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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도_KSL_#1038 (행 20:01-38)_220115_A1_
[단락 나눔]
20:01-06
20:07-12
20:13-16
20:17-24
20:25-38
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바울이...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권한’으로 번역된 ‘파라칼레사스’의 원형 ‘파라칼레오’는 ‘옆에’란 뜻의 ‘파라’와 ‘부르다’ , ‘이야기하다’는 뜻의 ‘칼레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옆에 불러 이야기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는 많은 경우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경고하다’,‘주의를 주다’는 뜻으로 쓰인다. 즉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을 위로함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돋우었고 주의할 내용들을 경고함으로 그들을 더욱더 강하게 했다는 뜻이다.
20: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그 지경으로...헬라에:
본절에서 ‘그 지경으로’로 번역된 ‘타 메레 에케이나’는 마게도냐 지역으로서,바울이 2차 전도 여행시에 다녔던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세웠던 공동체를 다시 한 번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 disciples)이 증인 (witness)으로 굳게 설 수 있도록 권면하는 데 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여기서 ‘권하고’로 번역된 ‘파라칼레사스’는 이미 절에서 ‘권한’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 단어가 ‘여러 말로’란 표현과 함께 쓰였는데,이는 바울이 마게도냐 지경을 다니며 격려와 위로와 권면 등을 충분히 한 후에 헬라로 떠났음을 보여 준다. 즉 바울은 기본적으로는 새롭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였으나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들에게는 ‘격려’를 통하여 그들이 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헬라’로 번역된 ‘헬라다’의 원형 ‘헬라스’는 ‘아가야 (Achaia)’를 이르는 대중적 이름으로서 마게도냐 아래쪽 남부 지방을 가리킨다. 이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조상신 ‘헬 (Hellen)’이란 이름에서 연유한 듯하다. 영어식 이름 그리스 (Greece)는 라틴어 ‘그라이키아 (Graecia)’의 음역이다. 발칸 반도 남쪽에 있는 그곳에서 바울은 석 달을 보내는 중에 (3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는 그의 최대 걸작 로마서를 기록했다.
20: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공모하므로...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한편,여기서 ‘공모(共諸)’로 번역된 ‘에피볼레스’의 원형 ‘에피불레’는 ‘어떤 사람을 반대하는 ’음모’라는 뜻의 고어 (古語)로서 사도행전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9:24에는 ‘계교’로, 그리고 본장 19절과 23:30에는 ‘간계’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에서 바울을 해하려고 음모를 꾸민 유대인들은 아마도 바울을 불법 종교 유포죄로 고소하였다가 갈리오에 의해 기각 처리된 후 줄곧 앙심을 품어온 자들로 보이며,바울의 오래된 적들이었다 (행 18:5-17).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
한편, 이들은 이방 각 교회의 구제 헌금 전달 대표자들임이 틀림없다. 마게도냐 교회의 대표는 소바더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였으며,갈라디아 지방의 대표는 더베의 가이오와 루스드라의 디모데요, 아시아 지방의 대표는 두기고와 드로비모였다. 여기서 아가야 지방,즉 고린도 교회에서 보낸 대표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20: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무교절 후에…닷새 만에:
바울은 유월절을 자신의 각별한 동역자 누가와 함께 빌립보 공동체에서 보냈다.
한편 ‘닷새 만에’로 번역된 ‘아크리 헤메론 펜테’는 ‘5일이 찰 때까지’란 뜻으로 5일을 가득 채 웠다는 의미이다. 사실 빌립보의 항구 도시 네압볼리에서 드로아까지는 뱃길로 이틀이면 충분한 거리였다(행 16:11). 따라서 5일 만에 당도했다는 것은 역풍과 폭풍과 같은 악천우로 인해 매우 힘든 여행을 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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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안식 후 첫날에:
한편 여기서 ‘안식 후 첫날에’로 번역된 ‘엔 데 테 미아 톤 삽바톤’에서 ‘삽바톤’은 안식일부터 그 다음 안식일까지를 일컫는 일주일을 가리키며,‘하나’라는 의미의 ‘미아’는 서수 ‘프로토스’를 대신해 쓰인 것으로(막 16:9) ‘첫째(first)’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일주일의 첫 번째 날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요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안식 후 첫날 연보를 모아 두라고 지시하였는데(고전 16:2), 이것은 당시 안식 후 첫날 헌금을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는 기사는 성만찬의 식사를 포함하는 예배로 모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므로(행 2:42), 드로아에서의 이날 모임은 예배를 위함이었다. 안식 후 첫날에 모임을 가진 것은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고(요 20: 26), 그후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당시 드로아의 일몰 시간이 7시경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힘든 일과를 마치고 오후 7시쯤에 모여서 바울의 강론을 들었다. 바울의 강론은 다음날 날이 새기까지 계속되었다 (11절). 당시의 일출 시간은 오전 5시였기 때문에 바울은 저녁 7시부터 아침 5시까지, 10시간의 강론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강론할새’로 번역된 ‘디엘레게토’의 원형 ‘디알레고마이’가 본래 ‘대화하다’,‘논의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디엘레게토’는 무려 10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바울 혼자서만 말했다기보다는 바울이 주도적으로 설교하되 청중들의 질문도 받아 가며 가르쳤다는 것을 암시한다. 드로아에서의 바울의 강론은 청중들의 뜨거운 호응 가운데 질문도 받고 휴식 시간도 가지면서 밤을 새며 진행된 것이었다 (11절).
