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교수와 신디 로퍼
정미경
'계집은 언문 해독하면 되지 많이 가르치면 배운 값한다고 밖으로 돌아서 못 쓴다.'
외할머니의 교육론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고등학교 진학까지 시켰는데 대학까지 욕심부리지는 말라고 늘 강조했다.
“돈을 벌어오라고도 안 한다. 그냥 집안일 거들면서 살림을 배우다가 시집가서 얌전히 잘 살면 그게 효도지. 네게도 그게 좋고.”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다가 해 떨어지고 늦게 집으로 돌아온 날에는 "유리그릇과 계집애는 밖으로 돌리면 깨지는 거다!"라며 어머니는 모진 엄포를 날리셨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댄가 왜 자꾸 여자 남자 따지고 설움을 주는 건데? 내가 딸로 낳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반항해도 돌아오는 어머니 대답은 ‘닥치고 집안일이나 거들라.’라는 한마디였고, 나는 더 대꾸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공부 좀 할라치면 어머니는 이것저것 일부러 집안일을 시켰다. 아들들에게는 문제집이나 참고서 비용을 넉넉히 주었지만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딸이라서.
"엄마는 내 잘못될까 그렇게 겁나나? 엄마 딸은 밖에 아무리 나가도 걱정할 일 요만큼도 없다.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어머니 방식으로 딸을 애지중지하는 것이려니 생각했기에 작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면, 어머니는 싱긋 웃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면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얼른 눈을 흘겼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돌이켜보면 외동딸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도록 지켜내겠다는 어머니의 의지가 참으로 강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학력고사가 끝나고 입학지원서를 낼 때가 되자 집안 어른들이 내 장래에 관심을 보이며 전화가 자주 걸려 왔다. 성적이 나쁘니 대학은 어림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원서나 넣어보자는 고모의 성화에 어머니가 맘을 굽히셨다. 그리고 지방 여자대학교 사범대학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이 되었다.
"여자 직업으로 선생이면 참하지. 시집 보내기도 좋고.“
고모의 적극적인 설득과 등록금에다 용돈 일체를 책임지겠다는 삼촌의 지지에 힘입어 생각지도 않게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나에게 갑자기 일어난 충격적인 변혁이었다.
버스 회수권에 적힌 '대학생'이라는 글자는, 처음 신은 구두며 끈이 긴 핸드백과 가슴에 안은 몇 권의 교재를 설명하는 증명서처럼 너무 선명했다. 나는 분명 대학생이 된 것이었다.
운동화만 신다가 갑자기 굽이 높은 구두를 신다 보니 저절로 허리가 꼿꼿해졌다. 핸드백 끈이 흘러 내릴까 불안하여 어깨를 과장되게 올리다 보니 온몸이 긴장되었다. 단발머리를 볶아 파마하고 입술에 루즈도 발랐다. 여대생다운 품위와 자세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나로서는 온 힘을 다했다. 힘들었다. 게다가 학과 건물마다 흩어져 있는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받다 보니 몸과 마음 모두 어지럽고 복잡했다. 그러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새벽 등교에 야간자습으로 이어지던 입시지옥 고3 생활보다 대학생 생활이 더 힘들다.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구나. 공부에 별 관심도 없는 내가 무슨 선생님이 된다고. 이 대학을 꼭 다녀야 할까?'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생 시절, 험난한 대학 세계에 대해 내가 남모를 푸념을 얼마나 했는지는 나와 하느님만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내 사정은 아랑곳없이 친구들은 대학을 10년쯤 다닌 사람들처럼 싹 적응한 것으로 보였다. 수업 시간표 불평, 교재 불평, 교수 불평, 학교 후생복지시설 불평까지 하는 걸 보며 놀라운 나는 그저 꿔다 놓은 시골뜨기 보릿자루였다. 그러니 한패가 된 친구들을 따라 열심히 몰려다녔다. 친구들은 같은 과 친구들에게 단체로 대리 출석을 부탁한 다음 미팅을 하러 가거나, 백화점 쇼핑에 나선 형편 좋은 친구들을 따라 다 같이 온종일 아이쇼핑을 했다. 이곳저곳 거리를 쏘다니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성인 영화를 보기도 했다.
붙어 다니던 친구는 다섯, 그중 리더는 신디 로퍼(Cyndi Lauper 미국·싱어송라이터·배우·사회운동가·80년대 팝의 여왕)였다.
우린 각자 별명을 지었는데, 우리들의 리더는 신디 로퍼의 쉬밥(she bop)을 광적으로 좋아하고 복장도 신디 로퍼를 모방해서 별명도 신디 로퍼였다.
