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외울 말씀 9장 7-8절이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로마서 9장 1-5절 【이스라엘을 위한 근심】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9: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9: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내게 이것을 증언하는 것은,
직역: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말한다. 그리고 것말을 하지 않는다. 내 안에 거룩한 영이 내게 양심과 함께 증거한다.
9:1 Ἀλήθειαν λέγω ἐν Χριστῷ,
참 나는말한다 안에서 그리스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οὐ ψεύδομαι,
아니 거짓말 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1단)
συμμαρτυρούσης μοι τῆς συνειδήσεώς μου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함께 증거한다. 내게 그 양심과 나의 안에서 영 거룩한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단수)
주해 1-2절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헬라어 원어 성경 본문에서는 이하 논리 전개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참말'(알레데이아)이라는 표현이 문장 서두에 나옴으로써 본서 독자들의 주의를 새로운 논의에로 전환시키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라는 표현은 바울의 전형적인 문구로서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를 계속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고 성도들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에 이르게 됨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표현은 이제부터 논의하게 되는 내용이 추호의 거짓이나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진실한 말이라는 것을 강하게 보여준다.
▣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주로 담당하는 사도였지만 자기 동족에 대해서도 역시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이 표현되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지 못한' 표현들을 자주 사용했지만진정으로 바울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앞장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기쁜 마음을 표현하였으나, 여기서는 동족들의 불신에 대한 극심한 슬픔을 침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 원문의 뜻을 좀 더 명확히 살린다면 '성령 안에서 나의 양심이 나와 함께 연대 증언한다'는 의미이다. 서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참말'을 강조하였듯이, 본 구절에서는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이 '성령의 관할 하에서'라는 의미로 양심의 진실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성령의 조명을 받은 '양심'은 율법의 행위를 드러내는데 불과한 사람들의 양심과 구별된다. 한편 바울은 '내 양심'과 '나'를 중복하여 표현함으로써 자기 고백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의 법정 증언에 있어서 2명 이상의 일치된 증인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서 발견되는 중복적 표현도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관습에 준하여 자신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 (앞절에 포함)
9:2 내게는 a)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9:2 나에게 큰 근심이 있고, 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직역: 그리고 내게 큰 슬픔이 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에는 끊임없는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9:2 ὅτι λύπη μοί ἐστιν μεγάλη
때문이다 슬픔 내게 있다 큰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ἀδιάλειπτος ὀδύνη τῇ καρδίᾳ μου.
그리고 끊임없는 아픔이 그 마음에 나의
주해 1-2절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헬라어 원어 성경 본문에서는 이하 논리 전개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참말'(알레데이아)이라는 표현이 문장 서두에 나옴으로써 본서 독자들의 주의를 새로운 논의에로 전환시키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라는 표현은 바울의 전형적인 문구로서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를 계속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고 성도들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에 이르게 됨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표현은 이제부터 논의하게 되는 내용이 추호의 거짓이나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진실한 말이라는 것을 강하게 보여준다.
▣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주로 담당하는 사도였지만 자기 동족에 대해서도 역시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이 표현되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지 못한' 표현들을 자주 사용했지만진정으로 바울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앞장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기쁜 마음을 표현하였으나, 여기서는 동족들의 불신에 대한 극심한 슬픔을 침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 원문의 뜻을 좀 더 명확히 살린다면 '성령 안에서 나의 양심이 나와 함께 연대 증언한다'는 의미이다. 서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참말'을 강조하였듯이, 본 구절에서는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이 '성령의 관할 하에서'라는 의미로 양심의 진실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성령의 조명을 받은 '양심'은 율법의 행위를 드러내는데 불과한 사람들의 양심과 구별된다. 한편 바울은 '내 양심'과 '나'를 중복하여 표현함으로써 자기 고백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의 법정 증언에 있어서 2명 이상의 일치된 증인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서 발견되는 중복적 표현도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관습에 준하여 자신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9: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9:3 나는 내 형제, 곧 육체를 따라된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께로부터 끊어진다 해도좋다.
직역: 나의 형제들과 나의 친척들을 위하여 나의 육신을 따라 나는 그리스도로부터 내 자신이 저주가 있게된다면 나는 원하고 있어왔다. 왜냐하면,
9:3 ηὐχόμην γὰρ ἀνάθεμα εἶναι αὐτὸς (부정사: 현재 능동)
내가원하고있어왔다 왜냐하면 저주가 있다 내자신이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 1단)
ἐγὼ ἀπὸ τοῦ Χριστοῦ ὑπὲρ τῶν ἀδελφῶν μου
나는 부터 그 그리스도 위하여 그 형제들 나의
τῶν συγγενῶν μου κατὰ σάρκα,
그 친척들을 나의 따라 육신의
주해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며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용서를 위해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던 동족에 대한 모세의 지극한 사랑이 연상되는 기도이다.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 바울에게 있어 가까운 촌수를 지닌 친지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을 통해 난 이스라엘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즉 바울은 언약의 백성이었던 동족들과의 유대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 비록 바울에게 있어 이 일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더라도, 여기서 저주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파기됨으로써 죄인의 신분으로 지옥의 멸망, 즉 최후적인 저주를 받게 됨을 가리키는 것은 명백하다.
▣ 원하는 바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위코멘' 은 미완료 과거 중간태로서 준희구법적으로 쓰였다. 즉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원한다'라는 의미로서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뉘앙스를 더 많이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렇게 사실상 불가능한 소원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이 모세와 같은 동족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9: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심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직역: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을 제정하심과 섬김과 약속들 있다.
9:4 οἵτινές εἰσιν Ἰσραηλῖται,
그들은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ὧν ἡ υἱοθεσία καὶ ἡ δόξα καὶ αἱ διαθῆ και ἡ νομοθεσία
그들의 그 양자됨 과 그 영광 과 그 언약들 과 그 율법제정
καὶ ἡ λατρεία καὶ αἱ ἐπαγγελίαι,
그리고 그 섬김 과 그 약속들
주해: 본절과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진 특권을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얍복강에서 부여하신 이름으로 요한복음에서도 매우 특징적으로 명예롭게 사용되었다. 이렇듯 그 이름으로도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구약 시대 구속사의 주역임이 잘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권은 또한 '저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티네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이 관계대명사는 특히 '성품과 성질'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서 가지는 고유한 특권과 사명을 적절하게 잘 말해주고 있다.
▣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 '양자됨'이란 혈통적으로는 비록 친자가 아니나 법적으로 아들의 신분으로 받아들여져 아비의 가업과 상속물을 이어 받을 수 있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누리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 한편 성도 개개인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신약적 개념의 양자와는 구분되는 개념이기는 하나 구약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구약적 개념이다.
▣ 영광과. - 신약에서 '영광'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독사'는 주로 추상적인 용법으로 쓰이지만, 아마도 본절에서는 구약적 개념으로 가시적이고 빛나는 하나님의 현현인 '쉐키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영광은 십계명을 받을 때 시내 산에 임하였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임재의 장소로 여겨졌던 성막이나지성소의 속죄소 그리고 성전에 임하였던 영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기도 했으며, 또한 심판과 재앙을 위한 임재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임재 역시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 민족들과는 구분되는 특권인 것이다.
