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로마서 2장 1-5절]
인간에게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 첫째는, 형이하학적 인간으로 – 본능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지난 시간 상고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부류인 - 형이상학적인 인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로마서 2장 전체가 - 이 두 번째 부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형이상학적인 인간을 다른 말로 - 철학적 인간, 성경에서는 도덕적 인간이라 부릅니다. - 그런데 도덕적 인간에도 – 세 부류가 있습니다. -
본문 1-5절은 도덕적 인간 중에서도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인간에게 나타나는 특징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로마서 2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첫째, 그들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 판단’은 헬라어로 ‘크리노 κρίνω’인데, 정죄 혹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 무엇인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 남을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못합니다. - 지식이 없는 사람은 – 도덕을 논하지 못합니다.
둘째, 그들은 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 자기도 똑같이 그 잘못을 범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고 말씀하셨습니다. - 즉 자기가 한 일은 - 언제든지 덮어두면서, 남의 일만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이 부류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 정말 주님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이와 같이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 지식으로만 무장하면 –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 오히려 지식의 말씀을 도덕적 잣대로 삼아 남에게만 들이대며 –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앉게 되기 쉽습니다.
1980년대 말경, 노사 간 팽팽한 대립이 있었을 때입니다. - 그때 가톨릭교회는 약자 - 즉, 근로자의 편이었습니다. - 그래서 근로자들이 고용자 측에 비도덕적 행동을 하더라도 – 그들의 잘못을 나무라기보다 – 고용자 측이 반성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 이후에도 견지되었습니다. - 그런데 가톨릭교회가 1988년 평화신문을 창간하고 – 이듬해 노사분규가 발생했습니다. - 그 신문사에 근무하는 직원은 – 16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평화신문사 사장인 신부님은 – 16명 가운데 4분의 1인 - 네 명의 직원을 일방적으로 해고하고, 경찰을 동원해 물리적으로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동안 일관되게 근로자의 편에 서왔는데 – 직접 기업을 해보니, 자신들이 주장하던 바가 실제로 적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톨릭이 운영하는 병원인 대구파티마병원에서도 노사분규가 발생한 일이 있습니다. - 근로자 측이 발표한 이유를 보면, - 50여명의 수녀들이 병원의 요직을 독차지하는 것은 – 또 다른 의미에서 족벌체제이며 –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감시 감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 한 수녀의 머릿수건이 벗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구지역에 있는 사제들이 – 사제의 명의로 – 수녀의 머릿수건을 벗긴 근로자 측이야 말로, - 반가톨릭 적이요 – 반교회적 야만이라고 매도했습니다.
평화신문 사장님이 발표한 성명서나 – 파티마병원 원장님이 발표한 성명을 보면, - 일반 기업의 고용자의 성명서와 동일합니다. - 성명서에 사용한 단어까지 똑같습니다.
항상 근로자의 편이 되어 – 고용자를 비판하고 정죄했는데 – 막상 그들이 고용자 입장에서 근로자들과 분쟁이 생기자 – 여타 고용자들과 똑같이 대처한 것입니다.
더욱이 아니러니 한 것은 – 평화신문사 사장으로 있을 때 – 근로자들을 경찰력을 동원해 끌어낸 분이 –7. 80년대 – 인권운동을 펼친 함세웅 신부님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누구도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정죄하고 비판하면서도 – 우리 자신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 아예 생각조차 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잘못 운운하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 왜 자신도 똑같은 짓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 그 이유는 실은, - 자신이 먼저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 동일한 잘못을 범하는 사람에게 – 관심조차 없을 것입니다. - 그러나 자신이 그 바닥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 비난의 화살을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권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면 – 그는 권력가 못지않게 – 권력에 대한 관심이 높고 – 탐용이 강한 사람입니다. - 그렇지 않다면, 권력가에게 조금의 긍휼한 마음도 없이 – 맹목적인 비판만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 두 부류에 속합니다. - 하나는, 권력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다가 – 권력에서 프러포즈해 오면, - 하루아침에 그 품에 안기는 언론인, 군인, 혹은 학자입니다.
그들이 과거에 권력을 비판하던 글들이 –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음에도 – 언제 그랬냐는 듯 –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버린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형태의 권력을 부리는 경우입니다. - 권력을 가진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을 하면서 – 자기 스스로를 우상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 다른 세력으로 하여금 – 자신을 영웅으로 보게 하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 따라서 이들도 다른 의미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권력을 심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재벌을 향해 – 무지막지할 정도로 심판을 가하고 있다면 – 그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마음속에 그 누구보다도 – 재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거나 – 혹은 그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으로서 받은 소외감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 – 돈을 소유한 사람은 – 그것을 더 좋아해 - 계속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 취하게 됩니다. - 그러므로 그들을 비판한다고 해서 –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 내가 정말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아니라 –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 권력을 가진 사람과 – 재벌을 무자비하게 심판할 것이 아니라 –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 사랑으로 권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제삼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 그것이 남을 심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별 할 수 있습니까?
