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장 자유의 절제에 대한 바울의 모범과 절제하는 자의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7:1-16:4까지 이어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설립자요 사도인 바울에게 당시 고린도 교회의 현안 문제로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도록 요청한
여러 사안에 대하여 바울이 그와 관련된 신학적 원리와 실천 방안을 각각 답변한 내용을 보도한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본장은 좁게는 8:1-11:1까지 계속되는 일련기사, 곧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가 제기된 것을 기회로 그에 대해서는 물론 그와 같은 소위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 제반에 대하여 성도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를 교훈한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본서 기록 당시인 대략 A.D. 55년경의 고린도시는 헬레니즘(Hellenisim) 문화에 깊이 물든 항구 도시요 상업 도시로서 그리스-로마의 각종 전래 우상이나 기타 밀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귀신 숭배 행위가 극성하고 있었다. 특히 고기나 특정 음식은 비록 의례적으로나마 일단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다음 시장 등에서 거래되곤 하였기 때문에 성도들은 부득불 이런 음식의 식사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8:1-11:1까지의 일련기사는 전체가 일종의 소논문식으로 바로 이러한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를 실례로 한 아디아포라 문제에 대한 성도의 기본 자세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포함된 각 문단은 그 개별적 의미보다는 전체 주제와의 관련하에서 갖는 논리적 일관성이 더욱 중요한 바 본 개관에서는 먼저 이 일련기사 전체의 내용 전개 요약과 그 전반적 의의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각 문단의 세부적 의의와 문맥 파악은 강해주석란의 해당 문단강해를 참조하기로 한다.
먼저 8:1-8은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가 제기된 것에 대하여, 이 문제는 그 자체가 절대적 선도 악도 아니나 다만 이에 임하는 자의 판단에 따라 결과적으로 선과 악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위 아디아포라 문제의 하나임을 규명한 것이다. 다음 8:9-13은 아디아포라 문제인 우상 제물의 식사에 대하여, 모든 아디아포라 문제를 대하는 성도의 기본 자세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지식이 강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성도는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아는 자가 자신보다 지식이 약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거리낌을 갖고 있는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기 전에 절제와 양보를 행하라는 결론을 일단 제시하고 있다.
이에 이어지는 제 9장은 전반적으로 바을 자신의 생활을 자유의 절제의 산 모범으로 제시하며 모든 성도들의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보다 세분하자면 9:1-14은 자유의 절제에 대해서 보인 바울의 모범 자체를, 9:15-23은 바울이 자신을 절제하여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수준에 맞추는 것은 약한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확신시켜 주려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자유의 절제의 목적을 보여 준다. 그리고 9:24-27은 그렇게 절제하는 자가 분명히 천국 구원과 상급을 얻을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모든 성도에게 자발적으로 자유를 절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10:1-13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은면서도 교만하여 우상 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함, 하나님을 원망함 등의 죄를 자행하다 거듐 심판당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함으로써 신약 성도들도 교만한 마음으로 자유를 남용하지 말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즉 이 단락은 앞서 직접적으로 자유를 절제하라고 말한 후에 이어서 자유를 절제할 줄 몰랐던 이스라엘의 패망의 역사를 회고시킴으로써 자유의 절제의 필요성을.간접적으로 역설한 것이라 하겠다. 다음 10:14-22은 이제 다시금 시각을 아디아포라 문제 젼반에 대한 자세에서 고린도 교회 내에서 당장 제기된 구체적 현안 문제인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로 좁힌다. 그리하여 만약 성도가 자신의 자유만 과신한 나머지 본 사안을 소흘히 다룬다면 은연중에 우상 숭배에 빠질 위험이 있는 바, 이에 우상 숭배 자체는 절대적으로 심각한 범죄임을 새삼 지적하며 본 사안에 임하는 성도들의 주의를 새로이 환기시키고 있다. 끝으로 10:23-11:1은 이상에서 밝힌 논리적 근거와 바을 자신의 모범에 따라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는 앞서 8:9-13에서 일단 밝힌 1차적 결론에 비해서 이제 이에 대한 제반 사항을 고려한 뒤에 최종적으로 주어진 결론으로서 보다 명료하고 세부적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먼저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 자채가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니므로 굳이 어떤 음식을 대하든 우상 제물의 여부를 굳이 가리지 말고 먹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어느 음식이 우상 제물임을 알게 된 후에는 비록 이를 먹는 것이 선악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여도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에 대하여 확고한 확신이 서 있지 않은 자신보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으로 전개된 우상 제물의 식사 문재를 중심으로 한 아디아포라 문제 재반에 대한 바울의 권면의 요지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모든 아디아포라 문제는 그 자체가 직접 선악과 관련이 없는 바 그 문재 자체에 대하여 성도는 자유하며 또한 그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갖는가 하는 것은 성도 각자의 판단과 책임 하에 위임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성도 모두는 이 문재에 대한 이견 때문에 상대방을 매도하거나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받을 필요는 절대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성도 각자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의 자유와 유익을 내세우기 보다는 자신보다 믿음이 약한 자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 공동체 전체의 건덕(健德)과 화평을 위하여 절제의 원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샛계. 이상의 두 원칙을 전제한 상태에서 각 아디아포라 문제들의 독특한 성격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관련된 성경의 여러 말씀에 나타난 교훈을 취합하여, 최대한 성경의 전반적 원리가 수렴된 선한 결론을 도출하여 되도록 전성도가 이를 함께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교훈 전반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직결된 문제 이외의 모든 영역에서 성도는 절대적으로 자유하다는 성도의 구속사적 특권을 먼저 확인한다. 아울러 그럼에도 성도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럼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이 성도의 삶으로서 최대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 되고자 애써야 한다는 성도로서의 구속사적 의무도 또한 확인케 되는 것이다.