▣ 언약들과. - 이 단어에 대한 사본들의 독법은 단 ․ 복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즉 ① 복수(하이 디아데카이)는 시내산 사본(H), 에브라임 사본(C), 모스코 사본(K), 아도스 사본(ψ) 등에 나타나고, ② 단수(헤 디아데케)는 바티칸 사본(B), 베자사본(D)등에 나타난다. 여기서 후자, 즉 단수라는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이는 구약 율법의 대표인 시내 산 언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또한 곧바로 나오는 '율법을 세우신 것'이란 말과 조화를 이룬다. 구약은 아담과의 시초적 행위 언약 이후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그리고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 '새 언약' 등 일련의 언약들이 나타난다. 즉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관심 하에서 이러한 언약들을 계속 맺어왔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특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제반 언약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은혜의 언약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발전하는 점진적 양상을 띠었다.
▣ 율법을 세우신 것과. -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수여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큰 특권이었다.
▣ 예배와. - '예배'(라트레이아)는 출애굽 과정에서 드린 장막에서의 예배 혹은 성전에서의 예배, 그리고 나아가 포로기 이후에 보편적 이었던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특권 역시 택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정에서의 예배까지도 규정되었다.
▣ 약속들이 있고. - 앞서 언급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들과 동일한 말이다. 그러나 언약의 형식적 측면과 언약 자체를 강조하는 말이라면, '약속들'이란 그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 특히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 데 기초가 되는 메시야 약속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9: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b)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9:5 조상도 그들의 것이며, 육체로 하면 그리스도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아멘.
직역: 그들의 조상들도 그들으로부터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분은 모든것 위에 계시서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아멘
9:5 ὧν οἱ πατέρες καὶ ἐξ ὧν ὁ Χριστὸς τὸ κατὰ σάρκα,
그들의 그 조상들 그리고 부터 그들 그 그리스도 그 따라 육신을
ὁ ὢν ἐπὶ πάντων θεὸς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그분 계시는 위에 모든것 하나님 찬송을 받으실 토록 그(이시다) 영원 아멘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 '조상들'이란 사도 바울이 본서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들과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의 왕으로서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다윗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1차적으로는 이들을 가리키지만,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구속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스라엘 역사상 모든 조상들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 이스라엘의 특권 중 가장 결정적인 항목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이스라엘에게서 취해졌다는 사실과, 바로 그분이 지니신 신성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동시에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혈통에서 나왔다는 진술을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본절 말미에 나오는 '세세에‥‥아멘'이 위에서 언급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형식적 문장 전환의 어구라고 주장하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설명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는 문장인 것이다.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은 바로 이 점에서 명백해진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줄기에서 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배척, 하나님의 화를 자초했던 것이다.
로마서 9장 6-13절 【진정한 약속의 자녀】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9:6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고,
직역:
9:6 Οὐχ οἷον δὲ ὅτι ἐκπέπτωκεν ὁ λόγος τοῦ θεοῦ.
않도다 그와같지 또한 것을 실패하여온 그 말씀이 그 하나님의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3단)
οὐ γὰρ πάντες οἱ ἐξ Ἰσραὴλ οὗτοι Ἰσραήλ·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사람들) 에서 이스라엘 그들이 이스라엘
주해 6-7절
▣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 '폐하여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페프토켄'은 '떨어지다', '효과 없게 되다'의 뜻을 지닌 동사의 완료시제로서 여기서 부정어 '우크'와 함께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에도 효과적이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효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한편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연관된 문맥을 고려한다면 4절에서 시사된 언약에 나타나는 약속의 말씀이다. 즉 1-5절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비애가, 곧이어 결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의미 없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이러한 '약속의 자녀'에 관한 말씀으로 인해, 위로받게 된다는 진술이다.
▣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 본문에서 말하는바 참된 이스라엘은 혈통적 유대인, 즉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참된 언약의 계보는 언약의 아들인 이삭만을 통해 계승된다. 한편 특히 성경 가운데서 이삭과 대조되는 이스마엘은 분명히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식이라도 이삭에게 주어진 약속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은 이미 이삭의 탄생 시에도 강조된 바가 있다. 이 구별은 8절에 나오는 '약속'이라는 한마디 말 속에 깊이 함축되어 있다. 한편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에서 '씨'(스페르마)나 '자녀'(테크논)라는 단어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은 '씨'를 집합적으로 보고 '자녀'를 제한적으로 보는 해석을 취하여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 절에서 언급되는 대로 이 '씨'와 '자녀' 의 차이는 이스마엘과 이삭 간에 확연히 구분되는 '약속과 선택', '육신과 유기'의 개념을 반영한다. 또한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는 구절은 창 21:12의 70인역으로부터 직접 인용했다. 그리고 '칭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데세타이'는 '이름이나 직위가 불리워질 것이다'라는 의미로 각 개체의 이름으로 존재와 본질을 드러내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이름과 연관된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9:7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만 c)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너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하셨습니다.
9:7 아브라함의 씨가 모두 그 자녀가 아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하셨으니,
직역:
9:7 οὐδ᾽ ὅτι εἰσὶν σπέρμα Ἀβραὰμ πάντες τέκνα,
아니다 때문 있다 씨가 아브라함 모든사람 자녀들이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ἀλλ· ἐν Ἰσαὰκ κληθήσεταί σοι σπέρμα.
오직 의한 이삭에 불러질 것이다 네게 씨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주해 6-7절
▣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 '폐하여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페프토켄'은 '떨어지다', '효과 없게 되다'의 뜻을 지닌 동사의 완료시제로서 여기서 부정어 '우크'와 함께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에도 효과적이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효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한편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연관된 문맥을 고려한다면 4절에서 시사된 언약에 나타나는 약속의 말씀이다. 즉 1-5절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비애가, 곧이어 결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의미 없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이러한 '약속의 자녀'에 관한 말씀으로 인해, 위로받게 된다는 진술이다.
▣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 본문에서 말하는바 참된 이스라엘은 혈통적 유대인, 즉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참된 언약의 계보는 언약의 아들인 이삭만을 통해 계승된다. 한편 특히 성경 가운데서 이삭과 대조되는 이스마엘은 분명히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식이라도 이삭에게 주어진 약속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은 이미 이삭의 탄생 시에도 강조된 바가 있다. 이 구별은 8절에 나오는 '약속'이라는 한마디 말 속에 깊이 함축되어 있다. 한편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에서 '씨'(스페르마)나 '자녀'(테크논)라는 단어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은 '씨'를 집합적으로 보고 '자녀'를 제한적으로 보는 해석을 취하여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 절에서 언급되는 대로 이 '씨'와 '자녀' 의 차이는 이스마엘과 이삭 간에 확연히 구분되는 '약속과 선택', '육신과 유기'의 개념을 반영한다. 또한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는 구절은 창 21:12의 70인역으로부터 직접 인용했다. 그리고 '칭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데세타이'는 '이름이나 직위가 불리워질 것이다'라는 의미로 각 개체의 이름으로 존재와 본질을 드러내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이름과 연관된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 주심을 받습니다.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
직역:
9:8 τοῦτ᾽ ἔστιν,
이것은 이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οὐ τὰ τέκνα τῆς σαρκὸς ταῦτα τέκνα τοῦ θεοῦ
아니 그 자녀들이 그 육신의 이런 자녀들이 그 하나님의
ἀλλὰ τὰ τέκνα τῆς ἐπαγγελίας λογίζεται εἰς σπέρμα.