20: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표준 원문 (Textus Receptus)에서는 ‘우리의’에 해당하는 ‘에멘’ 대신 ‘그들이 있는 (KJV,they were)’이란 뜻이 있는 ‘에산’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7절과 13절에 ‘우리’ 라는 표현이 나올 뿐 아니라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소생시키는 7-12절의 내용이 목격자가 아니면 쓰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윗다락에 모인 사람들 중에 본서 저자 누가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한 ‘에멘’이 더 적합한 듯하다.
그런데 본절에서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한 이 사람은 당시 상당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집이 드로아의 많은 성도들을 다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을 뿐 아니라 3층 다락까지 (9절) 있었던 사실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신빙성이 높다.
▶등불을 많이 켰는데:
여기서 ‘등불을 많이 켰는데’로 번역된 ‘에산 데 람파데스 히카나이’는 ‘각양 각색의 많은
등불을 켰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집회를 위한 교회 건물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성도 중 유력한 자들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처소에 부족한 등불을 보충하기 위하여 성도들은 각자의 집에서 등불을 가져왔던 것이다.
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오래동안…이야기하고:
한편 ‘오래’로 번역된 ‘히카논’의 원형 ‘히카노스’는 ‘~에 이르는’,‘~에 도달하는’이라는 의미로서 시간의 간격을 나타낼 때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총 39회의 용례 중 행 9:43 ; 눅 8:27등과 같이 누가에 의하여 27회나 사용되었다. ‘히카노스’다음에는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시간이 나오는데 본절에서는 ‘곧 날이 새기까지’란 표현이 나와 그날 밤을 완전히 새우면서 이야기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시 드로아의 일출 시간은 새벽 5시 정도였다. 따라서 바울은 일몰 시간 오후 7시부터 일출 시간 오전 5시까지 말씀을 강론한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로 번역된 ‘호밀레사스’의 원형 ‘호밀레오’는 ‘~와 함께 교제하다’ , ‘~와 함께 이야기하다’는 뜻으로 여기서 오늘날의 ‘설교학(Homiletics)’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호밀레오’는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상호간의 친밀한 대화를 뜻한다. 떡을 떼며 성찬을 진행한 바울은 조금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필요한 말들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20: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람들이...데리고 와서:
본절의 주어는 ‘에가곤’동사 속에 포함 된 3인칭 복수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유두고를 누가 데려왔는지는 물론 어디로 데려왔는지,왜 데려왔는지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첫째,병에서 회복된 유두고를 자신의 집에서 편히 쉬게 하기 위해 그의 가족에게로 데리고 갔다는 견해가 있다. 둘째,유두고를 교회로 데려갔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유두고를 교회로 데려간 이유는 유두고의 사건을 목격하지 못한 자들을 위함이었다고 한다.
참된 하나님의 기적은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유두고를 본 많은 자들이 적지 않은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막 떠나려는 바울에게 데려왔다는 견해가 있다. 바울의 기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웅하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여기서 ‘위로를…받았더라’로 번역된 ‘파레클레데산’의 원형 ‘파라칼레오’는 ‘위로로써 힘과 용기를 돋우다’,‘기운을 북돋우다’는 뜻이다. 그리고 ‘파라클레데산’은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는 신적 수동태로 볼 수 있으며 그 주체는 하나님이다. 즉 살아난 유두고를 통해 하나님은 드로아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로 그들의 심령을 북돋워 주신 것이다.