외울 말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자유의 절제에 대한 바울의 모범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자유를 제한하고 사도직을 행하는 바울의 궁극적 목적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절제하는 성도의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9:16,27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12대 각오
1.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생명 마저도 아끼지 알을 것임(행 20:24)
2. 예수와 그의 십자가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 하지 알을 것임(고전 2:2)
3. 복음 전막 사역을 마땅한 일로 알고 결코 자랑치 않을 것임(고전 9:16)
4.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킬 것임(고전 9:27)
5. 모든 일에 자기 유익이 아닌 맡은 사람의 유익을 구할 것임(고전 10:7)
6. 복음이 주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한 핍박도 감수할 것임(고후 4:9)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자랑치 않을 것임(갈 6:14)
8.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예수의 존귀함을 드러낼 것임(빌 1:20)
9.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는 목숨 마저도 돌아보지 않고 힘쓸 것임(빌 2:30)
10.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 버려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임(빌 3:8)
11.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상급을 위한 경주에 최선을 다할 것임(빌 3:14)
12.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것임(빌 4:11)
주요 주제-9:1,2 바울의 사도권 변호 이해
고후 11장 자료노트 참조
인물 연구-9:5, 베드로
벧전 2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9:18-21 구속사적 관점에서 연결되는 복음과 율법의 이해
갈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난제 해설-9:27 버림받음을 두려워하는 바울
1. 문제 제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로서 자기 몸을 쳐 복종하는 이유를 밝힘에 있어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라'고 줬다. 이러한 본문은 이미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 자가 또다시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만약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어 한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다시 구원에서 탈락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근거한 예정(豫定)은 어떠한 요인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여정의 불변성의 교리(롬 8:29,30; 딤후 2:29)와 모순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는 성화(聖化)의 파정애서 일시적 방황은 있을 수 있으나 은혀의 상태가 끝까지 유지되어 결국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성도의 견인(堅認)에 관한 교리와도 정면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2. 문멸 해결
본문은 위에서 저기 한 문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즉 본문과 같이 말한 사도 바울의 의도만 바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본문의 교훈을 준 이유를 아리와 같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① 성도의 방종에 대한 경고: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가 자기 몸을 쳐서 주의 복음에 복종케하지 않으면 이미 받은 구원도 잃어버릴 수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며 비록 구원에서 완전 탈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한 것으로 이는 성도의 방종(放縱)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택한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구원 섭리에 의해 반드시 복음을 믿고 구원에로 나아가게 된다(요 10:28,29; 롬 8:35-7).
그러나 이는 이미 복음을 믿은 성도라 하여 방종하고 어떠한 죄를 범해도 상관없다는 말은 아니다. 성도는 반드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여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聖化)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엡 4:13). 그렇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은 비록 사랑하는 자기 아들일지라도 채쩍으로 때리는 것처럼 징계하시는
것이다(히 12:4-13). 이에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렬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교훈을 주기도 한 것이다.
② 성도의 행함의 중요성 강조:
본문에서 바울은 사역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스스로 복음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말은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헹함으로 얻을 수 있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와 상반된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야고보서 기자가 언급한 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한 사실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참 믿음을 가진 성도(聖徒)라면 반드시 이에 합당한 행함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복음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에게 참 믿음이 있다 하기 어렵고 또 믿음이 없는 자라면 그가 아무리 입술로 복음을 많이 전파한다 할지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3. 의의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비록 우리가 이미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속의 은혜를 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방종할 경우에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준엄한 교훈을 얻게 된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은 자신의 믿음이 행함으로 올바로 나타나고 있는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과연 우리가 가진 믿음이 올바른 믿음인지 점검해 보는 계기를 삼아야 된다.
인물 연구-9:6, 바나바
행 15장 자료노트 참조
원여 연구-9:23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여기에 쓰인 혈라어 원문은 '슁코이노노스 아우투 게노마이'( )이다.
여기에서 동사 '게노마이'의 원형은 '되다'라는 뜻의 '기노마이'( )이다. '아우투'는 인칭 대명사 '아우토스'( )의 중성 소유격으로서 '그것의'라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앞문장의 '복음'(토 유앙겔리온 )을 가리킨다. 한편 '슁코이노노스'는 '함께'라는 뜻의 접두어 '쉰'( )과 '코이노노스'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쉰'은 '코이노노스'의 의미를 강조해 준다. '코이노노스'는 '함께 나누다‥‥‥에 한 몫 끼다'라는 뜻의 동사 '코이노네오'( )에서 파생된 것으로 '친구', '동료'라는 일차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교제'라는 뜻의 '코이노니아'( )도 역시 같은 어군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것(복음)의 친구가 되다(또는 동역자가 되다)'가 된다. 이것은 바을 자신이 복음과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 즉 그가 전심전력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다른 맡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그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신령한 축복들을 누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에게 전도자로서 근원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교훈해 준다.
