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암재단 생활인 10인의 증언
“거리로 나선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김동림(47)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가 너무 듣기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워낙 몸이 약했어요. 학교 다닐 때도 몸이 약해서 차를 못 타서 아버지가 자전거로 데려다주셨어요. 그랬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심부름 다녀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때부터 집에만 있었는데, 2학년 때부터는 몸이 더 안 좋아져서 병원에 갔더니 뇌 위축증이라고 했어요. 뇌가 활동은 하는데 조금씩 굳어가는 병이래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이런 병에 걸렸었는데, 유전됐다고 하더라고요. 이 병은 한 대 걸러가지고 유전이 된데요.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 보고 책보고. 안 그러면 정말 무료하고, 계속 누워만 있으면 정말 죽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근데 집에서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니까 장애인들이 나와서 매스게임도 하고, 운동경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집에만 있지 말고 시설에 와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날 이후부터 어머니한테 시설을 알아봐 달라고 졸랐어요. 사실 저 때문에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하셨고 자주 싸우셨어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는 날이면 ‘저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면서 막 소리를 지르셨기도 했고, 어머니를 막 욕하시면서 때리기도 하셨고요. 해서 그때 어머니한테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막 울고 그랬어요. 빨리 죽으라는 얘기가 너무 듣기 싫었거든요. 그리고 그때 생각엔 시설에 가면 여러 사람도 만나고 밖에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한번 죽지 두 번 죽나요?
처음에 알아 본 곳은 삼육재활원이었는데, 제 나이가 많아서 거기엔 갈 수 없었고, 대신 석암에 오게 됐죠. 25살이었어요. 시설에 와보니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어요. 그때 제가 있었던 방은 5명이 생활했는데, 한분은 완전히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셨고, 한분은 지적 장애, 두 분은 생각은 하는데 움직이지는 못하셨고, 나머지 한분은 풍으로 오셨어요. 모두 50~60대셨어요. 밖에도 맘대로 나갈 수 없었어요. 사회적응 훈련이라고 해서 일 년에 한 두번 정도만 나갈 수 있었어요. 맨 날 방에만 누워있었죠. 텔레비전도 방마다 있는 게 아니고 휴게실 같은데 밖에 없었고요. 지적 장애인들에게 손지검을 하는 선생님들도 많았어요. 지적 장애인들은 대소변을 잘 못 가리잖아요. 그리고 화장실 가겠다는 말을 제때 못하니까 그냥 싸는 거죠. 그러면 목욕할 때 막 때리는 거예요. 하지만 부모님들은 몰랐어요. 부모님들이 오면 좋은 얘기만 하고, 지적 장애인들이 이르지도 못하니까. 또 우리가 알려주려고 해도 선생님들이 면담할 때 항상 같이 있으니까 말할 수가 없었던 거죠.
87년부터 석암에 있었으니, 예전부터 시설에 비리가 많다는 걸 알았지만 얘기를 못했어요. 텔레비전에서 장애수당 많이 올랐다는 뉴스는 분명 봤는데,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알고도 안주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말할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가 선생들한테 얘기하면 선생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듣고 있지 별다른 얘기를 안했거든요. 누구한테 얘기를 한다는 게 참 어렵고 두려웠어요.
한땐 원장님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근데 지금은 원장님이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 같아요. 이 사건 터지고 나서 한다는 말이 자기는 깨끗하다고 믿어달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어요. 앞으로 우리가 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나왔어요. 이미 이부일씨는 구속은 된 상태지만 시설을 민주화시켜달라고. 사실 지금도 선생님은 가지 말라고, 농성하러 다니고 자고 그러면 몸 상태가 더 굳어진다면서 말리세요. 하지만 내 몸 안 좋으면 전화하겠다고 그러고 나와요. 지금까지 죽어서 살아왔는데, 한번 죽지 두번 죽나요? 사실 시설에서 절대 살고 싶지 않아요. 갈 곳만 있으면, 주거지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나와 살고 싶어요.
하지만 여기는 자유가 있어요
내 꿈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 도와주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화장실도 조금만 잡아주면 갔다 오고 그래요. 어렸을 때도 사람들이 몸이 약해서 많이 도와줬고요. 그래서 생각한 게 나보다 못한 사람들 많이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건만 되면 전국 일주를 하고 싶어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전국을 일주한다는 게 쉽지 않겠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국 일주를 하는 사람들보니까 힘이 나고 내가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오십이 넘고 더 나이가 들어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전국일주 하면서 우리 가족들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4년 전에. 어머니가 심장이 안 좋다는 건 알았는데, 돌아가신 지는 몰랐어요. 근데 꿈에 어머니가 나오고 어머니랑 하도 연락이 안돼서 누나한테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이미 한달 전에 세상을 뜨셨다고 하더라고요. 임종도 못 지키고, 아직까지 화장해 유골 뿌린 곳에도 못 가봤어요. 아버지는 광주에서 보일러 일하시면서 혼자 사신다고 하는데, 일흔이 넘으셔서 귀도 잘 안 들리시고, 눈도 안 보이시고 그러신데요. 누나랑 남동생은 결혼해서 산다는데 못 본지 너무 오래됐어요. 지금은 아무도 연락처를 몰라요. 가족들이랑 찍은 사진도 하나 없고요. 기회가 되면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요.
살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비록 시청 앞에서 잠을 자고,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서명을 해달라고 말을 하다보면 입이 얼고 몸이 아파요. 하지만 여기엔 자유가 있어요. 반대로 시설은 따뜻하지만 나를 구속시켜요. 시설 밖으로 나오는 건 물론이고 심지언 방에서 어디가려고 나오는 것도 말해야 해요. 그래서 아무도 나를 터치하지 않고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지금, 이곳의 삶이 나에겐 가장 행복해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겐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윤석도(47)
어머니가 살아생전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어렸을 땐 꿈이 많았어요. 지금은 두 가지 꿈이 있어요. 우선 몸이 안 아팠으면 하는 거예요. 될 수 있는 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프면 안돼요. 한번 아프면 너무 오래가고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꿈은 자유롭게 혼자서 여행하는 거예요. 여행하면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좋은 데도 다니고 싶어요. 사실 나는 태어나서 47년 동안 거의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이랬으니까, 학교는 커녕 집문 밖에도 못 나가봤죠.
내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이예요. 4남 1녀의 막내고요. 아버지는 25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저 세상으로 가셨지요. 태어난 다음에 집 방에만 있고 나가지는 못했죠. 집이 구멍가게를 했는데, 손님이 와서 물건 사가면 돈 받아주고 가게 지키면서 아주 조금씩 용돈을 받았어요. 몸이 이렇게 됐으니까 친구도 거의 없었어요. 얘들은 저를 놀리기만 했죠. 병신이라고 그러고 ‘앉은뱅이, 앉은뱅이’라고 하면서 놀리고 쳐다보는데 정말 죽고만 싶었어요. 아버지도 제가 이러니까 술 먹고 들어오시면 어머니를 힘들게 한다고 싫은 소리를 많이 하셨고요. 그래도 그냥 이렇게 사나 싶었는데, 어머니가 연세가 드시면서 저 돌보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셨어요. 그러는 거 보면서 내가 시설에 오겠다고 했어요. 식구들은 못 가게 했는데 어머니 살아생전에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음 하는 마음에, 나도 나이 더 먹기 전에 오려고 한 거예요. 그때가 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으니까 저 28살 때였어요. 어머니는 저 여기 온 다음에 딱 한번 뵈었는데, 그 뒤 4~5년 후에 돌아가셨지요.
