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耽羅)에서 개국(開國)하신 량을나(良乙那) 후손들의 발자취.
잊혀진 조상(祖上)을 찾아서
제3章(장) 李朝(이조) 時代(시대)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 - 상산김씨(商山金氏).
淑人(숙인) 商山金氏(상산김씨)는 直提學(직제학)을 지내신 金後(김후)의 따님이시고, 未雛王(미추왕)의 後孫(후손)이시다. 梁 峻(양준) 선조(先祖)께서는 思貴(사귀) 先祖(선조)의 여섯 兄弟(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 나셨으나, 병화(兵火)로 인(因)하여 문헌(文獻)이 소실(燒失)되어 후손(後孫)들이 生卒(생졸)을 모른다. 후손(後孫)들이 조상(祖上)님의 생졸(生卒)과 경력(經歷)을 모르니,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通)하여 소상이 밝혀 본다.
梁峻(양준)선조(先祖)님에 대한 行蹟(행적)을 수십년(數十年) 동안 찾을길이 없었다. 그러나 至誠(지성)이면 感天(감천)이라더니, 인터넷(internet)이 발달(發達)하여 미국(美國)에서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열람(閱覽)할수 있는Program이 생겨 자료(資料)를 밝힐수 있어 감사(感謝)한 마음으로 공개(公開)한다. 양준(梁峻) 선조(先祖)님에 대한 관직(官職)은 고려대학교에서 씨족원류(氏族源流)(650pg), 안동권씨(安東權氏), 서기(西紀) 1467년 世祖(세조)13년 成化(성화3년) 丁亥(정해)년에 만든 성화보(成化譜175pg), 문화류씨(文化柳氏) 가정보(嘉靖譜)(151pg)를 참고(參考)하여 종삼품(從三品) 부정(副正)을 지내셨다고 계시(啓示)하고 있다. 양준(梁峻) 선조(先祖)님의 외손(外孫)이신 강린의 자료(資料)에 의(依)하면, 양준(梁峻) 선조(先祖)님은 정삼품(正三品) 사재감(司宰監:하천담당관청) 정(正)을 지내셨다고 전(傳)하고 있다.
씨족원류(氏族源流)가 일반적(一般的)으로 객관적(客觀的)인 자료(資料)라고 판단(判斷)하기 때문에, 종삼품(從三品) 부정(副正)을 지내신 것을 신뢰(信賴)할 수 있고, 종삼품(從三品) 부정(不正)을 지냈으면 정삼품(正三品) 정(正)을 지냈다는 진주강씨의 계시(啓示) 자료(資料)도 일방적(一方的)인 주장(主張)은 아닐 것이다. 남원양씨(南原梁氏) 문양공(文襄公)후손(後孫)중에 봉사공 후손(後孫)이신 경주(慶州) 감포 문중(門中)에서도 양준(梁峻) 선조(先祖)님은 종사품(從四品) 군수(郡守)를 지내셨다고 전(傳)하고 있다. 諸(제) 마다 기록(記錄)한 족보(族譜)에 등재(登載)된 자료(資料)가 일치(一致)하지 않아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中)에 태종(太宗)~세조(世祖) 시대(時代)에 활동(活動)하신 양준(梁峻) 선조(先祖)님의 행적(行蹟)을 살펴보았더니, 아래와 같다.
참고(參考):사재감(司宰監)은 『경국대전』에는 어물(魚物)·육류(肉類)·식염(食塩)·소목(燒木)·거화(炬火) 등을 맡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조(提調, 종2품) 1인, 정(정3품) 1인, 부정(종3품) 1인, 첨정(僉正, 종4품) 1인, 주부(종6품) 1인, 직장(종7품) 1인, 참봉(종9품) 1인 등을 두었다. 뒤에『속대전』에서는 정(正)·부정(副正)·참봉(參奉)을 감원(減員)하고 봉사(奉事) 1인(人)을 증원(增員)했다가 1882년(고종(高宗) 19)에 폐지(廢地)되었다. 巨濟冠浦門中(거제관포문중)은 梁思貴(양사귀) 先祖(선조)님의 여섯째이신 梁峻(양준) 先祖(선조)님의 子孫(자손)이시며 梁峻(양준) 先祖(선조)님은 內職(내직)으로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正郞(정랑)/司宰監正(사재감정)을 지내시고, 外職(외직)으로 眞寶縣監(진보현감)/全州判官(전주판관)/靈光郡守(영광군수)를 지내셨기 때문에 그 子孫(자손)들은 郡守公派(군수공파)로 分派(분파)하여 世代(세대)를 이어오고 있다.
