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다와 시
남 진 원
나는 2000년에 강릉시 여성문화센터 문예창작 강의를 맡았다. 그때는 강원도립대학에 대학 강의를 나갈 때였다. 돌아보니, 내 평생의 일은 교육이었다. 21살(만19살)에 초등교단에 나와 20여년, 그 이후 태성전문대학, 강릉영동대학, 강원도립대학에서 10여년의 대학 강의 생활, 강릉여성문화센터 및 강릉예총, 강릉평생교육정보관 등에서 25여년 문예창작 강좌를 하였으니 48여년의 星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2000년이 끝나갈 무렵 강릉여성문화센터 문예창작반 회원들과 의논하여 문학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한울림문학회」였다. 2001년에는 첫 작품집 [나뭇잎 만큼 열리는 숲의 말]이 탄생하였다.
그 이듬해인 2002년에는 시를 강의하면서 낭송에도 관심을 갖았다. 시에 대한 감동의 효과적인 방법은 시낭송이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나 좋아하는 시를 가지고 나와 읽거나 낭송한다면 얼마나 즐거움을 갖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03년 9월 경포 바닷가에 있는 상가를 다녀보았다. 마침 바닷가에 있는 한 카페가 마음에 들어 주인과 의논을 하여 성사가 되었다. 그 카페의 이름은 「참새를 실은 잠수함」이었다.
첫 낭송회는 10월 토요일 둘째주 7시에 하기로 정하였다. 나는 강릉의 시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며 시낭송에 나오라고 권유하는 데에 분주하였다. 그리고 낭송할 사람들의 시의 내용을 복사하여 가지고 나갔다. 이렇게 하여 바다시 낭송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 번째인 12월 낭송에는 시첩을 직접 만들었다. 모양은 볼 품이 없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매우 귀중한 자료인 것 같았다.
낭송시간은 2003년 12월 13일 오후 7시였다. 12월의 저녁 7시면 매우 밤이 깊은 한밤중이었는데 …. 그때는 내 나이가 51살이었으니까 한창 젊은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3회 낭송이 12월이니 자연히 송년낭송 모임이 되었다. 그래서 타이틀도 「송년 바다시 낭송회」였다.
인사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첩에는 이런 내용만 있지, 누구의 글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나는 내가 당연히 쓴 글로 알았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니 내가 쓴 글이 아니었다. ‘쥐락펴락 하시면서’이나 ‘슴벅거리며’ 등의 고향맛이 나는 글귀를 나는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권순인씨가 쓴 글을 내가 옮겨 적은 것인 것 같았다.
- 인사말의 글 -
「바다시 낭송회는 주인이 누구시냐고요?
참석하시는 모든 이가 그날의 주인이 됩니다.
낭송을 원하는 작품을 들고 매월 둘째주 토요일 7시 언제나 그 자리로 오세요.
시를 한 편 들고 오셔서 주인이 되십시오.
당신의 고운 목소리로 외는 시는,
조용히 꽃이 되어 가슴에 내릴 것입니다.
쥐락펴락 하시면서 엉구렁치듯 매달려도 보시고
슴벅거리며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응시하고 있는 님들을 향해
진한 향기도 건네십시오.」
시첩의 제목도 『벽에 걸린 그녀』라는 글귀였다. 단번에 들어오는 강렬한 느낌이 있다. 모던(modem)한 현대적 감각의 구절이다. 이 구절은 내가 채정미 시인의 시낭송 제목인 <벽에 걸린 그녀>를 뽑아 붙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역시 이 글귀에서도 보듯이 채정미 시인은 날카롭고 참신한 시어로 현대적 감각의 동시를 써서 이제는 중견작가로 한국아동문단에 자리를 잡았다.
축하의 말도 있었다. 영동수필문학회 회장을 맡은 박종철 선생께서 오셔서 축하의 말을 해주셨다. 그뿐이 아니었다. 초대낭송가의 시낭송도 있었다. 또 내가 출강하는 학생도 나와서 시낭송을 하였다.
시첩에는 2003년 11월 낭송했던 2회 시낭송 참가기도 실렸다. 시낭송 참가기는 제목이 ‘훈훈한 사랑’이었다. 나도 2회 감상기를 썼는데 ‘훈훈한 사랑’이었다.
훈훈한 사랑
최유진
훈훈한 사랑이
옹기종기 모여
내미는 손 글 솜씨는
열린 가슴에 춤을 춘다
알싸한 분위기
목줄기 적시는 한잔의
커피 향에 취해
살가운 시선
마주 앉아
현악기의 선율을 타고
들려오는 듯
눈빛 한 줌 미소를
바라보며
감춰진 가슴이 보이는데
그래도 제 멋에 겨워 한마음이 되어
한자락 오려낸
떨리는 그리움 심연의 꽃 피우며
훗날
귀뚜리 자장가 소리가 들리듯
추억의 한 페이지가
어디 쯤 망울져 있을까!
최유진 씨는 글을 처음 시작한 때였다. 그때 이미 이처럼 좋은 시를 쓴 걸, 이제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는 후에 원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도 글을 열심히 써서 문단에 등단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보니 내가 이런 글을 쓴 것 같지 않았다. 그 정도로 신기하였다.
제목은 (훈훈한 사랑)이었는데 처음 부분은 이랬다.
- 이번에도 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오붓한 시의 잔치를 벌렸다.
