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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란?
여수시문화관광해설사 박정희
1948년 10월19일 저녁.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제14연대 하사관 그룹은 제주도 파병을 반대하여 정부수립 2개월만의 이승만 정권을 당혹하게 하였다. 14연대 하사관이 주도한 봉기는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곧이어 전남동부지역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진압군이 즉각 투입되어 순천은 23일, 여수는 27일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14연대 봉기군과 남로당 등의 지방좌익세력은 부근의 산악지대인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군은 14연대 군인 봉기를 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광주에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군사 장비를 지원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정보 분야에서 국군의 지휘를 했다. 그 덕분에 여수탈환작전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국회는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우려와 강력한 반대를 뿌리치고 여순사건 뒤 한 달 보름 만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한편 군대와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사회적 영향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군은 한국전쟁을 거친 뒤에 가장 강력한 반공조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이후 장기군사독재 정권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여순 사건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아무런 재판도 없이 초등학교 운동장이나 해안 절벽, 산기슭에서 죽어갔다.
누가 죽였는지, 누가 죽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도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70여 년 동안 만 여명이나 되는 주검들이 야산에 유기되어 방치되어 왔다.
여순사건은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4연대 봉기군들이 들어왔을 때에는 우익인사와 경찰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고, 진압작전 때에는 협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원한 등으로 협력자를 지목하여 처형하는 바람에 지역사회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이후 나서면 다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진보적 사회운동의 싹은 잘려 버리고 말았다.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국가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여순사건과 이후의 한국전쟁은 남한사회가 반공국가로 작동하는 원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 만성리 형제묘, 학살지, 위령비
1948년 10월 26일 여수를 탈환한 진압군은 봉기군에 참여했던 사실을 심사하기 위한 본부를 서초등학교에 세우고, 여수 시민을 공설운동장, 진남관, 동초등학교, 서초등학교에 분산 수용했다. 봉기군으로 활동했다는 확실한 증거보다는 신발, 군용 물품 소지자를 비롯해 개인적인 감정까지 포함된 혐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였다.
마래터널 앞은 1948년 11월 초순, 현재의 중앙초등학교인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적극 가담자로 분류된 125명이 처음으로 집단 학살된 곳이다.
이들은 총살당한 뒤 5명씩 장작더미 위에 묶였으며, 그 위에 다시 장작더미를 올려 다섯 묶음의 5층을 만들었다.
시체와 장작더미 위에 벙커-C유를 붓고 불을 질러 3일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또한 시체와 기름이 타는 불쾌한 냄새는 몇 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다.
마치 제주 4.3사건의 유족들이 공동으로 마련했던 백조일손지묘(百組一孫之墓)를 연상하게 한다.
여순사건의 부역혐의자가 되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 졌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직접 학살 현장을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 한 후에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125명이라는 이야기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실태 조사 중 확인되었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불을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사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고 한다. 잡혀있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생사가 궁금하던 많은 가족들이 학살지와 가까운 산위에 숨어서 불타는 시신을 바라보았지만 서슬 퍼런 군인들이 지미는 현장을 애끓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 부역자 색출
1948년 여순사건 때 여수 지역의 진압 작전을 이끈 것은 백선엽, 김백일, 박기병, 백인엽 등 주로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만주국에서 익힌 임진격살(臨陣擊殺)( 군인과 경찰의 재량으로 적대하는 세력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여수 진압 작전에서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만주군 출신들은 시민들을 상대로 임진격살이라는 즉결 처분을 실시했으며, 필요한 증거는 혐의로 충분했다.
1948년 10월 26일, 진압군은 서초등학교에 본부를 세우고, 시민들을 동정의 공설 운동장, 진남관, 동초등학교와 지금의 중앙초등학교인 종산초등학교 5곳으로 모았다.