시설은 항상 이상한 일 투성이었어요
그렇게 온 곳이 석암베데스다 요양원이었어요. 시설에 와서 몇 개월은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친구 사귀는 것도 어려웠고요. 또 나한테는 별로 그러지 않았는데 지적 장애인들은 차별하고 그랬어요. 똥 싼다고 밥 조금씩 주고, 또 어떤 직원들을 때리기도 하고. 또 시설은 항상 이상한 일 투성이었어요. 손님들은 분명 왔다갔는데, 그 사람들이 가져온 먹을 것이나 후원품을 주지 않았거든요. 나중에야 알았는데, 후원품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바로 주지 않고 창고에 넣어두고 안 줬어요. 대신 유통기간 지난 과자랑, 빵을 줬어요, 라면도 그렇고. 그렇지만 8~9년 전에 새로운 원장님이 온 다음부터는 조금 바꿨어요. 새로 온 원장님은 인권을 존중해주겠다고 했어요. 대표적으로 반찬이 좋아졌어요. 예전에 반찬은 김치랑, 무말랭이랑 마을쫑이었는데, 김치는 아주 오래돼서 정말 먹을 수 없는 거였어요. 마을 쫑이랑 무말랭도 끊임없이 줘서 싫증나도록 먹었죠. 그런 반찬도 이후에는 세 가지에서 두 가지로 줄었고, 밥은 항상 설어 있었지요. 근데 새원장님 오고 나서는 반찬이 달라진 거예요.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어요. 해서 우리가 매일 감사 나오라고 했어요. 감사 뜬 날이나 손님 왔다간 날은 반찬이랑 밥이 아주 잘 나왔거든요. 요즘은 시청 앞에서 농성하고 있으니까 반찬이랑 밥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김치하나가 나와도 잘나오고, 고기는 질리게 줘요.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못 먹었는데. 지금이 이 시설오고 20년 동안 가장 괜찮은 식사가 나오고 있는데, 농성장에 나오느냐고 자주 먹진 못해요.
시설에서 살면서 끔찍한 경험도 했어요. 8~9년 전에 일인데, 그때는 1년에 한두 번 사회적응 훈련이라고 나가는 게 외출의 전부였어요. 마침 그해는 사회적응 훈련이라고 개울가로 소풍을 갔는데, 돈을 아끼려고 했는지 직원들도 거의 데려가지 않고 봉고차 한 대에 20명의 장애인들만 태워서 간 거예요. 그냥 막 집어넣은 거죠, 차안에. 거기에 마침 그날 비가 와서 개울이 불어가지고 난리가 났었어요. 모두 다 쓸려갈 뻔했고요.
그게 두려워서 안 싸울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시설이 민주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안에서도 터놓고 얘기할 수도 있고, 자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말도 못했어요. 원장이나 선생님한테 불만이 있어도 대화를 못했지요. 얘기를 하면 찍히니까, 그러면 대우가 나빠지고, 왕따를 당하니까. 원장이랑 선생님들이 얘기도 안 할려고 하고, 쳐다도 안보고, 그 사람을 시설에서 아주 왕따를 시켜요. 그렇게 은근히 차별을 해서 다시 그런 말 못하게 하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재활원으로 가래요, 요양원에 있지 말고 다른 시설로 옮긴다고 하는 거예요. 예전에 한 물리치료사가 지적 장애인을 신발로 막 때린 일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우리가 그러지 말라고 하니까 우리보고 여기 있지 말고 다른 재활원으로 가라고. 그래서 우리가 단합해서 집에 가겠다고 대들었어요. 시설에는 사람인원수당 지원금이 나오니까 차마 우리보고 집에 가라고는 못하더라고요.
시설 비리 문제 터지고 시청 앞에서 농성을 하니까 원장이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데요. 우리가 걱정된다고, 그러면서 시설에 오셔서 얘기 좀 하자고 했데요. 그 전화 받고 우리 형이 놀래서 전화를 했어요. 내가 말했죠. 좋아지기 위해서 한다고, 이사장과 원장이 많은 비리를 저지른 이중인격자고 앞에서는 잘해주는 척하고 우리 돈을 몰래 훔쳐가고 그런다고. 사실 나는 여기서 쫒겨나면 갈 곳이 없어요. 집도 없고, 가족들이랑 살 수도 없고요. 형이랑 누나들은 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고, 큰 형님은 63살이시니 나이도 있으시고. 그렇지만 그게 두려워서 안 싸울 수는 없잖아요. 내 권리를 찾기 위해서 해야 해요. 지금 문제가 해결되고 시설 비리가 없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자립생활을 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나가서 살 수가 없어요. 나도 시설에서 나와서 자유롭게 간섭 받지 않고 살고 싶지만 지금 정부에서 지원하는 활동보조 몇 시간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시설에서 살 수밖에 없어요.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이곳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터놓고 얘기하고 같이 놀았던 때예요. 선생님들하고 우리하고 같이 밥 먹고, 과자 먹고 얘기하고 그랬는데...... 남들에겐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우리는 지금 비리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데서 살아요.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고 존중해주지 않는 곳에서 살아요. 우리를 이용해서 돈을 더 훔쳐갈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랑 살았지요. 해서 우리에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놀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예전의 그때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때가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예요. 다시 그런 시간이 생겼음 좋겠어요.
“장애를 가진 아버지였기에 20년 간 모질게 인연을 끊었습니다”
김진수(59)
사고
서른 세 살이던 84년도에 결혼을 했어요. 부인이랑 사이에 두 딸이 있고요. 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적성에도 안 맞고, 월급이 빠듯해서 도저히 편치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현대 건설에 취직해서 85년 리비아에 갔다가 87년도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좀 더 돈을 벌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우리 부인하고 애하고 살던 집에서 연탄가스 사고가 나서 일찍 들어오게 된 거죠. 다행히 우리 식구들은 무사했지요. 들어와서 모은 돈으로 작은 연립도 사고,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제가 하던 일이 조명을 잘 받게 하기 위한 페인트 칠 작업을 하는 거였는데, 저희 식구 먹고 사는 건 문제가 없었어요.
87년도 8월에 간만에 식구들이랑 원천 유원지로 놀러 갔어요. 부인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유원지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었는데, 깊이가 1m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들이 여기는 물이 얕으니까 다이빙하면 목뼈가 부러져서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더라고요. 근데 내가 뭐에 씌였는지,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그 수영장에 다이빙을 한 거예요. 그때 뭐가 뚝딱 거리는 거예요. 물속에 머릴 쳐 박고 있는데, 정신은 멀쩡하고 다리가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애들은 내가 안 나오니까 잠수를 잘 한다고 생각했데요. 몇 분 후에 구조 됐는데, 마침 그곳이 개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간호사도, 의료 장비도 없었어요. 사고 후에 응급처치만 잘 됐어도 이렇게 까진 되진 않았을 텐데.
이별
사고 난 다음날 아침에 중환자 실로 동서가 찾아왔어요. 그러더니 앞으로 성관계도 못 하고, 인생 끝났다고, 애들 엄마 더 나이 들기 전에 빨리 이혼해주라고 하더군요. 사고난지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땐 정말 머리에 총 맞은 것처럼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하얘졌어요. 그때부터 언젠가 헤어져야하는구나 생각했죠.