서기(西紀) 1427년 세종(世宗)9년(年) 02월 10일 진보현감(眞寶縣監)----- 종육품(從六品).
서기(西紀) 1434년 세종(世宗)16년(年) 10월 30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육품(正六品).
서기(西紀) 1435년 세종(世宗)17년(年) 2월 10일 전주판관(全州判官) ----- 종오품(從五品).
서기(西紀) 1444년 세종(世宗)26년(年) 1월 12일 사헌지평(司憲持平)----- 정오품(正五品).
서기(西紀) 1455년 世祖(세조)元年(원년) 12월 27일 정랑(正郞), 原從功臣(원종공신)으로 각각(各各) 기록(記錄)하고 있다.
원종공신(原從功臣, 元從功臣)은 각(各) 功臣錄券(공신녹권) 중(中) 친공신(親功臣:직접적인 공신)의 아래로, 補助的(보조적)인 役割(역할)을 한 공신(功臣)이었다. 原從功臣(원종공신) 역시 친공신(親功臣)과 같이 1등, 2등, 3등으로 훈(勳)이 구분(區分)되어 있었으며, 각(各) 공신명(功臣名)에 따라 宣武功臣(선무공신)의 경우(境遇)는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 奮武功臣(분무공신)의 경우(境遇)는 奮武原從功臣(분무원종공신) 등(等)으로 原從(원종)앞에 공훈명(功勳名)이 붙었다. 각(各) 정치적(政治的) 사변(事變)이 발생(發生)하여 공신(功臣)들이 녹훈(錄勳)되면 친공신(親功臣:정식공신(正式功臣)으로 녹훈(錄勳)된 자(者)와 原從功臣(원종공신)이 발생(發生)했고, 각(各) 공신(功臣)의 공훈명(功勳名)의 뒤에 原從功臣(원종공신)을 붙여서 정공신(正功臣)보다 한등급 아래로 포상(褒賞)했다.
선무공신(宣武功臣)이나 扈從功臣(호종공신)의 경우 공훈(功勳)이 낮은 공신(功臣)이 原從功臣(원종공신)에 편입(編入)되는 사례(事例)도 있었다. 혜택으로는 原從功臣(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된 자(者)는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以上)으로 승진(昇進)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原從功臣(원종공신)의 아버지의 경우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한 경우, 아버지가 생전(生前)에 역임(歷任)한 관직(官職)에서 한등급을 추증(追贈)해 주었다. 공(功)이 있는 자(者)가 원종공신 서훈(敍勳)이 되기 전(前)에 사망(死亡)한 자(者)는, 공(功)이 있는 본인(本人)을 추증(追贈)하되, 최소(最小) 정삼품(正三品) 堂上官(당상관) 직책(職責)을 추증(追贈)했다. 공훈(功勳)을 세운 친공신(親功臣)이나 왕족(王族)의 친(親)·인척(姻戚)이 원종공신에 임명(任命)되는 것이 보통(普通)이었다.
참고문헌(參考文獻):
奮武功臣(분무공신)은 조선시대(朝鮮時代), 西紀(서기) 1728년에 李麟佐(이인좌)의 亂(난)을 평정(平定)한 吳命恒(오명항)등 열다섯 사람에게 내린 훈명(勳名).
오명항(吳命恒, 1673년 5월 29일(음력 4월 14일) ~ 1728년 10월 12일(음력 9월 10일)은 朝鮮(조선)의 文臣(문신)이다. 本貫(본관)은 해주(海州), 字(자)는 사상(士常), 號(호)는 모암(慕庵)ㆍ영모당(永慕堂), 諡號(시호)는 충효(忠孝)이다. 高祖父(고조부)는 領議政(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며, 外祖父(외조부)는 領議政(영의정) 여성제(呂聖濟)다. 李麟佐(이인좌)의 亂(난)을 討平(토평)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에 冊錄(책록)되고 해은(海恩)府院君(부원군)에 俸(봉)해졌으며, 右議政(우의정)에 이르렀다.