학교 정문에는 담을 높게 쌓아올려 시내 쪽을 향해 중기관총을 걸어 놓았고, 운동장 주위로 무장한 군인들이 삥 둘러서서 삼엄한 경계를 폈기 때문에 끌려 온 사람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진압군은 먼저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담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을 학교 건물 뒤편 등에 마련된 즉결 처분장에서 개머리판, 참나무 몽둥이, 자전거 체인으로 죽이거나 총살했다.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을 떨쳤던 김종원은 여러 차례 시도했던 상륙 작전 실패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중앙초등학교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혐의자를 즉결 참수했다.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 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 되었고, 이로 인해 시내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4연대가 여수를 장악했던 때에는 인민위원회가 이른바 ’반동분자’로 간주된 경찰관, 우익 인사, 우익 청년단체원들을 지목하여 처벌했다. 이에 따라 처벌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일반 시민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압군은 전 시민을 혐의자로 의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여순 봉기에 대해 군인과 경찰은 진압작전 중인 경우, 탈출 또는 반항의 위험이 있다고 간주된 때에는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구금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을 즉결 처형했다. 군법회의는 재판의 형식을 띠었지만,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다.
한 증언에 따르면 지금의 중앙초등학교인 종산국민학교에서 법무관 4명이 재판을 했는데, 혐의자가 한 명씩 법무관 앞에 나와 각각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법무관 옆에는 경찰이 서 있다가, 혐의자가 앞에 가면 이름을 확인하고, 대충 조사한 다음 바로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재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법무관을 만나는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곤 했다.
혐의자 체포부터 군법재판까지의 과정을 책임지고 있던 부대는 군기대였지만, 그 중에서도 제2여단 군기대가 가장 광범한 활동을 했다. 대전에 본부를 둔 제2여단 군기대는 여순봉기 협력자 3천 여 명을 압송하여 대전 형무소에 감금시키고 취조를 진행했고, 11월 30일 경 대전형무소에서 취조가 끝난 3백여 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사이에 3천 명을 취조한 제2여단 군기대의 총원은 15명에 불과 했다. 산술적으로 보더라도, 한 명의 군기대원이 쉬지 않고 하루에 20명씩의 혐의자를 취조해야만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주한 미군사고문단 보고서는 한국군 장교들이 오전에 60~70건을 판결하고, 오후에는 처형을 감독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연대장이 임명한 군인들로 구성된 군법회의는 되도록 사형을 선고하려고 노력했다. 시일이 지날수록 처형의 방식도 변해 갔는데, 처음에는 사형 집행이 총살형으로 이루어졌지만, 탄약이 부족할 때에는 죽창이 사용되었다. 사형 집행이 계속 반복되어 이루어지면서, 사형에 임하는 병사들의 감각도 무디어져 갔다. 여러 번 죽창으로 찌르기를 반복한 병사들은 지쳐갔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제비뽑기를 하여 줄일 사람을 선택했다고 한다. 학살 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하나의 놀이로 전락했던 것이다.
수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온 협력자 색출 과정은 어떤 이의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시민들은 도저히 저항 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손가락 총으로 상징되는 협력자 색출로 형성된 공포와 죽음 뒤에는 지역 공동체 성원들 간에 불신과 증오가 내면화되었다.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 또는 죽어야 한다.”라는 인식 하에 실시된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은 작게는 여수, 순천이라는 지역사회를 완전히 찢어 놓았다. 여순사건에 대해 군인과 경찰은 진압작전 중인 경우, 탈출 또는 반항의 위험이 있다고 간주된 때에는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구금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을 즉결 처형했다. 군법회의는 재판의 형식을 띠었지만,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 서국민학교(현서초등학교) 부역자 색출과 손가락 총
1948년 10월 26일 여수를 탈환한 진압군은 기관총을 마구 쏘아대며, 남아있던 봉기군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 시내에서 벌어진 진압 작전은 집집을 샅샅이 훑어 나가면서 이 잡듯이 뒤지는 철저한 소탕 작전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던 좌익 저항 세력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시내로 압축해 들어온 진압군은 집집마다 들이닥쳐 느닷없이 방문을 덜컥 열어젖히면서 ‘손 들엇’하고는 짤막한 외침소리와 함께 싸늘한 총구를 가슴에 들이댔다. 집안에 있으면 봉기군으로 여겨 무조건 쏴버린다고 경고하는 주민들을 집밖으로 내몰았다. 진압군은 봉기군으로 의심되거나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사살했다. 나이 어린 한 학생의 손목을 잡고 냄새를 맡은 진압 군인은 화약 냄새가 난다며 끌고가 죽이기도 했다.