머리에 추를 달고 살고, 매일 약을 먹고 수술도 두 번이나 했으니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었죠. 돈 벌은 것은 얼마 없는데 한 달에 2백 만원씩 병원비가 나갔으니 모아둔 돈도 다 떨어졌죠. 돈을 못 내니까 병원에서 해줄 게 별로 없다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집도 팔고 전세로 살다가 안 되겠어서 다치고 1년 반 만에 형을 불러서 방을 하나 구해달라고 했어요. 애들 엄마가 친구 만나러 나간 때 짐을 싸서 나왔죠. 놀래서 우는 딸한테 그랬죠. ‘아버지 병원에 갔다가 다 나아서 꽃피면 올게.’ 결국 그 이듬해 봄에 부인이랑 이혼을 했어요. 애들은 엄마가 키우기로 하고.
시설
혼자 사는데 참 추웠어요. 돈도 없고, 집은 창고를 개조한 것이라서 낡았고. 또 욕창이 너무 심해서 엄청 고생도 했어요. 2달간 업드려서 대소변 해결하고, 좀 아문 다음에는 엉덩이를 다 긁어내고 허벅지 살을 떼어서 엉덩이에 피부 이식수술까지 해야했죠. 결국 혼자 사는 걸 포기하고 내가 마성에 있는 사회복지 시설에 전화를 했어요, ‘나 좀 데려가 달라.’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죽은 목숨이었거든요. 가보니 완전히 군대식으로 하더라고. 아침 6시에 예배를 드리고, 밤 9시 되면 완전히 소등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손톱 발톱을 검사하고. 거기서 화장실에서 변을 보다가 자빠져서 엉덩이에 이식한 피부가 다 까지기도 했는데, 또 바로 얼마 후에는 내가 소변 호스를 꼽고 살았는데, 거기 간지 두달 쯤 지났을 때 몸에 고열이 나는 거예요. 호스가 오염이 돼서 몸에 세균이 침투한 거였죠. 거기서는 못 고쳐서 결국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했죠. 그날 이후로 배꼽에 구멍을 뚫어서 소변 호스를 꼽고 살고 있죠. 그 이후에 다시 마성으로 오지 않고 한동안 혼자 살다가 석암으로 왔어요. 그때가 89년 12월이었죠. 형이 가자고 해서 갔더니 나를 맡아 주는데 2천 만원을 달라고 해서, 돈 없다고 해서 깍고 깍아서 4백 만원을 주고 들어왔어요. 형이 오면서 주소도 완전히 석암으로 옮겨버렸고요.
또 다른 병
18년 전에 요양원에 옴이 돌았는데 그때 제가 지어먹은 약이 잘못됐는지 지금까지 피부병이 생겨서 고생을 하고 있어요. 항생제 성분 들어간 약은 아예 못 먹어요. 그걸 먹었다고 하면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고 사타구니나 입술 같이 약한 데는 다 진물이 나고, 옷도 못 입고 고생을 해요. 해서 감기가 걸려도 약을 못 먹어요. 또 나이가 드니 심장병도 있어서 말하는 것도 힘들고, 가만 있으면 머리가 빙빙 돌아요.
아이들
사고 나서 병원에 있을 때 감염된다고 애들을 병실에 못 데리고 오게 했거든요. 그런데 애들이 계속 아빠를 찾으니까 우리 부인이 치마 속에 애를 감춰가지고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두 살짜리가 고개를 내밀고 ‘아빠’ 그러는 거예요. 정말 울기도 많이 울었죠. 내가 애들한테 도움이 되긴 커녕, 힘들게만 했으니.
부인하고 헤어진 후 한 번도 못 만났는데, 지난해 5월에, 헤어진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어요. 그동안 모질게 연락을 끊었죠, ‘나 죽었다. 니네 아버지는 없다’하고. 애들이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장애인인 내가 나타나서 아버지라고 하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크겠어요. 그래서 연락도 안하고 찾지도 않았어요. 헤어진 부인이 애들을 18년 동안 키우다가 애들이 크니까 애들 동의를 얻어서 재혼을 했데요. 그리고 다행히 재혼한 아버지가 착해서 애들 대학까지 다 보내줬고요. 첫째도 대학 다니고, 둘째도 올해 사회복지과에 입학했어요. 아이들을 죽기 전에 다시 보게 돼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나의 자유, 나의 삶이 찾아온다.”6)
김현수(33)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 “엄마, 나 시설에 가기 싫어요.”
9살 때부터 시설에서 생활했으니 20년이 넘었네요.
처음엔 다른 시설에 있었어요. 기숙사도 있고, 학교도 있었는데, 병동에 들어가서 생활해야 했지요, 당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워서 신문지 깔고 똥 싸고 그랬으니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7년 정도 있다가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상태에서 나와야 했어요. 시설에서는 나이가 다 찼으니 나가라고 하더군요.
잠깐 집에 와있었지만, 부모님은 또 시설을 알아보시더군요. 엄마에게 “시설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는데, 씨도 안 먹히더라고요. “너 시설에 안가면 어디서 먹고 살거니?” 그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더군요. 부모님은 어부였고, 집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아래 동생들이 있으니 집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도 시설에는 가고 싶지 않아서 가출을 했어요. 길거리에서 자고, 노숙하는 아저씨들에게 밥도 얻어먹었지요. 그럭저럭 버틸 만은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수동휠체어의 바퀴에 있는 쇠가 닳아서 손이 다 찢어졌어요. 피는 나고, 집에 가면 시설에 보내질 것 같고……. 하지만 결국 사춘기 반항은 여기서 끝났어요. 돌파구가 없었으니까. 그 때 들어온 곳이 지금의 석암 시설이지요.
부모님은 별로 가진 게 없었지만, 나를 이 시설에 보내려고 입소금을 무려 2천만 원이나 내야 했어요. 처음에는 4천만 원을 불렀다고 하데요. 집에서는 “많은 돈을 냈으니 얌전히 살아라.”라고 말했고요. 처음 몇 달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뭘 먹고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뭘 했는지……. 너무 지치고 할 일이 없어서 그랬겠죠?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어요. 그래도 어찌어찌 아무생각 없이 살다보니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긴 하더라고요.
나를 고치려 들지 말고, 사회를 고쳐야 되는 거 아닙니까?
8년 전 쯤, 처음 그룹홈이라는 걸 들었고, 자립생활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어머니는 얌전히 살라고 했지만 부모님도 동생들도 각자의 인생이 있듯 나의 인생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나도 남들처럼 돈 벌어서 연애도 자유롭게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일산에 있는 직업학교에 지원했는데, 고등학교 졸업 이상만 입학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잖아요. 사정사정 했지요. 초등학교밖에 못나왔지만, 여기서 하는 일은 잘 할 수 있으니 지켜봐 달라고요. 다음날 땜질하는 테스트를 하고, 필기시험 보는데 중학교 이상이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오더군요.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 나와서 이런 문제 못 푼다고 했더니, “누가 중학교 안 다니라고 했냐?” 그러는 거예요. 내가 다니고 싶지 않아서 안 다닌 것도 아닌데, 배우지 못한 게 죄도 아닌데. 못 배웠으니까 배우고 싶어서, 남들처럼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싶어서 그래서 간 거였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그렇게 원망을 했어요.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봐요. 사람들 중 반이 장애인이었다면 휠체어를 타고 다녀도 요상하게 쳐다보지 않을 거라고. 혹 모두가 장애인이고 몇몇만 비장애인이었다면 오히려 비장애인이 창피를 당했겠지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회는 장애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 사회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배우지도, 일하지도, 연애를 하지도, 평범하게 살지도 못하고 시설에 사는 거예요. 나를 고쳐야 하나요? 사회를 고쳐야 하나요?