오직 그 자녀들이 그 약속의 여김을 받는다 으로 씨 (동사: 직설법 현재 신적수동태 3단)
주해
▣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본절 가운데에는 6,7절의 보다 보충적인 설명이 나타나고 있다. 즉 7절에서는 '씨'와 '자녀'가 다소 추상적으로 대조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육신'과 '약속'의 대조가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6절에서 '참 이스라엘'이란 말이 7절에서 '아브라함의 씨'로 나타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대치되어 나타나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거로서의 '약속' 개념은 이미 4장에서 자세히 설명되었는데, 구체적으로 이 '약속'이란 창세기 18장에 나타나는 이삭의 출생과 연관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비록 인간의 믿음을 전제로 하긴 하나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그 약속에 속한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이미 그 약속에 속한 자들임을 알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9:9 그 약속의 말씀은 d) "내년에 내가 다시 올때쯤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한 것입니다.
9:9 약속의 말씀은 "내년 이때에 내가 오겠으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한 이것이다.
직역:
9:9 ἐπαγγελίας γὰρ ὁ λόγος οὗτος·
약속의 왜냐하면 그 말씀은 이것
κατὰ τὸν καιρὸν τοῦτον ἐλεύσομαι
따라 그 때를 이 내가올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1단)
καὶ ἔσται τῇ Σάρρᾳ υἱός.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라에게 아들이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주해
▣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 본절의 문두에 '약속'(에팡겔리아)이란 단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앞 구절에서 말하는 약속을 본절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본절의 핵심어인 약속을 보다 강조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이처럼 참으로 '약속'이라는 한마디가 참 자녀됨에 대한 논의의 핵심이다. 또한 이 표현은 6절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라는 구절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과 결부된 말씀의 권위를 재차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한편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생략하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되는 '가르'를 고려한다면 본절은 더욱 강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8절과 본절을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왜냐하면 약속의 말씀이 이것이기 때문이다'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 창 18:10,14를 혼합하여 자유로이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명년 이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톤 카이론 투톤'은 '다음 해 이 때에'를 뜻하는 것으로서) 임신 기간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9:10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9: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직역:
9:10 Οὐ μόνον δέ,
아니다 오직 그러나
ἀλλὰ καὶ Ῥεβέκκα ἐξ ἑνὸς κοίτην ἔχουσα,
또한 역시 리브가 의하여 한사람에 잉태를 가질때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Ἰσαὰκ τ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이삭 그 조상 우리의
주해
▣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 '이뿐 아니라'라는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하며 이를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① 나이가 많았고, 불임이었던 사라에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하여 출산하게 된 경우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젊었으며 출산에 있어서도 이적의 요소가 적은 리브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 있었다는 것이다. ② 어머니가 달랐던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에 선택과 유기가 이루어졌듯이, 같은 여인에게서 난(더구나 쌍둥이인)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이삭의 씨 안에서도 동일한 구별이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근거하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과 이 '구별 작업'에 대해 인간이 항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은 한 어머니인 리브가가 강조된 것과 같이 한 아버지인 이삭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에게서 난 쌍둥이였지만(에서가 비록 형이었더라도) 선택과 유기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1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지속되게 하시며
9:11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고,
직역:
9:11 μήπω γὰρ γεννηθέντων
아직아닌 왜냐하면 태어나지도 (분사: 과거 능동태 속격 복수)
μηδὲ πραξάντων τι ἀγαθὸν ἢ φαῦλον,
않은 실행하지 무슨 선한 혹 악한 (분사: 과거 수동태 속격 복수)
ἵνα ἡ κατ᾽ ἐκλογὴν πρόθεσις τοῦ θεοῦ μένῃ,
위하여 그 따라 택하심을 목적이 그 하나님의 영속하면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사도 바울의 강조점은 야곱과 에서 사이에 존재한 선택이 아직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로 확대된다.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므로 선악의 구분이나 구체적 행위도 없었으므로 모든 조건이 동일하였지만 하나님이 한 편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요 은혜일 수밖에 없다. 한편 '하나님의 뜻'(프로데시스 투 데우)에서 '뜻'에 해당하는 '프로데시스'는 본래 '앞에'(프로)와 '두다'(티데미)의 합성어로서 행위를 하기 전에 앞에 세워두는 것, 즉 '목적', '결정'의 뜻으로 일련의 행동에 대한 사전의 심사숙고와 철저한 수행을 다짐하는 결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에는 '하나님의 뜻'이 '택하심에 따라'되는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신적 '예지'보다 하나님의 '예정'이 앞서는 듯이 묘사되어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2 하나님의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리브가에게 e)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9:12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라고 하셨다.
직역:
9:12 οὐκ ἐξ ἔργων ἀλλ᾽ ἐκ τοῦ καλοῦντος,
아닌 부터 행위들로 다만 부터 그 부르시는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단수)
ἐρρέθη αὐτῇ
그것이말하여졌다 그녀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ὅτι ὁ μείζων δουλεύσει τῷ ἐλάσσονι,
것을 그 큰자가 종노릇할 것이다 그에게 작은 자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주해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야곱과 에서에 대한 이 예언과 성취를 해석하는 견해는 두 가지가 있다. ① 민족적 차원으로 후에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에 속박되었다. ② 개인적 차원으로 장자권을 획득한 야곱과 장자권을 상실한 에서 간의 섬김에 적용된다. 하지만 실제로 에서는 야곱을 섬기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 다니는 모습이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실제로 본절의 상황이 예언된 창 25:23의 문맥도 '두 국민' 혹은 '두 민족'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큰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이 신약에서 형의 뜻으로 사용된 개인적 용례가 전혀 없다. 따라서 본절의 해석은 민족적 차원으로 보는 것이 좋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3 그것은 기록된 바 f)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한 것과 같습니다.
9:13 기록된 것과 같으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하였다.
직역:
9:13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같이 그것이기록되어져왔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τὸν Ἰακὼβ ἠγάπησα,
그 야곱을 내가 사랑하였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τὸν δὲ Ἠσαῦ ἐμίσησα.
그 그러나 에서는 내가미워하였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주해
▣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본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말 1:2,3의 인용으로 본장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유기에 대한 바울 자신의 논증을 더욱 확고히 하는 추가적 진술이다. 따라서 역시 이 구절도 전절과 마찬가지로 야곱과 에서 개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과 에돔 민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한편 '기록된' 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완료수동태로 여기서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기록된 말씀이 한 시대에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구속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미워하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미세사'라는 동사의 개념을 악의가 포함되지 않고 단순히 덜 사랑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 단어가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범죄한 자를 그대로 내버려두어 하나님의 공의로써 이를 미워하는 상태인 '유기'를 표현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로마서 9장 14-18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 그럴 수 없습니다.
