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존 하느님이신 증산 상제님 진리는 정음정양으로 수부가 없으면 공사가 아니라 하시고 9년 천지공사와 더불어 곤존 여성 하느님이신 태모 고 수부님의 10년 신정공사로 9년 천지공사의 종통 인사문제를 동지한식백오제 흑운명월 도수, 옥구 오성산 세 말뚝 공사, 윷판 도운 통일 도수, 무기 오십토 공사 등으로 매듭지으셨습니다. 태극도와 대순진리회에서는 태모 고 수부님을 아예 신앙대상에서 제외하고 세월과 더불어 지도자가 선화 할 때마다 천존 지존 음양 상제, 천존 지존 인존 3위 상제, 정산-우당-상도 등 3천遷성도로 그 공백을 메꾸어 왔기 때문에 올바른 종통맥을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상제님 신앙권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은 대순 계열 단체의 신도들입니다. 증산 상제님을 신앙하게 된 것은 그 분들에게 엄청난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증산상제님의 기유년(1909) 천지공사 종필 선언 이후 105년(동지한식백오제)을 넘어서면서 드러난 사오미 개명의 말복 통합살림의 진법출현을 맞이해 이제는 태모 고 수부님 낙종물 교단개창으로부터 시작되어 차 월곡(경석) 추종성도의 보천교 이종물 사명에 이은 운암강수만경래 숙구지 문왕도수의 대시태조 의통성업 세 살림 판에 들어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분들이 무극도 창교주 조 철제를 숭배하는 동지한식백오제의 105년 과도기 교리체계에 갇혀 증산상제님의 진법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대순계열의 진리체계가 천지공사 전체 퍼즐판(건존 증산상제님 9년 천지공사와 곤존 태모 고 수부님 10년 신정공사) 중 10년 신정공사를 싹뚝 잘라내고 그 자리에 증산 상제님께서 장차 그림자도 나타내지 못하게 그 기운을 막은 계룡산 정씨, 가야산 조씨, 칠산 범씨 중의 하나인 조 씨 천하의 교의체계로 상제님 진리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동안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하신 말씀에 반하는 과도기 ‘부분 퍼즐판’의 교리체계로 이끌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정보가 공개된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 이제는 전체 퍼즐판-진법을 바탕으로 그러한 한계를 모두 벗어나 모두 너나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증산교사(甑山敎史)>*(조 철제의 동거와 미륵불교 입교 및 신기탈취사건)조 철제(趙喆濟)는 경상남도 함안군 사람이라 어려서 부친 용모(鏞謀)를 따라서 만주 유하현(柳河縣)에 이주하였다가 신도(보천교인 金 赫으로 밝혀짐)를 만나서 태을주의 수련을 받았었다. 병진년(道紀 46, 1916)에 귀국하여 충청남도 안면도에 거주하다가 마침 그 지방을 순회하던 이 치복(李致福)을 만나서 천사(天師)의 행적에 관한 강화(講話)를 듣고 정읍군 우순면(雨順面) 마동(馬洞)으로 이주한 뒤에 친자종도들을 찾아서 천사(天師)의 행적을 연구하기에 노력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천사(天師)의 누이 선돌부인을 방문하니 부인이 마침 장기 수련을 행하다가 철제를 보고 자기와 인연이 있음을 말하고 본부(本夫) 박 창국(朴昌國)과 인연을 끊은 뒤에 드디어 철제와 동거하였다. 무오년(道紀 48, 1918)에 김 형렬이 전주에서 교단을 재건함에 철제가 그 교단에 가입하여 형렬에게 상종하였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 김혁(金赫:1875. 10. 16~1939. 4. 23)은 본명은 학소學韶, 호는 오석烏石. 선생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법부 참서관을 지낸 김태식(金泰植), 모친은 윤현숙(尹顯淑)으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소(學韶), 자는 순익(舜翼), 호는 오석, 본관은 경주이다. 