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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7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3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주께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어미를 떨어질 수 없는 어린 새끼이었다. 그는 그의 전지하신 눈으로 그 나귀 새끼를 보셨다. 또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온 우주의 큰 주인이시며, 원하시는 대로 무엇을 취하거나 사용하실 수 있는 자이시다.
[4-5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는 주님의 말씀이 스가랴 9:9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한다. 말은 전쟁의 동물이요 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방의 왕들은 말을 탔고 나귀를 타지 않았다. 나귀는 경멸을 당하는 짐승이었다. 주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내신다. 그것도 어미에게 의존하는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더욱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나라처럼 외적 영광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 지극히 비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은혜의 복음이 있다. 어떤 비천한 자도 예수께 나아올 수 있고 그는 그를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6-7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옷을 그 위에 얹은 것은 안장을 대신해서였다. 주께서는 어린 나귀 새끼, 아직 안장도 없는 짐승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주께서는 자기의 소유 혹은 공동 소유의 나귀 한 필도 없으셨다. 그는 가난한 삶을 사셨다. 지극히 부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소유자이셨던 그는 지극히 가난한 자가 되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의 삶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할지 분명하다.
[8-11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펼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무리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며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었다. 비록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거절했고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리들을 감동하여 그를 증거하며 그를 찬양케 하셨다. 감격스런 일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그들 중 다수는 변절하여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이것이 변태무쌍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사 2:22).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한다고 너무 감격할 것도 없고 우리를 멸시한다고 너무 낙심할 것도 없다.
[12절] 예수께서 [하나님의]40)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성전이 불의의 이익을 얻는 매매의 장소로 악용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타락이었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의 이름 아래 자기의 이익을 노리는 이 불의한 종교지도자들은 성전 안에서 돈 바꾸고 비둘기 파는 자들과 결탁되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일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땅에 속한 것,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것을 구하는 가련한 종교인들!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해서는 동정하셨으나,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노하셨다. 주께서는 온유하며 겸손하시지만, 종교의 타락에 대해서는 분노하셨던 것이다.
[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주님의 종교 개혁은 종교가 성경의 본래 가르침대로 되어야 한다는 정신에 근거하였다. 성경은,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고 가르쳤다(사 56:7).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종교가 예배자들의 주머니의 돈을 교묘히 긁어모으는 행위로 변질되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종교 개혁은 항상 성경에 근거해야만 된다. 요시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이 그러하였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도 그러하였다.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오직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감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14절]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 행위들에 대해서는 격노하고 동정심을 보이지 않으시던 주님이지만, 성전에서 그에게 나아온 소경과 절뚝발이들에게는 긍휼과 능력을 베푸셨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다. 주께서는 뻔뻔스런 악인들에게는 노하셨지만, 도움을 구하는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셨던 것이다.
[15-17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주께서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많이 드러내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분노했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또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아이들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사실, 메시아를 영접해야 할 저 지도자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기들을 사용하여 주를 찬송케 하셨던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하실 때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에 보내셔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시며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고 그가 온 세상의 참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원하시는 것을 사용하실 수 있는 우주의 주인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겸손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는 자기 소유나 제자들의 공동 소유의 말이나 나귀가 없으셨다. 그는 나귀 새끼를 빌려 타고 가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노하셨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의 제사들과 제물들을 돈벌이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종교의 부패는 가장 가증한 일이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갈릴리에서도, 유대 땅에서도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고쳐주셨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18-46절, 권위의 근원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예수님 일행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난한 환경은 그의 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난 때문에 좌절되지 않는다.
[19절]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배가 고프셨던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증거가 있다. 사람이신 그는 배고픔을 느끼셨고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셨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것과 같은 참된 인성, 즉 육신적 연약성과 지식의 제한성을 가진 인성이셨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히 4:15).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부당한 그의 감정적 행위이셨는가? 무화과는 보통 열매가 먼저 생긴 후 잎사귀가 커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이미 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나무의 경우는 비정상적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은 채 잎사귀만 무성했다. 이것은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이 종교적 형식들만 가득한 당시의 타락한 종교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20-22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주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믿음으로 하는 기도의 힘을 가르치셨다. 죽기 위해 올라가셨던 예루살렘에서, 또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의 형틀을 지실 그가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교훈하며 격려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교훈을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처럼 기적을 추구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기적들을 주심으로 섭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의 교회의 복음 사역이 얼마나 놀라웁게 전진해 왔는지! 복음 사역에 크고 작은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기도하는 종들을 통해, 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 그 장애물들은 극복되었다. 때로는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였지만, 복음 전파의 대행진은 꺾이지 않고 힘차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한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지만, 기도를 통한 회개와 믿음, 구원과 성화는 언제나 기대한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강건케 하시고 자기 교회를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23-27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것은 믿어보려는 동기에서 했다기보다 비난하려는 동기에서 했다고 보인다.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되받아 질문하심으로 그들의 위선의 악을 드러내셨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은 요한도 인정치 않았고 그가 증거한 예수님도 인정치 않고 있었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이었다. 그러나 저 악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8-30절]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아들은 가겠다고 했으나 안 갔고, 다른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으나 갔다. 전통본문에는, 맏아들이 처음에 싫다고 대답했으나 후에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이 처음에 가겠다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41)
[31-32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전통본문은 여기서도 첫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 곧 신약교회를 상징하였고, 맏아들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둘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상징하였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으나 세례 요한이 옳은 길을 외칠 때 회개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자부하였지만,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따라 회개하지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인가? 신앙생활은 처음보다 끝이 그리고 입술의 고백보다 실제적 행위가 더 중요하다.
[33-39절]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예수께서는 또 포도원 비유를 하셨다. 포도원은 구약교회를 가리켰고(사 5:2),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포도원을 관리한 농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열매는 구원의 열매, 즉 의와 거룩의 삶을 가리킨다.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소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을 영접하지도,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하나님께서 많은 종들을 더 보내셨지만, 그 지도자들은 그들에게도 그러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은 그를 예루살렘 밖에서 죽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신 것이다.
[40-43절]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貰)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 곧 위선적 지도자들을 멸하고 포도원을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같으시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버렸으나 그는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기이한 일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의롭고 선한 행실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의롭고 선한 행실이 있는 신약교회가 그것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선한 행실과 삶이며, 참된 구원은 그런 행위와 삶으로 나타난다.
[44-46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메시아께서는 돌에 비교되셨다(단 2:34-35). 이 돌은 구원과 심판의 돌이다. 악하고 완고한 자도 이 돌 위에 떨어지면 심령이 부서질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가기들을 가리킨 것인 줄 알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이시다. 그 돌은 완고한 심령을 부숴 구원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를 멸망시키기도 한다.
셋째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택자들의 구원, 회개와 믿음, 우리 자신의 성화, 참된 교회의 건립과 성장이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넷째로, 신앙생활은 처음보다 끝이, 또 입술의 고백보다 실제적 행위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끝이 좋고 열매가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의롭고 선한 행실과 삶이며, 참된 구원은 그런 행위와 삶으로 나타난다. 의롭고 선한 열매가 없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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