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태리의 정원> - 최승희
1911년 출생. 1930년대를 풍미했던 월북 무용가. 숙명여고 재학 댕시 성악을
전공하였으며 정정렬-김소희-김여란의 계보를 잇는 서편제, 익산 판소리 가수로 활동.
1936년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이태리의 정원>은 랙타임 풍의 피아노 인트로와
코넷 솔로, 유럽의 실내악적 분위기, 미국의 초기 재즈, 라틴 음악이 혼합된 앨범으로
초기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발견된 음반 중 서구 음악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작품이다.
2. <청춘 계급> - 김해송
1911년 평남 개천 출생, 본명 김송규, 1936년 오케 레코드에서 재즈 풍의 <캐리오카>
로 데뷔. 1940년 콜럼비아 관현악단과 함께 뉴올리언즈 빅 밴드 스타일을 표방한
<청춘계급>을 취입,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과 결혼하여 가수, 작곡가,
빅밴드 리더(콜럼비아 관현악단, KPK 악단)로 활동하던 중 한국 동란 발발 후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3. <나는 열일곱살이에요> - 박단마
1921년 경기도 개성 출생, 1937년 빅터 레코드에서 데뷔, 1938년 우리나라 레코딩
역사에서 최초의 빅 밴드 스윙 스타일을 수용한 <나는 열일곱살이에요>를 취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슈샤인 보이>, <무식한 부부>
등의 히트곡이 있다.
4. <다방의 푸른 꿈> - 이난영
1916년 전남 목포 출생, 1933년 태평 레코드에서 데뷔한 이래 <목포의 눈물>로 널리
알려진 초기 한국 대중음악의 여왕. 재즈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1939년 재즈와 블루스가 공존하는 캔사스 시티 재즈 스타일의 반주속에
완벽한 스윙감을 자아내는(흡사 빌리 할리데이를 연상케하는) <다방의 푸른 꿈> 취입.
5. <우러라 쌕스폰>, <룸바의 도성> - 김정구
1916년 함남 원산 출생, 1936년 뉴코리아 레코드에서 데뷔, <모던 종로>,
<청춘랑데뷔> 등 서구 음악 체계를 수용한 노래와 만요(漫謠), 그리고 히트곡
<눈물젖은 두만강>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림. 1940년대에 엔카의 영향이 많이
드러나지만 스윙 감이 살아있는 빅 밴드 반주에서 노래한 <우러라 쌕스폰>와
라틴 재즈 풍의 2/4 박자 쿠바-룸바 리듬의 경쾌한 넘버 <룸바의 도성>을 취입.
드러머 최세진은 김정구 악단에서 데뷔했다.
6. 그밖에 재즈 관련 아티스트.
1933년 강흥식은 <자스(재즈)는 운다>라는 곡을, 1936년 남인수는
<재즈의 꼿거리 (꽃거리)>를 취입. 그밖에 경성방송국의 황금좌 밴드,
단성사의 SMC 재즈 밴드, 오케 레코드의 CMC 스윙 재즈 밴드(손목인이 리더),
김해송이 결성한 KPK 악단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훗날 작곡가 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손목인은 1939년 자신의 CMC 스윙 재즈 밴드와 함께 베니 굿맨의
스윙 넘버 <싱싱싱>을 취입했다. 1920-30년대 당시 만연하던 뉴올리언즈 재즈
스타일과 빅 밴드 스윙 풍의 노래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구 대중 음악의 주류였던 재즈가 일본을 거쳐 일제치하의 한국에도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재즈라는 명칭이 인용되거나,
재즈의 형식이 도입된 대부분의 대분의 작품들은 재즈라고 하기보다는 미국의
스탠더드 팝에 근접한 음악으로 이해된다. 더불어 일본 엔카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고 있다. 당시 '재즈'라는 의미는 재즈를 비롯 미국 파퓰러송, 샹송,
칸소네 등 서구 대중 음악을 통칭하는 표현이었다.