나는 결국 엄마에게 부탁해서 석암 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먼 길 앞에서도 기분 좋은 이유
열심히 싸워서 시설장도 바꾸고 이사장도 바꿨어요. 하지만 시설의 규칙은 여전해요. 매일같이 반복되고, 하는 것도 없으면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지요. 이른 저녁이면 잠에 들고, 이른 아침 눈을 뜨면서 먼저 생각하는 건 “어떻게 시간을 재미있게 때우나?”예요. 참 재미없죠?
시설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자유롭게 사는 게 백배 천배 나을 거라 생각해요. 늦게 들어가면 혼날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버스를 놓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우리는 경계에 있어요. 시설생활인과 ‘평범한 삶’ 그 사이예요. 힘들지만, 이 싸움은 나를 자유롭게 할 것 같아요. 시설을 넘어 지역사회로. 가야할 길의 끝이 멀게 보이지만 ‘나의 자유, 나의 삶이 찾아온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아져요. 신이 나지 않나요?
서른이 넘은 이 나이지만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게 있어요. 평범하게, 자유롭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게 될 그 날, 진탕지게 술 퍼먹고 집에 늦게 들어갈 거예요. 같이 술 먹어요.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위해 “건배~”
“사람답게 살기 위해 세상에 나오다”
방상연(37)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나이는 37살이고, 석암 베데스다 요양원에 살고 있지요. 외할아버지네 집에서 자랐는데, 외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저를 더 돌볼 수가 없자 아빠가 나를 버렸지요. 그때가 10살이었어요.
버려진 저는 시립아동병원에서 자랐어요. 거기 있는 아이들은 미혼모 아이들이거나 저처럼 고아였어요.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처음에 가서는 가족들이 보고 싶고, 무섭고 해서 막 울었어요. 그러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웃기도 하고, 씩씩하게 살았어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재밌게 얘기도 하고 노는 게 좋았지만, 지내기는 힘들었어요. 밥 먹는 게 가장 싫었어요. 거기서는 조금만 먹어야 해요. 애들이 너무 많으니까 간호사들이 먹여주는 것도 힘들고, 대소변 처리해주는 것도 힘드니까 조금만 먹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니까 나무를 먹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비닐도 먹어요, 천조각도 먹고, 벽도 막 뜯어서 먹고. 우리가 공식적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날은 1년에 한번, 어린이 날 뿐이었어요. 그날이 되면 방에 이불을 깔아놓고 그 위에 과자를 풀어놔요. 그리고 그걸 다 먹으라고 해요. 다 못 먹으면 밥 안준다고. 배가 불러서 다 못 먹는데, 그래도 먹어야 해요. 사람들이 이불 위를 기어 다니면서 입으로 과자를 집어 먹고, 아예 못 움직이는 사람은 간호사들이 먹여줘요.
20살 때 석암에 갔어요. 병원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나가야하는데, 어느 날 석암 원장과 선생님이 찾아왔어요. 그리곤 애들을 불러놓고 ‘너 일로와, 너 일로와’ 그렇게 하면서 데려갈 애들을 찍었어요. 저도 그렇게 석암에 왔어요. 석암도 다르지 않았어요. 일어나서 밥 먹고, 똥싸고, 텔레비전 보고, 그러다 자고. 예전엔 외출도 못했어요. 조금만 잘못해도 심한 구박을 받았어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면 어떤 선생님은 ‘저런 나쁜 놈’, ‘천하에 몹쓸 놈’이라며 욕을 했어요. 미안하다고 빌어도 소용이 없었어요. 고아니까, 내 뒤에는 아무 것도, 아무도 없으니까, 막 대한 거예요.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야하는 이유가 뭘까 고민도 많이 했죠.
여기선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살다가 제복만원장님(현재 시설 내 비리 문제로 기소 중)이 석암에 왔어요. 우리에게 정말 잘 해줬고, 내가 그거보고 되게 좋아했어요. 근데 다 거짓이었어요. 앞에선 우리들을 개발시켜주고, 좀 더 좋게 지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뒤에서는 직원들 월급을 떼어먹고, 장애인 수당 떼어먹고, 국가에서 나온 돈 떼어먹었죠.
외출도 예전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자유는 없었어요. 저는 시설에서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직접 사람들과 부딪히고 얘기도 해야 이 사회가 뭔지 알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시설에는 그게 없어요. 시설 안에서 직업훈련을 배우도 써먹을 수가 없어요. 컴퓨터, 글씨, 수화 등 시설에 있는 프로그램 내가 거의 다 해봤는데 도움이 안돼요, 써먹을 곳이 없어요. 내 꿈이 영화감독이어서 하루는 이사장님께 컴퓨터도 배우고, 비디오 찍는 것도 배우고, 사람들 만나서 인터뷰도 하겠다고 하니까 이사장이 그러더군요. ‘노’라고. 내가 뭔가 하고 싶은데, 여기선 무조건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어요?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예요. 장애인이 지금처럼 사는 건 밥만 먹고 똥만 사는 기계랑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요.
그래서 여기 나왔어요. 더 좋은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나 혼자 떠나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솔직히 얘기해서 (시청 앞 농성하는 거) 너무 힘들어요.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고 아파요. 하지만 솔직히 이건 아무 것도 아니예요. 시설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설을 더 좋게 바꿔야하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나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시설에서 쫒겨날 각오도 하고 있어요.
밖으로 나오라고, 되게 좋다고.
나는 국가랑 우리 국민들이 장애인을 조금만 더 이해해주고, 조금 더 발전적인 걸 장애인들에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제원장은 자기가 시설, 석암재단의 주인이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그 사람도 필요 없어요. 시설의 주인은 바로 시설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예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국가가 비리없는 시설을 만들어주길 바래요. 장애인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거예요.
그리고 장애인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내가 농성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고, 세상도 돌아다니다 보니까 생각이 넓어져요. 생각도 많아지고, 생각이 되게 좋아지고. 그전에는 내가 밖에 나가면 뭘 알겠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제 밖에 나오고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게 아닌 걸 알게 되고, 나 보다 더 심한 장애인도 나오는 걸 보고 용기도 더 나고, 그래서 점점 더 많이 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욕심도 생기고요. 그래서 말해주고 싶었어요. 밖으로 나오라고, 되게 좋다고.
※ 못다한 이야기
사랑
좋아했던 여자도 있었어요. 하지만 끝까지 좋아한다는 말을 못했어요. 거기는 비장애인이었거든요. 솔직히 나에게로 오면 좋겠는데, 이 세상에서 비장애하고 장애하고 좋게 안 봐요. 그래서 나는 사랑 같은 거 이제 안하려고요, 사랑 같은 거 하면 마음이 아파서요.
부모님
그때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버려졌을 때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보고 싶어서 부모님도 찾아는 봤죠. 결국 찾긴 찾았는데,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셨데요. 연락도 없고. 이젠 얼굴도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보고 싶죠, 그립고.
꿈
어렸을 때는 꿈은 대통령? 되게 많았어요. 또 부자가 되고 싶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싶어서요. 부자가 되면 집도 있고, 가고 싶은 데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근데 내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겠어요? 그러니까 꿈이죠. 못 배웠으니까 공부도 못했으니까 일도 못하고 그래서 돈이 없죠. 지금은 시설에서 나와서 자립생활 하는 게 바램이예요. 친구랑 시설에서 나와서 버려진 땅이나 건물 고쳐서 살려고 장애인 수당 받은 돈을 모으고 있어요. 아주 조금이지만.