어린 시절 선생은 8세 때부터 10여 년 동안 향리에서 한문을 배웠다. 1894년부터 1896년 초까지는 용인향교에서 개신 유학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시기인 1898년 6월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0년 1월 졸업하여 육군참위로 경성시위보병대京城侍衛保兵隊 제1연대에서 부관 장교로 근무하였고, 1907년 8월1일 육군 정위(현재 대위급)일 때 군대가 해산되자 항일투쟁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 기흥으로 귀향했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1897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육군무관학교 교육은 자주 국방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근대식 군사교육이었고, 더구나 반일적 성향의 민족교육이었다. 때문에 박승환·이동휘·노백린 등에서도 보이듯이 이 시기 졸업생들은 반일 민족의식이 강했다. 선생이 뒤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 시기 무관학교 교육에서 연유하는 바 클 것이다. 1919년(44세) 용인 기흥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5월 일경의 눈을 피해 만주 서간도 유하현으로 망명해 무송현에 근거지를 두고 서간도 각지에 지단을 설치해 활동하던 흥업단에 들어가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흥업단은 농민과 군인이 따로 없이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군사 훈련하는 병농겸행(兵農兼行)의 방책을 취하여 동포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확립하는데 공헌하던 단체이다. 이 조직은 부단장인 선생을 비롯하여 단장에 김호, 총무 윤세복, 재무 이원일, 경호 오제동, 교섭 전성규(이현익) 등으로 모두가 대종교 교도였다. 만주 각 현에 지단·지부 조직을 두고 있던 흥업단의 부단장 직책을 맡았다면, 당시 국내 가장 큰 독립군 자금처인 보천교 신도임을 숨기고 있던 선생은 외견상 대종교 내에서도 위치가 상당히 높았고, 동시에 이후의 행적과 연계하여 보면 실질적으로 단체를 이끌어갔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1920년(45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식에 참여해 축사를 하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고 러시아로 도망갔다가 22년(47세) 8월 통의부 결성에 가담해 군사부감을 맡았다. 25년 3월 영안현(寧安縣)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김좌진의 대한독립군단 등 21개 단체들이 모여 신민부(新民部)를 결성하는 자리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피선된다. 군사부위원장에는 김좌진 장군이 피선되었다. 신민부(新民部)는 성동(城東)사관학교를 만들었는데 김혁이 교장을 맡아 500 여명의 졸업생 사관생도가 배출되었다. 신민부(新民部)가 북만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일제는 이를 주시하다가 일제의 하얼빈 영사관 경찰은 1928년(53세) 2월 신민부 본부인 석두하자(石頭河子) 흥륭진(興隆鎭)을 습격하여 김혁과 유정근 등 12인을 체포하였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김혁은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그 후 오랜 옥고로 병을 얻어 1935년(60세) 8월 서대문 감옥에서 가석방된 김혁은 고향에 돌아와 요양하다가 1939년(64세) 4월 병사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후일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조철제는 1917년 22세 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보천교 신도 오석 김혁(金赫)을 만나 도를 전해 받았다 하나 오석 김혁(金赫)은 1919년 기미년 3월 용인 기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당국의 눈을 피해 그해 5월 만주 무송현으로 도망갔던 분이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조철제는 1895년 12.24일 생으로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만주 통하현 부근 압록강변의 유하현으로 이주해 살았으며 오석 김혁에게 포교받고 1916년 귀국해 안면도에 거주했으며 1917년(22세) 20년 연상의 상제님 누이동생 선돌부인(박창국과 이혼)과 동거하기 시작했고 1918년(23세) 김형렬 성도 교단에 입교한 뒤 1919년(24세) 약장 궤를 도둑질해 얻고 1921년(26세)에는 상제님 성골도굴사건을 일으켜 큰 기운을 얻었다 생각하고 