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5남매 중 넷째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네에는 TV에도 나올만큼 “진도씻김굿”으로도 유명한 무당이 살았습니다. 저의 어린시절은 날마다 굿판이 벌어지는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가만히 있으면 귀에서 굿하는 소리가 가끔 들리는 착각이 들 때가 있는데, 어린시절의 경험이 참 중요한 듯 합니다. 그런데, 저는 “무교”를 주장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굿판 근처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믿음은 없지만 저의 아버지를 통해서 저를 지켜 주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친구들은 엄마가 항상 무당집에 다니셨기 때문에 굿판이벌어지면 떡과 밥을 먹었는데 저는 무당집 대문을 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면에는 3개의 교회가 있었는데요. 저는 교회가 있는 마을의 친구들을 부러워하며자랐습니다.어린 마음에도 교회가 있는 동네의 친구들은 뭔가 “밝은표정”이 있었구요. 렘 1:5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이 말씀처럼 저는 이미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대학을 미션스쿨로 가게됩니다. 학교가는 버스안에서 CCC학생을 통해 복음을 듣고 그 만원버스 안에서 둘이 손을 잡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저는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어느날예배중에 나의 조그만 죄까지 사진의 필름처럼 저의 죄를 보게하시고, 하나님은 저를 깊이 회개하게 하시고저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고 육신의 아버지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다 결혼할 나이가 되면서 믿음의 형제가 아닌 불신자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복음을전하면” 되는거 아닌가? 하면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습니다.신혼여행을 다녀온 첫날 가족이 다니는 절에 첫인사를 갔습니다. 다음날시할머니댁에 인사를 갔는데 상도동집에 2층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는데 보니 고아를 데려다 주지스님으로키워 절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서울대 뒤편 관악산에 자운암이라는 절을 운영하시다가 다시 절을 세우셨고1993 당시 강원도에 7억을 들여 새로 절을 지으셨습니다. 이 가문은 불심이 대단하여 절을 짓는 것을 생명처럼 여겼고 방송도 불교방송,책을 써도 불교책을 쓰는 가문이었습니다. 저의 핍박은 불을 보듯 뻔하게 시작됩니다. 같은 민족. 한글을 쓰는데, 대화가되지 않는다는 것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한 예로, 보통우리는 부엌에서 나물을 데치면 뜨거운 물로 소독하려고 물을 버리는데, 그렇게 하면 큰일납니다. “세균도 생명이니 죽이지 마라” 반드시 식혀서 버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월 초하루면 방생을 다니셨습니다. 큰아이를 낳고 나니 어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더 이상안된다. 하나면 족하다. 내 아들 등꼴빼지 마라. 그런데 저는 그 말씀 어기고 둘째 아이를 갖게 됩니다. 당연히 시댁은들고 일어났습니다. 아이를 지우라고, 세균은 살려도 손주를죽이라니. 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저의 결혼생활은 모순의연속이었습니다.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요. 저의 아주버님이 무당과 바람이 난 것입니다. 불교인 시댁은 무당이나 불교나 거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사위가 바람을피우면 죽일 놈이지만 아들이 파람을 피우면 능력이라고 시댁 식구들은 너나 없이 대환영이었습니다. 길고 긴 싸움이었고,저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구나”라고생각했습니다. 2007년 저희 아버님이 폐암말기 판정을 받고 드디어 제게 기회가 왔습니다.술중독으로 평생을 사신 아버님은 눈감으시기 전까지 지극정성으로 돌봄 끝에 예수의 “예”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셨는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고 소천하셨습니다. 연대세브란스 장례식장에서 영접하신 아버님을 교회장으로 치르느냐 집안의 뜻대로 불교장으로 장례를 치루느냐 싸움이 났습니다. 그때 남편은 입고 있던 셔츠를 찢으며 내 목에 칼을 꽂고 장례를 치뤄라. 나는모르고 우상숭배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 가문에서 우상숭배는 안된다고 선포했을 때, “교회장으로 장례를치루게 되었고 문제는 집안 어른들이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한 분 한 분 오셔서, 저는 평생들을 욕을 그 날 다 들은 듯합니다. 욕과 삿대질 그러나예배로 시작된 첫날부터 매일 예배가 드려졌고 마지막 예배에는 온 가문이 모여 은혜롭게 장례를 예배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평신도 신학, 평신도 선교사훈련, 기독교 상담학 석사 과정까지 훈련 속에 있었기때문에 넉넉히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었고,하나님은 이 기간을 통해서 모난 저를 만들어 가셨고. 불교신자.귀신들린자를 전도하게하솄습니다.