** 1940년대의 재즈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후, 일본과 미국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미국의 주류 대중 음악이었던 재즈는 적성국가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일체하의 한국에서 연주가 금지되었다. 비록 재즈 스탠더드나 팝 넘버들의 연주는
행해지었지만, 1930년대부터 대중들의 귀에 친숙해진 재즈 스타일의 노래와 연주들은
일본의 엔카를 수용하며 빅 밴드, 악극단, 서커스 음악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패전과 함께 악극단이 융성하면서 재즈는 다시 한번
한국 대중 음악 속에 깊숙이 반영되었다. 1940년대 당시 재즈 스타일을 표방한
아티스트로는 손목인, 김해송을 비롯하여, 김정구 악극단, 박시춘, 이유성, 서용덕,
임근식, 유종철, 이병우, 임정박, 기영종 등을 거론할 수 있다.
<한국 재즈의 태동(192-40년대) 선곡>
1. 복혜숙 : 목장의 노래(1930년)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막간가수들 편
2. 남인수 : 재즈의 꼿거리 (1936년) /유성기로 듣는 불멸의 명가수 남인수(2)
3. 최승희 : 이태리 정원(1936년) / 유성기로 듣던 불명의 명가수 얼굴 없는 가수 편
4. 박단마 : 나는 열일곱살이에요(1938년)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신카나리아, 김복희, 박단마 편
5. 김해송 : 청춘계급(1939년) /유성기로 듣던불멸의 명가수 김해송 편
6. 이난영 : 다방의 푸른 꿈(1939년)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이난영(1)
7. 김정구 : 우러라 쌕스폰아(1940년)/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김정구 편
II. 미 8군 무대와 재즈 (1950-60년대)
III. 이봉조와 길옥윤의 등장(1960-70년대)
해방전의 적성국가는 해방 후엔 우방국가가 됐다. 1945년 9월 미군 진주, 1950년
7월 미군 참전, 1953년 7월 이후 미군 주둔으로 재즈를 포함한 미국의 대중음악은
이 땅에 물밀듯 몰려왔다. 그리고 우리 대중 음악인들은 이국 땅에 온 미국 젊은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미8군 무대에서 본토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현대 한국의 재즈는
이 미8군 무대에서 태동했다. 당시에는 빅 밴드 스타일의 연주가 인기를 누렸는데,
재즈를 많이 연주하던 길옥윤, 이봉조, 최희준, 김상국, 강대관, 김강섭, 김광수,
여대영, 이동기, 김인배, 위키 리, 현미 등은 나중에 한국 대중음악의 주역이 됐다.
하지만 이 때의 재즈는 그때 미국에서 인기있던 루이 암스트롱, 베니 굿맨,
샘 테일러, 냇 킹 콜, 프랭크 시나트라, 마할리아 잭슨 등을 흉내내는 수준이 고작이었다.
당시 195-60년대 일본의 엔카를 한국의 음악적 풍토에 맞게 이식한 소위 '트로토',
'뽕짝'의 득세와 함께 재즈는 조금씩 그 본연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미자가 부른 <나는 열일곱살이에요>, <버리지 말아 주세요>의
리바이벌 넘버에서는 193-40년대의 빅 밴드 스윙을 보존하고 있었다.
코미디언 겸 가수 김상국은 뉴올리언즈 재즈의 대가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과
창법으로 그대로 모방한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를 히트시키기도 한다.
재즈의 의미는 트로토 가수의 후면에 기악 솔로(특히 브라스 앙상블이나 트럼펫,
색소폰 솔로)와 간간이 스윙 리듬을 선보이는 수준으로 퇴색되지만, 서구의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던 두 명의 색소포니스트 겸 작, 편곡가, 밴드 리더 길옥윤과
이봉조는 재즈의 불씨를 새롭게 지펴 나갔다.
길옥윤은 미 8군 무대에서 서구 음악의 문법을 체득했던 패티 김을, 이봉조는 현미,
최희준, 정훈희와 함께 음악적 결연을 맺고 나름대로 재즈의 의미를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악 연주를 허용하지 않는 한국 대중 음악의 풍토에서 좌절한 채,
자신의 전속 가수의 음악속에 재즈의 내용들을 미약하 게 나마 심어보는 차원에서
자신의 재즈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야만 했다.
