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중창단
작년 가을부터 중창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름은 ‘아유파’ 중창단. 스타워즈의 유명한 대사, 아임 유어 파더의 줄임말로 아빠들이 함께한다. 본격적인 활동을 했던 6개월 동안 몇 차례 공연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공연에 앞서 중창단 소개를 하며 모임지기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단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 단원은 쉽게 모이지 않는다. 해외출장으로 오히려 한 분이 줄었다. 다음으로 “아내의 허락이 있으면 됩니다.” 여기서 허락은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정의 평화를 생각함과 동시에 가족 내에서 음치라 생각되면 활동이 어렵겠다는 자체검열이 필요하단 뜻이다.
딱히 노래에 관심이 있어서 중창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모임에도 계, 상호부조 같은 말이 통할 수 있을까. 중창단 모임지기는 책방에서 하는 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계셨다. 그것도 책방에서 진행하는 최고가의 모임에. 그 무렵 다가온 중창단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결혼비용을 아끼고자 축가 또한 셀프로 했으나 2절 내내 삑사리가 나서 아직도 종종 놀림 받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노래와 거리를 쌓아가던 나에게 중창단 활동은 마음의 빚과 상호부조의 필요에 따라 시작되었다.
모임은 한 달에 두 번 이뤄진다. 본격적인 노래 연습에 앞서 발성부터 시작한다. 아에이오우 모모모모모 아아아아아 등 피아노 건반에 맞추어 소리를 내본다. 대게 조용히 책방에 앉아있는 나에게, 뱃속에서 소리를 끄집어내는 그 시간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껏 게워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허기짐과 후련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입단하고 두어 달이 되지 않았을 때, 데뷔무대의 기회가 주어졌다. 첫 번째 공연은 그림책서점에서 이뤄졌다. 그날은 모임지기의 솔로음반 발매기념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중창단은 게스트라고 할까. 코로나가 완화된 지난 가을, 경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인파로 북적였다. 공연은 그림책서점의 2호점에서 열렸는데, 많은 분이 1호점으로 착각하셨다. 2호점은 문 연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짐작해본다. 그날 1호점으로 향했던 분들은 개미지옥에 발을 헛디딘 개미처럼 복잡한 그곳을 제때 빠져나오지 못하셨다. 안타까운 전화들이 몇 차례 전해졌고, 시간에 따라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공연의 마지막은 아유파 중창단의 차례였다. 자리를 지키던 공연 관계자(아유파 멤버들)의 가족들도 쌀쌀한 가을바람에 시나브로 사라지고, 지윤씨와 로운이만 남았다. 아빠 노래하는 걸 구경 온 로운이는 리허설 할 때부터 잠들었기에, 청중은 지윤씨 딱 한 명이었다. 피아노 반주 선생님, 음향 조절 선생님, 네 명의 중창단이 단 한 사람을 위해 공연을 했다. 나는 노래를 하며 그 자리에 화장실이 엄청 급한 사람이 앉아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 괜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공연장소는 초등학교 학예회 자리였다. 당시 중창단 멤버는 총 5명이었는데, 나를 제외한 네 분의 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모참여의 시간이자 단원모집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학예회는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이었다. 아직 내 아이의 학예회에도 참여해보지 못했는데, 학부모의 위치에서 참여를 하게 됐다. “어, 책방 사장님이다!” 반가움으로 포장된 의아함의 인사를 몇 차례 받았지만, 가져온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글은 처음부터 들어오지 않았다. 책방사장이라 좋은 몇 가지 순간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때다. 어색한 자리에서 들어오지 않는 책을 보고만 있어도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럴싸한 순간들이 주어진다는 것. 공연을 마친 후 쫓기듯 가게로 돌아왔다.
매사 진지한 내게도 ‘힙함’이란 게 주어질 수 있을까. 그날이 강림하길 바라며 젊은 작가의 글을 찾아 읽는다. 이번에 나온 이슬아 작가의 신간에는 군부대로 북토크를 다녀온 이야기가 담겨있다. 음악 하는 동생과 함께 섭외되어 찾아간 북토크. 군복을 입은 300여명 앞에서 글쓰기 강의를 해야 하는 작가의 처지. 강연을 앞두고 담배를 피우다 동생이 했다는 “누나. 좆됐는데”라는 말이 그 암담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어찌어찌 1부 강의를 마치고, 2부 동생과 노래하는 시간. 그때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에 귀 기울이는 한 사람을 보았다고 한다. 그 모습 덕분에 남은 네 곡도 무사히 부르고 내려올 수 있었다고.
적룡부대의 나무판자 위에서 나는 용기가 잔뜩 꺾인 채로 서 있었지만, 사랑받지 않으며 용기를 잃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러면 오직 한 사람만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기에 취했을 때는 한 사람이라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지난주 글방의 즉흥 글쓰기 주제는 ‘불안’이었다. 나는 그때 이런 내용을 썼다. 끓는 물 안에 담긴 개구리처럼, 지금이 서서히 안도하며 죽어가는 상황은 아닐까 불안하다고. 변화하거나 떠나야할 때를 알지 못해 공간에 삼켜질 것 같아, 살아있는 화석이 될 것 같아 불안하다고. 글을 쓰며 진짜 불안한건 다른데 있다는 걸 깨닫는다. 관객이 없어도 노래를 다 마치고 내려오는 그 사람처럼, 원치 않는 관객 앞에서 준비한 이야기를 끝까지 마치는 그 사람처럼, 마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싶다. 단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싶다. 아니, 최선도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냥 하는 사람이고 싶다. 나의 불안은 요즘 내가 그런 사람과 거리가 멀어지는 데서 오는 것이겠지. 효율을 따져보고, 수입을 생각하고, 이득을 먼저 생각한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계산이 많아졌다. 그냥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다 중창단 활동을 하며 그냥 하는 순간들을 만나고 있다. 누군가 왜 중창단 활동을 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하는 거라고, 아니 그냥 하는 사람이고 싶어서라 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