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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우리 땅 우리 그림
금강산은 우리 선조들에게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중국의 시인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실컷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 했다. 이상하네. 일견을 한번 보았으면 하고 번역해왔지 않은가.
그러나 일‘一’을 부사副詞로 보면 ‘하나하나’ ‘빠짐없이’가 되기도 한다. ‘한번이라도’라면 모르겠으되 어찌 천하명산 금강산을 흘긋 보기 위해 고려국에 태어났으면 하고 기원을 했겠는가.
금강산은 우리의 시조나 가사, 그리고 민요 등에서 단순한 예찬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임을 알려준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디메뇨. 일 봉래 이 방장 삼 영주 이 아니냐’ 하고서 삼신산을 읊은 후에 곧장 떠올리는 것이 봉래, 즉 금강이었다.
‘천하명산 어디메뇨, 천하명산 구경갈 제’로 시작하는 금강산 타령은 ‘동해 끼고 솟은 산이 일만이천 봉우리가 구름같이 벌였으니 금강산이 분명쿠나’로 이어진다. 아예 천하명산은 금강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금강산이 아름답습니까, 설악산이 아름답습니까?” 하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금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덤덤히 내뱉었다. “금강산 줄기가 설악입지요”
죽으나 사나 한국인에게는 금강이었다. 민화에서는 흔하디흔한 것이 금강산 그림이다. 철마다 다르다보니 봄 금강金剛ㆍ여름 봉래蓬萊ㆍ가을 풍악楓岳 겨울 개골皆骨라 사시사철 금강산 타령이었다.
금강산의 여름 이름은 봉래이다. 봉래ㆍ방장ㆍ영주는 삼신산이다. 오늘날 금강산ㆍ지리산ㆍ한라산을 가리킨다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국인들은 금강산을 그릴 때 실경으로 그렸다.
중국인들은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신선산수와 신선이 노닐만한 누각산수를 그릴 때 한국인은 금강의 바위산에서 부처나 호랑이 장군 등을 찾았다. 한국인에게 금강산은 신선의 산이 아니었단 말인가.
금강산 구룡폭포 실경이다. 고려국에 태어나도 금강산 흘긋 보기도 힘든다 라고 털어놓아야 할 판이다. 그래서 사진이 있다. 사진이 없을 때는.... 그림을 그렸겠지.
이의성은 해산도첩에서 실경 금강을 그렸다. 사진을 박은 듯하지 않은가. 옛 사람들은 도장 찍듯 박아낸다 했다. ‘도장’이라... 듣던 말이다.
금강십곡병金剛十曲屛는 실경산수라 할 수 있는 금강산 그림 병풍이다. 실경산수는 관념산수에 대립하는 말이다. 산수를 마음속에 담아 와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장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다. 이런 유의 민화는 흔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숙련과 전문적인 기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경산수는 주로 화원들의 몫이었다. 민화에 남아 있는 실경은 이렇다 할 화원 그림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그것이 민화의 성격이었다.
겸제 정선의 진경산수는 민화 금강산도의 시발이자 종착역이었다. ‘겸제-민화-겸제’ 거나 ‘민화-겸제-민화’라는 순환도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암시이다.
겸제의 금강전도는 국보 제217호, 1734년 작품이다. 금강산 전체를 내려다보는 구도로 되어 있지만 인공위성에서 보는 납작한 시각은 아니다. 행글라이더를 타고 혹은 하늘 사다리를 보는 듯한 근접 조감의 시각이다.
만폭동을 중심으로 위로는 비로봉ㆍ아래로는 장안사를 배치한 후 모든 산들이 마치 공기가 빙빙 돌 듯 금강산을 감돌 듯 그려진다. 그래서 다시 하늘사다리를 떠올리게 한다. 장대한 지형지물을 보면 마치 천지가 엇물려 빙글빙글 도는 착각을 갖게 한다. 겸제의 느낌이 그랬을 것이다. 금강산 타령이 그랬을 것이다.
멀리서 내려다보되 그림 속에서 노니는 시각ㆍ그것이 겸제와 타령의 시각일 것이다. 겸제 유의 대관산수는 금강산 십곡병에서처럼 하늘사다리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경향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겸제와 민화의 연관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금강산의 시각ㆍ겸제의 시각은 분명 민화의 유래와 관련이 있다. 금강산 그림은 왕에게서 시작된다. 단오에는 공조에서 부채를 150개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한다. 임금은 왕궁 가신에게 나누어 준다. 그 부채 위에 대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린다 했다.
그것이 민가에 퍼진다. 바로 임금의 시각이었다.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음덕이었다.
금강십곡병
전제군주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등지고 하늘을 내려다보았다. 딴은 천명이 보이고 임금의 백성 사랑이 보였다. 단오부채는 그렇게 민화의 시원이 된다.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이다. 하늘 사다리라 하니 사다리가 있다 한다. 산이요ㆍ하늘을 버틴 나무요ㆍ하늘을 등지고 도장 찍듯 내려다 본 사람의 시각이다.
삼각연봉도三角連峰圖는 삼각산과 잇따른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이다. 아래로 내려가면 초가집들이 보인다. 소나무 역시 한국이 노송들이다. 관념과 실경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한성지도에서 삼각산 부근을 그린 그림은 한국적인 시각을 보여 준다. 그것은 삼각연봉도를 연상케 한다. 관념적일 수 있는 지도의 표현에 실경 유의 풍경이 그려진다.
실경은 어떤 것인가. 실제의 경치이다. 조선의 경치는 조선의 경치로 그려야 한다는 의식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 조선 시대였다.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전형적인 실경 그림이다. 이와 구별하기 위해 정선 유의 실경은 진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른다. 인왕제색도는 비 온 후의 신선한 인왕산의 모습을 그렸다. 중국의 관념산수와는 다르다. 그러나 민화의 산수 표현과 또 다른 면모가 있다.
강세황의 영통동구도는 송도기행첩에 나온다. 이끼 낀 바위 아래 나귀 탄 나그네가 가고 있다. 화면을 장악하는 거대한 바위에서 눈을 떼려 할 때 조그맣게 눈에 띄는 것이 나그네와 시종의 모습이다. 역시 실제의 풍광에서 비롯한다.
실경 그림은 조선조에 들어 실학의 발달에 힘입어 생겨난 사조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파한집에 실경 묘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경 그림은 이미 고려 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한집破閑集은 고려 중기 문인 이인로李仁老가 신라의 옛 풍습ㆍ평양의 산천과 인물 등을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글로ㆍ고려 원종 1년1260에 이인로의 아들 세황이 유고를 수습ㆍ간행되었다. 여기에 진양도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화가 이름은 없다.
진양은 옛 도읍이며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누가 진양도를 그려 문신 이지저에게 바쳤다. 벽에 붙이고 여럿과 감상하는데 군부참모 정여령이 재상을 뵈러 왔다. 재상이 말했다. “진양은 그대 고향이니 마땅히 시 한 수 읊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여령은 서슴없이 붓을 들어 시를 썼다. ‘푸른 청산 맑은 호수에 비끼니 재상은 진양도라 일컫는다. 호반 초가집 중에 내 집도 있으련만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뛰어난 문재에 놀란다.