두 사람 은 196-70년대 한국 대중 음악을 주도한 사단장의 지위에 있었고,
그들이 개인적인 욕심을 시도하기에는 두 사람에게 부여된 상업적 기대는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는 지도 모른다.
<미 8군 무대와 재즈 (1950-60년대) 선곡>
8. 김상국 :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1956년) / 그 시절 그 노래 제 2집
9. 이미자 : 버리지 말아 주세요(1960년) / 가요반세기 전집 1(LP)
10. 현미 : 밤안개 (1966년) / 별. 바람이 분다(LP)
11. 윤복희 : Kansas City(1968년) / 윤복희 스테레오 히트 앨범(LP)
<이봉조와 길옥윤의 등장(1960-70년대) 선곡>
12. 최희준 : 맨발의 청춘(1966년) / 최희준 그레이티스트 히트 앨범 (LP)
13. 정훈희 & 이봉조 : 무인도(1974년) / 정훈희 16 골드(LP)
14. 패티 김 & 길옥윤 : 밤바닷가에서 / 패티 김 스테레오 하이라이트 3(LP)
IV. 한국 재즈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1970-80년대)
** 1970년대의 재즈
1970년대는 한국 재즈의 암흑기였다.
1960년대가 한국 재즈가 이봉조, 길옥윤 등으로 인해 재즈가 트로트와 가요와
공존하는 환경이었다면, 1970년대와 1980년 대 군사 정권 하에서 재즈는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무분별한 외국 문화의 유입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탄압을 받는 시간이었다.
이봉조, 길옥윤, 여대영, 김강섭, 김인배 등은 방송국 악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대중 음악, 트로토 음악의 반주자로 변신함으로써, 재즈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꺾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베이시스트 겸 작, 편곡가인 이판근은
오직 재즈만을 고집하며, 훗날 다가올 재즈의 미래를 준비하며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더불어 한국의 재즈가 어둠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야누스라는 따스한
빛이 한국 재즈의 운명을 지키고 있었다.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이 운영하는 야누스는 한국 재즈 뮤지션들이 재즈에 대한
열정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KBS 관현악단장으로 재직중인신
정성조는 70년대 초·중반 명동의 오비스 캐빈과 소공동의 훠스즌스에서 그의 밴드
메신저스를 이끌고 맹렬히 연주하였고, 79년에는 버클리 음대에 진학한 최초의
해외 유학파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재즈 교육의 산실이었던
베이시스트 겸 작,편곡가 이판근은 외길 재즈 인생을 살아 오시며,
이른바 이판근 사단이라 불리는 많은 후배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박성연, 이판 근, 최선배, 조상국 등이 함께 했던 야누스 동우회는 한달에 한번씩
재즈 발표회를 하며, 꺼져가던 한국 재즈의 운명을 지켜나갔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 KBS 관현악단장으로 재직중인 정성조는 최초의 해외 유학파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 명동의 OB's 캐빈과 소공동의
훠시즌스에서 자신이 결성한 메신저스와 함께 재즈를 연주한다.
특히 정성조와 메신저스는 당시 젊은이들이 심취하고 있던 록과 펑키의 열기를
인지하고, 국내에서는 최초로 퓨전 재즈를 연주하기도 했으며, 이런 흔적들은
그가 담당했던 <어제 내린 비> 등의 영화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다.
79년 버클리 음대에 유학한 그는 편곡과 재즈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학과장을 거쳐, 현재 KBS 관현악단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리고 1960년대 라틴 재즈를 시도했던 타악기 주자 유복성은 1970년대에
유복성과 재즈 메신저스, 유 복성과 신호등을 결성하여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밖에 1960년 대 자니 브라더스(<빨간 마후라>를 히트시킨
남성 중창단)의 일원이었던 김준은 19 60년대 루이 암스트롱의 내한 공연에 깊이
심취하여 재즈 보컬리스트로 방향을 선 회한다. 그는 1978년부터 재즈 레스토랑과
클럽을 운영하는 한편, 1985년에는 한국 재즈 클럽과 재즈 공연 유치에 앞장서며,
재즈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 1980년대의 재즈
재즈를 싸롱 음악, 캬바레 음악, 무도회 음악으로 이해하고 있던 전두환 군사 정권
하에서 재즈는 여전히 어둠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이 시기 한국 재즈의 상징적인
공간 야누스는 1985년 최초로 <박성연과 야누스>라는 앨범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이 반영된 최초의 한국 재즈 앨범이라는
의미로 바라 볼 수 있다.
