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 기념관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여난다.
1920년 9월28일 순국(殉國)할 때까지 만 18세도 되지 않은 어리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부모님도 일본 쪽바리 왜놈들 발바닥에 짓밟히여 한많은 삶을 뒤로 하고 멀고 머언 하늘나라로 나래를 핀 것이 아닐까.
이화학당을 다니던 어린 소녀의 가슴 속에는 끓어 오르는 애국심과 나라 잃은 설움을 가눌 수 없어 온 몸을 던져 산화한 것입니다,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고향에 내려와서 호서 지방에서는 가장 거대한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되어서도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일제의 악랄한 고문과 만행으로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기미년 1919년 3월1일 이후로 오늘 2015년 3월1일까지 거의 100년가까이 96년이 흐른 오늘날 과연 3.1절 독립 만세 운동이 왜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뼈저린 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정부가 주관하는 매스콤으로나 잠시 비춰지는 연례적인 요식 행위로만으로 생각하지는 아니하였는지 나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잠시 거꾸로 돌려 우리의 역사를 돌아 보노라면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 시키고 이씨 조선을 개국한 것은 어쩌면 쿠데타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 519년 동안 계속된 이씨 왕조의 실록은 공(功)보다는 실(失)이 더 많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종이 즉위한 19세기 말에는 청나라를 비롯한 러시아 프랑스 미국등의 서양 열강들이 서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호시탐탐 기회와 핑게를 찾아 덤비던 시기였습니다,이 즈음 일본은 재빠르게 미국의 문물과 무기 기술을 받아 들여서 조선을 삼켜 버릴 기회만 엿보던 왜놈들이 었습니다,
그런데도 고종 나이 12세에 즉위하니 자연히 아버지 이하응인 대원군의 손아귀에 휘둘리는 수렴청정으로 쇄국정책을 폄으로서 더욱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가 되었던 것이라 봅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왜놈들은 더욱 교묘하고도 악랄하게 1910년(경술년) 8월 29일 고종을 폐위 시키고 순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 4년 뒤 융희4년에 총리 대신 이완용으로 하여금 한일합방 의정서에 도장을 찍게 한 것입니다,
결과론적으로는 그당시 사회 지도층이라는 왕조 주위에 인물들은 사리 사욕에 눈이 멀고 좌고우면 하면서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나 의무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일본놈들의 편에 서서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하였다고 봅니다 ,
여기에 더 하여 일반 백성들의 무지몽매 함이 더하여 이 나라 조선은 일본놈의 발굽 아래 짓밟혀 36년이라는 긴 세월을 나라도 없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봅니다.
지금도 저 현해탄 건너 왜놈들은 독도를 자기들 영토라 떠들며 예전의 만행과 식민화한 것은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이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정신 똑 바로 차리고 좀 더 멀리 세계를 내다 보는 안목이 필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애국 하는 것은 유관순열사나 안중근 의사처럼 거대한 일만이 아니며, 하다 못해 3.1절 기념일이면 집에 태극기라도 내 걸고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어디 있는지, 평생 한 번이라도 찾아 가서 그 분들의 숭고한 애국 정신과 희생 정신을 가슴으로 느끼며, 참배라도 한번 다녀오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합니다.
해서 이번 3.1절에는 늘걷회 회원 여섯명이 천안 아우내 장터와 유관순 기념관을 들러서 생가까지 다녀 왔습니다
해마다 3.1절 전야제와 3.1절 기념식을 거행 했었으나 구제역 여파로 올 해는 생략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추모각과 초혼묘에서 꽃 다발도 거의 안 보이고 참배하는 사람도 별로로 썰렁한 느낌이었습니다.
유관순 유해를 이화학당에서 그 당시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었으나 일제에 의하여 망실 되었답니다.
그리고 1989년에야 유관순열사의 순국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초혼묘를 유관순 기념관 추모각 위쪽에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동안 열사가 순국한지 70여년이 지나도록 열사는 하늘에서도 쉴 곳도 없이 허공을 맴돌면서 얼마나 우리 후손들을 원망하고 속상해 했을까를 생각하면 열사를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이처럼 이 나라 정치하는 분들의 정신 상태가 지금도 얼마나 기대 이하이며 보잘 것이 없는지를 이번에야 한번 더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표를 위하여는 지역 감정은 물론이며 국민의 편의와 불편은 아랑곳 하지 않고,일부 압력 단체의 눈치를 보며 국민들을 위한 진정한 법률은 지금도 국회 서랍 속에 처 박아 놓은게 비일비재합니다,
이들을 믿고 표를 몰아 준 국민들이 정녕 바보인지 국회에 명패 놓고 자리 비우기 일쑤인 그들이 똑똑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교과서와 매스컴등으로만 접하던 유관순열사의 기념관과 생가터를 찾아 열사의 순국 이념을 가슴에 새기고 왔습니다.
2015년 3월1일 무 무 최 정 남
유관순 기념관을 들어서면 바로 전면에 추모각이 있고 왼쪽으로 기념관이 있습니다
추모각 뒤편에 보이는 매봉산 정상 부근에 유관순열사 초혼묘가 있고 정상에는 봉화탑이 있습니다
그리고 초혼묘를 거쳐 봉화탑에 오른 후에 직진하여 하산하면 바로 생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까토노최정남 치빠노최길호 위짜노이부춘 씨모노김종운 조안노주상수 패노노손수웅
경내에서 내려다 본 아우내 모습
외롭게 보이는 열사의 초혼묘 앞에는 참배객은 없고 꽃바구니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그 앞에 우리가 아우내 장터에서 구입한 꽃다발입니다 열사가 순국하신 연세가 열아홉이기에 흰 장미 꽃을 열 아홉 송이를 사려했으나 흰 장미가 없어서 분홍색으로 준비햇습니다 "유관순열사의 순국 정신을 흠모합니다" 늘걷회 회원 일동
열사의 초혼묘
이곳 매봉산 정상에서 불을 피워서 연기로 멀리 타 지역에서도 알 수 있게끔한 봉화터에 세워진 유관순열사 봉화탑입니다
봉화탑 뒤쪽으로 생가터로 가던 중에 대한 독립 만세 삼창을 힘껏 외쳐봅니다 몇 십년만의 외침인지요
열사의 생애가 짧고 남아 있는 유물들이 별로 없어 잘못 전해진 것이 너무 많았다고합니다
찾는이가 별로 없는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은 생가터 앞에서
일차로 점심 회식은 아우내 장터에서 병천 순대로 허전했던 마음과 속을 달랜 후 천안역 앞에 생맥주집에서 한잔 원샷
유관순 기념관에는 동행을 아니 했으나 천안에서 숙박업을 경영하는 조수희 친구도 합류하여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모처럼 만난 늘걷회 친구들에게 조수희 동기가 맛있는 천안의 명물인 호도 과자를 하나씩 선물 보띠리를 안겼습니다
그리고 늘걷회 회원들은 조수희 친구와 헤여져서 수원에 하차하여 추가 감자탕으로 입가심한 후에 전공노기 되어 각자 원 위치로 귀가 하였습니다, 전철에서의 시간이 좀 길었으나 모처럼만의 의미 있는 늘걷회 하루 일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