더 놀라운 것은 산고 호수ㆍ집이 있는 실제의 경치가 이름 없는 화가에 의해 고려 시대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기록으로 본다면 조선의 실경산수 이전에 이미 자생적인 실경산수가 고려에 성행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삼각연봉도
영통동구도이다. 강세황은 분명 현장에서 스케치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하늘에서 빗겨 내려다 보는 시각으로 그려졌다.
진양도. 조선의 민화이니 정여령이 보았던 진양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스스로 자신이 깃들인 땅을 확인하는 시각은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설인시정이라ㆍ‘눈이 내리니 시 한수 읊고 싶구나’라고 화제를 쓰고 이름까지 얌전하게 썼다. 시정이 강조되어 함축미와 상징적 포용성이 적다. 결과적으로 값싼 향수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실경을 그리는 시각은 화원의 그림을 본뜬 것이라 여겨진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경 그림이란 고도의 숙련이 필욯나 작업이다. 보는 것과 그리는 것은 하나일 수 있지만 화면 위에 실경화로 옮겨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귀신을 그리는 것은 쉽고 고양이를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이치와 같다. 왜 그런고. 귀신이야 형체가 없으니 적당히 그려도 되지만ㆍ고양이를 똑같이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혹시 화원은 그림을 잘 그리니까 실경산수가 가능하고 민화는 기량없는 환쟁이들 그림이니 어설프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그러한 정의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실경에 관한 한 반드시 민화가 원화를 답습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민화를 보고서 화원이 자극을 받아 민화풍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채 크기로 선면화처럼 둥글게 만든 화면에 그린 산수화를 눈여겨보게 된다. 아마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부채 그림의 어려운 점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부채는 살아 있다. 살 사이에 바른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린 후에 살에 붙이면 좋으련만 부채그림은 완성된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상례이다. 자연 부챗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면에서 그리는 것처럼 유연하게 그려져야 한다.
어려운 기교 대신 편하게 그릴 수 있는 화면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하필이면 사각의 화면이나 삼각형이 아니라 부채꼴일까. 역시 부채가 주는 청량감은 그대로 도입하고 싶었으리라.
이 그림은 분명히 화원 그림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원이라면 부채에 그림을 그렸을 테니까. 이름 없는 환쟁이가 부채처럼 만든 화면에 그린 산수화의 자유로운 발상이 화원을 자극하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부채 그림처럼 대중적인 그림에서 자유롭게 환쟁이들의 자유분방한 기법을 떠올리며 흥겹게 금강산도를 그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설인시정도
강세황 그림은 자세히 보면 부챗살 자국이 보인다. 결국 부챗살을 떼어내고 표구하면 부챗살 없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부채형으로 만든 그림. 민초라는 말은 바람이 불면 풀이 옆으로 눕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높은 사람이 한다면 민초야 따라 해야지. 그러나 이게 뭔가. 백성은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있다.
진경산수의 대가인 겸제 정선1676-1759는 당시 지도 제작의 명인이었던 정상기1678-1752와 생졸년이 비슷하다. 활동시기와 무대 역시 흡사하다.
그러니 정신이 정상기와 합작으로 한성 도성지도ㆍ도성대지도 등을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당시의 지도는 서운관과 도화원의 합작이었기 때문이다.
서운관은 천문지리를 담당했고 도화원은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민화 지도가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림 지도를 만들기 위해 실경산수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대중들의 수요에 의해 실경산수가 그려졌을 가능성역시 배제하기 힘들다.
조선의 지도는 어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었다. 대를 이어 제작되고 수정되었다. 정인지의 후손인 정상기의 일문 5대가 지도 제작에 공헌했다. 아들 정항령ㆍ손자 정원림ㆍ현손자 정수상 등의 계보는 지도의 수요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설명해준다.
이들에 의해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대물림으로 수정 보완되었을 것이다. 정상기 외에도 지도 제작자는 많다. 18세기 정조 시대에는 이상권이 지도의 대가였다. 그의 한성전도가 전해진다.
대중의 수요에 의해 그토록 열광적으로 만들어졌던 지도와 마찬가지로 실경산수 역시 주문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럴 때 화원들에 의해 충족되지 못하는 물량은 환쟁이나 화공에 의해 보충되었다.
그림의 수준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백성의 감식안에서 중요한 것은 꽃이냐 새냐 등의 식별표지였기 때문이다. 금강산이면 금강산이지 갈필이나 습필, 몰골이나 구륵이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
논밭 팔아 그림을 모은다는 수장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애써 미술시장을 개척할 일도 아니었다. 오직 백성은 백성의 쌈지 사정에 따라 지도나 그림을 집어 들었다.
불합리한 미술품 거래의 관행에 만족하는 환쟁이들이 민화라는 그림을 그렸다. 쌀 한 됫박에 그림 한 장을 그려 주었던 것도 어엿한 주문 제작이었다.
화원들에게 부채 그림이나 지도는 생업이 아니었다. 정통화를 고집하는 도화원에서 질시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다. 화원의 민화는 그렇게 그려졌다. 왕이 그림을 정치 홍보의 수단으로 생각했으니 화원들은 그 수족이 될 따름이었다.
환쟁이들의 무단 복제가 저작원 침해로 생각된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수요자가 값을 결정하는 기묘한 시장 질서를 이루었을 것이다.
민화는 이렇게 자유로운 수요와 공급의 한가운데서 당당히 원화와 겨룰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던 배경이 그러하다. 그 배경에 하나가 더 있다. 우리 땅 사랑이 연결되는 문중과 하늘사상이다.
인왕제색도. 실경은 정선에게서 진경으로 완성된다. 사람들은 청나라 실학의 영향이라고 한다. 동기유발은 되었겠지. 그러나 지도와 상호 영향권에 있었을 것이다.
성시전도-부분-는 분명히 실경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더 생생한 우리 땅 사랑이라는 수요가 그림과 지도를 결합시켰을 것이다.
22. 문중의 귀신이 되어
빈한한 안동 유씨 가문에 부유한 김씨 문중의 여자가 시집온다. 친아버지와 시아버지가 같은 날 초상이 난다. 지관이 친아버지 묘를 잡으면서 ‘내일 정오까지 물이 나지 않으면 삼대 정승이 날 자리’라 했다.
김씨녀는 밤을 도와 친아버지의 묏자리에 물을 붓는다. 친가에서는 다른 곳에 묘를 쓴다. 김씨녀는 시침을 떼고 친아버지의 묏자리에 시아버지를 묻는다. 그래서 유성룡이 유씨 가문에서 났다는 이야기이다.
친아버지를 팽개치고 시아버지를 모실만큼 중요한 이유가 뭘까. 그것은 명당발복이요, 나아가 풍수지리로 연결된다.