박성연과 야누스, 김준, 유복성의 활동 외에도 이봉조 악단에서 재즈를 익혔던
신관웅, 최선배, 강대관, 이동기를 비롯, 최세진, 김수열, 임헌수, 그리고 미8군 무대
출신의 임희숙이 재즈 보컬리스트로 거듭나고 있었지만, 재즈가 대중 음악 전반에
끼친 파장은 극히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계인의 잔치 88 서울 올림픽의
개최와 함께 재즈는 새로운 형태로 조명된다. 알토 색소포니스트 강태환은 독학으로
재즈를 습득하며, 프리 타악기 주자 김대환과 트럼페터 최선배와 함께 서울 프리
뮤직 트리오를 결성하여, 한국의 소리가 담긴 프리 뮤직, 프리 재즈의 표현으로
독자적인 행보를 행하였다. 그리고 사물 놀이의 교주 김덕수는 1987년 우리의
사물놀이 장단과 유럽의 재즈 그룹 레드선과의 협연을 통해 새로운 에스닉 재즈의
방법론을 제안함으로써, 한국 재즈의 새로운 가능성을 세계에 제안했다.
<한국 재즈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 (1970-80년대) 선곡>
15. 정성조와 메신저스 : 어둔운 골목길(1976년) / 영화 어제 내린 비 OST(LP)
16. 유복성과 신호등 : 혼자 걷는 명동길(1977년) / 유복성과 신호등(LP)
17. 박성연과 야누스 : 물안개(1985년) /박성연과 재즈 앳 더 야누스 1(LP)
18. 강태환 : Seoul Free Music Trio (1988년) / Live Improvisation(LP)
** 1990년대 - 한국 재즈의 중흥기
1990년대 한국에서 재즈는 되살아났다.
이는 재즈가 약간의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 로 하는 음악이란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70~80년대는 권력이 재즈를 용납하지 않기 도했으나,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이 재즈를
들을 만한 경제적·정신적 여유가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90년대의 풍요와 미지의 장르에 대한 호기심은 순식간에 한국에 재즈 바람을 일으켰다.
90년대 한국 재즈의 열풍은 밖으로부터 불어왔다. 89년 미국 담배 회사가 후원한
팔리아멘트 재즈 밴드의 내한 공연은 그 신호탄이었고 첫 연주자는 보컬리스트
다이안 슈어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뒤 B.B 킹과 토니 베 넷, 키스 재럿,
윈튼 마살리스, 존 맥러플린, 존 루이스, 행크 존스, 얼 클루, 해리 코닉 주니어,
에릭 마리엔탈, 팻 메스니 등 미국 유명 연주자들의 내한은 재즈 부흥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90년대 한국 재즈의 커다란 세가지 흐름은 대중음악과 재즈의 결합, 국내파의 활약,
해외 유학파의 귀국이다.
첫번째는 대중 음악인들이 재즈를 주요한 음악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데이지(박광현), 빛과 소금, 김현철, 낯선 사람들 등이
대표 적인데 이것은 최근의 강력한 흐름이며 재즈에 관한 관심을 일으키는데
큰 구실을 했다.
두번째는 재즈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실력있는 국내 연주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색소폰의 강태환 이정식, 최광철, 김수열, 타악기의
김대환, 피아노의 신관웅 이영경 양준호, 트럼펫의 강대관 최선배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밖에 베이스에 전성식,김영현, 기타의 박지혁 등은 한국 재즈의 내일을
대변하는 젊은 뮤지션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독학으로 재즈를 익힌 이정식은
80년대 중반부터 재즈에 탐닉하여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 음악에 불어 닥친
재즈의 열기, 그 중심에 자리하며 한국 재즈의 전성기를 선도했다.