9:14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직역:
9:14 Τί οὖν ἐροῦμεν;
무슨 그런즉 우리가 말할것인가?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복)
μὴ ἀδικία παρὰ τῷ θεῷ;
아니다 불의가 께서 그 하나님
μὴ γένοιτο.
결코 그럴 수 없다. (동사: 희구법 과거 중간태/디 3단)
주해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께서 하나는 택하시고 하나는 거부하신 일이 인간적 측면에서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으므로 불공평하다고 항변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자의적 선택이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공평함'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표현은 3장 이후부터 자주 나타나는 앞서 밝힌 사실의 확실성을 다시 한 번 강조적으로 표현하는 바울의 상용구이다.
▣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하나님께‥‥있느뇨'의 문두에 나오는 부정사 '메'는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표현이다. 적자인 이삭을 선택하신 것이나 법적 권리가 없는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행동 혹은 이를 결정하신 하나님의 속성에는 '불의'(아디키아)라는 표현을 적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아 확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럴 수 없느니라' 역시 제기된 질문이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임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바울의 상용구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g)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으니
직역:
9:15 τῷ Μωϋσεῖ γὰρ λέγει·
그 모세에게 왜냐하면 그가(항상)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ἐλεήσω ὃν ἂν ἐλεῶ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1단)
내가 긍휼히 여길 것이다 바 내가 긍휼히 여기게 된다면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καὶ οἰκτιρήσω ὃν ἂν οἰκτίρω.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1단)
그리고 내가 불쌍히 여길 것이다 바 내가 불쌍히 여기게 된다면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주해
▣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 출 33:19의 인용으로 바울은 이제 논의를 전환하여 모세와 연관된 이스라엘의 선택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에 이어 모세를 등장시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두 사람이 지상의 권위를 가진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을 들어 효과적인 논증을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출 33:19은 바르트에 의하면 출 3:1-14에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로 계시하시는 것과 병행을 이룬다고 한다. 즉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은 어떠한 외부의 조건에 대해서도 영향 받지 않으시고 스스로 판단하며 결정하신다. 구체적으로 이 구절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 후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그 증표로 보여 달라고 요구한 데 대한 응답의 말씀으로서, 범죄하였으나마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애굽을 버린 것이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기인함을 보여준다. 한편 빈센트에 의하면 '긍휼히'와 '불쌍히'라는 말씀은 각각 슬픔과 비참함을 외적으로와 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연하기를 그는 이 표현들이 단순히 감정 표현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에 대한 사려 깊은 선택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본절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나아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은혜가 아니고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9:16 그러므로 이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며,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직역:
9:16 ἄρα οὖν οὐ τοῦ θέλοντος
그래서 그런즉 아니다 그(사람) 원하는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단수)
οὐδὲ τοῦ τρέχοντος
도 아니다 그(사람) 달려가는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단수)
ἀλλὰ τοῦ ἐλεῶντος θεοῦ.
오직 그(사람) 긍휼히여기시는 하나님의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단수)
주해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원하는 자'와 '달음박질하는 자'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간구했던 모세를 지칭한다. 아울러 본절에서 그 모세의 기도를 답습한 바울 자신의 동족을 위한 기도와 노력도 결국 모세의 '헛수고'와 진배없을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실로 모든 인간들의 필사적인 노력과도 비길 수 없다. 오직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의해 좌우된다. 한편 '원하는'과 '달음박질하는'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편의 부정적 측면으로서 각각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행동'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본절은 문법적으로 주어가 없는데, 혹자는 주어가 15절의 긍휼이라고 주장하며, 어떤 사람들은 6-15절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양자의 견해는 사실상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지닌 것으로서 그 의미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고 일치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9:17 그래서 성경에 바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h)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9:17 성경이 바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것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직역:
9:17 λέγει γὰρ ἡ γραφὴ τῷ Φαραὼ
말한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그 바로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ὅτι εἰς αὐτὸ τοῦτο ἐξήγειρά σε
것을 위하여 이같은 이일을 내가일으켰다 너를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ὅπως ἐνδείξωμαι ἐν σοὶ τὴν δύναμίν μου
위하여 내개 내보이면 안에 네게 그 능력을 나의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1단)
καὶ ὅπως διαγγελῇ τὸ ὄνομά μου ἐν πάσῃ τῇ γῇ.
그리고 위하여 전파되게하면 그 이름을 나의 안에 온 그 땅에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3단)
주해
▣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선택을 이룬다는 사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은 유기에도 적용됨을 보여 준다. 즉 바울은 그 표본으로서 모세의 상대자였던 애굽의 바로를 들고 있다. 한편 15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분은 비록 기록 가운데는 생략되어 있으나 하나님이 분명한데, 본절에서는 '성경'(그라페)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이름 대신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르시되'(레게이)가 현재형인 것은 말씀의 지속성과 항존적인 영향을 강조적으로 보여준다.
▣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 본절은 출 9:16의 인용으로 '세웠으니'라는 동사에 본래 구약 본문에서 히브리어로 '서다'라는 뜻을 지닌 '아마드'의 히필형(사역형)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70인역은 이를 헬라어 '디아테레데스'라고 번역해 히브리 본문에 충실하게 '네가 보존되었다', '네가 지켜졌다'란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바울은 구약의 본문을 직접 번역하여 본절에서는 '엑세게이라'라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1인칭 능동태로서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이 적절히 강조된 표현이며 구약의 본문의 의미와 보다 더 가깝다. 바울이 사용한 이 동사는 역사의 무대에 배우를 출연시키듯이 하나님이 바로를 선정해 세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악행자였던 바로에 대해 오래 참으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도구로서 사용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죄인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이다. 그리고 바로의 출애굽의 역사 반대는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돋보이게 하였다.
▣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인간들이 항변하지 못할 근거가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은 선택 뿐 아니라 유기를 통해서도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한편 '전파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앙겔레'도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어 '널리 공포하다', '사방으로 소식을 가지고 가다'라는 뜻을 가진다. 실로 출애굽의 역사는 과거 그 일이 일어난 당시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9: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9: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
직역:
9:18 ἄρα οὖν ὃν θέλει ἐλεεῖ,
그래서 그러므로 바 그가원한다 그(하나님)가긍휼히여긴다 (동사1,2: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ὃν δὲ θέλει σκληρύνει.
바 그러나 그가 원한다 그가 완고하다 (동사1,2: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그런즉. - 6절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언급과 실례를 본절에서 결론적으로 언급함을 보여준다.