또 한 친구는 컬처 클럽 (Culture Club 미국 팝그룹)의 보이 조지(Boy George 컬처 클럽의 리더 보컬‧동성애자‧양성적인 외모에 여장남자의 콘셉트로 유명)를 좋아하지만, 웨이브 커트 스타일의 외모 때문에 피비 케이츠(Phoebe Cates 미국 하이틴 스타 가수·배우·모델)였다. 그리고 명랑하면서 얌전한 단발머리에 눈이 큰 친구는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 그 무렵 새로 등장한 하이틴 스타), 그리고 늘 과묵하고 나와 같은 단발 파마지만, 날씬하고 키 큰 미인이라서 나타샤(Nastassja Kinski 독일인 배우·모델), 마지막 멤버인 나는 이도 저도 아니라서 가져다 붙일만한 인물이 없다 보니 엉겁결에 원더우먼.
우리는 이렇게 각각의 별명을 붙이고 애칭처럼 서로를 불러줬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그렇게 부르다 보니 또 서로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는 식으로 부추기며 ‘신디, 피비, 소피, 나타샤, 원더’하며 깔깔거리고 즐거워했다.
연이어 다가오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때문에 각종 서양 문화가 열풍처럼 몰려오던 시절이었다. 당시 정부는 올림픽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느라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거리는 팝송이나 외국영화가 넘치고, TV에서는 올림픽 관련 뉴스가 하루하루 풍선처럼 부풀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가 어린 여대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신디 로퍼는, 큰 사업가인 아버지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졸업장은 따겠지만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도주하여 부모를 떠난 독립적인 삶을 살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피비 케이츠는 재학 중이라도 조건만 맞으면 서울로 달아나 커리어 우먼의 길을 걷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팝과 현란한 펑키 헤어 스모키 화장 미니스커트와 원색 스타킹의 친구들 모습에 익숙해지기도 힘들었다. 그랬으므로 친구들의 꿈 이야기는 그저 팝송 가사 정도로 이해했다. 그렇게 생각 없이 지내던 어느 날 학교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어용교수 사퇴! 민주 교수 복직! 부패 총장 퇴진!’
우리 과 4학년 선배들이 교내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한 주일이 되자 후배들도 가세하라고 하더니 전 학년 의무 참여 사항이라는 선배들의 공지가 과 대표로부터 전해졌다. 멋모르는 우리는 선배들의 행진을 졸졸 따라다녔다. 며칠이 지났을 때 신디 로퍼가 말했다.
“야, 선배들이 낼부터 1학년도 수업 거부하라고 하더라. 우리 낼은 학교 잠깐만 왔다가 백화점 갈래? 아님, 볼링 치러 가든가. 동아리 다방 가도 좋고.”
그 무렵 나는 신디 로퍼와 같은 동아리에 가입해 있었다.
입학 한 달이 되었을 무렵, 교문 앞에서 지역연합동아리, 전공학회동아리, 취미동아리 따위의 다양한 동아리 모집 경쟁이 벌어졌는데, 대학생의 사회적 책무는 ‘봉사활동’이라는 어느 선배의 조언에 이끌려 함께 봉사활동 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는 학기 중에는 격주로 주말 활동을 했는데, 보육원을 방문하거나 공공장소 청소를 했다. 그리고 방학이 오면 보름에서 한 달간 가난한 농어촌으로 찾아가 노동 봉사를 한다고 했다.
함께 활동해 보니 주말 봉사활동이 끝나면 주점에서 저녁을 먹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그날을 평가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토론을 했다. 뿌듯했다. 생각 없이 놀러나 다니는 날라리가 되지 말라는 1년 선배의 다정한 조언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기도 했던 우리였다.
물론, 평가와 토론은 짧았고 낭만을 부추기며 목소리를 높이는 유흥은 길었다. 동아리 내 연애 금지 규칙을 깨고 커플이 된 사람들을 향해 벌칙과 야유를 날리기도 했다. 돌려 읽은 ‘민중과 지식인’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대해 열을 올린 토론이 오가기도 했다. 어떤 이는 눈물을 보였고 어떤 이는 ‘눈물은 싸구려 감상주의’라고 질타했다. 신입생 우리들의 눈에 이런 선배들의 모든 행동은 성숙한 사람들의 속 깊은 논쟁으로 여겨졌으므로 우리는 ‘묵묵히 봉사하는 그들의 정신’에 대해 고민했다.