진압군과 경찰은 시민들을 서초등학교, 진남관, 동정공설운동장, 동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불러 모아 협력자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인과 부녀자들을 운동장 모퉁이로 가게 한 뒤, 20~40대 남자들에게는 옷을 벗고 팬티만 입게 했다.
협력자를 지목하는 일은 반란에서 살아남은 그 지역의 경찰, 우익인사, 우익단체 청년들이 맡았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 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인 흰색 지까다비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봉기군으로 간주되었다. 흰 고무신은 지방 좌익세력에게 처형당한 우익 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가 이를 배급했기 때문이었다.
또 국방경비대가 입고 있던 군용 표시가 있는 속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혐의 대상이었다. 진압된 뒤 겉옷을 버릴 수 있지만 속옷은 갈아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 이 기준들을 원래 14연대 봉기군을 색출하기 위한 기준이었지만, 진압군은 이런 외모의 사람들 모두를 봉기군 협력자로 간주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외모나 다른 사람의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 강요된 자백 등의 기준에 의해 심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당시 인민위원회에 출입했던 사람이나 밥을 얻어먹으러 좌익을 따라다닌 사람 등 14연대 봉기 군인이나 좌익과 인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혐의를 받았다. 당시 ‘호박잎 하나라도 반란군에 준 사람’은 모두 혐의자로 몰렸다. 결국 진압군의 혐의에서 벗어나려면 국군이 올 때까지 집 안에 완전히 숨어 있어야만 했다. 빨갱이로 의심받는 시민과 학생들에겐 관용이란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한 학생이거나 군인들에게 밥 한 끼 해주거나, 봉기군을 숨겨주거나 아니면 봉기군이 남기고 간 소지품이나 흔적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봉기군에 협조한 사람으로 찍혀 억울하게 죽어갔다. 진압군과 그 후 진주한 경찰대는 여수시민 대다수가 ‘빨갱이’로 봉기에 참가한 것이라고 속단하면서 ‘최대의 증오와 적개심’으로 시민을 상대했던 것이다.
여순사건의 진압 작전 과정에서 엄청난 재산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에 대한 총괄적인 통계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과연 몇 명이나 희생을 당했는지에 대한 통계도 제각각이었다. 현재 인명과 재산피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작성한 몇 가지 통계에 불과하다.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1997년도부터 2003년까지 여수 지역과 옛 승주군이었던 순천시 외곽 지역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희생자 수를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여수 지역에서 희생된 사람은 총 884명이다. 이 가운데 봉기군이나 지방 좌익 세력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155명이고, 진압군과 경찰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531명이며, 행방불명 157명 등이다. 우익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은 전체 희생자 가운데 총 77%이며,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23%이다. 우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좌익에 의한 희생자보다 약 3배가 넘는다.
또한 희생자 대부분은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소년과 청장년층이었다. 여수지역에서는 이 연령층이 전체 희생자의 96%를 차지하며, 순천 외곽 지역의 경우에는 84%에 이른다.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자가 젊은 층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순사건의 진압 과정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원 대로우는 그의 보고서에서 진압군의 주요한 목표는 ‘약탈’과 ‘강간’이었으며, ‘의심할 것도 없이 이 과정은 가장 난폭한 꿈이 이루어지듯이 진행’되었다고 적었다.
◆ 잉구부(왼구부)전투
연등동 하구바구에 못 미쳐 지금의 소방서 자리는 길이 종고산 기슭으로 굽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왼구부’ 또는 ‘잉구부’라고 하였다. 여순 사건이 발생하자 1948년 10월 24일, 여수 탈환 작전을 시도한 진압군과 봉기군이 처음으로 접전을 펼친 곳이었기 때문에 이를 ‘잉구부 전투’라고 한다.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 송호성 준장은 10월 24일 오후 3시, 진압 작전의 선두에 나섰다. 공격 부대는 부연대장 송석하가 지휘하는 3연대 1개 대대와 장갑차 부대였고, 제5연대 병력을 비롯한 해안경비대 함정들이 여수만을 포위하고 있었다.
