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승〔家乘〕
선생의 부친은 휘(諱)가 견일(肩逸)이다.
신라 헌안왕(憲安王) 1년(857) 정축 - 당 선종(唐宣宗) 대중(大中) 11년 - 에 선생이 태어났다.
경문왕(景文王) 8년(868) 무자 - 당 의종(唐懿宗) 함통(咸通) 9년 - 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14년(874) 갑오 -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 - 에 과거 -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하였다. - 에 급제하였다. 선주(宣州) 표수현 위(漂水縣尉) - 다른 판본에는 율수현 위(溧水縣尉)로 되어 있다. - 에 조용(調用)되었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이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통(都統) 고변(高騈)의 종사순관(從事巡官)이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10년(884) 갑진 - 당 희종 중화(中和) 4년 - 8월에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는데, 바닷가에서 순풍을 기다리느라 엄체(淹滯)하여 겨울을 넘겼다.
11년(885) 을사 - 당 희종 광계(光啓) 1년 - 3월에 비로소 본국에 도착하였다. - 연장(年狀)에 이르기를 “무협 중봉의 해에 미천한 몸으로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의 해에 동토에 금의환향했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土〕”라고 하였다. - 왕이 계속 머무르게 하면서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12년(886) 병오 - 당 희종 광계 2년 - 7월에 헌강왕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을 시기하는 자들이 조정에 많았으므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7년(894) 갑인 - 당 소종(唐昭宗) 건녕(乾寧) 1년 - 에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가 되었다.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길에 도적이 많아서 가지 못하였다. 2월에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스스로 난세를 만난 것을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자적하며 오직 시를 짓고 노래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11년(1020) 경신 - 송 진종(宋眞宗) 천희(天禧) 4년 - 에 내사령(內史令)을 추증(追贈)하고, 선성(先聖)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이회재(李晦齋 이언적(李彦迪))에게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최 문창(崔文昌)은 그 문장이 신이할 뿐더러 그의 식견과 품행은 참으로 백세(百世)의 스승이 될 만합니다. 성정(誠正)의 설에 대해서는 아마도 그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마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구석진 나라에서 태어나 문학을 창도한 그 공은 막대하다고 할 것이니, 그렇다면 선성(先聖)에 배향할 대상으로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14년(1023) 계해 - 송 인종(宋仁宗) 천성(天聖) 1년 -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국조(國朝) 명종(明宗) 7년(1552) 임자 - 명 숙종(明肅宗) 가정(嘉靖) 31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바로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과 적서를 따지지 말고 먼 변방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대대로 군역의 부담을 지우지 말라.”
16년(1561) 신유 - 명 숙종 가정 40년 에 서원(書院)을 경주(慶州) 서악(西岳)에 세웠다. 다음은 《동경지東京志》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윤(府尹) 구암(龜巖) 이공 정(李公楨)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에게 품신(稟申)하여 계해년(1563)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퇴계 선생이 서원을 서악정사(西岳精舍)라고 명명하였다. 강당은 시습(時習)이라 하고, 동재(東齋)는 진수(進修)라 하였으며, 서재(西齋)는 성경(誠敬)이라 하고, 동쪽 하재(下齋)는 절차(切磋)라 하고, 서쪽 하재는 조설(澡雪)이라 하였으며, 앞의 누각은 영귀(詠歸)라 하고, 문은 도동(道東)이라 하였다. 그리고 누각 난간 사이에 선생의 필적을 걸어 놓았는데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 버렸고, 위판은 산골짜기로 옮겨 보관하였다.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33)에 이시발(李時發)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옛터에 초사(草舍)를 짓고 위판을 다시 봉안하였다. 임인년(1602)에 이시언(李時彦)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사우(祠宇)를 중건하였으나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최기(崔沂)가 부윤으로 있을 때에 강당과 재사(齋舍)와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중건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여우길(呂祐吉)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부중(府中)의 유자(儒者)인 진사(進士) 최동언(崔東彥)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자, 서악서원(西岳書院)이라고 사액하였다. 편액(扁額)은 원진해(元振海)의 필적이다. 병술년(1646)에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고, 묘제(廟制)를 동향(東向)으로 하여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와 개국공(開國公 김유신(金庾信))과 문창공(文昌公)을 차례로 모두 향사(享祀)하였다.”
구암 이공 정의 〈서악정사(西岳精舍)〉 시는 다음과 같다.