보감-9:24-27 삶의 경주에서 성도가 명심해야 할 것들
1. 뒤를 돌아다 보지 않음(눅 9:62)
2. 모든 일에 절제함(고전 9:25)
3. 자신부터 쳐서 이겨야 함(고전 9:27)
4. 항상 깨어 있음(고전 15:34)
5. 잘못을 범하지 않음(고전 15:34)
6. 낙심하지 않음(갈 6:9)
7. 노력을 늦추지 않음(빌 3:14)
8. 끝까지 달려감(히 3:14)
9. 뒤로 물러가지 않음(히 10:38,39)
10 분명한 목표를 향해 달려감(히 12:2)
풍습-9:24-27 초대 교회 시대의 운동 경기들
갈 5장 자료노트 참조
9:1-14 자유의 절제에 대한 바울의 모범
우상의 제물 식사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해 설명하면서 책임 의식과 절제를 강조한(8:1-13) 바울은 이제 본장에서는 자신의 생활을 자유의 절제의 산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동참을 촉구한다. 즉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이웃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아야 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바을 자신이 먼저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자신의 모범을 따르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언제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온갖 율법적 의무를 부과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아무것도 행치 않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마 23:3,4) 자신이 항상 그러한 삶을 살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바울이 다른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자신의 모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4:16; 11:1; 빌 3:17; 살후 3:7,9).
특히 본문에서는 자신이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그 권리를 사용치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절제의 원리에 근거함을 피력한다. 즉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로서 마땅히 교회의 물질적 후원을 받을 권한을 갖고 있으며 베드로와 같은 다른 사도들처럼 결혼해서 아내와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권리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량으로 복음 사역을 했음을 설명한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한 채 독신으로 지내면서 더구나 스스로 노동을 통해 자비량 선교에 힘쓰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12절). 바울은 물질적 원조를 받으며 사역할 때 있을 수 있는 오해, 즉 복음이 혹시나 바을 자신의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오해되어 믿음이 연약한 자들 가운데 혹시 시험에 드는 자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자신의 사도적 권한과 인간적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울의 모범과 같이 진정 성도들은 다른 사람보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스스로의 개인적 권리를 절제할 뿐 아니라 유보할 줄도 아는 태도를 소유해야 된다.
9:1 바울은 고전 8장에서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이어 본장에서는 자유를 포기한 자신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월등한 자유와 권리를 지니고 있지만 믿음의 형제들의 유익을 위하여 포기해 왔으며 또 포기한다는 것이 본장에서 다루는 주요 내용이다. 한편 바울은 자신에게는 자유와 권리가 있으나 사용하지 않았음을 설명 하기 위해 본절에서 먼저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중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제외한 나머지 세 질문은 모두 사도권과 관련된 질문이다. 이제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 여기서 '자유자'란 노예에 상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즉 여기서 자유란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고전 8:9), 곧 율법과 우상 제물과 같은 무지에서의 자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결국 바울이 이 질문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자신은 자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가 아니냐‥‥너희가 아니냐. - 바울은 자신의 권리가 그 누구보다도 월등하고 뛰어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도성을 제시하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은 일반 자유자가 갖는 권리 이외에 사도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마 1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 전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한편 바울은 여기서 그의 사도성을 증거하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들고 있다. 첫째는 우리 주 예수를 보았다는 것이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체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행 9:1-19; 고전 15:8). 이것은 평범한 회심이 아니며 남들이 전혀 모르는 주관적인 경험도 아니었다. 이 체험은 바울을 이방 세계에로의 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신 객관적인 것이었다. 특별히 바울은 '예수'라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명칭을 굳이 언급함으로 자신의 체험의 객관성과 실제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튼 바울은 비록 12사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도직을 부여받았지만 사도직의 절대 필요 조건인(행 1:22) 예수의 삶과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언자들이 알고 있었던 동일한 예수를 보았고 그의 음성을 들었다. 따라서 바울의 주장대로 그의 사도성은 부인할 수 없다. 사도의 자격 조건에 대해서는 마 102-4주석을 참조하라. 둘째는 고린도 교회가 그의 사도직의 열매라는 것이다. 첫 번째 사실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증거에서 어느 정도 주관성을 띠고 있다면, 이는 분명한 객관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직 수행의 결실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자녀들이었다(고전 3:1-9). 특히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의 길을 걷게 되고 계속 그길을 가고자 하는 사실은 바울의 사도성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만일 바울이 아무리 수고를 한다해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없다면 결코 그 열매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바울의 사도권 변호에 대해서는 고후 11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9: 다른 사람들에게는‥‥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분명히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는 베드로와 아볼로와 바울을 비교하였고, 바울을 추종하는 자들의 반대파였던 자들은 바울이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을 것이다(고전 1:12-17). 그러나 비록 다른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고린도 교인들 만큼은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인침과 같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기서 '인친 것'(스프라기스)은 소유권이나 진위 여부를 표시하기 위한 표식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세례가 회개에 대한 인(印)인 것처럼(엡 4:30), 고린도 교인들의 회심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인(印)이었던 것이다(Hodge).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다면 그들의 믿는 믿음까지도 부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결국 고린도 교회의 현실적 존재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가시적 표징이 되었다.