광복군 출신으로 독립 전쟁에 참여했던 송호성은 봉기군을 설득하기 위해 확성기로 봉기군과 청년에게 호소했으나 대화가 쉽지 않았다.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적게하여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송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 애국 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울면서 반란 장병들에게 호소했다. 이에 대해 반란군은 “선생 벌써 때는 늦었습니다. 우리들은 죽음으로써 이승만의 인민 학살에 반항했습니다.”라고 울면서 총을 쏘았다. 송호성은 이 선무 공작으로 목이 쉬어 벙어리가 되었고, 귀는 총성으로 귀머거리가 되어, 실의에 빠진 채 반 죽은 사람이 되어 보람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송호성이 여수의 입구인 미평면 잉구부에 이르자 이 일대에 매복하고 있던 봉기군이 기습함으로써 송호성의 고막이 찢어지고, 종군 기자로 참가했던 AP통신의 크린튼이 죽었다.
◆ 중앙동 인민대회와 장소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이 지역의 좌익 세력은 군인들의 무장력을 든든한 바람막이로 삼고, 하루 만에 ‘인민위원회’를 세운 다음 기본적인 행정을 펼쳐 나갔다.
지방 좌익 세력이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친일파 처단과 식량 배급 등의 행정, 즉 ‘인민행정’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이후부터, 멀리는 일제 시기부터 단련된 사회 운동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순 사건에 합류했던 여수 지역의 좌익 인물들은 대부분 일제 시대부터 독서회나 노동조합 또는 조선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독서회나 조선 공산당 활동을 통해 좌파 이론을 흡수했고,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서 대중 운동의 경험을 쌓았다.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여수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되었지만, 어기서 활동했던 인물들은 여순 사건 때 다시 인민위원회를 재건했다. 여순사건 직후 재건되었던 여수인민위원회 의장단 다섯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이었던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은 해방 직후의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14연대는 여수를 점령한 뒤 제일 먼저 읍사무소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아침부터 여수의 도심지인 중앙동 근처에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성명서’, ‘여수 인민위원회 성명서’등과 인민대회를 알리는 벽보가 붙었고, ‘미군 철수’,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도 나붙었다.
인민위원회 의장단에는 이용기, 우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5명이 뽑혔고, 의장에는 이용기, 보안서장에는 유목윤이 선출되었다. 여수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이용기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여섯 항목의 정책을 발표했다.
첫째, 친일파 모리 간상배를 비롯하여 이승만 도당들이 단선 단정을 추진하는데 앞장섰던 경찰, 서북청년회, 한민당,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을 반동 단체로 규정하고 악질적인 간부들을 징치하되 반드시 보안서의 엄정한 조사를 거쳐 사형, 징역, 취체, 석방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여 처리할 것입니다.
둘째, 친일파, 모리 간상배들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은행예금을 동결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 할 것입니다.
셋째, 적산 가옥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가 관권을 이용하여 억지로 빼앗은 집들을 재조사해서 정당한 연고자에게 되돌려 줄 것입니다.
넷째, 매판 자본가들이 세운 사업장의 운영권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다섯째, 식량영단에 문을 열어 굶주리는 우리 인민 대중에게 쌀을 배급해 줄 것입니다.
여섯째,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무산 대중에게도 은행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인민위원회는 위이 여섯 가지 정책에 따라 행정을 펼쳤고, 14연대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해방군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군인이 여수 시내로 나가면 주변에 있는 상인들과 시민들은 일어나서 환영했다.
순천에서도 14연대 군인들이 시내를 점령한 10월 20일 밤, 여맹과 민청이 지하에서 나와 간판을 걸었고 인민위원회도 재건되었다. 순천에서는 이날 밤, 인민군 사령부와 순천군 내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표로 순천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여수와 순천에 만들어진 인민위원회는 기본적으로 해방 직후 등장했던 지방인민위원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북한에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 남북 분단정권이 이미 기정사실로 된 상황에서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대중 봉기는 남한 정권을 완전히 부정했다.