▣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 - 본절은 출애굽기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구절이다. 한편 8절에서 '육신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간의 대조로 이삭과 이스마엘의 선택과 유기를 예로 든 바울은 13절에서는 야곱을 사랑하심에서 비롯된 선택과 에서의 미워하심에서 비롯된 유기를 종결짓고, 또다시 본절에서는 이스라엘과 모세를 긍휼히 여기신 선택과 바로를 강퍅케 하신 유기를 대조하며 전체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세 구절, 나아가 6절부터 시작된 선택에 관한 논의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델레이)이라는 본절의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즉 본절에서 이 동사(델로)는 뚜렷한 목적을 지향하는 법령적 의미로 사용되어하나님의 필연적이고 주권적인 의지를 강조한다. 한편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을 바울이 '강퍅케'(스클레뤼네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출애굽기의 관련 기사들에 대하여 매우 탁월한 인식을 가지고 요약한 것이다. 즉 출애굽기에서 이 표현은 매우 현저히 자주 등장하며그중 몇 절은 특히 하나님에 의해 강퍅케 된 경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 바로가 강퍅케 된 책임이 바로가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절대로 악을 행하도록 자극하시는 분이 아니며 인간의 잘못은 모두 자신의 근원적인 부패함에 기인한다. 다만 하나님께서 바로의 죄악된 본성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어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으므로 이를 하나님께서 '묵허해두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즉 본절(17절을 포함하여)은 16절에 대한 당연한 부연적 설명으로서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핵심적 논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바로의 죄를 그대로 내어버려 두사 유기되도록 하신 것은 공명정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로마서 9장 19-29절 【하나님의 선택의 정당성】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9:19 그러면 여러분은 제각기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
9:19 그러면 너는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책망하십니까?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라고 할 것이니,
직역:
9:19 Ἐρεῖς μοι οὖν·
네가말할것이다 나에게 그러면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2단)
τί [οὖν] ἔτι μέμφεται;
어찌하여 그런즉 아직도 그(하나님)가 책망하다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단)
τῷ γὰρ βουλήματι αὐτοῦ τίς ἀνθέστηκεν;
그 왜냐하면 뜻에 그의 누가 거역해 왔다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3단)
주해
▣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절대적 주권성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제 독자들의 마음속에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을 스스로 제시한다. 특히 바울이 이스마엘, 에서, 바로로 이어지는 유기된 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완고한 성격은 실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을 겨냥하여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질문은 이러한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만약 유기자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허물하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즉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수는 없으므로 논리적으로 인간의 허물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대적하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데스테겐'의 완료형은 저항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결국 인간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수는 없다는 대답을 강력히 예기하는 표현이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떤 학자는 하나님의 나타난 섭리와 숨겨진 섭리의 차이를 들어 설명하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러한 질문을 품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감취어진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감취어진 뜻이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9: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i)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
9:20 사람아, 참으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박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으신 분께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말하겠느냐?
직역:
9:20 ὦ ἄνθρωπε, μενοῦνγε σὺ τίς εἶ
오 사람아 감히 너는 누구 이냐?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ὁ ἀνταποκρινόμενος τῷ θεῷ;
그 말대꾸하다 그 하나님께 (분사: 현재 중수디 주격 2단수)
μὴ ἐρεῖ τὸ πλάσμα τῷ πλάσαντι· (분사: 과거 능동태 여격 단수)
아니라 말할것이다 그 빚어진것이 그 빚으신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τί με ἐποίησας οὕτως;
어떤 나를 너는 만들었다 이와같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주해
▣ 이 사람아. - 이 호격(vocative)은 단순히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목적 이외에도, 뒤에 이어 나오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칭호와 웅변적이고 강조적인 대조를 이루기 위함이다.
▣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힐문하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타포크리노메노스'는 '반대'(안티)와 '대답하다'(아포크리노마이)의 합성어로서 '반대하여 말하다' 혹은 '되받아 말하다'라는 뜻으로 '감히'라고 번역된 '메눈 게'와 더불어 19절의 빈정거리는 듯한 질문에 대해 단호한 반박의 뜻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이 그러한 반박적 의미를 보다 잘 나타내 준다.
▣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침묵해야 할 까닭을 인간이 바로 피조물이라는 사실로 입증하고 있다. 바울은 이곳에서 사 29:16; 45:9을 인용하면서 근본적으로 인간이 흙에서 유래했다는 창조 기사를 염두에 둠으로써 그 근본이 결코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근본적 관계는 바로 이러한 창조주-피조물의 관계이다. 따라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지혜롭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알리거나 설명할 의무가 없다. 그러므로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항변할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1 토기장이에게는 흙덩이 하나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21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어리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직역:
9:21 ἢ οὐκ ἔχει ἐξουσίαν ὁ κεραμεὺς τοῦ πηλοῦ ἐκ τοῦ αὐτοῦ
혹 않았느냐 가지지 권리를 그 토기장이 그 진흙의 부터 그 같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φυράματος ποιῆσαι ὃ μὲν εἰς τιμὴν σκεῦος ὃ δὲ εἰς ἀτιμίαν;
한 덩어리 만들도록 그 한편 으로 귀한 그릇 또 한편 으로 천한 (부정사: 과거 능동태)
주해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 '진흙 한 덩이'는 본래적으로 가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처럼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토기장이의 손에 의해 빚어지면 가치 있는 그릇이 되듯이 전적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에 의해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 한편 바울은 딤후 2:30에서 그릇의 재료별로 귀히 쓰이는 그릇(금, 은으로 된)과 천히 쓰이는 그릇(나무나 흙으로 된)을 구분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동일한 흙을 재료로 하는 그릇들은 '귀함'과 '천함의 차이'보다는 자주 쓰이지 않는 장식용 그릇과 상용 그릇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본절의 논의는 그러한 사소한 문제라기보다는 본문의 문맥이 선택과 유기를 다루는 맥락임을 통해 볼 때 선택과 유기와 같은 보다 뚜렷한 차이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후자는 전혀 쓸모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토기장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기본적인 그릇의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듯이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다. 한편 '만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사이'는 부정과거 부정사로서, 이는 만드는 권한이 전적으로 토기장이, 즉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2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권능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9:22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분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망받도록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직역:
9:22 εἰ δὲ θέλων ὁ θεὸς ἐνδείξασθαι τὴν ὀργὴν (부정사: 과거 중간태)
만일 그러나 원하면 그 하나님이 보이는 그 진노를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γνωρίσαι τὸ δυνατὸν αὐτοῦ
그리고 알게하는 그 능력을 그의 (부정사: 과거 능동태)
ἤνεγκεν ἐν πολλῇ μακροθυμίᾳ σκεύη
견디셨다 가운데 많은 오래참음 그릇들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ὀργῆς κατηρτισμένα εἰς ἀπώλειαν,
진노의 준비 되어져있는 위하여 멸망을 (분사: 완료 수동태 대격 복수)
주해