9:3 힐문하는 자들. - 바울이 사도권을 주장하게 된(1,2절) 배경이 되는 구절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몇 개의 당파가 나뉘어져 있었는데(고전 1:12), 각각의 당파에서는 상대 당파의 지도자에 대한 자격 여부를 가지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철문하였다. 바울에 대해서는 특히 그 비난하는 농도가 짙었는데, 그것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조건이 틀리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먼저 자신의 사도직이 다른 사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밝히고(1,2절), 이어 계속해서 그들과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 본구절은 앞의 두 절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견해(Alford, Bengel, Findlay)와 뒤이어 나오는 내용을 가리킨다는 견해 (Grotius, Chrysostom)가 있다.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내용은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사도성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사도성이 입증된 이후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말이기 때문이다(Hodge, Morris). 즉 바울은 지금 너희가 나의 사도성에 대한 증거이니 이를 위한 더 이상의 분명한 변명이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9:4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다른 사도들과는 조건이 다르다는 이뀨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바울이 그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그가 사도가 아닌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큰 오해였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도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순전한 봉사와 복음 전파에 장애가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숭고한 정신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 이하에서는 이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를 시정시켜 주고 있다.
우리가. - 6절로 미루어 보아 본절의 '우리'란 바울 자신과 바나바를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이것은 교회의 경비로 부양받을 권리를 지칭하는 것이지 인간 모두가 지닌 생명을 이어 나가기 위한 본질적인 권한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주의 특별한 종들이 그들이 목회를 행한 회중들에게서 그들의 생활을 부양받을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눅 10:7,8). 그런데 바울이 이 권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선교 활동을 행한 교회로부터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스스로 노동을 통하여 자급한 것(고전 4:12)에 연유한다. 즉 바울이 자급 전도한 것을 두고 고린도 교회 일각에서는 바울이 부양받을 권리가 없는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는데, 본절은 이에 대해 변명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많은 봉사를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절은 음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다룬 고전 8장의 내용과 연결시켜 자신이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고전 8:13)은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그 권리를 포
기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Barrett).
9:5 다른 사도들과‥‥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 본구절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결혼에 대한 권리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을 자신도 다른 사도들과 동일하게 결혼할 자유와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사역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으며, 또한 아내로 하여금 교회의 부양을 받게 할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자매된 아내'를 사도를 따르며 재정적 뒷받침을 해 온 여인들로 본다(Tertullian). 그러나 본구절의 내용이 결혼에 관한 것이므로 '자매'라는 표현은 '기독교인 아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무튼 바울은 자기에게도 결혼할 수 있는 권리와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사역할 권리가 있음을 다른 사도들과 주님의 형제들 그리고 게바를 언급하며 비교하고 있다. 특별히 '다른 사도들' 안에 게바가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게바를 재차 언급하고 있는데 이처럼 '게바'를 다시 언급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게바는 사도들 중에 지도적 위치에 속하였는데 그의 결흔한 사실(막 1:30)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며 고린도 교회에도 게바파가 형성될 만큼 그가 대내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어 바울이 비교하기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Hodge), 게바에 대해서는 벧전 2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9:6 일하지 아니할 권. - 이것은 '생계를 위한'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가리키는데, 사도들은 다른 노동을 하지 않고 교회를 통하여 부양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 스스로 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는데(고전 4:12),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 때문에 바울을 다른 사도들과 다른 위치의 인물로 평가 절하하였던 것이다. 4절 주석 참조. 바울은 본구절에서 원칙적으로 다른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부양받는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은 교회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자신에게도 주어져 있는 '일하지 아니할 권'을 포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도로서 일하지 않고 교회로 부양받을 권을 포기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것이 보다 숭고한 봉사의 정신에서 기인한 것 이요 결코 교회 의 부양을 받을 권리 가 없어서가 아님을 설명하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바나바를 자신과 함께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바나바가 고린도 교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로 인정되었음을 암시한다(Barrett).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할 때 바나바와 혜어졌는데(행 15:39) 바나바가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알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자급 전도한 사실을 고린도 교회가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바나바에 대해서는 행 11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9:7 누가 자비량하고‥‥먹지 않겠느냐. - 본구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의 실생활과 관련된 사실을 예로하여 사도적 권리를 진술하고 있다. 즉 바울은 모든 사도들이 주의 복음 전파에 전념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교회로부터 받을 권한이 있음을 비유를 통하여 말하는 것이다. 첫번째 실례는 병사의 경우인데, 그 어느 병사도 자신의 비용으로 병사 노릇을 하지 않으며, 병사가 국가나 그가 속해 있는 조직으로부터 무기, 식량 등 모든 것을 공급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다. 두번째 실례는 포도원 주인의 경우인데, 포도나무를 심는 자가 포도 실과를 먹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심는 것이 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포도나무를 심는 자나 가꾸는 자는 그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포도나무를 통하여 얻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세번째 실례는 목자의 경우인데, 목자가 양이나 염소들로부터 젖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다. 