우가의 몇 마디 말 전해진 그 이후로 虞家數語相傳後
만고토록 사문이 백일처럼 환해졌네 萬古斯文白日明
마음으로 계합하여 곧장 대답한 증삼(曾參)이요 一唯參乎心默契
도가 형통하여 거듭 어질다 한 안회(顔回)였네 再賢回也道重亨
광풍이라 동락의 종용한 뜻이라면 光風東洛從容意
추월이라 서림의 감개한 정이랄까 秋月西林感慨情
벗을 모아 공부할 곳이 지금 있으니 會友琢磨今有地
이 당의 이름을 정녕 저버리지 말기를 丁寧無負此堂名
퇴계 선생이 이 시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기자가 교화한 우리 동방 예부터 좋은 나라 箕敎吾東曾善國
문치(文治)의 교화가 빛날 천운이 지금 돌아왔소 至今天步屬文明
성인의 인재 양성도 터전이 있어야 하고말고 多材聖作非無本
사람이 도를 행해야지 어찌 저절로 형통할까 至道人行詎自亨
책 속의 보물 찾는 일 적막해졌으니 寥落塵篇尋寶訣
호걸들 상정을 벗어나 분발해야겠지 奮興豪傑出常情
선산의 경내에 멋지게 열린 선비들의 집 儒宮好闢仙山境
늙은 나도 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네 老我增思實趁名
그리고 팔계(八溪) 정종영(鄭宗榮)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은나라 기자 때부터 펼쳐진 대동의 문교 大東文敎自箕殷
신라 시대에 명현들이 성대하게 일어났네 羅代名賢濟濟群
흥망을 백번 겪은 뒤에 남은 산하요 興亡百變餘山海
치란의 천년 세월 속에 뒤섞인 취훈이라 治亂千秋混臭薰
정별하여 끝내는 바르게 표시하게 되었나니 旌別終歸人正表
지휘해 선비가 운집함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 指麾重見士如雲
장수를 서산 아래에 의탁할 만한데 藏修可託西山下
추로에 이론이 왜 그렇게 분분했던가 鄒魯曾多外議紛
김학봉(金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서악정사를 참배하며 제생(諸生)에게 보여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서악정사의 이름은 예전부터 들었는데 西岳精舍舊聞名
원객이 만리 여정에서 지금 막 돌아왔네 遠客初回萬里程
구옹이 서원을 세운 뜻을 누가 알리오 誰識龜翁開院意
계림의 잎사귀들 모두 바람소리 내는걸 雞林葉葉盡風聲
선조(宣祖) 6년(1573) 계유 - 명 신종(明神宗) 만력(萬曆) 1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文昌侯)는 도덕과 문장으로 우리 동방에서 제일가는 인물이다. 그의 후손은 비록 미천한 서얼이라도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
광해(光海) 을묘년(1615)에 태인(泰仁) 무성(武城)에 서원을 세웠다. 태인에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 본군(本郡)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 이 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고 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 선생(金先生)의 시는 다음과 같다.
닭 잡던 당일부터 퍼지기 시작한 맑은 향기 割雞當日播淸芬
가시나무 위의 봉황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오 枳棘棲鸞衆所云
천년 전 읊던 혼을 어디에서 찾을거나 千載吟魂何處覓
일만 송이 연꽃 속에 일만 개의 고운 芙蕖萬柄萬孤雲
인조(仁祖) 4년(1626) 병인 - 명 장종(明章宗) 천계(天啓) 6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의 후예에 대해서는 비록 지서(支庶)와 천얼(賤孼)이라고 하더라도 군정(軍丁)의 일을 시키지 말라.”
현종(顯宗) 11년(1670) 경술 - 청 성조(淸聖祖) 강희(康煕) 9년 - 에 함양(咸陽) 백연(柏淵)에 서원을 세웠다.
숙종(肅宗) 22년(1696) 병자 - 청 성조 강희 35년 - 에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사액(賜額)하였다.
영조(英祖) 31년(1755) 을해 -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20년 - 에 대구(大丘) 해안현(解顔縣)에 계림사(桂林祠)를 세우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 - 지금은 구회당(九會堂) 뒤에 옮겨 세웠다. -
정조(正祖) 20년(1796) 병진 - 청 인종(淸仁宗) 가경(嘉慶) 원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의 자손은 비록 지서라도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 그리고 태강(汰講)의 예에 포함시키지 말라.”
○ 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열성조(列聖朝)의 분부를 받은 대로 과연 제대로 준행(遵行)하고 있는지,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히 단속하여 거행하게 하고, 이를 범하는 수령이 있으면 역시 드러나는 대로 심리하여 처단하라.”