정산(鼎山)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으며 25년(30세) 4월 무극도를 창립한다(35년 8월 해체) 1945년(50세) 해방과 더불어 태극도를 창립하고 55년(60세)에 옥황상제님이신 증산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라 새롭게 칭하고 자신을 옥황상제로 참칭하기 시작한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그러나 독립지사로 만주에서 무장항쟁의 길을 걸은 오석 김혁(金赫)에게 1917년 도를 받았다는 조철제의 주장과는 달리 김혁은 독립운동사에 있어 족적이 확연히 남겨진 공인으로서 1919년 용인 기흥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일제당국의 추적을 피해 다니다 1919년 5월에야 만주 무송현으로 간 것이 확실하게 밝혀졌으므로 만일 조철제의 주장이 맞다면 조철제 집안이 1917년에 만주에서 있으면서 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오석 김혁 선생이 1919년(44세) 만주로 도망가 무장항쟁을 벌이기 이전 국내에 있을때라 볼 수 있다. 오석 김혁이 당시 정읍 대흥리에 가서 이치복 성도를 만나 도를 받은 시기를 대략 추정하면 36세 되던 시기인 태모님 대흥리 첫살림 교단개창 시기인 1911년부터 대흥리에서 조종골 살림으로 독립하던 1918년 시기(이치복성도 대흥리 교단에서 내쳐져 나갈무렵) 즉 조종골로 옮길 무렵인 1918년 9월 천종서 집으로 옮기실 무렵까지(김혁 43세)로 보인다. 이 기간 오석 김혁 선생은 대흥리 시절의 이치복 성도에게 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결론적으로 김혁은 1911년 36세시절부터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44세 이전에 이미 대흥리를 드나들며 이치복 성도에게 도를 받은 것으로 보이고 1916년에 조철제가 김혁에게서 도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1911년부터 1916년 이전에 대흥리 보천교에 드나들며 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철제 가족에게 포교하여 보천교의 주문과 신앙방법에 대한 자세한 교리를 설명해주었다는 것이 1917년이고 그 가족이 먼저 입교한 것을 보면 1916년 이전에 대흥리를 드나든 것으로 보인다. 이로보면 조철제는 김혁이 만주로 가기 3년전인 1916년에 만주에서 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1916년 이전에 안면도로 가족이 다시 들어와 국내에서 만난 김혁에게 도를 받은 것이 된다. 실제로 조철제는 1916년 안면도에 살았으며 1917년 선돌부인과 동거하게되어 이것이 진실임을 말해준다. 당시 김혁은 어떤 연고로 만났는지 모르지만 당시 만주에서 살다 돌아온 조철제 가족에게 보천교를 권유했으며 조철제 누이 조봉귀와 종제 길룡은 김혁의 권유로 보천교에 입도하여 주문과 신앙방법에 대해 자세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부친 조용모도 증산 상제님을 신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철제 연원의 비밀>*당시 보천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비밀 방주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입교의식도 연원주가 개별적으로 가정집에서 비밀리 입도시키는 예에 따라 김혁은 조철제가족을 사가에서 입교의식을 치루어 입교시키고 조철제 역시 날을 잡아 입교했는데 태극도 <진경전서>에 보면 김혁에게 입교의식을 치룬 날이 "이날이 윤2월 10일 양력 4월 1일 축시였다"라고 나온다. 조 철제는 입도한 후에 김혁으로 부터 증산상제님의 생애와 선도의 역사를 비롯하여 신봉하고 수행하는 방법과 기도치성의 절차 등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진경전서」 247쪽) 이후 조철제는 증산 상제님에 대한 깊이 있는 진리를 알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절대적 신권을 가진 옥황상제님이 탄강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혈족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혈족과 연분을 맺으면 자신에게 한량없이 큰 축복과 화권이 있으리라 생각한 끝에 혈족을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하며 결국에는 2017년(22세) 박창국과 살고있는 증산상제님 누이동생 선돌부인(42세)을 찾아 인연을 맺어 함께 살게 되었다.