고려시대의 풍수사인 도선선사는 ‘우리나라 인민되어 정성으로 구산求山하며 첫째는 선조를 위함이요, 둘째는 자기 일이라. 다른 일은 구하다가 아니되면 그만이되 구산이라 하는 일은 잘 못하면 망가亡家라, 집안 망하나니 세상 사람 눈 있거든 구산하기 힘을 쓰라’ 했다.
구산이란 묏자리를 구하는 일이다. 묏자리를 잘 쓰면 조상의 음덕이 있으리라 한다. ‘죽은 사람 은덕으로 자자손손 복 받으면 이 아니 좋은 일인가. 사람마다 힘써보소’ 그렇게 도선은 덧붙였다.
이러한 신념의 뿌리는 풍수지리風水地理 혹은 감여堪輿사상이다. 풍수지리란 천기를 헤아려 그 기틀이 깃들인 땅을 택하는 것이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감여에서 감은 하늘의 도, 여는 땅의 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감여는 하늘의 뜻이 깃들인 땅의 도를 파악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지리란 산수의 지세ㆍ지형의 동정을 살핀다. 땅이 만물을 기르고 활력을 주는 것이니 땅의 덕이 있는 곳은 인간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땅은 땅이되 하늘의 땅이었던 것이 한국인의 땅 사상이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한국인은 하늘의 백성이다. 그래서 하늘은 그리고 하늘의 주재자인 하느님은 그 자손에게 길흉화복의 조짐을 보여주고 복록과 은덕을 준다. 그것이 풍수지리의 한국적 의미이다.
한국인에게 땅은 하늘인가 보다. 구성룡정변가라, 풍수지리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아홉 별과 용이 제목으로 등장한다.
도선이 풍수사상이 옥룡결에 담겼다. 음양도참설이 기본이 되었다. 땅은 하늘 백성이 내려와 머무는 곳이 아닌가. 도선선사의 비석이다.
아차산세도峨嵯山勢圖는 아차산과 산성을 그린 그림이다. 아차산성은 오늘날 광진구 구의동ㆍ중곡동ㆍ광장동에 있었던 백제산성이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굴욕적인 참패를 한 곳이다. 이 전투 이후에 백제는 웅진, 즉 오늘날 공주로 천도하게 된다. 그 아차산의 산세와 지형지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한국인의 지도관을 잘 벼여 주는 것이 아차산세도이다. 지도의 중심에 이른바 하늘사다리가 있어서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본 시각으로 그린다. 그래서 아래쪽의 산이 거꾸로 그려진다.
글씨는 산을 향해 씌어진다. 오른쪽의 나무는 아예 돌아누웠다. 중심이 화양사 쯤 된다. 화양사를 중심으로 하는 아차산의 산세와 물과 민가를 그린 것이 아 지도이다.
그런데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 산성, 절 등은 비교적 실증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산수화와는 거리가 멀다. 평면도에 가깝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화양사 관광 지도는 더욱 아니다. 주변이 더 상세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또 몇 걸음이라고 거리 표기가 있다. 민가 몇 호, 논 몇 개 등이 적혀 있지만 군사작전 지도라 보기에는 엉성하다.
그래서 풍수지리도라 본다. 지금 장한평 정도의 감여지도라 보는 것이다. 아차산을 빗겨 좌청룡 우백호로 벌어지고 앞쪽으로는 물이 흐른다. 넓은 외명당, 안산과 조산 등 풍수지리의 중요 착안점들이 차분히 그려져 있다.
아마 문중의 묘를 쓰거나 도읍을 준비하려고 만든 지도일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중고 자동차 업자나 골동품상의 8대조 할아버지가 장한평을 개발하려는 야심을 품고 만든 지도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의 지도는 풍수지리사상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도록 그려지게 마련이다. 풍수설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이 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도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른 용도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순전히 풍수지리만을 다룬 지도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풍수지리의 근본 원리를 도해한 그림도 있을 수 있다.
서양인에게 인간은 애플파이와 같다. 구성성분이 같다는 것이다. 동양인에게 인간은 우주와 같다. 그래서 소우주였다. 순환과 운행이 같기 때문이다. 동서에 따라 이렇게 비유가 다르다.
아차산세도
다원적 연역체계가 가능한 것이 풍수지리설이다. 연화형이라, 좋다는 것인가, 나쁘다는 것인가. 지네가 땅에 엎드린 형국이라니 어떻다는 말인가. 풍수지리도는 그렇게 애매하게 표기된다.
또 다른 풍수지리 액이다. 지세를 논할 때도 남의 논에 물대기 식으로 어물어물하게 마련이다. 사자가 곤수구를 희롱하는 자세, 어미 용이 새끼를 돌아보는 지형이란다.
감여지인도堪輿智仁圖라, 감여는 하늘과 땅의 도를 말함이요, 지인은 지혜와 어짊을 뜻한다. 그런데 풍수지리를 도해한 그림책 이름이 지인도이다. 해설과 주석이 없으면 어찌 풍수지리의 책이라 할 것인가.
그림 왼쪽에 만마거랑도萬馬巨浪圖라 되어 있다. 1만 마리 말이 커다란 파도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주산을 향하여 작은 산들이 마치 말 머리를 모으듯 늘어서 있다. 그러나 풍수에 말은 그렇게 친밀한 배역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역시 용과 호랑이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에서 용은 상상 속의 용이 아니다. 땅의 기복과 굴곡을 나타내는 능선을 상징한다. 용은 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산맥에도 물이 필수라는 사상이 담겨 있다. 물은 지맥에 생기를 준다.
천일생수天一生水라 물은 만물의 조종이다. 그래서 미간산선간수未看山先看水라는 말이 있다. 산보다 물을 먼저 보라는 뜻이다.
간룡看龍는 산의 줄기와 가지를 분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길을 본다. 용은 물에 따라 모인다. 물이 흩어지면 날아간다. 심혈尋穴, 혈을 찾을 때 역시 물길을 본다. 물이 풍부한 곳에는 부호가 많고 얕은 곳에는 빈천이 많다.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풍수에서의 물이었다. 물이 있었기에 용이 있었다. 그래서 용호의 개념이 풍수에 중요했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물이 풍부한 나라가 또 있을까. 흐르는 물, 솟는 물을 마셔도 장독이 오르지 않는 물이 쏟아지는 나라가 또 있으랴. 풍수사상은 자연스레 이 나라에서 토속신앙이 있었다.
풍수의 목적은 많은 사람에게 명당사상과 동일시되었다. 명당사상은 하늘의 천기를 입은 땅을 선택함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혜택을 입는다는 사상이다.
봉건 사회에서 혜택이란 무엇일까. 입신양명ㆍ부귀장수ㆍ다자다남이 있다. 나아가서 왕후장상도 땅이 주는 혜택으로 알았다.
풍수사상의 뿌리는 깊다. 신라 경순왕 시절에 벌써 산도가 있었다. 풍수지리설이 지배 계층에까지 파고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의 태조는 묏자리라는 천기를 이어받았다는 사상이 정책적으로 강조되었다.