인민위원회는 대한민국의 법령을 인정하고 않았고, 이들이 내세운 혁명 과업과 그 활동은 이승만 정부와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이었다. 봉기 대중에게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 모리 간상배들이 추진한 단독정부였고, 은행 예금은 이들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것에 불과했다. 많은 경찰들이 사복을 입고 도망치거나 붙잡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여수의 유명한 자본가였던 김영준과 우익 청년단장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 마래터널(등록문화재 제116호)
마래터널은 1926년 말굽형식의 시공되어 현재까지 차량 통행용으로 이용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자연 암반 터널이다. 자연 암반을 깎아 1차로 만들었으며, 식민지 시대 일본의 군사용 도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총연장 640m, 폭 4.5m, 높이 4.5m로 중간 다섯 곳에 여유 공간을 두어 차량이 서로 피하여 운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국내 유일의 자연 암반 터널이라는 점에서 2004년 12월 31일 국가 지정 등록 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현재 국도 17호선 우회도로 건설에 따라 마래터널의 도로로서 기능이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마래터널의 활용 방안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마래터널 동쪽에는 경상남도 하동과 광양만, 남쪽의 여수해만과 경상남도 남해, 오동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경관과 검은 모래로 잘 알려진 만성리 해수욕장, 신덕, 모사금 해수욕장 및 여수국가산업단지가 분포하고 있다.
마래터널을 비롯한 전라선 개통 과정이 식민지시대 함경도와 평안도를 비롯한 중국인 노동자까지 동원된 여수 지역의 근대사이며, 10·19 여순 사건 당시 민간인 학살지로서 현대사까지 담고 있다.
특히 10·19 여순 사건과 관련된 유적지가 마래터널을 중심으로 만성리 학살지, 형제묘, 애기섬, 오동도 등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개최지와의 접근성 등 다양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수 근·현대사 박물관 건립을 제안할 수 있다.
2007년부터 정부에서는 1도 1국립박물관과 2011년까지 인구 9만 명당 1공립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총 공사비의 30%를 지원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 정책의 목표는 박물관이 지식기반사회의 도래, 세계화의 심화라는 환경변화 등을 흡수할 수 있는 문화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 박물관에 비해 21세기 박물관이 지향해야 할 모습은
첫째, ‘미래와 세계로 열린 박물관’이다. 20세기 박물관이 전통의 보존을 위해 ‘기억의 축척’에 주안점을 두어 왔다면, 21세기 박물관은 지식기반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세계 속에 한국의 이미지를 심는 ‘미래 창조’ 기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둘째,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박물관’이다. 기존의 박물관은 ‘유물’을 중심으로 그것의 보존과 전시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21세기 박물관은 ‘체험’을 중심으로 그것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전시, 교육, 문화행사 등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이활발한 기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셋째, ‘재미있고 즐거운 박물관’이다. 20세기 박물관이 ‘계몽’에 중점을 두다보니 자칫 지루하여 흥미를 유발할 수 없었다면, 21세기 박물관은 교육과 오락이 결합된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를 제공함으로써 즐겁게 배울 수 있는 기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마래 1터널은 매표소나 매점으로,
마래 2터널은 여수동학농민관, 마래터널과 전라선 개척관, 휴게 공간, 여수 항일운동관, 10·19여순사건관, 여순사건 위령탑 또는 상생·화합의 전망대 등으로,
마래터널을 근·현대사 박물관으로 만들 경우, 여수의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한 항일 운동, 전라선 개척관, 여수 항일 운동관, 10·19 여순사건관, 여순사건 위령탑과 상생·화합의 전망대 등의 특성을 반영한다면 마래 제2터널을 여수시 근·현대 박물관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새로운 도로의 개설과 여수역의 이전에 따른 기능 저하를 막고,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시설과 접근성을 높일 수 있으며, 천연 암반 터널 자체를 박물관으로 활용함으로써 다른 나라와 지역의 박물관과 차별화할 수 있을 것이다.
◆ 신월동 한화 공장 14연대 주둔지 터(현 한화 대피소 포함)
제14연대는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몇 일 앞둔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 창설되었다. 신월리는 일제 말기에 일본 해군의 항공기지가 있던 곳이다. 여수 반도 남쪽 구봉산 허리와 바다를 끼고 도는 외길 안쪽으로 미군은 이곳을 ‘앤더슨 기지’라는 이름을 짓고, 14연대의 주둔지로 사용했다.
14연대원으로는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김지회 홍순석 등 좌익계 장교들과 지창수(池昌洙)등의 하사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14연대에 창설에 투입된 기간 병사들은 광주에 주둔한 4연대로부터 차출되었기 때문에 이 병력에는 여순 봉기를 주도한 인물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또한 14연대가 4연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둥 부대는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어서, 14연대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 4연대가 합류하기도 했다.