<증산교사(甑山敎史)>*기미년(道紀 49, 1919) 여름에 철제가 따로 교단을 창설하려고 획책할새 유 의경(柳宜卿)이 철제에게 일러 가로대 『천사(天師)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사 운수를 뭉쳐서 약장과 궤에다 감아두셨으므로 차 경석도 이 신기(神器)를 얻은 연후에야 운수가 열려서 교단창설에 성공하였나니 그대도 교단을 창설코저 하면 먼저 계획을 세워 이 신기(神器)를 도취(圖取)하도록 하라.』하니 철제가 이 말을 옳게 생각하였다.
<전경(典經)>*선돌부인이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라 하루 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라고 도주(조철제)께 아뢰니라. 이때 도주께서는 도수에 따라 이 준세(李俊世)의 재실에서 도수를 보고 계셨도다. 이곳은 황새마을에 가까운 통사동(通士洞)이니라.
<증산교사(甑山敎史)>*철제는 심복부하 권 태로(權泰魯), 성 정오(成丁五), 이 정두(李正斗), 조 용서(趙鏞瑞), 권 영문(權寧文) 등 장정 8 사람을 순사로 가장하여 하여금 밤중에 본소를 습격하여 경석을 체포하려는 태세를 보이며 가택수색을 행하니 차 윤칠이 나서서 사유를 묻거늘 방망이로 머리를 쳐서 대번에 혼도케 하고 온 집안이 소란한 틈을 타서 치성실 문을 열고 약장과 궤를 도적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증산교사(甑山敎史)>*윤칠이 정신을 차린 뒤에 치성실 문이 열렸음을 보고 들어가 보니 약장과 궤가 보이지 아니한지라 이에 순사가 아니고 강도단임을 깨닫고 마을 사람들을 일으켜서 함께 뒤를 밟아서 쫓으니 태로 일행은 짐이 무거워서 빨리 걷지 못하여 붙잡히게 되겠으므로 약장은 길가에 버리고 궤만 가지고 돌아왔었다. 철제는 이렇게 궤를 도적하여다가 감추어 두고 선돌부인과 부친 용모(鏞謀)와 삼촌 용서(鏞瑞)와 심복부하 권태로(權泰魯) 등과 더불어 교단창설의 준비를 진행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성묘 도굴사건) 신유년(道紀 51: 1921) 2월에 묘구(墓寇)가 구릿골 뒷산 장탯날에 모셔둔 성묘(聖墓)를 발굴하여 성골을 도적하여 갔거늘 김 형렬이 김제경찰서에 고발하니 경찰은 전북 각 경찰서에 통지하여 큰 수사를 진행하였다. 원래 조 철제는 궤를 도적하여다가 감추어두고 교단창설을 계획하더니 성골을 몸에 지니고 수련하면 쉽게 도통된다는 말을 유포한 뒤에 심복부하 권 태로(權泰魯), 손 진방(孫進邦) 등 장정 8 사람을 보내여 밤을 타서 성묘를 발굴하여 정읍군 감곡면 통사동 이씨 재사(齋舍)에 성골을 숨겨두고 심복장정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이 사실을 탐지한 문 공신은 심복부하 김 정우(金定雨)로 하여금 철제를 거짓 추종하여 철제의 신임을 받게 된 뒤에 임술년(道紀 52: 1922) 정월에 공신이 김정우로 하여금 장정 20여명을 거느리고 목검을 들리고 밤중에 통사동 재사를 습격하여 성골을 지키던 조 용모를 쳐서 오른 팔을 부러지게 하고 권 영문(權寧文)을 쳐서 혼도케 하니 철제는 도망한지라 정우 등이 성골과 현금 만 여원을 빼앗아 갔다.