이성계가 묘를 쓸 때 이야기이다. 금강산 표훈사 수좌인 나옹조사와 무학이 ‘그 자리는 장상의 자릴세’ 하고 가르친다. 하여 이성계는 왕후의 자리에 아버지 환조의 묏자리를 잡는다. 정화능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조선의 태조가 되고 그 아비는 환조로 추존된다는 이야기이다. 명당에 묘를 쓰면 왕이 될 수 있다... 군침도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감여지인도
두 마리 용이 물을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가. 먹을 만큼 먹고 물장난을 치는가. 암수 두 마리가 서로 먹으라고 히히덕거리는가.
정인명당도正人明堂圖는 명당그림이다. 바로 선 인간의 명당 그림을 볼까. 옆 그림은 측인, 뒷면 그림은 배면, 오장육부를 그린 그림은 장부라 한다. 모두 명당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글자대로 보면 명당이란 밝은 집이란 뜻이다. 좋은 집터, 좋은 묏자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당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명당이란 엄밀히 말해 혈의 앞에 물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다 묘를 쓰나? 혈이다. 혈이란 집을 짓거나 묘를 쓰는 곳이다. 만조백관이 어전에 모이듯 명당은 혈을 중심으로 앞으로 퍼진 마당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려졌다.
혈이란 원래 침구학에서 경락의 요처를 말한다. 머리 꼭대기에 백회가 있고 발바닥에 용천이 있다. 그 사이 열두 개의 순환 계통에 365개의 경혈이 있다. 마치 1년 12개월 365일에 일부러 맞춘 것 같다.
인체도는 풍수지리와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 풍수지리를 인체에 비유하면 혈심은 가슴 부위에 해당된다. 청룡ㆍ백호는 양팔에 비길 수 있다. 그래서 양비라 한다.
동양의 정신에는 사람과 자연과 우주가 하나로 관통한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사람, 천지인天地人라 했다. 하늘이 땅과 사람에 골고루 명당을 점지한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하늘의 진리가 땅에 깃들이듯이 땅의 진리가 인간에 깃들인다.
천지인사상, 즉 삼재사상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주역周易의 「계사繫辭전」이다. 괘卦의 6효爻가 천지인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주나라의 역법인 주역은 은나라의 귀장역歸藏易, 하나라의 연산역連山易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역의 팔괘는 낙서洛書에서 나온다.
하나라 우 임금이 치수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마흔 아홉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낙구부도洛龜負圖라 했다. 우 임금의 정치철학인 홍범구주洪範九疇가 거기서 유래한다고 했다. 동이족과 연관이 있다. 동이족인 순 임금을 이어받은 것이 우 임금이기 때문이다.
봉건 농경 사회의 문중 역시 천지인의 개념에 바탕을 둔다. 하늘이 내려 주는 천기가 땅에 깃들이니 그 기를 받아 영웅호걸과 왕후장상이 나온다는 믿음이 문중으로 결속되었을 것이다.
정인명당도
측인명당도이다. 인체를 소우주라 할 때 운행은 우주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주가 뭐지? 초등학교 교과서 같은 것인가?
천지자연을 그릴 수 있다. 사진 찍을 수도 있다. 상징과 도안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느 것이 천지요, 어느 것이 자연인가.
친정아버지의 묘에 물을 부었던, 그래서 친정 대신 시댁을 선택했던 김씨녀는 문중을 택했다. 그것은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유일한 선택이었다. 출가외인이라, 죽어도 시댁의 귀신이 되어야하는 봉건 농경 사회에서 문중이란 부와 권세를 담는 철옹성이었다.
봉건 농업 사회는 인력이 세력이었다. 문중은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의 폐쇄집단이었다. 가부장적인 피의 약속을 기록한 것이 족보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혼인이다. 남자는 씨앗, 여자는 밭이라 했다.
성씨는 남자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여자는 시집가면 성이 없었다. 문중을 옮기는 제 2의 삶은 나머지 평생을 살아있는 귀신으로 지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유인儒人라는 말을 쓴다.
유인이란 원래 조선 때 외명부의 품계였다. 정구품 및 종구품의 문무관의 처를 유인이라 했다. 살아 벼슬한 남자의 그늘에서 벼슬을 한 것이다.
한마디 불평도 못하고 칠거지악을 송두리째 멍에처럼 지고 살았던 조선의 여인들, 그들을 달래는 대의명분이 또한 문중귀신이었다. 망령이 갈 곳이 없어 구천을 헤맨다는 것은 평생 문 밖 출입이 금기시되었던 조선의 여인네들에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형별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조선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존여비사상은 무너졌다. 반상과 사농공상이 궤멸되는데 남녀의 존비가 무슨 상관이랴. 그래서 철모르는 사람들은 남녀 평등시대, 혹은 여성 상위시대를 읊는다.
읊는 것이야 자유지만 그들은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하고 있다. 수렵시대에 이르기까지 모계 사회가 중심이었다. 태어나는 아이는 어미의 것이었다. 수렵 목축시대를 거치며 부계 사회가 대두된다. 자손은 부모의 공동 소유였다.
농경 시대에는 문중 사회가 된다. 문중이라는 가공의 개념아래 가족은 편입된다. 떡 두꺼비같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인위 도태되었다.
여권신장이나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억울할 일이 있나 하겠지만 그것은 문화사적인 세월의 탓이다. 신라 때 선덕ㆍ진덕ㆍ진성여왕 등 예외가 있다 하나 남존 여비의 세월은 무려 5천년 전통을 과시해왔다.
내몽고 오란찰포 암각회에 사슴 사냥하는 사람이 새겨져 있다. 발이 셋 달린 괴물인가.
몽고야 남의 나라 아니겠어? 그럼 울주 반구대의 고래잡이 벽화도 남의 것이겠네? 세 발 인간은 구석기 시대부터 부계 사회가 승세를 굳혔다는 증좌일 것이다.
23. 땅과 하늘의 명당자리
경북 칠곡군 송림사 터는 원래 떵떵거리는 동네 토호가 탐내던 묏자리였다. 터가 워낙 세다 하여 망설이는 사이 어느 샌가 스님들이 절터를 닦고 있었다. 지관이 스님을 엎어놓고 세 번 울 때까지 때리라 했다. 그러고서 묘를 쓰면 악귀가 다른 터로 옮겨 간다나 어쩐다나.
이 양반이 장정들을 데리고 올라간다. 헌데 수십 명 스님이 완공된 절터에서 염불을 외고 있다. 아뿔싸, 한 발 늦었구나, 양반은 가슴을 치며 내려온다.
만약 토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면 정말 악귀가 설쳤을까. 아마 장정들에게 지신밟기를 시키거나 스님을 불러 독경을 했을 것이다. 또는 지관 말대로 스님을 엎어놓고 두 번까지는 울렸을테지.
세 번째는 시주를 듬뿍 주어 안택경이라도 읽게 했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워진 이야기들이 한국의 전설들이고 풍수지로 명당이야기이다.