결국 바울의 논지의 요점은 실로 영적인 군사요(딤후 2:3,4), 농부요(고전 3:6), 목자인(요 21:15) 복음 전파자들이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9:8 내가‥‥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 앞의 구절에서 열거한 실례들에 대한 보충적 발언을 말하려고 하는 의도이다. 즉 앞서 말한 세 가지 사실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실례들이지만, 이것들이 주는 교훈, 즉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사실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율법'이란 표현은 특별히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울은 자신의 진술이 인간적인 상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것으로 매우 정당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9:9 모세 율법에‥‥기록하였으니. - 바울은 자신의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모세의 율법의 내용, 즉 신 25:4의 말씀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이 인용구는 평상시에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 놓지만 일할 때에는 망을 벗겨서 일을 하면서 곡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신 25:4 주석 참조. 이러한 내용은 하찮은 짐승에게도 그 수고의 대가를 받을 수 있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는 일하는 자는 그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Pfitzner).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염려하심이냐. - 이는 하나님이 소를 염려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새 한 마리에도 관심을 보이신다(욥 38:41; 마 6:26). 바울은 다만 신 25:4에는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일하는 짐승이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듯 인간들은 당연히 일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Hodge).
9:10 전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판토스'( )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확실히', '분명히'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신 25:4의 말씀은 오직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여‥‥기록된 것이니. - 율법은 분명히 비이성적 존재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들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와 같이 신 25:4의 규정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특히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들의 필요를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이다(Calvin). 즉 하나님은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충실할 수 있도록 반드시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하여 소를 비유로 하여 규정하신 것이다.
밭 가는 자는‥‥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 소가 밭을 갈고 곡식을 떠는 작업을 할 때에도 그 응분의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는데 하물며 농부에게는 그 권리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농부들이 일의 대가에 대한 소망을 지닌 것은 자명하다는 진리를 토대로 바울은 본구절에서 일하는 사람(분명히 사도들도 포함되어 있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보수를 받을 소망과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다(Barrett). 결론적으로 교회의 일꾼인 사도들은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9:11 영적인 것을 뿌렸은즉‥‥과하다 하겠느냐. - 세 가지 일상적인 사례와 성경적인 근거를 통해 일하는 자가 그 보수를 받는 것이 정당한 일임을 설파한 바울은 이제는 실제적으로 복음 전도자와 교회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전도자가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라는 하나님의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다. 즉 '영적인 것'을 고린도라는 밭에 뿌렸는데 그 뿌린 대가로 '육신의 것', 곧 물질적인 이득을 소망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자명한 것으로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영적인 것'(프뉴마티카)은 한없이 고귀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을 가리키는 반면, '육신의 것'(사르키카)은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에 비교할 때 매우 보잘 것 없고 미미한 것을 가리킨다.
9:12 다른 이들도. -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바울이 떠난 후에 짧은 기간 동안 고린도 교회에서 일하였던 전도자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이들은 교회의 부양받을 권리를 사용하여 교회가 그들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바울이 사도직의 권리인 부양받을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자급하였다는 것이 사도권의 의혹을 살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바울은 이들과는 달리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고 어느 누구보다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며 오랫동안 그곳에서 주의 일에 힘써왔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누구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을 위해 그 권리 사용을 자제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권한을 사용하기를 자제하면서 참아냈다. 이렇게 한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복음에 대한 그의 봉사는 그에게 권리를 부여하였지만 바울은 그 권리 자체를 복음을 위해서 포기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서 이 복음이 혹시나 바을 자신의 생계를 위한 방편인 것처럼 오해되어 혹시 시험드는 자들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응당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행사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교훈한 것(고전 8:9-13)을 친히
실천하며 모범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알지 못하느냐. - 바울은 계속하여 사도들과 설교자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본구절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들이 충분하지 않았다는듯이 또 다른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실례는 보다 사도들의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성전의 일을 하는 이'란 레위인을 가리키며, '제단을 모시는 이'란 제사장을 가리킨다. 이들 가운데 레위인은 이스라엘 각 지파가 바친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제사장은 제단에 바쳐졌던 제물로 생계를 유지했다. 민 18:8-20주석 참조. 그와 같이 성도들을 위해 복음 증거에 전념하는 전도자들이 성도들로부터 생계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9:14 주께서도‥‥명하셨느니라. - 본구절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나열한 실례들을 근간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주께서 복음 전도자들에 대해 하신 말씀을 언급하여 복음 전도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이 주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고전 7:10에 이어 두 번째이다. 하여튼 본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마 10:10; 눅 10:7)고 하신 말씀의 인용이다. 즉 바울은 사도가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일반적인 주변 상황(7절), 율법의 증거(9절), 종교적 관행(13절)에 이어 최종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울이 사도의 권리에 대한 논증을 이처럼 주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는 것은 그가 주의 말씀에 최대의 권위를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9:15-23 자유를 절제하며 사도직물 행하는 바울의 궁극적 목적
