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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천국 처소에 대한 약속과 형제 사랑의 명령 및 보혜사 성령의 약속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13-17장까지 이어지는 본래 성자 하나님이셨으나 태초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제 곧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전날 밤인 고난주간 제 5일째인 목요일 밤에 최후의 만찬을 전후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고별설교와 기도로서 주신 여러 말씀들을 보도한 일련기사의 연속부분이다.
예수께서 지금껏 3년간의 공생애를 가지신 것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전에 자신의 구속 사역의 의미와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져올 천국 구원에 대한 계시(revelation)를 주 내용으로 하는 신약 복음의 본질을 미리 밝히시고 선포하시기 위해서였다. 또한 당신이 부활 승천하신 후 세상 끝날 재림하여 오실 때까지 지상에서 복음의 중심지 역할을 할 교회를 건립하도록 미리 세우신 사도들을 교육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 수난이 내일로 다가온 시점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곧 받으실 십자가 수난과 자신들을 떠남으로 인해 두려움과 혼란에 처하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더욱 강한 믿음으로 이에 대처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와 관련된 매우 심오한 구속사적 진리들을 제자들에게 집중 교육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의 일련기사인 제 13-17장은 제13장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 유다의 배반 및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실을 예언하셨음을, 그리고 제 14-16장이 당신의 십자가 수난 및 부활 승천 이후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을 향한 위로의 약속 및 핍박에 대한 교훈을, 그리고 제 17장이 대속 희생을 위한 죽음을 앞두시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그리스도로서 제사장적인 중보기도를 드린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은 예수의 연속된 강화에 이어지는 부분임에도 특히나 도마(5절), 빌립(8절), 유다(22절) 등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대답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즉 본장은 이제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실 경우 두려움 속에 남아 있게 될 제자들을 향하여,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 재림하여 오실 때까지 이미 작정된 멸망의 심판으로 인해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의 최후의 발악으로 고난과 핍박이 더욱 거세게 일어날 이 세상에서 복음 전파 사명을 감당할 신약 시대 전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는 진리들을 보도한다.
먼저 전반부 1-15절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목적이 각 성도들이 장차 가게 될 천국 처소들을 예비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밝히시며 자신이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심을 선언함과(1-7절) 더불어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자기 증거와 자기를 믿는 자들에 대한 기도 응답의 약속과 사랑의 새 계명 준수 권면을 골자로 하는 예수의 교훈(8-15절)을 보도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매우 풍요한 구속사적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시나 이 땅에 성육신(成肉身)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일차적으로는 죄 값으로 인해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영원한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하는데 그 최종 목적이 있다. 따라서 흔히들 오해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단지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죄 의식을 없애주고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살며,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을 명심토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잠시 이 세상에 거주하고는 있으나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존재로서 그 삶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후반부 16-3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에 대한 약속(16-24절)과 이제 십자가 수난 직전에 이런 보혜사의 약속을 주시는 이유 및 이런 당신의 수난 전의 말씀에 의지하여 당신의 구속 수난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이 닥쳤을 때 흔들리지 말 것을 교훈(25-31절)하신 내용 등이 있다.
보혜사(헬, 파라클레토스)란 문자 그대로 '곁에서 돕는 자'란 뜻으로서 이는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세상 끝 날 재림하여 오실 때까지 지상에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세세토록 전함으로써 이 땅 위에 천국을 확장해 나가며 궁극적으로 구속사의 최절정인 천국의 완전한 실체를 도래케 하는 사역을 감당할 성도들을 보호, 위로, 인도하시는 역할을 담당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 한편 보혜사 성령은 다름 아닌 창조주요 전 우주의 주권자이신 삼위 하나님 중 제 3위 하나님이시다. 태초 인간의 타락 직후 제 1위 성부 하나님은 인간 구속의 법을 수리하시고 이를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성취하도록 작정 섭리하신 후 주 예수의 성육신 강림까지 구약 구속사를 주도적으로 섭리하셨다. 한편 이제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시어 구속 사역을 일단 성취하신 후 그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인 세상 끝 날의 재림의 약속을 남기시고 일단 세상을 떠나 승천하시며 이처럼 제 3위 하나님이신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예수 이후 세상 끝 날까지의 구속사는 제 3위 하나님이신 성령이 성부가 작성하시고 성자가 성취하신 구속 사역을 확장, 적용시키시며 구속사를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가시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구속사의 각 단계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각각 주도적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신 동시에 각 단계에서도 다른 두 위의 하나님도 도래하심은 물론 전체적 입장에서는 삼위 하나님이 함께 연속성을 가지고 태초부터 종말까지 구속사를 진행시키셨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 당시 주의 사도들이 십자가 수난을 목전에 두고도 절망할 필요가 없었듯이 우리 성도는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적 좌절의 위험은 없는 것이다.
외울 말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천국 처소에 대한 약속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성부와 하나이신 예수의 기도 응답의 약속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보혜사 성령의 약속과 계명 준수 권면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보혜사 성령의 사역과 예수 수난 예고
25 〇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14:6 그리스도의 길 되심에 대한 7가지 사실
1.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요 14:6)
2. 시험을 피하는 길(고전 10:13)
3. 성소에 들어가는 길(히 9:8)
4. 새롭고 산 길(히 10:20)
5. 진리의 길(벧후 2:2)
6. 바른 길(벧후 2:15)
7. 의의 길(벧후 2:21)
보감-14:1-3 성도들이 가져야 할 10가지 믿음
마 15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4:1-3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자기 선언
요 2장 연구 자료 참조
신학용어-14:16,17 보혜사(保惠師)
'보혜사'(헬,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오직 사도 요한의 저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용어이다(요 14:16,26; 15:26; 16:7). 그러나 이 용어는 성경 전반에 나타난바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 또는 성령과 성도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들을 함축하는 용어로서 매우 중요하므로 보혜사에 관계되는 전반적인 사실을 살펴보겠다.