한편 이때 드로아 공동체가 받은 위로가 얼마나 컸는지는 ‘적지 않게’ 에 해당하는 ‘우 메트리오스’란 표현이 잘 보여 준다. ‘메트리오스’는 ‘헤아림’ (마 7:2)이란 뜻이 있는 ‘메트론’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따라서 ‘우’란 부정어와 함께 사용된 본문의 표현은 단순히 ‘적지 않게’ 혹은 ‘많게’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실로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고 큰’ 이란 의미이다.
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20: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20: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기오 앞에...사모에...밀레도에:
‘기오 앞에 오고’에서 ‘오고’로 번역된 ‘카텐테사벤’의 원형 ‘카탄타오’는 ‘~에 도착하다’는 뜻이다(행 16:1 ;18:19). 즉 바울은 기오에 저녁에 도착하여 기오 섬 맞은편 대륙의 항구에 정박하여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다.
드디어 바울 일행은 월요일 드로아에서 출발하여 금요일 저녁 밀레도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지체치 않기 위하여…이는…급히 감이러라:
여기서 ‘지체치’로 번역된 ‘크로노트리베사이’의 원형 ‘크로노트리베오’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와 ‘비비다’, ‘비벼서 닳게 하다’는 뜻의 동사 ‘트리보’의 합성어로서 ‘시간을 비벼서 닳게 하다’,즉 ‘시간을 쓸데없이 소모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에베소를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했는데,그것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몹시 서둘렀다는 사실은 ‘급히 감’에 해당하는 ‘에스퓨멘’이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foot)'을 의미하는 ‘푸스’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발을 급하게 옮기다’는 뜻이 있으며,‘몹시 서두르다’는 뜻을 지니는 ‘스퓨도’의 미완료 능동태이다. 특히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급히 서둘렀음을 잘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미 무교절 후 빌립보에서 드로아에 이르기까지 닷새 (6절) , 드로아에 도착하여 이레 (6절) 드로아에서 밀레도에 도착하기까지 나흘(13-15절) 총 16일을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데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바울이...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한편 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는 약 45km정도의 거리로서 하루에 오기에는 힘든 거리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밀레도에 체류한 지 최소한 3일 후에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전갈을 받고 이곳까지 온 장로들은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처음 갔을 때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던 약 12명의 제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행 19:1-7).
20: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내가 항상…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너희도 아는 바니’로 번역된 ‘휘메이스 에피스타스데’에서 ‘에피스타스데’의 원형 ‘에피스타마이’는 머리로 이해하여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 경험으로 체득한 지식을 가리킨다. 즉 함께한 3년간의 생활을 통해 갖게 된 바울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리킨다. 특히 동사 ‘에피스타스데’가 2인칭 복수형 동사이므로 ‘너희도’에 해당하는 인칭 대명사 ‘휘메이스’는 생략해도 상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용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베소의 장로들인 그들이 잘 알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기서 ‘항상’이라고 번역된 ‘톤 판타 크로논’은 정관사 ‘톤’과 ‘모든’이란 뜻의 ‘판타’
그리고 ‘시간’이란 뜻의 ‘크로논’이 합해져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함께한 ‘모든 시간’을 가리킨다. 이 시간이 31절에서는 ‘3년’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내가…어떻게 행한 것을’이라고 번역된 ‘포스...에게노멘’은 구체적으로 19-21절까지의 내용으로 간단히 요약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하여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는 떳떳한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에베소 장로들을 향하여 이렇듯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곧 모든 겸손과...주를 섬긴 것과:
본절을 직역하면 ‘모든 겸손,눈물,그리고 유대인들의 음모를 통해 나에게 닥쳤던 시험 들을 가지고 주를 섬기 는 것 (NASB, serving the Lord with all humility and with tears and with trials which came upon me through the plots of the J ews)’ 이 된다. 즉 본절에서 가장 주된 핵심 내용은 ‘주를 섬기는 것’이며 다른 것은 이에 부속되는 것이다.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일어났던 시험,특히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일어났던 ‘시험들
(페이라스몬)’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 누가는 본서 19:9에서 유대인들의 적대적인 태도만을 기록했지만,바울 자신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가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많은 시련들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고전 15:30-32; 16:6 ; 고후 1:4-10; 11:23 등).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꺼림이 없이:
여기서 ‘유익한’으로 번역된 ‘쉼페론톤’의 원형 ‘쉽페로’는 ‘돕다’,‘유익하다’는 뜻으로 듣는 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익한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 유익한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들이 구원을 얻는 데 유익한 것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회당이나 두란노 서원과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나 혹은 개인을 심방하는 각 집에서나 전혀 꺼림이 없었다.
