종 실현될 천국 구원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역사가 전개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장구한 신․구약 구속사의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예수 이 전과 예수 이 후에 태어난 모든 세대의 인간들 중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이를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을 기회를 갖게 하셨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길게 설명한 것은 결국 죄와 악으로 오염된 현재의 우주와 역사는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단 천사와 인간의 범죄에 대한 징계를 유보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배려로 잠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일 뿐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또한 절대 초월자로서 전 우주와 우리의 전 인격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택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구원도전 인격적이고 절대 완전할 수밖에 없는 바 그 구원이 실현되는 장(場)은 이 죄로 오염된 현 우주와 역사되는 다른 차원의 시공(時空)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즉 궁극적으로는 현 우주와 역사의 종말의 필연성과 그 필연적 종말의 도래의 과정과 관련된 기본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내용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2. 필연적 종말을 전제한 성도의 현실 생활 자세
이처럼 필연적인 종말을 전제할 때 현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는 매우 첨예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이중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구약시대 성도들에게도 역사 종말 이전에 각 개인의 종말인 죽음 문제가 있었고 또 이 역사의 종말은 그들에게도 적용될 것이었지만 그때에는 성경 계시의 점진성에 의거하여 아직 역사 자체의 종말에 대한 계시(revelation)가 미비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는 현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있어서보다는 그 중요성이 적었다고 볼수 있다.
어쨌든 현재 예수의 구속 사역은 이미 성취되었으나 그 최종 실현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천국 구원은 아직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의 구속 사역의 성취로 천국이 영적으로는 분명 도래하였으나 그 천국이 영육 간에 온전히 도래하는 것은 종말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일 것이다. 한편 성도는 이미 성취된 주의 구속 사역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여 이미 구원을 확정 받아 신분상으로는 이미 천국에 속한 자가 되었으며 비록 영적 차원에 그것도 부분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 천국을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그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이 세상에 속해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현 우주와 역사는 종말을 맞을 것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 성도는 과연 다가오는 종말을 전제할 때 이 현실을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또한 굳이 역사 전체의 종말이 아닐지라도 각 성도가 죽음을 통하여 개인적 종말을 맞을 것인바 이런 각도에서도 성도의 현실 생활에 대한 자세 문제가 제기 된다.
한편 우리는 너무도 광범위한 주제인 종말을 전제한 성도의 현실 생활 자세 문제 전반에 대한 해결책을 논할 수는 없으므로 많은 성도가 이 문제에 있어서 흔히 범하는바 종말과 현실 어느 한쪽에만 너무 치우쳐서 범하는 두 극단론의 오류에 대해서만 지적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균형 잡힌 성도의 현실 생활 자세의 원칙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극단적 종말론의 오류 금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극도로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한다. 그리하여 같은 견해를 가진 극히 폐쇄된 집단 내에서만 교제를 나누고자 하며 여타의 사회적 관계와 책임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전혀 불성실하다. 또한 신비주의와 맹목적 광신에 빠지기 쉽다. 또한 주의 재림으로 인한 세상 종말의 날은 심지어는 주 예수 자신도 모르며 오직 성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성경의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주의 재림의 징조 및 그 도래 과정에 대한 성경의 일부 말씀을 확대 해석하며 종말의 날짜를 인위적으로 정해놓고 이를 맹신하며 열광하는 소위 시한부 종말론(終末論)이 역사상 계속 출현해 왔는바 이들도 바로 이 부류에 속한다.
이런 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태초 아담의 타락 이후 즉각 형벌을 주시지도 그리고 주의 십자가 구속 사역 이후 즉각 천국을 도래시키시지도 않은 근본 목적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곧 먼저 주의 성도된 자들이 복음을 널리 전함으로 모든 하나님의 택한 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원받을 충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런 선교적 관점(宣敎的 觀點) 에서 주어진 현실 생활에 최대한 충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주의 복음 자체를 전하는 동시에 성도로서 실제의 개인 및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바른 자세와 비전(Vision)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마 5:16). 실로 하나님은 될수록 모든 자가 구원 얻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무조건 종말만 기다리며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편협된 종교 이기주의인 바 이는 성경의 진리와 위배된다.
또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물론 천국에서의 삶이지만 이 땅에서의 현실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다시 얻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삶의 기회이므로 이를 즐거이 누릴 권리와 의무가 있다. 또한 비록 세상은 훼손 오염되었으나 이 땅에서도 우리의 영혼은 천국의 비밀을 누릴 수 있는 바 현실은 주와의 교제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 인격을 더욱 성숙시키는 곧 성화(聖化)의 기회로 선용해야 할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현실을 대함에 있어서 먼저 개인적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으로서 현실을 누리며 성화(sanctification)의 기회로 선용하고 또 대 사회적으로는 선교의 기회로 깨달아 기쁘고 감사히 현실을 누리며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얻고자 현실을 선용해야 할 것이다.
2) 극단적 현실론의 오류 금지
이런 부류에 속한 자들은 주의 복음과 인간의 전인격적 구원보다 현실의 정치. 사회적 관심을 더 우위에 놓는다. 기독교의 교리는 자신들의 사회사상을 뒷받침하는 재료일 뿐이다. 이런 자들은 흔히 절대 초월자로서 삼위 하나님(Trinity)의 존재, 우리의 죄 자체를 구속하시려는 예수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가진 그리스도의 독특한 존재와 사역,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인간의 전인격적 구원을 종교적 미신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은 기독교가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다른 종교나 사상과 더불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단적 종말론이 광신적 경향을 가진 무지한 집단의 이단주의자들에게 많다면 이 극단적 현실론은 인본주의적 지식을 맹신하는 자유주의적 이단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이들은 먼저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이 전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보여 주는 계시의 책 성경의 진정성을 새삼 확인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성경이 보여주는 절대 초월자에 의한 우주의 무에서 유로의 창조,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전인격, 주의 부활과 승천으로 정점에 이른 성경의 모든 예언과 그 역사적 성취, 그리고 그에 의거한 기독교 교회사(敎會吏)의 전개에 대하여 존재론적 관점(Ontological Viewpoint)에서 분명한 재정립을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앞서 설명한 원리에 의하여 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획득 즉 전인격적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이 땅위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가능함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개인적 갈등은 물론 구조적 모순도 오직 그 문제의 궁극적 원인인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될 때에만 가능한바 이는 오직 주의 복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또 결코 현실에서는 그 최종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냉엄한 진리의 양면을 명백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성경 진리대로 사는 것이 곧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길이며, 인간은 능히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는 신앙의 지혜와 겸손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끝맺는 말
먼저 성도는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종말 앞에서 현재 성도가 현실에서 처한 첨예한 갈등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종말 및 그 이후의 새 세상과 현실 사이에서 성도는 무엇보다 먼저 성도의 궁극적 지향점은 오직 천국이라는 또 천국일 수밖에 없다는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연후에 이 원칙을 잊지 않는 범위에서 그리고 또 현실과 인간의 한계를 잊지 않는 범위에서 이 현실에서의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는 물론 특히 이웃 간의 수평적 관계에서 갖는 개인적 및 사회적 생활의 기쁨과 책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편 본고에서는 전체적 입장에서 종말을 전제한 성도의 기본절인 현실 생활 자세에 대해서만 논하였는바, 종말과 관련하여 가장 큰 관심과 물의를 빚는 '주의 재림과 종말의 때'에 대한 문제 및 그에 즈음한 성도의 자세 문제에 대해서는 베드로후서 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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