1. 용어의 정의
'보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는 '아무개 곁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대개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이 단어는 능동적인 측면에서 재판관 앞에서 다른 이를 변호하는 자, 혹은 곁에 서서 격려하며 권고하는 자,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아무개에게 탄원을 올리는 중개자(요 14:16,26; 16:7; 요일 2:1)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수동적인 측면에서 옆에 서서 보조하고 원조하는 자, 친구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2. 보혜사이신 그리스도
일반적으로 '보혜사'라고 하면 성령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본문 16절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의 보혜사이심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16절)라고 했는데 여기서 다른 보혜사란 성령을 가리키며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한 보혜사이심을 암시한다. 또한 요일 2:1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죄 용서를 위해 성부 하나님께 중재하는 대언자라고 말한다. 이는 근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기 몸을 대속제물(代贖祭物)로 바침으로써 죄인들이 그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그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염두에 둔 것이다(사 53:11; 벧전 3:18). 그리고 이렇듯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며, 중재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대제사장직과도 일치하는 것이다(히 7:25-28). 실로 보혜사이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그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롬 8:34).
3. 또 다른 보혜사 성령
제 3위 성령 하나님도 제 2위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우리의 보혜사이시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의 사역은 신자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자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리고 특히 성령은 성도 안에 내주(內住)하심으로써 성도들과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때로는 뜨거운 확신으로, 때로는 위로와 권면하심으로 도우신다(롬 15:13; 고전 2:17-16).
4. 의의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 성도들은 모두 두 분의 보혜사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두 분이 결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18절)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들을 도우시고 계시다는 사실에 우리는 새삼 큰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또 우리가 연약하여 낙망할 때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며(롬 8:26), 또한 보혜사 그리스도께서도 언제나 성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은(롬 8:34; 요일 2:1) 우리가 우리의 연약한 모습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더욱 신앙생활에 박차를 가할 것을 교훈한다 하겠다. 한편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에 강림하셨다. 이러한 오순절 보혜사 성령 강림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큰 의의를 갖는 바 이에 대해서는 행 2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도표 - 14:16-17, 성령의 묘사
1. 하나님의 신(창 1:2)
2. 지혜로운 영(출 28:3)
3. 주의 선한 신(느 9:20)
4. 주의 성신(시 51:11)
5. 자유한 영(시 51:12)
6. 심판, 소멸의 영(사 4:4)
7. 지혜와 총명의 신(사 11:2)
8. 모략과 재능의 신(사 11:2)
9. 주를 경외하는 신(사 11:2)
10. 보혜사(요 14:16)
11. 진리의 영(요 14:17)
12. 성결의 영(롬 1:4)
13. 생명의 성령(롬 8:2)
14. 양자의 영(롬 8:15)
15. 유일하신 영(엡 4:4)
16. 영원하신 성령(히 9:14)
17. 은혜의 성령(히 10:29)
18. 영광의 영(벧전 4:14)
19. 거룩하신 자(요일 2:20)
20. 일곱 영(계 1:4)
21. 대언의 영(계 19:10)
원어 연구-14:30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엔 에모이 우크 에케이 우덴'이다. 여기서 '엔 에모이'는 '~안에'(in)를 뜻하는 전치사 '엔'과 '나'(I)를 뜻하는 '에고'의 여격인 '에모이'가 합쳐져서 '내 안에'(in me)라는 뜻을 가진다. '우크 에케이'는 '가지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 동사의 3인칭 단수에 부정어(우크)가 붙어 '그가 갖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한편, '우덴'은 '결코 아니나'라는 의미의 '우데'와 '하나'(one)를 뜻하는 헤이스'의 합성어인 '우데이스'가 변형된 것으로서 '하나도 아닌' 또는 '아무 것도 아닌'이란 뜻을 지닌다(막 9:8).
따라서 전체적으로 본문은 그가 내게 있어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다'(he has nothing in me: KJV)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는 지나치게 문자적인 의미에만 집착한 것으로 충분한 뜻을 전달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KJV역과는 달리 본 구절을 번역한 예를 Living Bible과 RSV 역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그가 내게 대한 권세가 없다'(he has no power over me)로 나와 있다.
문맥에 따라 본절을 살펴볼 때 바로 이 후자의 해석이 바람직한 번역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본절의 그(이 세상 임금)는 사탄(엡 2:2)을 의미하며, 바로 그 '사탄이 예수의 권능과 영광을 침해할 아무런 권세가 없다'는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 예수의 짤막한 한 마디에서도 우리는 예수야말로 이 세상의 참된 권세자요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한 왕이심을 확실히 알게 된다.
신학용어-14:17 성경의 진리 개념
요 16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 14:27 성도가 누리는 영적 평안에 대한 묘사
1. 그리스도가 대신 징계 받음으로 누리는 평안(사 53:5)
2.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요 14:27)
3.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없게 하는 평안(요 14:27)
4.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요 16:33)
5.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아 누리는 평안(롬 5:1)
6. 믿음 안에서 충만케 된 평안(요 15:13)
7. 둘로 하나를 만드사 연합케 하신 평안(엡 2:14)
8.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평안(골 1:20)
9.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주시는 평안(살후 3:16)
10.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구해야 하는 평안(벧전 3:11)
신학용어-14:22 주(Lord)
요 13장 자료 노트 참조
14:1-7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앞장의 마지막 단락에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가 본장에서도 역시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룟 유다의 배신(요 13:21-30)과 예수님 자신의 떠나가심(요 13:33),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否認)에 관한 예수님의 예고(요 13:36-38)를 듣고 의기소침해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심어 주는 장면이다.
먼저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위로와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권면으로 강론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떠나가심이 결코 제자들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면서 자신이 제자들 곁을 잠시 떠나가심은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반드시 세상에 다시 오셔서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1-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도마의 질문(5절)이 잘 대변해 준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자기 선언을 하셨는데(6절),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앞서 자신을 양의 문(요 10:7-9), 선한 목자(요 10:11,14) 그리고 부활과 생명(요 11:25)으로 선언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성(神性)과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함으로써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7절). 이러한 예수의 자기 선언에 대해서는 요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물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것이 그 해답으로서, 참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며,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자신의 구원을 온전히 이룸은 물론 아직도 엉뚱한 곳에서 구원과 영생의 길을 찾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올바른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여야 할 것이다(행 4:12).