제4연대, 14연대는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자주 발생했는데. 국방경비대는 무기 지급, 계급장, 복장, 급식 문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찰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있었고, 처음에는 경찰 예비대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대 간부 대부분은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이어서 군 우위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경찰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가 겹쳐져 장교뿐만 아니라 사병들도 경찰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에 경찰 측에서는 경비대를 경찰 조직의 하부 기관쯤으로 보아 무시했고, 사상적으로는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했다. 한편, 국방경비대 사병들은 과거 ‘일제의 앞잡이’로서 활동했던 경찰들이 높은 대우를 받았으며 자신들을 멸시하는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여순 봉기의 주동자였던 지창수는 부대원들에게 “경찰들이 쳐들어온다. 응징하러 가자.”라고 말했고, 이런 외침에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동조했다. ‘친일파’ 경찰을 타도해야 한다는 슬로건은 사병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4연대는 여수와 순천에 진입하여 가장 먼저 경찰관과 우익 인사를 처단했다.
한편 남로당은 군대에 좌익세력을 잠입시켜 장교에 대한 공작은 중앙당에서, 사병은 각 도당에서 맡았다. 장교 선발과 교육 배치 등의 모든 인사권은 중앙 집권적으로 일원화되고 있었고, 장교들은 근무지 이동이 빈발했기 때문에 지방 당에서는 장교에 대한 공작을 할 수 없었다.
14연대가 창설되었을 때, 광주 4연대에서 파견된 70명의 기간요원들 가운데에는 정보기관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하사관들과 사병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14연대 하사관 그룹 중에서 지창수, 정낙현, 최철기, 김근배, 김정길 등은 남로당과 연결된 사람들었다.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지 못했지만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
장교 그룹에서는 김지회, 홍순석 등이 대표적이었고, 이 밖에도 많은 장교가 중앙당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하사관·사병 그룹과는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장교 그룹 가운데 홍순석은 지창수에게 포섭되어 장교 중에는 유일하게 14연대 당부에 소속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14연대의 조직 책임자는 지창수였으며, 14연대의 당 조직(당부)은 도당과 연결을 갖고 있었으므로 군당과 같은 수준의 단위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주둔지인 여수군당과는 횡적인 연관을 전혀 갖지 못했고, 오직 도당과의 연락선만을 갖고 있었다.
지창수, 홍순석, 정낙현, 김영만, 이영회 등 14연대의 세포 책임자들은 연대 내에서 계속 모임을 갖고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의 필요성 등 일반적인 정치 정세와 사업 방향을 토의하곤 했다. 홍순석 중위는 순천에 파견된 2개 중대를 지휘하는 선임 장교였고, 지창수 상사는 정낙현과 함께 4연대 1기생 출신이었다.
김지회의 경우는 중앙당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원이라는 것을 다른 남로당 세포들이 전혀 알지 못했지만, 4연대에 근무했을 때부터 진보적인 행동을 간간히 표출했기 때문에 남로당 계열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4·3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 작전을 위한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0월 초순에 다시 시작된 유격대의 공격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에는 제주도의 9연대뿐만 아니라 6연대 1개 대대, 부산 5연대 1개 대대와 해군함정이 증원될 예정이었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선포했다. 중산간 마을에 대해 초토화 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공개적인 발표였다.
10월 19일 아침 7시, 14연대에는 육군 본부로부터 “LST(전차양류정)는 10월19일 20:00시에 출항하라. 제주경비사령관 김상겸 대령에게 반드시 통보할 것”이라는 내용의 일반 전보가 여수우체국을 거쳐 연대장에게 전달되었다. 당시에는 육군 본부와 연대 사이에 직접 무선 통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 전달되어야 할 작전 명령이 우체국 일반 전보로 전달된 것이다. 이제 14연대는 제주도민을 상대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처지에 빠졌다.
지창수를 중심으로 하는 하사관 그룹은 예광탄 3발을 신호로 봉기를 시작으로 하고, 예광탄이 오르면 즉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기로 했다. 14연대 무기고에는 제주도 진압을 위해 지급받은 미군의 신식 무기 M-1 소총과 60㎜ 박격포, 탄약과 폭탄이 보관되어 있어 이 무기들은 장병들과 여수, 순천 시민들을 무장시키는데 사용하기로 했다.