더불어 재즈의 본고장에서 재즈를 익힌 유학파 뮤지션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재즈의 인기는 더욱 확산되어 간다. 서구 음악의 이론과 실기를 마스터한 뮤지션들은
재즈의 대중화 뿐만 아니라, 강단에서 재즈 교육을 체계화함으로써 한국 재즈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타의 한상원, 잭 리,
김영수, 피아노의 정원영, 김광민, 한충완, 곽윤찬, 트럼펫의 이주한의 가세는
1990년대 한국 재즈의 중흥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1992년 대한민국 재즈 페스티벌을 출발로 한국 재즈의 자생력을 모색하던 중,
한국 재즈는 그리고 차인표, 케니 G라는 전혀 엉뚱한 재즈 히어로의 지원(?)에
힙입어 재즈 신드롬이라는 사회적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이 허망한 재즈의
거품이 걷히고 재즈는 앙상한 골격을 드러냈지만, 이미 대중들에게 한번 확산된
재즈의 열기는 그 위력을 진지하게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국 재즈의 중흥기(1990년대) 선곡>
19. 맹원식 & His Jazz Band : 봉선화(1990년) / 성불사의 밤(LP)
20. 임희숙 : 그래도 설마하고(1992년) /대한민국 재즈 페스티벌 실황 앨범(LP)
21. 박광현과 데이지 : Hello, Miss Daisy(1994년) / Daisy
22. 이주한 : Holiday Just Started(1995년) / Ginseng Funk
23. 김덕수 & 레드 선 : Things Change(1995년) / 난장. 뉴 호라이즌
** 1990년대 후반 - 한국 재즈의 오늘, 그리고 내일
1997년 국내 최초의 국제 재즈 페스티벌인 무주 재즈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이듬해인 1998년에는 한국 재즈 뮤지션들의 잔치인 울진 재즈 페스티벌이
개최되어 1999년에는 2회를 맞았다.
방송국마다 재즈 라디오 프로그램이 신설되었고, 재즈 라이브 클럽과 재즈 전문 저널이
생겨났고, TV방송에서도 재즈는 더 이상 성역이 아니었다. 이렇게 재즈가 내용 없는
열풍에서 내실있는 음악으로 자리하게 되면서 한국 재즈는 짧은 시간내에
새로운 지형도를 짜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재즈가 메인스트림 재즈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1990년대 후반에는
보다 다양한 음악적 요구들이 실천되어 대중화, 다양화의 시기였다.
젊은 해외 유학파 뮤지션의 귀국, 각 음악 대학, 재즈 아카데미 등 재즈 교육 기관
출신의 젊은 뮤지션들은 퓨전 재즈, 컨템포러리 재즈, 그리고 재즈 보컬의 새로운
표현을 통해 한국 재즈를 다양한 형태로 이끌어 나갔다. 더 쿼텟, 웨이브, 인터플레이,
스텝스, 김영수 밴드, 스텝스, 보컬리스트 정말로, 장정미, 웅산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이 더 이상 외국의 재즈 스탠더드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재즈라는 대안에 심각하게 매달린 결과 새로운 창작과 실험,
한국적 재즈 스탠더드의 모색 등의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모색되는 시기가 1999년과
2000년을 즈음한 한국 재즈의 표정들 이다.
<한국 재즈의 오늘 그리고 내일(1990년대 후반-2000년) 선곡>
24. 이정식 : 꽃밭에서 (1999년) / 화두
25. 인터플레이 : 코끼리가 있는 정원(2000년 발매 예정) / 인터플레이
26. 더 쿼텟 : Window(2000년 발매 예정) / First Morning
1930 한국에서 최초의 재즈 풍의 레코딩 :
1930년 2월-3월, 복혜숙의 <종로행진곡>,< 그대 그림자>, <목장의 노래> 취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