14:1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예수를 팔 자에 대한 말씀이나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예언, 근본적으로는 예수가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확정적인 말씀에(요 13:33) 모든 제자들은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아신 예수께서 그들을 위로하신다. 한편 여기서 사용된 '마음'(카르디아)은 인간의 육체와 대비되는 지.정.의적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 이곳은 신앙이 깃드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음에 근심한다는 것은 세상적 걱정으로 인한 믿음의 퇴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와 같은 영적 퇴보를 경계하신 것이다. 또한 '근심하지'에 해당하는 '타라세스도'( )는 지난 주간 동안에 예수가 친히 겪으신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도 사용된 말인데(요 11:33; 12:27; 13:21) 이처럼 예수께서는 친히 겪으신 괴로움을 회상하시면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있다(Bernard). 또한 현재 가정법과 함께 사용된 부정어 '메'( )는 계속되는 과정 중에 있는 행동을 금지하라는 의미로, 본절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근심하는 것을 즉시 그만 두라'는 명령의 뜻이다(G.hussies).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접속사 '카이'를 중심으로 앞뒤 두 문장은 각각 평서문이나 명령문으로 다 번역이 가능하다. 한편 개역성경은 이를 '평서문 + 명령문'으로 번역하는데, 아마도 번역자들의 의도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같이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본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만일 그러한 의도의 표현을 하려했다면 앞의 문장을 조건문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개의 번역 성경이나(공동번역, 현대어 성경, 현대인의 성경, 표준 신약 전서, 새번역, NIV, RSV, TEV, NASB) 학자들의 견해와 같이(C. Barrets, G. Beasley-hurray, A. Robertson, Bernard, Lindars) 둘 다 명령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두 문장 모두 현재형(피스튜에테)으로서 '계속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Hendriksen). 이처럼 세상 근심을 근본적으로 타개하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거할 곳'에 해당하는 '모나이'( )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과 23절에만 나오는 희귀한 단어이므로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여행자들의 야간 숙소를 의미하는 아람어 '온'(on)과 세속 헬라어(secular Greek)에서 쓰인 '모나이'의 의미가 거의 일치한다고 보고 교부 오리겐(Origen)은 이 단어를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위치한 정거장(station)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편 라틴어로 번역된 벌게이트(Vulgate)는 이 단어를 '만시오'(mansio)라고 번역하며 '쉬어가는 장소'라는 뜻을 가진다. 또한 '만시오'란 라틴어에서 파생하고 틴데일(Tyndale)에게서 근원하여 현대의 많은 영역 성경들이 취하는 '맨션'(mansion)이라는 표현도 있다. 그런데 이것의 중세 영어에서의 본래 뜻은 오늘날과 같이 '대저택'이 아니라 '거주지'(dwelling place)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를 '대저택'으로 확대 해석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자들은 A.D. 1세기 초에서 중반까지로 연대 추정하는(Charles, 사실이 그런지 의문이지만) 위경(偉經) '에녹의 묵시록'(Book of the Secrets of Enoch)에서 '오는 세상에 선한 자에게는 많은 저택들이(many mansions) 준비되어 있다'는 구절을 증거로 내세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나이'가 일시적 장소(stages)가 아닌 거처(abodes)로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오리겐(Origen)의 견해는 반박된다(Bernad, T.S. Berry). 하지만 이처럼 이 단어를 성경 외적인 증거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보다는 요한이 애용하며 '모나이'란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거하다'란 뜻을 지닌 '메노' 동사와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동사가 본서에서는 아버지나 예수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 속에서 거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15장을 보라). 따라서 이 표현 속에 나타나는 분명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예수가 말씀하신 '거할 곳'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라는 사실이다(Brown. Robertson). 이 사실은 예수께서 '내 아버지 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을 보아도 명백하다. 따라서 '거할 곳'은 장차 성도가 성부 ․ 성자 ․ 성령과 함께 거할 천국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앞부분에서 언급된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사실이 이어지는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강조되고 있다. ① '그렇지‥‥일렀으리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겠느냐?'(would I have told you? )라는 의미로(Brown) 만약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지 않았다면 제자들에 대해 신실하신 예수께서 이 사실을 반드시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부정적 가정법'을 사용하여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사실의 확실성과 더불어 내세에 이르기까지 예수와 제자들의 교제가 지속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표현이다(G.Beasley-hurray). ② '내가‥‥예비하러 가노니'라는 말씀을 다시 하심으로 아버지 집에 처소가 많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신다. 특히 '예비하러'에 해당하는 '헤토이마사이'라는 표현은 어떤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예비적으로 보내는 관습을 암시하는데(민 10:33; 마 26:17; 막 14:12), 예수께서 친히 이 일을 자청(自請)하심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천국의 길로 인도하는 선구자(프로드론모스, 히 6:20)이시다(Westcott, Robertson, Bruce, Spicq).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그리스도의 승천과 천국 준비와 더불어 재림이 예언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가서‥‥예비하면'이라는 문장 초두에 나오는 헬라어 '에안'을 개역 성경은 '조건'으로 해석하지만 오히려 '가서‥‥예비했을 때'(when)라는 '시간'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Brown). 즉 그리스도는 성도를 위해 처소를 예비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비하여 재림하는 그'때'는 올 것이다. 또한 '다시 와서'(팔린 에르코마이)는 현재 중간태로 쓰여 혹자는 성령의 임재와 같이 현재에도 계속 성도를 위해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본절을 이해하기도 하나(Lucke, 0lshausen) 여기서는 예언적 현재로 해석하여 분명한 미래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강조하는 구절로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일이 일어날 시기는 최후의 심판이 있는 후 영원한 천국이 시작되는 미래에 일어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시내산 사본(H)이나 바티칸 사본(B) 등과 같은 유력한 사본들은 개역성경의 번역과 같이 다소 애매한 독법을 가진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나 베자 사본(D) 등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리라'는 다소 이해하기 쉬운 독법을 취한다. 이처럼 후자가 더 매끄러운 독법을 가지지만 그러한 사실이 바로 서기관적 가필을 통한 개선(scribal improvement by adding)임을 지적해 주는 것이므로 전자에 보다 신빙성을 두는 것이 좋다(Brown). 이러한 관점에서 본절은 5절 이하에서 도마가 반문(反問)하는 것과 연결된 문맥으로 보아야할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께서는 미리 6절의 길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본절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너희는 길(즉 '내가 곧 길'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예수 자신을 가리킴)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 그 길이 인도되는지(즉 예수가 어떻게 될지 그 운명을) 모른다'. 즉 이 말씀은 6절의 교훈을 위한 예비적 언급이요, 요 13:36의 베드로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 것이다(C.H.Dodd). 한편 '알리라'에 해당하는 '오이다테'는 결여적인 완료형(defective perfect)으로서 현재의 의미로 쓰인다(Frifz Rienecke). 