“무겁기만 했던 삶의 무게, 그리고 아직도 두려운 삶”
황정용(52)
도장
내가 다니던 학교엔 장애인이 모두 세명이었어요. 한명은 등이 굽었고, 한명은 다리 한쪽이 짧아서 발을 절었고, 또 한 명은 나. 지금은 일어나지 못하는데, 그때는 지팡이 잡고 돌아다녔어요. 학교는 부모님이 데려다주셨고. 아버지가 도장 파고, 시계 수리 하는 일을 하셨는데, 내가 다리를 못 쓰니까 너는 이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지 그렇지 않으면 굶어죽는다고 해서 남들보다 3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사실은 학교에 가기 싫었어. 아니 가고는 싶었는데, 애들이 하도 절뚝발이 온다고 놀리니까. 또 남에게 도움 청하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래도 도장을 파려면 한자는 알아야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갔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어요. 시계고치고, 도장 파는 거, 전자제품 고치고. 중학교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놀림 받는 게 싫어서 망설였는데, 중학교 입학시험에 반 정도 등수로 붙었어. 그때는 떨어지는 애들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다녔어요. 배우고 나니 욕심도 나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섬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육지까지 나와야했어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아버지 79년도에 돌아가시고 졸지에 가장이 됐어요. 그때부터 기술 배운 걸로 자영업해서 살았죠.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두 집 살림을 했어요. 3남 2녀 중, 남동생 2명은 새어머니 자식이예요. 새로 들어오신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 갑자기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연이어 죽고, 어머니하고 나하고 동생들을 다 떠맡았죠. 어머님은 장애인이었어요. 내 동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래서 장애 수당이랑 생활비 나온 거, 내가 도장 파서 번 돈으로 동생들 다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고, 출가도 시켰어요. 우리 어머니가 우리한테는 안 쓰셔도 걔들한텐 다 퍼주셨어요. 내가 매번 ‘우린 뭐 먹고 사냐, 이러다 거지된다’고 해도 듣지 않으셨어요. 또 항상 일을 하셨어요. 생활비 한 푼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채소, 배추, 나물, 파, 가정에서 먹을 수 있는 건 다 키우셨어요. 그러다가 자궁암에 걸리셨는데, 그러면 가만히 계셔야하는데 그렇지 않으셨어요. 뭐라도 해야 한다고, 남의 밭 빌려서 계속 채소를 키웠죠. 수술 받은 뒤 2년 간은 괜찮았는데, 수술 받은 게 재발된 다음에는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2003년도에 돌아가셨죠. 어머님 돌아가시고는 살기 어렵더라고요. 가족들이 배가 다르니까 골치도 아프고, 동생들 하고도 자주 싸우게 되고. 막내 동생은 카드를 좋아해서 계속 사고를 치는 바람에 제수씨는 도망가고. 어머님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삶에 대한 미련이 없더라고요. 해서 술로 살았어요. 술로 사니까 남동생이 택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저기 운전하고 다니면서 나 맡겨놓을 요양원을 찾아봤나 봐요. 어느 날 와선 태우더니 시설에 떨어뜨려 놓더라고요. 그 때 이후로 남동생들은 못 만났어요. 전화 연락만 가끔 올 뿐이고, 여동생만 한두번 왔었어요. 적금 들어놓은 것도 하나 있는데, 남동생이 가져가서 받지도 못했어요.
여자
젊은 시절에 가정을 꾸리려고 여자들을 사겨보긴 했는데, 내 맘대로 안 되더라고요. 그 동네는 이상하게 장애인들한텐 여자를 안 주더라고요. 비장애인을 사귀려고 해도 장애인이라고 반대를 하고 막아놓으니 연애란 걸 할 수가 없었죠. 신세한탄 한다고 술 먹고 술집에 자주 가게되다 보니 거기서 한 여자를 만났어요. 비장애인이었죠. 잘 해서 살아보려고 했는데, 친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에 다녀온다고 돈 30만원만 꿔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꽤 값어치가 나가는 돈이었는데, 그래도 저축해놓은 돈을 찾아서 줬죠. 하지만 안돌아왔어요. 그때가 27살 때였어요. 얼마 뒤에 다방에 다니던 여자를 만났는데, 거기도 똑같았어요. 한동안 치마 입은 사람들은 보기도 싫었어요. 서른 중반 되고, 다시 짝을 찾아보려고 시도는 했죠. 해서 다른 데 가서 살면 내 짝이 생기려나하고 수원에 있는 장애인 직업훈련 시설에 갔었어요. 기술 있는데 없다고 속이고 거기서 5년을 살았는데, 맞는 짝이 없더라고요. 그 뒤론 짝 찾는 것도 포기했죠.
장애
살면서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항상 찌그러진 인상으로, 목숨 붙어있으니까 사는 거지, 어디 바라보고 산 적이 없어요. ‘아 내 앞에 닥쳤다. 오늘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루가 가나’ 그런 생각으로 살았죠. 걸어도 못 다니니까 어디가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하고. 좋고 행복한 걸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아요. 추억이랄 것도 없고. 하도 부딪히고 하는 일마다 막히고 그러니까 속상해서 어머니하고 자살할 생각도 많이 했죠. ‘나는 세상 살지 말래나 보다’ 하고 연탄이라도 펴서 쥐죽은 듯이 가려고도 했죠. 장애를 안 가졌으면 삶이 바뀌었겠죠. 재미나는 쪽으로 쏠리고, 인생도 좀 다르게 살아졌을 것 같고.
시설비리
시설이 비리가 너무 많아요. 나눠져야 할 돈을 다른 데로 다 빼돌리고. 2005년도에는 장애수당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원장한테 가서 생활비는 생계비로 사무실로 들어간다고 치고, 장애수당은 왜 안주냐고 따졌더니 그제야 주더라고요. 따지고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에게만 수당을 줬어요. 보시다시피 누워 있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 건 다 떼먹은 거죠. 또 시설가면 친척들이 많아요. 친족끼리 이사장, 원장, 선생 다 해먹는 거죠. 여기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지, 시청농성장에도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장애인이니까 만만하게 보는 거죠.
시설비리가 없으면 장애인들이 그나마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나뿐만이 아니라 나 보다 더 심한 장애인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당해야 하잖아요. 시설 비리가 없으면 모든 장애인들이 나보다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나는 시설 문제 해결되면 나와서 살고 싶어요. 시설이 싫어요. 시설 사람들 보기도 싫고 거기서 살기도 싫고. 집이라도 있으면 조그만 점포라도 얻어서 내 기술을 살려볼까 하는데, 다 돈이 필요한 일이니 잘 될지 모르겠어요.
“돈과 비리로 빼앗긴 자유”
황인현(39)
매일 나가고는 싶지만 나갈 수가 없었어요
태어날 때는 정상이었데요. 근데 자다가 경기를 했데요. 그걸 그냥 놔둬야하는데, 엄마가 애가 경기를 하니까 병원에 데리고 갔데요. 그때 내가 놀래가지고 이렇게 됐데요. 이후에 병원에 갔더니 앞으로 내가 걷지도 못하고 누워서만 생활한데요. 정말 집에서 매일 텔레비전만 보고, 음악만 듣고 그랬어요. 형제들은 다 학교 다니고 사회활동을 해서 같이 못 놀았어요. 매일 나가고는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삼육재활원에 갔더니 엄마한테 나 운동시키라고, 물리치료도 받으면 좋아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출퇴근 했어요. 매일 엄마가 업고 재활원까지 갔는데, 버스가 안 태워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차도 잘 잡지 못했고, 엄마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나는 좋았어요. 집에만 있다가 나가니까, 세상 구경하는 게 아주 좋았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거기 다 있잖아요.