▣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 본절을 시작하는 헬라어 본문의 첫 세 단어인 '에이 데 델론'은 문자적으로 '만일 그러나 원하는 바라'는 뜻이지만 '델론'을 '때문에' 대신 '할지라도'의 의미를 추가해 해석하기도 한다. 즉 이를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바이지만'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강조적으로 표현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때문에'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렇다면 '데'라는 접속사는 강한 의미가 아닌 가벼운 역접의 의미로 지금까지 언급한 비유에서 구체적 적용으로 넘어가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민족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표현하는 바울은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죄인에 대한 형벌은 기뻐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적으로 언급함으로 이스라엘의 회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① '진노의 그릇'이 라는 확정적인 용어가 다음절에 나오는 '긍휼의 그릇'과 대조되고 있으며, ② '준비된'(카테르티스메나)이란 완료형이 확정된 상태를 강조하는 것 등이란 점을 들어 본절이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강조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지금까지 바울이 일관되게 논의한 중심 사상인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에 보다 비중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이러한 견해는 '델론'의 분사형을 '때문에'가 아니라 '하고자 하기 때문에'의 의미로 보는 견해이다. 이처럼 이 견해는 하나님이 바로와 같이 패역한 자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 것은 마지막 순간에 그의 진노를 나타내심으로 그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견과 더불어 전항의 주석에서 밝힌 바와 같이 '델론'을 '할지라도'로 번역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3 영광을 받도록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
9:23 또한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려 하셨다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
직역:
9:23 καὶ ἵνα γνωρίσῃ τὸν πλοῦτον τῆς δόξης αὐτοῦ
그리고 위하여 그가 알기 그 부유함을 그 영광의 그의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ἐπὶ σκεύη ἐλέους ἃ προητοίμασεν εἰς δόξαν;
위로 그릇들 긍휼의 그것들을 그가 미리준비하였다 위하여 영광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 '예비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토이마센'은 22절에서 '준비된'으로 번역된 '카테르티스메나'와 의미상 차이가 있다. 즉 후자는 결과에 강조점이 있다면 본절에 쓰인 용어인 전자에는 사전성이 부각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선택은 예정되었고 유기는 예정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둘은 다 예정된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그 강조점이 멸망은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정에 있고 결과가 중시되는 반면, 선택은 예정된 하나님의 은혜로 그 긍휼성이 강조되고 있다. 한편 '영광의 부요함'이라는 표현이 '긍휼의 그릇'에만 한정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선택과 유기에 관련한 하나님의 예정적 섭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므로 양자 모두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 다만 22절과 본절에서는 유기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선택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로움이 강조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9:24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그릇으로 부르시되,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셨으니,
직역:
9:24 Οὓς καὶ ἐκάλεσεν ἡμᾶς οὐ μόνον ἐξ Ἰουδαίων
이것(그릇)들로 역시 그가부르셨다 우리를 아니다 오직 중에서 유대사람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ἀλλὰ καὶ ἐξ ἐθνῶν,
또한 역시 중에서도 이방사람들
주해
▣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녀라. - 비유에서 현실로 논의를 돌이킨 바울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정의한다. 진노의 그릇이 완고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긍휼의 그릇'이 구원으로 초대받은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새로운 의미의 이스라엘은 '부르심'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 구성될 집단으로 육적인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같은 혈통적 구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단지 신적 선택에 포함되어 부르심을 입었는지의 여부와만 관계를 갖는다. 한편 여기서 '부르심'은 23절의 '예비하심'과 같은 의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5 그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글 속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a)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9:25 호세아서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직역:
9:25 ὡς καὶ ἐν τῷ Ὡσηὲ λέγει·
같이 또한 안에 그 호세아서 그가말씀하시는 것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λέσω τὸν οὐ λαόν μου λαόν μου
내가부를것이다 그(사람을) 아닌 백성 나의 백성으로 내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καὶ τὴν οὐκ ἠγαπημένην ἠγαπημένην·
그리고 그(사람을) 아니한 사랑을받고있지 사랑을받고있는(사람이라) (분사1,2: 완료 수동태 대격 단수)
주해
▣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 본절은 그리 정확히 일치되지는 않지만 호 2:23에서 인용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호세아서가 타락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으로서 이방인의 선택을 언급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하게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로루하마, 호 1:6)들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계신다. 이 경우처럼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멀어져 긍휼을 입지 못했던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즉 이방인이 전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았지만 후에는 하나님의 백성 속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약의 예언을 정확한 그 상황보다는 그 내용이나 글자 자체의 의미만으로 인용하는 경향은 바울 뿐 아니라 다른 신약 저자들에게도 일반적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6 b)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b. 호1:10)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함과 같다.
직역:
9:26 καὶ ἔσται ἐν τῷ τόπῳ οὗ ἐρρέθη αὐτοῖς·(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그리고 있을것이다 안에 그 장소 바 말하여졌던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οὐ λαός μου ὑμεῖς,
아니라 백성 내 너희는
ἐκεῖ κληθήσονται υἱοὶ θεοῦ ζῶντος.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단수)
거기서 그들이 부름을받으리라 아들들이라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복)
주해
▣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이 구절은 70인역의 호 1:10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그곳에서'란 ① 이스라엘이 이국인의 대우를 받던 모든 곳으로서 당시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 등지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② 원래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 땅의 백성들이 살던 곳을 가리킨다는 견해들이 있다. 아마도 ②의 암시가 함축되어 있기는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이 유대인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뜻은 ①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따라서 흩어져 있는 모든 유대인의 장소에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듯이, 자신을 전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길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게 되었다는 것이 본절의 핵심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9:27 그리고 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c)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c. 사10:22)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외쳤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더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니,
직역:
9:27 Ἠσαΐας δὲ κράζει ὑπὲρ τοῦ Ἰσραήλ·
이사야가 또 외친다 관하여 그 이스라엘에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ἐὰν ᾖ ὁ ἀριθμὸς τῶν υἱῶν
만일 있을지라도 그 수가 그 자손들의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Ἰσραὴλ ὡς ἡ ἄμμος τῆς θαλάσσης,
이스라엘의 같이 그 모래와 그 바다의
τὸ ὑπόλειμμα σωθήσεται·
그 남은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주해
▣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본절과 28절은 사 10:22,23을 인용하는데, 그 문맥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앗수르의 침략에 관한 예언이다. 한 때는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던 민족이 앗수르의 침략과 그 이후에 있은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침략으로 크게 줄어들고, 후에 이를 하나님의 연단으로 깨닫고 신앙을 회복한 소수의 남은 자만이 겨우 돌아오게 될 것이 예언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외형적 이스라엘의 몰락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것이나, 아울러 이후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염두에 두고 예언적 의미에서 이러한 말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심판의 뉘앙스를 강조하는 것은 이사야서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언급된 구절을 바울이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라고 바꾸어 인용한 점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 많던 이스라엘 뭇 자손은 '남은 자'라는 적은 수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결부된 긍휼하심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은 이사야의 예언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나 바울은 본절에서와 11:5에서 이를 더욱 발전시켜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바울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9-11장의 주제는 이스라엘이 영적인 시련기를 거친 후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을 의도하고 있지만 진정한 남은 자는 이스라엘의 한계를 넘어서며 이방인에게로 확대되어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9:28 주께서는 그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그리고 조속히 온 땅에서 이루실 것이다."
9:28 주께서 그 말씀을 땅 위에서 남김없이, 그리고 속히 끝내실 것이다."