즉 지금까지 예수와 더불어 생활하며 교훈을 받아온 제자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더욱 예수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 - 다드(C.H.Dodd)에 의하면 토마의 이 질문은 4절과 연관해서 '주께서 가실 길, 즉 운명(destination)도 알지 못하거늘 어떻게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자신이 배신당하여 죽을 것이며 부활하여 하나님에게로 가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영적 분별력이 결여된 그는 여전히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본서에서 여섯 번째 등장하는 예수의 신적 면모를 보여 주는 '나는‥‥이다' 즉 '에고 에이미' 형식(formula)으로 이에 대해서는 요 6:35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이 같은 자기 묘사는 우둔했던 도마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와 구원의 원리, 즉 아버지 집에 이르는 과정인 구속사적 의미를 함축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길, 진리, 생명'이란 세 가지 표현 모두가 이제 곧 담당하실 십자가 수난을 통해 성취될 구속 사건과 밀접히 연결된다. 이 세 가지 묘사는 깊은 영적인 전리를 함축하므로 개별적으로 고찰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서로 연관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Brown). ① '길'과 '진리'가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된다는 견해와 더불어 히브리 사상에는 진리는 길의 형용사적 묘사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본문을 "나는 생명에 이르는 진정한 길'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Ambrose. Leothe Great, Maldonatus등). ② '길'을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견해로 진리와 생명을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고 신적인 실체(divine realities)로 보아 '나는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란 의미로 본문을 해석한다(라틴 교부들 다수, Clement of Alexander, Augustinus, Thomas Alquinas, Westcott, V.Tailor 등). ③ 오히려 '길'이 핵심적인 것으로 '진리'와 '생명'은 '길'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견해. 즉 '예수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길이 된다'는 설명이다. 4,5절에서 논의의 주제가 된 것은 '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6절 하반절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암시하기에 주석학적으로는 이 견해가 가장 바람직한 듯하다(Bengel, Weiss, Schlatter, Tillmann. Dela Potterie, Strathmann 등). 한편 헬라어 본문에서 '길 ․ 진리 ․ 생명' 앞에 정관사(헤)가 붙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 되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 기독교의 절대적 배타성은 구원의 목표 혹은 목적(goal)인 아버지께 이르는 길(the way)이 오직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행 4:12; 딤전 2:5).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예수를 통해서 만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요 1:1,14,18)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요 10:30; 17:11). 한편 5절에서 도마는 그 '길'을 모른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안다고(4절) 말씀하신 것을 본절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신다. 또한 본절에 나오는 '알았더면'(에그노케이테)이나 '보았느니라'(헤오라카테)가 모두 완료형인 것은 제자들이 이미 '길'이신 예수를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를 안 것은 동시에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또한 본절 후반부에 나오는 '그를 알았고'에서 '알았고'(기노스케테)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이제부터 계속 아버지를 알기 시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A.Robertson). 즉 본절도 본서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론적 동질성(essential equality)을 표현한 것이다.
14:8-15 성부와 하나이신 예수
앞 단락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영광스러운 재림을 예고하시는 가운데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자기 선언을 하신 것에 관하여 살펴보았다(1-7절).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그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확신하지 못하는 빌립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청에 대한 예수의 교훈이다.
빌립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자세로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던 것이다(8절). 그런데 이러한 빌립의 요구는 신성(神性)을 지닌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를 반영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일체성을 말씀하시면서(9절) 누구든지 자신을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속성, 성품, 뜻, 계획 등도 알 수 있다고 하셨다(10,11절). 다시 말해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성부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 주신 것이다(요 1:18).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이 누리게 될 특권에 대해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자신이 행한 일들을 제자들 또한 할 수 있고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12절). 물론 이런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 예수께서 보내실 보혜사 곧 '성령'을 통해서 그들이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행 1:8;2:1-13).
둘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분명한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13,14절). 즉,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또한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으로 확신한다면, 주의 일을 위해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절당하지 않고 확실한 응답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때때로 응답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결코 주님의 약속이 거짓되거나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믿음이 결여되었거나 우리가 우리의 소욕대로 잘못 구한 까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약 4:3; 요일 3:22). 그리고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15절)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만이 정녕 성령 충만하고(16절) 경건의 능력있는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는 것(딤후 3:5)임도 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아마도 이 빌립의 요구에서 '우리에게'란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는 당시 모든 제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금방 말씀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의 전제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제자들은 아마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 보였던 것 같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임재 양상인 신현(theophany)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출 24:10; 33:18; 사 40:5).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너희'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보아 본절은 전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나 구체적으로 '빌립'이란 이름과 '네'(쉬)란 대명사를 특별히 사용하신 것은 특히 빌립에게 주목하시는 끝까지 자상함을 잃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배려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예수의 동질적인 존재성에 대해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누차 강조하여 왔다(요 1:14,18; 3:33-36; 5:17,18; 6:29,38,57; 7:29; 8:16,19,28,29,42,54,55; 10:15,30,33,37,38; 12:45; 13:31 등 Hendriksen). 제자들은 벌써 3년 동안이나 예수와 함께 있으며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님(빌 2:6)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전히 영적으로 부족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빌립과 제자들에게 7절에서 하신 말씀과 거의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심으로 그들에게 예비된 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신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본절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상호 보완적인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동질성(equality)을 가지고 계심이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되고 있다. ① 존재론적 측면에서의 동질성: 성부와 성자는 독립적이며 서로 간에 구분되는 개체이시나 또한 한 신적 본체로서 서로를 나타내며(요 1:18; 10:38) 완전한 연합을 이룬다. 