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9장 37절 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1-1절 [하나님 나라 임재에 대한 교훈]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9: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9:1 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여기에 서 있는 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기 전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직역: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서있는 몇 사람들은 죽음을
맛을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고 있는 것을 그들이 볼 때까지 결코 아니할 사람들이 있기 위함이라.
9:1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그리고말씀하고계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진실로 내가 말한다 너희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ὅτι εἰσίν τινες ὧδε τῶν ἑστηκότων (분사: 완료 능동태 소유격 복수)
위함이라 있다는 몇사람들은 여기에 그 서서있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οἵτινες οὐ μὴ γεύσωνται θανάτου
바-사람들 아니할 결코 맛을보지 죽음을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3복)
ἕως ἂν ἴδωσιν τὴν βασιλείαν
때 까지 그들이 볼 그 나라를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τοῦ θεοῦ ἐληλυθυῖαν ἐν δυνάμει.
그 하나님의 임하고 있는 으로 능력 (분사: 완료 능동태 목적격 단수)
주해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또'가 헬라어 원문에서는 등위 접속사 '그리고'(카이)로 되어 있다. 이는 본절이 막 8:28-38의 구조 속에 포함되며 그 결론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마태와, 누가는 본절과 병행을 이루는 내용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앞선 사건의 결론 부분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그런데 마가는 다른 복음서의 경우와 달리 본절을 변형 사건의 서론적 위치에 두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본절이 두 사건의 전환적 역할을 담당함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와 같이 배열한 것 같다. 즉 고난 가운데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는 고난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의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변형 사건이 예수의 재림을 앞당겨서 보여주고 확증하는 사건이란 점에서 마가의 의도는 보다 분명해 진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앞선 구절들이 당시 제자들의 상상과는 다른 메시야 관에 입각하여 죽음을 예언함과 동시에 제자들 역시 십자가를 질 것을 교훈했다. 또한 역설에 역설을 거듭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했다, 이러한 충격적인 교훈이 당시 제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이어질 그리스도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으리란 놀라운 소식 역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실로'(아멘)란 말을 사용하여 이성적인 이해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언의 신실성을 확인하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 본 귀절의 해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다. 그 가운데 해석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죽기 전'이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전자의 문제는 후자의 해석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에 대해 하나님 권능이 임하는 대표적 사례를 변화산 사건, 그리스도의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 그리스도의 재림 등 여러 가지로 보아왔다. 이 모든 것이 갖는 부분적인 타당성과 그 한계성에 대하여는 본 주석은 이에 대해 복음의 역동적 사역을 가리키는 복합적 표현이라 본다.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시면서 복음사역을 수행하실 때부터 이미 마귀의 세력은 힘을 잃었고 변화 산 사건을 통하여 승리의 영광을 보여 주었고, 부활을 통하여 이를 실증했으며,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교회에 확산된 것이며 장차 재림을 통하여 완전한 성취가 이루어질 것이다.
2-13절 [변화산 사건과 교훈]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9:2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9:2 육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여,
직역: 육일들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신다. 그리고 그들을 높은 산 속으로 올라가신다.
홀로 그런데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다.
9:2 Καὶ μετὰ ἡμέρας ἓξ παραλαμβάνει ὁ Ἰησοῦς τὸν Πέτρον
그리고 후에 일들을 육 데리고가신다 그 예수께서 그 베드로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τὸν Ἰάκωβον καὶ τὸν Ἰωάννην
그리고 그 야고보 와 그 요한을
καὶ ἀναφέρει αὐτοὺς εἰς ὄρος ὑψηλὸν κατ᾽ ἰδίαν μόνους.
그리고 올라가신다 그들을 속으로 산 높은 로 따(별도) 홀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μετεμορφώθη ἔμπροσθεν αὐτῶν,
그런데 변형되셨다 앞에서 그들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주해
▣ 엿새 후에. -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고난과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예언이 있은 지 엿새 후이다. 병행 본문인 마 17:1에도 이와 동일한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마가와 마태와 다르게 '8일쯤'이라고 밝혀 상호 일치하지 않는 듯한 표현을 한다. 이는 유대인의 일수 계수법이 정확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이에 경과한 시간을 만 6일이나 날짜 상으로는 8일째 되는 날로 보인다. 한편 공관 복음서 전체가 분명한 날짜를 표현하는 것은 이 후에 제자들에게 보여줄 산상변화의 이야기가 막연히 신비적인 이야기나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 특별히 이 세 제자가 동반되는 경우가 복음서 가운데는 세 번 있었다. 본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 이전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그리고 이 일 이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가 그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중요한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12제자 중에서도 이들을 특별히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깊은 뜻을 가르쳤다. 역시 본 사건에서도 제자들 가운데서 지도자 격이며 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세 제자를 택하여 그의 영광을 보여줌으로 그리스도의 본성과 구속사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여 후에 주님께서 쓰라린 고뇌 당하실 때를 그들로 하여금 준비케 하며 이 사건의 중인으로 삼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따로'(모누스)는 '외부와 격리되어'란 뜻으로서 변화 사건이 영적으로 성숙한 선택받은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신비로운 사건임을 암시한다.
▣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본문의 높은 산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으나 옛 전승에 따르면 '다볼 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볼 산은 이스르엘 평야 가운데 위치한 둥그런 산으로 해발 560m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높은 산이라 보기 힘들며 게다가 산 정상에는 요새화된 성이 있었기 때문에 신비스러운 변화의 사건이 일어나기에는 부적당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헤르몬 산'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해발 약 2,800m의 높은 산인데다. 옛날부터 성산(聖山)으로 취급되었고 바로 전에 기록된 사건(막 8:31-38이 일어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 '변형되다'(메테몰포데)는 것은 단순한 외형상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본질적 형상(몰페)이 바뀌어지는 것(메타)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에 대한 신비로운 계시를 가리킨다. 이것은 곧 앞으로 있을 육의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는 일을 예시하는 것이다. 즉 이 변형은 훗날 십자가가의 고난을 받을 것이나 이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승리이며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재현될 천국의 영광과 자신의 심판자로서의 재림을 미리 확증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세례의 사건과 함께 예수의 삶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현현한 유일한 사건이다. 이로써 짧은 순간동안 예수께서는 충만한 영광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 증인들에게 보여진다. 이런 극적 장면을 전개함으로 예수는 아직도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야 하며 부활한 이후에는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이 변형 장면은 세 사람의 선택된 제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완전한 정체, 곧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아직도 충분하게 구체화되어야 할 예고편으로서 이해되어야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9: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한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9:3 그분의 옷이 땅 위의 빨래하는 이가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빛나고 희게 되었다.
직역: 예수님의 그 겉옷이 광체 나는 눈 같이 심히 희어지게 되었다.
땅 위에서 빨래하는 자가 이와 같이 희게 하는 것을 할 수 없다.
9:3 καὶ τὰ ἱμάτια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στίλβοντα λευκὰ λία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이에 그 겉옷이 그의 되었다 광채 나는 희어지게 심히 (동사: 직설법 고거 중간태/디 3단)
οἷα γναφεὺς ἐπὶ τῆς γῆς οὐ δύναται οὕτως λευκᾶναι. (부정사: 과거 능동태)
바-와같이 빨래하는자가 위에서 그 땅 없다 할 수 이 같이 희게하는 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그 옷이 광채가‥‥희어졌더라. - 예수의 변화 장면을 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마가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당시 예수는 옷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가 신성하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경 가운데는 시내산에서 증거의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사실과 신적 지혜를 가진 자가 별처럼 빛날 것과 계시록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 역시 빛나는 얼굴을 가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의 변형 역시 하나님과 만난 지혜 있는 의인임을 드러내는 표시라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9:4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나누었다.
9:4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직역: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말하고 있었다.
9:4 καὶ ὤφθη αὐτοῖς Ἠλίας σὺν Μωϋσεῖ
이에 나타나셨다 그들에게 엘리랴가 함께 모세와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καὶ ἦσαν συλλαλοῦντες τῷ Ἰησοῦ.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그리고 있었다 함께 말하고 그 예수와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주해
▣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나타나. - 본문에 언급된 '나타나'(오프데)는 '목격하다' 혹은 '경험하다'란 뜻을 가진 '호라오'의 부정 과거 직설법으로 이는 엘리야와 모세의 나타남이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직접 경험된바 있는 객관적인 현현임을 가리킨다. 한편 여기에서 예수의 변형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이 존경하는 율법의 대표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모형으로 시내 산에서 이미 여호와의 영광을 경험한 자이다. 그리고 엘리야 역시 구약 예언자 가운데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며 메시야의 선구자에 대한 모델이 됨으로써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여호와의 영광을 호렙 산에서 경험한 자였다. 더구나 모세는 죽었으며 엘리야는 산 채로 승천되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주님의 재림 시에 무덤에서 일어나 주님을 맞으러 나올 죽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반면, 엘리야는 주님이 강림하실 때에 살아서 맞을 자들을 대표한다. 이처럼 주님이 죽은 모세와 승천하였던 엘리야와 함께 나타난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지배하시는 그의 능력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메시야의 그림자였던 저들이 이제는 예수가 참 메시야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즉 모형에 불과했던 저들이 그들을 통해 보여주었던 예표들이 성취되고, 모세가 세웠던 의식들이 폐지되려는 순간에 나타난 것은 합당한 일이다.
▣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 마태와 마가는 대화의 내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지만,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메시야의 출현과 더불어 메시야로서의 사역 완수를 위해 죽으심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의 핵심이므로 이를 대표하는 두 인물과 더불어 이를 직접 수행하실 예수께서 이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시는 것은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9:5 베드로가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9:5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랍비님, 저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랍비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 하였으니,
직역: 그래서 베드로가 대답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음이니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막들 셋을 만들게 된다면 당신을 위하여 하나를 그리고 모세를 위하여 하나를
그리고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를 만들겠습니다.