첫째, - 증오심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하는 것입니다. - 아무리 그럴듯한 말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지라도 – 그 안에 증오가 있으면 – 그것은 결국 증오로 들어나며 – 심판하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꾸민 말과 글귀를 동원해도 –사람들은 정죄하는 말을 알아차립니다. -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말은 – 진실성도 결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 있다면, - 권면하는 것입니다. - 사랑으로 권면하는 사람은 –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 그러나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 어떻게든 남을 끌어내리려 하기 때문에 – 어떤 경우에도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셋째, -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상대의 잘못을 자신이 범치 않는다면, - 권면하는 것입니다. - 사무엘하 12장 1절-15절을 보면, - 부하의 아내를 취한 다윗을 – 나단 선지자가 사랑으로 권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일 나단이 다윗을 정죄했다면 – 다윗은 그에게 반발했을 겁니다. - 더욱이 나단 선지자는 – 남의 유부녀를 데려다가 간음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남을 권면하려 한다면 – 적어도 권면하는 그분분에 있어서만큼은 – 깨끗해야 합니다.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되면 – 남에게 권면은 하면서도 – 자신도 똑같은 짓을 일삼습니다. - 그리고는 자신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 예화를 들어 말했습니다. - 어느 마을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 부자는 소와 양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암양 한 마리밖에 없었지만 – 그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잣집에 손님이 오자 – 그 부자는 자신의 양과 소를 아끼기 위해 – 가난한 사람의 양을 뺏어다가 요리를 해서 – 손님에게 대접을 했습니다.
나단의 그 이야기를 듣고 – 다윗이 노하여 이르되 - “그 부자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했습니다.
지금 다윗은 남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 그리고 그 남편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다윗은 나단이 한 부자 이야기를 듣고는 분개하면서 – 그 부자는 마땅히 죽을 자라고 심판하며 정죄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도 – 한 순간 믿음을 잃어버리고 –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되어 –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 회개의 열매가 맺힌다면, - 권면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사랑으로 권면함에도 – 한순간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권면하는 한 –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므로 – 반드시 언젠가는 회개의 열매가 맺힙니다. - 반대로,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남을 권면해도 – 그 실체가 정죄라면 – 남는 것은 적개심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된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 로마서 2장 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
자신이 지금 나쁜 짓을 행하면서 - 자신은 접어두고 - 남만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서 ‘판단’을 뜻하는 헬라어는 ‘크리노 κρίνω ’입니다. (참고: 아나크리노(ἀνακρίνω) : 판단하다. ...아나 ἀνα = ...하다 )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나를 정죄함이니’에서 ‘정죄’를 가리키는 헬라어 ‘카타크리노 κατακρίνω’인데 –판단을 뜻하는 ‘크리노 κρίνω’ 앞에 - ‘...에 따라서’ 라는 뜻의 전치사 ‘κατα’가 붙습니다.
내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피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내가 같은 죄를 지으면서 남을 정죄할 때 – 내게 되돌아오는 정죄인 ‘카타크리노 κατακρίνω’는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크리노 κρίνω’와 ‘카타크리노 κατακρίνω’의 차이입니다. -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라는 것은 – 너에 대한 남의 정죄를 너 자신이 초래했다는 의미입니다. -
로마서 2장 2절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에서 ‘심판’에 해당되는 헬라어 ‘크리마 κριμα’는 – 법정 용어로 ‘취소 불가능한 판단’을 뜻합니다.