남편은 해외근무로 집에없었고 그 스트레스를 남편을 미워하고 딸에게 스트레스를 풀다보니 딸은 77kg까지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기독교상담을 공부하면서 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엄마인지 알게 되었고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서” 딸과의 관계도 회복되었고 지금은저의 딸은 20kg 살도 빼고 잘 성장을 했습니다.
저의 남편은 불교 집안에서 불교 학생 회장을 할 만큼 불심이 깊었고연대옆에 “ 봉원사”라는 큰 절이 있는데 중이 결혼을 하는대표적인 한국의 절이라고 합니다. 그곳의 중의 딸과 혼담이 오가다 깨졌다고 합니다.
남편의 외가는 B형간염으로 단명하는 집안으로 남편 또한 모계간염으로만성B형 간염 보균자였습니다. 아마 결혼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저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 후 알게 되었고 저의 평생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기도 중 하나님은 저의 가정을 캐나다에서 카타르로 옮겨 주셨고 카타르로 가기 전 남편은 꿈에 하나님께서 얼굴을수술하여 주셨고 천국을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카타르로 가면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B형간염이 치료된 걸 알았고 너무나 놀라서 여의도 성모에 뛰어가 정말 치료가 되었냐고. 나중에 알고보니 중동지역은 B형간염과 폐결핵을 가진자에게는 비자발급이안되는데 B형만성간염은 거의 치료사례가 없는 것인데, 하나님은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저의 남편은 제가 수요일, 금요일, 주일 등 거의 매일 교회에 가다시피하니, 본인은 교회는 일주일에한번만 가는 줄 알았는데, 제가 이상한 교회를 다니는 줄 알고 저를 감시한다고 따라와서 밖에서 안으로뒷자리에서 앞자리로 점점 은혜를 받고 지금은 안수집사로 저의 둘도 없는 동역자요 교회의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카타르에서 10년쯤 근무하던남편은 카타르에 더 있으면 자기가 죽을 것 같다고 근무지를 옮겨 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오전 시간은 금식을 하며 교회와 나라와, 카타르 또 가족을 위해서 매일 중보 기도를 했는데 그날은 아이들에게보낼 7000만원이 필요했고 남편의 근무지를 옮겨 주실걸 기도했는데 정확히 7000만원이 은행에 들어왔고 갑자기 오만 출장을 가게 되는 응답을 주셨습니다.보통 국제수주는 2년에서 3년 걸려 준비해도무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일주일만에 수주하고 일주일만에 오만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우리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저희는 정년을 2-3년 남겨두고 하나님의 일도 세상일도 은퇴하고 싶었습니다. 은퇴 후에 어디서 어떻게 살지 밖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작년1월 9일을 시작으로 저희가 가진 모든 걸 하나님은 걷어가셨습니다. 이쪽저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욥기서를 눈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뤘고 더 이상 내게는 고난이없을 줄 알았는데 가진 모든 걸 잃고 나니 처음에 대인공포증이 왔고 연예인들이 흔히 말하는 공황장애가 뭐지? 했는데눈을 뜨고 있는데도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되는 공황장애가 왔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앞에 네가지를 회개했는데 (1)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기도를 했음에도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이 갑자기신학을 한다고 했을 때, 선 뜻 허락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2) 평생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았던 것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3)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내것인냥 생색냈던 것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4) 사건앞에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했던 것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4가지를 깊이 회개하게 하시고 비로소 하나님이 오만으로 보내신 것을 깨달았고오만을 놓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슬람권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의문을 가진 것들이 궁금했는데. 마침 한국성서대학교에서이슬람 강좌를 한학기 공부하면서 이슬람 역사,이슬람선교, 난민선교등을 공부하고 오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만에는 한인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는데, 계속 교회가 세워졌다 깨어졌다를반복하다가 마침 두가정이 1년 6개월을 예배를 드리다가 지쳐서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교회문을 닫기로 한 그 주에 남편이 오만으로 발령을 받고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자립을 하면서 성도를 보내주셨고지금은 아이와 어른을 합쳐 40명 정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큐티인으로글을 읽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매일 말씀으로 큐티하기,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기 등. 이제는 교회에 부흥이일어나기 시작했고 저희는 먼저 오만에 건강한 한인교회가 세워지길 힘쓰고 있으며 점차, 나아가 이바디파이슬람 국가 오만에도 복음이 증거되길 위해서 기도로 나가길 원합니다 .지금은 고난이 축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저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첫댓글남미화 선교사님의 인생여정에 깊이 관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동행하심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정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남선교사님을 통해서 수많은 이슬람 백성들이 구원을 얻도록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남미화 선교사님의 인생여정에 깊이 관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동행하심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정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남선교사님을 통해서 수많은 이슬람 백성들이 구원을 얻도록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절 구절 삶이 묻어 나오는 간증에 은혜많이 받았습니다 . 선교사님 가정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