9:5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ὁ Πέτρος λέγει τῷ Ἰησοῦ·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그래서 대답하여 그 베드로가 말씀드린다. 그 예수님께 (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단수)
ῥαββί, καλόν ἐστιν ἡμᾶς ὧδε εἶναι, (부정사: 현재 능동태)
랍비여 좋음 그것이-이다 우리를 여기 있는 것이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ποιήσωμεν τρεῖς σκηνάς,
그래서 우리가만들게된다면 셋을 장막들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1복)
σοὶ μίαν καὶ Μωϋσεῖ μίαν καὶ Ἠλίᾳ μίαν.
당신을위하여 하나를 그리고 모세를위하여 하나를 그리고 엘리야를위하여 하나를
주해
▣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 여기서 '고하되'(아포크리데이스)는 문자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동사의 시상이 단순과거 수동태인 것으로 보아 예수의 변형과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하였던 것으로 인한 당혹감에서 베드로는 수동적으로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눅 9:32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기 바로 전까지 졸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떠 신비한 사건을 목격했다는 점과 베드로가 평소와는 다르게 예수를 랍비(선생님)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초막 셋을 짓되. - 옛날 유대에서는 귀한 손님이 왔을 경우 특별히 자신들이 쓰는 거처와 구분된 초막을 지어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환회에 넘쳐 초막 셋을 지어 예수와 더불어 세 분을 거기 모시고 그 환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했던 것이다. 이로 보아 그때까지도 베드로는 메시야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으심으로만 인류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며 변형사건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형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며 메시야가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함으로써 단지 장차 일어날 사건의 예고편에 불과한 것을 붙잡아 현실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깨달아야 했던 것은 예수의 변형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이 말을 한 주체를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 둘도 베드로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9: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9:6 이는 그가 매우 무서워하여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직역: 왜냐하면 베드로가 무슨 대답을 하였는지 알지 못함이라. 왜냐하면 그들이 심히 무서움게 되었음이라.
9:6 οὐ γὰρ ᾔδει τί ἀποκριθῇ,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디 3단)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알지 무슨 대답을 하였는지 (동사: 직설법 과거완료 능동태 3단)
ἔκφοβοι γὰρ ἐγένοντο.
그들이되었음이라 왜냐하면 심히무서움게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3복)
주해
▣ 심히 무서워하므로‥‥무슨 말을 할는지. - 마태는 세 제자의 두려워함을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와 연관 짓고, 누가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체험한 일과 연관 지으나, 마가는(2하반절-6절) 그 모든 일과 연관을 짓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본절은 막 8:32와 마찬가지로 변형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 부족과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고, 또 그것들을 결합해서 베드로의 실패를 부각시키고 있다. 즉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극심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밝고 빛난 모습을 보고 무서워 떨 수밖에 없는 죄인된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암시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9:7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9:7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으며, 구름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이 아들의 말을 들어라." 하였다.
직역: 그러자 흰 구름이 위로 덮으며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자 구름 속에서 한 소리가 났다.
이 사람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9:7 καὶ ἐγένετο νεφέλη ἐπισκιάζουσα αὐτοῖς,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그러자 있었다 흰구름이 위로 덮으며 그 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3단)
καὶ ἐγένετο φωνὴ ἐκ τῆς νεφέλης·
그리고 났다 한소리가 속에서 그 구름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3단)
οὗτός ἐστιν ὁ υἱός μου ὁ ἀγαπητός, ἀκούετε αὐτοῦ.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이사람이 이다 그분 아들 나의 그 사랑하는 너희는말을들어라 그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본문에서 '덮었다'는 말은 단순히 위를 덮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있었던 곳에 구름이 펼쳐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믿어졌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예수의 변형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때 들리는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길 수 있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 이 소리는 공관복음서가 기록하고 있으며 베드로는 훗날 자신의 서신서에서 이를 다시금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가운데서 중요한 싯점에 몇 번 반복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첫째로,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렸는데 이것은 메시야의 신분으로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에 대한 성부의 공적 선언이었다. 두 번째는 본 사건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으로서 앞으로 메시야 구원 사역에 증인이 될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수난 주간에 성부와 성자 간에 나누신 신비스러운 대화 가운데 들려주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성부의 증인이 나타나있다. 어쨌든 이러한 기록의 증언은 공생애 초기와 중간과 말기에 성부 하나님이 친히 초자연적 인 말씀으로 예수의 메시야 성을 확인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한편 본 사건에서는 제자들에게 이 음성을 들려줌으로 모세나 엘리야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더 높으신분임을 밝혀 그들에게 확신을 주어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들의 의무임을 알게 하려 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주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근원이 되었다.
▣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 '저희 말을 들으라'는 말은 예수의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듣는다'는 말은 주로 '복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복종해야 할 것은 예수의 모든 가르침이지만 당시 그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막 8:34-38에 나오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8 그들이 바로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9:8 그들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단지 예수님만 자신들과 함께 계셨다.
직역: 그런데 둘러보니 문득 그들은 아무도 이상 보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들 자신들과 예수님만 함께 있었다.
9:8 καὶ ἐξάπινα περιβλεψάμενοι οὐκέτι οὐδένα εἶδον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그런데 문득 둘려보니 더 이상못하였다 아무도 그들은 보이지 (분사: 과거 중간태 주격 복수)
ἀλλὰ τὸν Ἰησοῦν μόνον μεθ᾽ ἑαυτῶν.
그러나 그 예수님만 오직 함께 그들 자신들과
주해
▣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 마태는 제자들이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일으키셨고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구약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구약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가 홀연히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예수를 소개하기 위한 제한된 목적을 가졌음을 보여 줌과 동시에 이러한 것이 없어짐에도 불구하고 예수만이 홀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드러내어준다. 이제는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통치자와 대변인은 모세나 엘리야가 아니라 예수인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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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시어 인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때까지는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직역: 그리고 그들이 산으로부터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히 명하셨다.
그 아들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게 된다면,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게 된다면 말하지 않기 위함이라.
9:9 Καὶ καταβαινόντων αὐτῶν
그리고 내려올 때에 그들이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복수)
ἐκ τοῦ ὄρους διεστείλατο αὐτοῖς
부터 그 산 예수께서엄히명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3단)
ἵνα μηδενὶ ἃ εἶδον διηγήσωνται,
위함이라 아무에게도 않기 자세히 말하게된다면 하지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3복)
εἰ μὴ ὅταν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κ νεκρῶν ἀναστῇ.
는 외에 때에 그 아들 그 사람의 가운데 죽은자 살아나게된다면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예수께서 경계하시되‥‥이르지 말라. - 예수의 변모 광경은 주님이 메시야라는 진리를 제자들에게 확증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것이었다. 무엇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했으므로 주님은 메시야라는 증거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세 제자와 동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이 그 사실을 즉시 말해버린다면 이는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것이 되며 주님의 구속을 위한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변모 사건을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일을 영원히 비밀로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이라는 한정적 말을 덧붙였다. 이는 부활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은 확증된 것이며 이 이후에는 이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메시야의 함구령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방해받지 않게 하려 함이고 다른 일면으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난 이후에야 확실한 메시야의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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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9:10 그들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서로 물었다.
9: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서로 논의하였다.
직역: 그리고 그들이 말씀되어진 것을 자신들끼리 굳게 간직하였다.
죽은자들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무슨 일인가 질문 하였다.
9:10 καὶ τὸν λόγον ἐκράτησαν πρὸς ἑαυτοὺς συζητοῦντες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그리고 그 말씀되어진 그들이굳게간직하였다 끼리 자신들 질문하며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τί ἐστιν τὸ ἐκ νεκρῶν ἀναστῆναι. (부정사: 과거 능동태 주격)
무엇 일인가 그 가운데 죽은자들 일어나는 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 제자들은 메시야 함구령의 시한인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며 결국 죽임을 당하리라는 생각과 더불어 죽은 메시야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그들은 번민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제자들도 죽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부활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인자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막 8:27 이후 계속되는 예수의 종말 예고를 통한 자기 계시와 변화 산에서의 하나님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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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9:11 그들이 예수께 묻기를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 하니,
9:11 그들이 그분께 질문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니,
직역: 그래서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께 묻고 있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말하나이까?
엘리야가 먼저 오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 라는 것을
9:11 Καὶ ἐπηρώτων αὐτὸν λέγοντες·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그래서 그들이묻고있었다. 그에게 말하기를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ὅτι λέγουσιν οἱ γραμματεῖς
어찌하여 말하나이까? 그 서기관들이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ὅτι Ἠλίαν δεῖ ἐλθεῖν πρῶτον; (부정사: 과거 능동태)
것을 엘리야를 반드시 해야한다 오는 것을 먼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예수께 그 의미를 묻되 바로 묻지 못하고 엘리야의 출현과 관련된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을 들어 묻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은 끊임없이 메시야에 앞서서 엘리야가 올 것을 말하고 있었다. 즉 제자들은 먼저 와서 죄인들을 회개시키며 모든 것을 회복하여야 할 엘리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야되신 예수께서는 이미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부활하신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논조로 질문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가 먼저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하니 제자들에게 이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9: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런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찌 된 일이냐 ?
9: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자에 관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을 것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직역: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런데 인자의 대하여 어찌 기록되었느냐? 많은 일로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격기 위함이라.