李麟佐(이인좌)의 亂(난)은 朝鮮(조선) 영조(英祖) 4년(1728년) 少論(소론) 强硬派(강경파)와 南人(남인) 일부가 景宗(경종)의 죽음에 英祖(영조)와 老論(노론)이 관계되었다고 主張(주장)하면서 일으킨 內戰(내전)이다. 亂(난)이 일어난 英祖(영조) 4년이 干支(간지)로는 戊申年(무신년)이었기에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하고, 亂(난)의 主要(주요) 地域(지역)이었던 慶尙道(경상도)(嶺南(영남)의 이름을 따서 영남란(嶺南亂)이라고도 한다. 辛壬士禍(신임사화) 이후 실각당하였던 老論(노론)이 英祖(영조)의 卽位(즉위)와 同時(동시)에 다시 執權(집권)하고, 앞서 老論(노론) 4大臣(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少論派(소론파) 金一鏡(김일경)·睦虎龍(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그 당의 나머지는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1727년(英祖(영조 3년) 陰曆(음력) 7월 1일 老論(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陰曆(음력) 3월에 李麟佐(이인좌)·김영해·정희량·박필현·沈維賢(심유현) 등이 主動(주동)이 되어 密豊君(밀풍군) 탄(坦)을 推戴(추대)하고 反亂(반란)을 일으켰다. 먼저 李麟佐(이인좌)는 淸州(청주)를 습격해 병사(兵使) 李鳳祥(이봉상)을 죽이고 兵卒(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稱(칭)하며 四方(사방)으로 檄文(격문)을 돌렸다. 檄文(격문)의 要地(요지)는 景宗(경종)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흉악한 무리(즉 英祖(영조)와 老論(노론) 勢力(세력)에 의한 毒殺(독살)이고, 연잉군(英祖(영조)은 肅宗(숙종)의 王子(왕자)가 아니므로, 王大妃(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景宗(경종)의 원수를 갚고 昭顯世子(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密豊君(밀풍군) 탄(坦)을 王(왕)으로 세워 王統(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군사들은 景宗(경종)을 哀悼(애도)한다는 뜻에서 喪服(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 · 총융사 김중기 · 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 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려 하였으나, 용인(龍仁)에 退去(퇴거)하고 있던 少論(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이를 朝廷(조정)에 고변해 反軍(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고,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兵曹判書(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官軍(관군)에 의하여 反亂(반란)은 鎭壓(진압)되었다. 비록 短時日(단시일)의 內亂(내란)이긴 하였으나, 淸州城(청주성)을 中心(중심)으로 진천(鎭川)·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는 그 形勢(형세)가 몹시 위태로웠으며, 李麟佐(이인좌)를 비롯한 反亂(반란)의 主謀者(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押送)되어 處刑(처형)되었고, 밀풍군 坦(탄)도 事死(사사)된다 (自決(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6일 天下(천하)로 끝난 李麟佐(이인좌)의 亂(난)은 嶺南(영남)地域(지역)을 朝鮮(조선) 後期(후기) 政治(정치)에서 疏外(소외)시키는 結果(결과)를 낳았다. 비록 擧兵地(거병지)는 淸州(청주)였지만 南人(남인)들의 고장 嶺南(영남)에서 謀議者(모의자)와 同調者(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安東(안동) 등 일부 지역의 士大夫(사대부)들을 除外(제외)하고는 대다수가 擧事(거사)에 심적으로 同調(동조)했던 것이다. 李麟佐(이인좌)는 南人(남인) 윤휴(尹鑴)의 孫子(손자)사위여서 嶺南(영남) 儒林(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亂(난)이 平定(평정)된 후 英祖(영조)는 大邱府(대구부)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嶺南(영남)을 叛逆向(반역향)으로 못박았다.
윤휴(尹鑴, 1617년 10월 14일~1680년 5월 20일)는 朝鮮(조선) 後期(후기)의 文臣(문신), 성리학자이다. 南人(남인)의 巨頭(거두)이며, 淸南(청남)의 重鎭(중진)이자 禮訟(예송) 論爭(논쟁) 당시 南人(남인)의 主要(주요) 論客(논객)이었다. 本貫(본관)은 남원(南原).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號(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이다. 이름 휴(鑴)를 잘못 오기하여 윤준(尹鑴), 윤전(尹鐫)으로 읽기도 한다. 學者(학자) 간서재(澗西齋) 김덕민의 外孫(외손)으로, 김덕민, 이민구, 이원익의 文人(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侍講院(시강원)진선이 되었으며 이후 成均館(성균관)事業(사업), 사헌부大司憲(大司憲(대사헌), 吏曹判書(이조판서), 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西人(서인) 攻擊(공격)의 선봉장이었다.