직역:
9:28 λόγον γὰρ συντελῶν
말씀되어진 왜냐하면 끝마치시며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συντέμνων ποιήσει κύριος ἐπὶ τῆς γῆς.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그리고 단축하심은 행할 것이다 주님께서 위에서 이 땅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 사 10:23에 대한 축약적 인용으로 사본상의 문제점이나 번역 문제 등도 게재되어 있어 그 해석이 상당히 어려운 구절이다. 베자 사본(D), 보엘네리안 사본(G), 모스코 사본(K) 등 몇몇 사본은 '필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템논' 뒤에 '엔 디카이오쉬네 호티 로곤 쉰테트메메논'이란 구절을 추가하지만, 이것은 사 10:23의 70인역 번역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므로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등 유력한 사본들의 증거대로 '쉰템논'으로 보는 것이 좋다. 또 한글개역 성경이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로고스'도 '일', '선언' 등으로도 번역되나 27절에서 남은 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언급된 것이라고 볼 때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다. 즉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개됨이 없으며 가능한 한 빨리 반드시 성취된다. 따라서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가 반드시 구원받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분명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29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d)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다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한 것과 같습니다. (d. 사1:9)
9:29 또 이사야가 미리 말하기를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한것과 같다.
직역:
9:29 καὶ καθὼς προείρηκεν Ἠσαΐας·
또한 같이 미리말하고있던 것 이사야가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3단)
εἰ μὴ κύριος σαβαὼθ ἐγκατέλιπεν ἡμῖν σπέρμα,
만일 아니하셨더면 주님께서 만군의 남겨두시지 우리에게 씨를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ὡς Σόδομα ἂν ἐγενήθημεν
같이 소돔과 우리가 되었고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디 1복)
καὶ ὡς Γόμορρα ἂν ὡμοιώθημεν.
또 같이 고모라와 우리가같이되었다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1복)
주해
▣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 사 1:9의 70인역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할 때 '그렇게 적은 남은 자'란 표현이 '씨'라고 고쳐진 것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바울은 7,8절에서 씨에 대해 말하였고 그곳에서 이 단어가 약속의 참여자란 의미로 쓰인 것같이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파멸하게 된 성읍인 소돔과 고모라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남은 자가 하나님의 철저한 멸망의 진노 가운데서도 보존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27절에서는 많은 수의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제한된 남은 자만 구원 얻을 것이 강조된 반면, 본절은 이처럼 심각한 심판 가운데서도 남은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특징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인간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단지 경건한 침묵만을 지킬 수밖에 없음을 밝힌 본 단락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본절의 말씀이 선택된 자에게 베풀어진 크신 은혜를 강조한 것은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9장 30-33절 【행위를 의지한 이스라엘 백성의 과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0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9:30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이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었으나,
직역:
9:30 Τί οὖν ἐροῦμεν;
무슨 그런즉 우리가말할것인가?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복)
ὅτι ἔθνη τὰ μὴ διώκοντα
때문이다 이방사람들이 그 따르지 않는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δικαιοσύνην κατέλαβεν δικαιοσύνην,
의를 얻었다 의를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δικαιοσύνην δὲ τὴν ἐκ πίστεως,
의를 그런데 그 의한 믿음(확신)에
주해 30-31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방인 가운데서도 선택받은 자가 있는 반면, 이스라엘이 거부된 것은 저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으로 항변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바울은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이야기들의 결론을 진술하고 있다. 그 결론이란 한마디로 행위로 '의'를 얻고자 한 이스라엘은 의를 얻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의를 획득했다는 역설이다. 이 '의'의 특징은 바울의 복음이 의존해 있는 근본적인 개념으로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의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소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의의 법, 즉 율법을 지키고자 했으나 율법의 본질은 외면한 채 형식적으로만 준수함으로써 진정한 의의 법에 도달하지 못했다. 즉 율법주의적 유대교는 구원을 얻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 실패의 구체적 이유가 다음 절에 제시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9:31 의의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직역:
9:31 Ἰσραὴλ δὲ διώκων νόμον δικαιοσύνης
이스라엘이 그러나 따르던 법을 의 의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εἰς νόμον οὐκ ἔφθασεν.
안으로 법(관습)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30-31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방인 가운데서도 선택받은 자가 있는 반면, 이스라엘이 거부된 것은 저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으로 항변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바울은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이야기들의 결론을 진술하고 있다. 그 결론이란 한마디로 행위로 '의'를 얻고자 한 이스라엘은 의를 얻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의를 획득했다는 역설이다. 이 '의'의 특징은 바울의 복음이 의존해 있는 근본적인 개념으로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의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소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의의 법, 즉 율법을 지키고자 했으나 율법의 본질은 외면한 채 형식적으로만 준수함으로써 진정한 의의 법에 도달하지 못했다. 즉 율법주의적 유대교는 구원을 얻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 실패의 구체적 이유가 다음 절에 제시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9:32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 그들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9:32 왜 그렇게 되었느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직역:
9:32 διὰ τί;
통하여 무엇을?
ὅτι οὐκ ἐκ πίστεως ἀλλ᾽ ὡς ἐξ ἔργων·
때문이다 아니하고 의하여 믿음(확신)에 도리어 때에 의하여 행위들에
προσέκοψαν τῷ λίθῳ τοῦ προσκόμματος,
그들이걸려넘어졌기 그 돌에 그 걸림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32-33절
▣ 어찌 그러하뇨. -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율법까지 수여받고 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이스라엘이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적 질문이 제기될 것을 예상하고 본절과 다음 절을 통해 이를 해명하기 위해 '어찌 그러하뇨'란 말로써 독자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다.
▣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사 8:14과 28:16이 내용상으로는 상이하지만 본문에서는 결합되어 인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걸림돌은 바울에 의하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였다. 사 8:14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거치는 돌이라고 묘사되며, 사 28:16에서는 시온에 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고 기록되는데, 이 '돌'은 신약에서 성육신하시어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32절에 언급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능력과 행위에 의지한 이스라엘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요긴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들이 되시는 것은 한없이 큰 은혜이다. 참으로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본장에서 논의된 유대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된 구원에 이르는 길이란 주제를 마감하기에 적절한 결구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9:33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e)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f)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e. 사8:14,28:16).
9:33 기록된 것과 같으니 "보아라, 내가 시온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두니,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직역:
9:33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같이 그것이기록되어져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ἰδοὺ τίθημι ἐν Σιὼν λίθον προσκόμματος
보라 내가(항상)둔다 안에 시온에 돌 걸림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καὶ πέτραν σκανδάλου,
그리고 반석을 실족하게하는
καὶ ὁ πιστεύων ἐπ᾽ αὐτῷ
그러나 그(사람) 믿는(확신) 대하여 그에게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οὐ καταισχυνθήσεται.
아니할것이다 조금도부끄러움을 당하지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주해 32-33절
▣ 어찌 그러하뇨. -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율법까지 수여받고 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이스라엘이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적 질문이 제기될 것을 예상하고 본절과 다음 절을 통해 이를 해명하기 위해 '어찌 그러하뇨'란 말로써 독자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다.