삼육재활원에서 6개월 있었는데, 근데 나이가 차니까 딴 데 가라고 통보가 왔어요. 거기는 18살 먹으면 나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해서 병원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돈이 두배더라고요. 해서 나는 못 간다고 했더니 돈을 더 내고 기숙사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기숙사에 갔더니 이 돈을 가지고 못산데. 해서 집에서 돈이 없으니까 나와서 딴 데 가자고 했어요. 결국 돈이 없어서 더 있을 수가 없었지요. 재활원에서는 휠체어 타고 내 마음대로 왔다갔다 했는데, 집에 오니 다시 갇혀 지내야 했죠. 친구도 없고. 그때는 화장실도 집 밖에 있어서 그것도 힘들고. 엄마가 매일 대변처리를 해주셔야했고. 기분이 착찹했죠, 많이 우울했고. 그래서 다시 보내달라고 많이 울었어요.
니 네가 뭐 그렇게 불만이 많냐
집에서 3년 있다가 석암으로 왔어요. 석암이 좀 더 싸더라고. 그때부터 18년 동안 석암에 있었어요. 작년부터 우리가 석암의 비리를 캐자 그랬어요. 오랫동안 비리가 있다는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아무도 말을 못하고 지낸 거였어요. 예를 들면 정부에서 피복비를 지원해주는데 우리 피복을 매번 나일론으로 된 싼 것만 사는 거예요, 그것도 체육복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마찬가지였죠. 또 간식비를 챙긴다고 생각했죠. 예전엔 우유가 매일 나왔는데, 나오다가 안 나오고, 빵도 안 나오고 그러더니 감자랑 고구마만 간식이라고 주는 거예요. 또 야유회도 반도 안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야유회 비용으로 나온 돈도 챙겨야하니까. 그렇게 계속 돈을 챙겨서 땅만 사고, 건물만 짓는 거예요. 그래야 새로운 사람 데리고 와서 수용시킬 수 있으니까. 선생님들 월급도 두달 동안 밀렸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개인적으로 나는 5년 전에 생활비라고 3천 만원을 냈어요. 죽을 때까지 석암에 있는 비용이죠. 근데 구청에서는 감사를 나와도 자기들끼리 막 하고 가는 거예요. 우리한테 뭘 물어봐야하는데, 비리가 있는데도 안 살피고 그냥 얼렁뚱땅하고 가는 거예요. 결국 작년에 비리문제로 걸려서 이사장은 구속이 됐는데, 원장은 안 잡혀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시설을 죽인다고 말하고 다니죠.
지난해 8월에는 사고 난다고 밖에 못나가게 했어요. 그전에는 나가서 영화도 보고, 시장도 가고 그랬는데 외부에서 오는 사람이 있어야지만 나가지 나머지는 전혀 못 나가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왜 못 나가냐고 항의했죠. 그러니까 원장이 바깥에서 사고 나면 자기가 책임져야한데. 자기가 다 책임져야하니까 나가지 마라. 나가고 싶으면 선생이랑 같이 나가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이랑 같이 가면 그만큼 돈을 더 써야해요. 선생님 차비랑, 밥값도 내야하고. 그래서 여기가 무슨 감옥이냐, 이렇게 나가는 건 감시다라고 항의했죠. 그렇게 석달 지나고 나니까 원장이 우리보고 나가라 그러더라고요. 그때가 10월이었는데 막 추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계속 나왔지요. 근데 나가고 들어온 기억을 남긴다고, 싸인하고 가야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법이래요. 그런데 우리는 싸인 안하고 나갔어요. 나도 몇 번 싸인 안하고 돌아다녔고요. 그랬더니 싸인 안하고 나가면 무조건 퇴소시킨다고 윽박을 지르더라고요. 거기는 우리가 무슨 말만하면 퇴소 시킨데요. 이건 쉽게 말하면 우리보고 아무 말대꾸 하지 말고, 주는 거 먹고 조용히 있어라 이거지요, 니 네가 뭐 그렇게 불만이 많냐는.
지난 4월 초에는 선생들이 담당하는 방을 바꿨어요. 본래 6개월마다 바뀌는데, 지금은 농성도 하고 그러니까 석달 만에 바꾼 거예요. 노조 선생님들하고 비노조 선생님들을 분리하려는 건데, 우리가 왜 우리 얘기도 안 들어보고 바꾸냐고 항의를 했죠. 그랬더니 또 원위치 해놨어요. 그리곤 요즘엔 자기 죄 없다고 우리보고 탄원서를 써 달래요. 인지가 없는 원생들 같은 경우에도 손도장 찍게하게 하고 자기가 쓰고 있어요. 그리고 지난 주에는 우리 농성 못하게 하려고 집에 전화도 했나보더라고요. 물론 우리 형은 여기 문제 다 알아요. 그래서 너 하고 싶은 데로 하라고, 끝까지 하라고 응원해주긴 했지만, 전화 때문에 가족들이 다들 걱정은 많이 하세요.
나와서 자유롭게 살거예요
우리 생각엔 지금의 석암을 폐쇄하고 다른 사람이 와서 비리 없는 시설로 새롭게 운영을 해야 해요. 그리고 전국에 비리 있는 시설이 많아요. 해서 관련법을 바꿔서 비리 있는 시설을 다 바꿔야해요. 석암에도 프로그램이 있는데, 다 시간만 때우는 거예요. 정부에서 돈 타먹으려고요. 그것보다는 사람들은 다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서 돌아다니는 게 필요해요. 우리가 들어가서 (바깥에 나온) 얘기를 하면 자기들도 나오고 싶데, 알고 싶고요.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거 먹고, 보고 싶은 거 보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석암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해요. 선생들이 바깥에 나가는 거 잘 안 해주고, 나가서도 잘 안 따라줘요. 저는 석암일 잘 되면 자립하기 위해 나올 거예요. 나와서 자유롭게 살 거예요. 돈도 벌어보고. 내 꿈이 어렸을 때부터 전파상 하는 거였어요. 집에 있으면서 하도 심심해서 누워서 라디오를 세 개나 조립했어요. 뜯었다가 원위치 하고 다시 반복 그런 거죠. 처음에는 안됐는데, 몇 번 하니까 되더라고요. 그땐 완전히 날아가는 기분이었죠. 누구한테도 배운 적이 없는데 내가 그걸 해낸 거잖아요. 나도 뭔가 할 수 있어요. 근데 시설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해요. 여건이 안돼요. 간단한 거지만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자유롭게 사는 거 시설에서는 못해요.
“우리 미리 떨어진 거 그게 너무 서러워”
주기옥(62)
가족
엄마는 동생을 낳다 돌아가셨어, 나 세 살 때. 언니도 동생도 죽고 나만 살았지. 새엄마가 들어왔고 아들만 넷을 났어.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웠데. 아빠는 군청에 다녔는데 나이 드시니까 그만 두시고 군납을 했다가 망했어. 빚쟁이들이 막 몰려와서 식구가 다 헤어졌어요. 너도 헤어지고, 나도 헤어지고.