9:12 ὁ δὲ ἔφη αὐτοῖς·
그 이에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Ἠλίας μὲν ἐλθὼν πρῶτον ἀποκαθιστάνει πάντα·(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엘리야가 과연 와서 먼저 회복한다 모든 것을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πῶς γέγραπται ἐπὶ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그런데 어찌 기록되어있느냐 대하여 그 아들에 그 사람의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ἵνα πολλὰ πάθῃ καὶ ἐξουδενηθῇ;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3단)
위함이라 많은일로 고난을격게된다면-격기 그리고 멸시를 당한다면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질문에 대답하심에 있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이 옳다고 긍정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받으며,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 역시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한편 여기서 '회복한다'(아포카디스타노)는 것은 문자적으로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고치다', '올바르게 하다', '질서를 바로잡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엘리야가 왜곡된 모든 사물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개조시키는 도구가 되어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그가 오심을 준비하도록 할 것이라는 엘리야의 사명을(말 4:6) 확증하셨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9: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그를 두고 기록한 대로,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기록된 것과 같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에게 행하였다."
직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가 실로 이미 왔으나 그런데 그에 대하여 기록된 것 같이
그가 원하고 있는 대로 무슨 일이듣지 그에게 행하였다.
9:13 ἀλλὰ λέγω ὑμῖν ὅτι καὶ Ἠλίας ἐλήλυθεν,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그러나 내가말한다 너희에게 것을 실로 엘리야가 와서 있으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καὶ ἐποίησαν αὐτῷ ὅσα ἤθελον,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그런데 그가 행하였다 그에게 무슨일이든지 원하고있는대로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ἐπ᾽ αὐτόν.
같이 기록된 바와 대하여 그에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주해
▣ 엘리야가 왔으되‥‥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 병행 귀절인 마 17:12에는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의도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는 세례인 요한을 말하며, 그 세례인 요한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죽인 것처럼 자신도 그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때 이로써 예수는 또다시 인자가 고난 받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한편 여기서'임의로 대우했다'는 말은 '원하는 것이면 멋대로 행했다'(they did to him whatever they desired)는 뜻으로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손에서 정당한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 불법적으로 행하는 악행에 희생 당했음을 말한다.
14-29절 [귀신들린 아이의 치유와 교훈]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9:14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고, 율법학자들이 그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
9:14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그 제자들 주위에 큰 무리가 있었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함께 논쟁하고 있었다.
직역: 그리고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았다 많은 무리가 제자들을 둘러있는 서기관들이 그들과 논쟁하고
9:14 Καὶ ἐλθόντες πρὸς τοὺς μαθητὰς
그리고 와서 에게로 그 제자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εἶδον ὄχλον πολὺν περὶ αὐτοὺς
그들이보았다 한 무리 많은 둘러있는 제자들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γραμματεῖς συζητοῦντας πρὸς αὐτούς.
그리고 서기관들을 논쟁하고 관하여 그들과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주해
▣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예수의 변화산상의 사건과 본사건의 시간적 차이를 누가는 '이튿날'이라고 밝힌다. 한편 본문의 '제자들'은 12명의 제자 중 예수와 더불어 동행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9명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산 밑에서 예수와 세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 9명의 제자들은 산 밑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서기관들과 심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서기관들의 악의의 찬 조롱을 받으며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후에 전개되는 내용으로 보아변론의 내용은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과 그에 파생된 병 고침의 정당성에 관한 논쟁인 것 같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를 항상 경계하고 있던 중 예수가 없는 틈을 타 아직 영적으로 충분히 무장치 못한 제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9: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서는 몹시 놀라, 달려와서 인사하였다.
9:15 모든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크게 놀라 그분께 달려와서 인사하니,
직역: 그런데 모든 무리가 즉시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가까이 달려와서 예수님께 인사하고 있었더라.
9:15 καὶ εὐθὺς πᾶς ὁ ὄχλος ἰδόντες αὐτὸν ἐξεθαμβήθησαν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복)
그런데 곧(즉시) 모든 그 무리가 보고 그를 심히 놀라게 되었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복수)
καὶ προστρέχοντες ἠσπάζοντο αὐτόν.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간태 3복)
그리고 가까이 달려와서 인사하고 있었더라 그에게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주해
▣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문안하거늘. - 예수가 나타나자 무리들이 심히 놀랐다는 상황을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무리들이 놀란 이유에 대해서는 본문이 명백히 밝히지 않으나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과거 모세의 경우처럼(출 34:29,30) 산상에서 변화의 광채가 아직 예수의 얼굴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에 대해 심히 놀랐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예수께서 변화산 사건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신 사실과 변화의 광채를 그 때까지 간직한 사실과는 조화를 이루기 힘들기 때문에 이 견해는 수긍하기 힘이 든다. 둘째로 생각해 볼 수있는 것은 제자들이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할 뿐 아니라 서기관들과 변론 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었으며 이러한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갑작스런 출현은 놀랄 정도로 반가운 일이었다는 견해로서 본문이 전개되는 상황으로 보아 후자가 더 자연스럽다. 한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가운데 두고 모여 있는 세 부류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 병을 고치려다 실패한 제자들, 병을 고치거나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모여든 방관자들, 제자들을 힐난하는 서기관들이 그들이다. 이는 예수가 없는 동안 혼란이 야기되었다는 점에서 마치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산상에 있는 동안 산 아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며 범죄하는 무리들의 상태와 흡사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9: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들과 무슨 논쟁을 하고 있느냐 ?"
9: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가 그들과 무엇을 논쟁하고 있느냐?" 하시므로,
직역: 그리고 예수께서 그 서기관들에게 너희가 그들과 무엇을 인하여 논쟁하느냐?
9:16 καὶ ἐπηρώτησεν αὐτούς·
그리고 예수께서물으셨다 그 서기관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τί συζητεῖτε πρὸς αὐτούς;
무엇을 너희가 논쟁을하느냐 그들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예수께서 물으시되 무엇을‥‥변론하느냐. - 예수께서 던지신 질문은 제자들과 서기관들과의 변론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해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미 주님은 제자들의 부족함과 그들의 당면한 필요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계셨으며 신적 지각력으로 당시 제자들이 당하던 곤경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문을 선행하시는 것은 그들 자신의 필요를 깊이 자각케 하기 위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삶 가운데서 많은 어려움을 맞게 될 때 주님께서 이를 먼저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어려움에 처한 자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9:17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9:17 무리 중 하나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제가 벙어리 영 들린 제 아들을 선생께 데려왔습니다.
직역: 그래서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이여 당신에게로 벙어리 귀신이 들린제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9:17 Καὶ ἀπεκρίθη αὐτῷ εἷς ἐκ τοῦ ὄχλου·
그래서 대답하여 그들 하나가 중에서 그 무리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디 3단)
διδάσκαλε, ἤνεγκα τὸν υἱόν μου πρὸς σέ,
선생님이여 데려왔다 그 아들 제 에게로 당신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ἔχοντα πνεῦμα ἄλαλον·
들린 영을 벙어리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주해
▣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마태와 누가는 14-16절의 내용을 생략하고 예수가 산에서 내려오실 때 무리 중에 한 사람, 즉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와 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당시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변론이 떳떳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을 못했고,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서기관들과의 변론에서 열세에 빠진 자신들의 무능력을 폭로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했을 것이며. 그리고 군중들은 자신들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 누가에 의하면 그 아이는 외아들이었고(눅 9:38), 마태는 그 병명을 간질병이라 밝히고 있다(마 17:15). 이는 18절에 묘사된 환자의 중세로 보아 알 수 있는데, 이 아들에게는 말 못하는 것 이외에 악령이 육체를 지배하여 간질 중세 또한 있었던 것으로 본다. 한편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질병은 악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귀신들린 자'란 표현과 '간질병'이라는 표현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심한 병에 대하여 제자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무리들은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그의 부친만은 이의 치료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와 실정을 고한 것이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9:18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내쫓지 못했습니다."
9:18 어디서든지 그 영이 그를 사로잡으면, 그가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영을 쫓아내 달라고 말하였으나, 그들이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직역: 어디서든지 아이를 그것이 붙잡기만 하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거품을 흐립니다.
그리고 이빨들을 갊니다. 그리고 아이가 쇠악해 집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쫓아내게 된다면 쫓아내기 위함이라.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업었습니다.
9:18 καὶ ὅπου ἐὰν αὐτὸν καταλάβῃ ῥήσσει αὐτόν, (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그리고 어디서 든지 그를 그것이붙잡기만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를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ἀφρίζει
그러면 거품을 흘립니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τρίζει τοὺς ὀδόντας
그리고 갊니다 그 이빨들을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καὶ ξηραίνεται·
그리고 쇠약해지나이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καὶ εἶπα τοῖς μαθηταῖς σου
그래서 내가말하였다 그 제자들에게 당신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ἵνα αὐτὸ ἐκβάλωσιν,
위함이라 그것을 그들이쫓아내게된다면-쫓아내기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οὐκ ἴσχυσαν.
그러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 귀신이 어디서든지‥‥파리하여 가는지라. - 아이의 아버지는 주저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간질병의 증세를 상세히 진술한다. 또한 제자들이 자신의 아들의 질병을 능히 고치지 못한 사실까지 더불어 말한다. 이렇게 상술하는 가운데서 아들의 질병을 고쳐달라는 아버지의 간구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상세히 아뢰는 기도의 모습을 배우게 된다.
▣ 선생의 제자들‥‥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제어할 권능을 받았다. 또한 귀신을 내좇아 본 경험까지 있었다(막 6:13). 그러나 산 아래 있던 아홉 제자들은 이번 경우에는 귀신을 내어 쫓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의 권위에도 손상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을 런지도 모른다. 한편 마가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원인을 기도의 영이 없이 했기 때문이며(29절), 마태는 믿음이 적은 연고에서 그 까닭을 찾았다. 즉 그들은 전에 귀신을 쫓아낸 경험만 생각하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였던 것이다. 실로 주님께서 주신 권세는 믿음으로 행사될 때만이 효과를 낼 수 있었으며, 믿음은 영적 훈련과 기도의 경건 생활을 통해서 배양되어야 한다. 어쩌면 주님이 잠간 안 계신 것, 또는 세 제자들만 대동하고 뒤에 그들만 남기신 것 등이 그들의 영적 열심을 가라앉히고 믿음을 감소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패는 곧 그들을 당황하게 했을 뿐 아니라, 주님에게서 영광을 빼앗기고 대적자들에게 비판의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인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9: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9: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그를 내게로 데려와라." 하시니,
직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인가?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위해 참을 것인가? 그를 나에게로 데려오라.