예송(禮訟) 또는 예송논쟁(禮訟論爭)은 예절에 관한 論難(논란)으로, 孝宗(효종)과 孝宗妃(효종비) 仁宣王后(인선왕후)에 대한 繼母(계모) 자의대비(慈懿大妃)의 服喪(복상)기간을 둘러싸고 顯宗(현종), 肅宗(숙종)대에 發生(발생)한 西人(서인)과 南人(남인)간의 論爭(논쟁)이다. 朝鮮(조선) 後期(후기)에 次男(차남)으로 王位(왕위)에 오른 孝宗(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孝宗(효종) 昇遐(승하) 時(시)와 1674년 孝宗妃(효종비) 仁宣王后(인선왕후)의 昇遐(승하) 時(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仁祖(인조)의 繼妃(계비) 慈懿大妃(자의대비)의 服制(복제)가 爭點(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西人(서인)은 孝宗(효종)이 嫡長子(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王(왕)과 士大夫(사대부)에게 同日(동일)한 例(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主張(주장)하였고, 南人(남인)은 王(왕)에게는 一般(일반) 士大夫(사대부)와 다른 禮(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主張(주장)하여 對立(대립)하였다. 당초 許穆(허목), 윤휴(尹鑴)와 宋時烈(송시열)의 예론대결로 흘러가던 중 尹善道(윤선도)가 宋時烈(송시열)은 孝宗(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하였고, 이 事件(사건)을 契機(계기)로 禮訟(예송)은 討論(토론)에서 理念(이념) 對立(대립)으로 激化(격화)된다. 孝宗喪(효종상)인 기해예송(1차)과 仁宣王后(인선왕후)상인 갑인예송(2차)으로 두차례 전개되었다.
原從功臣(원종공신)은 조선시대(朝鮮時代), 큰 공(功)을 세운 정공신(正功臣) 이외에 작은 공(功)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칭호(功臣稱號).
辛丑扈從功臣(신축호종공신)은 (高麗) 공민왕(恭愍王) 10년(1361)에, 홍건적 침입 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렸던 공신호(功臣號).
親功臣(친공신)은 例典(예전)에, 조상(祖上)으로부터 이어받은 공신(功臣)이 아니고 자기(自己) 공(功)으로 장부(帳簿)나 문서(文書)에 기록(記錄)된 공신(功臣)을 이르던 말.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記錄(기록)된 梁峻(양준) 先祖(선조)님의 官職(관직) 變化(변화)상을 살펴보면 한분에 대한 記錄(기록)으로 判斷(판단)되고, 韓國(한국) 梁氏(양씨) 中(중)에 世宗(세종) 時代(시대)에 저 정도의 官職(관직)에 從事(종사)할 梁峻(양준) 先祖(선조)님은, 梁思貴(양사귀) 先祖(선조)님의 아드님 이신 梁峻(양준) 先祖(선조)님 밖에 없기 때문에,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記錄(기록)된 梁峻(양준) 先祖(선조)님은 梁思貴(양사귀) 先祖(선조)님의 아드님이 틀림이 없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中(중)에 태종(太宗)~세조(世祖) 時代(시대)에 活動(활동)하신 양준(梁峻) 선조(先祖)님의 행적(行蹟)을 살펴보았더니, 아래와 같다.
西紀(서기) 1427年(년) 世宗(세종) 9년 2월 10일 진보현감(眞寶縣監)---------從六品(종육품).
西紀(서기) 1434年(년) 世宗(세종)16년 10월 30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正六品(정육품).
西紀(서기) 1435年(년) 世宗(세종)17년 2월 10일 전주판관(全州判官)---------從五品(종오품).
西紀(서기) 1444年(년) 世宗(세종)26년 1월 12일 사헌지평(司憲持平)---------正五品(정오품).
西紀(서기) 1455年(년) 世祖(세조) 元年(원년) 12월 27일 정랑(正郞),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각각(各各) 기록(記錄)하고 있다.
거제(巨濟) 관포양씨(冠浦梁氏)는 양준(梁峻) 선조(先祖)님의 자손(子孫)이시다.
따지자면 李朝(이조) 3대 太宗(태종1401-1418)때 이다.