앞단락(1-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제시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함에 장애가 없게 하려고 그 모든 것을 절제했노라고 밝혔는데, 이제 본문에서는 사도적 권한을 절제하며 사도직을 수행한 궁극적 목적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한을 절제함은 물른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었음을 말한다(19절). 사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숙한 믿음과 온전한 영적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22절). 따라서 그는 정통 유대인이면서도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마치 자신도 율법과 아무 상관 없는 자처럼 처신하며 그들의 문화적 상황에 스스로를 적응시켰다
(21절). 반면에 여전히 율법 아래에 놓여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실제로 자신도 율법을 준수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행동했다(22절). 바로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할례 문제에 있어서도 구체화되었는데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는 할례를 억지로 베풀지 않았던 반면에(갈 2:3). 디모데의 경우에는 루스드라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할례를 일부러 베풀었던 것이다(행 16:3).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태도를 이중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이라는
대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여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기꺼이 꺾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적 권한과 인간으로서의 개인적 권리를 포기한 채 오로지 복음 전파에 헌신 ․ 봉사할지라도 스스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고 선언한다(15~18절). 참으로 그가 복음을 전파한 이유는 도무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까닭이며, 그 어떤 존경이나 칭찬을 원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복음을 값없이 전하고, 치의 권한을 다 쓰지 않은 것을 상급으로 여기고 자족할 수 있었다. 실로 바울은 충성된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모두 행한 후에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10)는 고백을 하는 것과 같은 자세의 소유자였다.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고 이와 같이 이웃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기 위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려는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찬 자들이 되어야 한다.
9:15 이 말을 쓰는 것은‥‥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바울은 본구절에서 자신의 결심과 의도를 강력한 어조로 밝히고자 한다. 그는 다시 한번 교회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이나 대가에 대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사도의 권리에 대하여 길게 논증한 것이 자칫 앞으로는 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된 듯 오인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오해를 일축하기 위해 본절에서 '죽을지언정'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한 것은 아니라고 부연한다. 사실 그가 이렇게 사도의 권리를 논중한 이유는 '자신의 자랑'을 헛되이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권고에서였다. 즉 바울은 교회와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또한 복음의 원활한 전파를 위해서 당연히 갖고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자급 전도가 사도의 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바울은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논증을 계속했던 것이다.
9:16 자랑할 것이 없음은‥‥부득불 할 일임이라. - 바울은 앞의 구절에서는 사도의 권리 포기를 자랑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는 자랑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경제적 짐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행한 일은 자랑삼을 일이지만, 복음 전파 자체는 그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며 부득불, 즉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 사명인 까닭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께 사로잡힌 바 된 이후 그가 부여받은 강압적인 사명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전혀 없는, 실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포로요 종이었다(행 9:1-9; 롬 1:14; 갈 1:15; 빌 3:12). 물론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나 주께 강압적인 사명을 받은 것은 바을 자신에게는 고통이 아니요 한
량없는 감격으로(딤전 1 : 12-17), 그는 자원하는 마음과 순종함으로 그 사명을 수행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 전쟁 포로가 도망가려 한다든가 시 키는 일을 거부한다면 그는 필연코 화를 면키 어렵다. 그와 같이 사도 바울도 주께 사로잡힌 바 된 이후로 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주로부터 도망치려 하거나 사명을 거부하면 그에게 화가 미치게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욘 1장). 그래서 그는 주의 명령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이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억지로 감당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주의 맡기신 사명을 거부할 수 없는 강압을 느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간 바울의 이러한 강력한 사명 의식은 그로 하여금 백절불굴(百析不炭)의 위대한 전도자가 되게 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매우 큰 긍지를 가졌으나 복음 전파 자체는 자랑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주님의 부르심에 감격할 뿐이었고 순종할 따름이었다.
9:17 내가 내 임의로‥‥할지라도. - 뜻이 분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이다. 대체적으로 두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째는 '내가 다른 전도자들처럼 내 임의로 전도하였으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나 사실은 임의로 한 것이 아니니'(Chrysostom, De Wette, Alford)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이미 강압적으로 맡은 전도의 사명을 자발적으로 한다면 주님의 상급을 받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Bengel, Flatt)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전자의 견해가 문맥에 부합된다. 결국 바울은 지금 자신은 의무적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므로 복음 전파에 대한 자랑이나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이 문장은 바울의 사도직의 이해에 대한 자기 규정인데, '직분'(오이코노미아)은 '청지기'를 지칭한다(고전 4:2). 그 당시 청지기가 대부분 노예였음을 고려해 볼 때 이 표현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사실을 의미 한다. 즉 바울 자신은 복음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임의로 행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의 종으로서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은 결국 그가 만약에 종으로가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자발적으로 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나, 노예는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므로(눅 17:9,10) 바을 자신은 교회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무보수로 봉사해 왔다는 의미이다.