9:19 ὁ δὲ ἀποκριθεὶς αὐτοῖς λέγει·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그분께서 이에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단수)
ὦ γενεὰ ἄπιστος,
오 세대여 믿음이 없는
ἕως πότε πρὸς ὑμᾶς ἔσομαι;
까지 언제 함께 너희와 내가있을것인가?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1단)
ἕως πότε ἀνέξομαι ὑμῶν;
까지 언제 내가참을것인가? 너희를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 1단)
φέρετε αὐτὸν πρός με.
데려오라 그를 에게로 나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의 영적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본문에서 '믿음이 없다'(아피스토스)란 말은 단순히 믿음이 부족한 상태를 말함이 아니라 완전히 믿음이 없으며 오히려 진리에 대하여 '패역한', 곧 거스리는 불신앙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세대'(게네아)란 문자적으로는 '족속' 혹은 '자손'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특히 믿음이 없어 수치를 당하는 제자들을 말하며 이와 더불어 주님의 책망을 들어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한 무리들을 비롯해 당시의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의 불행을 보면서 한 사람의 불행을 본 것이 아니라 무감각하고 불신앙적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영적 생동력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시고 탄식하시며 질책하신 것이다.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 예수님의 이 말씀은 패역한 세대와 함께 계시기를 괴로워하시는 탄식인가? 아니면 오래지 않아 패역한 세대를 이별하실 것을 염두에 두시고 이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의미인가? 예수께서 간질병 들린 아이를 돌아보신 것을 보아 이 말씀은 그의 긍휼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즉 이 말씀은, 그가 믿음 없는 세대와 함께 계실 기간이 길지 못할 것을 가엽게 여겨서 한번이라도 더 긍휼을 베푸시려는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 본문에서 언급된 '참으리요'(아네크소마이)라는 말은 '인내한다', '용서한다' 혹은 '버티어내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이제까지 믿음 없는 백성들을 위해 활동하시고 회개를 촉구했는데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니 언제까지 기다려야 깨달아 알겠느냐는 뜻으로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책망의 표현은 모든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메시야로 더디 믿는 사실에 대한 질책에 비하면전혀 혹독한 말씀이 아니다. 물론 이 말씀이 예수께서 무리들을 향한 사랑과 인내의 마음을 포기하셨다는 뜻은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을 각성시켜 더 깊은 영적 성숙으로 이끌고자 의도하셨던 것이다.
▣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 실망하고 탄식할 만한 제자들과 무리들의 믿음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 뿐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시는데 있어 결코 인내심을 버리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즉 고통당하는 인간을 보시면서 얼마나 깊은 동정심과 애끓는 사랑을 가지셨는지 이러한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9:20 그래서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왔다. 귀신이 예수를 보자, 아이에게 즉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었다.
9:20 그들이 그를 예수께 데려왔다. 그 영이 예수님을 보자 그 아이에게 곧 경련을 일으켜, 그가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었다.
직역: 그래서 그들이 아이를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왔다. 그러자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본 후에 즉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아이를 그래서 땅 위에 넘어지고 거품을 흘리며 뒹굴고 있었다.
9:20 καὶ ἤνεγκαν αὐτὸν πρὸς αὐτόν.
그래서 데려왔다 그를이 에게로 그를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ἰδὼν αὐτὸν
그러자 본후에 그를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τὸ πνεῦμα εὐθὺς συνεσπάραξεν αὐτόν,
그(더러운) 영이 즉시(곧) 경련을일으키게하였다 그를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πεσὼν ἐπὶ τῆς γῆς
그래서 넘어지고 위에서 그 땅의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ἐκυλίετο ἀφρίζων.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그가뒹굴고있었다 거품을흘리며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 3단)
주해
▣ 귀신이 예수를 보고‥‥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18절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병 증세를 고한 내용과 그리고 본절을 함께 고려해 볼 때 이 아이의 병은 귀신에 의해 야기된 간질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귀신은 간질을 매개로 하여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치유하심으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신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예수와 사탄의 세력 간에 벌어지는 격렬한 싸움의 한 양상이라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9: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 하고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때부터입니다.
9:21 예수께서 그의 아버지에게 물으시기를 이 아이에게 이 일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시므로 그가 말하였다. 어려서부터입니다.
직역: 그래서 예수께서 그 아이 아비에게 물으셨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되었느냐?
이일이 아이에게 되어있던 기간을 말하였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9:21 καὶ ἐπηρώτησεν τὸν πατέρα αὐτοῦ·
그래서 그가 물으셨다 그 아비를 그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πόσος χρόνος ἐστὶν ὡς τοῦτο γέγονεν αὐτῷ;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3단)
얼마나오랜 시간이 되었느냐 기간이 이일이 되어있던 그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ὁ δὲ εἶπεν· ἐκ παιδιόθεν·
그가 이에 말하였다 부터 어릴 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언제부터‥‥어릴 때부터. - 본절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예수께서 그 아이를 깊이 관심을 가지고 동정하셨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서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 앓아 매우 심각한 상태인 것을 시사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9:22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십시오."
9:22 그영이 아이를 죽게 하려고 자주 불에도 던지고 물에도 던졌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실 수 있다면,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를 도우소서."
직역: 귀신이 아이를 자주 불 속과 물속 까지도 던졌나이다. 아이를 죽이게 된다면 죽이기 위함이라
그러나 만일 무엇이든 당신이 하실수 있거든 우리를 위하여 측은히 여기시여 도와주세요.
9:22 καὶ πολλάκις καὶ εἰς πῦρ αὐτὸν ἔβαλεν
그리고 자주 까지도 속으로 불 그를 귀신이던졌나이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εἰς ὕδατα ἵνα ἀπολέσῃ αὐτόν·
그리고 속으로 물들을 위함이라 죽이게된다면-죽이기 그를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ἀλλ᾽ εἴ τι δύνῃ,
다만 만일 무엇이던 당신이하실수있거든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단)
βοήθησον ἡμῖν σπλαγχνισθεὶς ἐφ᾽ ἡμᾶς. (명령분사: 과거 수동태/디 주격 2단)
도와주세요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어 위하여 우리를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2단)
주해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자주 던였나이다. - 본절에서 귀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육을 파괴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즉 귀신은 한 인간의 영과 육을 사로잡아 지배하고 조종함으로 전인적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자주'(폴라키스)란 말은 지속적 반복을 보여 주는 부사로서 귀신의 활동으로 인해 생명이 위험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불쌍히 여기사. - 믿음이 없고 회의적인 태도였으나 자신의 심경과 형편을 솔직하게 아뢰고 있다. 이러한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불신앙적인 모습은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18절). 제자들을 통해 무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환자의 아버지는 도와주시기를 원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록 부족한 믿음이나 자신의 진실된 상태를 하나님께 아뢰는 자는 결국 주의 은총을 받게 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9:2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9:2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할 수 있다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직역: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믿는 것을 할수 있다면 믿는사람에게 모든것을 할 수 있다.
9:23 ὁ δὲ Ἰησοῦς εἶπεν αὐτῷ·
그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τὸ εἰ δύνῃ,
그 만일 할수있다면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2단)
πάντα δυνατὰ τῷ πιστεύοντι.
모든것을 할수있느니라 그 믿는사람에게 (분사: 현재 능동태 여격 단수)
주해
▣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 예수께서 아비의 회의적인 믿음에 대하여 그 아비의 '하실 수 있거든'이란 말(22절)을 반복하시면서 반신반의 믿음을 경책하신 것이다. 즉 본문의 말씀은 내가(예수님) '할 수 있느냐'라는 것보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실로 아이의 병이 낫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아이를 치료할 능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아비가 예수의 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한 것도 그들 마음속에 내재된 이런 불신앙 때문이었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능력의 제한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본문은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판타;)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는바 이는 아이의 아버지가 말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란 제한적 신앙의 댓구가 되는 말로서 믿음의 절대성을 밝힌다. 즉 믿음을 가진 자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손길이 믿음 있는 자와 함께 하여 그로 말미암아 능히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보다 근원적인 신앙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주께서 하시는 일에 미심쩍어 하는 인간의 제한된 신앙을 가지지 않는다. 이처럼 신앙이란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는 것이며, 그러할 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9:24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24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곧 부르짖으며 말하였다. "제가 믿습니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
직역: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 지른 후 눈물로 말하고 있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9:24 εὐθὺς κράξας ὁ πατὴρ τοῦ παιδίου ἔλεγεν·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곧(즉시) 소리지른 후 그 아버지가 그 아이의 로 말하고있었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πιστεύω·
내가믿습니다 주여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βοήθει μου τῇ ἀπιστίᾳ.
당신이도와주소서 나의 그 믿음없는 것을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단)
주해
▣ 곧‥‥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 아이의 아비는 믿음 없음에 대해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자 '즉시'(유뒤스)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즉 자기를 도와 아이의 병을 고쳐 달라한(22절) 그가 믿음이 치병(治病)에 선행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교훈을 들은 후 이제는 자기를 도와 믿게해 달라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전자의 '믿는다'는 고백과 후자의 '그 믿음에 대하여 지 ․ 정 ․ 의를 통한 믿음의 확증이 없다'는 말이 서로 상반되는듯하나 이러한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믿는다'는 말과 그 믿음에 대한 확신 있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 가운데서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하는 그러한 솔직하고도 진실한 고백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도록 해야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9:25 예수께서 무리가 떼를 지어서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벙어리, 귀머거리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하셨다.