<증산교사(甑山敎史)>*공신은 성골을 자기 거처하는 방 천반자(天盤子) 위에 감추어 두고 현금은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성골을 빼앗어 갈때에 왼손 완골(腕骨)이 들켰으므로 철제가 수습하여 김 윤진(金胤鎭) 권 영수(權寧秀)와 함께 밤중에 도망하여 도보로 대전을 거쳐서 안동으로 향하려 하다가 서대전에서 김 정우(金定雨) 등에게 붙들리게 됨에 철제는 완골을 윤진에게 주어 빨리 도망하게 하였다. 정우는 철제를 추궁하여 완골을 찾지 못하고 철제가 가진 현금을 빼앗았다.
<증산교사(甑山敎史)>*철제는 대전 일본 경찰서에 정우를 강도로 고소하니 경찰이 정우와 철제를 가두고 취조함에 성묘를 도굴한 일과 성골을 쟁탈한 사실이 전부 탄로된지라 이에 문공신 김정우를 비롯하여 일당 20여명이 모두 검거되어 정우는 고문치사 되고 공신은 7년 징역에 처하게 되고 철제는 경찰에 뇌물을 주어 면하게 되고 성골은 정읍경찰서로 이송하였는데 정읍경찰서에서는 3월에 성골을 찾아다가 대흥리 앞 냇가에 빈실(殯室)을 지여 봉안하여 두니 완골을 찾은 뒤에 장례를 거행하려는 것이었다.
<증산교사(甑山敎史)>*철제는 윤진에게서 완골을 찾아서 몸에 지니고 있다가 오랜 뒤에 순창 회문산에 매장하고 장 덕원(張德元)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위토(位土) 너마지기를 사서 덕원에게 경작케 하였는데 수십 년 후에 위토는 철제가 팔아가고 덕원이 죽은 뒤에 김 병철(金炳澈)이 가서 파보니 완골이 없는지라 일부에서는 덕원이 한때 정인표(鄭仁杓)를 추종할 때에 완골을 파내어 인표에게 전하였다는 풍설이 유포되었다.
<증산교사(甑山敎史)>*정묘년(道紀 57: 1927) 가을에 철제가 천사(天師)의 딸 순임(舜任)의 이름으로 보천교를 상대로 성골 인도청구 소송을 제기하니 경석이 밤중에 차 윤경, 김 정곤, 김 규찬, 권 창기 등으로 하여금 성골을 대흥리 뒷산 중턱에 암장한 후 차 윤덕을 명하여 그 부근 벌판에 밭을 일궈서 엄적(掩跡)케 하고 빈실(殯室)에는 김 정곤의 집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죽은 자의 해골을 파다가 관에 넣어두었었는데 순임이 결국 패소하게 되었으므로 이 사실이 비밀에 묻혀 있었더니
<증산교사(甑山敎史)>*십년 후 정축년(道紀 67: 1937) 여름에 문 정삼이 천사(天師)의 친족들과 더불어 천사(天師)의 장의(葬儀)를 거행하려 할 새 성골을 모시러 대흥리에 가서 경찰의 입회하에 빈실(殯室)에 들어가 관을 열어본 즉 관이 비어있는지라 일행은 놀래어 흩어져 돌아가고 정삼은 경찰에 호소하여 보천교 간부들을 추궁하니 성골을 은닉한 사실을 자백하고 대치(代置)하였던 해골도 도난당한 것이 판명되었다.
<증산교사(甑山敎史)>*그 뒤로 10여년을 지나서 8.15 해방 후 무자년(道紀 78: 1948) 봄에 순임(舜任)이 대흥리에 가서 차 윤경(車輪京)과 한 인희(韓寅熙)의 안내로 성골을 찾아서 모셔다가 기축년(道紀 79: 1949) 3월 보름날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오리알 터에 장사하였고 완골은 종시 찾을 길을 얻지 못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철제는 성묘도굴사건에 경찰에 뇌물을 주고 석방되어 완골(腕骨)을 지니고 경북 안동군 일직면 소호리 권 오현(權五賢)의 집에 가서 은거하면서 계해년(道紀 53: 1923) 봄부터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에 교단본부의 건축공사를 시작할새 신도들을 모아 진업단(進業團)이라는 노동단체를 조직하여 이 승원(李承元)으로 하여금 거느려 품삯없이 노역에 종사하게 하고 병인년(道紀 56: 1926) 구월에 본부 대건축이 낙성됨에 교단이름을 무극대도교라고 지어서 간판을 걸고 무극도 취지와 강령과 도규(道規)를 발표하여 신도의 처녀 여섯 사람을 뽑아들여 후궁(後宮)으로 정하니 본처와 선돌부인까지 처첩이 여덟 사람이었다.