즉 하나님과 예수는 하나이다(요 12:30 주석 참조). 이러한 존재론적 동질성은 나아가 신적 속성들에 있어서도 일치한다. 이 속성에서의 일치에 대해서 본서는 성령도 일치한다고 증거하여(16,17,26절) 신비스러운 삼위일체(Trinity) 교리의 핵심을 모두 밝힌다. ② 사역적 측면에서의 동질성: 성자가 하시는 일과 모든 말씀이 성부의 의지와 일치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는 동등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신적 권위를 지니셨다는 근거가 된다.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10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성부와 성자 간의 동질성을 믿으라는 거듭되는 요구이다. 본서에는 예수가 하나님 되심에 대해 묘사하는 '표적'들과 그에 대한 설명들이 대부분인 바 본절에서도 이를 반복하며 강조함으로써 이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촉구하는 것이다. 한편 '나를 믿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절 '피스튜에테 모이'( )은 '에이스 + 목적격'이 뒤따르는 전형적인 경우와 달리 단순히 여격(dative)이 수반된다는 독특성을 지닌다(1절과 12절을 보라), 이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그 자신이 가치를 충분히 보증하는 '자신의 말씀'의 증거에 강조를 두며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4:21; 5:47; 10:38 참조). 한편 어떤 사본은(p7, P75. H , D, W 등) 본문에서 '나를'을 의미하는 '모이'( )를 생략하여 그 의미를 예수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10절과 11절 상반절에 나오는 예수의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믿으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본문의 문맥과 조화되는 더 나은 독법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서기관적 생략을 통한 개선(Scribal improvement by ouitting)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으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Morris). 그러므로 12절에서 예수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도 이미 성부와의 동질성에 근거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성부와 성자 간의 동질성은 이제 더욱 확대되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연합과 동역의 사상으로 나아간다(요 15:4,5; 16:11 주석 참조). 한편 '저도'에 해당하는 '카케이노스'( )는 강조 대명사로 '그 사람도 역시'라는 의미를 가져(A.Robertson)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그들이 이해했다면 성자가 하는 일을 자신들도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자신들이 연합한다는 의미이므로 제자들이 놀랄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말씀은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라는 표현이었다. 여기서 '아버지께로 감' 즉 예수의 승천이 '더 큰 일'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있었던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암시한다(16절 주석 참조). 또한 '이보다 큰 것'은 반드시 질적인 의미에서 더 큰 영적 이적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A.Robertson). 즉 성령의 강림과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복음전파 사역에 있어서(행 1:8) 제자들이 예수의 선교보다 더 확대되고 큰 능력으로(행 2:41; 4:4) 일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12절에 나오는 '이보다 큰 것'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더불어 예수의 승천 이후 예수와 교통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한 많은 이적과 폭발적인 복음 전파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 역사에서 입증되고 있다(행 1:14; 4:31; 6:6,7; 9:40,41; 10:4.9; 12:5; 13:3; 16:25-34, Hendriksen).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께서 그 일을 행하시고 우리는 다만 그의 하시는 일의 대행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편 '구하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일반적인 사본에서는 '아이테세테'와 같이 부정 과거로 쓰였으나 바티칸 사본(B)에서는 '아이테테'라는 현재형으로 쓰였다. 이것은 기도의 계속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본문을 변형한 서기관적 개선으로 보인다(Brown 참조). 또한 클레멘트의 라틴역 성경(the Clementine Valgate)과 몇몇 사본들은 '아버지께'(톤 파테라)라는 삽입구를 가지는데, 아마도 이것은 기도를 응답하시는 분이 '성자'라는 생소한 사상을 희석시키기 위한 주석적 가필(exegetical adding)로 구체적인 기도의 대상을 밝힌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부께서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동시에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신 성자께서도 기도에 응답하신다(14절을 보라). 이렇게 성자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목적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다. 이에 대해서는 요 13:31 주석을 참조하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 13절과 본절의 차이는 '내게'(메)가 추가된 것이다. 이는 기도의 대상이 성부와 더불어 성자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몇 사본들은(A,D, K) 이 단어를 뺀 독법(reading)을 취하지만 대다수의 사본들은(p66, W, B) 이 단어를 포함한 독법을 취한다. '내‥‥내'가 반복된 이러한 용법이 요한의 저서에 더 나오지 않기에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구약에서 시편이나(시 25:11), 또한 신약에서 스데반의 기도에서도(행 7:59) 이와 유사한 형태로 예수께 드리는 기도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단문을 비논리적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요 16:23 참조, A. Robertson).
내가 시행하리라. - 13절에서 이 구절은 '투토 포이에소'로서 직역하면 '내가 이것을 시행하리라'라는 뜻이었으나 본절에서는 '에고 포이에소'로서 '이것을'에 해당하는 '투토'가 생략된 대신 말하는 주체인 '예수 자신'이 강조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명백히 기도 응답의 시행자이심을 강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13,14절은 성자이신 예수가 성도들의 기도와 연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① 기도의 대상('내게'). ② 기도의 중보자('내 이름을') ③ 기도 응답의 시행자('내가 시행하리라').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기도에 관한 말씀(13,14절)과 보혜사 성령에 관한 교훈(16,17절)을 말씀하시는 중간에 '사랑'과 '계명'에 관한 본절이 등장하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하여 어떤 학자는 원래 본절이 20절과 21절 사이에 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K.Tomoi). 하지만 본절에서 사랑의 계명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오히려 문맥상 매우 중요한 교훈을 내포한다. 13-17절은 본래 믿는 자들이 행할 큰 역사(12절)에 이어 이에 대해 부연된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즉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고(13,14절)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16,17절; 눅 11:9-13 참조). 이렇게 될 수 있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들, 즉 참 제자(요 13:35)들인 것이다. 이처럼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배타적(exclusive) 계명 준수의 요구는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언약 준수 요구와 사랑과 밀접히 연결된다(N. Lohfink). 따라서 본절은 '사랑의 계명'(요 13:34,35)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진정 예수보다 큰 역사를 행할 자들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중요한 구절이다. 이러한 참 제자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지속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사랑하면'(아가파테)이 현재형으로 쓰였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이러한 계속적 사랑을 가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혹은 예수의 말씀을, 23,24절; 8:51; 15:20; 요일 2:5) 즐거이 지킬 것이다. 한편 몇몇 사본들(A.D 등)이 가지는 독법대로 '지키리라'란 표현이 명령형(테레사테)이라기보다는 미래형(데레세테)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B.L). 왜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이 현재에는 계명을 모두 지킬 능력이 없지만,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한 사랑은 계명의 준수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G.Beasley, Murray).