- 이상은 모두 가승(家乘)에 나오는 내용이다. -
[家乘]
家乘。先生父諱肩逸。
新羅憲安王元年丁丑。唐宣宗大中十一年 先生生。
景文王八年戊子。唐懿宗咸通九年 入唐。
十四年甲午。唐僖宗乾符元年 登第。禮部侍郞裵瓚榜 調宣州漂 一作
溧水縣尉。考績爲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及黃巢叛。爲都統高騈從事巡官。
憲康王十年甲辰 唐僖宗中和四年 八月。奉帝詔來聘本國。侯風海浦。淹滯經冬。
十一年乙巳 唐僖宗光啓元年 三月。始到國。有年狀曰。巫
重峯之歲。絲入中原。銀河列宿之年。錦還東土。 王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十二年丙午 唐僖宗光啓二年 七月。王薨。朝廷多疑忌。出爲太山郡太守。
眞聖主七年甲寅。唐昭宗乾寧元年 爲富城郡太守。祇召爲
賀正使。以道多盜賊不果行。二月。進時務十餘條。主嘉納之。以爲阿飡。自傷遭値亂世。不復仕進。自放於山水之間。惟以嘯詠爲事。
高麗顯宗十一年庚申。宋眞宗天禧四年 追贈內史令。從師先聖廟庭。
愼齋周世鵬上李晦齋書。崔文昌之文藻神異。其所見所行。眞可謂百世之師。而至於誠正之說。槩乎其未聞也。然其生一隅倡文學。功莫大焉。則配享先聖。非斯人而誰歟。
十四年癸亥 宋仁宗天聖元年 五月。贈諡文昌侯。
國朝明宗七年壬子。明肅宗嘉靖三十一年傳曰。先賢文昌侯崔致遠。卽吾東方理學之宗也。其子孫中勿論賤孼。雖在遐荒。世世勿侵軍役事。
十六年辛酉。明肅宗嘉靖四十年 建書院于慶州西岳。東京志。府尹龜巖李公楨。稟於退溪李先生。歲癸亥奉安。退溪先生命名曰西岳精舍。講堂曰時習。東齋曰進修。西齋曰誠敬。東下齋曰切磋。西下齋曰澡雪。前樓曰詠歸。門曰道東。樓楣間揭先生筆。而俱燬于壬辰。位版則移藏于山谷中。萬曆庚子。府尹李時發時。構草舍于舊址。還安位版。壬寅。府尹李時彥時。重新祠宇
而猶未盡復。庚戌。府尹崔沂時。重創講堂,齋舍及典祀廳,藏書室。天啓癸亥。府尹呂祐吉時。府儒進士崔東彥等陳疏請額。賜額曰西岳書院。扁額則元振海筆也。丙戌。府尹李民寏時。重建詠歸樓。廟制東向。弘儒侯,開國公,文昌公以次並享。龜巖李公楨西岳精舍詩。虞家數語相傳後。萬古斯文白日明。一唯參乎心默契。再賢回也道重亨。光風東洛從容意。秋月西林感慨情。會友琢磨今有地。丁寧無負此堂名。退溪先生次。箕敎吾東曾善國。至今天步屬文明。多材聖作非無本。至道人行詎自亨。寥落塵篇尋寶訣。奮
興豪傑出常情。儒宮好闢仙山境。老我增思實趁名。八溪鄭宗榮詩。大東文敎自箕殷。羅代名賢濟濟羣。興亡百變餘山海。治亂千秋混臭薰。旌別終歸人正表。指麾重見士如雲。藏修可託西山下。鄒魯曾多外議紛。金鶴峯謁西岳示諸生詩。西兄精舍舊聞名。遠客初回萬里程。誰識龜翁開院意。鷄林葉葉盡風聲。
宣祖六年癸酉。明神宗萬曆元年傳曰。文昌侯道德文章。我東方第一人也。其後孫雖殘微賤孼。勿侵軍役事。
光海乙卯。建書院于泰仁武城。泰仁有蓮池。先生宰本郡時所鑿。池種蓮云。佔畢齋金先生詩。割鷄當日
播淸芬。枳棘棲鸞衆所云。千載吟魂何處覓。芙蕖萬柄萬孤雲。
仁祖四年丙寅。明章宗天啓四年傳曰。文昌侯後裔。雖支庶賤孼。勿爲軍丁事。
顯宗十一年庚戌。淸聖祖康熙九年 建書院于咸陽柏淵。
肅宗二十二年丙子。淸聖祖康熙三十五年賜額武城書院。
英祖三十一年乙亥。淸高宗乾隆二十年 建桂林祠于大丘解顏縣。奉安影幀。今移建于九會堂後
正祖二十年丙辰。淸仁宗嘉慶元年傳曰。文昌侯子孫。雖支庶勿侵軍役。勿入汰講之例。○列聖朝受敎道來。
果能遵行乎。令該曹嚴飭擧行。而其有犯守令。亦爲隨現勘處事。以上幷家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