여기서 ‘꺼림이’로 번역된 ‘휘페스테일라멘’의 원형 ‘휘포스텔로’는 ‘아래’,‘밑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와 ‘피하다’ ,‘당기다’는 뜻이 있는 동사 ‘스텔로’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아래로 피하다’,‘아래로 물러서다’, ‘아래로 또는 뒤로 당기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주로 배의 돛을 걷고 내리는 것을 나타내며, 특히 본절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움츠리다’, ‘겁내다’,‘위축되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구원에 유익한 것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이 전혀 위축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지금 자신이 계속하여 온 항해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바울은 구원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전혀 두려움이나 위축됨이 없이 불퇴전의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믿음을:
‘회개’로 번역된 ‘메타노이안’의 원형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변화’,‘개심’이란 뜻으로서 자신의 잘못이나 악행을 혐오하기 시작하면서 보다 나은 생활 양식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자들의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러한 회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적 결단에 의한 행동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란 자신이 지었던 모든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틴’의 원형 ‘피스티스’는 ‘신앙’,‘확신’이라는 뜻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에서 믿음은 새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보라 이제:
‘이제’로 번역된 ‘뉜’이나 보라’로 번역된 ‘이두’는 모두 상대방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하여 쓰인 말이다. 자신의 장래를 예견하며 에베소 장로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메시지 (22-25 절)를 새로이 시작함에 있어서 복받쳐 오르는 감동에 의하여,그리고 고별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프뉴마’를 성령으로 보아 바울의 마음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한다고 굳게 결심하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을 해석한다. 성령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바울의 환난을 예고하시면서 (23절 ; 행 21:11) 동시에 바울로 하여금 그 길을 당당히 가게 하신 것이다.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이...결박과 환난이…나를 기다린다:
‘결박’으로 번역된 ‘데스마’의 원형 ‘데스몬’은 ‘띠’,‘끈’이라는 뜻으로 쇠사슬이나 끈으로 속박당한 상태 즉 투옥을 상징 한다. 또한 ‘환난’으로 번역된 ‘들립세이스’의 원형 ‘들립시스’는 ‘압박’,‘궁핍’,‘곤고’란 뜻이며,그리스도께서 겪으셨던 고난이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반드시 받게 될 고난을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결박과 환난은 문자 그대로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나아갈 때 앞으로 경험하게 될 감옥 생활과 그로 말미암는 극심한 고난을 가리킨다.
특히 여기서 ‘기다린다’로 번역된 ‘메누신’의 원형 ‘메노’는 ‘머무르다’,‘떠나지 않다’,‘지속적으로 소멸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여 바울이 만나게 될 결박과 환난은 단순히 일회적으로 경험하게 될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될 사건임을 나타낸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여기서 ‘달려갈 길’로 번역된 ‘드로몬’의 원형 ‘드로모스’는 ‘노정’으로 직역되며,‘인생의 노정 (the course of life)’이나 ‘직무의 노정 (the course of office)'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달려갈 길’은 바울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고 또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사명자로의 노정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명’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안’의 원형 ‘디아코니아’는 ‘직분 (ministry)’이라는 뜻이며 특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직분을 가리킨다.
▶마치려 함에는…조금도…아니하노라:
여기서 ‘마치려 함에는’으로 번역된 ‘호스 텔레이오사이’는 마치기 위해서’라는 목적의 뜻을 나타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다는 뜻이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조차도 기꺼이 내놓기로 각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단과 각오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갈 2:20 ; 빌 1:20; 3:7-9).