그랬던 까닭인지 나와 신디 로퍼는 갑자기 ‘민중과 지식인’을 떠올리며 수업 거부 사태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자며 선배 언니들을 찾아다녔다. 알아본 결과, 우리 과 김 교수가 방과 후에 사적으로 학생들을 불러내어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선배 학생들은 이런 일을 힘들어했고 괴롭힘으로 느꼈으며, 이 괴롭힘에 피해를 본 언니들의 제보가 잇달았는데, 대학 당국은 오랫동안 곤란을 겪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렇게 행동한 김 교수를 당장 해직시키라는 데모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수업 거부가 1개월을 넘어가더니, 다른 선배로부터 확인한 진상은 달랐다. 김 교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미 해직된 뒤에 시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총장이 의식 있는 민주 교수인 김 교수를 자르기 위해 나쁜 공작을 폈으니, 학교 측은 김 교수를 당장 복직시켜 학생들의 수업권을 보장하라는 것이 데모의 진짜 이유였다. 그와 함께 부패한 총장과 이 일에 관여한 자격 없고 무능한 어용교수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본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앞으로도 무기한 수업 거부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신디 로퍼와 내가 알아낸 내용을 전했더니 친구들은 “이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떠냐? 우리는 무조건 수업 거부 찬성 아니냐? 중간고사 거부라는데 잘됐다. 놀자!”라고 명랑하게 말했다.
“선배 언니들이 저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우리만 배신할 수는 없지 않나? 김 교수님이 술 냄새 풍기며 수업 들어오는 건 좀 그렇지만 솔직히 우리 과 교수 중에 젤 멋있잖아?”
사태는 점점 악화해 시위 지도부가 총학생회로 바뀌었고, 전교생 수업 거부로 번지더니 우리들의 무기한 수업 거부는 1학기 기말고사 거부까지 이어졌다. 방송이나 신문 지상에도 ‘학사 행정 마비 최장기화’라는 머리기사가 연일 도배되었다. 상상한 적 없는 낯선 풍경이었다.
나는 지금도 김 교수의 수업을 또렷이 기억한다.
첫 시간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10여 권의 책을 끼고 강의실로 들어와 교탁 위에 책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휙 돌아서더니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 눕는다’를 칠판에 휘갈겼다. 이어 “암울한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이 책들은 이번 학기에 읽고 토론할 책들이다. 빠짐없이 읽기 바란다.”라고 한 뒤, 잠시 우리를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처연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구성지고 그 태도가 너무 극적인 나머지 우리는 숨소리도 조심했고, 눈물이 맺힌 김 교수님의 두 눈이 너무 슬퍼서 함께 울 것만 같았다. 그다음 시간은 야외 수업,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던지고 토론하는 중에, 김 교수는 문득 ‘광주학살’을 언급했다.
“역사상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살인마들을 필연코 멸망하도록 끌어낸 민중의 궐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해서도 안 된다.”
암호 같은 선언이었고 기억에는 남았지만,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짧게 지나간 단말마였다. 그러나 내가 사는 나라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전하려 했던 것은 알 것 같았다.
사실 기대를 품은 대학 강의실은 특별함 없이 실망스러웠다. 하나같이 교재만 낭독하는 고등학교 교사 같던 교수님들의 무색 무미 무취의 수업들에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의 공부 벌레들-에서 본 게 대학이지 이것이 대학인가? 이게 주입식 수업만 하는 고등학교지 이게 무슨 대학인가?’ 불만도 많았다. 그런 우리에게 김 교수의 수업은 확실히 ‘대학생’이라고 적혀있던 버스 회수권처럼 자격증을 부여하는 느낌을 주었다.
수업 중에 각자 의견을 개진하고 서로 질문하고 답하다 보면 대학생답게 존중받는 기분도 느꼈다. 삼촌의 힘까지 빌어 학업을 해보고자 애쓰던 내게는 큰 위안이기도 했다.
“실력 좋고 올바른 교수를 오히려 쫓아내다니 이 학교는 확실히 문제가 많네. 선배들 말이 맞는 거 같아. 학교가 썩은 거야.”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은 넓게 퍼졌고 점점 깊어졌다. 전투경찰이 학교에 진입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처음에 나는 학교와 맞서는 총학생회의 뜻에 선뜻 가세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수업에 들어가고 시험을 치르라는 학교 측의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어정쩡한 학생이었다.
그런 어느 날, 밤사이 전경들이 본관으로 진입하였고, 농성 중인 총학생회 선배들이 모두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우르르 철야농성에 가세해 들어가는 선배들 틈에 이끌려 농성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세상이 시끄러워도 너만은 절대 빨갱이 되지 말고 수업에 들어가.”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가 있었다. 또, ‘민중과 지식인’에 대한 해석을 놓고 ‘봉사활동자로 지식인의 의무를 다해야지 과격한 데모는 반대다.’라는 동아리 선배들의 걱정 어린 충고도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바람이 부는 대로 누군가의 손이 이끄는 대로 흘러 다녔다. 때로는 무너지는 댐에 손가락을 넣어 마을을 지켜낸 소년이 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변화무쌍한 내 스무 살의 나날이 쌓여갔다.