9:25 예수께서 무리가 몰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영아, 내가 네게 명령하니,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아이에게 들어가지 마라."
직역: 예수께서 한 무리가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엄히 꾸짖었다. 더러운 영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에서 벙어리 되고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네게 명한다. 그 아이로부터 나오라.
그리고 더 이상 그 아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들어가지 말라.
9:25 Ἰδὼν δὲ ὁ Ἰησοῦς ὅτι ἐπισυντρέχει ὄχλος,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보시고 그리고 그 예수께서 것을 달려모이는 한무리가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ἐπετίμησεν τῷ πνεύματι τῷ ἀκαθάρτῳ λέγων αὐτῷ·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엄히꾸짖었다 그 영에게 그 더러운 말씀하시기를 그것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τὸ ἄλαλον καὶ κωφὸν πνεῦμα, ἐγὼ ἐπιτάσσω σοι,
그 영아 그리고 그 벙어리되고 귀머거리 내가 명한다 네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ἔξελθε ἐξ αὐτοῦ
나오라 부터 그로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2단)
καὶ μηκέτι εἰσέλθῃς εἰς αὐτόν.
그리고 더 이상말라 들어가게된다면 들어가지 속으로 그의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2단)
주해
▣ 무리의 달러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 예수께서는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이적을 행하심으로 발생될, 즉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신기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러므로 더 많은 무리가 모이기 전에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려 한 것이다. 한편 사악한 귀신을 대하시는 주님의 태도는 절대적인 권위로 단호히 질책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탄의 세력은 항상 그리스도와 적대될 수밖에 없는 '더러운', 즉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 '나오고'(엑셀데)와 '들어가지 말라'는 동사는 모두 부정 과거로 동작의 단회성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명령은 귀신으로 하여금 단번에 나와서 다시는 들어가지 말 것을 말씀하시는 강력한 명령이다. 즉 간질병은 정상적인 상태와 병적인 발작 상태를 반복하는 것 이므로 완전한 치유는 일시적인 발작의 멈춤이 아니라 영구한 발작이 추방임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9:26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나갔다. 아이는 죽은 것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다" 하였다.
9:26 그 영이 부르짖으며 아이에게 경련을 심하게 일으킨 후에 나가니, 그가 죽은 것같이 되고, 많은 이들은 "아이가 죽었다." 라고 하였다.
직역: 이에 소리지르고 아이를 많은 경련을 일으키고 귀신이 나갔다. 그러자 아이가 죽은사람과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을 것이다.
9:26 καὶ κράξας
이에 소리지르고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πολλὰ σπαράξας ἐξῆλθεν·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그리고 많은 경련을일으키게하고 그를 귀신이나갔다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ἐγένετο ὡσεὶ νεκρός,
그러자 아이가되었다 같이 죽은사람과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3단)
ὥστε τοὺς πολλοὺς λέγειν
그러므로 그 많은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정사: 현재 능동태)
ὅτι ἀπέθανεν.
것을 그가 죽었을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죽었다 하나. -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고 있는 모습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귀신의 최후의 발악으로 아이에게 극심한 발작을 일으켰으나 이에 예수의 추방명령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아이에게 머물지 못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귀신의 활동이 멈출 아이는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다. 이는 귀신의 발작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와 더불어 예수의 권위 있는 명령에 따라 그 아이 안에서 귀신이 더 이상 활동치 않음으로써 완전히 치료된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9:27 그런데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섰다.
9:27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키실 때 그가 일어섰다.
직역: 그러나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붙잡고 일으켰다. 그러자 아이가 일어났다.
9:27 ὁ δὲ Ἰησοῦς κρατήσας τῆς χειρὸς αὐτοῦ
그 그러나 예수께서 붙잡고 그를 손들을 그의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ἤγειρεν αὐτόν,
일으켰다 그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ἀνέστη.
그러자 그가 일어났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예수께서 권능으로 병자를 치유하실 때에 자주 취하시는 방법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송장처럼 힘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친히 잡아 일으키신 것은 아이가 죽었다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 준다. 또영적으로 번사 상태에 빠진 자를 예수께서는 친히 손을 내밀어일으키심으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다는 간접적인 교훈을 주기도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9: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모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
9: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조용히 그분께 묻기를 "어찌하여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므로,
직역: 예수께서 집안으로 들어간 후에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었다.
조용히 따로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는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까?
9:28 Καὶ εἰσελθόντος αὐτοῦ εἰς οἶκον
그리고 들어간 후에 그가 안으로 집에 (분사: 과거 능동태 소유격 단수)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κατ᾽ ἰδίαν ἐπηρώτων αὐτόν·
그 제자들이 그의 로 따 질문하고있었다 그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ὅτι ἡμεῖς οὐκ ἠδυνήθημεν ἐκβαλεῖν αὐτό; (부정사: 과거 능동태)
어찌하여 우리는 없었습니까 할 수 쫓아내는 것을 그것을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디 1복)
주해
▣ 우리는 어찌하여‥‥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흔히 있었던 경우와 같이 중요한 일을 끝내고 예수와 제자들은 무리들과 헤어져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사건의 결론과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이때 제자들은 '종용히'(카타이디안), 즉 개인적이고 은밀하게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는지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께로 가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자신들의 무능력에 심각하게 고민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치료했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고민은 제자들 뿐 아니라 본서가 기록될 당시 본서의 독자들에게도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 영적으로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성도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에 이어 나오는 29절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자들에게 문제 해결의 핵심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9: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내쫓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내쫓을 수 없다."
9: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종류의 것은 기도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직역: 이에 에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종류는 예배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는 것을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느니라.
9:29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ῖς·
이에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τοῦτο τὸ γένος ἐν οὐδενὶ δύναται
이런 그 종류는 의하여 아무것에도 없느니라 할 수 (동사: 직설법 과거 중수디 3단)
ἐξελθεῖν εἰ μὴ ἐν προσευχῇ.
나가는 것을 에 않고 통하지 기도(예배와 금식) (부정사: 과거 능동태)
주해
▣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 본문의 '이런 유'(투토토 게노스)라는 표현은 귀신 가운데서도 여러 유형이 있으며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아이에게 실린 귀신은 과거 제자들이 쫓아낸 귀신들보다 더 악랄하며 강했던 것을 암시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기도만이'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에 비해 마태는 '믿음이 적은 탓'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결코 별개가 아니며 상관적 관계를 갖는다. 즉 기도는 믿음이 있음을 나타내며 믿음 없는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제자들은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이미 받았지만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능력의 주인되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신앙 관계가 유지되어야 함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제자들은 기도함으로 계속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데 실패했다. 실로 기도를 통해 의심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는 자세가 영적인 일을 이루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자신들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교만했으며 더 이상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던 것이다.
30-37절 [제 2차 수난 예고]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9:30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9:30 그들이 거기서 떠나 갈릴리를 통과하여 지나가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무도 아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직역: 그리고 거기에서 나가서 갈릴리를 통하여 그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지 않으셨다. 아무에게도 알리게 된다면 알리지 않기 위함이라.
9:30 Κἀκεῖθεν ἐξελθόντες παρεπορεύοντο διὰ τῆς Γαλιλαίας,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간태 3복)
그리고 거기에서 나가서 그들이지나가고있었다 통하여 그 갈릴리를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복수)
καὶ οὐκ ἤθελεν ἵνα τις γνοῖ·
그러나 않으셨다 원하지 위함이라 아무에게도 알리게 된다면 알리지 않기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주해
▣ 그곳을 떠나‥‥알리고자 아니하시니. - 본문에서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변화 사건이 있은 헤르몬 산,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내려와 치유 사건을 행하신 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곳'은 '간질병 아이를 고치신 곳'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빌립의 영지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 갈릴리를 거쳐 남쪽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즉 갈릴리에서의 공적 사역을 끝내고 마지막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에 있어 자신에게 부여된 영적 구원의 사역을 신중하고 엄숙하게 완수하며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갈릴리에서는 그의 행로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9: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로,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뒤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31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며,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나, 그가 죽임을 당한 지 삼일 후에 부활할 것이다." 라고 하셨으나,
직역: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만 가르치고 계신다.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넘겨진다, 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그들이 죽일 것이나 그러나 죽임당하고 제 삼일날이 살아날 것이라
9:31 ἐδίδασκεν γὰρ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가르치고계신다 왜냐하면 그 제자들만 그의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또 말씀하고계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ὅτι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παραδίδοται εἰς χεῖρας ἀνθρώπων,
것을 그 아들이 그 사람의 넘겨지고 의하여 손들을 사람들의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καὶ ἀποκτενοῦσιν αὐτόν,
그리고 그들이 죽일것이나 그를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복)
καὶ ἀποκτανθεὶς μετὰ τρεῖς ἡμέρας ἀναστήσεται.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 3복)
그러나 죽임을 당하시고 그 제 삼 날에 그가살아날것이라 (분사: 과거 수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 본절은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는 '이는'이라는 접속사(가르)로서 전절의 이유를 설명하므로 시작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그 행로를 알리고자 아니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사적 교훈을 주심으로 특별히 부활 후에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들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수난 예고의 교훈을 가르치시려 했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의 수난 예고는 네 번의 서로 다른 시기에 행하여졌는데 그 가운데서 첫 번째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에 주어졌고, 본절은 그 두 번째의 것이다. 특히 이 두 번째 가르침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임박한 죽음의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확실성에 대해 가르치셨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예고해왔던 인자의 고난, 죽음, 부활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지금 그 고난의 길로 향하고 있음을 가르치셨다. 한편 세 번째의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그리고 네 번째는 유월절 이틀 전, 곧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심으로 실제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놀라거나 실족하여 주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하셨다.