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내가…아노라:
즉 본절에서도 주어 ‘에고’가 별도로 쓰여 오늘의 이별이 그들과는 마지막이 될 것을 바울 ‘자신 스스로’가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순교를 강하게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이번 여행으로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것은 아니지만 본절의 시점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A.D.67년경에 순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를 직역하면 ‘그 나라를 전파하며 (RSV,preaching the kingdom)’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개역 성경이 ‘하나님 나라(KJV, the kingdom of God)’란 표현을 쓴 것은 바시리엔 시스 사본(E)등이 ‘하나님의’를 뜻하는 ‘투 데우’란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표준원문(Textus Receptus)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따라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도 영접하지 않음으로 당할 심판에 대해 자신은 자유하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바울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런 사실은 ‘~에 대하여’로 번역된 ‘아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전치사는 ‘~ 로부터 (from)’ 라는 분리,이탈을 나타내는 의미의 탈격 전치사로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심판받을 때 바울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나타낸다. 그리고 ‘깨끗하니’로 번역된 ‘카다로스’는 칠십인역 (LXX)에서는 유대의 정결법 (Jewish Purity Laws)에 나오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할 때 사용된 단어이나 본절에서는 재판에서 ‘죄가 없는’,‘무죄의(innocent)’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는 자가 받는 죽음의 심판에 대하여 자신은 관계 없고 무죄하다고 엄숙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본문에서 이 단어는 부정어 ‘우’와 함께 사용되어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전함에 있어서 전혀 위축 되거나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선포하였음을 보여 준다 (20절).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감독자를 삼고...치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감독자’로 번역된 ‘에피스코푸스’의 원형 ‘에피스코포스’는 ‘관리자’,‘보호자’라는 뜻으로 교회의 전반적인 일을 살피고 관리하는 임무를 가진 자로서 오늘날 목사에 해당하는 직분이다.
한편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치게 하셨느니라’로 번역된 ‘포이마이네인’의 원형 ‘포이마이노’는 목자가 양을 칠 때 사용하는 단어로서 ‘양육시키다’는 뜻이다. 즉 이 단어는 목자가 양 떼를 데리고 다니면서 물과 풀을 먹이고 잠을 재우는 것을 연상시킨다. 본문에서는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사로 쓰였으므로 ‘양육하게 하려고 (KJV,to feed)’, 또는 ‘치게 하려고 (NASB,to shepherd)’ 라는 의미이며 주체는 성령이다. 선한 목자이며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양육하신 것처럼 (요 10:11 ; 벧전 2:25),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친히 성도들에게 보내신 보혜사(保惠師) 성령께서(요 14:16,26; 15:26; 16:7)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양떼들을 양육하기를 원하신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내가 떠 난 후에:
직역하면 ‘나의 그 떠남 이후’ 이다. 여기서 ‘떠남’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문의 뉘앙스로 볼 때는 바울이 출발하면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흉악한 이리가 등장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흉악한 이리가..아끼지 아니하며:
‘흉악한’으로 번역된 ‘바레이스’의 원형 ‘바뤼스’는 본래 ‘무거운’이라는 의미이지만,‘가혹한’, ‘흉포한’,‘잔인한’이라는 의미도 있다. 본문에서는 ‘이리 (wolf)’에 대해 사용되었으므로 ‘무거운’이라는 의미가 아닌 ‘흉포하고 잔인한’ 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또한 ‘이리’로 번역된 ‘뤼코이’의 원형 ‘뤼코스’는 문자 그대로 ‘이리’,‘늑대 (wolf)’를 가리키는 단어이나 본문에서는 상징적으로 쓰여 ‘이단’,‘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아끼지 아니하며’로 번역된 ‘메 페이도메노이’에서 ‘페이도메노이’의 원형 ‘페이도마이’는 ‘용서하다’,아끼다’는 뜻이다. 따라서 ‘메 페이도메노이’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해칠 것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이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을 때 조금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20: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제자들을 끌어...어그러진 말을 하는:
한글 개역 성경에서 ‘너희 중에서도’로 번역된 ‘엑스 휘몬 아우톤 야’은 사실 ‘너희 자신들 중에서부터 (NASB,from among your own selves)’라는 의미를 지닌 매우 강한 표현으로서 거짓교사들이 바로 에베소 교회 내부에서도 일어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 ‘어그러진’으로 번역된 ‘디에스트람메나’의 원형 ‘디아스트레포’는 ‘비틀다’,‘왜곡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켜 옳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이들은 교인을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끌어’로 번역된 ‘아포스판’의 원형 ‘아포스파오’는 로부터’ 에서 멀리 떨어져’란 뜻의 전치사 ‘아포’와 ‘끌다’,빼다’라는 뜻의 동사 ‘스파오’의 합성어로서 ‘분리하다’(눅 22:41;행 21:1)라는 뜻을 가진다.