첫째 결(결)이 高麗末期(고려말기) 西紀(서기) 1392년 恭讓王(공양왕)4년 太祖(태조)1年(년) 壬申年(임신년) 生(생)이시고,
둘째 민(岷)이 西紀(서기) 1395년 乙亥年(을해년: 太祖(태조4년) 生(생) 이시고,
셋째 역(嶧)이 西紀(서기) 1398년 戊寅年(무인년: 太祖(태조 7년) 生(생)이시고,
넷째 기(岐)가 西紀(서기) 1401년 辛巳年(신사년) 3대 太宗(태종3년) 生(생)이시고,
다섯째 교(嶠)가 西紀(서기) 1404년 甲申年(갑신년: 太宗(태종4년) 生(생)이시니,
李朝(이조) 셋째 임금이신 太宗祖(태종조1401년-1418년)에 태어 나신것이 分明(분명)하다고 볼수 있다. 따지자면 바로 윗 형님과 사이에 여자 兄弟(형제)가 없다고 볼때에 자세히 살펴보면 3살 터울로 보면 1407년 정해년(丁亥年) 태종(太宗) 7년에 태어 나셨다고 볼수 있다.
府君(부군)께서는 記錄(기록)에 의하면 行爲(행위)에 의해서 靈光郡守(영광군수)로 薦擧(천거)되셨는데, 德(덕)을 세우는 사업을 著述(저술-글을 써서 책을 만듬)함이 많았는데,兵火(병화-전쟁으로 일어나는 화재)로 모두 失傳(실전)하여 庚子年(경자년) 3월 3일 任實(임실) 삼계면 죽계리 大板(대판) 서당동 祭閣(제각) 西便(서편)에 設壇(설단)을 세워 매년 陰曆(음력) 10월 9일 後孫(후손)들이 追慕祭(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依(의)하면 많은 業績(업적)을 남긴 記錄(기록)이 남아 있어 此後(차후) 整理(정리) 하고저 한다. 그리고 고려大學校(대학교) 韓國史(한국사) 硏究所(연구소)의 記錄(기록)에 의하면 子女(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고 기록 하고 있다.
配位(배위)는 淑人(숙인) 商山 金氏(상산김씨) 直提學(직제학)을 지내신 金 後(김후)의 따님이시고, 未雛王(미추왕)의 後孫(후손)이시다.
墓所(묘소)는 실전하여, 후일에 任實郡(임실군) 三溪面(삼계면) 大板村(대판촌) 書堂洞(서당동)에 壇所(단소)를 설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9일에 후손들이 追慕(추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郡守公(군수공) 조상님은 우리 門中(문중) 派祖(파조)이시다. 子女(자녀)는 아들 梁 普(양 보)이시다.
http://blog.daum.net/bangyang/121
http://blog.daum.net/bangyang/960
13世祖(세조) 梁峻(양준) - 商山金氏(상산김씨)
14世祖(세조) 양 보(梁 普) - 용성양씨(龍城梁氏).
14世祖(세조) 장녀-최린(崔璘)-海州人(해주인) 世祖庚辰(세조경진:1460년,세조(世祖 5년)에 公者(공직자)로 기록(記錄).
14世祖(세조) 차녀- 김효문(金孝文)-만호(萬戶)를 역임(歷任).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14世祖(세조) 梁普(양보) - 龍城君(용성군)梁氏(양씨)
梁 峻(양 준) - 商山金氏(상산김씨)의 아들. 14世祖(세조)이신 梁普(양보) 선조(先祖)님의 生卒(생졸)을 後孫(후손)들은 알수 없으나, 忌日(기일-돌아 가신날)은 陰曆(음력) 3월 17일 이라고, 記錄(기록)한 八代祖(팔대조) 處海(처해)祖上(조상)님의 셋째 同生(동생) 處晋(처진) 先祖(선조)님의 親筆(친필) 遺品(유품)을 六代孫(육대손) 梁奉基(양봉기)祖(조)의 生家(생가: 任實郡 屯南面 屯德里 禹蕃村(임실군 둔남면 둔덕리 우번촌)에서 가첩(家牒)을 發見(발견) 하였다.