▣ 넘기워. - 인자가 사람의 손에 넘겨지게 만드는 주체가 하나님임이 간접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말 가운데는 이 십자가 수난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하신 섭리에 의한 것임을 전달하려는 예수님의 목적성이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9: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9:32 그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그분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직역: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예수께 캐묻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9:32 οἱ δὲ ἠγνόουν τὸ ῥῆμα,
그(제자) 그러나 알지못하고있었다 그 말씀을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καὶ ἐφοβοῦντο αὐτὸν ἐπερωτῆσαι. (부정사: 과거 능동태)
또한 무서워하고있었다 그를 캐묻는 것을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 3복)
주해
▣ 제자들은‥‥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 예수께서 인자로서 사역의 절정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것의 관련성을 깨닫지 못했다. 한편 마가는 이러한 제자들이 예수께 묻기를 두려워했다고 밝히는 반면 마태는 제자들의 반응을 '근심'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왜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며 오히려 근심하고 또 무서워했던가? 이는 제자들 역시 베드로처럼 예수께서 죽임을 당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으로 볼 수도 있다(막 8:32).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현세적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막 10:35-40) 예수의 가르침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 고난의 의미에 대해 무지했으며 현세적인 메시야관에 지배되었다는 사실은 諒절 이하에 '누가 크냐'는 논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무튼 주님이 가야할 본질적 사역에 대해서 그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저들은 어리석고, 헛된 논쟁만을 서로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9: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
9:33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가 길에서 무엇을 논쟁하였느냐?" 하셨으나,
직역: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왔다. 그래서 집안에 계신 후에 그들에게 묻고 계셨다.
너희가 무슨 일로 길에서 스스로 논쟁하고 있느냐?
9:33 Καὶ ἦλθον εἰς Καφαρναούμ.
그리고 그들이 왔다 으로 가버나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ἐν τῇ οἰκίᾳ γενόμενος ἐπηρώτα αὐτούς·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그래서 안에 그 집에 계신 후에 묻고계셨다 그들에게 (분사: 과거 중간태/디 주격 단수)
τί ἐν τῇ ὁδῷ διελογίζεσθε;
무슨일로 안에서 그 길에 너희가 논쟁하고있느냐 (동사: 직설법 미완료 중수디 2복)
주해
▣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새. -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 갈릴리 전도의 본거지였던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며 이곳에서 마지막 구속 사역을 행해야 했기 때문에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으셨다.
▣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 제자들이 길을 걸으면서 벌린 결론은 상당히 격렬하였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때 이 변론에 동참하시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변론 내용을 다 알고 계셨다(34절). 그리고 이제 제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고쳐주시기 위해 먼저 질문하셨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9: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9:34 그들은 침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길에서 누가 가장 큰가에 관하여 서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직역: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길에서 누가 더 큰지 서로 함께 논쟁하였음이라.
9:34 οἱ δὲ ἐσιώπων·
그들이 그러나 잠잠하고있었다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πρὸς ἀλλήλους γὰρ διελέχθησαν ἐν τῇ ὁδῷ τίς μείζων.
함께 서로 왜냐하면 논쟁하였음이라 안에서 그 길에 누가 더 큰지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디 3복)
주해
▣ 서로 누가 크냐. - '누가 크냐'(티스 메이존)는 말은 비교급으로 '누가 더 크냐'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심을 보고 정치적 측면에서 왕국을 건설할 때가 임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실 것을 기대하고 그때 누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다투고 있었다. 실로 영적인 자각력의 부족으로, 인간적인 욕망에 이끌려 무의미한 논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논쟁은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야 직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격을 지님에 대한 이해의 결핍에서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도 여행의 결과를 분석한 데서 제자들 간에 경중이 생기고, 또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3제자를 리고 산으로 올라가심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열에 관한 변론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어였든 제자들은 이런 다툼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9:35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9:35 예수께서 앉으셔서 열둘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이 되고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직역: 이에 예수께서 앉으신 후에 열두제자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첫째로 있는 것을 원하면 모든 이들의 섬기는 자가 되고 모든 자의 끝이 될 것이다.
9:35 καὶ καθίσας ἐφώνησεν τοὺς δώδεκα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이에 앉으신 후에 그가 부르셨다 그 열두(제자를)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λέγει αὐτοῖς·
그리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εἴ τις θέλει πρῶτος εἶναι, (부정사: 현재 능동태)
만일 누구든지 원하면 첫째로 있는 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ἔσται πάντων ἔσχατος καὶ πάντων διάκονος.
될것이라 모든이들의 끝이 그리고 모든이들의 섬기는자가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주해
▣ 첫째가 되고자 하면.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무익한 논쟁에 대해 노중에서 책망하지 않으시고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집에서 분위기를 가라앉힌 후 겸손에 대해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르치시려는 섬김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의 내용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역설적인 진리였으므로 그들을 잘 납득시킬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그 가르침의 요체는 무릇 첫째가 되고자 하면 끝에서 섬겨야 한다는 천국의 질서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와 정반대되는 겸손과 희생에 최고 가치성을 부여하셨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섬김과 겸손을 마땅히 지녀야 할 인간관계의 표준으로 제시하셨던 것이다. 사실이 교훈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일관성 있게 보여 주시는 교훈이요, 예수의 전 생애에서 친히 모범을 보여 주신 교훈이므로 이 땅에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천국의 시민인 성도들은 이 교훈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로서 천국 시민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여기서 '섬기는 자'(디아코노스)는 '하인', '봉사자', '사역자'란 뜻으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환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는 초대 교회 시대에 교회의 봉사자로 세움 받은 '집사'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딤전 3:8). 이러한 사실은 교회가 '섬기는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을 수용했다는 증거가 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9: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9:36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를 팔로 안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직역: 그리고 한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세우셨다. 그들의 한가운데 그를 파로 안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9:36 καὶ λαβὼν παιδίον ἔστησεν αὐτὸ ἐν μέσῳ αὐτῶν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그리고 데려다가 한어린아이를 세우셨다 그를 안에 한가운데 그들의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καὶ ἐναγκαλισάμενος αὐτὸ εἶπεν αὐτοῖς·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그리고 팔로 안으시고 그를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주해 9:36-37절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 예수께서는 지금 가르치시는 교훈이 교회의 유지의 근본이며 천국 시민의 자격을 확보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훈이므로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이를 데려오셔서 보다 구체적인 교훈을 주신다. 한편 여기서 '내 이름으로'라는 것은 주님에게 속한 또는 주님을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이는 어린이를 영접하는 자는 주님의 정신을 소유한 자이고, 주님의 정신을 소유한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의 '영접한다'는 말은 '시인한다' 또는 '사랑으로써 대접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섬김과 겸손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서 어린이를 통해 실물 교육을 시키셨다. 한편 예수께서 어린이를 섬김의 표본으로 내세우신 것은 그 시대에 어린이가 가장 맞은 자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즉 어린아이는 생각의 정도가 옅을 뿐 아니라 연약하여 노역이나 전쟁에도 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낮고 천한 자, 미미하고 약한 자들이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가장 천하고 낮고 약한 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어린아이를 마치 예수를 대하듯 하라고하심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낮은 자에 대한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 나를 영접하면‥‥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 예수께서는 가장 낮은 자와 자신을 연결시켜 낮고 천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듯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에 대한 종의 직분을 설명하신다. 그래서 천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예수 자신이 천한 신분으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와 같은 어린아이들 중 하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직역: 누구든지 내일 이름으로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9:37 ὃς ἂν ἓν τῶν τοιούτων παιδίων δέξηται
누구 든지 하나를 그 이런 아이 영접하는사람은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3단)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ἐμὲ δέχεται·
으로 그 이름 내 나를 영접하고있는것이다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단)
καὶ ὃς ἂν ἐμὲ δέχηται,
그리고 누구 든지 나를 영접하는사람은 (동사: 가정법 과거 중수디 3단)
οὐκ ἐμὲ δέχεται
아니요 나를 영접함이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단)
ἀλλὰ τὸν ἀποστείλαντά με.
다만 그 보내신 나를 (분사: 과거 능동태 목적격 단수)
주해 9:36-37절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 예수께서는 지금 가르치시는 교훈이 교회의 유지의 근본이며 천국 시민의 자격을 확보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훈이므로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이를 데려오셔서 보다 구체적인 교훈을 주신다. 한편 여기서 '내 이름으로'라는 것은 주님에게 속한 또는 주님을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이는 어린이를 영접하는 자는 주님의 정신을 소유한 자이고, 주님의 정신을 소유한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의 '영접한다'는 말은 '시인한다' 또는 '사랑으로써 대접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섬김과 겸손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서 어린이를 통해 실물 교육을 시키셨다. 한편 예수께서 어린이를 섬김의 표본으로 내세우신 것은 그 시대에 어린이가 가장 맞은 자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즉 어린아이는 생각의 정도가 옅을 뿐 아니라 연약하여 노역이나 전쟁에도 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낮고 천한 자, 미미하고 약한 자들이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가장 천하고 낮고 약한 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어린아이를 마치 예수를 대하듯 하라고하심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낮은 자에 대한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 나를 영접하면‥‥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 예수께서는 가장 낮은 자와 자신을 연결시켜 낮고 천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듯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에 대한 종의 직분을 설명하신다. 그래서 천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예수 자신이 천한 신분으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38-41절 [편협한 분파주의의 경계]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9: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르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9:38 요한이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어떤 이가 선생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는데, 그가 저희를 따르지 않으므로 그를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니,
직역: 요한이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이여 어떤자가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나이다.