특히 아노니’에 해당하는 ‘오이다’는 단순히 ‘알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주목함으로 인식하다’, ‘경험함으로 알다’란 의미를 지니는 ‘에이도’의 완료형이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떠나고 없는 에베소 교회에서 장차 일어날 일을 마치 눈으로 직접 목격하듯이 확실히 알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의 진한 사랑과 더불어 마귀의 속성을 익히 앎으로 인하여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바울의 영적 통찰력이 매우 돋보인다 할수 있다.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훈계하던:
이는 ‘마음’(롬 7:23), ‘영’(살후 2:2), ‘뜻’(계 17:9)등의 의미를 갖는 명사 ‘누스’와 ‘두다’ (마 5:15), ‘주다’ (마 12:18)등의 뜻을 갖는 동사 ‘티데미’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마음에 두게 하다’는 뜻이며 주로 ‘권면하다’ (골 3:16 ; 살전 5:14)는 의미로 사용되는 ‘누데테오’의 현재 분사형이다.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특히 본절처럼 중간태로 쓰일 때에는 ‘넘기다’,‘위임하다’,‘추천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이 에베소 장로들을 넘겨받아 그들의 모든 일을 주관케 해 달라는 간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에베소 장로들과 함께 있게 되면(상반절),마치 집이 건축되듯이 말씀이 그들의 삶을 굳건하게 건축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인해 장로들은 인격과 영성이 날로 새로워질 것이고 성령과의 교통이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지상 교회의 이상적 모습을 이루기 위하여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이 먼저 말씀에 의하여 세우심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직역하면 ‘기업을 주시도록’이다. 본문 역시 앞서 나오는 ‘너희를…든든히 세우사’에 해당하는 ‘오이 코도메사이’와 마찬가지로 부정사 구문으로서 ‘능히’로 번역된 분사 ‘뒤 나메노’의 지배를 받으며 주의 은혜의 말씀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베푸는 두번째 은혜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기업’은 구속함을 입어 성령의 은혜에서 자라가는 자가 장차 천국에서 얻게 될 완성된 구원과 상급을 가리킨다 (고전 3:12-15 ; 골 1:12 ; 엡1:18).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내가 아무의…탐하지 아니하였고:
여기서 ‘에페뒤메사’의 원형 ‘에피뒤 메’는 금지된 것을 ‘갈망하다’,‘탐내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과거의 단회적 사건을 뜻하는 부정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에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 본 적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당하여:
본절 전체를 원문을 따라 직역하면, ‘(나의) 이 손들이 나와 및 나와 동행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섬긴 사실을 너희들 자신이 알고 있다 (NASB,You yourselves know that these hands ministered to my own needs and to the men who were with me)’ 가 된다. 바울은 본절에서 자비량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필요도 채웠다는 사실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당하여’로 번역된 ‘휘페레테산’의 원형 ‘휘페레테오’는 일차적으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비유적으로 ‘섬기다’,‘봉사하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행 13:36 ; 24:23). 당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노예들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여겼음을 잘 보여 준다. 즉 바울은 배 맨 아래층에서 배의 진행을 위해 수고하는 지극히 비천한 노예처럼 자신도 전도 여행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재정을 자신 스스로 섬기는 자세로 감당했다는 뜻이다.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모본을 보였노니:
‘휘페데익사’의 원형 ‘휘포데익뷔미’는 ‘눈앞에서 직접 보여 주다’, ‘실물 교육을 하다’는 뜻이다.
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 크게 울며…입을 맞추고:
여기서 ‘울며’로 번역된 ‘클라우드모스 에게네토’에서 ‘클라우드모스’는 단순히 섭섭한 감정을 느껴 흘리는 눈물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 애곡할 때 사용하는 매우 큰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마 2:18).
한편 ‘입을 맞추고’로 번역된 ‘카테필룬’은 ‘카타필레오’의 미완료형으로서 몇 번이고 계속적으로 입을 맞추었음을 가리킨다. 신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바울과의 헤어짐을 슬퍼하여 반복해서 입을 맞추고 있는 장로들의 애틋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근심하고…전송하니라:
여기서 ‘근심하고’로 번역된 ‘오뒤노메노이’의 원형 ‘오뒤나오’는 본래 ‘심히 괴롭히다’는 뜻이나 본절에서는 중간태로 사용되어 ‘자기 자신을 심히 슬프게 하다’는 뜻이다. 즉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바울의 말로 인해 장로들은 스스로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전송하니라’로 번역된 ‘프로에햄폰’ 의 원형 ‘프로햄포’가 단지 배웅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어 준다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항상 자비량으로 사역한 바울의 선교 원리와 맞지 않으므로 본절에서는 단순히 배에까지 함께 간 것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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