한국의 풍수지리 이야기를 추적하면 그 뿌리는 대개 옥룡자玉龍子 도선선사에게 돌아간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무학대사ㆍ남사고ㆍ이지함ㆍ맹사성ㆍ일지ㆍ성지ㆍ송암 등의 풍수사들이 이 땅을 주름잡았다.
도선은 한나라 청오자靑烏子의 청오경, 진나라 곽박郭璞의 장서葬書, 즉 금낭경金囊經, 당나라 복응천卜應天의 설심부雪心賦 등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러면 복응천ㆍ곽박ㆍ청오자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신화의 세계가 있다.
특히 곽박은 목천자전ㆍ산해경ㆍ초사의 주석을 달았다. 동이족과 연관된 서적들을 통해 신선사상을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풍수지리는 원래 땅에 깃들인 하늘의 진리를 궁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묏자리나 쓰는 방편으로 알고 있다. 조선 정조의 능행도는 한국의 풍수사상이 단순히 묏자리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풍수는 하늘의 뜻과 연결되어 있었다.
서구에 풍수Feng Shui가 소개된다. 이르되ㆍ둔덕이 뒤를 보호하고 앞쪽 전망이 좋은 곳에 살면 영화를 누리리라. 그럼 달동네 사람들은 다 부자겠구먼
최초의 나경은 자석막대였을 것이다. 종이에 원을 그리고 십자를 그은 방위가 진화를 하여 나침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부자들이 투자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는 18세기 말ㆍ정조가 화성의 현릉원에 친행하는 행차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원화는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김득신과 화원들이 그린 그림도 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은 민화라 부른다. 정통 원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화에서는 구륵전채鉤勒塡彩의 극채색 그림을 폄하했다. 구륵전채는 윤곽을 그리고서 색을 밀어 넣는다는 뜻이다. 대개 화려한 오방색을 극채색으로 불렀다. 그래서 민화이다. 또 이유가 있다. 화원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지 않아 낙관을 찍지 않았다.
공동 제작일 때도 역시 낙관은 없다. 왕의 하명에 감읍하고 제조도감提調都監의 요청에 쾌응하면서도 낙관이 없는 이유가 있다. 도화원에서 금지하는 극채색으로 그림을 그려도 규제하지 않았던 이유와 같다. 바로 천명이기 때문이다.
천명에 의해 그려진 그림, 즉 임금의ㆍ임금에 의한ㆍ임금을 위한 그림이 민화라 했던 것이다. 백성의 그림이라 알고 있었다면 속이 메스껍고 껄끄러울 수도 있다.
화성능행도 혹은 정조능행도는 여덟 폭 그림으로서 각 장면마다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능묘에 절하시는 장면, 수라 드는 장면, 노인 공경하시는 장면, 밤에 군사 조련하는 장면, 친히 활 쏘시는 장면, 귀성행렬, 한강에 뜬 배 위로 건너는 행렬 등이 그려진다.
6천명이나 능행에 수행했다니 장관이 아니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림을 곰곰이 뜯어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능묘에 절하시는 장면과 귀환하시는 장면은 능행, 즉 능으로 행차하는 그림에 해당된다. 수라를 드시거나 노인 공경하시는 당면은 오다가다 그럴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급제 증서를 수여하는 일은 왕궁에서 해도 되는 일이다.
야간 군사 조련은 임금이 없어도 행해질 수 있다. 활 쏘시는 장면은 능행과는 정녕 무관한 일이다. 이처럼 팔폭 능행도는 왜 능행도라는 이름으로 그려졌는지 궁금한 장면들이 모였다.
힌트가 있다. 수라는 먹는 것이 아니다. 드시는 것이다. 왕이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공경하시는 것이라 쓴 구절이 생각날 것이다. 모두 이유가 있다. 왕의 행위는 모든 백성의 귀감이다. 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하늘의 섭리, 그것이 담겨 있는 것이 능행도이다.
현왕과 선왕의 권위를 세상에 널리 펴는 것이 능행도의 사상이다. 왕실과 사직, 그것은 살아서의 명당과 죽어서의 음택으로 나타난다. 권력이 바뀌면 역사도 바뀐다. 명당도 같다.
화성능행도
포로가 된 족장이 부탁했다나. “목을 길게 잘라주소. 족장인 줄 알게...” 허세로 봐서는 능행도 역시 뒤지지 않는다.
명단 중에 명당이야 모두 높은 분 차지였다. 화성에 효도능행 다니시는 정조가 오죽 좋은 자리를 잡았을까. 화성행군도이다.
시조왕릉도始祖王陵圖는 씨족이 시조를 모신 왕릉의 목판그림이다.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는 신라이 첫 임금이기도 하다. 족보에서는 시조를 모시고 그림에서는 왕으로서 묻힌 능을 그렸다. 족보는 다른 그림의 뒷부분에 배접용으로 쓰였다.
그림은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경주의 지명을 보여준다. 금오산ㆍ복천ㆍ반월성ㆍ봉황산ㆍ나정ㆍ신선대 등이 그러하다. 그 사이로 왕릉 이름들이 적혀 있다. 마치 거대한 능묘 사이를 비집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한 도시가 경주이다.
세계 문화 유적의 대부분에서 이렇게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그러나 경주는 이미 신라 시대의 왕릉이 풍수지리사사에 의해 수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예 죽은 자의 땅에 비비적거리며 살고 있는 곳이 경주인 셈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경주의 지형을 보니 행주형行舟形이다. 힘차게 나가는 배 모양이었다는 게다. 왕건은 지관을 신라 왕에게 보내 봉황이 둥지를 떠나는 형이라 속이게 한다.
“그럼 어떻허면 좋은고”
왕이 묻는다. 지관이 답한다.
“봉황대에 알 같은 산을 만들고 율림에 우물을 파옵소서. 봉황이 알을 품고 물을 먹을 테니 떠나지 않으리다.”
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부랴부랴 산을 쌓고 우물을 판다. 배에 산을 싣고 밑구멍을 뚫었으니 배가 가라앉고 말지. 신라가 망한 것이 왕건의 계략이라는 이야기로 전해온다.
정말 그런가. 이런 풍수질의 이야기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각도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에 경주의 지형이 행주형이 아니라면 어떨까. 만약 왕건이 패망하고 신라가 몇 백 년 더 버텼다면 이야기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행주형이 아니라 봉황형이 되었을 것이다. 봉황대의 알을 품고 율림의 우물을 마시면서 봉황은 마르고 닳도록 경주와 고락을 함께 했다고 적혔을 것이다. 행주형 지세는 홍수 설화와 연관되기도 한다. 구원의 배라는 뜻이다.
충남의 풍수사가 유언했다. “나 죽으면 못 가운데 수장하라.” 맏이와 둘째가 어찌 수장하리요 하곤 토장했다. 막내가 몰래 유골을 파내 석관에 담아 수장했다. 어머니까지 수장하자 용왕과 용왕비가 된 부모가 현몽했다.