참새처럼 날아든 사람들의 얼굴 모습은 모두 상기되어 있었다. 신정숙 앵커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낭송은 1회 때보다 한결 성숙된 모습이었다. 낭송하는 사람들과의 짧은 대화도 격이 있어 좋았다. 그리고 많은 문인들이 참석하여 시 낭송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이하 줄임) -
이때에도 수필가 박종철 선생, 신정숙씨, 이미숙씨, 권순인 시인과 부인, 박성동 씨, 한경임 시인, 김지영 시인 등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성동씨는 마이크를 잡은 뒤에 말이 너무 길어서 사람들에게 민망스러웠다. 그 친구는 점술가로 시인이 아니지만 내가 친구로 참여시켰는데 마이크를 잡고는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곤 하였다. 나는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 친구의 말을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에도 이런 일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미숙씨도 그 후 원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지금은 대학원까지 다니고 시인으로, 시낭송가로 활동하고 있다. 가끔 강릉에 들릴 때면 전화가 와서 살아가는 사정을 들었던 것이다.
수필가 박종철 선생을 만난 것은 어느 식당에서였다. 그날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젊고 잘 생긴 40대 후반의 멋진 분이 나를 불러 앉혔다. 수필을 하는 박종철 선생이었다. 그 후 그분의 인품이 훌륭한 것을 알았다. 내가 강릉여성문화센터에서 문예 창작반을 그만 둘 때에 박종철 선생을 추천하여 그분이 그곳에서 수필 강좌를 열게 안내해 드렸다. 그 후로 많은 분들이 수필작가로 등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릉의 수필문학은 그 분에 의해 확장되고 발전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은 몸이 많이 불편하여 병원에서 보내고 계신다.
바다시 시첩 3집을 보다가 그곳에 발표한 임춘자씨의 작품을 대하였다. 정말 괄목상대라는 말을 할 정도로 놀라운 작품이었다.
겨울날
임춘자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는 날에도
창호지 한 장으로
엄동을 가리던 때가 있었다네
방구들이 뜨뜻해져오던 새벽녘이 정말 좋았지
이불 속에서 새끼 돼지들처럼 빠져나오면
벌건 화로가
방에 남아있던 찬 공기까지 후끈후끈 데워주었어
구유에는 김에 묻혀 소가 여물을 먹고
방안 두레반에선 아버지와 아들들이
방바닥에선 어머니와 딸들이
밥을 먹었어
노란 조밥에 시퍼런 무짠지를 척 걸쳐먹던
그 밥상이 새삼 그리워지는군
우리 속의 고구마처럼 갇혀
긴긴 겨울을 지내던
감껍질처럼 뽀얗게 분이 나는 게야
새순 틔울 씨감자로 남게 되는 게야
(제3회 바다시 낭송시첩 [벽에 걸린 그녀], p.24.)
1960년대와 70연대엔 설날을 전후한 1월 말경에는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곤 하였다. 밖에 나가 세수를 하고 문을 열면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었던 그 때, 어머니는 화로에 잉걸불을 담아 문안에 들어놓으셨다. 얼마 못가서 방안은 후끈후끈 하였다.
할머니는 일찌감치 부엌에 나와 가마솥에 옥수수 대궁을 썬 더미를 넣어 삶으셨다. 잠시 후엔 구유에 있는 황소가 김을 뿜으며 여물을 먹었다. 그때 쯤 동쪽 햇살이 부엌 문틈을 비집고 들어찼다.
둥그런 반 주위에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밥은 좁쌀을 섞은 노란 조밥이거나 감자와 보리쌀을 넣은 시커먼 보리밥 또는 메밀을 타개서 넣은 메밀밥이었다. 반찬은 시퍼런 무짠지와 시래기를 끓인 국과 배추 김치 등이 놓인 반찬이었지만 가족들은 맛난 아침을 먹었다.
할아버지 밥상은 맏손자인 나와 겸상을 하였고 둥근 반에는 아버지와 삼촌 동생들이 둘러앉았다.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들은 방바닥에 밥과 반찬을 놓고 먹거나 따로 어두운 도장방에서 먹곤 하였다. 지금 보면 성차별적인 밥상이라고 할지 모르나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문화였기에 아무도 그 자체에 불평이나 불만이 없었던 듯하다.
60년이 지난 세월이지만 그때의 일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얼마나 아름답고 그리웠던 시간이었던가. 시 한편이 상기시켜주는 정서의 힘이 이렇게 크게 행복을 안겨주고 있다.
그때 발표하고 낭송한 내 작품 ‘눈과 잉크 물’도 새롭고 낯설게 느껴졌다.
눈과 잉크 물
남진원
눈 오는 밤이면
꿈 하나에 말 하나 씩 매달고
눈을 맞았다. 사랑이었다.
그 날,
외투에 날아들던
회색빛 바람소리
그대 숨결.
내 사랑은
검정 잉크 물이다
이렇게 눈이 올 듯한 밤
이렇게 눈이 오는 밤
차창을 스치는 나무처럼
스며드는 기쁨이여
밤 12시
기적 소리 속에
눈물 이별 고독의
긴 입맞춤
눈오는 밤이면
내 사랑은 지금도
검정 잉크 물이다.
(2003. 12. 13. 제3회 바다시낭송집)
그간 시간도 많이 흘렀고 사람들도 물결처럼 흘러오고 흘러가기도 했다. 한 번 가면 돌아오기 어렵고 한 번 와도 내일에 대한 기약이 없는 게 세월이 아니던가. 꿈같은 인생사, 길재의 시조 한 수가 변치 않는 명시로 다가온다.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