14:16-31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
앞 단락에서는 삼위일체 가운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관계성, 즉 아버지와 아들은 근본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8-15절). 그런데 그에 이은 본문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께서 장차 성령을 보내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즉, 주님 자신이 비록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신다 할지라도, 삼위 일체중 또 다른 하나님이신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어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16-24절). 그런데 예수께서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로 표현하신 것은 성도들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면서 마땅히 성도들의 말할 바와 행할 바를 가르치고 도와주시는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26절) 염두에 둔 것이다.
아무튼 이같이 예수의 떠나가심이 도리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큰 축복이 된다는 이 약속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위로의 말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보혜사 성령에 관한 약속은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승천하신지 얼마 후인 오순절에 성취되었는데,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완전히 변화된 제자들의 신앙과 용기, 그리고 엄청난 권능과 지혜가 바로 그들이 체험한 성령 충만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행 2:1-4).
한편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 덧붙여 성도들이 누리게 될 '평안'에 관해 교훈하셨다(25-31절). 물론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평안 역시 앞서 약속된 보혜사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본장의 첫 단락(1-7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절)고 제자들을 위로하신 바 있는 예수님께서 이제 본장의 마지막 단락인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평안을 약속하시면서 다시 한 번 '너희는 마음에 관심하지 말라'(27절)고 위로하고 계시는 까닭은 주님의 떠나가심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 그만큼 지대(至大)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자신이 떠나더라도, 결코 세상적인 평안과는 질적으로 다른 참된 평안을 제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고 다짐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 즉 그 무엇도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롬 8:35-39)으로 인한 평안을 누리게 된다면, 더 이상 주님의 떠나가심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28절).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성도가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평안을 소유하기만 하면, 그 어떤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겪더라도 능히 승리할 수 있으며, 언제나 신실한 믿음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아울러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18절) 끝까지 성령님을 통해서 위로하시고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큰 사랑을 느끼게 된다. 실로 이러한 주의 보호와 사랑이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지라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요 16:33).
14:16 내가 아버지께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시리니. - '구하겠으니'에 해당하는 '에로테소'( )는 버나드(Bernard)에 의하면 보편적으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닌 '아이테오' 동사와 구별되어 예수가 하시는 기도에 배타적으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요 1:22; 16:23에서는 예수에게 '아이테오'가 사용됨). 요한은 동의어들을 그렇게 세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자주 교차적으로 사용한다. 한편 '또다른 보혜사'에서 '또 다른'(카이 알론)이란 표현은 보혜사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중보자(Mediator)되시는 예수(13,14절) 대신에 중보자가 되실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2:1).
또한 '보혜사'에 해당하는 '파라클레토스'는 '곁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파라'( )와 '부르다'라는 뜻의 '칼레오'에서 파생한 '클레토스'의 합성어로서 세속 헬라어에서는 '변호자' '대언자'라는 의미로 쓰였다(A.Robertson). 신약에서는 롬 8:26-34에 그 의미가 나타나는 것 외에는 요한에 의해서만 이 말이 쓰인다. 한편 '보혜사'(保惠師)라는 개역성경의 번역은 '보호하고 은혜 주시며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이 한국 교회에 익숙한 것은 틀림없으며 성령에 관한 폭넓은 명칭으로서 의의는 있을지 몰라도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살린 표현은 아니다. 이 표현은 원어의 의미를 살려 '보호자', '변호자',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현대인의 성경 난하주)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한편 이에 대해서는 요 15:16의 주석과 본장 자료노트'보혜사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리고 '영원토록'(에이스 토 아이오나)에 대해서는 4:14 주석과 마 28:20 주석을 참조하라.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 본절의 '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의 경우, 헬라어에서는 소유격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 해석이 문제가 된다. 즉 이를 주격의 의미로 보면 '진리의 영'이 '진리가 되신 영'으로 해석되어 성령이 진리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이를 원래 소유격의 의미로 해석하면 '진리란 성격을 지니신 영'으로 해석되어 성령의 진실된 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이 주격의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드물고 성령과 진리가 동격으로 표현된 예가 있긴 하지만(요일 5:7 '성령은 진리니라') 여기에서 소유격은 요한에게 있어 거의 그렇듯이 목적격적인 의미를 지님이 거의 확실하다(Brown). 즉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요(요 16:13) 혹은 진리를 증거하고 밝히시는(요 15:26,27) 영이다(Morris, Bernard, Barrets). 한편 혹자는 진리를 증거하는 영, 즉 보혜사(16절)는 진리 자체이신 예수(6절)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나(Johnson) 본절의 문맥에서는(16,17절) 성령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을 대체(replace)한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즉 오실 보혜사는 이제 진리이신 예수 대신에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는 진리의 영'이신 것이다(요 15:26 주석 참조).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빛'이신 예수를 깨닫지 못하던 어두움인(요 1:5,10) 세상이 예수가 보내신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① 영적 통찰력이 없고(우 데오레이, '보지 못하고') ② 영적 지식도 없으며(우데 기노스케이, '알지도 못함') ③ 영적 분별력도 없고(고전 2:12-14)로 ④ 성령을 인정하지도 않기(마 12:22-27; 행 2:1-12)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를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제자들은(7-11절) 그와 동격이신 성령도 당연히 안다. 한편 16절과 본절에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 세 번 사용되는데, 그 시제와 전치사 사용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① '너희와 함께 계시게'(메드 휘몬, 16절) ② '너희 옆에 거하심'(파르 휘몬, 17절) ③ '너희 안에 계실 것'(엔 휘몬, 17절). 여기서 ①의 경우는 '같이'란 의미가 강한 '메타'( )가 사용되어 성령과 성도간의 교제를(9,15,27절), ②의 경우는 '함께'란 의미가 강한 '파라'가 사용되어 성도에 대한 성령의 인격적 임재를(23절; 요 8:38), 그리고 ③의 경우는 '속에'란 의미가 강한 '엔'이 사용되어 성령의 내재란 의미를(10절) 보다 강조한다(Westcott).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사한 의미의 전치사를 각각 다르게 사용하는 것은 요한이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피한 강조적 용법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③ 항이 미래시제로 표현된 것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본서 저자 요한의 관점에서는 부활 후 예수께서 '성령을 주신' 사건. 20:22 주석 참조)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①,②의 현재형도 미래적 성령 강림의 확실성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예언적 현재형 표현으로 볼 수 있다(3절의 '다시 와서'에 관한 주석 참조).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고아와 같이'에 해당하는 '오르파누스'는 요 13:33에서 제자들이 '소자들아'(테크니아)라고 불리운 것을 상기시킨다. 유대에서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여겨졌으므로 제자들은 스승이 죽었을 때 '고아'라고 불리웠다. 