西紀(서기) 1985년 4월 1일에 丙寅譜牒(병인보첩)를 編纂(편찬) 할려고, 議論(의논)차 先山(선산)도 頂拜(정배)할 兼(겸) 訪問(방문)할때에 發見(발견)하였는데, 안타갑게도 後孫(후손)들은 忌日(기일)를 쓴 遺品(유품)이 있었는데, 그 內容(내용)을 잘 모르고 아직까지 필묵(筆墨: pen and ink) 함(函)에 넣어 방 한 가운데 담아 두고 있었는데, 아래와 같은 筆跡(필적)을 남겨 두었는데, 짐작으로 미루어 보아 7代祖(대조) 처진(處晉) 선조(先祖)님의 親筆(친필)로 6代祖(대조) 석구(錫龜) 선대(先代)의 後孫(후손)들이 參考用(참고용)으로 쓰신 수필본(手筆本)임을 알수가 있서 아주 귀한 유품(遺品)임을 28세손(世孫) 봉기(奉基) 할아버님께 말씀 드리고, 筆者(필자)가 서울로 가지고 와서 複寫(복사)를 하고, 梁漢鐸(양한탁)씨 편으로 보내 주었는데 그 內容(내용)이 위와 같다.
장수군(長水郡) 산서면(山西面) 귀후재(歸厚齋)은 원종공신(原從功臣) 양준(梁峻) 선조님의 아드님이신 양보(梁普) 선조(先祖)님께서는 음덕(蔭德)으로 임실(任實) 오수(獒樹)의 역참(驛站)을 관리(管理)하는 찰방(察訪)을 역임(歷任)하시고, 그 자손(子孫)들은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임실현(任實縣)과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장수현(長水縣)에 세거(世居)하였다. 임실(任實) 오수(獒樹)의 인접(隣接) 고을이 장수(長水) 산서(山西)인데, 장수군(長水郡) 산서면(山西面)은 묵재공(默齋公) 양우(梁祐) 先祖(선조)님을 배향(配享)한 월곡서원(月谷書院)이 있었던 곳이고, 양준(梁峻)의 자손(子孫) 재실(齋室)인 귀후재(歸厚齋)가 있는 곳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양보(梁普)의 장자(長子) 양구수(梁龜壽)선조님께서는 참봉(參奉)을 지내셨고, 참봉(參奉) 양구수(梁龜壽)의 장자(長子) 양홍제(梁弘濟) 선조님께서도 참봉(參奉)을 지내셨다. 양준(梁峻)선조님의 장손(長孫) 양홍제(梁弘濟)의 세 아드님(3子) 양주(梁澍), 양발(梁潑), 양호(梁浩)先祖(선조)님께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충신(忠臣)이시다. 충신(忠臣) 자손(子孫)이 충신(忠臣)을 낳은 것이다.
府君(부군)께서는 字(자)를 彦博(언박)이라 하셨고, 祖上(조상)의 蔭德(음덕)으로 西紀(서기) 1504년 燕山君(연산군) 甲子年(갑자년) 12월 26일에 獒樹道 察訪(오수도 찰방)을 除授(제수) 받으시고, 다음해 乙丑年(을축년) 正月(정월)에 赴任(부임)하셨다가 中宗四年(중종 4년- 1509년 己巳(기사)년에 司甕院 直長(사옹원 직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만 記錄(기록)하고 음(蔭) 通政代夫(통정대부) 獒樹道 察訪(오수도 찰방)이라고 記錄(기록)한 점을 보면, 祖上(조상)의 음덕(蔭德)으로 벼슬을 했다고 볼수 있다. 이 文獻(문헌)은 國立圖書館(국립도서관) 3冊(책) 2744로 分類(분류)한 龍城誌(용성지) 上二(상이) 券(권)에 남아있는 資料(자료)다.
察訪(찰방)은 李朝(이조)때 각 道(도)의 역참(역마를 바꾸어 타던곳을 말함)일을 맡아보던 外職(외직)으로 일명 馬官(마관) 郵官(우관) 驛丞(역승)으로 서을을 중심으로 각 地方(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馬匹(마필)과 官員(관원)을 두어 公文書(공문서)를 傳達(전달)하고 公用(공용)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 하게한 기관을 驛站(역참)이라고 하였는데, 약간의 驛站(역참)을 一區(1구)로 하고 이를 驛道(역도)라 稱(칭)했다.