제주도 출병을 위한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던 1948년 10월 19일 19시 50분, 비상 나팔소리에 따라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모이자 지창수는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지창수가 연설을 마치자, 미리 봉기 계획을 논의했던 남로당 세포원들과 대부분의 사병들은 “옳소.”하고 찬성을 표시했고, 이를 반대한 하사관 3명은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 당했으며, 봉기한 사병들은 제지하려던 장교들은 사살되거나 피신해야만 했다.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뒤, 여수인민위원회는 10월 24일자로 [여수인민보]를 발간했다. 이 신문에는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작성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서가 있다. 이 글은 14연대 군인들이 봉기한 이유를 그들 스스로가 가장 명확히 표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문헌이다. 따라서 이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봉기 세력의 생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조선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 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 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 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게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 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 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 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의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분단 정권을 거부하고 독립된 통일조국을 위해 투쟁에 나선 제주도민을 줄이러 가는 파병을 거부한다는 주장은 군인 봉기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대한민국 국방군은 침공하는 외국 군대에 싸우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지, 같은 민족인 농민과 청년, 부녀들에게 총을 쏘고, 죽이기 위해 국방군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출병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간주했다.
여순 봉기 뒤에 탈출한 박승훈 연대장조차 기자회견에서 14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제주도 출병을 희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제주도를 전남과 같은 지역권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서도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는 주요한 정서 중의 하나였다.
성명서에는 쌀 수집이나 토지개혁 같은 사회 경제적 요구는 나타나고 있지 않은 반면, 강한 반미· 반제국주의 의식을 표출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병사위원회의 성명서만으로 볼 때,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는 전반적인 사회 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제주도 파병을 반대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연대 주력은 19일 새벽에 이미 여수를 점령하고, 오전 9시 30분 경 순천역에 도착했다. 역에 있던 순천 경찰은 이미 도망간 다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다. 여수에서 온 14연대 병력이 순천역에 도착하자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2개 중대가 즉시 봉기군에 합류했다.
광주에 있는 제5여단 사령부는 10월 20일 새벽 1시 30분 경 전남경찰국으로부터 여수 봉기의 소식을 연락 받았다. 광주에 남아 있던 최고위급 장교는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이었다. 그는 즉각 총사령부와 미군 고문관에 보고하는 한편, 장병들에게 비상소집을 발령했다. 4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한 4연대 2중대의 중대장은 순천 낙안 출신의 김동희였다. 그는 같은 국방경비대 군인끼리 싸운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봉기군과 순천 경찰 간에 전투가 벌어지자 경찰의 배후를 공격했다. 진압하러 왔던 4연대 2중대가 오히려 봉기에 합류함으로써 봉기군은 원군을 얻었고, 그 결과 순천의 기마대와 인근 지역에서 증원 나왔던 경찰은 봉기군의 군사력 앞에 맥없이 무너져 오후 3시 경에는 순천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여수를 점령한지 몇 시간 만에 순천까지 장악한 14연대 봉기군은 밤 사이에 세 그룹으로 군대를 재편했다. 3개 편대 중 첫 번째 부대는 서쪽 벌교 방면, 두 번째 부대는 북쪽의 학구 방면, 세 번째 부대는 동쪽 광양 방면으로 진출했다.
봉기가 일어나자 남로당 전남도당에서는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14연대의 여수 봉기는 당시 남로당이 취하고 있던 투쟁 방침과는 어긋나는 점이 많았지만, 도당 지도부는 이미 봉기가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봉기가 당의 전략 방침에 따라 계획성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봉기의 발발과 확산 과정으로 볼 때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남도당은 여수봉기를 일단 ‘당의 거사’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 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참여함으로써 광범한 대중 봉기로 발전하였다. 남로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세워 식량 배급과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동 세력 등을 처단함으로써 기초적인 행정을 시작했고, 학생들은 총을 잡고 봉기군을 원조했으며, 여학생들과 여성 조직원들은 봉기군에게 밥을 해주는 등의 일을 도왔다. 남한의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대중 봉기는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여순 봉기는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 맞는 정치적 위기였지만, 전남 동부 지역에만 머물렀고 전국적으로 파급되지는 못하였다.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을 몇 일 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봉기군과 진압군의 반복되는 점령과 재점령의 순환에 놓여 있거나 한 차례의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났다.