<증산교사(甑山敎史)>*(무극대도교의 말로) 무극대도교는 전성시대에 10 여 만에 달하였던 신도가 교의의 불확실과 일정의 탄압으로 인하여 점차 탈교자가 많아지고 교세가 침체하여짐에 조 철제는 신도들의 신앙을 다시 고무하여 교세를 만회코저 할새 무진년(道紀 58: 1928) 겨울에 술사 김 해산(金海山)을 비밀히 초빙하여 신도가 가장 많이 있는 밀양군으로 데리고 가서 밀양면 금시정(今是亭)에 신도 수백명을 모아 대치성을 행할 때 먼저 철제가 도통되어서 천지화권을 농단하니 이번 치성에 화권을 대중앞에 공개한다고 소문을 내었다.
<증산교사(甑山敎史)>*지정한 날 밤중에 치성을 행한 뒤에 모두 보니 금시정 앞 암새 강변 밤나무 숲속에서 현황(炫煌)한 노릿불(火花)이 일어나거늘 철제가 자기의 화둔(火遁)하는 권능이라고 자랑하는지라 군중이 『이것은 회중전지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떠들며 논박하니 철제는 도망하여 버렸었다.
<증산교사(甑山敎史)>*신도들이 철제를 붙들지 못함에 간부 이 우형(李愚衡), 김 용국(金容國) 등을 붙들어서 협박하니 우형과 용국이 김 해산을 붙들어 감금하고 『금시정 사건은 모두 너의 간계인데 우리가 이제 신도들의 협박을 견딜 수 없으니 네가 해결하라』고 강박하거늘 해산이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대중을 모으게 하고 초령술(招靈術)을 행하여 무수한 유령을 현형(現形)케 함에 인심이 진정된지라 우형과 용국은 이 틈을 타서 도망하여버렸다.
<증산교사(甑山敎史)>*철제는 밀양으로부터 집에 돌아와서 교세 만회책에 고심하더니 경오년(道紀 60: 1930) 겨울에 서울사람 감 익룡(甘 翊龍)이 찾아와서 평안북도 무산군에 있는 국유림 벌채허가를 얻게 되었으니 벌채자금을 조달하고 신도들을 동원하여 벌채하자고 권하거늘 철제가 허락하고 신도 400 여명을 무산군으로 보내어 벌채에 종사케 하였더니 무산경찰의 방해로 벌채허가가 나지 못하게 되고 신도들은 경찰이 강제로 돌려 보내버렸다.
<증산교사(甑山敎史)>*임신년(道紀 62: 1932)에 철제는 교단소유 전답을 팔아서 그 대금을 자금으로 하여 금광 80여구(區)를 출원하고 전주군 이서면 사금광(沙金鑛)과 충북 음성군 무극광산을 채굴하여 상당한 수익을 얻음에 이에 충남 안면도에 두 곳과 원산도(元山島)에 두 곳 간사지(干瀉池) 4000여 두락의 개간에 착수하여 을해년(道紀 65: 1935)에 준공하였는데 원래 대부(貸付)허가 수속을 밟지 아니한 까닭에 원산도(元山島) 간척지는 보령군청에 무상으로 빼앗기고 안면도 간척지는 어느 일본인이 대부허가를 얻어서 무상으로 빼앗아 버렸다. 이렇게 하여 간척사업이 실패됨에 교단의 재산은 탕진되고 교세는 더욱 침체되므로 광업도 경영난에 빠져서 광구전부를 팔아버렸다.