9:18 내 상이 무엇이냐. - 이것은 노예가 노동을 하는데 주장할 대가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다. 노예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을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이다. 대가를 요구할 권리란 노예에게는 없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바울은 자신을 노동력을 하나님께 빌려 주고 그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노예로 규정하였다. 즉 바울은 자신을 아무런 권리도 없는 자로 규정한 것이다. 물론 노예도 주인으로부터 먹고 입는데 필요한 생필품을 받는다. 그와 같이 바울도 교회의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권리마저 복음을 위하여 포기하고 그것을 그의 상으로 여긴 것이다. 즉 그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리고 자랑할 근거를 가짐으로 마음의 자족을 얻은 것이다.
9:19 모든 사람에게‥‥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그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하여 왔던 사실을 밝히고 있는 구절이다. 바울은 이제 경제적인 자신의 권리 포기(1-19절)를 넘어서 자유인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고 또한 바리새인이었다(행 22 3). 더 나아가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완전한 자유인이었다(행 16:37).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그 누구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그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기로 작정하였는데, 이는 그가 회심 이후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7:22). 바울의 모범은 다른 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고 봉사하는 데 자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여튼 그가 이렇게 자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예속시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항상 그 자신의 자유를 지킨는 것보다 우선 되었다.
9:20 본절부터 22절까지는 19절의 '모든 사람'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다. 즉 바울은 본문에서 바을 자신이 자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종이 된 사실을 세 부류의 사람, 즉 유대인, 율법 없는 자, 약한 자에게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분명히 유대교에 열심이던 유대인이었다(갈 1:14).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모든 관계를 완전히 끊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유대인은 육체적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다(빌 3:3).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유대주의가 실현되었고,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롬 10:4). 그러나 그는 유대인을 '얻기 위하여' 다시 유대인과 같이 되었는데, 이것은 바울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관례를 적절한 선에서 따랐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울은 분명히 이방인 선교를 위한 사도로 소명 받았지만(행 9:15) 그의 전도 원칙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에게 복음 증거를 원할히 하기 위하여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로 하여금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케 했는가 하면(행 16:3), 그 자신이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결례를 행하기도 했다(행 21:17-29).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 이는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의 강조를 위한 반복이다. 즉 유대인은 율법으로 하나님과 법적 관계를 맺은 민족이라는 점에서 유대인과 율법 아래 있는 자는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여튼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다(롬 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인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율법의 규정을 좇아 행하였는데, 이는 그가 유대인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거나 이중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동족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이 훼손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하여'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행동하였는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Hodge).
9:21 율법 없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모스'( )는 '불법한 자'를 의미하기도 하나(살후 2:8; 딤전 1:9), 여기서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바울이 취한 행동을 의미한다. 바울은 율법에 충실한 바리새인이었을 뿐 아니라 교법사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율법을 어긴다고 생각하여 기독교인을 핍박하며 죽이기까지 한 율법에 열심을 보인 자였다(행 22:3,4).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의 완성임을 깨닫고부터는 유대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율법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대인들 앞에서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권면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자유가 방종과는 다른 것임을 알게 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라고 주장한다. 이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율법, 즉 '그리스도의 율법'에 새로운 복종을 해야 함을 인식케 하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죄와 사망의 법과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 사는 자인 것이다(롬 8:2; 갈 6:2). 하여튼 바울은 분명 새로운 율법 아래 있는 자였으나 이방인들에게는 마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행했다. 즉 그는 이방인들 앞에서는 유대인의 율법을 무시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이방인들 앞에서 유대인처럼 행동한 베드로를 책망하기까지 했다(갈 2:11-21). 이는 모두 이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어색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9:22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기서 '약한 자'란 고전 8장의 믿음이 연약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즉 유대교나 이교의 문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다시 그의 논증을 우상 제물 문제로 돌아가 본절을 통해 그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바울은 믿음이 강하여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롬 14:1). 그러나 그는 결코 우상 제물을 먹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고전 8:13). 이는 그가 믿음이 약하지 않으나 약한 자 같이 되어 약한 자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상대방과 같은 입장이 되어 상대를 이해하는 것만큼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 바울이 유대인, 이방인, 약한 자 등 여러 모양의 사람에게 맞는 전도 방법을 취한 것을 가리킨다. 아무모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바울이 여러 모양의 사람에게 자신을 적응시키고자 한 이유이다. 즉 바울은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그리고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믿음이 약한 자처럼 행한 것이다. 바울은 진리에 대해서는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그들처럼 행동하였다. 실로 바울은 복음 증거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이라도 버리고 포기하기를 서슴지 않은 위대한 전도자였던 것이다.
9:23 내가‥‥복음에 참예하고자. - 여기서 '참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코이노노스'( )는 '~와 함께'를 의미하는 '쉰'( )과 '공유자', '동료'를 의미하는 '코이노노스'( )의 합성어로 '~함께 공유한 자'란 의미다. 따라서 본절을 이에 따라 직역하면 '내가‥‥다른 사람과 함께 복음을 공유하는 자가 되고자'가 된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을 자신이 복음에 참예하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 하는 바울의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 것이다.