그리고 그 區間(구간)의 馬政(마정)을 맡아 보는 官職(관직)을 察訪(찰방)이라 하였다. 이는 교통로를 이용하여 情報(정보)의 收集(수집)도 行(행) 하였으며 高麗(고려) 後期(후기) 부터는 驛丞(역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西紀(서기) 1535년 (중종 30년) 부터 察訪(찰방)이라 改稱(개칭) 하였다. 이는 從六品官(종육품관)으로 大典會通(대전회통)에 의하면, 京畿道(경기도) 6명, 忠淸道(충청도) 5명, 慶尙道(경상도) 11명, 全羅道(전라도) 6명, 黃海道(황해도) 3명, 江原道(강원도) 4명, 咸鏡道(함경도) 3명, 平安道(평안도) 2명을 두었고, 중요한 要所(요소)에, 兼(겸) 察訪(찰방)을 12명 두어 察訪(찰방)의 非行(비행)을 監視(감시) 하였다.
普(보)선조님의 實際(실제) 忌日(기일)은 陰曆(음력) 3월17일 이다.
淑人(숙인) 梁氏(양씨)-龍城君 朱雲(용성군주운)의 十一世孫(11세손)으로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지내신 梁敬老(양경노)의 따님이시다.
實際(실제) 忌日(기일)은 陰曆(음력) 2월 14일 인데, 지금의 任實郡 三溪面 大板村 書堂洞(임실군 삼계면 대판촌 서당동)에서 陰曆(음력) 10월 9일에 後孫(후손)들이 時祭(시제)를 모시고 있다.
墓所(묘소)는 合葬(합장)을 했고, 碑石(비석)을 세우고 무덤앞에 제물을 차려 놓는 석상(石床)도 만들었고, 석상(石床) 아래에 碑文(비문)이 새겨져 있다. 南原 陰仕秩(남원 음사질)에 적혀 있다.
자손(子孫)으로는
長男(장남):梁 龜壽(양 구수)
次男(차남):梁 鳳壽(양 봉수)
長女(장녀)로, 全州李氏(전주이씨) 李命堅(이명견)에게, 出嫁(출가)하셨다고, 대방군파보(帶方君派譜)에 西紀(서기) 1986년 丙寅譜牒(병인보첩)에, 記錄(기록)한것으로 보아 西紀(서기) 1799년에 만든 기미보첩(己未譜牒)을 補完(보완) 하셨다고 생각되어 아래를 整理(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長男(장남) - 梁 龜壽(양 구수) - 慶州金氏(경주김씨).
次男(차남) - 梁 鳳壽(양 봉수) - 錦山余氏(금산여씨).
長女(장녀) - 전주인(全州人) 이 명견(李 命堅)
次女(차녀) - 김해인(金海人) 김 준손(金 駿孫)으로 直提學(직제학)을 지내신 馹孫(일손)의 형님이시고,
아들은 金大壯(김대장)이시다.
參女(삼녀) - 유 팽종(柳 彭宗)은 郡守(군수)를 지내셨고, 아들은 柳忠謙(유충겸)이시다
四女(사녀) - 신 극충(愼 克忠)은 縣監(현감)을 지내셨고, 아들은 慎 溓(신렴)이시다.
梁峻(양준) 先祖(선조)님 家系圖(가계도).
직업은 副正(부정:종 3품)
室直長原州金連宗女(실직장원주김연종여):번역~夫人(부인)은 直長(직장)을 지내신 原州(원주) 金連宗(김연종)의 따님.
梁峻(양준)의 子女(자녀)는 아래와 같다.
子普直長(자보직장):飜譯(번역)~아들은 普(보)이시고, 職業(직업)은 直長(직장)이시다.
첫째따님은 女崔璘 海州人 世祖庚辰(여최린 해주인 세조경진):飜譯(번역)~따님은 西紀(서기) 1460년 世祖(세조) 25년 庚辰年(경진년) 海州崔氏(해주최씨) 崔璘(최린)에게 出嫁(출가).
둘째따님은 女金孝文 萬戶(여김효문 만호):飜譯(번역)~따님은 萬戶(만호) 벼슬을 지내신 金孝文(김효문)에게 出嫁(출가).
梁普(양보)의 子女(자녀)는 아래와 같다.
子龜壽(자구수) : 첫째아들 梁龜壽(양구수).
子鳳壽(자봉수) : 둘째아들 梁鳳壽(양봉수).
女金駿孫(여김준손): 첫째따님은 金 駿孫(김 준손)에게 出嫁(출가).
女柳彭宗(여유팽종):둘째 따님은 柳 彭宗(유 팽종)에게 出嫁(출가).
女愼克忠(여신극충) 巨昌人(거창인):셋째 따님은 巨昌人(거창인) 愼 克忠(신 극충)에게 出嫁(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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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