그래서 그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들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9:38 Ἔφη αὐτῷ ὁ Ἰωάννης·
대답하였다 그에게 그 요한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διδάσκαλε, εἴδομέν τινα ἐν τῷ ὀνόματί σου
선생님이여 우리가보았나이다 어떤자가 으로 그 이름 당신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복)
ἐκβάλλοντα δαιμόνια
내어 쫓는 귀신들을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단수)
καὶ ἐκωλύομεν αὐτόν,
그래서 금하고 있었다 그를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1복)
ὅτι οὐκ ἠκολούθει ἡμῖν.
때문이라 않고 있기 그가 따르지 우리들에게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단)
주해
▣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금하였나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새로운 가르침은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즉, 이는 예수께서 37절에서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고 하셨는데, 요한이 '예수의 이름'에 대한 이 교훈을 기억하면서 예수를 따르겠다고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있어 그것을 보고 금했다는 보고였다. 한편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도직의 중요한 표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이 자기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여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예수의 이름'이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도 '영접'해야 함에도 이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앞부분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과 배치된다. 제자들은 그들이 단지 자기들에게 소속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배척하고 말았던 것이다. 참으로 이러한 독선주의와 배타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오는데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지는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9:39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9:3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곧바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다.
직역: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금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속히 비방하는 것을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9:39 ὁ δὲ Ἰησοῦς εἶπεν·
그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μὴ κωλύετε αὐτόν.
말라 금하지 그를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οὐδεὶς γάρ ἐστιν
아무도아니함이라 왜냐하면 이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ὃς ποιήσει δύναμιν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바-사람들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으로 그 이름 내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καὶ δυνήσεται ταχὺ κακολογῆσαί με· (부정사: 과거 능동태)
또한 할수 있을 속히 비방하는 것을 나를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주해
▣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그들의 생각이 독선임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예수를 직접 따르지 않고, 제자들의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고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의 치병 활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졌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한 선한 목적에서 시행되어졌기 때문이다. 실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제자들에게만 국한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독선적인 정신을 경고할 뿐 아니라 그것을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더 갈망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다.
직역: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반대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이니라.
9:40 ὃς γὰρ οὐκ ἔστιν καθ᾽ ἡμῶν,
그가 왜냐하면 않은 있지 반대하고 우리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ὑπὲρ ἡμῶν ἐστιν.
지지하는 우리를 이니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녀라.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의탁하여 귀신을 내어 쫓는 자를 금하지 말라 명령하신 두 번째 이유를 밝히신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는 말 대신 '우리'라는 말씀으로 제자들과 자신을 관련시키고 있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증거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할 뿐 아니라 우리 편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역으로 마 12:30에서와 같이 '나와 함께 아니한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니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는 진리와도 동일한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9: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9: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이유로 너희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자는 결코 자기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누구든지 너희를 나의 이름으로 물 한잔을 마시게 주는 자는 너희가 그리스도에 속하여 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그의 상이 결코 손상시키게 된다면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9:41 Ὃς γὰρ ἂν ποτίσῃ ὑμᾶς
누구 왜냐하면 든지 마시게주는자는 너희를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ποτήριον ὕδατος ἐν ὀνόματι ὅτι Χριστοῦ ἐστε,
한 잔의 물의 으로 이름 것을 그리스도에속하여 너희가 있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복)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진실로 말한다 너희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ὅτι οὐ μὴ ἀπολέσῃ τὸν μισθὸν αὐτοῦ.
때문이다 않기 결코 손상시키지 그 상을 그의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물 한 그릇을 주면‥‥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문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라는 말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물 한 그릇'이라는 것은 가장 보잘 것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봉사를 말한다. 따라서 본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가장 작은 봉사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행해질 때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39,40절에서 말한 관용의 정신을 적극적인 면에서 더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반대하지 않는 자'는 '위하는 자'라는 40절의 소극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측면으로 확장하여 교훈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에 봉사라는 미덕을 위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혹은 '결단코‥‥않으니라' 등의 강력한 표현으로써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42-50절 [죄에 대한 결단 촉구]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9: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9:42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는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방아 맷돌이 달린 채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
직역: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만일 차라리 자기의 목을 인하여
연자 맷돌을 매달려서 바다 속으로 그가 던지워져 있다. 그에게 그것이 좋은 것이라.
9:42 Καὶ ὃς ἂν σκανδαλίσῃ ἕνα τῶν μικρῶν τούτων
그리고 누구든지 실족케하는자는 하나를 그 작은사람중의 이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τῶν πιστευόντων [εἰς ἐμέ],
그 믿는 안에 나를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단수)
καλόν ἐστιν αὐτῷ
좋은 것이라 그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μᾶλλον εἰ περίκειται μύλος ὀνικὸς περὶ τὸν τράχηλον αὐτοῦ
차라리 만일 매달려서 맷돌에 연자 의하여 그 목을 자기의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3단)
καὶ βέβληται εἰς τὴν θάλασσαν.
그리고 그가던지워져있다 속으로 그 바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주해
▣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본절은 35-41절에 있는 봉사자 독선 금지에 대한 교훈의 결론이며 43-50절에 나오는 교훈의 서론 부분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나를 믿는 소자'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의미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 언급된 '소자'는 단지 어린아이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예수 공동체에 속한 연약하고 신앙이 미성숙한 자들을 가리키며, 더 넓게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모두 지칭한다. 그리고 '실족케 하면'(스칸달리세)이란 말은 '함정이나 덫에 쓰이는 막대기'(스칸달론)를 의미할 때 쓰이는 말로 '덫', '죄에 빠뜨림', '실족케 함'을 뜻하며 때로는 '거리끼는 대상', '십자가의 거치는 것'으로 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말은 믿음을 떠나 멸망케 하는 일을 의미한다. 즉 나약하고 미미한 신앙인을 유혹하거나 배반하여 상처를 받게 하고 낙심케 하는 행위를 말한다.
▣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 연자 맷돌(리도스 뮐리코스)은 문자적으로'나귀 맷돌'로서 손으로 돌리는 '손 맷돌'(뮐로스, 마 24:41)과는 다른 나귀에 매어 돌리는 큰 맷돌이다. 어떤 맷돌이든지, 맷돌에는 곡식을 집어넣어서 갈리도록 하는 구멍이 있다. 그래서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라는 말씀은 곧, '그 구멍 속에 목을 끼우고'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 수리아, 헬라, 로마 등에서 시행된 사형법의 일종으로 아비를 죽인 원수나 공공의 안녕을 파괴한 자를 죽일 때 사용한 방법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단호한 형벌을 제시한 것은 아무리 연약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를 실족시키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미치는 형벌은 단지 육체적인 죽음 이상의 것임을 경고하여 주님의 교훈의 철저성을 보여 주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손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너에게 낫다.
직역: 또 만일 너의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면 그것을 찍어버려라. 네가 너를 불구자로 그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은 것이다.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불의 지옥 속으로 가는 것 보다 낫다.
9:43 Καὶ ἐὰν σκανδαλίζῃ σε ἡ χείρ σου,
또 만일 실족하게 하면 너를 그 손이 너의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ἀπόκοψον αὐτήν·
찍어버려라 그것을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2단)
καλόν ἐστίν σε κυλλὸν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ζωὴν
좋은 것 이다 네가 불구자로 들어가는 것이 속으로 그 생명을 (부정사: 과거 능동태)
ἢ τὰς δύο χεῖρας ἔχοντα ἀπ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γέενναν, (부정사: 과거 능동태)
보다 그 두 손들을 가지고 가버리는 것이 속으로 그 지옥을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2단)
εἰς τὸ πῦρ τὸ ἄσβεστον.
속으로 그 불의 그 꺼지지 않는
주해 9:43,45,47절
▣ 만일 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 전절에서는 남을 실족케 함을 경계하셨으나 이 부분에서는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일의 방해가 되는 그 어떤 요소도 제거해야 한다는 철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손'(43절), '발'(45절), 그리고 '눈'(47절)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 그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찍어 버리라', '빼어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육신이 죄짓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즉시 중단하라는 말씀이다. 죄가 손을 비롯해 발 및 눈 등의 육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본절은 죄가 영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철저한 영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 본문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게엔난'으로 히브리어 '게힌놈'에서 유래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아하스와 므낫세의 통치 기간 중 바로 이곳에서 어린아이들을 이방신 몰록의 희생 제물로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 그곳은 불태우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시아왕은 그곳을 불결한 곳으로 선언하였고, 예레미야는 그 곳과 관련하여 무서운 멸망의 예언을 하였다. 또한 그곳은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게힌놈 혹은 게엔난이라는 말은 결국 '지옥'을 뜻하는 호칭이 되었다. 특별히 43절에서는 게엔난을 보충적으로 설명하면서 '꺼지지 않는 불'(퓌르토 아스베스톤) 즉 문자적으로는 '끌 수 없는 불'이라는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옥에 들어가는 자가 받을 형벌은 결코 끝이 없으며 또한 영원토록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글 개역 KJV 번역본 ◆한글 흠정역 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4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4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거기에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가 있음.
직역: 그곳에 그 구더기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도 꺼지지 않는다.
Mar 9:44 ὅπου ὁ σκώληξ αὐτῶν οὐ τελευτᾷ,
그곳에 그 구더기가 그것들을 않는다 죽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τὸ πῦρ οὐ σβέννυται.
그리고 그 불도 않는다 꺼지지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주해 9:44,46절
▣ (없음). - 개역 성경은 시내 사본(N), 바티칸 사본(B), 레기우스 사본(L), 레기우스 사본(L) 등과 같이 생략하고 있으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베라 사본(D) 등에는 48절과 동일한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즉 이는 43,45절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보완 설명을 삽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굳이 없어도 내용 연결에 하등 지장이 없으므로 생략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저는 발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다리저는 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직역: 또 만일 너의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면 그것을 찍어버려라. 네가 너를 절뚝발이로 그 생명 속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 두 발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불의 지옥 속으로 던지는것 보다 낫다.