작년에 아버지가 찾아오셨어. 여든이 넘으셨는데 서울에 오셨더라고. 작년에 주민등록 새로 만들면서 아버지 찾으려고 했지만, 못 찾을 줄 알았지. 해서 긴가민가 했어. 내가 그랬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나 버렸어.”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내가 죄가 많다.” 우리 새엄마가 나 클 때 참 구박 많이 했어. 설움도 많이 주고, 그래서 헤어진 거야. 우리 아버지가 가끔 나 보고 싶다고 전화하는데, 새엄마가 가끔 통화하면 거기서 살다 죽으라고 해요. 아버지가 날 따뜻하면 오신다고 하시던데, 오실 수 있으시려나.
도망 1
뿔뿔이 헤어지고 얼마 안돼서 대전서 남자랑 2년을 살았어. 교회에서 누가 소개해주는 바람에. 남자가 하도 패가지고 무서워서 도망 나왔어. 남자는 노가다 판에서 일했고, 장애가 없이 멀쩡한 사람이었어. 근데 나중에 들으니 의처증이 있다고 하더라고. 술만 먹으면 하도 패서 남자가 무서운 거야, 사람이 무서웠고. 애는 배속에 들었었는데, 지워졌어. 하도 패가지고. 그래서 도망을 나왔어, 일 나갔을 때.
도망 2
그 겨울에, 그 추운데 역전으로 나왔지. 어디 가 있을 때도 없고. 그때 어떤 아줌마가 나를 부르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러 저래하게 생겼다니까 자기 집에 가재. 여관 하는데, 집이나 봐달라고. 여관에 가서 정말 죽도록 일만했어. 그 아줌마가 당뇨병이 있어서 일을 못하니까 하루에 식구들 밥이라고 밥을 9번을 했어, 9번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다 했어. 겨울 때는 정말 추운데, 연탄을 갈아야 했어. 근데 돈은 안주고 일만 시켜먹더라고. 10년 동안 한 푼도 못 받고 일만 한 거지. 날마다 먹고 사는 게 너무 고생이 되가지고, 그땐 집도 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인생 참 죽고 싶었어.
서울역
열차타고 도망쳤지, 서울로. 아무도,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왔지. 서울역에서 두 달을 살았지. 그땐 집구석도 없잖아요. 낮에는 괜찮은데, 밤엔 무섭고 타향 땅이야. 서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 서울역에서 껌도 팔고, 이것저것 장사를 좀 했지. 그땐 목발 집고 다녔었거든. 근데 88올림픽 한다고 사람들이 와서 데려갔어, 대방동 부녀보호소로. 대방동에서 두 달 인가 석 달 살다가 석암 요양원으로 보내졌어. 그때 나랑 해서 여자만 8명이 석암으로 왔는데, 아파서 가고, 설사 많이 해서 가고, 약해서 죽고 지금은 문 씨하고 나만 살았어.
딸, 미리
석암에 들어와서 애기를 하나 키웠어. 그전에는 선생님이 적어서 아이들을 다 돌보기 어려우니까 우리가 도와줬어. 엄마가 허약해서 시설에 맡겨진 아이었는데, 애기가 얼굴도 하얗고 너무 이뻤지. 세 살부터 내가 키웠어. 밥 먹이고 똥 치우고, 내가 손 수 귀저기 빼고 빨고. 아기 때부터 배로만 기어 다녔어. 몸을 전혀 못 써서 완전히 다해줘야 해. 걔가 ‘엄~마’하고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는 알잖아. 해서 내가 정에 푹 빠졌어. 내가 지난해 우리 미리 스물 네살까지 씻겨주고 밥 먹여주고, 내가 다 했어. 근데 시설의 한 선생이 미리 살찌면 안 된다고 밥도 조금만 먹으라고 했어. 그러면서 매일 다이어트 하라고 우리를 그렇게 구박했어. 애가 먹을 만큼은 줘야하는데, 우리 미리가 친엄마 닮아서 키가 큰데, 나만 보면 애를 너무 많이 먹여서 키만 키웠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막 울면서 원장한테 우리 선생님 좀 바꿔달라고 그랬지. 너무 피곤하다고 선생님 좀 바꿔달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우리를 찢어놨어. 미리는 1층에 남고, 나는 2층으로 보내지고. 그 뒤 어느 날은 우리를 구박했던 선생이 애 등허리를 팍팍 팼데요. 그때 우리 미리가 시퍼런 물을 넘겼데. 왜 그랬는지 몰라. 그 소릴 듣고는 맘이 얼마나 아프던지, 아이가 보고 싶어서 미치겠는 거야. 그래도 못 봤어. 우리 애기가 본래 몸이 안 좋아서 밤 낮으로 병원에 자주 갔는데, 결국 지난해 갔어, 스물 다섯에. 내가 미리 병원에 있을 때 안 좋다고 해서 얼굴 보러 간다고 했는데 못 가게 했어. 미리 죽고도 병원에 간다니까 석암에 온다고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 미리가 한 시간인가 석암에 왔다 갔어. 우리 식구들이 나 미리 키운 거 다 알잖아, 애기 때부터 키운 거, 그렇게 내가 그리워하던 애가 갔어. 근데 원장이 창피하다고 울지 말래. 내가 키운 자식이 가는데 내가 왜 안 우냐고요. 옆에 있던 친구가 “원장님 자식이 그렇게 되면 안 울거냐”고 따졌죠. 우리 미리하고 헤어질 때, 원장이 말 한마디를 따듯하게 안하고 천대한 걸 생각하면, 나는 우리 미리 떨어진 거 그게 너무 서러워. 우리 미리 많이 맞았다는 것도 너무 서럽고. 그게 가슴에 가장 많이 남아, 너무 서러워서 세상 살고 싶지도 않아.
소망
시설에서 살기 싫어, 나오고 싶어. 너무 지겨워 삶이, 지옥 같아. 난 시설엔 안 갈 거야. 시설에서 살고 싶다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어. 나도 머리도 있고, 인간인데, 사람들은 다 다니는데, 나가고 싶은 데로 못가고 23년 동안 내 자유로는 한 번도 못나오고 쳐 박혀 살았어. 내가 먹고 싶은 거 먹고, 누구한테 지시 안 받고,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어. 우리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데, 왜 그렇게 못하게 해? 우리가 죄인이야?
나오면 친구들이랑 같이 살 거야. 그리고 교회 나가서 봉사하면서 살 거야.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도우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 이젠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다 하고 까무러치는 거야.
“함께 사는 공동체 마을을 꿈꾸며”
김용남(50)
입소
올해 50세인 김용남입니다. 저는 89년 7월 19일 오후에 용산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당시 저는 을지로 2가에 있는 한식집에서 요리사로 일했는데, 근무 끝나고 용산에 놀러 갔습니다. 마침 장대비가 내렸었는데, 놀다가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던 길에 차에 치였습니다. 아마 주차하려던 차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 들었는데 당시 운전기사가 제가 무단횡단을 했다고 경찰에 모함을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저는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없어서 다음날에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곤 중환자 실로 옮겨졌다가 병실로 옮겨졌는데, 그 병실이 석암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실이었습니다. 병원에서 4개월 정도 있었는데, 어느 날 병원 업무과장인가 하는 사람이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해서 59년 생이라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고 치료만 잘 받으시라고 하더라고요. 두달 후엔가, 다시 업무과장이 와서 병원에 있으면 돈이 더 든다고 달라고 하더군요. 아니면 석암요양원에 가면 한달에 한번씩 병원에서 나가니까 치료도 공짜로 받을 수 있으니 그리 가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인천 계신 형수도 교통사고를 당했고, 대전 살던 우리 작은형도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서 절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해서 서른 두 살 때 석암으로 넘어왔습니다. 내가 일해서 모은 전 재산, 6백 만원을 다 주고 시설에 왔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보험회사에서 5백 만원을 병원비로 주고 갔다고 합니다.