이는 헬라의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역시 그 제자들을 '고아'라고 불리워지도록 했다는 점과도 일맥상통 한다(Brown). 예수께서 이러한 배경과 연관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는 의문이지만 중요한 것은 유대 사회에서 과부와 더불어 가장 불쌍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분되었던 보호자를 상실한 고아가 되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한편 '오리라'에 해당하는 '에르코마이'는 역시 3절과 같이 분명한 미래를 의미하는 현재형으로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모두 표현하는 이중 암시적 용법으로 쓰였다(28절 주석 참조).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부모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이 큰 힘이 된다.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이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 '조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 미크론'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임박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의미하지만 20절의 표현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 그리스도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 이전까지, 즉 종말론적 중간시기(eschatological interim)로 볼 수도 있다(Brown). 이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안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나 불신자들은 영적 어두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망각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나 성령을 보지 못하는(본절, 17절)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휘메이스', 즉 '너희'란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었음) 예수를 본다. 이 표현 역시 1차적으로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신약 시대에 계속될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속사역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주의 재림 시 영광 가운데서 예수를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는 내가‥‥살겠음이라'에 대해서는 요 6:57과 요 16:16 주석을 참조하라.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그날'(에케이네 테 헤메라)이란 종말론적 완성의 날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야 임재를 나타내는 '주의 날'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본서에서 '마지막 날'(요 6:39,40,44,54)이라는 표현과 거의 의미 차이 없이 쓰였을 것이다(요 16:23,26 주석 참조). 역시 본절에서는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새로운 교회 시대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될 종말의 날을 가리킨다. 이 날이 이르면 성부와 성자 간의 본질적 일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믿음을 통한 영적 인격적 연합에 대한 신비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 교리 구원론 부분을 참조하라. 또한 성부와 성자 간의 연합과 성자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는 요 17:21 주석을 참조하며 아울러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관계를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묘사하는 밀접성에 대해 요 10:11,14; 15:5 주석을 참조하라.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리니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15절에서는 사랑이 전제가 되어 계명을 지킬 때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할(12절) 자의 자격을 얻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이 본절에서도 성령의 임재와 나아가 종말론적 부활에 참여할(16-20절) 자의 자격이 제시된다. 그러나 문장의 구조는 15절과 반대로 나타나서 '사랑하면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과 비교되어 '계명을 지켜야 사랑하는 자'라고 기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의미상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단어나 문장을 피하는 것이 요한적 문체(Johannine Style)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요'가 미래 시제라고 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만 온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조건적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해 본서는 일관되게 강조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13:34; 15:9 참조, 롬 8:28-30). 한편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묘사하는 '나타내리라'에 해당하는 '엠파니소' 또한 부활 후에 육체적 현시와 아울러 최후의 심판시의 신적 현현(theophany)을 동시에 표현한다.
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 본서 저자 요한은 본절의 유다가 가룟 유다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가룟 유다에 대한 혐오가 있었음을 암시한다(요 13:30). 뿐만 아니라 이름 앞에 이렇게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유다'라는 이름이 유대인들에게 흔하기 때문이다(마 13:55; 수의 형제, 눅 3:30; 예수의 조상 중 1인, 행 5:37; 반란자, 행 9:11; 다메섹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자 등). 한편 본절의 유다는 '다대오'라고 불리운(마 10:3; 막 3:1 또 야고보의 아들을(눅 6:16; 행 1:13) 말한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 아마도 유다는 21절의 '나타내리라'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능력적으로(예를 들면 정치적 메시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오해했던 듯하다(Hendriksen, Robertson, Morris). 이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예수께서는 이것에 관해 말씀을 더 부연하신다.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 15절,21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즉 한마디로 이 말씀은 진정한 '제자' 혹은 '성도'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요 13:35 주석 참조).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21절의 말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볼 수 있는 자들이 아버지께 사랑받는 제자들이듯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과 교제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배타적 축복이다. 이 영적인 연합은 '거처'(모넨, 2절 주석 참조)라는 단어가 영속적인 거주지를 의미한다고 해서 천국에서의 미래적인 거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6,17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내주(內住)와 연결하여 현재적 임재와 영적 교제로서의 의미 또한 강력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와서'(엘류소메다)에서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아버지와 예수', 나아가 '성령'까지도 성도와 교류의 대상이 됨을 보여 준다. 한편 '저에게 와서'에서 '저에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아우톤'에서 '프로스'란 전치사는 요 1:1에서 하나님과 '함께'를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어 성부와 성자간의 밀접한 교제 관계 즉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한 상황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 요한의 특징적 표현이다(요 1:1 주석 참조). 이처럼 삼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신다. 또한 이어 나오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거처하심을 묘사하는 '저와 함께'는 17절에서 성령의 거주하심에 사용된 '저와 함께'(파르 아우토)라는 표현의 반복으로서 사탄의 세력이 넘볼 수 없는 확고한 밀착 관계를 보여 준다.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말을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앞부분에서는 계속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계명 준수가 제자됨의 요건임을 반복하여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적 서술을 통해 제자됨의 의미를 강조적으로 보여 주시려는 예수의 의도가 나타난다. 즉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당연히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데. 이것은 제자의 요건과 정반대된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15,21절 주석 참조). 