9:45 Καὶ ἐὰν ὁ πούς σου σκανδαλίζῃ σε,
또 만일 그 발이 너의 실족하게 하면 너를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ἀπόκοψον αὐτόν·
찍어버려라 그것을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2단)
καλόν ἐστίν σε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ζωὴν χωλὸν (부정사: 과거 능동태)
좋은 것 이라 너에게 들어가는 것이 속으로 그 생명을 절뚝발이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ἢ τοὺς δύο πόδας ἔχοντα βληθῆναι εἰς τὴν γέενναν. (부정사: 과거 수동태)
보다 그 두 발들을 가지고서 던져지는 것 속으로 그 지옥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2단)
주해 9:43,45,47절
▣ 만일 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 전절에서는 남을 실족케 함을 경계하셨으나 이 부분에서는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일의 방해가 되는 그 어떤 요소도 제거해야 한다는 철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손'(43절), '발'(45절), 그리고 '눈'(47절)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 그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찍어 버리라', '빼어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육신이 죄짓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즉시 중단하라는 말씀이다. 죄가 손을 비롯해 발 및 눈 등의 육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본절은 죄가 영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철저한 영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 본문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게엔난'으로 히브리어 '게힌놈'에서 유래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아하스와 므낫세의 통치 기간 중 바로 이곳에서 어린아이들을 이방신 몰록의 희생 제물로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 그곳은 불태우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시아왕은 그곳을 불결한 곳으로 선언하였고, 예레미야는 그 곳과 관련하여 무서운 멸망의 예언을 하였다. 또한 그곳은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게힌놈 혹은 게엔난이라는 말은 결국 '지옥'을 뜻하는 호칭이 되었다. 특별히 43절에서는 게엔난을 보충적으로 설명하면서 '꺼지지 않는 불'(퓌르토 아스베스톤) 즉 문자적으로는 '끌 수 없는 불'이라는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옥에 들어가는 자가 받을 형벌은 결코 끝이 없으며 또한 영원토록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글 개역 KJV 번역본 ◆한글 흠정역 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4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4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4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거기에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가 있음.
직역: 그곳에 그 구더기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도 꺼지지 않는다.
Mar 9:46 ὅπου ὁ σκώληξ αὐτῶν οὐ τελευτᾷ,
그곳에 그 구더기가 그것들을 않는다 죽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τὸ πῦρ οὐ σβέννυται.
그리고 그 불도 않는다 꺼지지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주해 9:44,46절
▣ (없음). - 개역 성경은 시내 사본(N), 바티칸 사본(B), 레기우스 사본(L), 레기우스 사본(L) 등과 같이 생략하고 있으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베라 사본(D) 등에는 48절과 동일한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즉 이는 43,45절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보완 설명을 삽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굳이 없어도 내용 연결에 하등 지장이 없으므로 생략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뻬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빼내버려라. 한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직역: 또 만일 네 눈이 실족하게 하면 그것을 빼어버려라. 네가 너를 한눈으로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 두 눈들을 가지고서 불의 지옥 속으로 던지는 것 보다 낫다.
9:47 Καὶ ἐὰν ὁ ὀφθαλμός σου σκανδαλίζῃ σε,
또 만일 그 눈이 네 실족하게 하면 너를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ἔκβαλε αὐτόν·
빼어버려라 그것을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2단)
καλόν σέ ἐστιν μονόφθαλμον
좋은 것 너를 이라 한 눈으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들어가는 것이 속으로 그 나라 그 하나님의 (부정사: 과거 능동태)
ἢ δύο ὀφθαλμοὺς ἔχοντα βληθῆναι εἰς τὴν γέενναν, (부정사: 과거 수동태)
보다 두 눈들을 가지고서 던져지는 것 속으로 그 지옥을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2단)
주해 9:43,45,47절
▣ 만일 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 전절에서는 남을 실족케 함을 경계하셨으나 이 부분에서는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일의 방해가 되는 그 어떤 요소도 제거해야 한다는 철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손'(43절), '발'(45절), 그리고 '눈'(47절)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 그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찍어 버리라', '빼어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육신이 죄짓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즉시 중단하라는 말씀이다. 죄가 손을 비롯해 발 및 눈 등의 육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본절은 죄가 영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철저한 영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 본문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게엔난'으로 히브리어 '게힌놈'에서 유래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아하스와 므낫세의 통치 기간 중 바로 이곳에서 어린아이들을 이방신 몰록의 희생 제물로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 그곳은 불태우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시아왕은 그곳을 불결한 곳으로 선언하였고, 예레미야는 그 곳과 관련하여 무서운 멸망의 예언을 하였다. 또한 그곳은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게힌놈 혹은 게엔난이라는 말은 결국 '지옥'을 뜻하는 호칭이 되었다. 특별히 43절에서는 게엔난을 보충적으로 설명하면서 '꺼지지 않는 불'(퓌르토 아스베스톤) 즉 문자적으로는 '끌 수 없는 불'이라는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옥에 들어가는 자가 받을 형벌은 결코 끝이 없으며 또한 영원토록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9:48 거기에서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직역: 그곳 지옥에 있는 구더기가 죽지 않는다. 그리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9:48 ὅπου ὁ σκώληξ αὐτῶν οὐ τελευτᾷ
그곳에 그 구더기가 그 지옥 않는다 죽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τὸ πῦρ οὐ σβέννυται.
그리고 그 불도 않는다 꺼지지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주해
▣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본절은 사 66:22을 인용한 말씀이다. 이 말씀 역시 지옥 형벌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힌놈 골짜기의 불이 쉬지 않고 타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구더기는 내적 고통을, 꺼지지 않는 불은 외적인 고통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한 모든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끊임없는 형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통 구더기는 죽은 시체를 먹다가 죽는다. 불은 연료를 태우고 꺼진다. 그런데 구더기는 결코 죽지 아니 하고 불은 꺼지지 않는 것으로 말하여 지옥의 본질이 끊임없는 고통이요 아울러서 지옥이 죽지 않는 곳임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9: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9:49 모든 사람이 불로 소금 치듯 할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에 절이듯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제물마다 소금으로 소금치듯 함을 받을 것이다.
9:49 Πᾶς γὰρ πυρὶ ἁλισθήσεται.
사람마다 왜냐하면 불로서 소금에절이듯이 될 것임이라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주해
▣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 구절은 대단히 난해하므로 그 해석도 구구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해석들을 늘어놓아서 독자들을 혼란케 하느니보다는, 앞의 문맥과 이 말씀이 주어진 시대에 대한 역사적 배경, 그리고 '소금'과 '불'이 언급되어 있는 다른 성경 구절을 잘 조화시켜 본절을 해석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불'이나 '소금'은 성경의 여러 경우에서처럼 모두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소금과 불의 역할은 다같이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함으로 정결하게 하고, 불은 이미 부패한 것을 태움으로 정결하게 한다. 다시 말해 불은 43,48절처럼 지옥의 모습으로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부패한 것을 태우고 은과 금을 연단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불'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선인과 악인, 불신자와 신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연단과 격렬한 시험과 환난으로 이해된다. 이 시험과 환난은 악인에게서 선인을, 불신자들에게서 신자들을 분리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는 신자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악한 요소들을 정결케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교훈은 곧 있게 될 그리스도의 죽음과 또한 초대 교회가 당하게 될 고난을 염두에 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 이는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충고인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9: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 짠맛을 내겠느냐 ?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9:50 소금은 좋은 것이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 안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직역: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맛을 잃게 된다면 너희가 무엇으로 그것을 맛을 내리요.
너희 자신들 속에 소금을 가지라. 그리고 서로 화목 안에서 화목 하라.
9:50 καλὸν τὸ ἅλας·
좋은것이나 그 소금은
ἐὰν δὲ τὸ ἅλας ἄναλον γένηται,
만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잃게 된다면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 3단)
ἐν τίνι αὐτὸ ἀρτύσετε;
으로 무엇 그것을 너희가맛을내리요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2복)
ἔχετε ἐν ἑαυτοῖς ἅλα καὶ εἰρηνεύετε ἐν ἀλλήλοις.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가지라 속에 너희자신들 소금을 그리고 화목하라 안에서 서로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2복)
주해
▣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그 맛을 잃으면. - 본절은 39-49절의 내용을 비유로써 결론짓는 것이다. 소금의 기본적인 기능은 맛을 내는 것과 더불어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서 인간 생활에 얼어서는 안될 좋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맛을 잃으면 그 좋은 역할은 할 수 없으며 쓸모없어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사실 팔레스틴에서 소금은 사해 근방의 암석이나 늪지대, 개펄 등지에서 나오는 석고 등의 이 물질과 섞여 맛을 잃거나 알카리성의 맛을 가지고 있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보건대 본절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분명하다.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버려져 밟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 가운데서 훈련을 받았으나 후에 성경의 교훈을 반대하여 그 안에서 굳어진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의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 곧 생명력을 공급할 빨만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책무를 다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 본 문장은 33절 이하의 내용 전체를 적절하게 결론짓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요지는 분명하다. 너희들이 예전처럼 서로 자리다툼이나 하고(33절) 높아지려 하여 헛된 것에 대해 논쟁하기 보다는 지혜와 순결과 겸손과 세상에 대한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 화목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그와 같은 논쟁과 이기적인 목적이 훗날에 교회의 건설에 큰 장애가 될 것을 미리 아셨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변화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무용함을 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를 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향한 제자들이 헌신과 자기 희생을 세상 가운데서 실천하길 원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