▣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사 8:14과 28:16이 내용상으로는 상이하지만 본문에서는 결합되어 인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걸림돌은 바울에 의하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였다. 사 8:14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거치는 돌이라고 묘사되며, 사 28:16에서는 시온에 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고 기록되는데, 이 '돌'은 신약에서 성육신하시어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32절에 언급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능력과 행위에 의지한 이스라엘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요긴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들이 되시는 것은 한없이 큰 은혜이다. 참으로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본장에서 논의된 유대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된 구원에 이르는 길이란 주제를 마감하기에 적절한 결구이다.
첫댓글
1장-8장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칭의와 성화와 영화에 이르는 완전한 구원의 진리이다.
1:18-511 = 죄들의 형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화목제물되심을 믿음으로 의롭함을 받는다.
5:12-8:4 = 죄의 권세와 능력의 세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영의 법으로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름이다.
8:5-39 = 죄의 존재로 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려면 영을 따라 행하고 그리스도와 고나도 함께하여 영광을 받음과 영화롭게 됨이다.
9장-11장 위 진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방인과의 비교로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가 이방인과 동일 한 진리이다.
9:1-33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과 은혜에 대하여
10:1-21 하나님의 그리스도와 그 믿음에 대하여
11:1-36 하나님의 경륜과 그 목적과 순종 대하여
그러므로 로마서의 바울의 복음[믿음으로 칭의, 연합으로 거룩, 영으로 살아 영화에 이름 1-8장]은 감추어있다 알려진 신비의 계시로 이는 모든 이들 즉 온 인류에게 주는 진리이다.
목사님의 열정과 연구는 대단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절대적 주권아래서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롭다함에서 거룩케 되어 영화롭게되어 영광에 이르는 완전한 구원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며 절대적인 주권을 통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으로 9-11장의 부분은 그 실패와 성공이 이스라엘 운명은 믿음을 통해서 만 결정되는 일로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모든 부분으로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근심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1)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1.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는 유대 동족들에 관하여
이것은 참말이지 거짓말이 아니다
그것은 양심이 성령 안에서의 증거이다.
바울은 이것은 내 마음의 큰 슬픔과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차라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저들은 구원을 원한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인이요 아들의 자격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봉사와 약속을 받았다.
믿음의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이요
육체로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오셨다.
그는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본 단락에서 바울은 먼저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토로한다(1-3절).
바울이 이토록 상심하며 괴로워한 이유는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선택받고 언약과 율법을 얻는 특권을 가지긴 했었으나 자기 민족만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구원받을 백성이라는 민족주의적 교만과,구원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에 대한 순종적인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불의를 범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한 잘못된 태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처한 것이다(4,5절).
*큰 특권을 받은 유대인이라도 잘못 된 가르침과 그 교리에 대한 도그마[절대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못된 예정론에 매몰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ㄱ)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ㄴ)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ㄷ)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2.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헛되게 되지 아니하고 주권대로 되는 것이다.
이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여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여 다 씨가 아닌 것은 이삭에게서 나야 씨라 불린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삭의 탄생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리브가가 쌍태를 잉태하였을 때 선과 악 이전에 큰 사람이 작은 자를 섬긴다하셨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리라 하신 성경의 기록과도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신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어 설명한다(6-13절).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스라엘의 계보는 아브라함의 육신(肉身)의 자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약속(約束)의 자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과거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사실이다.
그특권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 민족만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하에 민족 전체가 아닌 일개인 곧 약속의 자녀에게만 주어졌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이, 그리고 장자인 에서가 아닌 야곱이 영적 계보를 계승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로 선택받는 것은 인간의 공로나 조건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는 것이어야 한다. 이스라엘처럼 착각으로 전통과 유전을 도그마하는 위험성 처럼 우리 또한 선택에 대한 잘 못된 교리에 의하여 착각에 빠지면 안된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ㅁ)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ㅂ)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3.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절대로 하나님께 불의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사람이 원한다고 달음질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대로 된다.
성경은 바로에게 이일을 통하여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 되게 하려 함이라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고자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먼저 주권적 선택을 하시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이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증거로서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시며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절대 주권을 가지신 주권자(主權者)이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들에 대한 모든 일들을 계획, 지도하시되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행하실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그러한 주권에 의해 세운 절대 공의롭고 선한 경륜(經輪) 속에 누구를 선택하시든지 않든지 하시는 것이다(14-18절)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이다 원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이 하나님의 선택안에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전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ㅅ)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ㅇ)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ㅈ)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ㅌ)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고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1.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한 것임.
하나님은 절대로 허물이나 실수가 없기에 누구도 그 뜻을 거역 하지 못한다.
사람이 감히 말대꾸 할 수 없다 지음 받은 물건이 지으신 이에게 항의 못한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가지고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위를 가졌다.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 그 능력을 알게 하셨으나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다.
하나님께서 또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그릇에 영광의 풍성을 알게도 하신다.
이 그릇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이 호세아로 말씀하신 대로 내 백성이 아니 자를 백성이라 하고 사랑받지 못 할 자를 사랑한다고도 하셨다.
내 백성이 아닌 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의 말도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
주께서 땅위에서 그 분의 말씀을 온전하고도 신속하게 집행 하실 것이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주께서 씨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다
9:19-24 토기장이 비유를 통한 7대 교훈
1. 피조물인 인간의 삶은 창조주께 헌신하는 것이어야 함(신 10:12
2.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전적 순종해야 함(삼상 15:22)
3. 피조물인 인간의 교만은 창조주 앞에서 실로 어리석은 것임(렘 49:16)
4. 피조물인 인간의 운명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달려있음(시 100:3)
5.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뜻대로만 살아야 함(잠 16:4)
6.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께 항변할 권한이 없음(롬 9:20,21)
7.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께 대한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음(롬 9:30-32)
2,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나온 의로 만 가능함.
이를 알지 못해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곧 믿음에서 난 의를 얻은 것이다.
그의 율법을 추구하던 이스라엘은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들은 믿음에서 난 의가 아니라 행위에서 의를 얻으려다 걸린 것이다.
성경은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를 시온에 둔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 분과 말씀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다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만유의 창조주로서 자신의 뜻대로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권적인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은 특히 선민으로 삼으신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구원 사역 가운데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절대적이지만 실제는 진리의 말씀의 내용을 바로 알고 해석 되어야 그 진리를 온전히 믿을 수 있게 된다.
믿음에서 난 의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ㅋ)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2,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나온 의로 만 가능함.
이를 알지 못해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곧 믿음에서 난 의를 얻은 것이다.
그의 율법을 추구하던 이스라엘은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들은 믿음에서 난 의가 아니라 행위에서 의를 얻으려다 걸린 것이다.
성경은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를 시온에 둔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 분과 말씀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다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얻는 의는 헬라어 원문에는 '엔 디카이오쉬네'가 부가되어 있다. '디카이오쉬네'는 '공정한' 또는 '올바른'을 뜻하는 '디카이오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정의' 또는 '공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남김없이 완전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공정하고 올바르게 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사람은 행위로는 스스로 의로워 지기가 불가능하기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고 자신이 의로우시기에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 동일하고 유대인이 많은 특권을 가졌어도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으로 실패에이른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며 이방인도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 주시는 이 진리는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