이 제자가 아닌 자들의 심각한 영적 상태는 불순종의 지속이란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사랑하지'와 '지키지'가 모두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사랑과 계명 준수가 항상 행하여져야 함을 보여 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아울러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을 거부하는 것이 결국 삼위 가운데 하나이신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다시 한 번 성자와 성부의 동등되심을 증거하신다(요 7:6 주석 참조).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실 시점이 매우 임박해 있지만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더 지체하기를 원하시는 뉘앙스(nuance)를 가진다. 이와 더불어 '이 말(들)'(타우타)은 이 밤에 하신 말씀들(13장 이하) 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제자들에 대한 진리의 가르침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실 보혜사 성령의 사역은 예수께서 3년 동안 가르치신 모든 것보다 더 큰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즉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부과된 증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Hendriksen) 필요한 '모든 것들(판타)을 가르치실 것이다. 따라서 지금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들을 그때에는 모두 알게 될 것이다(요 2:22; 7:39; 12:16. 참조). 한편 성령을 가리키는 '그가'(에케이노스)는 강조 지시대명사로서 성자 예수에 뒤이어 활동하실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또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란 표현은 16절에서와 같이 성령을 위해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이고, 반면 요 15:26의 '내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보낼 자'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성령의 발출자(發出者)이심을 증거한다(행 2:33). 즉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부와 성자를 말미암아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성령 사역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기원한다. 따라서 1648년 공표(公表)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大小要理問答)의 '삼위일체' 항목에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Chapter ll. 3)는 영원 발출설(eternal procession)을 표명한다. 요 15:26 주석을 참조하라.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예수께서 떠나실 것과 제자들 가운데서 배반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실 때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은(1절 주석 참조) 아마도 아직 그 두려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러한 분위기를 고려하여 위로하실 필요가 있었다(요 20:9,21,26 주석 참조). 한편 '평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로서 구약시대에 문안이나 작별 인사로 사용했던(삼상 25:6,35) 히브리어 '샬롬'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러한 히브리적 개념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나 불화가 없는 소극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성취된 집단이나 개인의 안녕과 복지를 가리키는 적극적인 사고나 행동이 수반되는 평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나의 평안'(혹은 요 16:33에서와 같이 '내 안에서의 평안', '엔 에모이 에이레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만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눅 2:14; 19:38) 가장 근원적이고도 항구적인 평화, 즉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므로써 얻어지는 영육 간의 축복을 가리킨다(눅 6:33 주석 참조).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 예수께서는 승천과 재림의 사실을 다시 한 번 반복하심으로 그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3,18절; 요 7:33 주석 참조).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 '사랑하였더면'에 해당하는 '에가파테'는 미완료과거로서 '계속해서 사랑해 왔다면'이라는 현재의 상태에 대한 다소 부정적 의미를 함축함으로써(A. Robertson) 제자들이 스승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Bernard). 만약 제자들이 예수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고 영적 메시야로 사랑했더라면 그의 말씀을 지키며(15절 주석 참조) 이해하려고 애썼을 것이고 오히려 구속사적 섭리에 따라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보혜사 성령이 임재하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이 구절은 단순히 예수가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Arianism)나 삼위일체 교리를 배격하고 성부만이 유일한 하나님되심을 주장하는 유니테리언파(Unitarianism)의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본서에서 강조하는 예수의 신성의 두 측면은 ① 존재론적 동질성(essential equality, 요 10:30)과 ② 기능론적 종속성(functional surbodination)인데, 본절은 바로 후자를 대표적으로 증거해 주는 구절이다. 즉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니라 육신을 입으신 성자의 입장에서의 삼위일체적 서열의 차이를 본절은 보여 주는 것이다(빌 2:6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신론 중 '삼위일체의 진술과 변증'을 참조하라.
14: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 당장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장차 구속사적 섭리를 이해하게 하기 위한 예수의 자상한 배려이다(요 13:19 주석 참조).
14: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 이미 수난의 시간이 임박해 왔으며 말씀하셨던 앞으로 있을 성령의 사역(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26절)을 기대하시기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을 심문하던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앞에서는 물론 십자가에 달렸을 때조차도 별로 말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고난을 순순히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이 세상 임금'에 대해서는 요 12:31 주석 참조. 구체적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계된 사람들의 모욕적인 행위를 통해 가시화(可視化)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께 궁극적으로는 그 힘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요 17:11; 18:36), 이 사실은 예수께서 이 세상의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입증된다(히 4:15). 하지만 예수께서는 세상에 대한 예정된 사명이 있으셨다. 그래서 그는 검과 몽치(눅 22:52), 홰와 병기(요 18:3)를 들고 죄인을 잡듯이 다가온 자들에게 순수히 체포당하셨고 그 세상 앞에 몇 가지 사실을 입증하신 것이다(31절).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다. - 관계할 것이 없는 세상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하신 예수의 행동은(요 18:1-11, 특히 11절을 보라) 생명을 스스로 내어 주어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발적인 의지에 기인한다(요 10:11,18). 따라서 이 구절이 다음에 나오는 '여기를 떠나자'의 이유를 제시한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적고 30절에 나타난 세상 임금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Brown),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임과(요 3:16)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본서가 자주 언급하지만(요 3:35; 5:20) 아버지에 대한 성자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기는 이곳이 처음이고 유일하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이어지는 15,16장에는 그리스도의 강화가 계속되며 또한 17장에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나온다. 따라서 혹자들은 이 표현이 '일어나라 상에서 떠나자'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여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해 가는 것을 묘사하거나 혹은 본문이 본래 이 위치에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취하기도 한다(T. Nicklin). 또한 14-16장을 다락방에서 행해진 강화로 보고 긴 다락방 강화에서 내용과 형식상 문단을 구분하는 주의 집중적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본절이 첫 번째 구분이고 두 번째는 요 16:33이라고 봄),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즉시 다락방을 떠났으며(Hoskyns, Dodd) 나머지 이야기와 기도(15-17장)는 겟세마네로 가는 길에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A. Robertson). 그러나 절충적인 생각으로 이 말씀 후 예수께서 떠나신 것은 분명하지만 나머지 말씀들은 시간적으로 먼저 말씀하신 것이거나 '떠나자'고 하신 후 떠나기 전까지 말씀하셨다는 주장도 있다(Hendriksen), 이 모든 설명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나 예수께서 다락방에서 지금까지의 마지막 위로를 마치시고 겟세마네를 향해 출발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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