정부는 38선 경계 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를 진압군으로 편성했다.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군수, 인사를 통제하면서 진압 작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진압 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군사고문단과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진압 작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 진압 작전은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 경력이 있었던 김백일, 백선엽 등에 의해 주도 되었다. 공식적인 지휘 체계도 흔들려 진압 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편의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였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 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 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법도 제정되기 전에 실시된 계엄령은 반란 지역의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할 수 있게 만든 ‘살인 면허장’이었다. 그 결과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보다 진압군이 점령했을 때, 민간인 희생자가 몇 배나 더 발생하였다.
해방 전후의 한국 현대사는 서로 체제가 다른 분단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또한 연구자에 따라 매우 다르다. 여순 사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의 이승만 정부와 언론 기관 그리고 국방부에서 간행한 공식 간행물 등은 여순사건을 여수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일으킨 군내의 쿠테타’ 또는 남로당 중앙이나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으며, 다른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여순사건에서는 좌익에 의한 경찰, 우익 인사 학살뿐만 아니라,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이러한 희생의 결과적 책임을 모두 봉기했던 군인과 지방 좌익세력들에게 떠넘겼다.
이런 측면에서 좌익의 폭력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평가는 편향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은 역사적 사실 규명이 미흡한 채, 편향적 해석만이 생산되고 유통된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향이 큰 사건일수록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당시 이승만정권이 여순 사건에 대해 가졌던 위기감과 대응 방식이 이후 강력한 반공 노선 아래에서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으로 닥친 위기를 진압 작전으로 극복한 뒤, 반공 사회 구축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반공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여순 사건은 반공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고, 현재까지도 여순 사건에 대한 지식과 이미지는 당시에 형성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좌익 세력의 폭력과 비인간성이 강조되었고 심지어 좌익세력은 짐승이나 악마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진압 작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 우익 단체원들은 공산주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애국자로 칭송되었고, 작전이 끝난 다음에는 훈장이 수여되었다. 반공이 애국이며, 반공 이외의 것은 체제에 대한 위협이자 매국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 보도연맹 사건과 애기섬 학살
1949년 6월 5일부터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성향 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는데, 여수의 보도연맹들은 거의가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보도연맹은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으로,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연맹으로 불렸다. 1949년 말까지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30만 명에 달했으며, 결성목적은 좌익세력을 통제, 회유하려는 것이었다. 활동목표는 대한민국 정부의 절대지지, 북한괴뢰정권 절대 반대와 타도, 공산주의사상 배격, 분쇄 등의 강령으로 요약된다. 강령에 따라 보도연맹 원들은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여 밀고하고 자수를 권유하는 등 반공활동을 하였다. 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초기, 서울을 제외한 전국, 특히 이천, 안성, 평택이남 지역에서는 정부, 경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 보도연맹원에 대한 무차별 검속 및 집단총살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의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났던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여수의 경우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여수를 비롯한 시 외곽지역인 율촌, 소라, 삼일, 쌍봉의 보도연맹원들을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가 총살, 수장하였으며 남면, 화정면, 삼산면의 섬 지역은 주변 무인도나 바다에서 처형 후 수장하였다. 당시 특무대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애기섬 희생자는 약 120명 이내로 추정된다.
◆ 손양원목사와 둔덕동 순교지
여수 신풍 애양원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손양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여 그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19년 서울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0년 일본 쓰가모 중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으며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부산 감만동 나환자 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러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1939년 8월 22일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으나 1940년 9월 25일 수요 예배 후 일본이 강요하던 신사참배 거부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광주 형무소와 경성 구치소, 청주보호관찰소 등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여 애양원 교회로 돌아와 재활 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사회가 혼란하던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 때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잃었으나, 아들을 죽인 학생을 양아들로 삼아 사랑을 실천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여수가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인 1950년 9월 13일 인민군에 의해 잡혔다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지금의 둔덕동 새중앙교회 바로 앞에 손양원목사 순교지임을 알리는 비가 있고
옆에는 사랑의 성자 손양원 목사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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