집이 좁다는 게다. 큰 석관에 이장했다. 그 결과 막내는 벼슬이 정승에 올랐다. 벼슬이 중요한가. 사회윤리가 중요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법도 하다. 정승을 탄핵할 명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례방식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풍수지리설이 성행한 이유이다. 족보는 그 실마리가 된다.
시조왕릉도
족보의 산도이다. 왕족의 권력이 역사를 만든다면 호족으 역사는 족보에 기록된다. 딴은 똑똑한 자손을 두고자 하는 욕망이 이해가 간다.
경주지도. 춘추필법은 결과에서 소급하여 원인을 합리화한다. 권력을 얻은 자는 잃은 자를 매장한다. 행주냐 봉황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누가 나중에 권력을 잡았느냐에 달려 있다.
천강석합도天降石盒圖는 김해 김씨의 족보에 실린 그림이다. 하늘에서 돌 상자가 내려왔다는 뜻이다. 가락국의 사적을 적은 글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김해 김씨의 시조는 김수로왕이다. 신라 유리와 19년42에 가락국이 구간이 금관국 북쪽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금알이 든 금합을 얻었다. 알이 변해 6가야의 왕이 되었다. 처음 나온 것이 수로왕이다. 금관가야 혹은 대가야의 시조이다.
김씨는 금알에서 나온 수로왕에게 붙여진 성이다. ‘금+알’의 신화는 알타이어족의 문화권에서 종종 태양신화와 연관된다. 이를테면 북방신화의 전형이요, 대륙계의 문화전래를 보여준다.
남방 전래, 즉 해양문화의 전래를 보여주는 그림이 항탑도해도航塔渡海圖이다.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왕후 이야기이디 때문에 천강석합도와 나란히 그려진다. 항탑도해도란 탑이 바다를 건너오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왕후는 허황옥이다.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파사석탑이 그려졌다. 우리의 기층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남방문화, 즉 벼농사와 죽세공과 방직 등의 유산이 이 탑처럼 우리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이 책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산에 묘를 쓰면서 그림으로 남긴 산도 혹은 묘도이다. 위에는 학성군ㆍ학천군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래는 지명이라 생각되는 만수동 등이 기재된다. 가운데는 산도가 그려진다. 월출산ㆍ잠두산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안에 능묘와 비석ㆍ상석 혹은 비각 등을 그렸다. 이토록 산도를 세상에 자랑스레 공개하는 이유는 명산임을 알려 범접하지 못하게, 혹은 우리 시조의 묘소가 이토록 명산이니라 하는 과시일 것이다. 가짜 명산도가 그려지지 못하도록 하는 포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명산에 얽힌 이야기야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가짜 명산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술한 글이 있다. 조선에서 무학대사가 처음으로 내장산 명산도를 만들었다. 임금이 이를 휘지비지諱之秘之라, 숨기고 아끼다가 정승이나 판서에게 “옛다, 너 하나 가져라” 하고 하나씩 떼어준다.
40장짜리 명산도가 세상에 나돈다. 1백장 짜리로 둔갑을 한다. 지관마다 슬쩍 자기 것을 끼워 넣는 것이다. 명산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한국인이 빚어낸 희극일까. 비극일까.
중국 사람들은 수재壽材를 아낀다. 생전에 관을 사서는 보고 만지고 광택까지 내면서 즐긴다. 한국인은 투박한 소나무 관에 담긴다. 관을 볼 수 있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죽은 자가 남긴 가족이나 친지들이다.
한국인은 수재 대신 좁은 국토를 누빈다. 명당 찾아 삼천리란다. 그 뿌리깊은 명당사상의 근원에 족보가 있다.
천강석합도
항탑도해도. 시조의 신이함을 자랑하는 것은 후손이 못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성한 후손이 신화를 보존하는 법이다.
명산도이다. 한국인의 명당사상은 봉건 농경 사회의 산물이다. 부귀다남이 농경 사회의 동경이라면 고관대작은 봉건 사회의 이상이었다.
풍수지리사상은 한국인을 세 방향에서 장악한다. 첫 번째로는 봉건 농경 사회의 혈족사상이다. 두 번째로는 내세와 현실구복 사상이다. 세 번째로는 산악숭배사상과 하늘사상이다.
봉건 농경 사회는 전통적으로 대가족 제도를 기본으로 한다. 노동력이 곧 힘이므로 혈족으로 뭉친다. 자식들에게는 머슴에게 주는 새경을 해마다 주지 않아도 된다. 길러 주고 가르쳐 주고 장가만 보내 주면 된다.
며느리는 다른 문중에서 그냥 데려온다. 며느리란 원래 그런 것이려니와 조건 없이 희생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이들의 불평을 위무하는 것이 족보요, 상속이요, 문중의 보호와 소속감이다.
내세는 현세의 연장이었던 것이 봉건 사회였다. 부모에 효도하는 것은 자식들에게 효도를 보장받는 관행이었다. 선조에 제사지내는 것은 언젠가 일위一位 선조로 기제사祇祭祀를 받으리라는 당연한 기대를 바탕으로 한다.
풍수명당사상은 장례와 성묘 및 기제사 등의 사후 관리가 보장되는 제도이다. 조상의 음덕으로 오늘의 부를 누리노라는 자랑은 나를 아무렇게나 묻으면 너희들이 액운을 당하리라 하는 으름장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농경 사회의 두레와 대가족 집단 및 명당 발복사상은 뒤집으면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대가족 제도의 혈족은 단일 민족의 폐쇄적인 씨족관에서 비롯할 수 있다. 무덤을 잘 쓴다는 것은 허례허식일 수 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사람이 겪는 고통이 막심하지 않은가. 논리학에서는 동전의 앞면은 결코 뒷면일 수 없다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가지 중에서 하나의 가지가 옳으면 다른 가지는 옳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동전을 뒤집건 엎건, 이쪽 가지를 잡건 저쪽 가지를 잡건 진실인 명제가 있다. 그것은 원형적 구조이다. 원형原型는 모형母型, 혹은 고형태古形態라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의 핏속에 녹아 흐르는 피의 약속 같은 것이다.
종족과 문화적 기조, 문명의 발상에서부터 숱한 검증과 시행 착오를 거쳐 유전적으로 체질화한 집단 무의식이 상징 및 상징적 체계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원형이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사회현상학적ㆍ제도적 고찰에 앞서 신화와 전설에 귀를 기울인다.
기록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국체와 정체의 은밀한 보호 아래 전래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원형이 전래되거나, 결과적으로 전래된 옛 이야기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신화가 향하는 표적을 좇아가다 보면 거기에 산이 나온다. 산악숭배사상이 나온다. 삼신산은 그래서 우리 민족의 고향이 된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라고? 사람들은 반문한다. 지금이 정보화 시대인데 무슨... 하고 빈축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친근한 것은 대부분 농경사회와 연관이 있다. 농경장면이 새겨진 청동기에는 우리의 원형이 녹아 있다.