<무극도 해산 고찰, 권지1-22>*그간 무극도를 계승한 당사자임에도 대순진리회 측의 기록은 연구자들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그 결과 무극도의 사정을 잘 모르는(때론 악의적인 견해를 가진) 외부 학자의 책이 많이 채택되어 왔다. 여기에 편승해 태극도의 『진경전서』(87년 출간)와 같은 서적조차 상당한 근거를 가진 문헌으로 묻어가고 있다. 『진경전서』는 2년 후인 89년에 『진경』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진경』은 「무극진경」과 「태극진경」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태극진경」이 도주님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부 수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 내용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소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도주님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에 대해 수도인들이 알아야 할 부분을 교운 2장으로 친히 작성하여 내려 주셨다. 도주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무극도의 해산사례에서 보듯이 정확한 근거 없이 지어진 「태극진경」을 자주 접함으로써 나중에는 그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병폐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자제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외부의 학자들이야 도를 모르는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잘못된 설을 가지고 종단 내부에서까지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차제(此際)에 『典經』의 신성성(神聖性)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극도 해산 고찰, 권지1-22>
*「태극진경」 즉 『진경』의 저자인 황 진규의 진술에 따르면 윤 금현의 기록을 참조해서 썼다고 한다. 윤 금현은 1952년에 도주님(정산 조 철제)을 처음 뵈었고, 당시 직위가 호령(지금의 교정)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단 1952년 이전의 내용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52년 이후도 도주님을 계속 가까이서 시봉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의 내용은 계속 곁에서 시봉했던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다. 「태극진경」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소개할 예정이나 우선 대표적인 한 가지만을 들자면 ‘태극주’ 문제를 들 수 있다. *** 재세시에는 ‘정산님’ 또는 ‘도주님’이라는 두 가지 호칭 외에는 쓰이지가 않았으며, 당신께서 스스로를 ‘태극주’라고 지칭하신 적은 더욱 없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에는 ***께서 당신이 ‘태극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태극주’라는 호칭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다. 이는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자가 임의로 지어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이중성 대개벽경(大開闢經)>
*하루는 대흥리에서 다수의 양지조각에 각기 옥황상제라 쓰시고 뒷간에 가시어 후지(后紙)로 쓰시니라. 성도 물어 여쭈기를, “지금에 옥황상제라 쓰시어 후지(后紙)로 쓰시니 어찌된 연고이나이까.” 말씀하시되, “천하에 어느 누가 감히 이같이 하리오. 천지만신이 목을 자르고 몸을 찢어발기노라. 이 뒤에 하늘을 거스르고(패천) 도를 어지럽히는(패도) 자가 있어, 혹 패가망신하고 세상을 그르쳐 백성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정녕 경계함을 보인 것이나니 내가 고심함이 이와 같노라.”