9:24-27 절제하는 성도의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복음 사역자가 되어 그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절제한 것은 오직 주의 복음을 위 함이었음을 고백한 바울(15-23절)은 이제 본문에서는 운동 경기를 예로 들어 이렇게 자유를 절제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얻게 될 것임을 주지시키며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유를 절제할 것을 권면한다.
즉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익숙했으며 고린도에서 3년마다 개최된 이스티미안 운동경기(The Isthimian athleticgames)를 예로 들어 모든 운동 경기자가 각 종목에서 단 한번의 영광의 승리를 얻기 위해 부단한 연습과 극기의 훈련을 통해 자신을 철저히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푼대로 삼고 마치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선수와 같이 전진하는 성도들(딤후 4:8; 계 2:10) 역시 철저한 극기의 삶을 살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의와 생명의 면류관에 비해서 너무나 초라하고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쓰기 위해 운동 선수들이 마치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모든 사사로운 욕망을 눌러야 한다면, 과연 영원한 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자신을 다스리며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 하는지 명약 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닐 수 없다(딤전 4:7,8). 물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따라 모든 성도들에게 차별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믿음의 경주에 임하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운동 경기자가 상급을 얻기 위해 오직 목표점만을 바라보며 질주하듯이 세상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만 바라보며 생활하되(히 12:1,2) 자기 자신의 몸을 온전히 쳐 복종시키는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27절).
9:24 지금까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 사실을 설명한 바울(15-23절)은 이제 본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에서는 성도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와 같은 자유 및 권리 포기와 절제가 요청된다는 사실을 운동 경기자의 모습을 비유로 권면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운동 경기가 사회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 했는데 , 고린도에서는 매 3년마다 올림픽과 비슷한 '이스티미안'(Isthimian) 경기가 벌어지곤 했으며 주요 종목으로는 경마, 경주, 권투 등이 있었다.
운동장.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온'( )은 본래 약 200m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였다. 이것이 훗날 사람들이 길이가 약 200m의 규격화된 경기장을 만들면서 점차 경기장, 곧 스타디움(stadium)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 - 이는 구원받을 자가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구원은 복음을 영접하고 최선을 다해 신앙의 경주를 마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 결국 이 말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와 같이 신앙의 경주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결코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없음을 나타낸 말이다.
9:25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얻고자 하노라. - 달리기 선수의 비유의 주된 사용 목적으로서 우승하기 위한 훈련과 연습 태도를 묘사하고 있다. 경주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자는 훈련의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계속 훈련에 임해야만 한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운동 선수로서의 신체적 상태를 유지하는데 해가 된다면 그 음식은 절제하여야 한다. 이 비유는 복음의 승리를 위한 성도의 자유 포기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즉 승리하기를 원하는 선수들은 곧 시들어 색을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이처럼 힘든 훈련 과정을 참고 감수하는데, 하물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상으로 얻을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많은 절제와 권리의 포기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현재의 고난과 역경을 앞으로 받을 승리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감수해야 함을 권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9:26 향방 없는 것 같이‥‥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 두 종류의 운동 경기, 즉 달리기 선수와 권투 선수의 행동을 통하여 바울의 전하려고 하는 요점이 분명하게 제시된다. 즉 달리기 선수가 결승점을 향하여 자신의 라인(line)에서 벗어남 없이 달려야 하듯이 바울 자신도 향방없이 달리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복음의 목적에 맞추려고 노력했으며, 복음의 목적지에서 자신의 관심을 돌리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권투 선수도 상대를 쳐서 쓰러뜨려야 승리를 얻게 되듯이 바을 자신도 분명한 목표 의식을 갖고 복음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허공을 치는 것처럼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바울이 본구절에서 교훈하는 것은 달리기 선수나 권투 선수가 목적을 갖고 경기에 임하듯이 그리스도인 개개인도 역시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갖고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9:27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 여기서 '쳐'(휘포피아조)라는 말은 '~아래'를 의미하는 '휘포'( )와 '눈'을 의미하는 '옵스'( ), 그리고 '친다'를 의미하는 '피아조'( )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눈 아래를 친다'가 된다. 이는 권투 선수가 상대방의 눈 아래를 가격한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바울의 싸움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권투 선수들이 승리를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얼굴을 쳐 다운을 시켜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부단한 싸움, 곧 극렬한 극기와 절제가 필요함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종하게 하다'(둘라고게오)는 말은 '종으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경기나 전쟁에서 패자가 승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바울은 이 말을 육체적인 본성 및 죄의 경향과 욕망 등을 영의 일에 굴복시킨다는 말로 사용하였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두려워 함이로라. - 바울이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 이유이다. 그런데 본절의 '버림이 될까'는 문자적으로 '불합격자가 될까'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미 믿는 자가 구원에서 탈락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복음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없으며 그런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오해하여 본절을 근거로 개인적인 예정과 구원의 확실성 및 성도의 견인 교리 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관련하여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롬 8장 연구자료를,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구원론 중 성도의 견인 부분을 참조하라. 그러나 본절은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얻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 자신이 먼저 복음에 따라 사는 삶으로 성도들 앞에서 모범이 되어야 함을 교훈하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