중앙일보 1996년 1월 21일자. 우리의 핏속에 녹아 우리의 가슴을 때로 저릿저릿 후비는 것, 그것을 우리는 원형이라 부른다. 그 원형이 깃들이는 곳이 산이다.
24. 삼신산의 삼신할매
삼신할매는 한국인을 점지하고 낳도록 도와주고 자라도록 돌봐주고 길러 준다. 결코 거룩한 젯상 하나 바라지 않고, 맑은 물 한 대접이면 신명을 다해 한국인을 돌봐주었던 것이 마음씨 좋은 삼신할매였다.
삼신할매가 누구인가. 근본도 내력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공통된 숭앙을 받는 할머니가 삼신할매다.
삼신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신이다. 단군 신화의 환인ㆍ환웅ㆍ환검 혹은 왕검이다. 그리고 삼신산이 있다. 봉래ㆍ방장ㆍ영주산이다. 동해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했다. 서복이 진시황을 설득하여 동남동녀를 싣고 불로초를 찾으러 갔다는 신선의 땅이 바로 삼신산이었다.
삼신은 삼성三聖라고도 한다. 삼성이라 하면 많은 뜻으로 쓰인다. 석가ㆍ공자ㆍ예수를 말하기도 하고ㆍ노자ㆍ공자ㆍ안회ㆍ요ㆍ순ㆍ우ㆍ문왕ㆍ무왕ㆍ주공 등이 삼성이다. 불교에서는 비로자나불ㆍ문수보살ㆍ보현보살ㆍ아미타불ㆍ관세음보살ㆍ대세지보살 등을 꼽는다.
소크라테스ㆍ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를 내세우기도 한다. 또 제주도에는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의 삼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삼성은 역시 삼신이다.
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三聖祠는 환인ㆍ환웅ㆍ환검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그러나 단군 왕검이 구월산 산신이 되었다 하니 왕검 즉 환검일 수도 있다. 삼성이 하나의 신격으로 통합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삼신에서 연상되는 것은 산신山神이다. 단군 왕검이 산신이었다. 같은 발음의 신이 있다. 산신産神이다. 출산을 돕는 신이다. 삼신三神-산신山神-산신産神를 놓고 보면 그럴듯한 연상이 떠오른다.
삼신인 환인ㆍ환웅ㆍ환검이 하나가 되어 구월산 산신이 된 환검으로 통합된다. 산신은 발음이 같은 산신이 된다. 여기에 대가족 제도의 농경사회에서 자상한 할머니의 모습과 연상결합한다. 그래서 삼신+할매=삼신할매가 된다는 것이다.
산에는 산신이 산다. 산신이 삼신이다. 삼신이 삼신할매이다. 이 도식을 모르면 왜 제약회사에서 이런 광고를 냈는지 알 수 없다.
3은 좋은 숫자이다. 셋은 세우다 라는 뜻이라 한다. 어쩐지 남자의 숫자인 이유를 알 법도 하다. 제주 삼성혈에도 남자가 솟아올랐다.
삼신성산도三神聖山圖는 삼신산을 그린 그림이다. 삼신산은 어디 있는가.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는 제齊나라 위왕威王와 선왕宣王 및 연燕나라 소왕昭王가 삼신산을 찾고자 했다고 적고 있다.
시황본기始黃本紀에는 서복徐福가 동남동녀를 데리고 찾아 나섰다 했다.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도 삼신산이 나온다.
산해경에는 열고야列姑射가 조선의 남쪽 바다에 있다고 했다. 열고야는 장자의 남화경에서 말하는 막고야藐姑射이다. ‘요堯는 세상을 다스려 천하를 평정한 후에 신인 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막고야 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빈수 근처 평양에 이르러 홀연히 천하를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평양은 오늘날 산서성 임분현 남쪽에 위치한다. 요 임금의 도시이다. 요임금은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두 딸을 줄만큼 동이와 가깝다.
또 발해渤海에 봉래ㆍ방장ㆍ영주가 있다. 발해는 바닷가라는 뜻이다. 오늘날 서해 바다 쯤이 된다. 신선사상의 중심인 연제해빈燕齊海濱과 같은 지역이다. 그래서 제나라 위왕과 연나라 소왕이 신선을 찾았던 것이다.
연ㆍ제 역시 동이의 나라이다. 발해바다를 끼고 있는 산동성은 동이문명의 중심이었다. 그 문화권에서 신선의 땅이 어딘가. 반도였다.
신선의 땅에서 최초의 신선은 물론 단군 왕검이다. 그 다음이 곤평산군이다. 서기 85년의 염제현 신사비에 의하면, 한나라가 반도 원주민의 산신제을 지내 준 기록이 있다. 신라는 삼산 오악에, 고려는 산천신에 제사지냈다.
고려는 산천신에 관직을 내렸다. 조선은 국행제라는 산천 제사를 지냈다. 모두 산신사상이자 삼신사상과 연관이 있다.
삼신은 펼치면 환인ㆍ환웅ㆍ환검이다. 모으면 하나의 신이 된다. 하느님이라 부르는 하늘의 지배자이자 태양신이다. 태양신의 아들인 햇빛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 높은 산이다. 밝산이라 불렀다. 밝알산이니 밝은 알 산이다. 밝은 알...옛 한국어에서 가리키는 태양산이다.
단군은 태양 아래의 생명체이다. 그래서 모두 태양의 순환으로 설명된다. 다시 환검은 구월산에서 산신이 되었다. 신이 되었으니 하늘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산에서 태어나 산으로 들어간 것은 말을 바꾸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회귀의 뜻이 있다.
그래서 귀천이 아닌가. 사람이 죽는 것이 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삼신이 환검이 되고 환검은 구월산으로 들어갔으니 삼신이 산신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환검의 자손들은 산에 묘를 쓴다. 산은 하늘로 향하는 통로이자 사다리이기 때문이다.
삼신성산도
전국시대 지도이다. 연나라는 오늘날 북경 지방이다. 제나라는 산동에 있었다. 발해를 코 닿을 곳에서 동이의 신선사상이 자라고 있었다.
백제의 산경문벽돌은 아무리 봐도 동이의 신선산수라는 느낌이다. 백제의 영토가 중국 본토에 있었다는 주장이 그래서 더욱 솔깃하다.
삼불오선도三佛五仙圖는 금강산을 그린 팔폭병풍의 한 폭이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에는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다. 석가봉ㆍ관음봉 등은 불교적 이름이다. 산신봉 강선대 등은 도교적 명칭이다.
무속적 이름도 있다. 칠성봉ㆍ귀면봉 등이다. 마치 만법이 금강산에 녹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만신사상이다. 역시 삼불암ㆍ삼선암 등 삼신과 관계되는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삼신산의 으뜸은 금강이다. 봉래ㆍ방장ㆍ영주에서도 으뜸이어서 앞에 놓인다. 춘하추동에 따라 금강ㆍ봉래ㆍ풍악ㆍ개골이라 별명이 붙는다. 계절마다 절경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 경승보다 중요한 것은 해상신선설과의 관련이다.