-一日 在大興 洋紙數片 各書 玉皇上帝 如厠 用后紙 弟子 問曰 今 書玉皇上帝 用后紙 何以乎 曰 天下誰人 何敢如此 天地万神 斷頭裂身 從后 有悖天悖道者 恐或敗家亡身 誤世傷民 丁寧示戒 我用苦心 如此-
<대순전경>*계룡산鷄龍山의 정씨왕국鄭氏王國과 가야산伽倻山의 조씨왕국趙氏王國과 칠산七山의 범씨왕국范氏王國을 일러오나 이 뒤로는 모든 말이 영자影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태극도, 대순계열 성도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조 철제가 종통이 되려면 그의 인생족적과 삶이 경만장 안 내성 추종성도에게 내린 도안 세 살림 사명과 부합해야 하며 역경만첩의 문왕의 사명자 도수와 부합하여야 합니다. 만일 종통을 안 씨가 아니라 조 씨 가문에 내렸다면 천지수기를 돌리는 안 씨 추원재 재실공사는 조 씨 추원재 재실 공사로 되었어야 하고 학암 이중성 선생의 <대개벽경(천지개벽경)>에 ‘평생불변심 안**’이 아니라 ‘평생불변심 조**’라 되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상제님 주요 추종성도 중엔 조 씨 성을 가진 분이 아예 안계십니다. 동시에 가야산 조 씨 왕국이란 말이 그림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을 안 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조 철제 가문의 3부자에게 초중말복 세 살림을 내렸다면 안 내성 성도에게 모든 종통공사를 돌돌몰아 보신 천지공사를 조 씨 성을 가진 추종성도를 통해 보셨을 것입니다. 동시에 3초 끝에 대인출세 공사에 ‘이곳이 도안(都安)의 집’이 아니라 ‘이곳이 도조(都趙)의 집’이라 공사 보셨을 것이며 종통 세 살림 사명기와 성장, 예장, 신장 세 살림 공사도를 안 내성 성도의 순흥 안 씨 사가가 아닌 조 씨 사가에 맡겼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무경도 안 내성 성도 집이 아닌 조 씨 성도 집을 택해 남기셨을 것입니다. 그간 교단개창이라는 종통의 시발점이 태모 고 수부님이라는 수부사명을 삭제 처리한 교리 구조위에 빈 공간을 조철제의 행록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통을 주장한다면 동지한식백오제 공사대로 기유년(1909)으로부터 105년째인 사오미 개명장(2013 계사, 2014 갑오, 2015 을미)에 진법이 그 교단을 중심으로 나오되 조 씨 가문의 도조(都趙) 3부자 문왕의 도수 세 살림 진법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 철제를 상제로 만들어 천지공사를 행했다는 『태극진경』의 저자 황 진규는 스토리텔러였던 윤금현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조 철제 살아생전 ‘정산님’ 또는 ‘도주님’이라는 두 가지 호칭 외에는 쓰이지가 않았으며, 스스로를 ‘태극주’라고 지칭한 적은 더욱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태극진경」에는 조 철제를 ‘태극주’라고 부르는 호칭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는데 “이는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자(윤 금현)가 임의로 지어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 라 밝혔을 뿐입니다. 심지어 박한경 도전都典도 「태극진경」이 정확한 근거 없이 지어져서 사실처럼 느껴지는 병폐가 있으니 삼가라 공표했을 정도입니다.
<무극도 해산 고찰, 권지1-22>
* 「태극진경」이 도주님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부 수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 내용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소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도주님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에 대해 수도인들이 알아야 할 부분을 교운 2장으로 친히 작성하여 내려 주셨다. 도주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무극도의 해산사례에서 보듯이 정확한 근거 없이 지어진 「태극진경」을 자주 접함으로써 나중에는 그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병폐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자제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무극도 해산 고찰, 권지1-22>
*황진규는 윤 금현의 기록을 참조해서 썼다고 한다. 윤 금현은 1952년에 도주님(정산 조 철제)을 처음 뵈었고, 당시 직위가 호령(지금의 교정)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단 1952년 이전의 내용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52년 이후도 도주님을 계속 가까이서 시봉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의 내용은 계속 곁에서 시봉했던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다. 「태극진경」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소개할 예정이나 우선 대표적인 한 가지만을 들자면 ‘태극주’ 문제를 들 수 있다. 옥황상제님 재세시에는 ‘정산님’ 또는 ‘도주님’이라는 두 가지 호칭 외에는 쓰이지가 않았으며, 당신께서 스스로를 ‘태극주’라고 지칭하신 적은 더욱 없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에는 옥황상제님께서 당신이 ‘태극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태극주’라는 호칭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다. 이는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자가 임의로 지어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도, 대순 계열의 단체는 증산 상제님 신앙으로 많은 사람을 인도했으니 그 공덕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범 증산계 모든 신도는 과거의 잘잘못을 떠나 동지한식 백오제 사오미 개명장에 드러난 본 범증산계 통합경전의 진법 그대로 태모 고 수부님의 윷판 통일도수에 따라 모두 한 형제로 만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