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호설(作號說)
“여보! 오늘은 꼭 지으세요.”
“알았어요.”
왕비님의 채근이 시작된 게 근 열흘이 넘었다. 본인과 자기 친구인 00씨 호를 지어달라는 요구다. 난, 올해 초 이베리아 반도를 다녀온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관한 책을 읽어야 했고, 또 남도 여행을 계획 중이라 호남 관련 여행 서적을 들여다보느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허나 성질 급한 왕비님의 성화가 갈수록 세질 것이 분명하기에 더 이상 미적거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제 저녁 책장에 꽂힌 『중용한글역주』를 꺼내들었다. 왕비님과 00씨의 그간의 언행과 평소 성품을 머릿속에 그리며『중용한글역주』를 읽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다!”
난, 즉시 ‘호설’이라 제목을 붙이고 순식간에 A4용지에 해설을 썼다. 아래 그 내용이다.
호설(號說)
아내 00은 매사 너그럽고 온유하며 유연해서, 세상 만물을 너끈히 포용하는 덕성을 지녔다. 고로 자용(子容, Master Inclusiveness)이라 한다.
부인 00는 매사 재계하고 정중하며 중도를 지키고 정도를 걷는 품성을 지녔다. 고로 자경(自敬, Master Earnestness)이라 한다.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
2017.2.18(토) 淸凉山下 山木居士 著而書.
방바닥에 엎드려 다 쓰고 난 뒤, 왕비님을 불렀다.
“여보오! 이리 와 봐요. 당신과 00씨 호, 지었어요.”
“그래요? 호호호!”
주방에서 저녁 반찬을 만들던 왕비님이 쪼르르 달려왔다. 내가 건네준 ‘호설’을 읽으며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숙희한테 알려 줘야지.”
왕비님은 신이 나서 호설을 쓴 종이에 스마트폰을 가져다댔다. 사진을 찍어 원주에 사는 00씨한테 보내려는 것이다. 한참 동안 00씨와 깔깔 낄낄 까륵 까륵 거리며 수다를 떨고 난 후, 다시 나한테 수다 내용을 전해주었다.
“00가, 너무너무 맘에 든대요. 뭘 선물하면 좋겠느냐고 해서, 나중에 막국수나 한 그릇 사라고 했어요. 00가, 너무 약소한 게 아니냐고 해서, 당신은 수육도 안 먹고 오로지 막국수 곱빼기면 족하다고 했어요.”
“잘했어요. 막국수 집에선 막국수가 최고지. 옛날 원주에 갔을 때 들렸던 그 막국수 집 다시 한 번 갑시다.”
“그래요.”
“당신, 호 괜찮소?”
“맘에 꼭 들어요. 어쩜 이리 잘 지을 수가 있지...”
왕비님은 처음 말 배우는 애기처럼 자용, 자용, 자용 하며 쉼 없이 입술을 놀리며 발성 연습을 했다. 그때 외출했던 큰애가 집에 들어섰다. 내가 먼저 말했다.
“엄마 호 지어줬다.”
“뭐라고 지었는데?”
“자용 이라고.”
“무슨 뜻인데?”
난, 『중용』삼십일장(三十一章)에 나온 문장을 해설하며 그 이유를 말해줬다.
내 말이 끝나자 큰애 입에서 심드렁하게 한 마디 튀어나왔다.
“그거 중의법인데.”
왕비님이 물었다.
“중의법이라니?”
“엄마, 잠꾸러기잖아. 아직도 자냐고 물어보는 말도 되잖아.”
왕수다인 왕비님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어어...”
늘 유쾌 발랄한 여신인 왕비님의 표정이 석고상처럼 굳어진 것 같았다. 왕비님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 왕비님답지 않은 모습이 맘에 걸렸으나, 큰애의 대답이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어, 나 역시 큰애의 해석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런 경우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 할까, 아니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할까.
드디어 나한테 한문을 배운 큰애의 수준이 애비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 아닐까? 나는 큰애한테 선언하노라.
“이제 너 홀로 서라! 이미 부모의 은혜를 갚았노라!”
2017. 2. 20(월) 10:07 교무실에서 산목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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