석암에 와서 이래저래 고향이나 언론사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통사고와 시설에 대한 불만 편지였는데 한통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병원의 한 선생님이 편지 한 무더기를 다 버리더라고요. 아마 거기에 제 편지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최근에는 우리 요양원이 이사를 가려고 했다가 취소했습니다. 말로는 요양원 일대에 도로공사 때문에 시끄럽다고 한 건데, 생각은 딴 데 가있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더 빼먹을 수 있을까’. 이사 가려고 한 곳엔 노인시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군데 다 모아놓으면 더 많은 걸 지원받을 수 있으니까 그쪽으로 모아놓으려던 속셈 같습니다. 게다가 지금 있는 곳은 땅값이 올라서 이건 팔아먹으려고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원장이 있었을 때는 생활인들을 감금하다시피 했고, 제복만원장은 밖으로 나가면 사고가 날 수 있으니까 시설 밖으로 나갈 때마다 싸인하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외출은 많이 하는 편입니다. 볼 건 없어도 동네 한 바퀴 도는 거지요.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하다보면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공동체
나는 우리 사회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살 수 있는 공동체 마을을 조성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전국에 장애인 없는 마을이 어디가 있습니까? 우리 사촌형도 그렇고, 내 친구도 그렇고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장애인도 그 지역사회에서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이게 뭡니까? 시설에 넣어서 인간 사육하는 거지. 개 사육은 해도 인간 사육은 해선 안 됩니다. 지금 시설은 우리들을 팔아가지고 자기들의 이익만 챙길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육당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리 가라고 하면 가야하고, 저리가라 하면 저리 가야하고. 시청에서 서명을 받는데 어느 한분이 문제 있는 재단은 허가를 취소해야 한다고 적어주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꿈
석암에 온 이후로 여기서 20년을 살았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제사도 한번 못 지냈고, 묘지에도 한번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젠 형제들 전화번호도 모릅니다. 가족들이랑 연락도 전혀 안됩니다.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꿈은 장애인들이랑 제주도에 한번 같이 가는 겁니다. 지금은 장애인들도 많이 제주도에 가는데 우리 원생들이랑 같이 가고 싶습니다. 혼자 가는 건 재미없습니다. 같이 가야 흥도 나고, 재미도 나고, 웃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순종적 삶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
한규선(47)
어쩔 수 없는 선택
1988년도 스물일곱에 시설에 들어왔는데, 그 즈음엔, 세 형님들은 모두 결혼을 한 상태였고, 형수님과 조카들도 있었지요. 형들이 결혼하기 전엔 문제가 안됐을 테지만, 결혼을 했으니 같이 사는 것이 불편하게 됐어요. 형수님들도 계시고, 형님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조카들도 꽤 컸을 때니까요.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셨기 때문에 차라리 시설이 낫겠다 말씀을 하셨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남겨진 내가 형제들 사이에서 우환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던 게지요. 아마도 집에 계속 집에 있었더라면 나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웠을 거예요. 내가 우리 집을 잘 아니까.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별로 저항하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내가 안 간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순종적 삶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
시설에 왔는데, “뭐 이런 데가 다 있나”싶었지요. 대소변 못 가린다고 밥을 조금 주고, 나이어린 선생들이 노인들한테 반말하고, 가족이나 교회에서 간식 넣어주면 창고에 들어가 안 나오고 그랬으니까요. 난 입소금이 없이 들어갔는데, 입소금 내고 들어간 사람들하고 차별을 당하기도 했어요. 입소금 내고 들어온 생활인에게 준다고 휠체어를 뺏기기도 하고, 6년 동안 수발한 방에서 쫓겨나기도 했어요. 그 때 아~ 돈이 없으니, 세상이 무섭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것뿐이겠어요? 시설에서 20년을 살았으니까 별일 별일이 다 있었겠지요.
그래도 신앙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그렇게 10년을 지냈는데, 나중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아무리 신앙인이어도 그렇지, 내 인생은 뭔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수동적으로 사는 것보다는 도전적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혼자 컴퓨터를 배우고, 사람들과 얼마간의 돈을 모아서 인터넷을 설치하고,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엿보기 시작했어요.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근데 결론은 내렸는데 무언가를 실천으로 옮기기 힘들었죠. ‘과연 내가 시설에서 나간다면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솔직한 이야기로, 내가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도 10년 전만해도 시설에서 나간가다는 거,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거든. 답답하지만 누가 해결해 주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으니까, 누구하고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해본적은 없어요. 가족과 이야기해 봤냐구요?
가족, 이해와 부담
아버지는 십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난 임종도 못 지키고. 명절 때 집에 갔다가 알았으니까. 다들 슬퍼할까봐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아니죠. 난 엄연히 가족인데. 근데 왜 나한테 이야기를 안했는지 알잖아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하더라도, 어차피 답은 뻔했을거야. “그냥 거기서 살아라.” 어차피 뻔 한 답을 듣게 될 텐데 노인네 걱정하게 뭣 하러 이야기해요. 굳이 이야기 할 필요 없지. 서로 부담만 느낄테고. 그렇다고 원망은 없어요. 난 그런 거 없어. 가족들도 나름의 생활을 가져야 하니까. 그 사람들이 나 때문에 자기 생활을 못하는 건 안 되잖아요. 그 사람들도 각자 자기 삶을 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가끔은.. 차라리 가족이 없었더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설에서 뛰쳐나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솔직히 시설생활인비대위 활동을 하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언론에 나간다면 혹은 시설에서 가족에게 전화를 해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골치 아파지잖아. 가족을 이해하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지만, 부담스러운 존재. 그것이 나와 가족의 모습이에요.
꿈이니까. 이해가 가나요?
막상 나가려고 하면 방법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 시설에 살면 영구임대아파트 분양도 안 되죠. 활동보조도 터무니없이 작잖아요. 그리고 가족들의 반대. 사실은 그것이 제일 걸림돌이지요. 그것만 아니라도 당장 뛰쳐나갈 텐데요.
물론 나가는데 성공하더라도 어려울 거야. 어려운건 나도 알아요. 먹고 살 걱정해야 되니까. 그건 아는데 그래도 나와야 돼. 뭐 시설에 있는 게 몸은 편할 수 있겠지요. 몸은 편할지도 몰라. 근데 그건 아니거든요. 장애인도 사람이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요. 난 개나 돼지가 아니니까. 난 사람이라고. 난 세상에서 세상과 부딪히고 살고 싶지 남의 도움 밑에서 살고 싶지나 않아요. 그렇게 단 한 달만이라도 내 나이대의 평범한 남자처럼 밖에서 살아보고 싶고, 단 하루를 살아도 밖에서 살고 싶어요. 그게 내 꿈이야.
내가 당장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해도 꿈은 버리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꿈이니까. 이해가 가나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버릴 수 없지요. 설사 그게 안 이루어진다 해도 꿈을 버릴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