해상신선설은 발해의 동쪽 군자자국에 봉래ㆍ방장ㆍ영주산이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사기 「봉선서」에 의하면 삼신산은 불사의 약초가 있는 곳이다. 그 곳에 새와 짐승들은 흰빛을 띠고 있고ㆍ황금과 은으로 지어진 궁궐이 있다. ‘
멀리서 볼 때는 구름처럼 하늘에 떠 있는 것 같더니 가까이 가니 물속에 있어 결국 아무도 이르지 못하였다는 곳이다. 신기루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상상의 선경일 수 있다.
한라산 민화는 한민족이 이 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를 잘 보여준다. 한라산과 백록담이 보이고 아래쪽으로는 성산포가 따로 그려진다. 이윽고 하나의 섬으로 재조립되었다. 오늘의 지도와는 다르다. 지도의 제목도 영주도라 되어 있다. 마치 신선의 땅처럼 그렸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신선의 땅이라 생각하는 곳이 바로 선경일지니, 한반도가 중국에서 동경하던 신선의 땅일 수 있는 가능성은 이런 그림에서도 잘 보여진다. 사실 한국만큼 살기 좋은 곳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으랴.
땅 그림을 마무리하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하나의 민화를 보자.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신선임을 일깨워 주는 그림이다.
삼불오선도
한국인은 산에서 신선을 찾는다. 그러나 신선이 산에만 있으랴. 신선의 땅에 사는 사람 모두가 신선이 아니던가.
금강산도이다. 금강은 원래 신선의 산이었다. 반도야 원체 신선의 땅이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신선산수처럼 그려놓으면 실경보다 야릇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기국碁局선경도는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대국 장면을 그린 것이다. 옛 이야기에는 바둑 두는 노인네들 옆에서 구경한 사람 이야기가 있다. 대추씨 비슷한 것을 주길래 얻어먹었단다.
판이 파하고 나서 보니까 도끼 자루가 썩어 있었다. 마을로 내려와 보니 몇 백년이 지났더라는 이야기이다.
이 그림은 나무 그늘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사람을 그렸다. 갓을 벗어 던진 상투 머리에 편안한 옷을 입고 있다. 이마에 솔바람이라도 쐬는 모양이다. 왼쪽 아래로는 인가가 보인다. 사람들도 조그마하게 그려졌다. 유독 바둑 두는 사람들만 크게 그려진 것 외에는 별로 신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나무가 엄청나게 크다. 한참을 올라가보면 나무 위에 뿔이 달린 부엉이가 두 마리 앉아 있다. 부엉이는 장수의 상징이다. 부엉이는 묘두응猫頭鷹이라, 고양이 머리를 한 매로 불리운다. 고양이 묘猫는 중국어로 마오라고 읽는다.
일흔 살을 뜻하는 모耄 역시 중국어로 마오가 된다. 그래서 고양이는 장수의 상징이 되고, 덩달아 고양이 얼굴을 가진 부엉이 역시 장수를 상징하게 된다. 그래서 이 그림을 신선도라 해석했다.
신선놀음이라는 바둑판을 그렸다고 모두 신선그림은 아니다. 신선이 노니는 것 같은 선경을 그렸다고 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것이 대수인가. 신선이란 오래 사는 사람이다. 늙어서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거나 때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불사라는 개념은 신선사상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사람이겠는가. 그래서 신선이란 인간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인간형으로 생각되었다.
한국인은 신선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생각지 않는다. 신선의 땅에 사는 사람이 바로 신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 하늘에 닿는 나무의 그늘 아래서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몸과 마음 편하게 한세상 노닐 듯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선놀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삼신할매에게 삶과 죽음을 맡기는 한국인의 삼신사상이었다.
기국선경도
결국 신선 이야기의 끝은 인간이다. 인간이 신선이다. 그리고 그 인산은 회남자에서 말한 도덕군자가 아니라 이 땅에 뿌리내린 민초들이다.
신선도ㆍ누각산수가 있다.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소재이다. 신선의 거처ㆍ신화 인물의 누각을 그렸다. 동이의 원형이다. 그래서 이런 그림은 우리에게는 서툴다. 이국적인 냄새가 난다.
땅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근화강역ㆍ팔경풍류ㆍ풍수지리를 거쳐 삼신성산을 이야기했다. 근화강역에서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느님주신 동산’이라는 노래를 배웠다. 그리고 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이 나라를 보우하는지 알았다.
태양신이 그 자손인 하늘민족을 이 땅에 내려 보낼 때 땅인들 허술했겠는가. 보살피는 정성 또한 지극하지 않으랴 하는 것이 근화강역을 찬양하는 한민족의 마음이었다.
팔경풍류에서는 옛 동이족의 신화와 전설이 소상팔경을 이 나라에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토불이라, 이 땅과 이 몸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동ㆍ관서ㆍ영주 등 경승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기는 심정은 이 몸이 이 땅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풍수지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 민족이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한민족의 시조인 환인은 태양신이다. 태양의 아들 햇빛이 천하제일의 큰밝산에 비치듯 한민족이 죽어 산에 묻혀 하늘로 돌아간다는 사상이 명당ㆍ명산사상으로 나타났다는 것도 알았다.
명산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이어야 하고, 명당은 뜻, 즉 천기를 거스르지 않는 땅이어야 했다.
삼신성산에서는 삼신ㆍ삼성ㆍ삼신이 모두 한민족의 발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민족의 의식과 생활과 환경, 나아가 국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 땅의 섭리가 담긴 것이 하늘 그림이었다.
다시 하늘 그림으로 돌아가 보면 거기서 산신과 서왕모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천지신명에서는 한민족이 태양신의 후손임을, 영수서조와 벽사문배에서는 옛 동이족의 신화에서 동양의 정신이 비롯함을, 종교도상에서는 만법 통일의 슬기를 배웠다.
그 종교도상에서 산신의 모형母型이 서왕모西王母라는 점을 역설했었다. 삼신=산신=서왕모=삼신할매가 된다. 하늘의 진리가 삼신으로 나타나서 땅의 진리인 산신으로 바뀌고 인간의 진리인 할머니의 다정한 손길로 이어지는 긴 여행을 겪게 된다.
그 여행의 시작에 인간이 있다.
아이가 말한다. “엄마 사랑해” 엄마가 묻는다. “얼마만큼?” 아이는 “하늘만큼 땅만큼 ” 하고대답한다. 얼마나 귀여운가. 엄마는 행여 깨질까 조심조심 아이를 꼬옥 안아준다. 사실 아이들이란 워낙 유연해서 웬만큼 힘주어 껴안아도 깨지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게 사람 둘이 껴안은 모습을 한자로 사람 인人이라 했다.
아둔한 지리 선생님이 말했다. ‘화산은 산에서 불을 뿜는다. 큰 지구상에서 산이란 평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선생은 화산활동의 결과 산이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산소가 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산소는 낮아도 하늘로 통하는 산사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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