내가 남을 험담하고, 판단하는 것은 –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것은 –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 하나님의 심판에는 이러한 속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진리대로’라는 말은 –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히’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 그러므로 3절은 –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로 피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로마서 2장 3절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즉 무고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에게는 - 피할 수 없는 판단과 정죄가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 어디를 가도 그는 – 그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에게 –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 대하십니까? -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령, 신하가 임금이 살아있는데도 – 자신이 임금의 고유 업무를 하겠다고 한다면, - 이것은 역모이며, 쿠데타입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고유한 일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만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만 심판자이십니다. - 성경 어디에도 사람을 가리켜 – 심판자라고 기록한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 내가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 하나님의 고유한 역할을 빼앗는 것입니다. - 바꿔 말하면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 그런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 로마서 2장 4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남을 험담하고 정죄하는 것은 -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 인자하시고 용납해 주시고 - 참아 주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어원은 ‘여자의 자궁’입니다. - 여자의 자궁에 태아가 생기면 - 자궁은 태아를 최대한 보호합니다. - 설령 그 태아가 기형아라 하더라도 – 자궁은 자기 생명을 나누며 – 최적의 조건으로 태아를 보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자하심으로 - 우리를 대해 주십니다. - ‘용납하심’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노케 ἀνοχή’는 ‘참다’라는 뜻입니다. - 우리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참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참아 주시지 않는다면 – 우리 모두의 인생은 – 이미 끝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길이 참으심”은 영어로 - ‘long suffering'입니다. - 참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 즉, 오래도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 부부지간에도 – 부자지간에도 – 형제지간에도 – 참는 것이 고통일 수 있습니다. - 이런 의미에서 – 우리가 온갖 죄를 지음에도 - 하나님께서 참고 계시다는 것은 – 하나님께서 고통을 감수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참으십니까? - 그것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 계속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 – 남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심판한다면 – 곧 인자하시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을 – 멸시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의 주제 요절이 -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입니다.
멸시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 우리는 열심히 예배당을 다니고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어디를 가든 - 남을 정죄하고, 비방하고, 심판한다면, - 그것이 바로 -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기 때문에 -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간음한 여인을 놓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 추궁하자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손에 쥐고 잇던 돌을 놓고 - 모두 돌아갔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 이 여자는 감격하여 - 이후 교회에 열심히 다녔을 것입니다. - 그리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예배드리고 봉사하면서 - 예전의 타락한 생활을 반복한다면, 이 여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배에 잘 참석하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는 - 남을 정죄하고 - 자신이 아쉬울 때는 그 방법으로 돈을 벌기도 한다면,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 로마서 2장 5절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고집스러운 마음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 같은 마음입니다. - ‘고집’이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 ‘귿은 것, 강한 것’입니다. - 강퍅한 마음에 지식이 더해지면, - 그것은 자기와 남을 동시에 죽이는 독약이 됩니다. - 알면 아는 만큼 남을 더 심판하게 됩니다.
고집스러운 마음과 회개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 결국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쌓는도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데사우리조 θησαυρίζω’는 - ‘보물’을 뜻하는 명사 ‘데사우로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보물을 쌓기 위해 얼마나 애씁니까? -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쉴 틈도 없이 애를 씁니다. - 이렇게 정성들여 모아 두었는데, 마지막 날 뚜껑을 열어 보니 -전부 하나님의 진노거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멸망거리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해변 가에서 모래로 성을 쌓습니다. - 열심히 쌓습니다. - 그런데 한 아이가 성을 쌓으면서 다른 아이의 성을 건드렸습니다. - 그로 인해 그 아이와 멱살을 잡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다시 정성스럽게 성을 쌓습니다. - 그리고는 해가 저물어 가자 –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들이 정성스럽게 쌓았던 모래성을 들고 가지 못합니다.
언제 이 성을 쌓았냐는 듯, 그 성을 그냥 두고 갑니다. - 그리고 밤에 밀물이 들어오면 – 그 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 그래도 모래성을 쌓은 아이들은 괜찮습니다. - 그저 모래성만 없어진 것이며 – 시간만 낭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 하나님의 진노의 밀물이 올 때는 – 그가 쌓은 소유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멸절입니다. - 그러니 우리의 매일의 삶이 – 진리를 쌓고, 생명을 쌓는 나날이 되지 않으면 – 마지막 날에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2)고 말씀합니다. - 이를 가는 것은 – 잠을 자면서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그런데 얼마나 억울하면 이를 갈겠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부터 - 밖을 향한 눈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 우리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고 - 굳고 강퍅한 그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 끊임없이 남을 정죄하고 자신도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패역한 도덕주의자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참다운 의인의 삶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설령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거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음에도 삶이 개선되지 않거나, 계속해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비바람을 보내 우리의 삶을 흔들고 계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나 역시 잘못을 범하고 있음에도 나와 똑같은 잘못을 행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뽑아야 합니다. - 내가 주님 앞에서 고쳐져야 합니다. - 나의 들보를 뺀 다음에는 – 티끌이 있는 형제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있는 곳이 에덴동산이 됩니다.
정죄는 남을 죽이는 것이지만, - 사랑의 권면은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살리는 권면의 사람이 될 때, 바로 그곳에 사랑이시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