그러는 사이 정부와 언론이 빨간딱지를 붙인 ‘좌경용공 세력’의 수업 거부와 데모대열들은 전국에 빠르게 늘고 있었다. 그리고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가 시위는 격렬했다. 학교생활도 동아리 생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의 충돌과 희생당한 학우들의 소식으로, 혼란을 거듭했다.
그리고 2년 후, 김 교수는 서울의 주요 대학 교수가 되어 TV에 등장했다. ‘시국선언 민주 교수 삭발식’의 화면에서였다. 그 장면을 보는 내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이래저래 어지러운 세월이 흘렀고 김 교수의 일은 희미해졌다.
20년쯤 지난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신디 로퍼와 마주쳤고 스무 살 적 친구들이 모여 서로들 소식을 주고받았다. ‘쉬 밥’을 열렬히 사랑했던 신디 로퍼는 미국으로 가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부모님의 재력에 힘입어 부유한 경제인 남편을 만나고, 남편의 권유로 역사과에서 느닷없는 경영대학원으로 들어가 학위를 받은 후 지방대학의 교수가 되었다며 ‘공부 젤 싫어하는 내가 교수라니 말 되나?’하고 자조적으로 말해서 나를 웃겼다. 그 시절 개성적인 화장과 펑크 헤어 도발적인 체인벨트와 미니스커트에 컬러 스타킹의 신디는 사라지고, 무채색 정장 차림의 점잖은 여교수가 되어 있었다. 피비 케이츠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고 소피 마르소는 2년여 공무원이었으나 결혼과 함께 그만뒀다. 나타샤는 네 명이나 되는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결혼을 못 했고, 부모님을 모시며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캔자스 외딴 시골집에서 허리케인에 날려 오즈로 날아간 도로시처럼, 언니 무릎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뛰어든 앨리스처럼, 아직도 잃어버린 내 삶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 애쓰며 살고 있다.
“너같이 얌전한 아가 운동권이 된 거는 다 김 교수님 때문이다. 그쟈?”
우리는 2학년부터 대학 생활이 서로 달라졌다. 각자의 길을 걸으며 소식을 모르고 살게 된 탓을 여교수 신디 로퍼는 김 교수에게 떠넘겼다.
“김 교수님 돌아가셨다. 혹시 몰랐나?”
“왜? 아직 젊다 아이가?”
“몰라 나도. 벌써 몇 년 지났다. 뇌출혈이었다고 아는 사람 통해 들었다.”
“나쁜 놈들은 잘만 사는데 좋은 사람은 일찍 떠난다카디·…·…. 세상 참 싫타 그쟈?”
“그러게. ‘풀이 눕는다’를 읽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
우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서로 ‘어데서 뭘 하든지 잘 살아라.’하고 인사하며, 그날의 우연한 만남을 작별했다.
‘김 교수’는 1967년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70년 동 대학원을 졸업, 80년에서 83년까지 독일과 프랑스의 유명 대학과 연구소에서 수학했다. 여차저차 한 이력 끝에 사망하기 2년 전까지 서울 명문대 교수로 재직했다고 해당 학교 학보는 기록했다. 그의 ‘풀이 눕는다’는 내 스무 살에서 가장 또렷한 기억이다.
스무 살의 날처럼 오늘도 바람은 쉼 없이 분다.
‘쉬 밥’과 ‘풀이 눕는다’는 합성어가 되어 내 귀를 간지럽힌다.
------------------
주제 : 나의 20세는 세상과 자아의 숲에서 흔들리는 길 찾기였다.
프로필 : 1998년 장편소설 ‘슈퍼우먼 죽다’ 출간
잡지‘나이고 싶은 나’에 어른이 읽는 동화
-‘가장 큰 나무 가장 낮은 가지에 새는’ 외 4편 연재
2021년 계간 ‘시에’ 봄호 수필 ‘코로나 북새통’ 발표
2024년 현재 강북여성일자리센터 1인 출판 과정 수강 중
|
첫댓글
그 시절의 스무 살에 딱 맞는 제목이네요. 알아야 할 것들을 알고 싸우려는 욕구와 모른 척 하고 놀고 싶은 욕구, 사실 지금도 그 둘 사이에서 전쟁 중이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